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진공 작전(서울進攻作戰)은 1908년 1월 13도 창의군이 일본 제국의 지배 아래 놓인 대한제국의 수도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실시한 군사작전이다. 서울진공작전, 서울 탈환 작전이라고도 부른다.
1907년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13도 창의군이 추진했으며, 총대장 이인영과 군사장 허위가 작전을 지휘했다. 이들은 서울을 공격하여 한국통감부를 타격하고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 등을 파기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려 했다.
1908년 1월 허위가 이끄는 약 300명의 선발대는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지만, 후속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후퇴했다. 이후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귀향하면서 연합군의 지휘체계가 흔들렸고, 결국 서울 탈환은 실패했다.
다만 독립기념관의 일부 연구에서는 1908년 4월부터 5월까지 허위와 잔여 의병세력이 다시 서울 탈환을 추진한 활동을 제2차 서울 탈환 작전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 서울 진공 작전 | |
|---|---|
| 시기 | 1908년 1월 (주요 진공 작전) |
| 후속 작전 | 1908년 4~5월 재진공 시도 |
| 장소 | 대한제국 경기도 양주 및 서울 동대문 외곽 |
| 작전 주체 | 13도 창의군 |
| 총대장 | 이인영 |
| 군사장 | 허위 |
| 주요 지휘관 | 민긍호, 김규식, 연기우 등 |
| 연합군 추정 규모 | 약 48개 의진, 총 1만 명 |
| 최초 선발대 | 약 300명 |
| 목표 | 서울 탈환, 통감부 타격, 일본과 체결한 강제조약 파기, 국권 회복 |
| 상대 | 일본 제국 육군 및 주한 일본군 |
| 결과 |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선발대 후퇴, 연합군의 서울 탈환 실패 |
| 관련 사건 | 정미의병, 대한제국 군대 해산, 정미7조약 |
개요
전국의 의병들이 동네에서 일본군과 따로 싸우는 것만으로는 답이 없다고 판단하고, 아예 일본 통감부가 있는 서울을 직접 공격하려 했던 작전.
1907년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장악했다. 이어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면서 한국이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까지 제거했다.
그러나 일본의 예상과는 달리 전국 각지에서는 오히려 의병운동이 확대되었다.
군대 해산에 반발한 대한제국 군인들 가운데 일부가 무기를 들고 기존 의병부대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의병들이 대부분 지역별로 분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강원도의 의병은 강원도에서 싸우고, 경상도의 의병은 경상도에서 싸우고, 전라도의 의병은 전라도에서 싸우는 식이었다.
반면 일본군은 통일된 지휘체계와 근대적인 무기, 철도와 전신망 등을 갖추고 전국적으로 병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결국 의병들은 지역별로 따로 싸우는 것만으로는 일본의 지배를 무너뜨리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이인영과 허위 등은 전국의 의병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대규모 연합군을 조직하고 서울을 직접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중심지인 서울을 탈환하여 한국통감부를 무너뜨리고, 일본에 빼앗긴 국가의 주권을 회복하겠다는 것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일본군과 게릴라전을 벌이는 것도 좋지만, 이번에는 아예 적의 본진을 털어버리자는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했으며, 1907년 말 약 1만 명 규모의 연합군인 13도 창의군을 조직했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군과의 전력 차이였다.
서울에는 이미 상당한 규모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일본군은 기관총과 근대적인 군사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반면 의병들은 무기와 탄약이 부족했고, 지역별로 다른 지휘체계와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1908년 1월 허위가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 외곽까지 접근했지만, 후속부대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했다.
게다가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해 귀향하면서 연합군의 지휘체계에도 큰 혼란이 발생했다.
약 1만 명의 의병을 조직하고도 정작 서울 앞에서는 약 300명의 선발대가 일본군과 싸워야 했던 것이다.
배경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강화했다.
일본은 그해 11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1906년에는 한국통감부를 설치했다.
초대 통감으로 임명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외교와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일본의 지배체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고종은 일본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으며, 이어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권까지 장악했다.
1907년 8월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외교권과 내정권을 사실상 상실하고, 국가의 독립을 지킬 정규군마저 잃게 되었다.
나라의 정부는 일본의 통제 아래 놓였고, 나라를 지켜야 할 군대는 강제로 해산당한 것이다.
