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의병(乙未義兵)은 1895년 일본 제국에 의한 을미사변과 친일 내각의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항일무장투쟁이다. 1895년 말부터 1896년까지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전기의병 또는 갑오·을미의병의 주요 부분을 이루는 의병운동이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조선 내정간섭이 심화되고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되자 이에 분노한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단발령이 강제로 시행되면서 농민과 포수 등 일반 백성들의 참여도 확대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하고 단발령이 철회되면서 대부분의 의병부대가 해산되었지만, 일부 의병들은 무장투쟁을 계속하거나 만주로 이동했다. 을미의병은 이후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으로 이어지는 근대 항일의병운동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 을미의병(乙未義兵) | |
|---|---|
| 시기 | 1895년 말 ~ 1896년 |
| 장소 | 조선 전국 각지 |
| 성격 | 항일무장투쟁, 위정척사운동, 근왕운동 |
| 주요 원인 | 을미사변, 단발령, 일본의 내정간섭 |
| 주요 참여 세력 | 유생, 농민, 포수, 지방 주민 등 |
| 주요 의병장 | 유인석, 이소응, 김하락, 이춘영, 김복한, 민용호, 이강년, 허위, 노응규, 기우만 등 |
| 주요 활동 지역 | 제천, 춘천, 이천, 홍주, 강릉, 안동, 진주, 장성 등 |
| 주요 상대 | 일본군, 친일 내각의 관군 및 지방 관료 |
| 주요 사상 | 위정척사, 존왕양이, 근왕창의 |
| 쇠퇴 원인 | 아관파천 이후 단발령 철회, 고종의 의병 해산 권고, 관군의 진압 |
| 의의 | 근대 항일의병운동의 전국적 확산 및 후속 의병운동의 기반 형성 |
개요
일본놈들이 왕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상투까지 자르라고 하자 빡친 선비들이 칼을 들고 일어난 사건.
1895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 하자 일본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더욱 과격한 방법을 선택했다.
바로 조선의 왕비인 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이다.
1895년 10월 8일 일본인 낭인들과 군인, 외교 관계자 등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당연히 조선인들의 분노는 엄청났다.
그런데 일본의 지원을 받던 김홍집 내각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본식 근대화를 추진한다며 단발령을 시행했다.
단발령은 성인 남성들에게 상투를 자르도록 요구한 명령이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가 싶겠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서 상투는 단순한 헤어스타일이 아니었다.
성리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조선인들에게 머리카락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신체의 일부였으며,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외국의 간섭으로 왕비가 살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외국의 영향을 받는 정부가 상투까지 자르라고 명령한 것이다.
나라의 왕비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했는데 이제는 일본식으로 머리까지 자르라는 상황이 된 것이다.
~~왕비를 죽여 놓고 머리카락까지 자르라고 하니 아무리 점잖은 선비들이라도 참을 수 있었겠는가.~~
결국 전국 각지에서 유생들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고 친일 내각을 타도하며 국왕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을미의병을 단순히 근대적인 민족독립운동과 동일하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당시 의병장들의 상당수는 전통적인 유교적 질서를 지키려는 위정척사 계열의 유생들이었으며, 일본의 침략뿐 아니라 서양식 근대화와 개화정책에도 반대했다.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애국적인 성격과 기존의 신분질서 및 유교적 가치관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성격이 함께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후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으로 이어지면서 점차 변화하게 된다.
배경
청일전쟁과 일본의 내정간섭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일본은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만 군대를 파견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위를 확보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다.
이후 일본은 조선의 정치와 행정제도 개편에 깊숙이 개입했으며, 청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1895년 4월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래의 종주권을 포기하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확보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바로 러시아 제국이었다.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와 함께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은 요동반도를 반환하도록 압박했다.
일본이 러시아의 요구에 굴복하자 조선의 궁정에서는 러시아를 활용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명성황후와 일부 대신들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일본의 간섭을 약화시키려 했다.
