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군대 해산(大韓帝國 軍隊解散)은 1907년 8월 1일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무장해제하고 해산하기 시작한 사건이다. 군대해산 또는 대한제국군 해산이라고도 부른다.
1907년 7월 24일 체결된 정미7조약의 비밀 부수각서에 따라 시행되었으며, 일본은 순종에게 군대 해산 조칙을 내리도록 강요한 뒤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의 진위대를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고 대한제국 군인들이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남대문 전투가 발생했다.
일본의 군대 해산은 같은 해 9월 3일 북청 진위대의 해산을 끝으로 사실상 완료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8,000명 이상의 대한제국 군인이 강제로 해산당했다. 다만 황궁 경비를 위한 소수 병력은 남겨졌다.
해산 군인들 가운데 일부는 무기를 들고 기존 의병부대에 합류했으며, 이는 정미의병이 전국적인 항일무장투쟁으로 확대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대한제국 군대 해산(大韓帝國 軍隊解散) | |
|---|---|
| 시기 | 1907년 8월 1일 ~ 9월 3일 |
| 장소 | 대한제국 전국 각지 |
| 해산 명령 | 1907년 7월 31일 |
| 해산 명분 | 군제 개편, 군비 절약, 향후 징병제 실시 |
| 실질적 목적 | 대한제국의 독자적인 군사력 제거 및 일본의 지배 강화 |
| 근거 | 정미7조약 비밀 부수각서 |
| 주요 관련 인물 | 순종,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이병무, 하세가와 요시미치 |
| 주요 저항 인물 | 박승환, 남상덕, 민긍호, 연기우, 유명규 등 |
| 주요 사건 | 남대문 전투, 원주 진위대 봉기, 강화 진위대 봉기 |
| 해산 병력 | 8,000명 이상 |
| 결과 | 대한제국 정규군의 실질적 소멸, 정미의병 확대 |
| 후속 사건 | 13도 창의군 결성, 서울 진공 작전, 경술국치 |
개요
나라를 지켜야 할 군대가 나라를 침략한 외국의 명령으로 해산당한 사건.
1907년 일본 제국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권까지 장악한 일본은 이번에는 대한제국의 군대를 없애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한제국에 군대가 남아 있으면 언제든 일본에 저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한제국 군대는 일본의 압력으로 이미 여러 차례 축소된 상태였으며, 일본군에 비해 병력과 무기에서도 크게 열세였다. 그러나 아무리 약한 군대라도 정규군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에는 부담이었다.
특히 고종의 강제 퇴위에 반발한 대한제국 군인들 가운데 일부가 일본 경찰과 교전을 벌이자 일본은 한국군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하여 군대 해산 명령을 내리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웃기는 부분이 하나 있다.
일본이 내세운 공식적인 이유는 군비를 절약하고 장차 더욱 강력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기존 군대를 일시적으로 해산한다는 것이었다.
~~나라가 침략당하고 있는데 국방비를 아끼겠다고 군대부터 없애는 아주 창의적인 국방개혁이었다.~~
물론 일본이 실제로 대한제국에 강력한 독립군대를 만들어 줄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의 목적은 대한제국이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1907년 8월 1일 일본은 서울의 시위대 군인들에게 비무장 상태로 훈련원에 집합하도록 명령했다. 겉으로는 훈련을 실시하는 것처럼 알렸지만 실제 목적은 군인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군대를 해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박승환의 죽음에 분노한 군인들은 무기고를 열고 일본군과 싸우기 시작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군대를 해산하라고 명령했지만, 대한제국 군인들은 오히려 일본군에 총을 겨눈 것이다.
비록 일본군의 압도적인 전력으로 저항은 진압되었지만, 해산 군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전국 각지의 의병부대에 합류하면서 이후 항일무장투쟁은 더욱 확대되었다.
배경
대한제국군의 성립과 개편
대한제국은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수립된 국가로, 기존 조선의 군사제도를 근대적인 체계로 개편하려 했다.
고종은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근대적인 군사훈련과 무기 도입을 추진했으며, 중앙과 지방의 군사조직을 정비했다.
