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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이즘(Dadaism)은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되어 유럽과 미국으로 확산된 전위예술 운동이다. 흔히 다다(Dada)라고도 부르며, 기존의 예술적 아름다움과 합리성, 사회적 권위와 관습을 부정하고 우연·부조리·풍자·도발을 예술의 표현수단으로 삼았다. 회화와 조각뿐 아니라 시·문학·사진·공연·영화·그래픽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개됐으며, 이후 초현실주의개념미술, 팝 아트 등 현대미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다이즘의 출발점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있었다. 당시 유럽은 과학과 기술, 산업의 발전을 인류 문명의 진보라고 자랑하던 시대였지만, 정작 그 과학기술을 이용해 기관총과 독가스, 대포를 대량 생산하고 수많은 사람을 전쟁터에서 죽이고 있었다. 다다이스트들은 이처럼 합리성과 문명을 내세운 기존 사회가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합리성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했고, 그 사회가 아름답다고 인정하는 예술과 문화의 가치 역시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다이즘은 처음부터 새로운 그림 양식이나 특정한 제작기법을 확립하려는 운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희들이 만들어놓은 예술과 문명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하면 왜 세상이 이 꼴이 됐는데?”라는 질문을 던지며 예술 자체의 의미와 권위를 공격했다. 평범한 공산품을 미술관에 전시하거나 신문에서 오려낸 단어를 무작위로 배열해 시를 만들고, 기존의 그림을 훼손하거나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운 공연을 선보이는 등 당시 기준으로는 예술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행위들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트리스탕 차라, 후고 발, 한스 아르프, 마르셀 뒤샹, 프랑시스 피카비아, 막스 에른스트, 한나 회흐, 라울 하우스만 등이 있다. 다다이즘은 1920년대 중반 이후 독립적인 운동으로서의 영향력이 약해졌지만, 예술가가 직접 제작한 아름다운 물건만 예술로 인정해야 하는지, 작품의 의미는 작가와 관객 중 누가 결정하는지, 일상적인 사물도 예술이 될 수 있는지 등 이후 현대미술의 핵심적인 질문들을 본격적으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역사

제1차 세계 대전과 취리히

다다이즘은 191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됐다. 당시 유럽 대부분은 제1차 세계 대전에 휘말려 있었지만 스위스는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징집과 정치적 박해, 전쟁을 피해 이동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여들었다. 독일 출신의 시인 후고 발과 공연예술가 에미 헤닝스 역시 취리히로 이주한 인물들이었으며, 두 사람은 1916년 2월 취리히 슈피겔가세의 작은 술집에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를 열었다.

카바레 볼테르는 처음부터 엄격한 예술단체나 미술관으로 만들어진 장소가 아니었다. 시인과 화가, 음악가들이 모여 작품을 발표하고 공연을 하며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실험적인 문화공간이었고, 이곳에서 후고 발과 에미 헤닝스, 트리스탕 차라, 한스 아르프, 마르셀 얀코, 리하르트 휠젠베크 등이 새로운 표현방식을 시도했다. 공연에서는 서로 다른 언어의 시를 동시에 낭송하거나 의미 없는 소리와 음절을 반복하고, 기괴한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등 기존의 연극과 문학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활동이 이루어졌다.

1916년 7월 후고 발은 다다 선언문을 발표했으며, 이후 트리스탕 차라가 선언문과 출판활동을 통해 다다 운동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차라가 1918년 발표한 다다 선언문은 다다이즘의 반권위적·반합리주의적 태도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다만 다다이즘은 모든 참여자가 하나의 사상과 목표에 동의한 통일된 조직이 아니었고, 초기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예술과 정치, 운동의 방향을 둘러싼 차이가 존재했다.

다다라는 이름의 유래 역시 여러 설명이 전해진다. 프랑스어에서 '다다'(dada)는 어린이가 타는 장난감 목마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며, 사전을 무작위로 펼치거나 종이에 칼을 찔러 우연히 이 단어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누가 어떤 방식으로 이름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참여자들의 설명이 서로 달라 하나의 일화만을 확정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오히려 특정한 논리나 거창한 의미를 가진 이름이 아니라는 점 자체가 다다의 성격과 잘 어울린다.