일본은 이러한 움직임을 자신들의 조선 지배계획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청나라를 몰아냈더니 이번에는 러시아가 나타났으니 일본 입장에서는 상당히 짜증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남의 나라 왕비를 죽일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을미사변
1895년 10월 8일 일본은 조선에서 친러시아 세력이 강화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당시 주한 일본공사였던 미우라 고로는 일본인 낭인과 외교 관계자, 군인 등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습격하도록 했다.
일본 측 행동대에는 조선의 친일 세력과 일부 군인들도 가담했다.
이들은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명성황후는 당시 조선의 왕비였으며, 1897년 대한제국 수립 이후 황후로 추존되었다. 따라서 사건 당시의 신분을 엄밀하게 표현하면 왕비가 맞다.
이 사건은 조선의 주권을 침해한 중대한 범죄였으며, 일본의 침략적 성격을 국제사회에도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런데 명성황후를 살해한 뒤에도 일본과 친일 내각은 사건을 은폐하고 정당화하려 했다.
친일 내각은 명성황후를 왕후의 지위에서 폐위하는 조칙까지 발표했다.
조선의 유생들은 이러한 조치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 일본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친일 내각을 타도하기 위한 무장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을미사변은 을미의병이 발생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1]
단발령 시행
1895년 12월 30일 김홍집 내각은 단발령을 공포했다. 당시 조선의 음력 날짜로는 11월 15일이었다.
단발령은 조선의 성인 남성들에게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으로 머리카락을 짧게 만들도록 요구하는 정책이었다.
당시 정부는 근대적인 풍속과 생활양식을 확립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조선의 유생들과 상당수 백성들은 이를 전통적인 윤리와 풍속을 파괴하는 조치로 받아들였다.
특히 유교에서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신체를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것을 효도의 중요한 원칙으로 여겼다.
그 유명한 《효경》의 구절인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가 이러한 인식을 대표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상투를 강제로 자르도록 명령한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 모양을 바꾸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신이 평생 지켜온 윤리와 가치관을 국가가 강제로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더구나 단발령을 시행한 정부는 일본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일본이 왕비를 살해하고 조선의 정치까지 간섭하더니 이번에는 조선인들의 머리카락까지 자르라고 명령하는 상황이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면 근대화가 되는 것도 아닌데, 일본의 영향 아래 있던 정부는 일단 상투부터 자르고 보자는 식이었다.~~
실제로 고종과 왕세자도 강제로 머리를 잘랐으며, 지방에서는 관리들과 경찰이 백성들의 상투를 자르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의병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만 을미의병이 단발령 때문에 처음 발생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이미 을미사변 직후부터 일부 지역에서 의병봉기가 시작되고 있었으며, 단발령은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2]
전개
초기 의병봉기
1895년 을미사변 직후부터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문석봉이다.
문석봉은 충청도 회덕과 유성 일대에서 활동한 인물로, 을미사변 이후 일본과 친일 내각을 몰아내기 위해 의병을 조직했다.
그는 1895년 가을 유성과 회덕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지만 관군의 진압을 받아 봉기가 실패했다.
당시 의병들은 일본군만을 상대로 싸운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영향 아래 있던 조선 정부의 관군과 경찰도 의병을 진압하는 데 동원되었다.
그 결과 조선인 의병들이 조선의 관군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외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일어난 사람들이 정작 자기 나라 정부의 군대와 싸워야 했던 것이다.
~~나라를 지키겠다고 총을 들었더니 나라의 군대가 자기들을 잡으러 오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초기 봉기들은 대부분 규모가 크지 않았고 조직적인 준비도 부족했다.
그러나 단발령이 시행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의병의 전국적 확대
1895년 말 단발령이 공포되자 전국 각지의 유생들과 백성들이 잇달아 의병을 일으켰다.
경기도와 충청도, 강원도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대규모 의병부대가 조직되었으며, 이후 경상도와 전라도 등지로 봉기가 확산되었다.
