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마 시게노부 Ōkuma Shigenobu | |
| 일본어 이름 | 大隈 重信 |
|---|---|
| 국적 | 일본 제국 |
| 출생지 | 일본 히젠국 사가번 (현 사가현 사가시) |
| 직업 | 정치인, 교육자 |
| 정당 | 입헌개진당, 진보당, 헌정당, 헌정본당 |
개요
오쿠마 시게노부(大隈 重信, 1838년 3월 11일 ~ 1922년 1월 10일)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이자 교육자다. 제8대와 제17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으며, 와세다대학을 설립한 인물로 유명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국가 형성에 참여한 정치인 가운데 하나로, 재정제도와 통계행정의 정비, 의회정치와 정당제도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와 대립하면서 영국식 의회정치를 지향했고, 1882년 입헌개진당을 창당하여 정당정치를 추진했다.
1898년에는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협력하여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내각으로 평가되는 제1차 오쿠마 내각을 조직했다.
그러나 이 내각은 당내 갈등으로 불과 4개월여 만에 붕괴했다.
이후 오랫동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가 1914년 76세의 나이로 다시 총리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참전과 1915년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를 추진한 정부의 수반이기도 했다.
일본의 의회정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제국주의적인 대외 팽창에도 관여한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평가가 복잡하다.
한국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나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지만, 일본 근현대 정치사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다.
특히 일본의 유명 사립대학인 와세다대학의 설립자라는 점에서도 역사적인 영향력이 크다.
오쿠마는 정치인이면서도 교육과 통계, 과학기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국가가 정책을 올바르게 결정하려면 정확한 통계자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1881년에는 정부 통계조직의 확대를 제안하고 통계원장을 직접 맡았다.
메이지 시대에 이미 국가를 운영하려면 감으로 결정하지 말고 숫자와 데이터를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양반인 것이다.
한편 1889년에는 불평등조약 개정 문제로 극우 성향의 정치적 테러범에게 폭탄 공격을 당해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그럼에도 정치활동을 계속했으며, 약 25년 뒤 다시 총리로 취임했다.
1922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그의 국민장에는 약 20만~30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1]
이름과 출생일
오쿠마 시게노부의 이름은 일본어로 大隈 重信이라고 쓴다.
성인 大隈은 일본어로 오쿠마(おおくま), 이름인 重信은 시게노부(しげのぶ)라고 읽는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오쿠마 시게노부라고 표기한다.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대외중신(大隈重信)이지만, 오늘날에는 이러한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출생일은 1838년 3월 11일이다.
다만 일부 일본 자료에서는 1838년 2월 16일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는 당시 일본에서 사용하던 구력과 오늘날의 양력 사이의 차이 때문이다.
- 구력: 덴포 9년 2월 16일
- 양력: 1838년 3월 11일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은 두 날짜를 함께 표기하고 있으며, 와세다대학에서는 양력 3월 11일을 오쿠마의 생일로 소개하고 있다.[2][3]
따라서 일부 자료에서 생일이 다르게 나타나더라도 반드시 오류라고 볼 수는 없다.
생애
사가번에서의 어린 시절
사가번은 오늘날 일본 규슈 북서부의 사가현 일대에 해당한다.
아버지는 사가번의 무사였던 오쿠마 노부야스(大隈信保)였다.
오쿠마는 사가번의 무사 집안에서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에는 번에서 운영하던 교육기관에서 유교 경전과 전통적인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기존의 봉건적인 교육방식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고전 문헌을 암기하는 방식의 교육보다 실제 사회와 국가 운영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배우는 데 관심을 가졌다.
이후 난학과 서양의 정치제도, 경제제도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가번은 일본에서 서양의 군사기술과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던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는 서양식 대포와 군함, 군사기술 등을 도입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오쿠마가 서양 문물과 근대적인 국가제도에 관심을 가지는 데 영향을 미쳤다.
서양 학문의 수용
오쿠마는 젊은 시절 나가사키에서 서양의 학문과 영어를 배웠다.
특히 미국 출신 선교사이자 교육자였던 귀도 베어벡(Guido Verbeck)에게 영향을 받았다.
베어벡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여러 정치인과 지식인들에게 서양의 정치제도와 법률, 과학 등을 가르친 인물이다.
오쿠마 역시 이러한 교육을 통해 서양의 헌법과 정치제도, 국제관계 등을 공부했다.
1865년에는 나가사키에서 영어와 서양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인 치엔칸(致遠館)의 설립에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은 그가 나중에 와세다대학을 설립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4]
특히 오쿠마는 서양의 기술만 도입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정치와 경제, 교육제도까지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포와 군함만 서양식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막부 말기의 정치활동
오쿠마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19세기 중반 일본은 에도 막부의 권위가 약화되고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1853년 매슈 페리가 미국 함대를 이끌고 일본에 도착한 이후 일본에서는 개항과 서양 세력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정치적인 갈등이 발생했다.
특히 막부의 통치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치체제를 주장하는 세력이 대립했다.
오쿠마 역시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 속에서 정치활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867년에는 소에지마 다네오미와 함께 사가번을 떠나 교토로 이동하여 정치적인 활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으며, 결국 사가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메이지 유신이 진행되면서 오쿠마는 새롭게 수립된 일본 정부에 참여하게 되었다.
메이지 정부에 참여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오쿠마는 신정부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당시 일본은 기존의 봉건적인 번 체제를 해체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재정과 화폐, 조세, 교통과 통신 등 여러 분야의 제도를 새롭게 정비해야 했다.
오쿠마는 특히 외교와 재정 분야에서 활동했다.