다다이스트들은 기존 문명과 예술의 논리가 인간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논리로 다시 새로운 예술을 설명하는 일에도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다다는 처음부터 “우리가 새로운 예술운동을 만들었으니 이제 이 규칙을 따라라.”라고 주장하기보다, 예술에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의심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베를린·쾰른·뉴욕으로의 확산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다다이즘은 취리히를 넘어 독일과 프랑스, 미국 등으로 확산됐다. 다만 각 지역의 다다이스트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취리히에서는 전쟁과 기존 문화에 대한 반발을 실험적인 시와 공연, 회화로 표현했다면, 독일 베를린에서는 정치적 풍자와 사회비판의 성격이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베를린 다다의 주요 인물로는 라울 하우스만, 한나 회흐, 존 하트필드, 게오르게 그로스 등이 있다. 이들은 신문과 잡지의 사진을 오려 붙이는 포토몽타주를 활용해 독일의 군국주의와 정치지도자,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비판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 이후 독일은 혁명과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고,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은 이러한 현실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기존의 예술이 사회와 분리된 고상한 활동이라는 관념에 반대하면서, 대중매체와 광고에서 가져온 이미지를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쾰른에서는 막스 에른스트와 한스 아르프, 요하네스 테오도어 바르겔트 등이 다다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에른스트는 기존의 인쇄물과 과학서적·소설 삽화를 오려 붙이는 콜라주를 발전시켰으며, 현실적인 이미지들을 비논리적으로 결합해 낯선 장면을 만들어냈다. 쾰른 다다는 1920년 전시를 통해 기존의 미술과 사회적 관습을 조롱하는 활동을 펼쳤고, 이러한 실험은 이후 에른스트가 초현실주의로 이동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미국 뉴욕에서는 마르셀 뒤샹과 프랑시스 피카비아, 맨 레이 등을 중심으로 다다와 관련된 실험적 활동이 전개됐다. 다만 뉴욕의 전위예술 활동은 취리히에서 다다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전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취리히 운동이 그대로 미국에 전파되어 뉴욕 다다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뒤샹과 피카비아 등은 이미 기존 미술의 관습을 의심하고 일상적인 사물과 기계적 이미지를 예술에 도입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활동이 취리히 다다와 연결되면서 하나의 국제적인 전위예술 흐름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파리 다다와 운동의 변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트리스탕 차라는 파리로 이동했고, 앙드레 브르통루이 아라공, 폴 엘뤼아르 등 프랑스의 전위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파리에서도 다다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이들은 선언문과 잡지, 공연과 전시를 통해 기존의 문학과 미술을 비판했으며, 관객을 도발하거나 기존 예술계의 권위를 조롱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920년대 초반부터 참여자들 사이에는 운동의 방향을 둘러싼 갈등이 나타났다. 브르통을 비롯한 일부 예술가들은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꿈과 무의식, 인간의 정신을 탐구하는 새로운 예술적 방법을 발전시키려 했다. 반면 차라 등은 다다의 반권위적이고 파괴적인 성격을 유지하려 했으며, 이 과정에서 파리 다다 그룹은 점차 분열됐다.

1924년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파리의 여러 전위예술가는 다다이즘에서 초현실주의로 이동했다. 다다이즘은 독립적인 국제 예술운동으로서는 1920년대 중반 이후 영향력이 약해졌지만, 그 과정에서 발전한 우연성과 콜라주, 기존 이미지의 재조합과 사회적 관습에 대한 비판은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이후 현대미술에서 계속 사용됐다.

특징과 표현방식

반예술과 기존 권위에 대한 부정

다다이즘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 반예술(Anti-art)이다. 반예술은 단순히 예술을 싫어하거나 모든 예술작품을 없애자는 뜻이 아니라, 기존 사회가 예술이라고 인정해온 기준과 제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에 가깝다. 당시의 전통적인 미술에서는 예술가의 숙련된 기술과 창의적인 표현, 아름다운 형태와 완성도가 중요한 평가기준이었다. 그러나 다다이스트들은 이러한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 사물과 이미지, 공연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다. 뒤샹은 자전거 바퀴나 병걸이처럼 이미 만들어진 일상용품을 예술작품으로 제시했고, 1917년에는 남성용 소변기에 서명을 한 뒤 《샘》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에 출품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뒤샹이 소변기를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었느냐가 아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물건을 선택해 기존의 용도와 다른 맥락에 놓는 것만으로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는 점이다.

