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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생년월일 1891년 4월 2일
사망일 1976년 4월 1일
국적 독일 → 프랑스
출생지 독일 제국 라인란트 브륄
학력 본 대학교
직업 화가, 조각가, 판화가, 시인
활동기간 1910년대~1976년
장르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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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4월 1일(1976-04-01)부로 고인이 되었습니다.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년 4월 2일 ~ 1976년 4월 1일)는 독일에서 태어나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조각가·판화가이자 다다이즘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예술가다. 기존의 그림과 인쇄물을 오려 붙이는 콜라주, 울퉁불퉁한 표면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문질러 무늬를 얻는 프로타주, 물감을 긁거나 찍어내는 그라타주와 데칼코마니 등 다양한 실험적 기법을 활용해 현대미술의 표현방식을 확장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은 뒤 기존의 합리주의와 전통적인 미술에 강한 회의를 품었으며, 전후 독일에서 다다이즘 운동에 참여한 뒤 프랑스로 건너가 초현실주의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에른스트의 작품은 살바도르 달리처럼 꿈속 장면을 정밀하게 재현하는 그림도 있고, 호안 미로처럼 형태가 크게 변형된 이미지도 있지만, 가장 독특한 특징은 현실에서 가져온 평범한 사물들을 전혀 관계없는 방식으로 결합해 기괴한 세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오래된 과학책의 삽화에 동물의 머리를 붙이거나, 기계처럼 생긴 물체를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표현하고, 나무와 바위의 질감을 이용해 존재하지 않는 숲과 괴물을 만들어내는 식이다. 처음 보면 그럴듯하게 그려진 장면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엇 하나 정상적인 관계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특히 에른스트는 완성된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미리 구상한 뒤 그대로 그리는 것보다 우연히 나타난 형태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하는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나무판자의 무늬나 종이의 질감, 물감이 번지고 눌리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형태가 나타나면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 그림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에른스트의 미술은 단순히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림을 만드는 과정 자체에 우연과 무의식을 끌어들인 실험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생애

독일에서의 성장과 제1차 세계 대전

에른스트는 1891년 독일 제국 라인란트의 브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필리프 에른스트는 청각장애인을 가르치는 교사이면서 아마추어 화가였고, 에른스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접했다. 다만 처음부터 전문 미술학교에서 화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1909년 본 대학교에 입학해 철학과 미술사, 심리학 등을 공부했으며, 특히 인간의 정신과 꿈·환각·무의식에 대한 관심은 훗날 그의 작품세계와 연결됐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는 아우구스트 마케 등 라인란트 지역의 표현주의 화가들과 교류했고, 1912년 쾰른에서 열린 존더분트 전시회를 통해 파블로 피카소,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등 당시 현대미술의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접했다. 1913년에는 파리를 방문하면서 프랑스의 전위예술과도 접촉했고, 이듬해에는 한스 아르프를 만나 오랫동안 이어지는 예술적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그의 삶은 크게 바뀌었다. 에른스트는 독일군에 징집되어 포병으로 복무했고, 약 4년 동안 전쟁을 경험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유럽 문명이 합리성과 진보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엄청난 규모의 살육을 벌였다는 사실은 그의 세계관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후 에른스트는 기존의 사회적 권위와 논리, 전통적인 미술의 규칙을 의심하는 전위예술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당시 유럽의 예술가들 가운데에는 전쟁이 끝난 뒤 “이성적이고 문명화됐다는 인간들이 결국 기관총과 독가스로 서로 죽였는데, 그동안 우리가 믿던 질서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음?”이라는 문제의식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다. 다다이즘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고, 에른스트 역시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의 가치관과 미술 형식을 뒤집으려 했다.