1869년에는 대장대보가 되었으며, 1870년에는 정부의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참의로 임명되었다.
1873년에는 대장경에 취임하면서 일본의 재정정책을 책임지는 중요한 정치인으로 성장했다.[5]
당시 일본 정부에는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 정치인들이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쿠마는 사가번 출신으로 이러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특히 오쿠보 도시미치가 중요한 정치적 후원자 가운데 하나였다.
재정과 통계제도의 정비
오쿠마는 메이지 정부에서 재정과 경제제도의 정비를 추진했다.
당시 일본은 전국적으로 통일되지 않은 화폐와 조세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정부가 안정적으로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했다.
오쿠마는 이러한 과정에서 재정개혁과 근대적인 행정제도의 발전에 참여했다.
또한 철도와 전신 등 근대적인 교통·통신시설의 확충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의 경제정책은 항상 다른 정치인들과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재정 운영과 정부 조직의 방향을 둘러싸고 여러 갈등이 발생했다.
오쿠마는 1880년 대장경에서 물러나 참의로 활동하면서 통계행정의 정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881년에는 국가의 상황과 정책 효과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통계자료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통계원의 설치를 제안했다.
이후 통계원이 설치되자 직접 초대 통계원장을 맡았다.
특히 정책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국가 상황을 조사하고 과거에 시행한 정책의 결과와 비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총무성 통계국은 이러한 활동을 근대 일본 통계제도 발전의 중요한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6]
현대의 관점에서는 증거기반 정책(Evidence-Based Policy Making)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오쿠마가 오늘날의 통계학이나 데이터 분석기술을 직접 개발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정책은 그냥 정치인들이 감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자료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비교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881년 정변
1881년 발생한 메이지 14년 정변(明治十四年の政変)은 오쿠마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다.
당시 일본 정부에서는 언제 헌법을 제정하고 국회를 개설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하고 있었다.
특히 오쿠마는 영국식 의회정치에 가까운 정치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다른 주요 정치인들은 상대적으로 점진적인 개혁을 선호했다.
오쿠마는 1881년 3월 헌법과 의회제도의 도입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빠른 정치개혁을 요구했다.
특히 1883년 무렵까지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정치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다른 정부 지도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홋카이도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
당시 일본에서는 홋카이도의 개발과 관련된 정부 재산을 민간에 매각하려는 계획이 논란이 되었다.
특히 개척사 장관이었던 구로다 기요타카가 정부의 재산을 특정 민간 사업가에게 지나치게 저렴한 가격으로 넘기려 한다는 의혹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정부의 특혜와 부패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인 비판을 불러왔다.
특히 자유민권운동 세력은 정부의 정책을 감시할 수 있는 의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오쿠마와 가까운 정치인들이 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움직임에 참여했다.
그러나 정부 내부에서는 오쿠마가 반정부 세력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결국 1881년 10월 오쿠마는 정부에서 축출되었다.[7]
이 사건으로 오쿠마는 정부의 중심적인 정치인에서 야당 정치인으로 입장이 바뀌었다.
서양식 의회정치를 도입하자고 주장하다가 정작 정부에서 쫓겨난 것이다.
다만 오쿠마의 실각을 단순히 민주주의를 주장했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당시에는 재정정책과 정치세력 사이의 경쟁, 홋카이도 관유물 불하 사건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또한 오쿠마 역시 근대적인 민주주의를 오늘날과 동일하게 이해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이후의 영향
1881년 정변을 계기로 일본 정부는 오쿠마를 축출했지만 동시에 향후 국회를 개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특히 정부는 1890년에 국회를 개설할 것을 약속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 등을 중심으로 헌법 제정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1889년 메이지 헌법이 공포되었다.
1890년에는 제국의회가 개설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도입된 정치제도는 오쿠마가 주장했던 영국식 의원내각제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메이지 헌법 체제에서는 천황에게 강한 권한이 부여되었으며, 정부가 의회에 전적으로 책임지는 구조도 아니었다.
따라서 오쿠마가 추구했던 정당 중심의 의회정치는 이후에도 중요한 정치적인 과제로 남았다.
입헌개진당 창당
1882년 오쿠마는 입헌개진당(立憲改進党)을 창당했다.
입헌개진당은 영국식 의회정치와 점진적인 정치개혁을 추구했던 정당이다.
대표적인 정치인으로는 오쿠마를 비롯하여 오노 아즈사, 이누카이 쓰요시, 오자키 유키오 등이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의회 개설과 정치적인 자유를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이끌던 자유당 역시 중요한 정치세력이었다.
오쿠마의 입헌개진당과 이타가키의 자유당은 모두 의회정치의 발전을 요구했지만 정치적인 기반과 구체적인 정책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입헌개진당은 도시의 지식인과 언론인, 상공업자 등의 지지를 받았으며 영국식 정치제도를 비교적 강하게 지향했다.
반면 자유당은 지방의 지주와 자유민권운동 세력을 중요한 정치적 기반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 정당 모두 메이지 정부의 관료 중심적인 통치에 대한 중요한 반대세력으로 활동했다.
정부에서 쫓겨났더니 이번에는 아예 정당을 만들어 정부에 반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입헌개진당의 창당은 이후 일본의 의회정치와 정당정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와세다대학 설립
오쿠마의 가장 널리 알려진 업적 가운데 하나는 와세다대학의 설립이다.
1882년 10월 21일 오쿠마는 동료들과 함께 도쿄전문학교(東京専門学校)를 설립했다.
이 학교가 오늘날 와세다대학의 전신이다.
