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사와 에이이치 渋沢 栄一 (しぶさわ えいいち) Shibusawa Eiichi | |
| 생년월일 | 1840년 3월 16일 (출생) 1931년 11월 11일 (사망, 향년 91세) |
|---|---|
| 국적 | 에도 막부 → 일본 제국 |
| 출생지 | 에도 막부 무사시국 하라군 지아라이지마촌 (현 일본 사이타마현 후카야시) |
| 직업 | 기업인, 은행가, 금융가, 관료, 사회사업가 |
| 가족 | 오다카 치요(첫 번째 배우자) 시부사와 가네코(두 번째 배우자) 시부사와 아쓰지(장남) |
개요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 栄一, しぶさわ えいいち, 1840년 3월 16일 ~ 1931년 11월 11일)는 일본 제국의 기업인, 금융가, 사회사업가다. 근대 일본의 은행 제도와 주식회사 제도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여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에도 막부 말기에 태어나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일본의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주도한 인물이다. 일본 최초의 근대적 은행인 제일국립은행을 설립하고 도쿄주식거래소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은행·철도·해운·방직·제지·보험 등 다양한 산업에 참여했다.
평생 약 500개의 기업 설립과 경영에 관여하고 약 600개의 교육·복지·사회사업 단체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500개 회사를 전부 혼자 창업했다는 뜻은 아니고, 투자와 자금 조달, 경영 자문, 기업 설립 지원 등 다양한 방식으로 관여했다는 의미다.[1]
일본에서는 근대 경제 발전의 위인으로 평가받으며, 2024년 7월 3일부터 발행된 일본의 신형 1만 엔 지폐에 그의 초상이 사용되고 있다.
한편 대한제국에서는 그가 총재로 있던 일본 제일은행이 은행권을 발행하고 금융시장에 영향력을 확대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일본의 경제적 침탈과 관련된 인물로도 평가된다.
생애
출생과 성장
1840년 3월 16일 에도 시대 무사시국 하라군 지아라이지마촌, 현재의 사이타마현 후카야시에서 태어났다.
시부사와 가문은 농업과 양잠업, 쪽 염료의 생산과 판매에 종사하던 유력한 농가였다. 어린 시절부터 가업을 도우면서 경제활동을 경험했으며, 친척에게 유교 경전을 배우기도 했다.
젊은 시절에는 존왕양이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1863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다카사키성을 점령하고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류지를 공격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훗날 서양식 자본주의를 일본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과거다. 처음에는 외국인을 몰아내겠다고 하던 양반이 나중에는 서양의 경제제도를 일본에 이식하는 데 앞장선 것이다.
막부의 신하가 되다
1864년 히토쓰바시 요시노부의 가신이 되었다. 요시노부는 훗날 도쿠가와 요시노부라는 이름으로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 되는 인물이다.
1866년 요시노부가 쇼군에 취임하면서 시부사와도 정식으로 막부의 신하가 되었다.
1867년에는 도쿠가와 아키타케가 이끄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프랑스에서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했다.
이때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근대적인 은행, 주식회사, 철도, 공장과 각종 경제제도를 직접 관찰했다. 특히 기업이 다수의 투자자로부터 자본을 조달하고 전문적인 경영 체계를 통해 운영되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경험은 이후 시부사와가 일본의 근대적인 산업과 금융 제도를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메이지 정부의 관료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붕괴하자 일본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옛 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머물고 있던 시즈오카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오쿠마 시게노부의 권유를 받아 1869년 메이지 정부의 관료가 되었다.
민부성과 대장성에서 근무하면서 조세와 화폐, 금융제도 개혁에 관여했다.
그러나 1873년 정부의 재정정책 등을 둘러싼 의견 차이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본격적으로 민간 경제계에 진출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나 대신이 되는 대신, 일본 경제의 기반을 구축하는 기업인이 된 것이다.
일본 자본주의의 기반을 구축하다
1873년 제일국립은행(第一国立銀行)의 설립에 참여하고 경영 책임자가 되었다. 1875년에는 은행의 총재에 취임했다.
제일국립은행은 일본 최초의 근대적 국립은행 조례에 따라 설립된 은행으로, 여기서 국립은행이란 국가가 직접 소유한 은행이 아니라 미국의 내셔널 뱅크 제도를 참고하여 설립된 민간 은행을 뜻한다.
이 은행은 훗날 제일은행으로 개편되었으며, 여러 차례 합병을 거쳐 오늘날 미즈호 은행으로 이어지는 금융기관 중 하나가 되었다.