~~이쯤 되면 일본은 대한제국이라는 간판만 남겨두고 국가의 기능은 하나씩 뜯어가고 있었다.~~
정미의병의 확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은 전국적인 항일무장투쟁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7년 8월 1일 서울에서는 박승환 참령의 자결을 계기로 대한제국 시위대 군인들이 일본군과 싸우는 남대문 전투가 발생했다.
지방에서도 원주와 강화의 진위대 군인들이 봉기했으며, 해산 군인들 가운데 일부는 무기를 가지고 기존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이들은 근대적인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소총과 탄약을 다루는 방법에도 익숙했다.
그 결과 의병부대의 전투력과 조직력이 이전보다 크게 강화되었다.
특히 민긍호는 원주 진위대 출신으로, 해산 군인들을 이끌고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군에 저항했다.
경기도에서는 허위가 의병들을 규합했고, 충청도에서는 이강년 등이 활동했다.
그러나 의병부대들은 지역별로 따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으며, 일본군에 비해 무기와 보급체계에서도 불리했다.
이에 전국의 의병부대를 연합하여 대규모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3도 창의군 결성
1907년 9월 이은찬과 이구재 등이 의병을 모집하고 이인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면서 전국적인 의병연합 구상이 본격화되었다.
이인영은 각 지역의 의병장들에게 격문을 보내 연합군을 조직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호응한 의병들은 경기도 양주 일대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양주는 서울과 비교적 가까우면서 강원도와 경기도 북부의 의병들이 모이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1907년 12월 전국 각지의 의병장들은 양주에서 회의를 열고 13도 창의대진소라는 연합조직을 결성했다.
총대장은 이인영이 맡았으며, 군사장에는 허위가 임명되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약 48개 의병부대, 1만 명 규모의 의병이 연합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이 숫자는 연합에 참여한 병력을 추산한 것이며, 1만 명이 모두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집결해 동일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 연합군에는 해산 군인과 포수, 농민, 유생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으며, 각 부대의 무기와 훈련 수준에도 차이가 있었다.
또한 모든 지역의 의병부대가 실제로 서울 인근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전국 규모의 연합의병군을 조직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로서는 상당한 성과였다.[1]
작전 계획
서울 탈환의 목표
13도 창의군이 설정한 가장 중요한 목표는 서울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대한제국 황제와 정부가 존재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일본 통감부와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의병들이 서울을 탈환한다면 일본의 지배체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주요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 서울에 진입하여 일본 통감부를 공격한다.
- 일본의 지배에 협력하는 친일 내각을 축출한다.
-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 등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을 파기한다.
-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내정권을 회복한다.
- 국제사회에 의병의 정당성을 알리고 외교적 지원을 확보한다.
이러한 계획은 단순히 일본군의 지방 주둔지를 공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 자체를 무너뜨리겠다는 정치적·군사적 목표를 가진 작전이었다.
~~그동안 일본군의 지부들을 공격했다면 이번에는 본사를 직접 털겠다는 소리였다.~~
서울 외곽 집결 계획
13도 창의군은 전국 각지의 의병부대를 서울 동대문 밖으로 이동시킨 뒤 병력을 집결시켜 공격하려 했다.
당시 의병들은 경기도 양주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서울 동북쪽으로 접근하는 경로를 이용했다.
작전의 핵심은 선발대가 먼저 서울 외곽으로 진격하여 진지를 확보하고, 후속부대들이 합류한 뒤 일제히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군사장 허위가 선발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허위는 경기도 북부에서 오랫동안 의병활동을 전개했으며, 서울과 주변 지역의 지형에도 익숙했다.
또한 휘하에는 대한제국의 해산 군인과 근대적인 총기를 다루는 의병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 연합군을 일정한 시간에 한 장소로 집결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각 지역의 의병부대들은 서로 다른 지휘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병력과 이동 속도도 달랐다.
게다가 의병들에게는 근대적인 통신장비가 충분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철도와 전신망을 활용하여 병력을 신속하게 이동시키고 명령을 전달할 수 있었지만, 의병들은 전령과 지역 주민들의 연락망에 크게 의존해야 했다.
