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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헤이그 특사 사건(海牙特使事件)은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3명의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주권 회복을 호소한 사건이다. 헤이그 밀사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나라꼴 병신 만든 군밤왕이 마지막 발악으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으로 이루어진 특사를 네덜란드 헤이그로 보낸 일이다. 이 사람들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기 위해 파견됐다.
헤이그에 가서 "일본놈들이 강제로 외교권 빼앗았어요 ㅠㅠ 도와주세요" 했는데 열강의 반응은 "응~ 어쩌라고 꺼져~ ^^"였다는 식으로 요약되기도 한다.
다만 실제로는 공식 회의 참가에 실패했을 뿐, 특사들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것은 아니다. 특사들은 각국 대표들에게 항의 문서를 전달했고, 국제 기자단을 상대로 연설하며 일본의 침략과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러한 여론전이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실질적으로 막을 수 있는 외교적 성과로 연결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원문의 고종 비판은 다음과 같다.
병신 같은 군밤왕 새끼가 당시 국제정세가 지금보다 더한 힘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었음을 인지하지조차 못한 것을 증빙하는 자료라고도 볼 수 있겠다. 대체 그 어느 열강이 당시 일본 상대로 누가 "오 그래요우 불쌍한 코릐아 독립 보장해줘요우" 이러겠냐? 가서 뭐 어쩔 건데 시발 ㅋㅋㅋ 지 폐위시킬 명분이랑 조약 체결할 명분만 준 거지 븅신 같은 새끼 ㅋㅋㅋ
이러한 비판은 특사 파견의 실효성과 고종의 국제정세 판단을 문제 삼는 관점이다. 실제로 당시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주요 열강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하거나 인정한 상태였으므로 국제회의를 통해 대한제국의 독립을 회복하기는 극히 어려웠다.
그러나 일본이 헤이그 특사를 이용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는 사실과 고종의 외교적 판단이 옳았는지는 별개로 구분해야 한다.
특사 파견은 주권을 되찾기 위한 외교적 시도였으며, 일본이 이를 침략 확대의 구실로 이용한 것이다.
결국 특사들은 정식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고, 이준 열사는 1907년 7월 14일 헤이그에서 순국했다. 이래서 주군 보는 눈도 중요한 거다.
참고로 자기 내장을 꺼내서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구라다. 그러나 단순히 화병으로 사망했다는 설명도 확정적인 의학적 진단은 아니다. 당시 현지 언론에는 얼굴의 종기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뒤 발생한 후유증이 사망 원인이라는 보도가 있었다.[1]
사건 정보
| 사건 | 헤이그 특사 사건 |
|---|---|
| 시기 | 1907년 4월~7월 |
| 장소 | 네덜란드 헤이그 |
| 파견자 | 고종 |
| 정사 | 이상설 |
| 부사 | 이준, 이위종 |
| 관련 회의 | 제2차 만국평화회의 |
| 주요 목적 | 을사늑약 무효 주장,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주권 회복 호소 |
| 결과 | 공식 회의 참가 거부, 국제 언론을 통한 침략 실상 폭로, 이준 순국 |
| 이후 | 고종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 군대 해산 |
배경
을사늑약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후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하여 대한제국의 외교와 내정에 간섭했다.
고종은 을사늑약을 정식으로 승인하지 않았으며, 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었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했다.
고종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에 일본의 침략을 알리고 외교적 도움을 요청했다. 특히 미국인 호머 헐버트를 통해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내용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미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묵인하는 입장을 보였으며, 영국 역시 영일동맹을 통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인정했다.
러시아 역시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일본과 타협하고 있었다.
따라서 1907년의 대한제국은 국제적으로 상당히 고립된 상태였다.
ㄴ 미국도 일본 편.
ㄴ 영국도 일본 편.
ㄴ 러시아는 일본에 전쟁까지 졌다.
ㄴ 그런데 어디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냐?
제2차 만국평화회의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1907년 6월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전쟁 관련 국제법 등을 논의하기 위한 국제회의였다.
고종은 이 회의를 일본의 불법적인 침략을 국제사회에 알릴 기회라고 판단했다.
