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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완종
사망일2015년 4월 9일
국적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출생지충청남도 서산군
직업기업인, 정치인
경력대아건설 회장
경남기업 회장
서산장학재단 이사장
충청포럼 회장
제19대 국회의원
추가 정보
사망지서울특별시 종로구 북한산
출생일1951년 8월 20일

성완종은 대한민국의 기업인 겸 정치인이다. 충청권을 기반으로 건설업계에서 자수성가해 대아건설과 경남기업 회장을 지냈으며, 이후 정치에 직접 뛰어들어 제1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기업인 시절부터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권에 넓은 인맥을 구축한 것으로 유명했고, 두 차례 특별사면을 받는 등 정치와 사업이 상당히 밀접하게 얽혀 있던 인물이다.

2015년 검찰의 해외 자원개발 관련 경남기업 수사를 받던 도중 자신이 정치적 표적이 됐다고 주장한 뒤 사망했다. 그런데 사망 직전 여러 정치인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남겼고 시신에서도 정치인 8명의 이름과 금액이 적힌 메모가 발견되면서, 본인을 겨냥해 시작됐던 사건이 순식간에 여권 핵심 인사들을 겨냥한 성완종 게이트 사건으로 뒤집혀버렸다.

생애

1951년 8월 20일 충청남도 서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를 중퇴했고,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가 신문 배달과 약 배달 등의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화물 운송업과 건설업에 뛰어들었다.[1]

20대에 200만 원도 되지 않는 자금으로 건설업을 시작했고 1982년 충청권 건설업체인 대아건설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 규모를 키웠다. 대아건설은 충청권의 관급공사와 플랜트 사업 등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며 1996년 코스닥 시장에 등록됐다.[2]

1990년에는 서산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은 충청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사업을 벌였으며 성완종 생전까지 수만 명에게 수백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장학사업은 훗날 그가 충청권에서 상당한 정치적 기반을 갖추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3]

경남기업

2003년 대아건설이 채권단으로부터 경남기업 지분 51%를 인수하면서 경영권을 확보했다. 당시 대아건설보다 경남기업의 도급 순위가 높았기 때문에 지방의 중견 건설업체가 자신보다 덩치가 큰 전국 규모 건설사를 인수한 것으로 주목받았다.[4]

경남기업 인수 이후 베트남 등 해외 건설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특히 하노이에 건설된 초고층 건물 랜드마크72 사업이 대표적이다. 이명박 정부 시기에는 각종 해외 자원개발 사업에도 참여했으나 글로벌 금융위기와 건설경기 침체, 대규모 해외사업에 따른 재무 부담 등이 겹치면서 경남기업의 경영 상태가 악화됐다.

경남기업은 2009년 이후 여러 차례 워크아웃을 거쳤고 결국 2015년 다시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맞았다. 성완종은 같은 해 3월 채권단에 자신의 지분과 경영권을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제출했다.[5] 경남기업은 성완종 사망 직후인 2015년 4월 상장폐지됐고 이후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정치 활동

성완종은 사업가 시절부터 정치권과 상당히 가까웠다. 2000년에는 충청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충청포럼을 만들어 회장을 맡았으며, 정치인과 관료, 기업인 등을 폭넓게 회원으로 끌어들였다.

초기에는 김종필이 이끄는 자유민주연합과 가까웠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산·태안 지역 공천을 신청했으나 공천을 받지 못했고,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는 자민련 비례대표 후보 2번으로 출마했지만 정당 득표율 부족으로 낙선했다.

이후 이명박 대통령 당선 이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다만 훗날 자신이 이명박 정부의 해외자원개발 비리와 함께 거론되자 "나는 MB맨이 아니다"라며 이명박 정부 핵심 인사로 분류되는 것을 강하게 부인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유선진당 후보로 충남 서산·태안에 출마해 당선됐다. 자유선진당이 이후 선진통일당으로 당명을 바꾼 뒤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이 됐다.