전국의 의병들을 한곳에 모으는 것과 그 의병들을 정해진 시간에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동네마다 따로 싸우던 의병들이 갑자기 전국 단위 합동작전을 하려니 생각보다 준비할 게 많았던 것이다.
국제사회에 대한 호소
13도 창의군은 무장투쟁뿐 아니라 외교적인 방법으로도 일본에 대응하려 했다.
이인영과 허위 등은 의병의 무장투쟁을 국제법적으로 정당한 전쟁행위로 인정받고자 했다.
당시 일본은 의병을 '폭도'라고 부르며 단순한 범죄집단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병 지도부는 자신들이 국가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싸우는 정당한 무장세력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서울에 사람을 잠입시켜 각국 영사관에 통문을 전달하도록 했다.
통문에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탈한 사실을 비판하고, 의병을 국제공법상 전쟁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정의와 인도를 존중하는 국가들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러한 사실은 1909년 7월 30일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서울 진공 작전 관련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2]
이는 의병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단순한 지방의 무장봉기가 아니라 국가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의병들이 국제법상의 교전단체로 인정받기를 요청했다고 해서 실제로 열강들이 그 지위를 승인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과 영국 등 주요 국가들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으며, 의병에 대한 실질적인 군사적 지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전 전개
허위의 선발대 출동
1908년 1월 13도 창의군은 서울 진공 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군사장 허위는 약 300명의 의병으로 구성된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그는 각 부대에 서울 동대문 밖으로 집결하도록 명령했으며, 선발대를 앞세워 일본군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후속부대가 도착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선발대는 서울 동대문 밖 약 30리 지점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의 거리 단위로 30리는 대략 12km 정도에 해당하지만, 실제 행군 경로와 정확한 진지 위치는 사료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오늘날의 특정 장소로 단정하기 어렵다.
허위는 이 지점에서 후속부대의 도착을 기다린 뒤 대규모 공격을 실시하려 했다.
서울 탈환을 목표로 결성된 의병연합군이 실제로 서울 외곽까지 진격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선발대는 예정된 위치까지 도달했지만 후속부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이미 의병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방어 준비
일본군은 13도 창의군이 서울을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방어태세를 강화했다.
서울 동대문 일대에는 기관총을 배치했으며, 의병들이 이동할 수 있는 주요 진격로를 차단하기 위한 병력을 준비했다.
또한 한강의 선박 운항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의병들의 이동을 방해했다.
당시 일본군은 한국에 주둔한 정규군을 중심으로 통일된 지휘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철도와 전신망 등을 활용하여 의병들의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었다.
반면 의병들은 각 부대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없었고, 후속부대와의 연락도 원활하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는 작전이 시작되자 곧바로 드러났다.
일본군은 의병들이 충분한 병력을 집결시키기 전에 선발대를 먼저 공격하기로 했다.
의병들이 1만 명의 병력을 모아 서울을 공격하기 전에, 일본군이 먼저 선발대부터 공격한 것이다.
~~적군이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줄 이유가 없었으니 일본군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동대문 외곽 전투
1908년 1월 중순 무렵 허위의 선발대는 서울 동대문 외곽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독립기념관의 허위 인명사전에는 1월 15일에 이 교전이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허위의 선발대는 후속부대가 도착하면 함께 서울을 공격하려 했지만, 일본군이 먼저 공격하면서 계획이 어긋났다.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의병들은 소총 등으로 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선발대의 병력은 약 300명에 불과했으며, 일본군은 우세한 화력과 조직적인 공격을 펼쳤다.
게다가 의병들의 후속부대는 예정된 시각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결국 허위의 선발대는 일본군을 상대로 장시간 교전했지만, 탄약과 병력의 부족으로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갈 수 없게 되었다.
일본군과 싸우는 동안 지원군은 오지 않았고, 선발대는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909년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당시 기록 역시 허위가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으나, 후속부대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후퇴했다고 설명하고 있다.[3]
다만 다른 자료인 《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에는 허위가 100명의 감사병(敢死兵)을 이끌고 선두에서 싸웠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는 전체 선발대를 약 300명으로 기록한 자료와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 선두에서 교전한 병력의 규모와 편제를 정확하게 복원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허위가 약 300명의 선발대를 이끌었다고 설명하되, 사료에 따라 전투에 직접 참여한 선봉 인원의 수가 다르게 기록된다는 점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김규식과 연기우의 부상
허위의 선발대가 일본군과 교전하는 과정에서 김규식과 연기우 등이 부상을 입었다.