특히 대한제국은 제2차 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외교적 접촉을 이전부터 시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한제국도 초청 대상국으로 검토되었지만 러시아가 일본과 타협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변경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906년 10월 러시아 측은 일본에 대한제국을 회의에 참가시키지 않겠다는 취지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럼에도 고종은 비밀리에 특사를 파견하기로 했다.[2]
특사 3인
이상설
이상설은 헤이그 특사단의 정사(正使)였다.
과거 의정부참찬을 역임한 인물로,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활동했다.
이미 1906년 대한제국을 떠나 북간도에서 교육과 독립운동에 힘쓰고 있었다.
헤이그 특사 파견 과정에서는 이준과 합류하여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이동했다.
특사단의 대표자로서 각국 외교관 및 국제회의 관계자들에게 대한제국의 입장을 전달하려 했다.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17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사망했다.
이준
이준은 법률가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과거 평리원 검사로 활동했으며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운동에도 참여했다.
고종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아 헤이그 특사 파견에 참여했다.
1907년 4월 대한제국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합류했다.
이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하여 러시아를 거쳐 헤이그에 도착했다.
하지만 정식 회의 참가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7월 14일 현지에서 사망했다.
특히 이준이 할복하여 사망했다는 이야기는 사실로 확인되지 않는다.
이위종
어려서부터 유럽 여러 국가에서 생활하여 외국어에 능통했다.
특히 프랑스어와 영어, 러시아어 등을 구사할 수 있었으며 이는 헤이그에서 활동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7년 7월 9일 국제 기자단이 모인 자리에서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참석자들의 공감을 얻었고 대한제국의 상황을 알리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3]
이후에도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했지만 말년의 정확한 행적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부분이 남아 있다.
호머 헐버트

공식적인 3인의 특사 외에도 호머 헐버트가 외교 활동을 도왔다.
헐버트는 미국 출신으로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일본의 침략에 반대했던 인물이다.
고종의 요청에 따라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대한제국의 입장을 알리려 했다.
특사들이 헤이그에서 활동할 때에도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헤이그 특사 사건을 단순히 한국인 3명만의 활동으로 설명하면 실제 외교 활동의 범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사건의 경과
이하의 내용은 원문에 실려 있던 사건 경과를 보존하면서 연대기와 사실관계를 정리한 것이다.
원문의 주요 출처는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종시대사》 제6집으로 표시되어 있었으며, 일부 인물 평가와 `=>` 해설은 기존 편집자의 의견이다.
고종의 외교적 판단과 정치적 책임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존재하므로, 사료에 나타나는 행동과 그 행동에 대한 해석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1. 특사들의 출발
1907년 5월 21일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원 검사 이준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러시아 수도로 향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무역사무관은 이를 통감부에 통고하여 그들이 헤이그에서 한국 독립을 위하여 활동할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두 사람이 처음부터 함께 대한제국을 떠난 것은 아니다.
이상설은 이미 북간도로 망명해 있었고, 이준은 1907년 4월 서울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합류했다.
이준은 4월 21~22일경 서울을 출발했으며, 4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이후 이상설과 이준은 5월 21일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탑승하여 6월 4일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2]
밀사들은 러시아 수도에서 전 주러시아 한국공사관 서기관 이위종과 합류했다.
그리고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 지 열흘 후인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헤이그 시내의 융 호텔에 숙소를 마련하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 원문 해설: 당시 통감부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특사들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서 출국해야 했다. 그런데 일본 측은 이들의 활동을 상당히 일찍 파악하고 있었다.
2. 평화회의 참가 시도
밀사들은 공식적으로 대한제국 대표의 자격을 인정받아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다.
우선 평화회의 의장이자 러시아 수석위원인 넬리도프를 만나 회의 참석을 부탁하려 했다.
하지만 넬리도프는 문제의 처리를 네덜란드 정부에 미루었다.
네덜란드 외무대신 후온데스는 대한제국에 독자적인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회의 참석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미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있고 여러 열강이 이를 인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특사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각국 대표들과 네덜란드 정부 관계자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어느 국가도 대한제국의 정식 회의 참가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따라서 특사들은 공식적인 대표 자격과 발언권을 얻지 못했다.
