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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발생했던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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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흥선대원군 집권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구한말의 주요 사건을 연도순으로 정리한 틀입니다.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은 1907년 정미의병 당시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들이 연합하여 조직한 항일의병군이다. 십삼도창의군, 13도 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13도 연합의병이라고도 부른다.

1907년 말 경기도 양주에서 결성되었으며, 이인영이 총대장, 허위가 군사장을 맡았다. 전국 각지의 의병부대들이 참여한 대규모 연합조직으로, 1908년 1월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이 장악한 서울을 탈환하고 한국통감부를 타도하려 했다.

당시 집결한 의병은 약 48개 부대, 1만 명으로 추정되며, 이 가운데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 출신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선제공격과 무기 부족, 의병부대 간의 지휘·연락 문제 등으로 서울 진공 작전은 실패했으며, 이후 연합조직은 해체되었다.

13도 창의군은 비록 군사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지역별로 분산되어 있던 의병들이 전국적인 연합전선을 구성하고 일본의 지배 중심지를 직접 공격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 항일무장투쟁의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
정식 조직 명칭 13도 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다른 명칭 십삼도창의군, 13도 연합의병
결성 시기 1907년 11~12월
결성 장소 대한제국 경기도 양주
활동 시기 1907년 말 ~ 1908년 초
성격 항일의병 연합군, 무장항일운동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주요 지휘관 민긍호, 이강년, 문태수, 박정빈, 권중희, 방인관, 정봉준 등
추정 병력 약 48개 의진, 1만 명
주요 참여 세력 정미의병, 해산 군인, 유생, 농민, 포수 등
주요 목표 서울 탈환, 통감부 타도, 국권 회복, 친일 내각 축출
주요 군사행동 서울 진공 작전(1908년 1월)
결과 서울 진공 실패, 연합군 해체 및 각 지역 의병활동으로 전환
관련 사건 고종 강제 퇴위, 정미7조약, 대한제국 군대 해산

개요

전국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의병들이 이대로는 답이 없다고 판단하고 힘을 합쳐 서울을 탈환하려 했던 사건.

1907년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권까지 장악했다. 여기에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면서 한국의 독자적인 군사력까지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의 예상과는 달리 해산된 군인들 가운데 일부는 무기를 들고 의병에 합류했고, 전국 각지에서 항일무장투쟁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문제는 이 의병들이 대부분 지역별로 따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강원도에서 싸우는 의병들은 강원도에서, 경상도에서 싸우는 의병들은 경상도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식이었다. 의병부대들은 자신이 활동하는 지역의 지형에 익숙했고 주민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전국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하기에는 조직과 연락체계가 부족했다.

반면 일본군은 통일된 지휘체계와 근대적인 무기, 철도와 전신망 등을 갖추고 있었다.

의병들이 아무리 용감하게 싸워도 지역별로 따로 싸우는 것만으로는 일본의 지배를 무너뜨리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이인영과 허위 등은 전국의 의병들을 하나로 모아 대규모 연합군을 조직하고 서울을 직접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목표는 상당히 대담했다.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는 서울을 탈환하고, 한국통감부를 공격하며,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조약들을 무효화하고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것이었다.

동네마다 따로 싸우지 말고 아예 일본 놈들의 본진을 털어버리자는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로 모여들었으며, 1907년 말 13도 창의군이라는 연합조직이 결성되었다.

당시 약 1만 명에 이르는 병력이 집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가운데 근대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해산 군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908년 1월 서울 진공 작전은 일본군의 선제공격과 의병부대들의 연합작전 실패 등으로 좌절되었다.

특히 작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해 귀향하면서 지휘체계에도 큰 혼란이 발생했다.

결국 서울 탈환에는 실패했지만, 13도 창의군은 의병운동이 단순한 지역적 무장저항을 넘어 전국적인 독립전쟁으로 발전하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배경

을사의병과 전국적인 항일운동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분노한 유생들과 지방의 무장세력들은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대표적으로 최익현은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민종식은 충청남도 홍주에서 의병을 이끌었으며, 신돌석은 경상북도 영해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나 당시 의병들은 대부분 지역별로 활동했으며, 하나의 지휘체계 아래에서 협력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일부 의병들은 다른 지역의 부대와 연합하여 작전을 수행했지만, 전국적인 연합군을 구성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일본군은 근대적인 군사장비와 조직력을 활용하여 의병부대를 각개격파하는 방식으로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의병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각 지역에서 나름 열심히 싸우고는 있었지만, 일본군은 전국 단위로 움직이는데 의병들은 지역별로 따로 움직이니 전쟁이 제대로 풀릴 리 없었다.