그러나 총선을 앞두고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던 서산장학재단을 통해 지역 단체에 1,000만 원을 기부한 행위 등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대법원은 2014년 6월 벌금 500만 원을 확정했고 성완종은 의원직을 상실했다.[6]

정치자금 사건과 특별사면

성완종은 국회의원이 되기 이전에도 정치자금 관련 형사사건으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었다.

2002년 지방선거를 전후해 회사 자금 16억 원을 빼돌려 자유민주연합에 불법 정치자금으로 제공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고, 2004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됐다. 그러나 형 확정 약 9개월 뒤인 2005년 5월 노무현 정부의 특별사면을 받았다.[7]

2007년에는 이른바 행담도 개발사업 사건과 관련된 배임증재 사건으로 다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성완종은 상고를 포기해 형이 확정됐지만 불과 한 달여 뒤인 2007년 12월 31일 참여정부의 마지막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돼 다시 사면·복권됐다.[8]

한 정권에서 두 차례 형사처벌을 받고 두 차례 모두 특별사면을 받은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였기 때문에 이후 특별사면을 둘러싸고 정치권 로비 의혹이 제기됐다. 2015년 검찰은 성완종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에게 특별사면을 부탁하고 경제적 이익을 제공했을 가능성도 수사했으나 공소시효 문제 등으로 기소하지 않았다. 2007년 사면 대상에 성완종이 포함된 경위를 두고도 당시 참여정부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측 사이에서 서로 다른 주장이 제기됐으며 명확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2015년 경남기업 수사

2015년 박근혜 정부에서 해외 자원개발 비리를 수사하던 검찰은 3월 18일 경남기업을 압수수색하며 성완종을 첫 주요 수사 대상으로 삼았다.[9]

검찰은 경남기업이 2006년부터 2013년까지 회사 재무상태를 허위로 꾸며 정부의 해외자원개발 융자금과 금융기관 대출 등 약 800억 원을 받아냈으며, 관계사 거래 등을 통해 약 25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의심했다. 검찰은 약 9,500억 원 규모의 분식회계 정황도 있다고 밝혔다.[10]

성완종은 이러한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 그는 경남기업의 재무 관련 실무는 전문경영인이 담당했으며 자신이 회사 자금을 개인적으로 빼돌린 사실이 없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특히 해외자원개발 관련 정부 융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에 대해 관련 자금은 사용처가 엄격하게 관리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유용할 수 없었다고 반박했다.

검찰은 4월 6일 성완종에 대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횡령 등의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나는 MB맨이 아닙니다"

영장실질심사를 하루 앞둔 4월 8일 성완종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자신의 수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기자회견에서 특히 강조한 것이 "나는 MB맨이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자문위원을 맡은 경력 때문에 이명박 정부의 해외자원개발 사업과 함께 엮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명박 정부의 핵심 인사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검찰이 해외자원개발 비리를 수사하다 뚜렷한 혐의를 발견하지 못하자 자신의 개인 비리와 가족까지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는 취지의 주장도 했다.[11]

성완종의 주장이 사실인지와 별개로 당시 수사가 정치권의 이른바 사정 정국과 맞물려 진행됐기 때문에 그의 사망 이후 검찰의 수사 방식과 대상 선정이 정치적이었던 것 아니냐는 논란이 발생했다.

사망

2015년 4월 9일은 성완종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심문이 예정돼 있던 날이었다. 그는 이른 아침 서울 청담동 자택을 나간 뒤 연락이 끊겼다. 가족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대규모 수색을 벌였고 이날 오후 북한산 형제봉 인근에서 성완종이 숨진 채 발견됐다.[12]

성완종 본인에 대한 2015년 경남기업 사기·횡령 등의 사건은 피의자 사망으로 공소권 없음 처분됐다. 따라서 검찰이 당시 제기했던 성완종 개인의 800억 원대 사기대출 및 수백억 원대 횡령 혐의는 재판에서 유죄나 무죄가 확정된 것이 아니다.[13]

그런데 성완종이 죽으면서 사건은 끝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커졌다.