두 사람은 당시 허위가 지휘하던 의병부대의 주요 인물이었다.
특히 연기우는 대한제국 강화 진위대 출신으로, 군대 해산 이후 의병활동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그는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며, 13도 창의군에도 참여했다.
《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에 따르면 허위의 선발대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김규식과 연기우가 총탄에 맞아 부상을 입었으며, 일본군에 붙잡히기도 했다.
다만 두 사람의 체포와 탈출 과정은 관련 기록에 차이가 있어 세부적인 경위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이후 연기우는 다시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경기 북부와 임진강 유역에서 일본군에 저항했다.[4]
이러한 사례는 서울 진공 작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의병들이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본대의 진격 지연
허위의 선발대가 일본군과 싸우는 동안 다른 의병부대들도 서울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속부대들은 일본군의 공격과 이동 경로의 문제, 부대 간 연락 부족 등으로 예정된 시간에 집결하지 못했다.
특히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일부 의병부대는 서울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야 했다.
그 결과 연합군의 병력을 한꺼번에 집중시켜 서울을 공격한다는 계획이 무너졌다.
물론 허위의 선발대가 후퇴한 뒤에도 일부 후속부대는 서울 외곽으로 접근했다.
독립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1908년 1월 28일 무렵 이인영이 이끄는 본대의 일부 병력 약 2,000명이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미 선발대의 전투가 실패한 상황이었고, 다른 지역의 의병들 역시 충분히 집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총대장 이인영에게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인영의 귀향
부친상 소식
1908년 1월 28일 무렵 이인영은 고향에 있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당시 이인영은 전국 의병연합군의 총대장으로서 서울 진공 작전을 지휘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군사 지휘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이인영은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은 유생으로, 부모의 장례와 삼년상을 치르는 것을 중요한 도덕적 의무로 여겼다.
그는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경상북도 문경으로 돌아갔으며, 군사장 허위에게 이후의 일을 맡겼다.
또한 여러 의병부대에 의병활동을 일시적으로 중지하라는 취지의 통문을 전달했다.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전국의 의병들이 모여 있었는데, 총대장이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전선에서 이탈한 것이다.
~~효도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나라가 망할 판이고, 하필 총사령관이 삼년상을 치르러 가버렸으니 나머지 의병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감했을 것이다.~~
다만 이인영이 아무런 대책 없이 군대를 버리고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허위에게 지휘권을 넘겼으며, 부친상을 마친 뒤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작전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총대장이 갑자기 지휘를 중단한 것은 연합군의 결속력과 작전 수행능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지휘체계의 혼란
이인영의 귀향 이후 허위는 연합군의 지휘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이미 서울 진공 작전은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었다.
선발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했으며, 후속부대들도 예정된 시간에 집결하지 못했다.
여기에 전국 의병들의 정치적·상징적 지도자였던 이인영이 물러나면서 지휘체계의 안정성까지 약화되었다.
각 지역 의병장들은 원래 독자적인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명령체계 아래에서 장기간 활동하기 어려웠다.
결국 일부 의병부대는 본래의 활동지역으로 돌아갔으며, 전국적인 연합군의 조직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1만 명에 가까운 의병을 규합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의병들을 끝까지 하나의 군대로 유지하는 데에는 실패한 것이다.
대규모 연합군을 조직했는데 총사령관이 빠지고 부대끼리 연락도 제대로 안 되니, 결국 다시 각자도생으로 돌아간 셈이다.
다만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한 원인을 이인영의 귀향 하나로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
일본군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의병연합군의 통신·보급·지휘체계 부족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제2차 서울 탈환 시도
연합군의 재정비
1908년 1월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한 뒤에도 허위와 일부 의병장들은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했다.
허위는 경기 북부와 임진강, 한탄강 유역을 중심으로 의병들을 다시 규합했다.
당시 허위의 휘하에는 김규식, 연기우, 김수민, 이은찬 등 여러 의병장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의병부대들을 재정비하면서 일본군의 군사시설과 관공서를 공격하고, 통신시설을 파괴하는 등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지역적 저항에 그치지 않고 다시 서울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와도 연결되었다.