당시에는 정치경제학과와 법률학과, 이학과 등의 교육과정이 마련되었으며, 개교 당시 학생 수는 약 80명이었다.[8]
설립 배경
오쿠마가 학교를 설립한 배경에는 1881년 정변이 있었다.
그는 정부에서 축출된 이후 정치적인 활동뿐 아니라 교육을 통한 사회적인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특히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정부의 관료를 양성하는 교육뿐 아니라 독립적인 사고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인재들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학교가 정부나 특정한 정치세력의 통제를 지나치게 받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중요한 이념이 학문의 독립(学問の独立)이었다.
오쿠마는 정치와 경제, 법률 등에 대한 교육을 통해 일본 사회의 근대화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려고 했다.
당시 일본에서 고등교육기관의 상당 부분은 국가적인 인재 양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민간에서도 독립적인 교육기관이 발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노 아즈사의 역할
와세다대학의 설립에서 오쿠마만큼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오노 아즈사다.
오노는 오쿠마와 함께 입헌개진당의 활동에 참여했던 정치인이자 지식인이었다.
특히 도쿄전문학교의 교육과정과 운영방식을 설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쿠마가 학교 설립을 위한 재정적·정치적인 기반을 제공했다면, 오노는 실제 교육제도와 학교 운영의 방향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와세다대학에서는 오쿠마를 건학의 아버지, 오노를 건학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9]
물론 이러한 표현은 두 사람이 실제 가족관계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학교 설립에 대한 기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도쿄전문학교에서 와세다대학으로
1882년 설립 당시 학교의 공식 명칭은 도쿄전문학교였다.
그러나 오쿠마의 저택이 와세다 지역에 있었고 학교 역시 인근에 자리 잡으면서 와세다학교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1902년에는 공식적으로 와세다대학으로 개칭되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있다.
1902년에 대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오늘날과 같은 법적 대학제도가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1920년에는 일본의 대학령에 따른 대학으로 인가되면서 정식 대학으로서의 제도가 확립되었다.[10]
따라서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 연도 | 사건 |
|---|---|
| 1882 | 도쿄전문학교 설립 |
| 1902 | 와세다대학으로 개칭 |
| 1907 | 오쿠마 시게노부 초대 총장 취임 |
| 1920 | 대학령에 따른 대학으로 인가 |
| 1922 | 오쿠마 시게노부 사망 |
| 1927 | 오쿠마 기념강당 완공 |
초대 총장
1907년 오쿠마는 와세다대학의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이 직책을 오늘날 일반적인 대학 총장의 행정적 역할과 완전히 같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당시 와세다대학은 총장과 학장을 구분하고 있었다.
오쿠마가 초대 총장이 되었지만, 실질적인 대학 운영은 학장이었던 다카타 사나에 등이 담당했다.
따라서 오쿠마의 총장직은 대학의 상징적인 지도자이자 후원자라는 성격이 강했다.
와세다대학은 오쿠마가 오랫동안 학교의 정치적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공식적인 직책을 맡지 않다가 1907년에 처음 총장이 되었다고 설명한다.[11]
오쿠마는 1922년 사망할 때까지 총장직을 유지했다.
정치인으로 학교를 만들었지만 학교가 자신의 정치조직처럼 보이지 않도록 거리를 두다가, 나이가 들어서야 대학의 상징적인 대표가 된 것이다.
외무대신과 폭탄 테러
불평등조약 개정
1888년 오쿠마는 구로다 기요타카 내각의 외무대신에 취임했다.
당시 일본 정부의 중요한 외교적 과제 가운데 하나는 서양 국가들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특히 서양 국가들이 일본에서 누리고 있던 영사재판권과 관세에 관한 특권 등이 중요한 문제였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특권을 축소하거나 철폐하여 서양 국가들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하려고 했다.
오쿠마 역시 조약 개정을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개정안에는 외국인 법관을 일본의 최고재판소에 임용하는 문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일본의 보수적인 정치세력과 민족주의자들은 사법 주권을 침해하는 양보라고 비판했다.
결국 조약 개정을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었다.
1889년 폭탄 테러
1889년 10월 18일 오쿠마는 외무대신으로서 업무를 마친 뒤 이동하던 중 폭탄 테러를 당했다.
범인은 일본의 국가주의 단체인 겐요샤(玄洋社)에 소속되어 있던 구루시마 쓰네키였다.
구루시마는 오쿠마가 추진하던 불평등조약 개정안에 반대하고 있었다.
특히 외국인 법관의 임용 등 일부 내용을 일본의 국가적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오쿠마에게 폭탄을 던졌으며, 오쿠마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결국 오쿠마는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12]
이 사건의 영향으로 불평등조약 개정 협상도 중단되었다.
오쿠마는 같은 해 외무대신직에서 물러났다.
서양 국가들과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려고 협상하다가 오히려 자국의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에게 폭탄을 맞아 다리를 잃은 것이다.
물론 테러범이 비판했던 조약 개정안에는 실제로 일본의 사법권과 관련된 논쟁적인 조항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정책에 대한 반대와 정치인을 폭탄으로 공격하는 행위는 별개의 문제다.
이 사건은 메이지 시대 일본의 정치적인 갈등이 폭력적인 테러로 발전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후의 정치활동
오쿠마는 폭탄 테러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지만 정치활동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여러 정당의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1896년에는 다시 외무대신으로 취임했다.
또한 1898년에는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따라서 테러 사건을 계기로 그의 정치인생이 완전히 끝났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오히려 오른쪽 다리를 잃은 이후에도 총리직을 두 차례 수행하게 되었다.