성완종 게이트

성완종의 시신을 검시하는 과정에서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메모지가 발견됐다. 메모에는 당시 여권 핵심 정치인들의 이름과 일부 금액이 적혀 있었다.

  • 김기춘: 10만 달러
  • 허태열: 7억 원
  • 홍준표: 1억 원
  • 부산시장: 2억 원
  • 홍문종: 2억 원
  • 유정복: 3억 원
  • 이병기
  • 이완구

[14]

더구나 성완종은 사망하기 몇 시간 전 경향신문과 약 50분에 걸쳐 전화 인터뷰를 하며 이와 관련된 상당히 구체적인 주장을 남겼다. 성완종은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2006년 10만 달러를 전달했고, 허태열 전 비서실장에게 2007년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7억 원을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홍준표, 홍문종, 이완구 등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주장을 했다.[15]

성완종은 자신과 가깝게 지내면서 정치자금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이 위기에 처하자 외면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에서는 정치인들에게 대가를 요구하고 돈을 줬다기보다 정치적 신뢰관계에서 돈을 제공했다는 취지로 설명했고, 자신을 수사하는 정권 인사들에 대한 배신감을 반복해서 드러냈다.[16]

본인을 구속하려던 사건은 그의 죽음으로 중단됐는데, 본인이 죽기 직전 남긴 메모와 녹취 때문에 이번에는 자신과 가까웠던 정치인들이 검찰 수사 대상이 되는 상당히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수사 결과

검찰은 별도의 특별수사팀을 구성해 성완종 게이트에 적힌 8명의 금품수수 의혹을 수사했다. 2015년 7월 검찰은 이 가운데 홍준표 당시 경남도지사와 이완구 전 국무총리만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고 나머지 6명은 증거 부족 또는 공소시효 등을 이유로 불기소했다.[17]

그러나 홍준표와 이완구 사건도 최종적으로 유죄가 인정되지는 않았다. 두 사건 모두 1심에서는 유죄가 선고됐으나 항소심에서 무죄로 뒤집혔고, 2017년 12월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했다. 성완종이 이미 사망해 법정에서 직접 증언하거나 반대신문을 받을 수 없는 상태였고, 돈이 실제 전달됐다는 사실을 입증할 객관적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18]

따라서 성완종 게이트는 실제 성완종이 작성한 메모이고 그가 생전에 같은 취지의 육성 인터뷰까지 남겼다는 점 자체는 확인됐지만, 메모에 적힌 정치인들이 실제로 기재된 돈을 받았다는 내용까지 법적으로 사실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논란 및 평가

성완종의 생애는 한국의 기업과 정치권이 오랫동안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그는 지역 장학사업과 충청포럼 등을 통해 상당한 지역 기반을 구축했고, 자민련에서 시작해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정파를 가리지 않는 폭넓은 정치권 인맥을 유지했다.

반면 회사 자금을 이용한 불법 정치자금 제공으로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었고, 두 차례 특별사면을 거쳐 다시 정치와 기업 활동을 계속했다. 이후 직접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다시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때문에 성완종을 단순히 2015년 검찰 수사의 무고한 피해자로 보는 것은 그의 이전 행적을 설명하기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 2015년 수사 당시 검찰이 주장한 거액의 사기·횡령 혐의 대부분은 성완종 사망으로 본인에 대한 재판이 열리지 못해 최종적인 사법 판단을 받지 않았다. 성완종 스스로도 사망 직전까지 자신이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고 주장했으며, 그가 사망하자 오히려 정치권과 권력자들에게 돈을 제공했다는 폭로가 튀어나오면서 검찰의 수사 방향 자체가 뒤집혀버렸다.

결국 자신도 불법 정치자금 문제로 처벌받았던 기업인이었고 정치권과 오랜 기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작 자신이 수사 대상이 되자 그동안 관계를 맺었던 정치권 인사들을 폭로하고 사망한 인물이라는 복잡한 이력을 남겼다. 리스트에 적힌 의혹까지 대부분 사법적으로 확정되지 못하면서 사건 전체에 상당한 미해결 영역도 남아 있다.