쾰른 다다이즘과 파리 생활

전쟁이 끝난 뒤 에른스트는 쾰른으로 돌아와 한스 아르프, 요하네스 테오도어 바르겔트 등과 함께 다다이즘 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에는 쾰른 다다 그룹을 결성하고 기존 미술의 권위와 관습을 비판하는 전시와 출판활동에 참여했다. 이 시기에 에른스트는 잡지와 광고, 과학서적의 삽화를 오려 붙이는 콜라주 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을 결합해 기괴하고 비논리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1920년 쾰른에서 열린 다다 전시는 당시의 도덕과 예술관념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전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술집을 통과해야 했고, 전통적인 예술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운 물건과 이미지들이 함께 전시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에른스트와 동료들에게 중요한 것은 기존의 미술관과 관람객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예술의 규칙을 흔드는 것이었다.

1921년에는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22년 프랑스로 이주해 시인 폴 엘뤼아르앙드레 브르통 등 프랑스 전위예술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후 브르통을 중심으로 초현실주의 운동이 형성되면서 에른스트는 그 핵심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됐다.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이 발표되고 1925년 첫 초현실주의 그룹전이 열리던 시기에 그는 이미 콜라주와 회화, 새로운 제작기법을 통해 독자적인 작업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다다이즘이 기존의 사회와 예술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데 강한 관심을 가졌다면, 초현실주의는 꿈과 무의식, 우연한 연상을 이용해 현실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표현을 추구했다. 에른스트는 다다이즘에서 시작한 이미지의 파괴와 재조합을 초현실주의의 꿈·무의식 탐구와 연결했고, 그 과정에서 프로타주와 그라타주 등 새로운 기법을 발전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과 미국 망명

1930년대 후반 유럽의 정치상황이 악화되면서 에른스트는 다시 전쟁의 영향을 받게 됐다. 그는 독일 출신이었지만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나치 정권에 반대했고, 나치가 현대미술을 퇴폐미술로 규정하던 시기에는 그의 작품도 독일에서 탄압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프랑스 당국은 독일 국적자라는 이유로 에른스트를 적성 외국인으로 분류해 수용했다. 독일에서는 나치에 반대하는 예술가였는데 프랑스에서는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구금되는 상당히 기막힌 상황에 처한 것이다.

에른스트는 프랑스 남부의 레 밀 수용소 등에 억류됐으며, 친구와 동료들의 도움으로 석방됐다가 전쟁이 확대되면서 다시 위험에 처했다. 1941년에는 미술품 수집가 페기 구겐하임과 구조활동가 배리언 프라이 등의 도움을 받아 미국 뉴욕으로 탈출했다. 유럽에서는 전쟁과 정치적 탄압 때문에 정상적으로 작품활동을 이어가기 어려웠지만 미국에서는 망명한 유럽의 전위예술가들과 함께 새로운 예술적 환경을 형성하게 됐다.

당시 뉴욕에는 에른스트뿐 아니라 마르셀 뒤샹, 피에트 몬드리안, 앙드레 브르통 등 유럽에서 피난 온 여러 예술가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의 활동은 미국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줬으며, 초현실주의에서 발전한 자동기술법과 우연성을 활용하는 작업은 이후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형성과도 연결됐다.

에른스트는 미국 체류 중 회화와 조각에 계속 몰두했으며, 애리조나의 세도나에 거주하면서 사막과 암석, 낯선 자연환경에서 새로운 시각적 영감을 얻었다. 독일의 숲과 프랑스의 도시생활을 경험했던 화가가 이번에는 미국의 붉은 사막과 거대한 암석지형을 접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 작품에서는 자연물과 동물, 토템처럼 보이는 조각적 형태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프랑스 귀환과 말년

에른스트는 1946년 화가 도로시아 태닝과 결혼한 뒤 미국 애리조나에서 생활했고, 1953년에는 프랑스로 돌아와 정착했다. 이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으며,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전시와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1954년에는 제27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회화 부문 대상을 수상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다시 확인했다.

말년에도 회화와 조각, 판화와 출판작업을 계속했으며, 1975년에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쾰른에서 기존의 미술을 조롱하던 다다이스트가 수십 년 뒤에는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회고하는 거장이 된 셈이다.

1976년 4월 1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했다. 향년 84세로, 85번째 생일을 단 하루 앞둔 날이었다. 유해는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치됐다.