1899년에는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군사권을 직접 통할하도록 했고, 군대의 편제와 지휘체계 역시 개편했다.
당시 대한제국군은 크게 서울을 방어하고 황실을 호위하는 시위대(侍衛隊)와 지방의 치안을 유지하고 방어를 담당하는 진위대(鎭衛隊)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시위대: 서울에 주둔하면서 황궁과 수도를 방어하는 부대.
- 진위대: 지방에 주둔하면서 지역 방어와 치안유지를 담당하는 부대.
- 군악대: 군대의 의식과 행진 등에 참여하는 음악부대.
대한제국 정부는 유럽과 일본의 군사제도를 참고하여 군대를 개편했으며, 외국인 군사교관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군사력은 주변 열강에 비해 매우 제한적이었다.
특히 일본은 대한제국이 독자적인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을 경계했으며,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한국의 군사조직에 대한 간섭을 확대했다.
1905년에는 일본의 압력으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크게 감축되었다. 이에 따라 서울의 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 일부만이 남게 되었으며, 1907년에는 그마저도 일본의 통제를 받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대한제국군의 존재는 국가가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마지막 제도적 기반 가운데 하나였다.
을사늑약과 통감부 설치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1906년에는 한국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일본은 대한제국의 모든 국가기관을 즉시 해체하지는 않았다.
황제와 내각은 여전히 존재했으며, 군대와 경찰, 행정기관 등도 형식적으로는 대한제국 정부의 조직으로 남아 있었다.
일본은 이러한 조직들을 점차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고 했다.
군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대한제국 군인들 가운데에는 일본의 침략정책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지방의 진위대가 의병 토벌 명령을 거부하거나 의병과의 교전을 회피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한국군이 언제든 항일무장세력으로 변할 가능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까지 설치했는데 한국군이 자기들 편이 되어주지 않으니 골칫거리였던 모양이다.~~
고종 강제 퇴위와 군인들의 반발
1907년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7월 19일 고종은 황태자에게 군국대사를 대리하게 한다는 조칙을 발표했지만, 일본은 이를 황위 양위로 해석하고 7월 20일 순종의 즉위를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이에 서울에서는 고종의 강제 퇴위에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당시 시위에는 일반 시민들뿐 아니라 대한제국 군인들도 참여했다.
특히 7월 19일 서울 종로 일대에서는 시위보병 제1연대 제3대대 소속 군인 약 100명이 무기를 들고 시위에 가담하여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를 위험한 존재로 판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이미 군대 해산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군인들이 실제로 일본 경찰을 공격하자 해산을 서둘러야 한다고 판단했다.
일본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정규군 조직과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에 위협이었던 것이다.
이후 일본은 본국에 병력 증파를 요청하고 대한제국군의 무기와 탄약을 통제하기 시작했다.[1]
정미7조약과 비밀 부수각서
1907년 7월 24일 일본은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정미7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했다.
이 조약에 따라 대한제국 정부는 법률을 제정하거나 중요한 행정처분을 내릴 때 일본 통감의 승인을 받아야 했으며, 고위 관료를 임명할 때도 통감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그런데 일본은 공개된 7개 조항과 별도로 한일협약 실행에 관한 각서라는 비밀 문서를 체결했다.
이 문서에는 사법제도의 개편, 일본인 관리의 임명 등과 함께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군대와 관련된 조항에서는 장래에 징병법을 시행하여 강력한 군대를 육성한다는 명분으로 기존 군대를 정리하도록 규정했다.
다만 황궁을 수비하는 데 필요한 일부 병력은 남겨두기로 했다.
이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군사력을 완전히 무력화하면서도 겉으로는 군제 개혁의 형식을 유지하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한제국이 새로운 군대를 창설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명분으로 기존 군대를 없애 버린 것이다.
~~집을 새로 지어주겠다면서 기존 집을 철거해 놓고 정작 새 집은 안 지어주는 꼴이다.~~
중요한 점은 공개된 정미7조약의 7개 조항에는 군대 해산이 직접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군대 해산은 별도로 체결된 비밀 부수각서에 규정되었다.