- 원문 해설: 정부 고관대작들은 좆까쇼 하고 안 만나주고, 기사감 찾고 있던 기자들을 불러 모아서 여론전을 시도함.
다만 모든 대표가 아무런 접촉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특사들은 여러 경로로 대표들에게 문서를 전달했으며, 일부 언론인과 외국인 협력자의 도움도 받았다.
3. 공고사 발표
특사들은 정식 회의 참가가 거부되자 외교적 항의 문서를 작성했다.
공고사(控告詞)라고 불리는 이 문서에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불법적으로 박탈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특사들은 을사늑약이 황제의 동의 없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일본이 무력을 이용해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한제국의 대표가 국제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이 문서는 1907년 6월 30일자 《만국평화회의보》에 게재되었다.[4]
따라서 특사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곧바로 쫓겨났다는 설명은 정확하지 않다.
공식 회의장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언론과 문서를 통한 외교 활동은 계속했다.
4. 이위종의 연설
완전 상쾌합니다!!!
1907년 7월 9일 영국 언론인 윌리엄 스테드의 도움으로 특사들은 국제 기자단의 모임에서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이 자리에서 이위종은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연설에서는 일본이 무력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사실과 을사늑약 체결 과정의 강압성, 대한제국 국민들의 저항 등을 설명했다.
특히 일본의 침략이 국제법과 평화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비판했다.
이위종의 연설은 기자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참석자들은 대한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를 채택했으며, 연설 내용도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 원문 해설: 회의장 입장에는 실패했지만 국제 언론에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물론 언론의 지지는 정부의 외교정책 변경과는 별개였다.
영국의 언론인이 한국에 동정적인 기사를 썼다고 해서 영국 정부가 영일동맹을 파기하거나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저지한 것은 아니었다.
5. 일본의 반응
이보시오 의사양반 제 멘탈은.. 끄어어얽!!
며칠이 안 되어 이 사건이 알려지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크게 힐책했다.
이토는 고종이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행동을 했으며 을사늑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할 권리가 있다는 취지로 협박했다.
이토는 일본 정부에 전보를 보내 특사 사건을 계기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더욱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요청했다.
실제로 이토는 특사 사건이 알려진 직후 이를 일본의 한국 내정 지배를 확대할 기회로 인식했다.
일본 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와 정부 관계자들은 고종을 퇴위시키고 통감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했다.[5]
일본 측이 제시한 핵심 방침은 다음과 같았다.
- 한국 황제로 하여금 황태자에게 양위하게 할 것.
- 한국 정부의 행정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 실행하게 할 것.
- 대신과 차관 이하 중요 관리를 일본인으로 임명하거나 통감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게 할 것.
- 원문 해설: 한창 한국 먹을 각 재고 있던 일본이 명분을 얻게 됨.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에 처음 생각한 것은 아니다.
일본은 이미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통감부를 통해 내정 간섭을 확대하고 있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은 이러한 지배를 더욱 강화할 수 있는 정치적 구실이 되었다.
6. 고종의 특사 파견 부인
이보시오 의사양반 제 멘탈은.. 끄어어얽!!
이토 히로부미가 특사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자 대한제국 내각의 대신들은 고종에게 대책을 요구했다.
당시 내각은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적인 인물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대신들은 고종이 일본과의 협약을 위반했으므로 황제가 직접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종은 자신이 특사를 파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취지로 해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헤이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황제의 밀서를 위조했다는 설명도 등장한다.
원문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고종은 40여 년간 외세의 힘을 빌려 자리를 유지할 궁리만 하며 민중을 억압하고, 과단성이 없어 척족과 관리들의 부패를 제어하지도 못하고 썩어빠진 정치체제에 대한 개혁도 단행하지 못하여 나라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한 무능한 군주답게 자신은 이 사건에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헤이그에 있는 자들이 밀서를 위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 원문 해설: 이를 알게 된 일본이 빡치자 고종이 아몰랑 내가 시킨 게 아니라 헤이그 애들이 문서 위조한 거양 이라며 군밤왕다운 태도로 일관.
실제로 고종이 일본의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특사 파견을 부인했다는 기록은 존재한다.
