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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는 일본 총리관저의 역대 내각총리대신 분류를 따른다. 동일 인물이 여러 차례 연속 내각을 구성한 경우 하나의 칸에 묶어 표기하였다.
개요
가쓰라 다로(桂 太郎, 1848년 1월 4일 ~ 1913년 10월 10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일본의 제11·13·15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으며,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당사자로 한국에 잘 알려진 인물이다.
조슈번 출신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육군의 근대화에 참여했으며, 청일전쟁에 종군하고 대만총독과 육군대신을 역임했다. 이후 일본의 총리로 세 차례 재임하면서 영일동맹, 러일전쟁, 을사늑약, 한일병합 등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크게 변화시킨 사건들에 관여했다.
특히 가쓰라가 총리였던 1905년 7월 27일, 미국의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가진 비밀 회담에서는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 확대를 사실상 상호 양해하는 내용이 논의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한국에서 흔히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고 불리는 외교적 합의다.
다만 엄밀하게 말하면 두 사람이 정식으로 서명하고 비준한 조약은 아니었다. 회담 내용을 정리한 합의 비망록이었으며, 이후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그 내용에 동의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외교적 의미를 가진다.
가쓰라는 이러한 외교적 환경을 활용하여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후 두 번째 총리 재임기간인 1910년에는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었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미국과 필리핀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남의 나라의 외교권을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고, 몇 년 뒤에는 그 나라를 아예 병합한 정부의 총리였던 것이다.
한편 일본 국내에서는 오랫동안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총리로 평가된다. 그는 1901년부터 1913년까지 사이온지 긴모치와 번갈아 정권을 담당하면서 일본의 정치를 주도했다.
이 시기는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게이엔 시대(桂園時代)라고 부른다.
가쓰라는 총 세 차례에 걸쳐 2,886일 동안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으로 재임했다. 이는 일본 역사에서 아베 신조에게 추월당하기 전까지 가장 긴 총리 재임기간이었다.[1]
또한 총리 재임 중 청나라와 러시아, 영국과 미국 등 여러 열강을 상대로 외교정책을 추진했으며, 국내에서는 육군과 관료조직을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1912년 세 번째로 총리에 취임했을 때에는 정당과 의회의 반발에 직면했다. 특히 제1차 헌정옹호운동이 확대되면서 불과 62일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10월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정치인생도 끝났다.
가쓰라 다로 Katsura Tarō | |
| 생년월일 | 1848년 1월 4일 |
|---|---|
| 국적 | 일본 제국 |
| 출생지 | 에도 막부 나가토국 조슈번 하기 (현 야마구치현 하기시) |
| 직업 | 군인, 정치인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이름과 생년월일
가쓰라의 이름은 일본어로 桂 太郎라고 쓴다.
성인 桂는 일본어로 가쓰라(かつら), 이름인 太郎는 다로(たろう)라고 읽는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가쓰라 다로라고 표기한다.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계태랑(桂太郎)이다.
특히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관련된 한국의 오래된 역사자료에서는 계태랑이라는 한자식 이름이 등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계태랑과 가쓰라 다로는 같은 인물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출생일은 양력으로 1848년 1월 4일이다.
그러나 일본 총리관저를 비롯한 일부 일본 자료에서는 1847년 11월 28일로 표기한다.
이는 당시 일본에서 사용하던 구력과 현대의 양력 사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 구력: 1847년 11월 28일
- 양력: 1848년 1월 4일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서는 양력 기준인 1848년 1월 4일을 출생일로 사용한다.[2]
따라서 자료마다 출생연도가 다르다고 해서 반드시 서로 다른 인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생애
조슈번 출신의 무사
가쓰라는 오늘날 야마구치현 하기시에 해당하는 조슈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슈번의 무사 집안이었다.
당시 일본은 에도 막부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여러 번들이 각자의 영지를 통치하는 봉건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서양 열강의 진출과 일본 내부의 정치적 변화로 막부의 통치체제는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조슈번은 사쓰마번과 함께 막부에 반대하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조슈번 출신 인물로는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있다.
가쓰라 역시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군사적인 활동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후 막부에 반대하는 전쟁에 참여했다.
보신전쟁
1868년 일본에서는 막부를 지지하는 세력과 신정부를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 보신전쟁이 발생했다.
가쓰라는 조슈번 출신 무사로서 신정부 측에 참여했다.
이 전쟁에서 신정부는 막부를 지지하던 세력을 제압했으며, 이후 메이지 정부가 일본의 중앙정부로 자리 잡았다.
가쓰라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았다.
특히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기존의 무사 중심 군사조직을 개편하고 서양식 근대 군대를 건설하려고 했다.
가쓰라는 이러한 군제 개혁에 참여하면서 군사관료로 성장했다.
독일 유학
1870년 가쓰라는 군사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서양의 여러 국가 가운데 특히 프로이센의 군사제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센은 강력한 육군과 근대적인 군사행정제도를 발전시킨 국가였으며, 1871년에는 독일 제국의 성립을 주도했다.
일본은 이러한 군사제도를 참고하여 자신의 육군을 발전시키려고 했다.
가쓰라는 독일의 군사제도와 조직 운영방식 등을 공부했다.
1875년에는 독일 주재 일본 공사관의 무관으로 임명되어 다시 유럽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이 기간에 독일의 군사행정과 장교 교육, 군대의 조직 등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1878년 일본으로 귀국한 뒤에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지휘 아래 육군의 제도 개혁에 참여했다.[2]
이러한 경험은 가쓰라가 단순한 전투 지휘관을 넘어 군사행정 전문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와의 관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가쓰라의 정치적·군사적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다.
두 사람 모두 조슈번 출신이었으며, 일본 육군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야마가타는 일본의 근대 육군과 징병제도, 군사행정체제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가쓰라는 야마가타의 휘하에서 활동하면서 육군 내부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1886년에는 육군차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육군의 고위 지휘관과 군사행정 책임자로 활동했다.
특히 육군 내부의 인사와 조직 운영에 관한 경험을 쌓으면서 정치적인 영향력도 커졌다.