주요 의병부대들은 지역의 유생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지만, 실제 전투에는 농민과 포수 등 일반 백성들이 다수 참여했다.
의병들은 친일 내각의 지방관들을 공격하거나 일본군의 군사시설을 파괴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관아와 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또한 의병장들은 격문을 발표하여 국왕을 보호하고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백성들이 봉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을미의병은 지역의 명망 높은 유생들이 지휘하고 평민과 농민들이 전투를 담당하는 형태가 많았다.
이러한 구조는 의병을 빠르게 조직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훗날 의병부대 내부에서 신분적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주요 지역별 의병활동
제천의병
을미의병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규모가 컸던 의병부대 중 하나는 유인석이 이끈 제천의병이다.
제천의병은 화서학파 계열의 유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항로의 학문적 계보를 계승한 유생들은 일본의 침략과 개화정책에 강하게 반대했으며, 전통적인 유교적 질서를 지키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1895년 말 이춘영, 안승우, 김백선 등이 의병을 조직했으며, 이후 여러 지역의 의병들이 합류하면서 규모가 확대되었다.
초기의 의병부대는 이필희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1896년 초 유인석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면서 조직이 재편되었다.
유인석은 호좌의진(湖左義陣)을 이끌고 충청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제천의병은 충주성을 공격하여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충주성 점령 과정에서 의병들은 일본군 및 관군과 싸웠으며, 친일 성향의 지방관들을 처단했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반격이 이어지면서 의병들은 충주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후 제천을 중심으로 항쟁을 계속했지만, 1896년 봄 관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근거지를 상실했다.
유인석은 이후 서북지방으로 이동하여 의병을 다시 조직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이동했다.
그는 이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했으며, 한말 의병운동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3]
이천의병
경기도 이천에서는 김하락을 중심으로 의병이 조직되었다.
김하락은 구연영, 조성학, 신용희, 김태원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했으며, 지역의 포수들을 군사력으로 활용했다.
특히 화포군 출신인 방춘식 등이 의병 모집에 협력하면서 총기를 다룰 수 있는 병력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천의병은 주변 지역의 의병들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관군에 저항했다.
1896년 1월에는 이천 백현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후 활동 범위를 확대했다.
이천의병은 여주와 안성 등 주변 지역의 의병들과 연합하여 남한산성 일대로 진출했다.
남한산성은 서울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의병들이 이곳을 장악한다면 수도에 대한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병부대 내부의 지휘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했고,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도 이어졌다.
결국 남한산성에 집결했던 의병들은 해산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천의병은 지역별로 분산되어 있던 의병들이 연합하여 대규모 항일무장투쟁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춘천의병
강원도 춘천에서는 이소응이 의병을 이끌었다.
이소응은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으로, 일본의 침략과 단발령 시행에 반대하여 의병을 조직했다.
그는 춘천 지역에서 약 1,000명의 의병을 규합했으며, 춘천부를 점령하고 친일 성향의 관찰사 조인승을 처단했다.
이소응의 의병부대는 강원도 북부와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했으며, 일본의 지배에 협력하던 지방관들과 관군에 저항했다.
춘천의병은 유생들의 지도 아래 농민과 지역 주민들이 다수 참여한 의병부대였다.
다만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이 강화되면서 점차 활동이 어려워졌다.
이소응은 이후에도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항일운동을 이어갔으며, 을미의병을 대표하는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강릉의병
강원도 강릉에서는 민용호가 의병을 조직했다.
민용호는 1896년 강릉을 중심으로 관동구군도창의소를 설치하고 주변 지역의 의병들을 규합했다.
그의 의병부대는 강릉뿐 아니라 강원도 동해안과 영서지역에서도 활동했다.
특히 원산 방면으로 진격하여 일본군의 군사시설을 공격하려 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민용호의 의병부대는 이후 강원도와 황해도, 평안도 등을 이동하면서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공격과 군수물자 부족으로 인해 점차 활동이 어려워졌다.