그러나 고종이 애초에 특사들을 파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이상설과 이준 등은 고종의 위임장을 가지고 활동했으며, 현지에서도 자신들이 고종의 명령에 따라 파견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위종 역시 고종이 특사 파견을 부인했다는 일본 측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6]
따라서 고종이 위협을 피하려고 특사 파견 사실을 부인한 것과 실제로 특사를 파견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고종의 정치적 책임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지만, 이 상황에서 일본의 강압과 친일 내각의 압박을 배제하고 단순히 고종이 겁쟁이라서 부인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7. 일본의 고종 퇴위 요구
이보시오 의사양반 제 멘탈은.. 끄어어얽!!
일본 정부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더욱 장악하기 위한 방침을 확정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의 양위를 추진하면서 친일 내각에 압력을 가했다.
1907년 7월 16일 오후 이완용 등은 내각회의를 열고 사태수습 방안을 논의했다.
그 결과 고종의 양위를 추진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완용은 궁궐에 들어가 고종에게 일본이 특사 파견으로 격분해 있으며 심각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당시 내각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안들이 논의되었다.
- 을사늑약에 황제의 어새를 찍을 것.
- 섭정을 둘 것.
- 고종이 직접 일본에 가서 일본 천황에게 사죄할 것.
고종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했다.
이완용은 일본의 책임 추궁을 피하기 위해 황태자에게 양위할 것을 요청했지만 이 역시 거부당했다.
이후 대신들은 다시 양위를 요구했고 고종은 격노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 원문 해설: 대신들이 '님 그럼 책임 안 짐?'이라고 하자 군밤왕답게 응 안 질 거야라는 태도로 일관함.
다만 여기서 양위를 거부했다는 것은 일본과 친일 내각의 요구를 거부한 행동이기도 하다.
따라서 고종이 권력욕 때문에 무조건 퇴위를 거부했다는 식의 설명만으로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황제의 퇴위는 대한제국의 국권과 정통성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8. 7월 18일의 압박
1907년 7월 18일 오후 내각대신들은 다시 회의를 열었다.
이후 대신 일동이 입궐하여 고종에게 양위에 관한 결단을 요구했다.
고종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며 그를 불렀다.
이토는 황실의 중대한 문제에 자신이 간섭할 수 없으며 한국 대신들과 양위 문제를 협의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 측이 친일 내각을 통해 양위를 추진하고 있었다.
즉 이토의 발언은 일본의 직접적인 책임을 부인하면서 한국 내각의 자발적인 결정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태도였다.
같은 날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도 서울에 도착했다.
이후 이완용 등 대신들은 고종에게 양위를 더욱 강하게 요구했다.
고종은 양위를 거부하며 일본의 요구를 막을 방법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오히려 일본의 압력을 이유로 양위를 강요했다.
원문에는 《매천야록》의 다음과 같은 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이완용이 칼을 빼 들고 "폐하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고함치자 고종을 모시는 무감과 액례들이 흥분하여 고종의 말 한마디만 있으면 갈기갈기 찢어버리려고 하고 있었으나 고종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다만 이 대목은 《매천야록》에 전하는 서술로, 실제 궁중에서 어떤 행동이 있었는지와 문학적·전언적 서술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또한 《매천야록》은 당시의 중요한 기록이지만 모든 대화와 행동을 녹취한 공식 회의록은 아니다.
- 원문 해설: 빡친 일본 외무대신이 '양위하시죠 폐하 ㅎㅎ?'라고 하자 역시 군밤왕답게 싫다는 태도로 일관.
다만 이 시기에는 단순히 외무대신 한 사람의 요구가 아니라 일본 정부와 통감부, 친일 내각 전체의 강제 퇴위 압박이 진행되고 있었다.
9. 원로대신들의 의견
고종은 양위 요구를 거부하면서 원로대신들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했다.
이에 신기선, 민영휘, 민영소 등이 불려 와 사태수습 방안을 논의했다.
원문은 민영휘와 민영소 역시 친일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원로들은 당시의 상황에서 일본의 책임 추궁을 피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양위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결국 고종은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방식의 조칙을 내리기로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단순한 대리청정이 아니라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를 넘기는 양위를 주장했다.