따라서 정미7조약 제몇 조에 군대 해산 조항이 있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2]
군대 해산 결정
일본군의 사전 준비
일본은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 명령에 반발할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특히 서울에는 근대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수천 명의 대한제국 군인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집단적으로 봉기할 경우 일본군에도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이에 일본은 군대 해산을 강행하기 전에 치밀한 준비를 진행했다.
우선 대한제국 군인들의 영외 출입을 통제하고, 총기와 탄약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주요 화약고와 탄약고 역시 일본군의 감시 아래 놓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본국에 추가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일본 정부는 제12사단에서 혼성여단을 편성하여 한국에 파견했으며, 이미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3사단과 함께 군대 해산에 대비하도록 했다.
1907년 7월 31일까지 일본군의 주요 증원 병력이 서울에 도착하면서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위한 준비가 사실상 완료되었다.
일본군은 서울의 주요 도로와 군사시설을 장악하고 군인들이 봉기할 경우 즉시 진압할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
군대를 개편한다면서 정작 그 나라의 군대를 공격할 준비부터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제 개혁에 왜 외국군 증원 병력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면 애초에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3]
순종의 해산 조칙
1907년 7월 31일 일본의 압력에 따라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명령하는 조칙이 내려졌다.
해산 조칙은 순종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으며,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가 관련 절차에 관여했다.
조칙에서는 국가의 재정이 어려운 상황이므로 불필요한 군사비 지출을 줄이고, 장래에 징병제를 실시하여 더욱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현재의 군대를 일시적으로 해산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핵심 내용은 황궁을 호위하는 데 필요한 병력을 제외하고 나머지 군대를 해산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러한 설명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국가는 이미 외교권과 내정권을 일본에 빼앗긴 상태였으며, 일본군은 서울과 전국의 주요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대를 없앤다는 것은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마지막으로 보유하고 있던 무장력을 포기하는 행위였다.
더구나 일본은 대한제국의 독자적인 군사력 강화를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군대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군대를 없앤다는 주장은 사실상 군대 해산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적군이 집 앞까지 들어왔는데 국방개혁을 한다면서 군인을 전역시키는 황당한 짓이다.~~
이완용과 이병무의 역할
군대 해산 과정에서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의 역할도 중요했다.
이완용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했던 을사오적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1907년에는 정미7조약에 직접 서명했다.
이병무는 대한제국의 군사행정을 책임지는 군부대신이었지만, 일본의 군대 해산 요구에 협력했다.
특히 이완용은 군대 해산 과정에서 소요가 발생할 경우 일본군이 이를 진압하도록 요청하는 내용의 공문을 통감부에 전달했다.
일본 측의 외교문서에도 대한제국 정부가 군대 해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저항을 진압하도록 통감에게 의뢰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결국 대한제국 정부는 자기 나라 군대가 해산 명령에 저항하면 일본군이 이를 진압할 수 있도록 협조한 것이다.
국군을 지휘해야 할 정부가 외국군에게 자국 군인들을 진압해 달라고 요청한 셈이다.
~~군부대신이라는 사람이 자기 나라 군대를 지키는 대신 그 군대를 없애는 일을 도왔으니, 직책이 아까울 지경이다.~~
이병무는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정미칠적으로 분류되며, 이후 1910년 한일병합에도 협력하여 경술국적에도 포함되었다.[4]
서울 시위대 해산
훈련을 가장한 무장해제
1907년 8월 1일 일본은 서울에 주둔한 대한제국 시위대의 해산을 강행했다.
일본군은 대한제국 군인들이 무장한 상태로 집결하면 저항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군인들에게 동대문 인근 훈련원에서 도수교련을 실시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도수교련이란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실시하는 군사훈련을 의미한다.
군인들에게 훈련을 한다고 알렸지만 실제로는 무기를 내려놓게 한 뒤 군대 해산을 통보하려 했던 것이다.
일본군은 각 부대에 무기와 탄약을 반납하도록 했으며, 장교와 일본인 군사교관들의 인솔 아래 군인들을 훈련원으로 집결시키려 했다.