작품 세계와 기법

콜라주와 이미지의 재조합

에른스트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법 가운데 하나는 콜라주다. 콜라주는 신문과 잡지, 사진, 인쇄물 등의 이미지를 오려 붙이거나 서로 다른 재료를 결합해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방식이다. 콜라주 자체는 에른스트 이전에도 사용됐지만, 그는 기존 이미지의 원래 맥락을 완전히 뒤바꾸는 방식으로 이를 독자적인 초현실주의 표현기법으로 발전시켰다.

에른스트는 특히 19세기의 과학서적과 도감, 소설 삽화를 즐겨 활용했다. 원래는 기계의 구조를 설명하거나 동물을 소개하고 소설의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그림을 오려내어 서로 전혀 관계없는 이미지와 결합했다. 예를 들어 정장을 입은 사람의 몸에 새의 머리를 붙이거나, 평범한 실내에 거대한 기계와 동물을 등장시키고, 사람의 신체와 가구가 뒤섞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이런 콜라주가 독특한 이유는 사용된 이미지들이 원래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사물은 그럴듯하게 생겼지만 서로 결합된 순간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된다. 현실적인 표현방식으로 비현실적인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는 르네 마그리트와도 공통점이 있지만, 마그리트가 사물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회화로 구성했다면 에른스트는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물리적으로 잘라 붙이는 방식에서 출발했다.

특히 오래된 과학책의 삽화를 활용했다는 점이 재미있다. 원래 과학책은 세상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만든 것인데, 에른스트는 그 삽화를 가져다가 세상에서 가장 비논리적인 장면을 만들어버렸다. 과학책에 있던 그림을 가지고 꿈속에서나 나올 법한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프로타주와 그라타주

프로타주(Frottage)는 에른스트가 1925년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기법으로, 나무판자나 나뭇잎처럼 표면에 질감이 있는 물체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연필이나 목탄으로 문질러 그 무늬를 종이에 옮기는 방식이다. 어린 시절 동전 위에 종이를 올리고 연필로 문질러 동전의 문양을 찍어본 경험이 있다면 원리 자체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에른스트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무늬를 정확하게 복사하는 일이 아니었다. 나무판자의 결이나 바닥의 요철을 문질러 얻은 형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숲이나 바위, 동물의 털, 기괴한 생명체처럼 보이는 이미지가 나타날 수 있다. 에른스트는 이렇게 우연히 만들어진 형태에서 새로운 장면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발전시켰다. 완성된 작품을 미리 구상하기보다 우연한 형태가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도록 만든 것이다.

1926년 출판한 《자연사》(Histoire naturelle)는 이러한 프로타주 기법을 활용한 대표적인 작품집이다. 제목만 보면 자연과학 도감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여러 표면의 질감에서 만들어낸 비현실적인 풍경과 생명체들이 등장한다. 에른스트는 이후 프로타주의 원리를 회화에 적용한 그라타주(Grattage)도 발전시켰다. 캔버스 아래에 질감이 있는 물체를 놓거나 물감이 칠해진 표면을 긁어내는 방식으로 예상하지 못한 무늬를 만들고, 이를 숲과 도시·괴물·기계 등의 이미지로 발전시키는 기법이다.

중요한 것은 에른스트가 눈을 감고 아무렇게나 문지른 뒤 완성이라고 선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연히 얻은 형태는 작품의 출발점이었고, 이후 어떤 부분을 강조하고 어떤 이미지를 추가할지는 작가가 결정했다. 따라서 프로타주와 그라타주는 우연한 무늬를 얻는 과정과 그 무늬를 해석·구성하는 작가의 판단이 결합된 기법이라고 볼 수 있다.

데칼코마니와 우연성

에른스트는 물감을 눌렀다가 떼어내는 데칼코마니 기법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다른 종이나 유리판 등을 표면에 눌렀다가 떼면 물감이 불규칙하게 번지고 갈라지면서 예상하지 못한 무늬가 만들어진다. 에른스트는 이런 형태를 활용해 바위와 숲, 폐허가 된 도시나 낯선 풍경을 표현했다.