결국 민용호는 부하들과 함께 만주로 이동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할 기회를 모색했다.
강릉의병은 지역적 활동 범위가 넓었으며, 관동지역의 의병운동을 대표하는 부대 가운데 하나였다.
홍주의병
충청남도 홍주에서는 김복한, 이설, 안병찬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대하여 의병을 조직했으며, 일본의 침략에 협력하는 친일 내각을 타도하려 했다.
홍주의병은 지역의 유생들과 관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으며, 한때 홍주 일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의병에 협력할 것으로 기대했던 홍주 관찰사 이승우가 입장을 바꾸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관군이 의병을 공격하자 의병부대는 충분한 저항을 이어가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홍주의병은 이처럼 초기 봉기에 실패했지만, 이후 이 지역에서 항일의병운동이 다시 일어나는 기반이 되었다.
특히 1906년 민종식이 이끈 홍주의병은 을사의병 시기 대표적인 항일무장투쟁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안동의병
경상북도 안동에서는 권세연을 중심으로 의병이 조직되었다.
당시 안동은 유교적 전통이 강한 지역이었으며,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들이 다수 활동하고 있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알려지자 안동의 유생들은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과 친일 내각에 저항했다.
의병들은 안동부를 점령하고 군기고의 무기를 확보했으며, 친일 성향의 지방관과 일본인들을 공격했다.
권세연은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부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관군의 반격이 이어지면서 의병들은 안동부를 계속 장악하지 못했다.
이후 일부 의병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해산했다.
안동의병은 영남지역에서 위정척사 계열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대표적인 의병운동이었다.
진주의병
경상남도 진주에서는 노응규와 정한용 등이 의병을 조직했다.
노응규는 최익현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운 유생으로, 일본의 침략과 단발령 시행에 강하게 반대했다.
1896년 초 진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그는 친일 성향의 관리들을 공격하고 군기고의 무기를 확보했다.
이후 경상남도 여러 지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으며, 김해 일대에서는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이 계속되면서 의병들은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노응규는 이후에도 항일운동을 이어갔으며, 경상남도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평가된다.
호남 지역의 의병
전라도에서는 기우만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기우만은 기정진의 학문적 계보를 계승한 유생으로,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일본의 침략에 저항했다.
그는 장성과 나주 등 호남 지역에서 의병들을 규합했으며, 여러 지역의 의병들을 광주로 집결시키려 했다.
이를 통해 호남창의군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관군의 공격과 지역별 의병부대의 조직적 한계 때문에 대규모 항쟁을 장기간 지속하지는 못했다.
호남 지역의 을미의병은 중부지역에 비해 봉기 시기가 다소 늦었지만, 이후 이 지역에서 항일의병운동이 발전하는 기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주요 의병장
| 이름 | 주요 활동 지역 | 주요 행적 |
|---|---|---|
| 유인석 | 제천·충주 | 호좌의진을 이끌고 충주성을 점령했으며, 이후 만주로 이동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
| 이소응 | 춘천 | 강원도 춘천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춘천부를 장악했으며 친일 관찰사를 처단했다. |
| 김하락 | 이천·남한산성 | 이천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주변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에 저항했다. |
| 이춘영 | 지평·원주·제천 | 김백선 등과 함께 의병을 조직했으며, 이후 제천의병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 김복한 | 홍주 | 이설, 안병찬 등과 함께 홍주의병을 조직하고 친일 내각에 저항했다. |
| 민용호 | 강릉·원산 | 관동구군도창의소를 조직하고 강원도와 동북부 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
| 이강년 | 문경·제천 | 문경에서 의병을 조직했으며, 이후 제천의병에 합류하여 활동했다. |
| 허위 | 선산·김천 | 경상북도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했으며, 이후 정미의병 시기에도 주요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
| 권세연 | 안동 | 안동의병을 지휘하여 안동부를 점령하고 친일 관료와 일본 세력에 저항했다. |
| 노응규 | 진주·김해 | 진주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경상남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
| 기우만 | 장성·광주 | 호남 지역의 의병을 규합하여 호남창의군을 조직했다. |
| 문석봉 | 유성·회덕 | 을미사변 직후 충청도에서 초기 의병봉기를 주도했다. |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일본의 침략에 저항했다.