고종은 끝까지 이를 구분하려 했다.
원문에서는 이 행동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이는 후일에 황제가 군권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두려는 것이었다.
- 원문 해설: 일말의 권력이라도 남겨놓고자 꼼수 부림.
그러나 대리청정과 양위는 법적·정치적으로 다른 행위다.
대리청정은 황제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황태자가 정무를 대신 수행하는 방식이고, 양위는 황제의 지위 자체를 넘기는 것이다.
고종이 이를 구분하려 한 것은 단순한 개인적 권력욕뿐 아니라 황제의 지위를 강제로 박탈하려는 일본의 요구에 대한 저항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10. 서울 시민들의 반발
완전 상쾌합니다!!!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가 내한하자 서울에서는 여러 소문이 퍼졌다.
고종이 일본에 가서 사죄할 것이라는 이야기와 황태자에게 양위할 것이라는 이야기, 새로운 한일협약이 체결될 것이라는 이야기 등이 퍼졌다.
이러한 소문으로 서울 시민들 사이에서 불안과 분노가 확산되었다.
당시 대한자강회와 여러 애국계몽단체 회원들은 일본의 압력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일부 단체는 특별회의를 열고 대중집회를 조직했다.
원문에서는 동우회 회원 약 1천 명이 모여 윤이병을 회장으로 선출한 뒤 종로로 이동했다고 설명한다.
당시 종로와 대한문 앞에는 일본의 고종 퇴위 압박에 반대하는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일본 경찰과 군대가 궁궐 주변을 통제하면서 군중과 충돌이 발생했다.
또한 원문에서는 서울 시민들이 결사회를 조직하고 최원석을 회장으로 선출하여 고종의 일본 방문과 강제 퇴위를 막으려 했다고 설명한다.
황제에게 굴복하지 말라는 상소를 전달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일본 경찰과 헌병이 이를 저지했다.
일본군과 경찰은 집회를 강제로 해산시켰으며, 일부 시위 참가자들은 폭행과 체포를 당했다.
- 원문 해설: 빡친 사람들이 몰려왔으나 일본 경찰 병력들에게 해산당함.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당시 대한제국 국민들이 고종의 강제 퇴위를 모두 환영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원문의 서술처럼 고종 개인의 정치적 능력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동시에 일본의 내정 간섭과 황제 강제 퇴위를 국권 침탈로 받아들여 저항한 사람들도 많았다.
11. 고종의 강제 퇴위
이보시오 의사양반 제 멘탈은.. 끄어어얽!!
1907년 7월 18일 고종의 황태자 대리청정에 관한 조칙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일본과 친일 내각은 이를 황제의 양위로 처리하려 했다.
결국 7월 19일 황태자 순종의 황제 지위 승계가 진행되었고 7월 20일에는 양위식이 거행되었다.
고종은 본래 자신의 의사에 반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즉위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황제가 스스로 양위한 것처럼 보이도록 했지만 실제로는 통감부와 친일 내각의 압박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원문에서는 고종이 끝까지 자신의 권력을 보전하려 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고종 강제 퇴위의 구실로 이용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했다.
12. 정미7조약 체결
이보시오 의사양반 제 멘탈은.. 끄어어얽!!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간섭을 더욱 확대했다.
1907년 7월 24일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대한제국 정부는 주요 정책을 시행할 때 일본 통감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또한 고위 관리의 임명에도 통감의 동의가 필요하게 되었다.
일본인을 대한제국의 주요 관직에 임명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이는 1905년 을사늑약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면, 1907년 정미7조약은 내정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일본은 같은 해 7월 신문지법과 보안법 등을 통해 언론과 집회, 결사 활동을 탄압했다.
그리고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관한 조칙이 내려졌으며, 8월 1일 군대 해산이 강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한제국 군인들의 저항이 발생했고, 해산된 군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의병에 합류했다.
이후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 원문 해설: 결국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내정과 군사권까지 장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준의 사망
아 잠깐 눈물 좀 닦고 ㅠㅠ 이 문서를 보고 광광 우럮따 8ㅅ8
할복 자살설
헤이그 특사 사건과 관련해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이준이 회의 참석을 거부당한 뒤 분노하여 자신의 배를 갈라 죽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는 사실로 확인되지 않는다.