가쓰라는 일반적으로 야마가타 계열의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후에는 자신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야마가타와도 이해관계가 충돌하기도 했다.
청일전쟁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가쓰라는 일본 육군 제3사단장으로 참전했다.
당시 일본은 청나라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고 있었다.
특히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양국의 긴장이 높아졌다.
이후 전쟁이 발생하자 일본군은 조선과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진행했다.
가쓰라는 제3사단을 지휘하면서 중국의 랴오둥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작전에 참여했다.
특히 하이청(海城) 일대에서는 러시아가 아니라 청나라 군대를 상대로 작전을 수행했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으며,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명목으로 종래의 종주권을 포기했고, 대만 등을 일본에 할양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후 조선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영향력을 더욱 확대했다.
가쓰라는 청일전쟁에서의 군사적 성과를 바탕으로 육군 내에서 더욱 중요한 지위를 확보했다.
대만총독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대만을 식민지로 획득했다.
그러나 대만에서는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저항이 계속되었다.
일본 정부는 대만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사적·행정적인 통치를 강화했다.
가쓰라는 1896년 6월 제2대 대만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는 약 4개월 동안 총독으로 재임했으며, 이후 일본으로 돌아왔다.
재임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일본이 새롭게 획득한 식민지를 통치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대만총독으로 활동한 경험은 이후 일본의 대외 팽창정책을 추진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다만 그가 대만의 모든 식민지 정책을 직접 수립하거나 장기간 통치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육군대신
1898년 가쓰라는 이토 히로부미의 제3차 내각에서 육군대신에 취임했다.
이후 오쿠마 시게노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등의 내각에서도 육군대신을 역임했다.
당시 일본에서 육군대신은 단순히 군사행정을 담당하는 장관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가진 자리였다.
특히 육군은 국가의 정치적인 의사결정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군사정책과 예산 문제를 둘러싸고 정부와 의회에 압력을 가할 수 있었다.
가쓰라는 이러한 상황에서 육군의 대표적인 정치인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특히 군사제도와 행정에 관한 전문성과 조슈번 출신 원로 정치인들과의 관계를 활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했다.
1901년에는 마침내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제1차 가쓰라 내각
1901년 6월 2일 가쓰라는 일본 제11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당시 53세였다.
제1차 가쓰라 내각은 1906년 1월 7일까지 유지되었으며, 총 재임기간은 1,681일이었다.
가쓰라가 세 차례 총리를 역임한 가운데 가장 긴 내각이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일본의 국제적인 지위를 크게 변화시킨 여러 사건이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1902년 영일동맹의 체결, 1904년 러일전쟁 발발,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을사늑약 등이 있다.
영일동맹
1902년 1월 30일 일본은 영국과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당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 제국의 세력 확대를 중요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에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으며, 일본 역시 같은 지역에서 자국의 이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가쓰라 내각은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했다.
당시 외무대신은 고무라 주타로였다.
영국 역시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특히 영일동맹은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중요한 외교적 기반이 되었다.
일본 국립공문서관은 가쓰라 내각이 이토 히로부미의 대러시아 타협론보다 영국과의 동맹을 선택한 점을 중요한 정책적 특징으로 설명한다.[3]
물론 영일동맹이 영국과 일본이 모든 상황에서 반드시 함께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구체적인 군사적 의무는 조약에서 규정한 조건에 따라 달라졌다.
그러나 영국이라는 강대국과 동맹을 체결했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의 외교적인 지위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러일전쟁
1904년 2월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두 나라는 만주와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청일전쟁 이후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일본은 이를 자국의 안보와 대외정책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가쓰라 내각은 러시아와의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전쟁을 선택했다.
일본군은 뤼순과 만주 지역에서 러시아군과 교전했으며, 1905년에는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트함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일본의 승리가 반드시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충분한 경제적·군사적 여유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역시 장기간의 전쟁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재정적 부담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가쓰라 내각은 외교적인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1905년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중재 아래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강화회담이 진행되었다.
이후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적·군사적·경제적으로 우월한 이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4]
일본은 이를 근거로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강화했다.
그러나 한국의 입장에서는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의 동의 없이 한국의 국제적인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내용을 합의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전쟁 이후의 사회적 불만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지만 일본 국내에서는 강화조약에 대한 불만이 발생했다.
특히 일본 국민들 가운데는 막대한 전쟁비용과 인명피해를 감수했음에도 러시아로부터 배상금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러시아의 영토를 더 많이 획득해야 한다는 주장도 존재했다.
1905년 9월에는 히비야 공원에서 강화조약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시위가 격화되면서 도쿄의 여러 지역에서 폭력적인 충돌과 방화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일반적으로 히비야 방화 사건(日比谷焼打事件)이라고 불린다.
가쓰라 내각은 경찰과 군대 등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불만은 가쓰라 내각의 정치적인 기반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1906년 1월 가쓰라는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며, 사이온지 긴모치가 새로운 총리가 되었다.
러시아와 전쟁해서 승리한 총리였지만 정작 전쟁을 끝낸 강화조약 때문에 국내에서 큰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가쓰라 다로가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유다.
1905년 7월 27일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비밀리에 만나 동아시아 문제를 논의한 사건이다.
특히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 문제를 서로 양해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인 만큼 실제 문서의 내용과 흔히 알려진 설명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회담의 배경
1905년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우세한 상황에 있었다.
특히 5월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러시아 발트함대를 격파하면서 일본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전쟁에 막대한 비용을 사용했으며, 장기간 전쟁을 계속할 여력도 제한적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강화회담을 중재하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상태였다.
당시 필리핀에서는 미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이 발생했으며, 미국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식민지 통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필리핀까지 위협받는 상황을 경계했다.
반면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용인받으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프트가 아시아를 방문했다.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년 ~ 1930년)는 미국의 정치인이자 법률가다.
이후 미국 제27대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러나 1905년 가쓰라를 만났을 당시에는 미국 대통령이 아니었다.
당시 태프트의 직책은 육군장관(Secretary of War)이었다.