다다이즘의 반예술적 태도는 미술관과 예술가의 권위도 공격했다. 작품이 미술관에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예술이 되는 것인지, 작가가 직접 손으로 제작하지 않은 사물도 작품이 될 수 있는지, 관객이 불쾌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는 표현도 예술로 인정할 수 있는지 등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다만 다다이스트들이 전부 예술의 소멸을 같은 방식으로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예술가는 기존의 예술제도를 조롱하는 데 집중했고, 다른 예술가는 새로운 시각적 표현과 문학적 실험을 발전시켰으며,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예술을 활용한 인물도 있었다. 다다이즘은 하나의 완성된 미학이 아니라 기존의 예술과 사회에 반발하는 다양한 활동들이 모인 운동이었다.

우연성과 부조리

다다이스트들은 예술가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전했다. 트리스탕 차라는 신문기사에서 단어를 오려 주머니에 넣고 무작위로 꺼내 배열하는 방식으로 시를 만드는 방법을 소개했으며, 한스 아르프는 종이 조각의 우연한 배치를 활용해 추상적인 구성을 제작했다. 이러한 작업에서는 작가가 처음부터 완성된 이미지나 문장을 머릿속에 구상하는 대신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물론 우연한 결과를 활용한다는 것이 작품 전체를 아무런 판단 없이 만든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재료를 선택하고 어떤 우연적 과정을 사용할 것인지는 작가가 결정하며, 실제로 나타난 결과를 그대로 유지하거나 수정하는 과정에도 작가의 의도가 개입할 수 있다. 다다이즘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예술가의 통제를 완전히 없애는 것보다 기존의 논리와 미적 판단만으로는 만들어지기 어려운 이미지와 관계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부조리와 무의미한 표현도 중요한 특징이다. 다다이스트들은 의미가 통하지 않는 소리시를 낭송하거나 서로 관계없는 단어를 이어 붙였으며, 관객이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이야기의 흐름과 논리를 일부러 깨뜨렸다. 이는 단순히 이상한 행동으로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언어와 이성을 통해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기존의 믿음에 대한 비판과도 연결됐다.

콜라주와 포토몽타주

콜라주는 신문과 잡지·인쇄물·천·종이 등 서로 다른 재료를 잘라 붙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기법이다. 파블로 피카소조르주 브라크 등 입체주의 화가들이 이미 1910년대 초부터 콜라주를 활용했지만, 다다이스트들은 이를 기존 이미지의 의미를 뒤바꾸고 사회를 풍자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막스 에른스트는 오래된 과학책과 소설 삽화를 활용해 인간과 동물, 기계가 서로 뒤섞인 기괴한 장면을 만들었다. 서로 다른 출처의 이미지가 하나의 장면으로 결합되면 개별 사물은 현실적으로 보이더라도 전체 상황은 비현실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이러한 콜라주 방식은 이후 초현실주의에서 꿈과 무의식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으로 이어졌다.

베를린 다다에서는 사진을 오려 붙이는 포토몽타주가 특히 활발하게 사용됐다. 한나 회흐와 존 하트필드 등은 신문·잡지에 실린 정치인과 군인, 대중문화 인물의 사진을 재조합해 독일사회의 권력관계와 정치적 혼란을 풍자했다. 사진은 당시에도 현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이미지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사진을 잘라 전혀 다른 맥락에 배치하는 작업은 기존의 권위 있는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이용되는지를 드러내는 효과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사진편집 프로그램으로 인물의 얼굴을 다른 몸에 합성하거나 뉴스사진을 이용해 정치적 풍자 이미지를 만드는 일이 흔하지만, 다다이스트들은 디지털 편집기술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신문과 가위, 풀을 이용해 비슷한 표현방식을 실험하고 있었다. 현대적인 합성사진과 인터넷 밈의 시각적 표현방식에도 연결되는 오래된 조상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공연·시·출판

다다이즘은 회화와 조각에만 국한된 운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초기 취리히 다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시와 공연, 음악과 무대활동이었다. 카바레 볼테르에서는 서로 다른 언어를 동시에 낭송하거나 의미 없는 음절을 반복하는 소리시가 발표됐고, 기괴한 의상과 가면을 착용한 공연자들이 무대에 등장했다.