제1차 오쿠마 내각
1898년 6월 30일 오쿠마는 일본 제8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당시 60세였다.
이 내각은 일본 정치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내각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기존의 메이지 정부는 주로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 정치인들의 인맥과 관료조직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반면 오쿠마 내각은 의회에 기반을 둔 정당세력들이 연합하여 구성한 내각이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와의 협력
오쿠마가 총리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에는 이타가키 다이스케와의 협력이 있었다.
이타가키는 일본의 자유민권운동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자유당을 이끌고 있었다.
1898년 오쿠마가 이끌던 진보당과 이타가키의 자유당은 통합하여 헌정당을 결성했다.
이후 이 정당이 정권을 구성하면서 오쿠마가 총리에 취임했다.
이타가키 역시 내무대신으로 입각했다.
이러한 이유로 제1차 오쿠마 내각은 와이한 내각(隈板内閣)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와이한이라는 표현은 오쿠마(大隈)와 이타가키(板垣)의 성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 다른 정당을 이끌었지만 정부의 관료 중심적인 통치에 대응하기 위해 협력했다.
최초의 정당내각
제1차 오쿠마 내각이 중요한 이유는 정당을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이 정부를 구성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일본의 내각은 주로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던 원로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중심이었다.
의회가 존재하더라도 정부가 반드시 의회의 다수당에 의해 구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898년에는 정당세력이 연합하여 내각을 구성하면서 일본의 정치제도가 새로운 단계로 발전했다.
물론 오늘날의 민주적인 의원내각제와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천황과 원로 정치인, 군부 등이 강한 정치적 권한과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차 오쿠마 내각은 정당정치 발전의 중요한 사건이지만 일본에서 완전한 의회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4개월 만의 붕괴
제1차 오쿠마 내각은 출범 이후 곧바로 내부 갈등에 직면했다.
특히 기존 자유당과 진보당 출신 정치인들 사이에 인사와 정책을 둘러싼 대립이 발생했다.
또한 문부대신이었던 오자키 유키오의 발언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도 발생했다.
이러한 갈등은 정당의 분열로 이어졌다.
결국 제1차 오쿠마 내각은 1898년 11월 8일 총사퇴했다.
총 재임기간은 132일이었다.[13]
일본 최초의 정당내각을 만들었는데 정작 정당끼리 서로 싸우다가 넉 달 만에 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물론 정당내각이 짧은 기간에 붕괴했다고 해서 그 역사적인 의미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후에도 정당정치는 일본 정치의 중요한 흐름으로 발전했다.
제1차 오쿠마 내각의 붕괴 이후에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다.
정계 은퇴와 복귀
1907년 오쿠마는 자신이 이끌던 헌정본당의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시 오쿠마의 정당은 오랫동안 야당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내부에서도 정치적인 방향에 대한 갈등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후 오쿠마는 와세다대학의 초대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교육과 사회적인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정치에 완전히 관심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일본 정치와 국제관계에 대해 의견을 발표했으며, 여러 정치인들과 관계를 유지했다.
1914년에는 다시 총리로 취임하면서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1907년에 정계에서 물러났는데 7년 뒤 76세의 나이로 다시 총리가 된 것이다.
제2차 오쿠마 내각
1914년 4월 16일 오쿠마는 일본 제17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취임 당시 76세로,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고령의 총리였다.
제2차 오쿠마 내각은 1916년 10월 9일까지 약 2년 6개월 동안 유지되었다.
총 재임일수는 908일이었다.[14]
첫 번째 총리 재임기간이 132일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훨씬 길었다.
정권 출범의 배경
1914년 당시 일본에서는 정부의 부패와 군사비 지출 등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발생하고 있었다.
특히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은 해군의 군함 발주와 관련된 부패 사건인 지멘스 사건의 여파로 총사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쿠마가 새로운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의회정치와 정치개혁을 주장해 온 인물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오쿠마 내각 역시 정당과 원로 정치인, 군부의 이해관계 사이에서 여러 갈등을 겪었다.
특히 일본의 대외 팽창과 군사력 강화, 의회와 정당정치의 관계 등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일동맹에 따라 협상국 측에 가담했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독일 제국이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가지고 있던 식민지와 조차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쿠마 내각은 독일에 최후통첩을 보낸 뒤 1914년 8월 23일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이후 일본군은 중국 산둥반도의 칭다오를 공격했으며, 독일이 점유하던 태평양의 일부 섬들도 점령했다.
일본의 참전은 영일동맹에 따른 군사적 협력이라는 측면이 있었지만, 동시에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당시 유럽의 주요 열강들이 전쟁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군사적인 활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중국과 서양 국가들 사이에 새로운 갈등을 발생시켰다.
일본 외무성의 역사자료에서도 오쿠마 내각의 참전 결정과 외무대신 가토 다카아키의 외교정책을 당시 일본의 대외 팽창과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15]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
오쿠마의 두 번째 총리 재임기간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사건 가운데 하나가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다.
1915년 1월 18일 일본 정부는 위안스카이가 이끌던 중화민국 정부에 21개 조항으로 구성된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이 요구는 일본이 중국에서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특히 산둥반도의 독일 이권과 남만주 지역의 일본 권익, 중국 내의 산업시설 등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또한 일본인 고문을 중국 정부에 배치하거나 중국의 경찰과 군사 분야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내용도 존재했다.