데칼코마니 자체를 에른스트가 처음 발명한 것은 아니다.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이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인물로는 오스카르 도밍게스가 있으며, 에른스트는 1930년대 후반부터 이를 자신의 작업에 활용했다. 또한 그는 구멍이 뚫린 용기에서 물감을 떨어뜨리거나 실을 이용해 불규칙한 선을 만드는 등 다양한 우연적 제작방식을 실험했다.

이러한 기법들은 초현실주의의 무의식 탐구와 연결된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모든 형태를 통제하지 않으면 예상하지 못했던 이미지와 연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완성된 작품에는 작가의 선택과 수정이 개입하므로 모든 것이 무의식만으로 만들어졌다고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에른스트는 우연한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그 결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 화면 전체를 구성하는 작업도 수행했다.

새와 로플로프

에른스트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이미지가 다. 특히 그는 로플로프(Loplop)라는 새 형태의 존재를 자신의 분신이자 또 다른 자아처럼 사용했다. 로플로프는 새의 머리와 사람의 몸을 결합한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다른 이미지나 작품을 관람객에게 보여주는 안내자처럼 표현되기도 한다.

에른스트는 어린 시절 자신이 기르던 새가 죽은 날 여동생이 태어났다는 경험을 회상하면서 새와 인간의 관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적이 있다. 다만 이러한 개인적 일화 하나만으로 그의 모든 새 이미지가 만들어졌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새가 작품 속에서 인간과 동물·꿈·변신을 연결하는 반복적인 상징으로 사용됐다고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로플로프가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새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화가 자신을 대신하는 존재처럼 기능한다. 에른스트는 로플로프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거나 다른 인물과 사물을 낯선 방식으로 결합했으며, 이를 통해 현실의 인간과 상상의 생명체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래서 에른스트의 그림에서 새가 보인다면 그것은 평범한 자연풍경의 일부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작가 본인이 새 대가리 달고 그림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주요 작품

《셀레베스의 코끼리》

《셀레베스의 코끼리》(The Elephant Celebes)는 1921년 제작된 에른스트의 초기 대표작이다. 화면 중앙에는 거대한 금속 용기나 기계장치처럼 생긴 물체가 자리하며, 코끼리의 몸통과 코를 연상시키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주변에는 머리가 없는 여성의 신체와 기괴한 구조물 등이 등장하고, 전체 장면은 현실적인 공간처럼 그려져 있으면서도 실제로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이 작품의 거대한 기계형 생명체는 아프리카의 곡물 저장용기 사진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른스트는 원래 전혀 다른 용도로 존재하던 사물의 형태를 차용해 마치 살아 있는 동물이나 거대한 기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셀레베스의 코끼리》는 기존 이미지를 변형하고 결합하는 다다이즘의 방식과 이후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나타나는 꿈같은 장면이 연결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처음 보면 코끼리라고 하기에는 몸통이 쇳덩어리 같고, 기계라고 하기에는 코와 꼬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제목을 알고 나면 코끼리처럼 보이기 시작하지만, 제목을 모르고 보면 “무슨 고대문명의 보스 몬스터임?”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 수도 있다.

《밤꾀꼬리에게 위협받는 두 아이》

《밤꾀꼬리에게 위협받는 두 아이》(Two Children Are Threatened by a Nightingale)는 1924년 제작된 작품으로, 회화와 실제 입체물을 결합한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림 안에는 두 아이와 새, 집과 인물이 등장하지만 화면 바깥으로는 작은 나무문과 입체적인 구조물이 튀어나와 있다. 이 때문에 관람객은 그림 속에 묘사된 공간과 실제 작품의 물리적인 공간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제목만 보면 작은 새가 두 아이를 위협한다는 상황 자체가 이상한데, 작품을 보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새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위험한 동물로 묘사되지 않으며, 인물들의 행동과 주변 공간도 서로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에른스트는 이렇게 현실에서 말이 되지 않는 장면을 비교적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하면서 꿈속에서 느끼는 불안과 비논리성을 드러냈다.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 회화가 단순히 기괴한 대상을 묘사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림과 실제 물체의 경계까지 흔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숲과 비둘기》