후고 발은 1916년 기하학적인 형태의 의상을 입고 소리시 《카라반》을 낭송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에서는 일반적인 문장의 의미보다 음절의 소리와 리듬, 낭송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게 다뤄졌다. 당시 관객이 문학과 공연에서 기대하던 명확한 이야기나 아름다운 언어 대신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와 낯선 움직임을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표현관습을 뒤흔든 것이다.

다다이스트들은 잡지와 선언문, 전단과 포스터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당시에는 인쇄매체가 사상을 전파하고 대중에게 접근하는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다다이스트들은 서로 다른 글자 크기와 서체를 뒤섞거나 문장과 이미지를 비정상적으로 배치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이러한 출판물은 훗날 실험적 타이포그래피와 그래픽디자인의 발전에도 영향을 줬다.

주요 인물과 작품

마르셀 뒤샹과 《샘》

마르셀 뒤샹은 다다이즘과 관련된 예술가 가운데 현대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 중 하나다. 그는 회화와 조각의 전통적인 제작방식을 의심하면서 공장에서 생산된 일상용품을 선택해 예술작품으로 제시하는 레디메이드(Readymade) 개념을 발전시켰다.

대표작 《샘》은 1917년 뉴욕 독립예술가협회 전시회에 출품된 남성용 소변기다. 뒤샹은 소변기를 구입해 방향을 바꾸고 'R. Mutt'라는 가명으로 서명한 뒤 전시회에 제출했다. 당시 전시회는 참가비를 낸 예술가의 작품을 심사 없이 전시한다는 원칙을 내세웠지만, 《샘》은 전시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기존의 전시제도가 무엇을 예술로 인정할 것인지 결정하는 방식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샘》의 원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오늘날 주요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은 뒤샹의 승인 아래 제작된 후대의 복제품이다.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샘》이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거론되는 사실 자체가 이 작품이 단순한 물건의 형태보다 예술에 관한 개념과 질문으로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뒤샹의 다른 대표작으로는 《자전거 바퀴》와 《병걸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복제 이미지에 수염과 턱수염을 그려 넣은 《L.H.O.O.Q.》 등이 있다. 특히 《L.H.O.O.Q.》는 미술사에서 가장 신성시되던 작품 가운데 하나를 대중적인 인쇄 이미지로 가져와 장난스럽게 변형했다는 점에서 다다이즘의 반권위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막스 에른스트와 한스 아르프

막스 에른스트는 독일 쾰른 다다의 주요 인물이자 이후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는 기존의 인쇄물을 오려 붙이는 콜라주와 우연한 질감을 활용한 프로타주·그라타주 등 다양한 기법을 발전시켰다. 특히 《셀레베스의 코끼리》와 《밤꾀꼬리에게 위협받는 두 아이》 같은 작품에서는 현실적인 이미지와 비논리적인 장면이 결합되면서 다다이즘에서 초현실주의로 이어지는 표현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한스 아르프 역시 초기 다다 운동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우연히 배치된 종이 조각을 활용한 콜라주와 유기적인 형태의 추상조각을 제작했으며, 에른스트와 함께 쾰른 다다 활동에도 참여했다. 아르프의 작품은 정치적 풍자나 사회적 도발보다 형태와 재료, 우연한 배치 자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다다이즘이 반드시 하나의 정치적 메시지나 공격적인 이미지로만 표현되는 운동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두 예술가의 작업은 이후 초현실주의와 추상미술로 이어졌지만 출발점에는 기존의 형식을 부정하고 우연과 실험을 받아들이려는 다다의 태도가 있었다. 특히 에른스트는 잡지와 과학책에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새로운 관계로 결합했고, 아르프는 작가가 의식적으로 계획하지 않은 형태를 작품의 구성요소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예술가의 전통적인 역할을 흔들었다.