여담

  • 1990년 설립한 서산장학재단을 통해 충청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오랫동안 장학사업을 했다. 지역에서 성완종의 지지기반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부분이다.
  • 2000년부터 충청 출신 정·관계·재계 인사들이 참여하는 충청포럼 회장을 맡았다. 이 때문에 기업인 시절부터 이른바 마당발로 불렸다.
  • 본인이 국회의원을 지냈던 서산·태안 지역구는 훗날 친동생인 성일종이 물려받다시피 했다. 성일종은 형 사망 이듬해인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해당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됐으며 이후 계속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사망 하루 전 기자회견에서 사용한 "나는 MB맨이 아닙니다"라는 문구는 사건을 상징하는 말 중 하나가 됐다. 정작 사망 뒤 공개된 리스트에는 박근혜 정부와 친박계 핵심 인사들의 이름이 대거 등장했다.
  • 성완종 게이트 수사가 결과적으로 명단에 오른 정치인 전원의 유죄 입증에 실패하면서, 성완종이 거짓말을 한 것인지 실제 금품수수가 있었지만 증거 확보에 실패한 것인지는 현재도 객관적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각주

  1. ↑ 경향신문, 「성완종은 누구… 충청서 건설업, 반기문 등 소속 '충청포럼' 회장도」, 2015년 4월 10일.
  2. ↑ 연합뉴스, 「성완종의 인생역정…대아건설에서 경남기업까지」, 2015년 4월 16일.
  3. ↑ 연합뉴스, 「'마당발' 성완종 전 회장 지역에서도 인맥·파워 과시」, 2015년 4월 14일.
  4. ↑ 연합뉴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인생·기업 경영방식은」, 2015년 4월 19일.
  5. ↑ 연합뉴스, 「경남기업 성완종 회장, 경영권 포기 선언」, 2015년 3월 19일.
  6. ↑ 연합뉴스, 「'선거법 위반' 새누리당 성완종 의원직 상실 확정」, 2014년 6월 26일.
  7. ↑ 연합뉴스, 「성완종 전 회장, 형 확정 1년 안돼 2차례 '고속 사면'」, 2015년 4월 13일.
  8. ↑ 연합뉴스, 「의혹만 남긴 채 역사 속에 묻힌 '성완종 특사 로비'」, 2015년 7월 2일.
  9. ↑ 연합뉴스, 「'자원외교비리' 수사 첫 타깃은 성완종의 경남기업」, 2015년 3월 18일.
  10. ↑ 연합뉴스, 「'자원외교 비리' 성완종 영장…9천500억 분식회계」, 2015년 4월 6일.
  11. ↑ 연합뉴스, 「'표적수사 억울' 강조하고 자살…급제동 걸린 사정정국」, 2015년 4월 9일.
  12. ↑ 연합뉴스, 「'자원외교 비리' 성완종 전 회장 잠적 후 숨진 채 발견」, 2015년 4월 9일.
  13. ↑ 연합뉴스, 「경남기업 수사 마무리…자원개발비리 첫 타깃 '빈 손'」, 2015년 6월 22일.
  14. ↑ 연합뉴스, 「검찰 '성완종 게이트' 확보…현 정권 실세 등 8명 거론」, 2015년 4월 10일.
  15. ↑ 경향신문, 「성완종 단독 인터뷰 '김기춘 10만달러·허태열 7억 줬다'」, 2015년 4월 10일.
  16. ↑ 경향신문, 「'돈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묻자 '뭘 처리해요, 꿀꺽했지'」, 2015년 4월 11일.
  17. ↑ 연합뉴스, 「82일간 달렸지만 '주마간산'에 그친 成리스트 수사」, 2015년 7월 2일.
  18. ↑ 연합뉴스, 「'성완종 게이트 의혹' 홍준표·이완구 무죄…대법 '증거 없어'」, 2017년 1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