훈련원 주변에는 무장한 일본군이 배치되어 있었고, 기관총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이때 서울의 시위대는 제1연대와 제2연대 등의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모든 부대가 일본의 명령에 순응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한국군이 총을 들기 전에 총을 빼앗고,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해산 명령을 통보하려 했던 것이다.
~~그냥 해산시키면 반란이 날 것 같으니 훈련이라고 속인 다음 무장해제부터 시키는 방식이었다.~~
훈련원 해산식
8월 1일 서울의 훈련원에서는 군대 해산식이 진행되었다.
훈련원은 오늘날 서울 중구 을지로 일대에 위치했던 군사훈련시설로, 당시 대한제국 군인들을 집결시키기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일본은 이곳에서 군인들에게 해산 조칙을 발표하고 퇴직금 성격의 은사금을 지급하려 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각까지 집결한 군인의 수는 예상보다 적었다.
일부 군인들이 탈영하거나 집결 명령에 불응했으며, 특히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는 해산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들 부대에서는 이미 무장저항이 시작되고 있었다.
훈련원에 모인 군인들은 일본군의 감시 아래 해산 조칙을 전달받았다.
군인들에게는 일정한 금액의 은사금이 지급되었으며, 군복을 벗고 귀가하도록 지시했다.
일본은 장교에게 약 1년 반의 급여에 해당하는 금액을, 하사 이하 병사들에게는 약 1년의 급여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급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병사들에게는 자신들이 소속된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러한 돈이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없었다.
일부 군인들은 지급받은 지폐를 찢어 버리며 분노를 표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침략당한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들에게 돈을 주면서 이제 군복을 벗고 집에 가라고 한 것이다.
~~나라가 없어질 판인데 퇴직금 몇 푼 받았다고 기뻐할 군인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훈련원에서의 해산식은 일본의 군사적 통제 아래 진행되었지만, 같은 날 서울 남대문 일대에서는 대한제국 군인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박승환의 자결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대한 무장저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박승환(朴昇煥)은 대한제국 육군 참령으로,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 명령이 내려지자 박승환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그는 해산 조칙을 전달받는 자리에 직접 참석하지 않고 부하 장교를 대신 보냈다.
이후 군대 해산 사실을 보고받은 박승환은 부하들에게 무기를 반납하도록 지시한 뒤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의 유서에는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박승환의 자결 소식은 곧바로 부하 군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미 일본의 군대 해산 명령에 분노하고 있던 병사들은 대대장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자 무기를 다시 꺼내 들었다.
일부 병사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총기와 탄약을 확보했으며, 자신들을 해산시키려던 일본군과 일본인 교관들에게 공격을 시작했다.
군대 해산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지휘관의 죽음이 부하 군인들의 무장봉기로 이어진 것이다.
박승환은 직접 전투를 지휘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자결은 대한제국군의 마지막 대규모 항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 당시 항일저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나라를 팔아먹은 대신들은 일본군에 보호를 요청하고 있었는데, 일선 지휘관은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5]
남대문 전투
대한제국군의 봉기
1907년 8월 1일 박승환의 자결을 계기로 대한제국 시위대 장병들이 일본군에 저항하면서 남대문 전투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박승환이 지휘하던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의 병사들이 봉기했다.
이들은 무기고에서 총기와 탄약을 확보하고 일본군을 공격했으며, 인근에 주둔하던 제2연대 제1대대도 이에 가담했다.
이후 다른 시위대 소속 일부 군인들도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는 서울 남대문과 서소문 일대의 병영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일본군은 대한제국군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기관총과 보병부대 등을 동원했다.
대한제국 군인들은 이미 해산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지만, 병영과 주변 건물을 활용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저항했다.
당시 일본군은 한국군의 무기와 탄약을 상당 부분 통제하고 있었지만, 일부 부대가 무장을 되찾아 집단적으로 봉기하면서 예상보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나라를 침략한 일본군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저항한 대한제국 정규군이 서울 한복판에서 싸운 것이다.