《숲과 비둘기》(Forest and Dove)는 1927년 제작된 작품으로, 에른스트의 그라타주 기법을 잘 보여준다. 화면에는 기괴한 형태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그 사이에는 작은 새가 자리한다. 나무의 표면은 일반적인 붓질로만 표현한 것이 아니라 물감과 질감이 있는 물체를 활용한 그라타주 기법으로 만들어져 있다.

에른스트의 숲은 평범한 자연풍경이 아니라 생명체와 기계, 건축물이 서로 뒤섞인 낯선 공간처럼 보인다. 새는 이런 거대한 구조물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작고 연약한 존재로 등장하며, 숲 전체는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진다. 독일의 숲과 어린 시절의 기억, 전쟁 이후의 불안 등 여러 요소와 연결해 해석되지만, 특정한 심리적 의미 하나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비 온 뒤의 유럽 II》

《비 온 뒤의 유럽 II》(Europe After the Rain II)는 1940~1942년 제작된 에른스트의 대표적인 전쟁기 작품이다. 화면에는 폐허가 된 도시와 암석, 기괴한 생명체처럼 보이는 형태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으며, 마치 유럽 전체가 거대한 재난을 겪은 뒤 살아 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의 구분이 사라진 듯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에른스트는 데칼코마니를 활용해 우연히 만들어진 불규칙한 질감을 풍경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물감이 번지고 눌린 흔적은 무너진 건축물이나 침식된 바위, 괴물의 신체처럼 보이고, 그 안에서 관람객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된 유럽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이 작품은 에른스트가 실제 전쟁을 경험하고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여러 차례 위험에 처했던 시기에 제작됐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다만 화면의 모든 형태를 구체적인 전쟁사건이나 특정 국가의 상징으로 대응시키기보다는, 전쟁으로 붕괴한 문명에 대한 불안과 환상적인 이미지가 결합된 작품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신부의 치장》

《신부의 치장》(The Robing of the Bride)은 1940년 제작된 작품으로, 새의 머리와 깃털을 연상시키는 붉은 의상을 입은 여성 형태가 화면 중앙에 등장한다. 주변에는 기괴한 생명체와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화면 안쪽에는 또 다른 그림처럼 보이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르네상스 회화처럼 인물과 공간을 비교적 정교하게 묘사하면서도 실제로는 어떤 의식이 진행되고 있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다.

중앙의 인물은 신부라는 제목과 연결되지만 일반적인 결혼식의 신부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과 동물, 의식과 변신이 결합된 존재에 가까우며, 주변 인물들 역시 현실적인 역할을 설명하기 어렵다. 에른스트는 이런 방식으로 전통적인 인물화와 종교화의 구도를 차용하면서 그 안에 초현실주의적 변신과 불안을 집어넣었다.

콜라주 소설과 조각

에른스트는 회화뿐 아니라 여러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배열해 이야기를 만드는 콜라주 소설도 제작했다. 대표작으로는 《백 개의 머리를 가진 여자》(1929), 《카르멜회에 들어가고 싶었던 어린 소녀의 꿈》(1930), 《자비의 일주일》(1934)이 있다. 이 작품들은 19세기의 소설 삽화와 과학서적·잡지 등의 이미지를 오려 붙여 만들어졌으며, 각각의 장면은 그럴듯하게 그려져 있지만 전체 이야기는 비논리적이고 기괴한 사건들로 이어진다.

일반적인 소설이 문장으로 사건을 설명한다면 에른스트의 콜라주 소설은 서로 다른 이미지들의 관계를 통해 독자가 스스로 장면을 연결하도록 만든다. 인물의 신체가 동물과 결합하거나 평범한 실내에 이상한 기계와 괴물이 등장하는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명확한 줄거리와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기보다 꿈속에서 이상한 삽화들을 연속해서 보는 듯한 경험에 가깝다.