그러나 의병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일부 평민과 포수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김백선과 같이 평민 출신으로 실제 전투를 지휘한 인물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을미의병이 단순히 양반들만의 운동은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을미의병의 특징
위정척사 사상
을미의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들이 지도부의 중심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위정척사는 바른 것을 지키고 잘못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고 서양의 사상과 외래세력의 침투를 배격하는 사상적 흐름을 의미했다.
을미의병을 이끈 유생들은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면서 전통적인 유교적 정치질서와 국왕의 권위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단순히 일본군을 몰아내는 것뿐 아니라 친일 내각이 추진한 개화정책에도 반대했다.
특히 단발령은 유교적 가치관을 훼손하는 대표적인 정책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을미의병은 항일운동인 동시에 전통적인 정치·사회질서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기도 했다.
물론 모든 의병들이 서양의 문물이나 근대적인 제도 자체를 동일한 정도로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병장들 가운데 상당수가 근대화와 일본의 침략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개화정책 전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일본의 침략에 저항한 것은 정당했지만, 근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국가의 독립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는 별도로 평가해야 할 문제다.
~~일본놈들을 몰아내는 것과 상투를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 반드시 같은 문제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근왕창의 사상
을미의병은 국왕에 대한 충성을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이를 근왕창의(勤王倡義)라고 부른다.
근왕은 국왕을 돕고 보호한다는 뜻이며, 창의는 의로운 뜻을 가지고 군사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의병장들은 일본이 조선의 정치에 간섭하고 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을 국왕의 권위를 짓밟는 행위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국왕에 대한 충성과 국가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당시 조선의 정부가 이미 일본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의병들은 국왕을 위해 싸운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국왕의 이름으로 파견된 관군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조선의 정치적 혼란과 주권 침해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근왕적 성격은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의병운동이 급격히 쇠퇴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국왕이 직접 의병들에게 해산을 권고하자 상당수 의병들은 더 이상 무장투쟁을 계속할 명분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유생과 평민의 신분 갈등
을미의병은 유생들이 지도부를 구성하고 농민과 포수 등이 병력을 제공하는 형태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에는 문제가 있었다.
당시 조선 사회에는 여전히 신분적 차별이 남아 있었으며, 일부 의병장들은 평민 의병들을 양반과 동등한 존재로 대우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제천의병의 선봉장이었던 김백선이다.
김백선은 평민 출신의 포수로, 초기 의병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실제 전투에서도 활약했다.
그러나 그는 유인석의 의병부대에서 지휘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군율 위반을 이유로 처형당했다.
당시 기록에는 그가 양반 출신 지휘관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는 설명도 등장한다.
이 사건은 의병부대 내부에 존재하던 신분적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다만 김백선의 처형에는 작전 실패와 지휘체계에 대한 불복종 문제도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단순히 평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형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평민 출신 의병이 양반 중심의 지휘체계 아래에서 차별을 받았다는 점은 중요한 문제였다.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함께 싸우면서도 내부에서는 여전히 양반과 평민을 구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과 싸우기도 바쁜데 아군끼리 신분 문제로 싸웠으니 제대로 된 지휘체계가 유지될 리 없었다.~~
이러한 신분적 한계는 이후 의병운동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1905년 을사의병과 1907년 정미의병에서는 평민 출신 의병장들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으며, 특히 정미의병 시기에는 해산 군인과 포수 등이 중요한 전투세력으로 성장했다.[4]
아관파천과 의병의 해산
아관파천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부른다.