독립기념관의 일부 연구에서는 1908년 4월 말부터 5월 말까지 이어진 이러한 활동을 제2차 서울 탈환 작전으로 구분한다.[5]
다만 이 시기의 작전은 1908년 1월처럼 전국의 의병이 대규모로 집결한 단일 작전이라기보다, 기존 연합군의 잔여 세력을 중심으로 진행한 재공세와 군사활동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서울 외곽의 재공세
1908년 4월 21일 허위는 이강년 등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전국에 통문을 보내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면서 다시 의병들을 규합하려 했다.
이후 4월부터 5월까지 경기 북부의 의병부대들은 서울 외곽으로 진격하기 위한 군사활동을 전개했다.
일본군 역시 이러한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의병들의 이동 경로를 차단하고 진압작전을 강화했다.
그 결과 서울 외곽과 경기 북부 지역에서는 여러 차례 교전이 발생했다.
그러나 의병들은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의병부대들의 전력이 이전보다 약화되었고, 전국적인 연합군을 다시 조직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제2차 서울 탈환 시도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통감부에 대한 요구
1908년 5월 허위는 부하 박노천 등을 서울로 파견하여 한국통감부와 접촉하도록 했다.
그는 일본 측에 고종의 복위와 외교권 회복, 통감부 철거, 대한제국 관청에 임명된 일본인 관리들의 철수 등을 요구했다.
관련 기록에는 30여 개의 요구조건이 제시된 것으로 나타난다.
허위는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무장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행동은 서울 진공 작전이 단순한 군사적 공격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본은 의병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08년 6월 11일 허위는 경기도 영평군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이로써 허위가 주도하던 서울 탈환을 위한 추가적인 군사행동 역시 크게 위축되었다.[6]
실패 원인
일본군과의 군사력 차이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일본군과 의병연합군 사이의 군사력 차이였다.
일본군은 근대적인 소총과 기관총, 충분한 탄약, 조직적인 지휘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서울에는 일본군의 주요 부대와 통감부 관련 군사시설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철도와 전신망을 활용하여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
반면 의병들은 부대마다 무장 상태가 달랐다.
일부 해산 군인들은 근대적인 소총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의병들은 화승총이나 구식 총기 등을 사용했다.
탄약과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보급체계도 부족했다.
게다가 일본군이 서울의 주요 도로와 교통망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병들이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키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의병들에게는 서울을 공격할 의지가 있었지만, 일본군이 장악한 수도를 점령하고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군사력은 부족했던 것이다.
부대 간 연락과 협조 부족
13도 창의군은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들을 급하게 통합하여 만든 연합조직이었다.
각 부대들은 자신들이 활동하던 지역에서는 일본군과 능숙하게 싸울 수 있었지만, 전국적인 규모의 합동작전을 수행한 경험은 부족했다.
특히 서울 진공 작전에서는 각 부대가 정해진 시각에 동일한 장소에 집결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후속부대들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일본군이 각 의병부대의 이동 경로를 공격했으며, 의병들 사이의 통신과 연락도 원활하지 않았다.
결국 약 300명의 선발대가 먼저 일본군과 교전하게 되었고, 다른 의병부대들은 충분한 지원을 제공하지 못했다.
전체 병력이 1만 명이라는 사실보다 실제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 몇 명을 한곳에 집중시킬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군대는 숫자만 많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다. 1만 명이 있다고 해도 300명씩 따로 싸우면 그 300명은 그냥 300명일 뿐이다.~~
지휘체계의 불안정
13도 창의군은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는 지휘체계를 구성했다.
그러나 각 지역 의병장들은 원래 독자적인 지휘권과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연합군 전체의 명령이 모든 부대에 동일하게 전달되고 집행되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귀향하면서 지휘체계가 더욱 불안정해졌다.
허위가 지휘권을 이어받았지만, 이미 일부 부대는 전투에서 피해를 입었고 후속부대의 집결도 늦어지고 있었다.
이는 전국적인 연합군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 상당한 장애가 되었다.
신분적 갈등과 조직적 한계
13도 창의군의 지도부는 주로 유생과 양반 출신 의병장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의병운동에는 평민과 포수, 농민, 해산 군인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고 있었다.