조각에서도 에른스트는 기존의 재료와 형태를 자유롭게 결합했다. 1930년대부터 조각작업을 시작했으며, 이후 미국 애리조나에서 생활하면서 일상적인 물체와 기하학적 형태를 조합한 토템 같은 조각을 제작했다. 대표적인 조각작품으로는 《염소자리》(Capricorn)가 있으며, 동물과 인간·왕과 여왕처럼 보이는 형태들이 결합된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그의 조각은 회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던 새와 괴물, 기계형 생명체가 실제 공간으로 튀어나온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림에서 사람의 몸에 새 머리를 붙이던 작가가 조각에서는 기하학적 구조물과 동물의 형상을 결합해 전혀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낸 셈이다.

인간관계

에른스트는 예술적 교류뿐 아니라 여러 예술가와의 개인적인 관계로도 알려져 있다. 1918년 미술사학자 루이제 슈트라우스와 결혼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는 1920년 아들 지미 에른스트가 태어났다. 지미 역시 훗날 화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에른스트가 프랑스로 이주하면서 부부관계는 멀어졌고, 이후 이혼했다.

1920년대에는 시인 폴 엘뤼아르와 그의 아내 갈라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갈라는 훗날 살바도르 달리의 아내로도 유명한 인물인데, 에른스트와 엘뤼아르 부부가 한동안 복잡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 역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전기에서 자주 언급된다. 갈라는 이후 달리와 함께 생활하며 그의 작품활동과 예술시장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에른스트는 1927년 마리베르트 오랑슈와 결혼했으며, 1930년대에는 영국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레오노라 캐링턴과 연인관계였다. 두 사람은 프랑스에서 함께 생활하고 작품활동을 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에른스트가 억류되고 전쟁을 피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관계가 끊어졌다.

미국으로 탈출한 뒤에는 미술품 수집가 페기 구겐하임과 결혼했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이후 화가 도로시아 태닝과 관계를 맺었고, 1946년 결혼해 에른스트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 생활했다. 태닝 역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가진 초현실주의 화가였으며, 두 사람은 미국 애리조나와 프랑스에서 각각의 작업을 이어갔다.

에른스트의 개인사는 당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교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그의 작품세계가 주변 여성 예술가들과의 관계만으로 형성된 것은 아니다. 특히 레오노라 캐링턴과 도로시아 태닝은 에른스트의 연인이나 아내라는 설명에 그칠 인물들이 아니라 독자적인 예술적 성취를 이룬 화가들이다.

영향과 평가

막스 에른스트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를 연결한 핵심 인물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기존의 예술과 사회질서에 반발하는 다다이즘 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초현실주의에서 꿈과 무의식·우연한 연상을 표현하는 여러 기법을 발전시켰다. 특히 콜라주와 프로타주, 그라타주, 데칼코마니 등을 결합한 작업은 예술가가 머릿속에서 완성된 이미지를 구상한 뒤 그대로 그려야 한다는 전통적인 제작방식에 도전했다.

그의 영향은 유럽의 초현실주의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으로 망명한 에른스트와 여러 유럽 전위예술가들은 뉴욕의 미술계에 새로운 표현방식을 소개했으며, 자동기술법과 우연성을 활용하는 작업은 이후 잭슨 폴록을 비롯한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실험과도 연결됐다. 다만 미국 추상표현주의 전체가 에른스트 한 사람에게서 비롯됐다고 볼 수는 없으며, 여러 유럽 예술가와 미국 화가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새로운 미술운동이 형성됐다.

에른스트의 작품이 지금도 흥미로운 이유는 정교하게 그리는 능력과 우연에 맡기는 실험을 동시에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는 실제 사물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그릴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기존 그림을 잘라 붙이고, 나무판자의 질감을 문질러 얻거나 물감을 눌러 만들어진 형태를 작품에 사용했다. 완성된 그림을 보고 있으면 화가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획한 것 같지만, 실제 제작과정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무늬와 이미지가 작품의 방향을 결정하기도 했다.