시부사와는 제일국립은행 외에도 다음과 같은 기업과 경제기관의 설립 또는 발전에 관여했다.
- 제일국립은행: 일본 최초의 근대적인 은행 가운데 하나로, 현대 일본 금융산업의 기반을 형성했다.
- 도쿄주식거래소: 1878년 설립된 일본 최초의 주식거래소로, 시부사와가 설립을 주도했다.
- 오지제지: 근대 일본의 제지산업을 발전시킨 기업이다.
- 오사카방적: 일본의 근대 방직산업 발전에 기여한 기업이다.
- 도쿄가스: 일본의 도시가스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관여했다.
- 일본철도회사: 일본의 민간 철도사업에 관여했다.
- 제국호텔: 일본의 대표적인 근대 호텔사업에 관여했다.
- 도쿄상법회의소: 일본의 상공업 발전을 위한 경제단체로, 오늘날 도쿄상공회의소의 전신이다.
이 밖에도 해운, 보험, 창고, 전력, 조선, 식품 등 거의 모든 주요 산업에 관여했다.
다만 기업을 설립한 뒤 이를 영원히 소유하면서 거대한 가족기업으로 키우기보다는, 새로운 기업을 만들어 경영이 안정되면 다른 사업의 설립과 발전을 지원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따라서 미쓰비시의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처럼 하나의 거대한 기업집단을 직접 지배하는 방식과는 차이가 있었다.
시부사와가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단순히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 경제 전체에 필요한 기업과 금융기관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사회사업과 말년
시부사와는 기업 경영뿐만 아니라 교육과 사회복지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고아와 빈곤층, 노인 등을 지원하는 도쿄양육원의 운영에 참여했으며, 학교와 의료기관의 설립 및 발전을 지원했다.
여성 교육과 상업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고, 국제 교류와 민간 외교에도 관여했다.
특히 러일전쟁 이후에는 미국과 일본 사이의 민간 교류를 증진하는 활동을 펼쳤다.
1923년 간토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에도 피해 복구와 구호활동에 참여했다.
1931년 11월 11일 도쿄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묘소는 도쿄의 야나카 묘지에 있다.
사상
도덕경제합일설
시부사와가 강조한 대표적인 경제사상은 도덕경제합일설(道徳経済合一説)이다.
그는 경제활동과 도덕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회적 책임과 도덕적 원칙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논어의 가르침과 근대 자본주의의 경제활동을 조화시키려고 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 알려진 《논어와 주판》(論語と算盤)은 이러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
논어는 도덕과 윤리를, 주판은 경제와 이윤을 상징한다. 즉 기업인은 돈을 벌면서도 도덕성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경영과도 연결되는 사상으로 평가된다.
물론 기업인이 도덕을 강조한다고 실제 사업이 언제나 도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에서의 제일은행 활동까지 살펴보면 시부사와의 경제사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합본주의
시부사와는 합본주의(合本主義)를 주장했다.
이는 다수의 투자자가 자본을 모아 기업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사회 전체에 필요한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특정 가문이나 개인이 기업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자본과 능력을 결합하여 경영하는 방식을 중시했다.
이는 이와사키 야타로가 주도했던 미쓰비시의 가족 중심 경영 방식과 대비된다.
두 사람은 근대 일본 경제를 대표하는 기업인이었지만 경영 철학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시부사와는 공동 출자와 협력적인 경영을 선호했고, 이와사키는 강력한 경영자의 통제와 기업집단의 확대를 중시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와 기업관은 일본 경제사에서 자주 비교되는 주제다.
한국과의 관계
대한제국에서의 제일은행 활동
시부사와는 대한제국의 금융 및 경제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가 총재로 있던 일본 제일은행은 조선에 진출하여 금융사업을 확대했으며, 1902년에는 한국에서 자체적인 은행권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은행권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초상이 들어갔다. 즉 오늘날 일본의 1만 엔 지폐에 등장하기 120여 년 전부터 그의 얼굴이 한반도에서 유통되는 지폐에 등장했던 것이다.
제일은행권은 1원, 5원, 10원 등 여러 권종으로 발행되었으며,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에도 당시 지폐가 소장되어 있다.[2]
문제는 제일은행이 대한제국 정부의 승낙 없이 은행권을 발행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한제국 정부와 한국 상인들을 중심으로 제일은행권 배척운동이 벌어졌으나, 일본의 정치적·군사적 영향력 확대를 배경으로 결국 통용되었다.[3]
시부사와 역시 단순히 일본 본토에서 은행을 경영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제일은행의 한국 사업과 관련된 금융 교섭에 관여했으며, 은행의 총재로서 한국에서의 금융사업 확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화폐정리사업과 금융 주권 침탈
1905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금융제도를 개편한다는 명목으로 화폐정리사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제일은행은 대한제국의 화폐정리 업무와 국고금 취급을 담당하면서 한국의 금융체계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확대했다.