미국의 현대적인 국방장관(Secretary of Defense)과는 역사적으로 다른 직책이다.
특히 당시 미국에는 오늘날의 국방부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육군부와 해군부 등이 별도로 운영되고 있었다.
따라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설명할 때 1905년의 태프트를 미국 대통령이라고 부르면 잘못된 설명이 된다.
태프트가 미국 대통령이 된 것은 1909년이었다.
1905년 7월 27일 회담
1905년 7월 25일 태프트는 필리핀으로 이동하는 도중 일본의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이틀 뒤인 7월 27일 오전 가쓰라와 비밀 회담을 진행했다.
회담에서는 크게 세 가지 문제가 논의되었다.
| 의제 | 주요 내용 |
|---|---|
| 필리핀 문제 | 일본은 미국이 지배하는 필리핀에 대해 침략할 의도가 없다고 밝혔다. |
| 동아시아 국제질서 | 가쓰라는 일본·미국·영국 사이의 상호 이해와 협력이 동아시아의 평화에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
| 대한제국 문제 | 가쓰라는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태프트는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전제 아래 일본의 보호권 확대를 지지했다. |
이 회담의 내용은 1905년 7월 29일 작성된 합의 비망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는 미국 측 외교기록에 남아 있으며, 한국의 우리역사넷에서도 원문의 주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5]
필리핀 문제
회담에서 태프트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미국이 지배하는 필리핀을 공격할 가능성에 대한 미국 내 우려를 언급했다.
특히 일본이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미국의 필리핀 지배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이 존재했다.
그러나 가쓰라는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침략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또한 필리핀이 미국처럼 강력하면서도 일본에 우호적인 국가의 지배를 받는 것이 일본에도 유리하다는 태프트의 견해에 동의했다.
이는 미국이 필리핀을 계속 지배하는 상황을 일본이 문제 삼지 않겠다는 외교적 의사를 나타낸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이 내용만으로 일본과 미국 사이에 새로운 공식적인 영토양도 조약이 체결되었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필리핀은 이미 미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문제
가쓰라가 회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문제 가운데 하나는 대한제국이었다.
가쓰라는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대한제국을 둘러싼 국제적 갈등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전쟁이 끝난 뒤 대한제국이 다시 다른 열강과 외교적인 관계를 맺으면 일본의 안보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일본은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대한제국에 대한 확실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실질적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제한하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구상이었다.
태프트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했다.
특히 일본군의 힘을 바탕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 다른 나라와 외교조약을 체결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도의 종주권을 확립하는 것은 러일전쟁의 논리적인 결과이며 동아시아의 평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있다.
태프트는 이것이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미국 정부를 대표하여 공식적인 보장을 할 권한은 없다고 명시했다.
그럼에도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자신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라고 판단했다.[5]
이러한 내용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당시 대한제국은 엄연히 독립된 국가였지만, 일본과 미국의 고위 정치인들은 대한제국의 대표자를 참여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의 외교권과 지배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운명이 걸린 문제인데 정작 대한제국 사람은 회담 자리에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미국·영국·일본의 관계
가쓰라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 일본 사이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일본은 이미 영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영일동맹은 일본이 러시아에 대응하는 데 중요한 외교적인 기반이었다.
가쓰라는 이러한 동맹관계에 미국도 일정한 형태로 참여하거나 상호 이해를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태프트는 미국 대통령이 의회의 동의 없이 새로운 동맹을 체결하는 데에는 헌법적인 제약이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따라서 세 나라 사이에 새로운 정식 군사동맹이 체결된 것은 아니었다.
7월 29일 비망록
가쓰라와 태프트의 회담은 1905년 7월 27일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회담 내용을 정리한 문서는 7월 29일 작성되었다.
이 문서의 영어 명칭은 일반적으로 Taft–Katsura Agreed Memorandum이다.
태프트는 이 문서를 미국 국무장관 엘리후 루트에게 전달했다.
문서에는 회담에서 논의한 필리핀과 대한제국,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관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었다.
미국 의회도서관이 보유한 원본 기록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문서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6]
따라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날짜를 표기할 때는 다음과 같이 구분하는 것이 정확하다.
- 1905년 7월 27일: 가쓰라와 태프트의 비밀 회담
- 1905년 7월 29일: 회담 내용을 정리한 합의 비망록 작성
- 1905년 7월 31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회담 내용에 대한 동의를 표시
일부 자료에서 7월 27일과 7월 29일이 모두 등장하는 이유는 이러한 차이 때문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반응
태프트가 보낸 비망록을 받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5년 7월 31일 답신을 보냈다.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가쓰라와 나눈 대화가 모든 면에서 옳았으며, 자신도 태프트의 발언을 확인한다는 취지의 답변을 전달했다.
이는 태프트가 개인적인 견해라는 전제를 붙였던 대한제국 문제에 대해서도 미국 대통령이 사실상 동의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후 미국 정부는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국화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미국 외교협회 역시 이 회담과 루스벨트의 답신이 일본의 한국 지배 구상에 대한 미국의 묵인을 보여주는 중요한 외교적 자료라고 설명한다.[7]
따라서 회담이 정식 조약이 아니었다고 해서 외교적 의미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정식 조약이었는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설명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국을 지배하기로 서로 약속한 비밀조약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설명은 당시의 외교적 이해관계를 간단하게 요약한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가쓰라와 태프트 사이에 정식으로 서명된 양국 간 조약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남아 있는 자료는 회담 내용을 정리한 비망록이다.