그래서 에른스트는 단순히 괴상한 그림을 많이 그린 초현실주의 화가가 아니라, 우연한 형태를 작품으로 발전시키는 방법 자체를 미술의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만든 예술가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초등학교 미술시간에도 나뭇잎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색연필로 문지르거나 물감을 접었다 펼쳐 무늬를 만드는 활동을 하지만, 에른스트는 그런 원리를 이용해 현대미술의 표현방식을 확장한 인물이다.

여담

  • 본명은 막시밀리안 마리아 에른스트(Maximilian Maria Ernst)다.
  • 1891년 4월 2일 독일 브륄에서 태어났다.
  • 본 대학교에서 철학과 미술사, 심리학 등을 공부했다.
  • 전문적인 미술학교 교육을 받지 않고 화가로 성장한 인물이다.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포병으로 복무했다.
  • 전쟁이 끝난 뒤 쾰른에서 한스 아르프 등과 다다이즘 운동을 전개했다.
  • 1922년 프랑스로 이주해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 콜라주와 프로타주, 그라타주 등 다양한 실험적 기법을 사용했다.
  • 프로타주는 나무판자나 나뭇잎처럼 질감이 있는 표면 위에 종이를 놓고 문질러 무늬를 얻는 기법이다.
  • 그라타주는 프로타주의 원리를 회화에 적용해 물감을 긁거나 표면의 질감을 이용하는 기법이다.
  • 데칼코마니도 활용했지만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이 기법을 처음 도입한 인물은 에른스트가 아니라 오스카르 도밍게스다.
  • 새 형태의 분신인 로플로프를 여러 작품에 등장시켰다.
  • 오래된 과학책과 잡지의 삽화를 잘라 붙이는 콜라주를 즐겨 사용했다.
  • 1929년에는 콜라주 소설 《백 개의 머리를 가진 여자》를 발표했다.
  • 《자비의 일주일》 역시 대표적인 콜라주 소설이다.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출신이라는 이유로 프랑스에서 구금됐다.
  • 1941년 페기 구겐하임 등의 도움으로 미국에 망명했다.
  • 미술품 수집가 페기 구겐하임과 결혼한 적이 있다.
  • 레오노라 캐링턴도로시아 태닝과도 개인적·예술적 관계를 맺었다.
  • 1946년 도로시아 태닝과 결혼했고 이후 사망할 때까지 함께 생활했다.
  • 미국 애리조나 세도나에서 생활하며 사막의 자연환경을 작품에 반영했다.
  • 1953년 프랑스로 돌아와 정착했다.
  • 1954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회화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 1975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 1976년 4월 1일, 85번째 생일을 하루 앞두고 사망했다.
  • 유해는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치됐다.
  • 대표작인 《셀레베스의 코끼리》는 제목을 모르고 보면 코끼리보다 거대한 기계나 괴물처럼 보일 수 있다.
  • 나무판자에서 얻은 무늬를 숲으로 만들고 과학책 삽화를 오려 괴물을 만드는 등 평범한 물건에서 낯선 이미지를 발견하는 작업에 능했다.
  • 초현실주의가 무조건 그림을 이상하게 그리는 미술이라고 생각한다면 에른스트의 제작기법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상한 그림뿐 아니라 그 이상한 그림을 만드는 방법까지 실험한 화가이기 때문이다.

대표작

  • 《셀레베스의 코끼리》 (1921)
  • 《밤꾀꼬리에게 위협받는 두 아이》 (1924)
  • 《자연사》 (1926)
  • 《숲과 비둘기》 (1927)
  • 《백 개의 머리를 가진 여자》 (1929)
  • 《카르멜회에 들어가고 싶었던 어린 소녀의 꿈》 (1930)
  • 《자비의 일주일》 (1934)
  • 《신부의 치장》 (1940)
  • 《비 온 뒤의 유럽 II》 (1940~1942)
  • 《염소자리》 (1948)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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