당시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일본과 친일 내각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러시아의 보호를 통해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려 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이동하자 김홍집 내각은 무너졌고, 친일 성향의 주요 관료들이 체포되거나 일본으로 도피했다.
김홍집과 정병하는 군중들에게 살해되었으며, 유길준 등 일부 관료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친러시아 성향의 새로운 내각이 수립되면서 일본의 조선 내 영향력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
새로운 정부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단발령의 강제시행을 중단하고, 각종 세금을 탕감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는 을미의병의 중요한 명분 가운데 하나였던 단발령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관파천이 곧 조선의 완전한 자주권 회복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영향력이 약화된 대신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었으며, 조선은 여전히 열강들의 세력 다툼 속에 놓여 있었다.
~~일본놈들한테서 벗어나려고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갔더니 이번에는 러시아가 조선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아관파천은 을미의병이 쇠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5]
고종의 의병 해산 권고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에게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발표했다.
새롭게 수립된 정부가 단발령의 강제시행을 중단하고 친일 내각을 제거했으므로, 의병들이 계속 무장투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의병들은 국왕에 대한 충성을 중요한 명분으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국왕이 직접 의병을 해산하라고 명령하자 상당수 의병장들은 이를 거부하기 어려웠다.
많은 의병부대가 무장을 해제하고 귀향했으며, 일부는 정부의 회유정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모든 의병들이 해산한 것은 아니었다.
유인석과 민용호 등은 일본군이 여전히 조선에 주둔하고 있고 국가의 독립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장투쟁을 계속하려 했다.
하지만 관군의 진압과 군수물자 부족 등으로 활동이 어려워졌으며, 결국 일부는 만주로 이동했다.
1896년 여름을 지나면서 국내의 대규모 을미의병 활동은 대부분 쇠퇴했고, 그해 가을 무렵에는 사실상 종식 단계에 접어들었다.
의병들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싸웠지만, 정작 자신들이 보호하려던 국왕의 명령으로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왕을 지키려고 일어났는데 왕이 그만 싸우라고 하니 계속 싸울 명분이 애매해진 것이다.~~
다만 을미의병이 해산되었다고 해서 항일운동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일부 의병들은 이후 다시 봉기했으며, 평민 출신 의병들 가운데 일부는 다른 형태의 민중운동으로 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후 의병운동으로의 계승
을사의병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의병들이 일어났다.
이를 을사의병이라고 부른다.
을사의병은 을미의병과 마찬가지로 유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일본의 침략이 더욱 심화된 상황에서 국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성격이 강해졌다.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최익현, 민종식, 신돌석 등이 있다.
특히 신돌석은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경상북도 영해를 중심으로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을미의병 시기의 유생 중심 지도체계에서 점차 다양한 신분의 의병장들이 등장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미의병
1907년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한 뒤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에 반발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전국적인 항일무장투쟁이 더욱 확대되었다.
이를 정미의병이라고 부른다.
정미의병은 을미의병과 비교하여 참여 계층과 전투력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을미의병은 지역의 유생들이 지휘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정미의병에서는 해산 군인과 평민 출신 의병장들의 역할이 크게 확대되었다.
또한 근대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합류하면서 의병부대의 조직과 전술도 발전했다.
대표적으로 이인영, 허위, 민긍호, 이강년, 홍범도 등이 활동했다.