이러한 요구들은 크게 다섯 개의 집단으로 구분되었다.
| 구분 | 주요 내용 |
|---|---|
| 제1호 | 산둥반도의 독일 권익과 관련된 일본의 요구를 중국이 인정 |
| 제2호 | 남만주와 동부 내몽골 지역의 일본 권익 확대 |
| 제3호 | 한야핑 제철회사 등 중국의 산업시설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 확대 |
| 제4호 | 중국 연안과 도서 지역의 권익을 다른 외국에 양도하지 못하도록 제한 |
| 제5호 | 일본인 고문과 경찰·군사 분야 등 중국의 내정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 확대 |
특히 제5호는 중국의 정치적 주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로 평가되었다.
일본 정부는 중국에 요구사항을 비밀로 유지하도록 압박했지만, 요구 내용이 알려지면서 중국 내부의 반일 여론과 국제사회의 반발이 확대되었다.
미국과 영국 등도 일본의 요구에 우려를 표명했다.
일본은 결국 제5호에 해당하는 주요 요구를 철회하거나 유보했으며, 1915년 5월 중국에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이후 중국 정부는 수정된 요구를 수용했고, 같은 달 관련 조약과 교환공문이 체결되었다.[16]
이 사건은 일본의 대외 팽창이 중국의 주권과 국제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또한 이후 중국에서 반일 민족주의가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오쿠마의 책임
21개조 요구는 오쿠마가 총리로 재임하던 시기에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추진한 외교정책이었다.
구체적인 협상과 요구사항의 작성에서는 외무대신이었던 가토 다카아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정책이 오쿠마 내각의 이름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총리였던 오쿠마 역시 정치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오쿠마의 업적을 설명하면서 이 사건을 제외하고 의회정치 발전과 교육사업만 강조하는 것은 균형 잡힌 역사적 평가라고 보기 어렵다.
특히 한국과 중국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근대화와 의회정치의 발전이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침략과 지배 확대와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자국에서는 입헌정치와 의회민주주의를 발전시키자고 주장하면서 다른 나라에는 정치적 주권을 제한하는 요구를 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모순이 존재한다.
다만 21개조 요구가 오늘날 알려진 그대로 전부 수용되어 중국이 일본의 완전한 보호국이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 역시 부정확하다.
중국 정부와 국제사회의 반발로 일부 요구가 수정되거나 철회되었기 때문이다.
1915년 총선거와 정치 스캔들
오쿠마 내각은 국내 정치에서도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특히 군비 확대와 예산 문제 등을 둘러싸고 의회와 충돌했다.
1914년 말에는 의회가 해산되었으며, 1915년 3월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오쿠마 내각을 지지하던 정치세력들이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선거 과정에서 정부의 개입과 매수 의혹 등이 제기되었다.
특히 내무대신이었던 오우라 가네타케가 정치적인 매수 사건에 연루되면서 큰 논란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일반적으로 오우라 사건(大浦事件)이라고 불린다.
결국 오우라가 사임했으며, 오쿠마 내각도 개편을 겪었다.
이러한 사건은 오쿠마가 정당정치를 발전시키려 했던 인물이면서도 실제 집권 과정에서는 기존 일본 정치의 부패와 권력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총리직 사임
1916년 오쿠마는 건강과 후계자 선정 문제 등을 둘러싸고 총리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특히 자신이 후임 총리로 기대했던 가토 다카아키와 당시 원로 정치인들 사이에 정치적인 갈등이 존재했다.
결국 오쿠마가 희망했던 방향으로 정권이 승계되지는 않았다.
1916년 10월 9일 오쿠마 내각이 총사퇴했으며, 이후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총리에 취임했다.
이로써 오쿠마의 두 번째 총리 재임도 종료되었다.
오쿠마는 두 차례의 총리 재임기간을 합쳐 총 1,040일 동안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으로 활동했다.
조선과의 관계
오쿠마가 두 번째 총리로 재임한 1914~1916년은 이미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던 시기였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한국은 일제강점기에 들어갔으며, 조선총독부를 통한 식민지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오쿠마가 1914년 총리로 취임했을 당시 일본은 이미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다.
다만 1910년 한일병합 자체는 오쿠마의 총리 재임기간에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다.
당시 일본의 총리는 가쓰라 다로였다.
따라서 오쿠마를 1910년 한일병합을 직접 추진한 총리라고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서술이다.
그러나 오쿠마의 제2차 내각도 일본 제국의 식민지 지배 체제를 유지한 정부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특히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는 일본의 동아시아 팽창정책이 계속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따라서 오쿠마를 일본 내부의 정치개혁가이자 교육자로 평가하는 것과 일본 제국주의의 정책을 추진한 총리로 평가하는 것은 서로 배타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는 일본의 의회정치 발전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제국주의 국가의 정치지도자로 활동했다.
정치사상
영국식 의회정치
오쿠마의 정치사상에서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영국식 의회정치에 대한 관심이었다.
특히 정당이 의회에서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고 그 정당을 중심으로 정부가 구성되는 방식을 지향했다.
당시 일본의 정치체제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입헌군주제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실제 정치 운영에서는 기존의 원로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쿠마는 이러한 정치구조를 개혁하고 정당의 역할을 확대하려고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토 히로부미 등 다른 정치지도자들과 충돌했다.
그러나 오쿠마가 오늘날의 보통선거와 대중민주주의를 완전히 실현하려 했던 정치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의 의회정치는 재산과 납세 조건에 따라 선거권이 제한된 제도를 바탕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와의 차이
오쿠마와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중요한 정치인이었으며, 정치제도의 발전 방향을 둘러싸고 여러 차례 대립했다.