또한 태프트 자신이 대한제국 문제에 관하여 공식적인 보장을 할 권한이 없다고 밝혔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다만 이후 루스벨트 대통령이 회담 내용에 동의했다는 점에서 미국 정부의 외교적인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 흔한 설명 | 실제 역사적 내용 |
|---|---|
| 미국과 일본이 비밀조약을 체결했다. | 양국 고위 인사 사이에 비밀 회담이 있었으며, 그 내용을 합의 비망록으로 남겼다. 정식으로 서명·비준한 조약은 아니다. |
| 태프트는 미국 대통령이었다. | 당시에는 미국 육군장관이었다. 대통령이 된 것은 1909년이다. |
| 미국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다. | 태프트는 개인적인 견해로 일본의 보호권 확대를 지지했고,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후 그 발언에 동의했다. |
| 1905년에 한국을 일본에 병합하기로 했다. | 직접적인 논의의 핵심은 대한제국의 외교권 제한과 보호국화였다. 실제 한일병합은 1910년에 이루어졌다. |
| 이 문서 때문에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었다. | 일본의 한국 지배 확대에 유리한 외교적 환경을 형성했지만, 영일동맹과 러일전쟁, 포츠머스 조약, 일본의 군사적 강압 등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 |
1924년 미국 역사학자 타일러 데넷(Tyler Dennett)이 이 문서를 발견하여 공개하면서 사건이 널리 알려졌다.
데넷은 이를 미국과 일본 사이의 비밀협정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문서가 구속력 있는 협정인지, 단순한 외교적 의견 교환인지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다.
1959년에는 역사학자 레이먼드 에스더스(Raymond A. Esthus)가 데넷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우리역사넷 역시 이러한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8]
따라서 가장 정확한 설명은 정식 조약은 아니지만 미국과 일본이 동아시아의 지배권 문제에 관해 중요한 외교적 양해를 형성한 비밀 회담과 비망록이라는 것이다.
대한제국에 미친 영향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중요한 이유는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반대를 피할 수 있는 외교적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특히 같은 해에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이어졌다.
| 날짜 | 사건 |
|---|---|
| 1905년 7월 27일 | 가쓰라-태프트 비밀 회담 |
| 1905년 7월 29일 | 가쓰라-태프트 합의 비망록 작성 |
| 1905년 7월 31일 | 루스벨트 대통령의 동의 |
| 1905년 8월 12일 | 제2차 영일동맹 체결 |
| 1905년 9월 5일 | 포츠머스 조약 체결 |
| 1905년 11월 17일 | 을사늑약 강제 체결 |
특히 제2차 영일동맹에서는 영국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우월한 이익과 보호조치를 인정했다.
포츠머스 조약에서는 러시아가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한 권익을 인정했다.
따라서 일본은 미국과 영국, 러시아 등 주요 열강과의 외교적 관계를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적 고립을 심화시켰다.
물론 한국의 주권을 박탈할 권리를 이러한 외국 정부들이 정당하게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했다고 해서 한국의 주권을 박탈하는 행위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국제정치에서는 강대국 사이의 이해관계가 작은 국가의 주권보다 우선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가쓰라는 이러한 국제적인 환경을 일본의 대외 팽창정책에 활용했다.
을사늑약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을 강요했다.
이 사건은 가쓰라의 첫 번째 총리 재임기간에 발생했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하려고 했다.
특히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다.
일본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파견하여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했다.
이토는 일본군의 군사적 위협과 정치적 압력을 바탕으로 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결국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으며, 일본의 통감부 설치가 추진되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조선통감에 취임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있다.
을사늑약 당시 일본의 총리는 가쓰라 다로였지만, 실제로 대한제국에 파견되어 조약 체결을 강요한 대표적인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따라서 두 사람의 역할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가쓰라는 일본 정부의 최고 책임자로서 한국에 대한 보호국화 정책을 추진했으며, 이토는 현지에서 외교적·군사적 압박을 주도했다.
또한 을사늑약은 한국 황제의 동의 없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주권 침탈의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게이엔 시대
게이엔 시대(桂園時代)는 가쓰라 다로와 사이온지 긴모치가 번갈아 일본의 총리직을 담당했던 시기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1901년부터 1912년까지의 정치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이름은 가쓰라의 성 桂와 사이온지의 이름 園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지만 필요에 따라 협력하면서 정권을 운영했다.
가쓰라의 정치적 기반
가쓰라는 주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정치적 계열과 일본 육군, 관료조직, 귀족원 등을 중요한 정치적 기반으로 가지고 있었다.
특히 군사관료 출신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정당 정치인들과 차이가 있었다.
반면 사이온지는 입헌정우회(立憲政友会)를 이끌던 정당 정치인이었다.
입헌정우회는 일본의 제국의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부가 예산과 법률을 처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쓰라는 정당의 지원 없이 정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입헌정우회와 때로는 대립하면서도 때로는 타협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두 사람은 정권을 번갈아 담당할 수 있었다.
정권 교대
| 기간 | 총리 | 내각 |
|---|---|---|
| 1901~1906 | 가쓰라 다로 | 제1차 가쓰라 내각 |
| 1906~1908 | 사이온지 긴모치 | 제1차 사이온지 내각 |
| 1908~1911 | 가쓰라 다로 | 제2차 가쓰라 내각 |
| 1911~1912 | 사이온지 긴모치 | 제2차 사이온지 내각 |
| 1912~1913 | 가쓰라 다로 | 제3차 가쓰라 내각 |
다만 마지막 제3차 가쓰라 내각은 이미 다이쇼 시대에 들어선 뒤에 성립했으며, 헌정옹호운동의 반발 속에 짧은 기간에 붕괴했다.
따라서 일반적인 게이엔 시대의 정치적인 안정성과 동일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은 가쓰라와 사이온지의 정권 교대를 메이지 말기 정치사의 중요한 특징으로 설명한다.[9]
정치적 의미
게이엔 시대는 일본의 정당정치와 관료정치가 타협하면서 발전한 시기로 평가된다.
특히 가쓰라는 군부와 관료조직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의회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정당과 협력했다.
반면 사이온지는 정당을 이끌면서도 군부와 원로 정치인들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따라서 두 사람이 번갈아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오늘날의 민주적인 양당제에 따른 정권 교대와 동일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당시 일본의 총리는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직책이 아니었으며, 천황과 원로 정치인들의 영향력이 강했다.
두 사람이 서로 선거에서 이기고 지면서 번갈아 집권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정당, 원로 정치인들 사이에서 타협이 이루어진 결과에 가까웠다.