특히 을미의병 시기부터 활동했던 허위와 이강년은 이후 정미의병 시기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정미의병은 전국적인 의병 연합인 13도 창의군을 조직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하는 등 더욱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을미의병에서 시작된 근대 항일의병운동은 이렇게 변화하고 발전하여 이후 국외 독립군 활동으로도 이어졌다.
| 구분 | 을미의병 | 을사의병 | 정미의병 |
|---|---|---|---|
| 시기 | 1895~1896년 | 1905~1907년 전반 | 1907~1910년경 |
| 주요 원인 | 을미사변, 단발령 | 을사늑약 | 정미7조약, 군대 해산 |
| 주요 지도층 | 유생 중심 | 유생·평민 의병장 | 유생·평민·해산 군인 |
| 대표 인물 | 유인석, 이소응 | 최익현, 신돌석 | 이인영, 허위, 민긍호 |
| 주요 특징 | 위정척사·근왕운동 | 국권회복 중심의 항일투쟁 | 해산 군인 합류와 무장투쟁 확대 |
의의와 평가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에 전개된 최초의 전국적 규모의 항일의병운동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1894년 갑오의병 등 앞선 무장저항도 존재했지만,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을미의병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한국인들의 집단적인 반발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왕궁을 점령하고 내정에 간섭했으며, 왕비를 살해하는 범죄까지 저질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지역의 유생들과 백성들이 무기를 들고 일본군 및 친일 내각에 저항한 것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다만 을미의병을 현대적인 의미의 민족독립운동과 완전히 동일하게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을미의병의 주요 지도자들은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유교적 질서를 지키려 했으며, 일본의 침략뿐 아니라 근대적인 개화정책에도 반대했다.
이러한 보수적인 가치관은 의병운동의 명분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적인 국가 개혁과 새로운 군사제도를 수용하는 데 한계로 작용했다.
또한 양반 중심의 지도부와 평민 의병 사이의 신분적 갈등도 존재했다.
이는 의병운동 내부의 조직적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들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저항했다는 역사적 의미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을미의병은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의 침략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으며, 이후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으로 이어지는 항일무장투쟁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을미의병은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을 지키기 위한 운동이면서 동시에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항일운동이었다는 두 가지 성격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일본을 몰아내겠다는 생각은 옳았지만, 상투까지 반드시 지켜야 나라가 살아남는다고 생각한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여담
- 을미의병의 이름은 의병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895년이 육십갑자로 을미년(乙未年)이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 을미의병은 1895년 말부터 1896년까지 활동했으며,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의병이 모두 1895년에 활동한 것은 아니다.
- 을미의병이 발생한 1895년 당시 국호는 조선이었다. 대한제국이 수립된 것은 1897년이므로, 을미의병을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이라고 부르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시대가 맞지 않는다.
- 을미사변은 양력 1895년 10월 8일에 발생했다. 당시 조선의 음력으로는 8월 20일이었다. 역사서에서 서로 다른 날짜가 등장하는 것은 음력과 양력의 차이 때문이다.
- 단발령 역시 음력 1895년 11월 15일, 양력으로는 12월 30일에 공포되었다.
- 단발령 자체가 을미의병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 이미 을미사변 직후부터 일부 지역에서 의병봉기가 발생하고 있었으며, 단발령은 이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역할을 했다.
- 을미의병의 주요 지도자들은 대부분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들이었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는 농민과 포수 등 일반 백성들이 다수 참여했다.
- 제천의병의 선봉장이었던 김백선은 평민 출신이었으며, 의병부대 내부의 갈등으로 처형당했다. 이 사건은 을미의병에 존재했던 신분적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 을미의병은 일본군뿐 아니라 조선의 관군과도 싸웠다. 당시 친일 내각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관군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무너지고 단발령이 철회되자 상당수 의병부대가 해산했다. 그러나 유인석과 민용호 등의 의병부대는 저항을 계속하거나 만주로 이동했다.
- 을미의병 시기에 활동했던 허위와 이강년 등은 이후에도 항일의병운동에 참여했다. 이는 을미의병과 이후의 항일무장투쟁 사이에 인적 연속성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 을미의병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유인석은 전국의 백성들에게 항일의병운동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을 발표했다. 대표적인 문헌으로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 전해진다.
- 근대 항일의병운동은 일반적으로 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으로 구분하지만, 이러한 분류가 각 시기의 의병활동이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부 의병장과 지역의 항일세력은 여러 시기에 걸쳐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