이준은 1907년 7월 14일 헤이그에서 사망했으며, 당시 현지 언론에는 그의 사망 원인에 관한 다른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헤이그 현지 언론은 이준이 얼굴의 종기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뒤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1]
따라서 이준이 자신의 내장을 꺼내 죽었다는 할복설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화병설
원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참고로 자기 내장을 꺼내서 자살했다는 얘기는 구라고 거기서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한다.
실제로 이준이 회의 참가 실패 이후 극심한 분노와 절망을 경험했다는 기록은 존재한다.
또한 여러 자료에서는 그가 단식하거나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화병으로 죽었다'는 표현은 감정적인 설명에 가까우며 실제 의학적인 사망 원인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당시의 현지 언론 보도와 후대의 전승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순국 이후
이준은 헤이그에서 사망한 뒤 현지에 매장되었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후에도 해외에서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
이준의 유해는 이후 오랫동안 헤이그에 안장되어 있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준의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했다.
현재 이준의 묘소는 서울 수유리의 애국선열묘역에 있다.
이준이 공식 회의 참가에 실패했다는 사실과 그가 독립을 위해 활동하다 외국에서 사망했다는 역사적 의미는 별개로 평가할 수 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과
공식 외교 목표의 실패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대한제국 특사들의 공식 회의 참가가 거부되었다는 것이다.
각국 대표들은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에 독립적인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특사들의 참석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특사들은 일본의 침략과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만국평화회의의 공식 의제로 올리는 데 실패했다.
또한 주요 열강들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에 대한 기존 정책을 변경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특사 파견의 본래 외교적 목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국제 여론전의 성과
반면 공식 회의 참가 실패가 곧 완전한 무성과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특사들은 항의 문서를 현지 언론에 발표했고, 이위종은 국제 기자단 앞에서 연설하며 대한제국의 입장을 알렸다.
당시 언론인들 가운데 일부는 특사들의 주장에 공감했으며,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을 보도했다.
특히 이위종의 연설은 대한제국 국민들이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고 독립을 원한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헤이그 특사 사건은 공식 외교에서는 실패했지만 국제 여론을 환기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국권 침탈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로 고종의 퇴위를 강요했다.
이후 정미7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내정 통제권을 강화했고, 군대해산을 강행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에 이어 내정과 군사권까지 더욱 심각하게 침해받았다.
그러나 일본이 헤이그 특사 사건이 없었다면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일본은 이미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특사 사건은 그러한 계획을 가속화하는 구실로 작용했다.
고종에 대한 평가
무능한 군주의 마지막 외교라는 비판
원문에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고종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했다.
진짜 씨발 세종이 와도 될까 말까 한 구한말에 고종같이 권력욕만 더럽게 세고 능력이라고는 없는 왕이 재위하고 있었으니.... 에휴 씨발.
이러한 비판에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고려할 때 열강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충돌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는데도 고종이 실현 가능성이 낮은 외교적 시도를 추진했다는 지적이 담겨 있다.
실제로 미국과 영국, 러시아는 이미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거나 묵인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고종이 만국평화회의에서 국제사회의 지원을 기대한 것은 결과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전략이었다.
또한 특사 파견 이후 일본의 압박이 강화되자 고종이 특사 파견 사실을 부인했다는 기록도 비판의 근거가 된다.
원문에서 고종을 군밤왕이라고 부르며 반복적으로 비판한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가능한 외교적 수단을 활용했다는 평가
반대로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을 고려하면 고종이 사용할 수 있었던 수단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미 일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외교권과 정부의 주요 권한을 통감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군사적으로 맞서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여론과 국제법에 호소하는 것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외교적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 이전부터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며 여러 국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따라서 고종이 국제정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설명보다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외교적 시도가 현실적인 국제정치의 장벽에 부딪혔다고 설명하는 편이 당시 상황을 더 정확하게 전달한다.