~~대한제국의 황제와 대신들은 일본에 굴복하고 있었지만, 정작 군인들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치열한 시가전
대한제국 군인들은 병영과 주변 도로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미 한국군의 봉기를 예상하고 상당한 병력을 서울에 배치한 상태였다.
또한 기관총과 충분한 탄약, 조직적인 지휘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대한제국 군인들에 비해 유리한 조건에서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반면 대한제국군은 일부 부대만이 무장저항에 참여했으며, 다른 부대들과의 연락과 지원도 원활하지 않았다.
더구나 군대 해산 과정에서 총기와 탄약의 상당 부분이 일본군의 통제 아래 놓였기 때문에 장기간 전투를 지속할 여건도 부족했다.
대한제국군은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수 시간 동안 저항했지만, 결국 병력과 화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전투에 참여한 한국군 가운데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으며, 일부는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다.
다만 일부 군인들은 전투 현장을 빠져나와 이후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이처럼 남대문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대한제국 군인들이 외국군의 강제 해산 명령에 맞서 정규군으로서 마지막까지 저항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피해 규모
남대문 전투의 피해 규모는 사료와 집계 기준에 따라 일부 차이가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의 교과서 용어해설에서는 전투에 참여한 대한제국군 2개 대대의 피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 구분 | 대한제국군 |
|---|---|
| 전사 | 68명 |
| 부상 | 100여 명 |
| 포로 | 516명 |
이 수치는 당시 일본 측 기록 등을 바탕으로 정리된 것으로, 전투와 관련된 모든 피해를 완벽하게 파악한 결과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일본군 역시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구체적인 피해 수치는 자료와 계산 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다.
따라서 남대문 전투에서 발생한 양측의 사상자 수는 출처를 명확히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6]
전투 이후 대한제국군의 서울 시위대는 사실상 해체되었으며, 일본군은 수도에 대한 군사적 지배를 더욱 강화했다.
대한제국의 수도를 방어하던 정규군이 자국 수도에서 외국군과 싸우다가 강제로 해산된 것이다.
지방 진위대 해산
전국적인 해산 명령
서울의 시위대가 해산된 이후 일본은 지방에 주둔하던 진위대도 차례로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당시 지방 진위대는 전국에 8개 대대 규모로 분산되어 있었다.
일본은 서울에서 발생한 무장저항이 지방에서도 반복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에 여러 지역에 일본군을 배치하고 해산을 진행했다.
그러나 지방 진위대 가운데 일부는 해산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원주와 강화에서는 군인들이 무기고를 장악하고 일본군에 저항했으며, 일부 병사들은 기존 의병들과 합류하여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이러한 봉기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단순한 군제 개편이 아니라 전국적인 항일무장투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원주 진위대 봉기
1907년 8월 5일 강원도 원주에 주둔하던 진위대 군인들이 일본의 군대 해산 명령에 반발하여 봉기했다.
당시 원주 진위대의 대대장은 서울에 소집되어 있었으며, 부대 내부에서는 대대장 대리 김덕제와 특무정교 민긍호 등이 봉기를 준비했다.
민긍호는 대한제국군 출신의 하급 군인이었지만, 항일무장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했다.
원주 진위대 군인들은 무기고를 장악하고 총기와 탄약을 확보한 뒤 원주 시내로 진출했다.
이들은 경찰서와 우편취급소 등 일본의 지배와 관련된 시설을 공격했으며, 한때 원주 일대를 장악했다.
이후 일본군이 원주 진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지만, 상당수 군인들은 이미 무기를 가지고 의병활동에 나선 상태였다.
민긍호는 해산 군인들을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강원도와 경기도, 충청북도 등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그의 부대는 근대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군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존 의병부대보다 조직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이후 민긍호는 13도 창의군에도 참여하면서 정미의병의 주요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일본은 원주 진위대를 해산시켰지만, 그 군인들은 의병이 되어 다시 일본군과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군대를 없앴더니 군인들이 실업자가 되는 대신 반일 게릴라가 되었다.~~
원주 진위대 봉기는 군대 해산이 의병전쟁 확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7]
강화 진위대 봉기
원주에 이어 강화에서도 군대 해산에 반발한 군인들이 봉기했다.