일부 평민 출신 의병장들은 상당한 전투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분과 출신에 따른 차별 때문에 연합군의 지도부에 충분히 참여하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신돌석은 경상북도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평민 출신 의병장이었지만, 최종적인 지휘부 편제에서는 제외되었다.
다만 신돌석의 부대가 실제로 양주에 집결하지 못한 데에는 지역적 거리와 일본군과의 교전 등 여러 사정이 있었으므로, 그의 불참을 오직 신분 문제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럼에도 당시 의병연합군의 지도부가 유생 중심의 전통적인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은 중요한 한계로 지적된다.
이는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는 전국적인 무장조직을 구축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주요 인물
| 이름 | 당시 역할 | 주요 행적 |
|---|---|---|
| 이인영 | 13도 창의군 총대장 | 전국 의병을 규합하고 서울 진공을 추진했다. 작전 도중 부친상을 당해 귀향하면서 허위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
| 허위 | 13도 창의군 군사장 | 약 300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다. 1차 작전 실패 후에도 서울 탈환을 다시 추진했다. |
| 민긍호 | 관동창의대장 | 원주 진위대 출신으로, 해산 군인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연합군의 주요 전력을 담당했다. |
| 김규식 | 허위 휘하 의병장 | 서울 진공 작전의 선발대 전투에 참여했으며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부상을 입었다. |
| 연기우 | 의병 대대장 | 강화 진위대 출신으로 서울 진공 작전에 참여했다. 교전 중 부상을 입었으며 이후에도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다. |
| 이강년 | 호서창의대장 | 연합군 지휘부 편제에 포함되었으나 실제 양주 집결과 서울 진공에 직접 참여한 정도는 기록에 차이가 있다. |
| 이은찬 | 의병 지도자 | 이인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는 데 참여했으며, 전국적인 의병연합군의 조직과 활동에 기여했다. |
이 가운데 작전에서 직접 선발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교전한 주요 지휘관은 허위였다.
이인영은 전국적인 연합군의 조직과 총지휘를 담당했으며, 민긍호와 이강년 등은 지역별 의병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다만 연합군의 지휘부에 이름이 포함되었다는 사실과 실제로 서울 외곽 전투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구분해야 한다.
작전 이후
13도 창의군의 해체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한 뒤 13도 창의군은 전국적인 연합조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총대장 이인영이 귀향했고, 선발대의 패배로 병력과 탄약도 소모되었다.
또한 일본군의 진압작전이 강화되면서 각 지역의 의병들이 서울 외곽에 계속 집결해 있기 어려워졌다.
결국 의병부대들은 본래의 활동지역으로 돌아가거나 개별적인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전국적인 연합군이 해체되었다고 해서 정미의병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허위와 민긍호, 이강년 등 여러 의병장들은 계속 일본군에 저항했다.
특히 경기 북부와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등에서는 의병들이 산악지형을 활용한 유격전을 벌였다.
허위의 체포와 처형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한 뒤 허위는 경기 북부와 임진강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여러 의병장들을 규합하면서 일본군과 경찰, 통신시설 등을 공격했고, 다시 서울 탈환을 시도했다.
그러나 1908년 6월 11일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 것이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허위는 자신이 한국의 의병장이므로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1908년 10월 21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허위의 죽음은 정미의병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항일무장투쟁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7]
이인영의 체포와 처형
이인영은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 뒤 다시 의병활동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는 삼년상을 마친 뒤 다시 의병을 조직하려 했지만, 일본 헌병의 추적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1909년 6월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인영은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09년 9월 처형되었다.
전국의 의병들을 규합하여 서울 탈환을 추진했던 총대장과 군사장은 결국 모두 일본에 의해 처형된 것이다.
- 의병전쟁의 지속
서울 진공 작전의 실패 이후에도 항일의병운동은 계속되었다.