제2차 가쓰라 내각
1908년 7월 14일 가쓰라는 일본 제13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제2차 가쓰라 내각은 1911년 8월 30일까지 유지되었으며, 총 재임기간은 1,143일이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1910년 한일병합이라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일본 국내에서는 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률이 제정되는 한편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에 대한 탄압도 이루어졌다.
한일병합
1910년 8월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했다.
이는 가쓰라의 두 번째 총리 재임기간에 이루어진 사건이다.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1907년에는 한국의 내정과 군대에 대한 통제까지 확대했다.
특히 고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본의 압력으로 퇴위했다.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1910년에는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선통감으로 임명되어 병합을 추진했다.
8월 22일 데라우치와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에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8월 29일 공포되었으며, 일본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제로 박탈했다.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일제강점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국 국무부에 보존된 당시 일본의 외교문서에도 조약의 체결일과 공포일, 서명 당사자 등이 기록되어 있다.[10]
가쓰라의 책임
한일병합조약에 일본 측 대표로 서명한 사람은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최고 책임자는 가쓰라 다로였다.
따라서 가쓰라는 한일병합을 추진한 일본 내각의 정치적 책임자였다.
특히 한일병합조약의 공포와 조선총독부 설치를 위한 칙령 등에는 총리였던 가쓰라의 부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당시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11]
따라서 가쓰라를 단순히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당사자로만 소개하는 것은 그의 대한제국 침략정책에 대한 책임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1905년에는 미국과 한국의 지배 문제를 논의했고, 1910년에는 실제로 한국을 병합한 정부의 총리였던 것이다.
다만 한일병합이라는 사건을 가쓰라 개인이 단독으로 결정하고 실행했다고 설명하는 것 역시 부정확하다.
실제로는 메이지 천황과 일본의 원로 정치인, 군부, 외무성과 조선통감부 등 여러 기관이 병합 과정에 관여했다.
또한 한국 내부에서는 이완용 등 친일 정치인들이 일본의 병합정책에 협력했다.
따라서 가쓰라는 이러한 일본 제국의 정치적·군사적 구조 속에서 중요한 책임을 담당한 인물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대역 사건
1910년에는 일본에서 대역 사건(大逆事件)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일본 정부가 고토쿠 슈스이를 비롯한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을 천황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한 사건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천황제와 국가체제에 대한 비판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특히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상의 확산을 국가적인 위협으로 인식했다.
가쓰라 내각은 이 사건을 계기로 관련 인물들에 대한 강력한 수사와 처벌을 진행했다.
이후 1911년에는 여러 피고인들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고토쿠 슈스이를 비롯한 12명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사건과 관련된 실제 모의의 범위 및 피고인들의 관여 정도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논쟁이 존재한다.
특히 당시 정부가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세력을 광범위하게 탄압하는 데 사건을 활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 사건은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사상의 자유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공장법 제정
1911년에는 일본의 첫 본격적인 공장 노동자 보호법인 공장법(工場法)이 제정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공장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장시간 노동, 아동노동 등이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특히 여성과 어린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가쓰라 내각은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의 근로조건을 일부 규제하는 공장법을 제정했다.
1911년 3월 28일 공포된 이 법은 여성과 청소년의 노동시간 및 취업연령, 산업재해 등에 관한 규정을 포함했다.
그러나 적용 대상이 제한적이었으며, 오늘날의 노동법과 비교하면 노동자 보호 수준도 부족했다.
또한 법률은 1911년에 제정되었지만 실제 시행은 1916년 9월에 이루어졌다.[12]
따라서 1911년에 공장법이 제정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당시 일본 노동자들의 근로환경이 즉시 개선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흥미롭게도 가쓰라 내각은 한편으로 노동자 보호를 위한 제도를 마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세력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추진했다.
이러한 점은 당시 일본 정부의 노동정책과 정치적인 자유에 대한 태도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관세자주권 회복
1911년 일본은 미국과 새로운 통상항해조약을 체결했다.
특히 2월 21일 체결된 조약을 통해 일본은 관세자주권을 완전히 회복했다.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가 추진해 온 불평등조약 개정의 중요한 성과였다.
일본은 19세기 중반 개항 이후 서양 열강과 체결한 여러 조약으로 인해 관세정책과 사법권에 제약을 받고 있었다.
이후 오랫동안 조약 개정 협상을 진행했으며, 1911년에는 관세자주권을 완전히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 국립공문서관은 1911년 미일통상항해조약을 이러한 과정의 중요한 사건으로 설명한다.[13]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상대방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였다.
즉, 1905년에는 일본 총리와 미국 육군장관으로 만났던 두 사람이 1911년에는 각각 일본과 미국의 최고 정치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다만 이 사실만으로 1911년의 조약이 1905년의 비망록을 직접 실행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외교적·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제3차 가쓰라 내각
1912년 12월 21일 가쓰라는 일본 제15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당시 64세였다.
그러나 세 번째 총리 재임은 그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제3차 가쓰라 내각은 1913년 2월 20일까지 유지되었으며, 총 재임기간은 62일에 불과했다.
특히 이 내각은 일본에서 제1차 헌정옹호운동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육군의 2개 사단 증설 문제
1912년 당시 일본에서는 육군의 2개 사단 증설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인 갈등이 발생했다.
특히 육군은 새로운 사단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당시 총리였던 사이온지 긴모치는 재정적인 부담 등을 이유로 증설에 반대했다.
그러나 육군은 이러한 정부의 방침에 반발했다.
특히 육군대신이었던 우에하라 유사쿠는 사단 증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임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육군대신을 현역 장성 가운데 임명하도록 하는 제도가 존재했다.
이 때문에 육군이 후임 장관을 추천하지 않으면 새로운 육군대신을 임명하기 어려웠다.
결국 사이온지 내각은 육군대신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총사퇴했다.
이 사건은 군부가 내각의 존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가쓰라의 세 번째 총리 취임
사이온지 내각이 붕괴한 뒤 가쓰라가 다시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가쓰라는 이미 궁중의 고위직인 내대신을 맡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총리에 취임한 것은 정치적인 논란을 불러왔다.