특히 헌법과 의회제도를 어떤 방식으로 도입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차이가 있었다.
| 구분 | 오쿠마 시게노부 | 이토 히로부미 |
|---|---|---|
| 주요 정치적 기반 | 사가번 출신, 입헌개진당 등 정당세력 | 조슈번 출신, 메이지 정부의 관료 및 원로 정치세력 |
| 선호한 정치제도 | 영국식 의회정치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제도 | 프로이센·독일식 입헌군주제의 영향을 받은 제도 |
| 의회에 대한 태도 | 정당과 의회의 정치적 역할 확대 | 천황과 정부의 권한, 의회와의 관계를 조정 |
| 주요 정치적 갈등 | 1881년 정변에서 실각 | 메이지 헌법 제정의 중심적 역할 |
| 교육 관련 업적 | 와세다대학 설립 | 일본의 근대적인 국가·행정제도 발전에 관여 |
물론 두 인물의 정치사상을 단순히 민주주의자와 독재주의자로 구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토 역시 헌법과 의회제도의 도입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오쿠마 역시 천황제와 일본 제국의 국가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차이는 근대적인 일본 국가를 어떤 정치제도를 통해 운영할 것인가에 관한 입장의 차이에 더 가깝다.
흥미로운 점은 오쿠마와 이토가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대립했지만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교류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1902년 도쿄전문학교가 와세다대학으로 개칭했을 때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학교의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전달하기도 했다.[17]
정치적으로는 오랫동안 싸우던 사이였지만 정작 상대방이 세운 대학교의 개교 기념행사에는 참석했던 것이다.
대중 정치와 연설
오쿠마는 대중을 대상으로 한 연설과 정치적인 의사소통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정당을 운영하면서 국민과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정책을 설명하고 지지를 확보하려고 했다.
이러한 태도는 기존의 원로 정치인들이 비공개적인 협의와 관료조직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문제를 결정하던 방식과 비교된다.
특히 1914년 이후에는 총리로서 적극적으로 선거운동과 정책 홍보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적인 정치활동이 항상 공정하고 투명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1915년 총선거에서 발생한 정부의 개입과 정치적 매수 사건은 오쿠마 내각의 한계를 보여준다.
교육관
학문의 독립
오쿠마는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독립적인 학문과 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정부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지나치게 종속된 교육만으로는 새로운 사상과 지식을 발전시키기 어렵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와세다대학의 건학이념인 학문의 독립과 연결된다.
그러나 학문의 독립이라는 개념이 정치와 사회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독립적인 학문을 통해 사회와 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학문의 활용
오쿠마는 학문이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특히 정치와 경제, 법률과 과학기술 등 실제 사회에서 활용할 수 있는 지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와세다대학이 설립 초기부터 정치경제와 법률 등 사회적인 활동과 관련된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그는 과학기술 분야의 교육을 확대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졌다.
1907년에는 와세다대학의 이공계 교육 발전에 관한 구상을 발표했으며, 이후 대학에서는 이공계 교육과정의 확대가 추진되었다.[18]
이러한 점에서 오쿠마의 교육관은 정치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것뿐 아니라 근대적인 산업과 사회에 필요한 전문적인 지식을 발전시키는 문제와도 연결된다.
사망과 국민장
오쿠마는 1922년 1월 10일 도쿄에서 사망했다.
향년 83세였다.
사망 당시 그는 오랫동안 일본의 정치와 교육 분야에서 활동했던 원로 인물이었다.
특히 일본의 총리를 두 차례 역임했으며, 와세다대학의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영향력이 컸다.
대규모 장례식
오쿠마의 장례식은 1922년 1월 17일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 진행되었다.
특히 일반 시민들도 참여할 수 있는 국민장(国民葬)의 형식으로 치러졌다.
와세다대학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장례식에는 약 20만~30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와세다대학과 관계 학교의 학생 등 약 2만 명이 행렬을 이루어 장례식에 참여했다.[1]
이는 당시 오쿠마가 가지고 있던 대중적인 인지도와 사회적인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다만 이 국민장을 국가가 주관하는 국장과 동일한 행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특히 국민장은 일반 시민과 사회단체 등이 참여하여 고인을 추모하는 행사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정계에서 여러 차례 쫓겨나고 폭탄 테러까지 당했던 정치인이 죽을 때에는 수십만 명이 장례식에 모여든 것이다.
평가
일본 의회정치의 발전
오쿠마는 일본의 입헌정치와 정당정치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1881년 정변 이후에도 정치적인 활동을 계속하면서 입헌개진당을 창당했고, 의회의 역할 확대를 주장했다.
또한 1898년에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내각을 구성했다.
물론 이 내각은 불과 132일 만에 붕괴했지만, 기존의 관료와 원로 중심적인 정치구조에서 정당 중심의 정치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만 오쿠마의 정치적인 성과가 일본의 민주주의를 완성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제한적인 선거제도와 천황의 강한 권한, 군부와 원로 정치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계속 존재했다.
재정과 통계행정의 근대화
오쿠마는 일본의 재정과 통계제도를 정비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특히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중앙집권적인 재정제도와 근대적인 행정체계를 구축해야 했다.
오쿠마는 재정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이러한 개혁에 참여했다.
또한 통계자료를 활용하여 국가의 상황과 정책 효과를 평가해야 한다는 관점을 강조했다.
1881년 통계원의 설립과 1898년 통계행정조직의 정비는 이러한 활동의 중요한 사례다.
그러나 당시 재정과 통계제도의 발전을 오쿠마 개인의 업적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실제로는 여러 정치인과 관료, 통계 전문가들이 제도 정비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특히 스기 고지 등 당시의 통계 전문가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와세다대학의 설립
오쿠마가 남긴 가장 지속적인 유산 가운데 하나는 와세다대학이다.