실제로 국사편찬위원회의 연구에서도 당시 특사 파견은 성공하기 어려웠지만 대한제국의 주권 침탈을 국제사회에 알린 의미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2]
고종의 책임과 일본의 책임
고종의 통치 능력과 개혁 실패, 외교적 판단에 관한 비판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이 일본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한 것은 일본이었으며,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고 내정과 군사권까지 장악한 것도 일본이었다.
따라서 고종의 정치적 책임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책임은 구분해야 한다.
또한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본의 국권 침탈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과 일본이 그 사건을 침략의 구실로 이용했다는 사실은 동시에 성립한다.
당시 국제정세
이보시오 의사양반 제 멘탈은.. 끄어어얽!!
헤이그 특사 사건은 당시 국제사회가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미국
미국은 1905년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묵인하는 입장을 보였다.
또한 필리핀에 대한 자국의 지배를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충돌하려 하지 않았다.
영국
영국은 영일동맹을 통해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을 견제하는 것이 중요한 외교적 목표였다.
영국 언론인 가운데 특사들을 지지한 인물도 있었지만 영국 정부는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막지 않았다.
러시아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일본과 타협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과거에는 대한제국에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1907년에는 특사들의 회의 참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1907년 7월에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새로운 협약까지 체결되면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는 방향이 강화되었다.
네덜란드
네덜란드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의 개최국이었다.
그러나 회의 참가국과 대표 자격 문제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적인 외교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특사들이 공식 회의에 참가할 수 없었다.
다만 네덜란드 현지 언론과 일부 인사들은 특사들의 활동을 보도하거나 지원했다.
결과
정부들은 외면했지만 일부 언론인들은 도왔다.
이 점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이해할 때 중요한 부분이다.
모든 외국인이 대한제국의 독립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 강대국 정부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으며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저지하지 않았다.
여담
- 헤이그 특사 사건은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07년의 정미7조약 사이에 발생한 사건이다.
- 이준은 헤이그에서 순국했으며,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후에도 국권 회복을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
- 이위종의 프랑스어 연설은 국제 기자단에서 호응을 얻었지만 주요 열강들의 외교정책을 바꾸지는 못했다.
- 호머 헐버트는 특사들의 활동을 도왔으며 이후에도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지했다.
- 이 사건으로 일본은 고종 강제 퇴위를 추진할 정치적 구실을 얻었다.
- 고종의 퇴위 이후 순종이 즉위했지만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주권은 더욱 제한되었다.
- 헤이그 특사 사건은 국제회의 참가 실패만을 기준으로 보면 외교적 실패였지만, 일제의 침략과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렸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결론
아 잠깐 눈물 좀 닦고 ㅠㅠ 이 문서를 보고 광광 우럮따 8ㅅ8
대한제국이 마지막까지 국제사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가로막힌 사건.
고종의 외교적 판단이 얼마나 현실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특사들이 실제로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기 위해 노력했고 현지에서 일부 언론의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도 함께 기록해야 한다.
또한 이준이 회의 참가 실패 이후 헤이그에서 사망했으며, 이상설과 이위종이 이후에도 해외 독립운동을 계속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문제는 대한제국의 독립이 국제사회의 정의나 공론만으로 보장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이 사건을 고종 강제 퇴위의 구실로 삼았고, 이후 정미7조약과 군대해산을 통해 대한제국에 대한 통제권을 확대했다.
결과적으로 헤이그 특사 사건은 외교적인 목적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대한제국이 일본의 지배를 자발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린 사건이었다.
ㄴ 조약이 불법이라고 호소했다.
ㄴ 각국 정부는 외면했다.
ㄴ 기자들은 들어줬다.
ㄴ 일본은 오히려 황제를 끌어내렸다.
국제정세가 냉혹하다는 사실과 침략당한 나라가 독립을 위해 저항했다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건이다.
관련 문서
외부 링크
각주
- ↑ 1.0 1.1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헤이그 특사의 현지 활동 및 이준 사망 관련 기록.
- ↑ 2.0 2.1 2.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연대기 - 헤이그특사 사건.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위종.
-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고하는 글.
- ↑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헤이그 특사 파견의 파문.
-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이위종의 일본 침략 규탄과 특사 파견 관련 발언, 1907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