한나 회흐와 베를린 다다

한나 회흐는 베를린 다다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포토몽타주를 통해 독일사회의 정치와 성별 역할, 대중매체의 이미지를 비판했다. 대표작 《다다의 주방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배불뚝이 맥주문화 시대를 절단하다》는 1919~1920년 제작된 대형 포토몽타주로, 정치인과 군인·예술가·기계와 인쇄매체의 이미지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이 작품에서는 독일의 정치권력과 군국주의, 당시 사회의 성별 관계와 대중문화가 풍자의 대상이 된다. 회흐는 신문과 잡지에 등장하는 유명인과 정치인의 이미지를 잘라내어 새로운 관계로 배치함으로써 기존 사회가 만들어낸 권위와 위계를 흔들었다. 특히 여성 예술가였던 회흐는 남성 중심의 예술계와 사회적 성별 관념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문제의식을 표현했다.

베를린 다다의 다른 인물인 존 하트필드는 포토몽타주를 정치선전과 반전·반파시즘의 수단으로 발전시켰으며, 게오르게 그로스는 사회적 위선과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풍자적인 회화와 드로잉을 제작했다. 이들의 활동은 다다이즘이 단순히 무의미한 장난이나 비논리적인 표현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는 적극적인 수단으로도 사용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초현실주의와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

다다이즘의 직접적인 후계 운동 가운데 하나는 초현실주의다. 다다이즘이 기존의 예술과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우연과 부조리를 활용했다면, 초현실주의는 이러한 실험을 바탕으로 꿈과 무의식, 인간의 정신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특히 앙드레 브르통과 막스 에른스트, 한스 아르프 등 다다와 관련된 여러 예술가들이 초현실주의의 형성에 참여하면서 두 운동은 인적·예술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됐다.

다만 두 운동을 단순히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다다이즘은 기존의 권위와 합리성, 예술적 기준을 해체하는 데 강한 관심을 가졌지만, 초현실주의는 무의식과 꿈을 통해 현실을 넘어서는 새로운 표현방식을 발전시키려 했다. 다다는 무엇이 예술인지 의심하고 기존의 규칙을 깨뜨리는 태도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경우가 많았던 반면, 초현실주의는 그 실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각적·문학적 세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다다이즘의 영향은 초현실주의 이후에도 계속됐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1960년대 이후 개념미술에서 작품의 물리적인 형태보다 예술가의 선택과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흐름에 영향을 줬고, 일상적인 사물과 대중문화 이미지를 예술에 도입하는 방식은 팝 아트와도 연결됐다. 또한 관객을 도발하거나 공연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활용하는 다다의 실험은 행위예술과 해프닝, 플럭서스 등 후대의 전위예술 운동에서도 다시 나타났다.

오늘날 현대미술관에서 평범한 물건 하나가 전시되어 있거나, 관객이 직접 참여해야 완성되는 작품, 기존의 광고와 뉴스사진을 편집한 이미지, 작품의 제작과정보다 아이디어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시를 보게 된다면 다다이즘과의 연결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모든 표현방식을 다다이즘 하나가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예술적 기준에 도전하는 태도를 국제적인 예술운동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다다이즘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출발점 가운데 하나다.