당시 강화에는 수원 진위대 소속 분견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강화의 군인들과 지역 항일세력은 군대 해산 명령이 내려지자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기로 결정했다.
봉기에는 유명규, 지홍윤, 연기우 등 군인과 의병 지도자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무기고를 장악하고 일본 경찰과 친일세력을 공격했으며, 강화 지역을 일시적으로 장악했다.
1907년 8월 10일에는 일본군이 강화 갑곶에 상륙하면서 군인 및 의병들과 교전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병력과 화력이 우세했기 때문에 강화의 항일세력은 장기간 지역을 방어하기 어려웠다.
이후 일본군은 강화성을 장악하고 진위대를 해산시켰으며, 봉기에 참여했던 군인들 가운데 일부는 무기를 가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이후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다.
강화 진위대 봉기는 대한제국군의 해산이 서울에서만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지방에서도 군사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8]
북청 진위대 해산
일본은 1907년 8월부터 지방 진위대 해산을 단계적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원주와 강화에서 무장저항이 발생하면서 일본은 각 지역에 대한 군사적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일부 지방 진위대는 별다른 무장저항 없이 해산되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군인들이 탈영하거나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이러한 과정은 약 한 달 동안 이어졌으며, 1907년 9월 3일 함경남도 북청 진위대의 해산을 마지막으로 지방 진위대의 해산이 사실상 완료되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황궁 경비를 위한 소수 병력을 제외하면 독자적인 정규군 조직을 상실하게 되었다.
군대 해산 규모는 8,000명 이상으로 집계되며, 자료에 따라 8,800여 명이라는 수치도 사용된다.
다만 이 병력 전체가 일본군에 맞서 싸운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해산 명령에 따라 귀가했고, 일부는 탈영하거나 의병에 합류했으며, 일부 군인은 일본의 새로운 군사조직에 편입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대한제국이 국가를 방어할 독자적인 정규군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과
대한제국의 군사주권 상실
군대 해산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대한제국의 군사주권이 사실상 소멸했다는 것이다.
국가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려면 외교와 행정, 법률뿐 아니라 영토와 국민을 방어할 수 있는 군사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했고,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내정권까지 일본의 통제 아래 놓였다.
여기에 군대 해산으로 정규군까지 사라지면서 독자적으로 국가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
물론 군대가 해산되었다고 해서 1907년에 대한제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법적으로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황제와 정부, 국가의 명칭은 1910년 한일병합까지 형식적으로 존속했다.
그러나 국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권한과 이를 집행할 수 있는 군사력이 이미 일본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주권국가로서의 기능은 크게 약화되었다.
황제는 남아 있었지만 그 황제가 국가를 방어할 군대를 지휘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황제라는 직함은 유지시켜 주면서 군대는 전부 없애 버렸으니, 사실상 국가원수라기보다 일본의 보호 아래 놓인 왕실의 상징적 존재에 가까워졌다.~~
군대 해산은 일본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조치 가운데 하나였다.
정미의병의 확대
군대 해산은 대한제국의 정규군을 없애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역설적으로 항일의병운동을 더욱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해산된 군인들 가운데 일부가 무기를 가지고 의병부대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군사훈련을 받은 정규군 출신이었으며, 소총과 탄약을 다루는 데 익숙했다.
또한 부대 편제와 전술, 행군, 경계 등의 군사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기존의 의병부대는 유생과 농민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경우가 많았으며, 근대적인 무기와 군사훈련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해산 군인들이 합류하면서 의병부대의 조직과 전투능력이 강화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민긍호다.
민긍호는 원주 진위대 출신으로,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봉기한 뒤 해산 군인들을 이끌고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이 밖에도 전국 각지의 해산 군인들이 기존 의병부대에 합류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1907년부터 확대된 정미의병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정규군을 해산시켰지만, 그 군인들 가운데 일부는 오히려 의병이 되어 일본군과 계속 싸웠다.
~~군대를 없애서 저항을 막으려 했더니 군인들이 지휘체계 밖으로 나가 각자 알아서 항일전을 시작한 것이다.~~
13도 창의군과 서울 진공 작전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각 지역의 의병부대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07년 말 이인영과 허위 등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연합하여 13도 창의군을 조직했다.