특히 기존의 정당 정치인들은 군부와 원로 정치인들의 영향력으로 정권이 결정되는 상황을 비판했다.
가쓰라는 정치적인 위기를 해결하고 정부를 안정시키려 했지만 의회와 국민들의 반발은 오히려 커졌다.
제1차 헌정옹호운동
1912년 말부터 1913년 초까지 일본에서는 헌정을 옹호하고 번벌정치를 타파하자는 운동이 확대되었다.
특히 오자키 유키오와 이누카이 쓰요시 등 여러 정치인들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운동의 핵심적인 구호는 다음과 같았다.
헌정옹호·번벌타파(憲政擁護・閥族打破)
이는 헌법과 의회의 역할을 존중하고, 일부 원로 정치인과 군부의 인맥을 중심으로 정권이 운영되는 상황을 개혁하자는 의미였다.
특히 가쓰라 내각은 이러한 비판의 중심에 있었다.
1913년 2월에는 도쿄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으며, 의회와 정부 주변에서 정치적인 긴장이 높아졌다.
특히 시위대와 경찰 사이의 충돌도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쓰라는 더 이상 내각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결국 1913년 2월 20일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 사건은 일반적으로 다이쇼 정변(大正政変)이라고 불린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은 가쓰라 내각의 붕괴를 일본의 헌정옹호운동과 정당정치 발전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설명한다.[14]
세 번째 총리가 되었는데 국민들이 내각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시위에 나서면서 두 달 만에 물러난 것이다.
특히 군부와 원로 정치인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에 대한 반발이 커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입헌동지회 구상
제3차 내각의 말기에 가쓰라는 새로운 정당을 설립하려고 했다.
그는 기존의 관료조직과 군부만을 기반으로 정권을 유지하는 방식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의회에서 안정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는 정당을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1913년 1월에는 신당 창당 구상을 공개했다.
이후 2월 7일에는 입헌동지회(立憲同志会)의 창당을 위한 선언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가쓰라는 같은 해 10월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정당이 정식으로 조직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지는 못했다.
입헌동지회는 그의 사망 이후인 1913년 12월 23일 가토 다카아키를 중심으로 정식 창당되었다.[15]
흥미로운 점은 가쓰라가 오랫동안 관료와 군부의 정치적 기반을 활용했던 인물이지만, 정치인생의 마지막에는 자신이 직접 정당을 창당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의 정치가 점차 정당과 의회의 영향력이 커지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설립을 추진한 정당이 실제로 장기간 어떤 정치적 역할을 수행할지는 그의 사망 이후에 결정되었다.
사망
가쓰라는 1913년 10월 10일 도쿄에서 사망했다.
향년 65세였다.
1913년 2월 세 번째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불과 약 8개월 만이었다.
그는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사망 당시에도 새로운 정당의 설립과 정치적인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쓰라가 세상을 떠난 뒤 일본의 정치에서는 정당세력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그러나 군부와 원로 정치인들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후 일본에서는 정당정치와 군부의 권한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특히 가쓰라가 정치적인 기반으로 활용했던 육군의 영향력은 20세기 일본의 정치사에서 중요한 문제로 남았다.
총리 재임기간
가쓰라는 총 세 차례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 구분 | 재임기간 | 재임일수 | 주요 사건 |
|---|---|---|---|
| 제11대 | 1901년 6월 2일 ~ 1906년 1월 7일 | 1,681일 | 영일동맹, 러일전쟁, 가쓰라-태프트 밀약, 을사늑약 |
| 제13대 | 1908년 7월 14일 ~ 1911년 8월 30일 | 1,143일 | 한일병합, 대역 사건, 공장법 제정 |
| 제15대 | 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 62일 | 제1차 헌정옹호운동, 다이쇼 정변 |
| 총 재임기간 | 2,886일 | ||
가쓰라의 총 재임기간은 2,886일로, 약 7년 11개월에 해당한다.
이는 오랫동안 일본 역사상 가장 긴 총리 재임기간이었다.
이후 아베 신조가 총 재임기간에서 가쓰라를 추월하면서 가쓰라는 2위가 되었다.
다만 가쓰라의 세 차례 내각이 모두 안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마지막 세 번째 내각은 불과 62일 만에 붕괴했다.
반대로 첫 번째 내각은 4년 7개월가량 유지되면서 당시 일본의 정치에서 상당히 긴 재임기간을 기록했다.
정치적 특징
군부 출신 총리
가쓰라는 정치인이 되기 전에 군인으로서 상당한 경력을 쌓았다.
특히 독일에서 군사제도를 공부하고 육군의 고위 지휘관과 육군대신을 역임했다.
따라서 그의 정치적인 기반은 일반적인 정당 정치인들과 달랐다.
특히 육군과 관료조직, 원로 정치인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특징은 가쓰라가 정당과 의회의 영향력을 제한하려는 정치세력과 가까웠다는 평가로 연결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당세력과 타협하거나 새로운 정당의 설립을 추진하는 등 정치적인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행동하기도 했다.
니코폰주의
가쓰라의 정치적 행동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니코폰주의(ニコポン主義)다.
이는 상대방에게 웃으며 친절하게 접근한 뒤 어깨를 두드리거나 편하게 대하면서 정치적인 협조를 얻어내는 방식을 가리킨다.
특히 가쓰라는 정치적 상대방을 무조건 강하게 압박하기보다 개인적인 친분과 대화, 타협을 통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데 능숙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행동 때문에 니코폰주의라는 별칭이 사용되었다.
일본의 역사사전에서는 가쓰라가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여러 원로 정치인들 사이에서 유연하게 행동하고, 정당세력과도 타협하면서 정권을 유지했다고 설명한다.[16]
정치적인 상대방에게 무섭게 윽박지르기보다 웃으면서 어깨를 두드리고 친한 척하면서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방식이었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인 수완이 언제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제3차 가쓰라 내각에서는 대중적인 반발이 확대되면서 결국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실용적인 정치적 타협
가쓰라는 군부와 관료조직을 중요한 정치적 기반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정당과 의회의 역할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특히 일본의 제국의회가 예산과 법률을 처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쓰라는 입헌정우회와 여러 차례 협력했다.