1908년과 1909년에는 전라도와 강원도, 경기 북부 등을 중심으로 의병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일본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특히 1909년에는 호남 지역에서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실시하여 의병부대와 이들을 지원하는 지역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로 인해 국내의 대규모 의병운동은 점차 약화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도 일부 의병들은 무장저항을 계속했지만, 상당수는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새로운 활동기지를 찾았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후 국외 독립군의 무장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의의와 평가
서울 진공 작전은 한국 근대 의병운동에서 전국적인 연합군을 구성하여 일본의 지배 중심지를 공격하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전의 의병운동은 주로 지역별로 전개되었으며, 서로 다른 지역의 의병부대가 하나의 작전을 위해 대규모로 협력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 진공 작전에서는 전국의 의병들을 규합하고, 공동의 지휘체계를 구성하며, 일본의 지배 중심지인 서울을 공격하려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또한 의병의 무장투쟁을 국제법상 정당한 전쟁행위로 인정받기 위해 각국 영사관에 통문을 전달하는 외교적 노력도 이루어졌다.
이는 당시 의병 지도자들이 단순히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만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군사적·외교적 활동을 함께 추진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만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작전은 명백히 실패했다.
일본군의 무기와 조직력이 우세했으며, 의병연합군은 충분한 보급체계와 통신망을 갖추지 못했다.
특히 선발대와 후속부대가 제시간에 합류하지 못하면서 대규모 연합작전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
이인영의 부친상으로 인한 지휘권 이양 역시 이미 불안정했던 연합군의 결속력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작전의 실패만으로 그 역사적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서울 진공 작전은 대한제국의 정규군이 해산되고 정부가 일본의 통제 아래 놓인 상황에서도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국가의 주권을 회복하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비록 수도를 탈환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전국 의병들이 하나의 목표 아래 연합하여 일본의 지배 중심지를 공격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병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또한 이 작전에서 드러난 통합 지휘와 보급, 통신의 중요성은 이후 무장독립운동이 보다 조직적인 군사활동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사례가 된다.
~~의병들의 의지는 충분했지만, 아무리 용감한 사람들이 모여도 지휘체계와 보급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다.~~
여담
- 서울 진공 작전은 일반적으로 1908년 1월에 실시된 13도 창의군의 서울 탈환 시도를 가리킨다. 다만 독립기념관의 일부 연구에서는 1908년 4~5월에 이루어진 추가적인 재공세를 제2차 서울 탈환 작전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 당시 연합군의 규모는 약 48개 의진, 1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전체 참여 병력을 추산한 것으로, 1만 명이 모두 동시에 서울을 공격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 허위가 이끈 선발대는 약 300명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일부 관련 기록에서는 직접 선두에 섰던 병력을 100명의 감사병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 허위의 선발대가 접근한 지점은 서울 동대문 밖 약 30리로 기록되어 있다. 대략 12km 정도의 거리지만, 실제 위치를 오늘날의 특정 장소로 확정하기는 어렵다.
- 1908년 1월 15일 무렵 허위의 선발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후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부 대중적인 자료에서는 작전의 전체 시기를 1월 말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후속부대의 진격과 이인영의 귀향까지 포함한 시기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
- 허위의 선발대가 일본군과 싸우는 동안 다른 의병부대들은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전체 병력이 상당한 규모였음에도 선발대는 지원 없이 일본군과 싸워야 했다.
- 작전에 참여한 연기우와 김규식은 일본군과의 교전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연기우는 이후에도 경기 북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했다.
- 13도 창의군은 각국 영사관에 통문을 보내 자신들을 국제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는 의병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국가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전쟁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 총대장 이인영은 작전 도중 부친상을 당하여 경상북도 문경으로 돌아갔다. 이후 삼년상을 마친 뒤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했지만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군사장 허위는 작전 실패 이후에도 경기 북부에서 의병들을 규합하고 서울 탈환을 다시 시도했다. 그러나 1908년 6월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같은 해 10월 처형되었다.
- 일부 의병장들은 연합군 지휘부에 이름을 올렸지만 실제 양주 집결이나 서울 진공 작전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 따라서 명목상의 참여와 실제 전투 참여를 구분해야 한다.
- 13도 창의군의 지휘부가 유생 중심으로 구성되면서 일부 평민 출신 의병장들이 충분히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은 당시 의병연합군의 조직적 한계로 지적된다.
- 서울 진공 작전의 실패 이후에도 의병전쟁은 계속되었으며, 일본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1909년 남한 대토벌 작전 등 대규모 군사작전을 실시했다.
- 1909년 7월 30일 《대한매일신보》에는 서울 진공 작전의 지휘부와 계획, 전투 과정 등을 설명한 기사가 게재되었다. 이는 오늘날 작전의 실제 전개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 가운데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