이인영이 총대장으로 추대되었고, 허위는 군사장을 맡았다.
13도 창의군에는 기존 의병뿐 아니라 군대 해산 이후 의병에 합류한 군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본의 지배 중심지인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했다.
1908년 1월 허위가 이끄는 의병 선발대는 서울 동대문 밖 약 30리 지점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과 의병부대 사이의 연락 부족 등으로 인해 서울 진공 작전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의 의병부대들이 연합하여 일본군이 장악한 수도를 직접 공격하려 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군대 해산으로 정규군 조직을 상실한 이후에도 한국인들의 조직적인 무장저항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독립군 활동으로의 계승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본은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더욱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국내의 의병운동은 일본군과 경찰의 강력한 진압작전으로 점차 약화되었다.
그러나 일부 의병들은 만주와 연해주 등으로 이동하여 무장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이러한 의병 출신 인물들 가운데 일부는 이후 독립군 부대의 지휘관이나 병사로 활동했다.
대표적으로 홍범도는 정미의병 시기 함경도에서 포수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했으며, 이후 만주에서 독립군을 지휘했다.
다만 홍범도는 대한제국 정규군의 해산 군인 출신은 아니었다. 그는 포수 출신 의병장으로서 정미의병에 참여했으므로, 모든 독립군 지도자가 해산 군인 출신이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정미의병과 이후 독립군 활동에는 인적·경험적 연속성이 있었지만, 독립군은 국외의 독립운동 단체와 군사조직, 한국인 이주사회 등을 기반으로 새롭게 발전한 측면도 있었다.
따라서 대한제국 군대 해산은 정규군의 소멸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면서도, 이후 항일무장투쟁이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관련 인물
| 인물 | 당시 직책 | 주요 행적 |
|---|---|---|
| 이토 히로부미 | 초대 한국통감 | 정미7조약 체결을 주도했으며,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추진한 일본 측 핵심 책임자. |
| 하세가와 요시미치 | 한국주차군 사령관 | 일본군의 증원과 배치를 지휘하고 대한제국군의 무장해제 및 해산을 군사적으로 지원한 인물. |
| 이완용 | 내각총리대신 | 군대 해산에 협력했으며, 한국군의 저항을 일본군이 진압하도록 요청했다. ~~일본군에 자국군 진압을 부탁한 총리.~~ |
| 이병무 | 군부대신 | 대한제국의 군사행정을 책임지는 대신이었으나 일본의 군대 해산 요구에 협력했다. |
| 박승환 |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 군대 해산 명령에 반발하여 자결했으며, 그의 죽음은 남대문 전투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
| 남상덕 | 대한제국 육군 참위 | 1907년 8월 1일 남대문 전투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장교. |
| 민긍호 | 원주 진위대 특무정교 | 원주 진위대 봉기를 이끌고 해산 군인들을 규합하여 정미의병에 참여했다. |
| 연기우 | 강화 진위대 관련 의병장 | 강화 진위대 봉기에 참여했으며, 이후 경기·황해도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
| 유명규 | 강화 진위대 관련 의병장 | 군대 해산에 저항하여 강화 지역의 무장봉기에 참여했다. |
이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군대 해산을 추진하고 집행한 일본 측 책임자였으며, 이완용과 이병무는 대한제국 정부 내부에서 이에 협력한 인물들이었다.
반면 박승환과 남상덕, 민긍호 등은 일본의 군대 해산에 저항했던 군인들이다.
같은 군대 해산 사건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일본에 협력했고,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일본군과 싸웠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 사건이다.
군대는 국가가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하고 영토와 국민을 방어하기 위한 핵심적인 조직이다.
그런데 일본은 대한제국이 자신의 군대를 스스로 유지할 권리마저 박탈했다.
이는 단순히 군사제도를 개편하거나 비효율적인 부대를 정리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한제국이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며, 일본의 지배에 대한 무장저항 가능성을 사전에 제거하려는 조치였다.