1882년 설립된 도쿄전문학교는 이후 일본의 주요 사립대학으로 성장했다.
오쿠마는 대학의 정치적 독립성과 실용적인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대학의 실제 설립과 운영에는 오노 아즈사와 다카타 사나에 등 여러 인물들의 기여도 존재했다.
따라서 와세다대학의 발전을 오쿠마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
오쿠마의 역사적 평가에서 중요한 비판 대상은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대외정책이다.
특히 1914년 제2차 내각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또한 1915년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를 추진했다.
이 정책은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려는 시도로 평가되며, 국제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따라서 오쿠마가 일본 내부에서 의회정치와 정치개혁을 추진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모든 정치적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일본 내부의 정치적 근대화와 대외적인 제국주의 팽창이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국민들에게는 더 많은 정치적인 참여를 주장하면서 중국에 대해서는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연표
| 연도 | 사건 |
|---|---|
| 1838 | 사가번에서 출생 |
| 1865 | 나가사키에서 치엔칸 설립에 참여 |
| 1868 | 메이지 신정부에 참여 |
| 1870 | 참의 취임 |
| 1873 | 대장경 취임 |
| 1881 | 통계원 설치를 제안하고 초대 통계원장에 취임 |
| 1881 | 메이지 14년 정변으로 정부에서 실각 |
| 1882 | 입헌개진당 창당 |
| 1882 | 도쿄전문학교 설립 |
| 1888 | 외무대신 취임 |
| 1889 | 폭탄 테러로 오른쪽 다리 절단 |
| 1896 | 외무대신 재취임 |
| 1898 | 헌정당 결성 |
| 1898 | 제8대 내각총리대신 취임 |
| 1898 | 제1차 오쿠마 내각 총사퇴 |
| 1902 | 도쿄전문학교가 와세다대학으로 개칭 |
| 1907 | 와세다대학 초대 총장 취임 |
| 1914 | 제17대 내각총리대신 취임 |
| 1914 | 일본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
| 1915 |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 |
| 1916 | 제2차 오쿠마 내각 총사퇴 |
| 1922 | 도쿄에서 사망 |
| 1922 | 히비야 공원에서 국민장 진행 |
여담
- 오쿠마 시게노부는 사가번 출신의 정치인이다. 당시 메이지 정부의 중심을 이루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의 정치인들과는 다른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 1838년생으로 이토 히로부미보다 세 살 많다.
- 일본의 전통적인 달력에 따르면 1838년 2월 16일에 태어났으며, 양력으로 환산하면 1838년 3월 11일이다. 따라서 자료에 따라 출생일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 어린 시절에는 유교 중심의 전통적인 교육보다 서양의 정치와 과학, 경제제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 미국 출신 선교사이자 교육자였던 귀도 베어벡에게 영향을 받았다.
-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외교와 재정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일본의 근대적인 통계제도를 정비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특히 1881년 통계원 설치를 제안하고 직접 초대 통계원장을 맡았다.
- 오쿠마는 정부가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통계자료를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인들이 국가를 운영하려면 먼저 숫자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 1881년 정변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다른 정부 지도자들과 대립하다가 정부에서 축출되었다.
- 이후 1882년 입헌개진당을 창당하면서 본격적인 정당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 같은 해 와세다대학의 전신인 도쿄전문학교를 설립했다. 1881년 정변이 오히려 대학 설립을 앞당긴 계기가 된 셈이다.
- 와세다대학에서는 오쿠마를 건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오노 아즈사는 건학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 도쿄전문학교는 설립 초기 정부에 비판적인 정치세력과 관련된 학교라는 이유로 부정적인 시선을 받기도 했다.
- 학교 설립 당시 오쿠마는 직접적인 학교 운영보다 재정적·정치적인 지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도쿄전문학교가 와세다대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02년이다.
- 1907년에는 와세다대학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다만 당시 실질적인 대학 운영은 학장이었던 다카타 사나에 등이 담당했다.
- 1889년에는 외무대신으로서 불평등조약 개정을 추진하던 중 겐요샤 소속의 구루시마 쓰네키에게 폭탄 테러를 당했다.
- 이 사건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 1898년에는 60세의 나이로 처음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내각은 약 4개월 만에 붕괴했다.
- 제1차 오쿠마 내각은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내각으로 평가된다.
-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협력하여 내각을 구성했기 때문에 와이한 내각이라는 별칭도 있다.
- 1907년에는 정당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정치에 완전히 관심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 1914년에는 76세의 나이로 다시 총리가 되었다.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고령이었다.
- 제2차 오쿠마 내각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참전을 결정했다.
- 1915년에는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를 추진했다. 특히 중국의 내정과 경제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요구하면서 국제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 오쿠마가 1914년에 총리로 취임했을 때 조선은 이미 일본의 식민지였다. 따라서 1910년 한일병합을 오쿠마가 총리로서 직접 추진한 사건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 오쿠마는 의회정치 발전에 기여한 정치인이었지만 제국주의적인 대외정책에도 관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평가가 복잡하다.
- 1916년 78세의 나이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 두 차례 총리 재임기간을 합치면 총 1,040일 동안 내각총리대신으로 활동했다.
- 한 번은 정당끼리 싸워서 넉 달 만에 물러났고, 다른 한 번은 76세에 총리가 되어 세계대전까지 경험한 것이다.