평가와 의의

다다이즘은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등장 당시부터 모든 사람이 그 활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기존의 미술을 존중하던 사람들에게 다다이스트들의 작품과 공연은 장난스럽거나 무례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으로 보였으며, 일부 전시는 관객과 예술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다다이스트들은 이러한 반응을 의도적으로 유발하기도 했기 때문에 관객이 작품을 불쾌하게 느끼거나 전시의 의미를 의심하는 것 자체가 활동의 일부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다다이즘에 대한 비판 가운데 하나는 기존의 예술을 부정하면서 결국 자신들도 예술운동을 형성하고, 훗날 미술관과 미술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는 점이다. 예술적 권위를 조롱하기 위해 전시했던 물건과 이미지가 시간이 지나 미술관의 소장품이 되고 미술사 교과서에 실리게 된 것이다. 특히 뒤샹의 《샘》은 미술관이 무엇을 예술로 인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작품이지만, 오늘날에는 오히려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널리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다다이즘의 의의는 모든 작품이 아름답거나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 데 있지 않다. 예술가가 반드시 새로운 물건을 직접 만들어야 하는지, 기존의 인쇄물이나 공산품을 작품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우연과 비논리적인 표현도 예술이 될 수 있는지, 예술은 사회와 정치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는지 등의 질문을 제기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역사적 상황과 분리해서 이해하기 어렵다. 유럽의 사회와 정치체계가 합리성과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대규모 전쟁을 벌였던 시대에 다다이스트들은 그 사회가 인정하는 예술의 아름다움과 권위까지 의심했다. 따라서 다다이즘의 무의미한 시와 기괴한 공연, 일상용품을 이용한 작품들은 단순히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미술의 초기 형태가 아니라 당시 사회의 논리와 질서에 반발하는 표현이기도 했다.

예술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고, 예술가는 뛰어난 기술로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야 하며, 미술관에 전시되는 물건은 일반적인 공산품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에 다다이즘은 정면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오늘날 이런 질문은 현대미술에서 익숙하게 받아들여지지만, 20세기 초반에는 기존의 미술관념 자체를 뒤흔드는 급진적인 시도였다.

여담

  • 191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됐다.
  • 최초의 주요 활동공간은 후고 발과 에미 헤닝스가 운영한 카바레 볼테르였다.
  • 제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등장한 전위예술 운동이다.
  • 다다라는 이름의 정확한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전해진다.
  • 다다이즘은 특정한 회화 양식보다는 기존의 예술적 권위와 사회적 관습에 대한 반발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 회화·조각뿐 아니라 시와 공연·문학·사진·영화·그래픽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개됐다.
  • 취리히 다다는 실험적인 시와 공연, 우연성을 활용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 베를린 다다는 정치적 풍자와 포토몽타주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 쾰른 다다에서는 막스 에른스트와 한스 아르프 등이 활동했다.
  • 뉴욕에서는 마르셀 뒤샹과 프랑시스 피카비아, 맨 레이 등의 실험적인 작업이 전개됐다.
  • 마르셀 뒤샹의 《샘》은 다다이즘 및 현대미술과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 《샘》에 사용된 소변기는 뒤샹이 직접 제작한 것이 아니라 구입한 공산품이었다.
  • 《샘》의 원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오늘날 전시되는 작품들은 후대에 제작된 복제품이다.
  • 뒤샹은 《모나리자》의 복제 이미지에 수염을 그려 넣은 《L.H.O.O.Q.》도 제작했다.
  • 막스 에른스트는 콜라주를 이용해 기존의 인쇄물을 전혀 다른 장면으로 재조합했다.
  • 한나 회흐존 하트필드는 사진과 신문 이미지를 활용한 포토몽타주로 유명하다.
  • 트리스탕 차라는 신문에서 오려낸 단어를 무작위로 배열해 시를 만드는 방법을 소개했다.
  • 의미 없는 음절을 반복하거나 여러 언어를 동시에 낭송하는 실험적인 시와 공연도 이루어졌다.
  • 1920년대 중반 이후 많은 참여자가 초현실주의 등 다른 예술운동으로 이동했다.
  • 다다이즘은 이후 초현실주의와 개념미술, 팝 아트, 행위예술 등에 영향을 줬다.
  • 평범한 물건을 미술관에 가져다 놓는 일이 오늘날에는 익숙할 수 있지만, 20세기 초반에는 기존의 예술관념을 뒤흔드는 행동이었다.
  • 다다이즘을 처음 접하면 “이딴 것도 예술임?”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런데 다다이스트들이 바로 그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려고 했다는 점에서 반응 자체가 작품의 문제의식과 연결된다.
  • 예술의 권위를 조롱하던 다다이즘 작품들이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미술관에 소장되고 미술사 교과서에 실린다는 점도 다다이즘의 역사에서 흥미로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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