특히 군대 해산을 위해 일본군을 증파하고 무기와 탄약을 통제한 뒤, 대한제국 군인들을 비무장 상태로 집결시키려 했다는 사실은 일본이 한국군을 잠재적인 저항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대한제국 정부의 협조 아래 군대 해산이 진행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정상적인 독립국가라면 외국군이 자국군의 해산을 강제하는 상황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은 이미 일본의 정치적·군사적 압력 아래 있었으며, 자국군을 보호해야 할 정부의 고위 관료들조차 일본의 정책에 협력했다.
그럼에도 일부 군인들은 해산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장저항에 나섰다.
박승환의 자결과 남대문 전투, 원주 및 강화 진위대의 봉기는 이러한 저항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물론 대한제국군 전체가 일본에 저항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군인과 장교들은 해산 명령에 따랐으며, 일부는 의병 토벌 등 일본의 정책에 협조한 전력도 있었다.
따라서 당시 대한제국군을 모든 구성원이 끝까지 일본에 저항했던 애국적인 군대라고 단순화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군대 해산에 반발한 일부 군인들이 실제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의병활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사건은 대한제국의 정규군이 사실상 소멸한 비극적인 사건인 동시에, 정규군 출신 군인들의 항일무장투쟁이 시작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나라가 군대를 지키지 못했지만, 군인들 가운데 일부는 끝까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국가를 지키라고 만든 군대가 국가의 명령으로 해산당했고, 그 명령을 거부한 군인들이 오히려 국가를 지키려 했다는 참으로 모순적인 사건이다.~~
여담
- 대한제국 군대 해산 조칙은 1907년 7월 31일 반포되었으며, 서울 시위대의 해산은 8월 1일에 강행되었다. 지방 진위대의 해산은 그해 9월 3일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대한제국 군대 전체가 8월 1일 하루 만에 해산된 것은 아니다.
- 일본은 군대를 해산하는 명분으로 장래에 더욱 강력한 군대를 창설하기 위한 군제 개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로 대한제국의 독자적인 정규군은 다시 창설되지 못했다.
- 당시 해산 조칙에서는 군대를 전부 없애는 것이 아니라 황궁 경비를 담당하는 일부 병력을 남겨두도록 했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모든 군인이 한 명도 남김없이 해산되었다는 설명은 정확하지 않다.
- 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식은 서울 동대문 인근 훈련원에서 진행되었다. 현재의 국립중앙의료원 일대에 해당하는 장소다.
- 일본은 군인들이 무장을 한 채 집결하면 저항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도수교련이라는 명목으로 비무장 상태에서 집결하도록 했다. 그러나 일부 부대는 명령에 불응하고 무기고를 장악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 박승환 참령은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자결했으며, 그의 죽음이 시위대 병사들의 무장봉기로 이어졌다. 당시 남대문 전투에서 대한제국 군인들이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 서울의 남대문 전투에서는 대한제국 군인 68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516명이 포로로 잡혔다는 집계가 전해진다. 다만 이러한 수치는 사료의 집계 기준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 8월 5일 원주 진위대 군인들이 봉기하여 일본에 저항했다. 민긍호는 이후 해산 군인들을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정미의병의 주요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 강화 진위대 역시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봉기했으며, 8월 10일에는 강화 갑곶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 1907년 군대 해산은 대한제국의 군사적 저항 능력을 제거하려는 일본의 정책이었지만, 일부 해산 군인들이 기존 의병부대에 합류하면서 정미의병의 전투력이 강화되는 결과도 낳았다.
- 군대 해산 당시의 사진과 기록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등에 남아 있다. 특히 훈련원에서 대한제국 군인들이 해산식에 참석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은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 영국의 언론인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는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 과정과 항일저항을 취재하면서 군대 해산과 관련된 상황을 기록했다. 그의 저술은 당시 일본의 침략과 한국인들의 저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외국인 기록 가운데 하나다.
- 해산된 대한제국군의 일부 인적·군사적 경험은 이후 의병활동과 독립군의 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다만 1948년 창설된 대한민국 국군이 대한제국군의 조직을 법적·제도적으로 그대로 계승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