특히 사이온지 긴모치와의 정권 교대는 이러한 정치적 타협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가쓰라의 정치적인 타협이 오늘날의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강한 신념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실제로 그의 정치적 행동에는 내각을 유지하고 권력을 확보하려는 현실적인 계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평가
일본의 근대화와 국제적 지위 확대
일본에서는 가쓰라가 메이지 시대의 국가 발전과 국제적 지위 확대에 기여한 정치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특히 1902년 영일동맹과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이 주요 열강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또한 1911년 관세자주권 회복은 일본이 서양 열강과의 불평등조약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성과였다.
이러한 외교적 성과가 가쓰라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는 여러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 시기에 총리로서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군사행정에 대한 전문성과 원로 정치인들과의 관계, 정당과의 타협 등을 통해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했다.
대한제국의 주권 침탈
한국의 역사에서 가쓰라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박탈하는 정책을 추진한 일본의 총리로 평가된다.
특히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을사늑약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제한하고 보호국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또한 1910년 한일병합 역시 가쓰라의 두 번째 내각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가쓰라의 정책이 한국에 미친 영향을 설명할 때 그가 단순히 국제적인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일본의 국제적인 지위 확대는 대한제국과 다른 지역에 대한 군사적·정치적 지배 확대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드러난 외교적인 태도는 당시 강대국들이 약소국의 주권을 자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취급했던 현실을 보여준다.
일본에서는 유능한 외교적 지도자로 평가받을 수 있는 행동이 한국에서는 국가의 주권을 빼앗는 과정에 기여한 행동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그러나 두 평가가 서로 완전히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역사적 사건이라도 어떤 국가와 사회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따라 평가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당정치에 대한 한계
가쓰라는 오랫동안 일본의 정치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정당정치와 의회의 역할을 둘러싸고 여러 갈등을 겪었다.
특히 그의 정치적인 기반은 군부와 관료조직에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안정적인 내각 운영에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정당세력과 대중의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특히 1912년 말 세 번째로 총리에 취임한 사건은 헌정옹호운동의 확대를 촉발했다.
결국 그는 62일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 사건은 일본의 정치가 점차 군부와 원로 정치인 중심의 체제에서 정당과 의회의 역할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으며, 일본에서는 군부와 정당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연표
| 연도 | 사건 |
|---|---|
| 1848 | 조슈번 하기에서 출생 |
| 1868 | 보신전쟁에서 신정부 측으로 참여 |
| 1870 | 독일 유학 |
| 1875 | 독일 주재 일본 공사관 무관으로 파견 |
| 1878 | 일본으로 귀국하여 군제 개혁에 참여 |
| 1886 | 육군차관 취임 |
| 1894 | 청일전쟁에서 제3사단 지휘 |
| 1896 | 제2대 대만총독 취임 |
| 1898 | 육군대신 취임 |
| 1901 | 제11대 내각총리대신 취임 |
| 1902 | 영일동맹 체결 |
| 1904 | 러일전쟁 발발 |
| 1905 | 가쓰라-태프트 비밀 회담 |
| 1905 | 포츠머스 조약 체결 |
| 1905 | 을사늑약 강제 체결 |
| 1906 | 제1차 내각 총사퇴 |
| 1908 | 제13대 내각총리대신 취임 |
| 1910 | 한일병합 |
| 1910~1911 | 대역 사건과 사회주의·무정부주의 세력 탄압 |
| 1911 | 공장법 제정 |
| 1911 | 관세자주권 회복 |
| 1911 | 제2차 내각 총사퇴 |
| 1912 | 제15대 내각총리대신 취임 |
| 1913 | 헌정옹호운동으로 제3차 내각 총사퇴 |
| 1913 | 입헌동지회 창당 구상 |
| 1913 | 10월 10일 도쿄에서 사망 |
여담
- 1848년 1월 4일 조슈번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구력으로는 1847년 11월 28일이기 때문에 일본 자료에서 출생연도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마찬가지로 조슈번 출신이다. 특히 메이지 유신 이후 조슈번 출신 정치인들이 일본 정부와 군부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 보신전쟁에 참여한 뒤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았다.
- 젊은 시절 독일에서 군사제도를 공부했으며, 이후 일본 육군의 군사행정체계를 정비하는 데 참여했다.
- 특히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군부의 주요 인물로 성장했다.
- 1894년 청일전쟁에서는 일본 육군 제3사단을 지휘했다.
- 1896년에는 제2대 대만총독을 역임했다. 다만 재임기간은 약 4개월로 길지 않았다.
- 1898년에는 육군대신에 취임했다. 이후 여러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역임했다.
- 1901년에는 처음으로 일본의 총리가 되었다.
- 총리를 세 번이나 역임했으며 총 재임기간은 2,886일이었다.
- 이 기록은 아베 신조가 추월하기 전까지 일본 역사상 가장 긴 총리 재임기간이었다.
- 가쓰라의 첫 번째 총리 재임기간에는 영일동맹과 러일전쟁, 을사늑약 등이 발생했다.
- 특히 러일전쟁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일본의 지배권 확대가 심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직접 회담했다.
- 당시 태프트는 미국 대통령이 아니라 육군장관이었다. 대통령이 된 것은 1909년이다.
- 가쓰라와 태프트는 1905년 7월 27일 회담했다. 회담 내용을 정리한 비망록은 7월 29일 작성되었다.
- 이러한 날짜의 차이 때문에 일부 자료에서는 밀약의 날짜를 7월 27일로, 다른 자료에서는 7월 29일로 소개하기도 한다.
- 흔히 정식 비밀조약을 체결했다고 설명되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서명하고 양국 정부가 비준한 조약은 아니었다.
- 그러나 이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태프트의 발언에 동의했다는 점에서 외교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 1924년 미국 역사학자 타일러 데넷이 관련 문서를 발견하면서 사건이 널리 알려졌다.