제일은행권은 한국 내에서 광범위하게 유통되었고 제일은행은 사실상 중앙은행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과정은 일본이 한국의 금융 주권을 침탈하고 식민지 금융체제를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4]
시부사와가 총재로 재직하던 제일은행이 이 과정에 직접 관여했다는 점에서 그의 경력을 일본 국내의 산업 발전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제일은행의 활동과 일본 정부의 정책을 모두 시부사와 개인 한 사람의 결정으로 돌리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당시 일본 정부의 대외정책, 대한제국에 대한 정치적 압력, 일본 금융기관들의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렇다고 시부사와가 이러한 활동과 무관했다고 볼 수도 없다. 제일은행의 경영 책임자로서 한국 관련 금융사업에 관여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
일본에서는 도덕적 자본주의를 주장한 기업인으로 평가받지만 한국에서는 그가 경영한 은행이 대한제국의 금융 주권 침탈에 관여했다는 점도 함께 평가해야 하는 이유다.
평가
일본에서의 평가
일본에서는 근대 경제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기업인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특히 근대적인 은행과 주식회사 제도가 자리 잡는 데 기여했고, 제조업·철도·해운·보험 등 다양한 산업의 발전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는 별명도 이러한 업적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단순히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교육과 복지, 사회사업에도 참여하고 기업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존경받는다.
시부사와의 경제사상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뿐만 아니라 현대 기업경영과 윤리경영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비판적 평가
시부사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별개로 그의 활동을 일본 제국주의의 경제적 팽창과 연결하여 바라볼 필요도 있다.
특히 대한제국에서의 제일은행 활동은 일본이 금융과 화폐제도를 통해 한국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의 일부였다.
이 때문에 시부사와의 도덕경제합일설과 실제 대외 경제활동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한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근대 기업인이었다는 사실과 일본의 경제적 침탈 과정에 관여했다는 사실은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 국내에서의 산업 발전과 사회사업에 대한 공헌,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에서의 경제적 활동을 구분하여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
1만 엔 지폐의 인물
2024년 7월 3일부터 일본에서 발행된 신형 1만 엔 지폐의 앞면에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초상이 들어갔다.
기존 1만 엔 지폐의 인물은 후쿠자와 유키치였으며, 지폐 뒷면에는 도쿄역 마루노우치 역사 건물이 그려져 있다.
일본 정부는 시부사와가 근대 일본 경제 발전에 기여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새로운 1만 엔 지폐의 인물로 선정했다.
신형 지폐에는 위조 방지를 위한 3차원 홀로그램 등 새로운 보안기술도 적용되었다.[5]
한국에서는 시부사와가 과거 제일은행권에 자신의 초상을 사용했고, 그 은행이 대한제국의 금융 주권 침탈에 관여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다시 주목받았다.
특히 1902년 제일은행권과 2024년 일본 신형 1만 엔 지폐에 동일한 인물의 초상이 들어간다는 점이 역사적 논란의 배경이 되었다.
다만 2024년 신권 발행의 공식적인 목적은 위조 방지 기술의 개선과 지폐 도안 변경이며, 대한제국의 금융 침탈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여담
- 젊은 시절에는 서양인을 몰아내려는 존왕양이 사상에 영향을 받았지만 이후 유럽의 근대 경제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당시 일본의 사상적 변화와 근대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 약 500개의 기업 설립과 경영에 관여했다는 기록으로 유명하다. 다만 모든 기업을 직접 창업하거나 소유한 것은 아니다.
- 기업 경영 외에도 약 600개의 사회사업·교육·복지 관련 단체에 관여했다.
- 일본의 대표적인 경제인으로서 이와사키 야타로와 자주 비교된다. 이와사키는 미쓰비시라는 거대한 기업집단을 형성했고, 시부사와는 여러 기업의 설립과 발전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활동했다.
- 2021년 방영된 NHK 대하드라마 《청천을 찔러라》(青天を衝け)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 그의 손자인 시부사와 게이조 역시 일본의 금융인으로 활동했으며 일본은행 총재와 대장대신을 역임했다.
- 2024년 신형 1만 엔 지폐에 그의 초상이 채택되면서 일본 내에서 다시 높은 관심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