- 오쿠마는 자신이 장수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인간이 생활습관과 정신적인 태도를 올바르게 유지하면 125세까지 살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 이러한 생각은 일본에서 인생 125세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19]
- 그러나 실제로 오쿠마는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25세까지 살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본인은 그보다 42년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다.
- 흥미롭게도 와세다대학에서는 125라는 숫자가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된다.
- 1927년 완공된 오쿠마 기념강당의 시계탑은 높이가 125척, 약 38m로 설계되었다. 오쿠마가 주장한 인생 125세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 오쿠마 기념강당은 오쿠마가 사망한 뒤 건립되었으므로 생전에 직접 완공된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 기념강당은 이후 와세다대학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축물이 되었다.
- 1922년 사망했을 때에는 국민장이 진행되었다. 당시 장례식에는 약 20만~30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 오쿠마는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시절 여러 차례 논쟁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사망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상당히 높은 인지도를 가진 원로였다.
- 와세다대학의 교내에는 오쿠마의 동상이 있다. 특히 학사복을 입은 모습의 동상이 널리 알려져 있다.
- 오늘날 와세다대학을 방문하면 오쿠마의 이름을 딴 강당과 정원 등 여러 시설을 찾아볼 수 있다.
- 와세다대학의 상징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비교되기도 한다.
- 후쿠자와 유키치는 게이오기주쿠대학의 설립자로 유명하며, 오쿠마는 와세다대학의 설립자로 유명하다.
- 두 사람 모두 서양 학문과 근대적인 교육에 관심을 가졌지만 정치활동의 방식과 인생의 경로에는 차이가 있었다.
- 일본의 유명한 대학 스포츠 라이벌 관계인 소케이센은 와세다대학과 게이오기주쿠대학 사이의 경기다. 두 학교의 설립자들이 각각 오쿠마와 후쿠자와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 오쿠마는 학교를 설립한 정치인이었지만 오늘날 와세다대학이 그의 모든 정치적 견해를 계승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 특히 21개조 요구와 같은 제국주의적인 대외정책은 당시 오쿠마 내각의 행위로 별도로 평가해야 한다.
- 오쿠마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한 개인의 경력이 일본의 근대화와 의회정치, 교육제도의 발전, 제국주의 팽창이라는 여러 역사적 흐름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 일본의 근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서에서는 오쿠마가 추진한 정치개혁과 교육사업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 반면 동아시아 국제관계와 제국주의의 관점에서는 1915년 21개조 요구 등 일본의 팽창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도 중요하다.
- 자국 내부에서는 의회와 정당의 권한을 확대하자고 주장했던 정치인이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는 사실은 근대 일본의 역사적인 모순을 보여준다.
- 그럼에도 오쿠마가 일본의 정치제도와 교육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다.
- 특히 와세다대학은 오쿠마 사망 이후에도 계속 발전하여 일본의 주요 사립대학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 오쿠마 자신은 1922년에 사망했지만 그가 설립한 대학은 1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그의 이름을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 정치인으로서의 내각은 두 번 모두 끝났지만, 자신이 세운 대학은 그가 죽은 지 100년이 넘도록 남아 있는 것이다.
관련 문서
- 메이지 유신
- 메이지 시대
- 다이쇼 시대
- 일본 제국
- 일본 내각총리대신
- 이토 히로부미
- 이타가키 다이스케
- 야마가타 아리토모
- 구로다 기요타카
- 가쓰라 다로
- 데라우치 마사타케
- 오쿠보 도시미치
- 후쿠자와 유키치
- 오노 아즈사
- 다카타 사나에
- 오자키 유키오
- 이누카이 쓰요시
- 가토 다카아키
- 귀도 베어벡
- 와세다대학
- 게이오기주쿠대학
- 오쿠마 기념강당
- 사가번
- 자유민권운동
- 입헌개진당
- 헌정당
- 메이지 14년 정변
- 메이지 헌법
- 일본 제국의회
- 입헌군주제
- 의원내각제
- 정당정치
- 불평등조약
- 겐요샤
- 제1차 세계 대전
- 영일동맹
- 21개조 요구
- 위안스카이
- 일제강점기
- 조선총독부
- 통계학
- 증거기반 정책
- 일본의 통계제도
각주
- ↑ 1.0 1.1 와세다대학 - 오쿠마 시게노부 사후 100주년 기획, 제3회
-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 오쿠마 시게노부
- ↑ 와세다대학 - 3월 11일은 오쿠마 시게노부의 생일
- ↑ 일본 국제어린이도서관 - 오쿠마 시게노부의 생애
-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 오쿠마 시게노부
- ↑ 일본 총무성 통계국 - 오쿠마 시게노부와 일본 통계제도의 발전
-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 메이지 14년 정변
- ↑ 와세다대학 - 대학의 역사
- ↑ 와세다대학 - 오쿠마 시게노부와 오노 아즈사
- ↑ 와세다대학 - 연혁
- ↑ 와세다대학 - 초대 총장 오쿠마 시게노부
- ↑ 일본 국립공문서관 - 1889년 오쿠마 외무대신 폭탄 테러 사건
- ↑ 일본 총리관저 - 제8대 총리 오쿠마 시게노부
- ↑ 일본 총리관저 - 제17대 총리 오쿠마 시게노부
- ↑ 일본 외무성 - 제1차 세계 대전과 일본 외교
- ↑ 미국 외교협회 - China, Japan, and the Twenty-One Demands
- ↑ 와세다대학 - 기부와 대학 발전의 역사
- ↑ 와세다대학 - 오쿠마의 교육철학과 이공계 교육
- ↑ 와세다대학 - 오쿠마 시게노부의 인생 125세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