-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비망록을 비밀협정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 그러나 당시 미국 정부가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하다.
-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직접적으로 논의된 것은 한국의 보호국화와 외교권 제한이었으며, 1910년의 완전한 병합조약이 그 자리에서 정식으로 체결된 것은 아니다.
- 가쓰라는 1905년 을사늑약을 추진한 일본 정부의 최고 책임자였다. 다만 현지에서 조약 체결을 강요한 대표적인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 1908년에는 두 번째로 총리가 되었다.
- 1910년 한일병합은 가쓰라의 두 번째 내각에서 이루어졌다.
- 병합조약에 일본 측 대표로 서명한 사람은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가쓰라는 일본 내각의 최고 책임자로서 병합정책을 추진했다.
- 일본에서 가쓰라는 전쟁과 외교를 통해 일본의 국제적인 지위를 높인 총리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주권 침탈과 식민지 지배에 관여한 정치인이라는 평가가 중요하다.
- 가쓰라는 사이온지 긴모치와 여러 차례 번갈아 총리직을 담당했다. 이러한 시기를 두 사람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게이엔 시대라고 부른다.
- 그러나 당시의 정권 교대는 오늘날의 민주적인 양당제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부와 관료조직, 정당과 원로 정치인 사이의 타협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가쓰라는 상대방에게 웃으며 접근하고 친근하게 행동하면서 정치적인 협력을 얻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러한 태도는 니코폰주의라는 별칭으로 알려져 있다.
- 정치적 상대방을 무조건 적으로 대하기보다 필요에 따라 협력하거나 타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 다만 이러한 정치적 수완이 모든 상황에서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 1910년에는 일본의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을 탄압한 대역 사건이 발생했다.
- 1911년에는 일본에서 공장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실제 시행은 1916년에 이루어졌다.
- 1911년에는 미국과 새로운 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이 관세자주권을 완전히 회복했다.
- 흥미롭게도 당시 미국 대통령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상대방이었던 태프트였다.
- 1905년에는 일본 총리와 미국 육군장관으로 만났던 두 사람이 1911년에는 모두 국가의 최고 정치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 1912년에는 세 번째로 총리에 취임했다.
- 그러나 헌정옹호운동이 확대되면서 62일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 1913년에는 새로운 정당인 입헌동지회의 설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정당이 정식으로 창당되기 전에 사망했다.
- 입헌동지회는 가쓰라의 사망 이후인 1913년 12월에 정식으로 출범했다.
- 1913년 10월 10일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그의 정치인생은 메이지 유신부터 다이쇼 시대 초기까지 이어졌으며, 일본이 봉건적인 사회에서 근대적인 제국주의 국가로 변화하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 일본 내부에서는 근대적인 군사제도와 행정체계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근대화를 함께 추진한 지도자가 아니라 국가의 주권을 침탈하는 정책을 추진한 총리였다.
- 특히 가쓰라가 총리로 재임했던 시기에는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국화와 완전한 병합이 모두 이루어졌다.
- 한편 당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가쓰라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의지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실제로는 일본 정부와 군부, 원로 정치인, 외교조직 등이 함께 추진한 국가적인 정책이었다.
- 가쓰라 역시 이러한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한 정부의 최고 책임자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일본의 정당정치 발전에서도 중요한 인물이지만, 정치인생의 마지막에는 정당과 의회의 반발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 군부와 관료조직의 힘으로 오랫동안 일본 정치를 주도했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군부와 관료 중심의 정치에 반대하는 대중운동 때문에 정권을 잃은 것이다.
-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일본의 정당정치와 군부의 영향력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되었다.
- 가쓰라의 생애는 근대 일본의 국가 발전과 정치적 변화, 제국주의 팽창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 한국에서는 주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이름으로 기억되지만, 실제로는 을사늑약과 한일병합 당시 모두 일본의 총리였다는 점에서 더욱 직접적인 역사적 책임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관련 문서
- 가쓰라-태프트 밀약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이토 히로부미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사이온지 긴모치
- 하라 다카시
- 오쿠마 시게노부
- 데라우치 마사타케
- 고무라 주타로
- 고토쿠 슈스이
- 오자키 유키오
- 이누카이 쓰요시
- 가토 다카아키
- 메이지 유신
- 보신전쟁
- 조슈번
- 청일전쟁
- 러일전쟁
- 영일동맹
- 포츠머스 조약
- 히비야 방화 사건
- 을사늑약
- 한일병합
- 한일병합조약
- 조선통감부
- 조선총독부
- 일제강점기
- 대한제국
- 고종(대한제국)
- 이완용
- 미국-스페인 전쟁
-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배
- 대역 사건
- 제1차 헌정옹호운동
- 다이쇼 정변
- 게이엔 시대
- 입헌정우회
- 입헌동지회
- 일본 내각총리대신
- 일본 제국 육군
- 메이지 시대
- 다이쇼 시대
- 일본 제국주의
각주
- ↑ 일본 총리관저 - 역대 내각총리대신과 재임기간
- ↑ 2.0 2.1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 Katsura Tarō
- ↑ 일본 국립공문서관 - 가쓰라 내각과 영일동맹
- ↑ 우리역사넷 - 포츠머스 강화조약
- ↑ 5.0 5.1 우리역사넷 -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 원문과 해설
- ↑ 시어도어 루스벨트 디지털 도서관 - 1905년 7월 29일 태프트의 비망록
- ↑ 미국 외교협회 - The Taft-Katsura Memorandum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가쓰라-태프트 협약
-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 게이엔 시대
- ↑ 미국 국무부 - 1910년 한일병합조약 관련 외교문서
- ↑ 미국 국무부 - 1910년 조선총독부 설치 관련 일본 칙령
- ↑ 일본 국립공문서관 - 1911년 공장법 제정
- ↑ 일본 국립공문서관 - 미일통상항해조약과 관세자주권 회복
-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 가쓰라와 입헌동지회
-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 입헌동지회의 설립
- ↑ JapanKnowledge - 가쓰라 다로의 정치적 경력과 니코폰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