정미7조약과 군대 해산

1907년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뒤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권까지 장악했다.

이어 같은 해 8월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서울의 시위대 군인들은 해산 명령에 저항했고, 박승환 참령의 자결을 계기로 남대문 전투가 발생했다.

지방에서도 원주와 강화의 진위대 군인들이 봉기했으며, 해산 군인들 가운데 일부는 무기를 가지고 기존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이러한 변화는 의병운동의 전투력과 규모를 크게 강화했다.

특히 원주 진위대 출신의 민긍호는 해산 군인들을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강원도 일대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부터 의병운동에는 군사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국의 의병들이 여전히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 어려웠다.

이에 의병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전국의 의병부대를 통합하여 대규모 군사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결성 과정

이은찬과 이구재의 활동

13도 창의군의 결성은 1907년 9월 이은찬과 이구재가 의병들을 모집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강원도 원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인물들로, 해산 군인 약 80명을 포함한 5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그러나 대규모 의병부대를 이끌기 위해서는 여러 지역의 유생들과 의병장들이 인정할 만한 지도자가 필요했다.

이에 두 사람은 경상북도 문경에 머물고 있던 이인영을 찾아갔다.

이인영은 1895~1896년 을미의병에도 참여했던 인물로, 유학자로서의 명망과 의병활동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

이은찬과 이구재는 이인영에게 의병대장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이인영은 부친을 모시며 은거하고 있었지만, 나라의 위기를 외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의병장직을 수락했다.

1907년 9월 이인영은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관동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그는 각 지역의 의병장들에게 격문을 보내 군사를 모으기 시작했다.[1]

이인영의 전국 의병 연합 구상

이인영은 처음부터 강원도 일대에서만 일본군과 싸울 생각이 아니었다.

그는 여러 지역에 흩어진 의병들을 통합하여 전국적인 연합군을 조직하고, 서울을 직접 공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당시 일본의 지배 중심지는 서울에 설치된 한국통감부였다.

따라서 서울을 탈환한다면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인영은 강원도 원주와 지평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면서 전국 각지의 의병장들에게 격문을 보냈다.

그는 의병부대들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하나의 군사조직을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국내 의병들뿐 아니라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도 격문을 보내 일본의 침략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구상은 단순한 지역 의병부대의 연합을 넘어 전국적인 항일전쟁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전국의 의병들이 각자 싸우는 대신 하나의 지휘체계 아래에서 서울을 공격하자는 계획이었다.

일본군이 근대적인 군대로 쳐들어오는데 의병들이 계속 동네별 동호회처럼 싸우면 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허위의 합류

13도 창의군 결성 과정에서 이인영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허위였다.

허위는 을미의병 시기부터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했던 유생 출신 의병장이었다.

1907년에는 경기도 연천과 적성, 철원 등지에서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는 해산 군인들을 받아들여 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했으며, 경기 북부 지역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허위는 전국적인 의병 연합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이인영의 계획에 협력했다.

1907년 11월에는 휘하 의병부대를 양주 방면으로 이동시켜 다른 지역의 의병들과 합류하도록 했다.

허위는 이후 13도 창의군의 군사장으로 임명되어 실제 군사작전의 수립과 지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인영이 전국 의병들의 정치적·상징적 지도자였다면, 허위는 연합군의 군사적 활동을 이끈 주요 지휘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13도 창의군 결성

양주 집결

1907년 11월부터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시 양주는 서울 북동쪽에 위치하여 강원도와 경기 북부의 의병들이 집결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특히 서울과 비교적 가까워 서울 진공 작전을 준비하는 데 유리한 위치였다.

이인영의 격문에 호응하여 강원도와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여러 지역의 의병부대들이 집결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약 48개 의진, 총 1만 명의 의병이 연합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역별로는 강원도와 경기도의 의병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강원도 의병은 약 6,000명, 경기도 의병은 약 2,000명으로 추산되며, 그 밖에 다른 지역의 의병들이 합류했다.

다만 이러한 숫자는 당시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추정치이며, 모든 병력이 같은 날짜에 한 장소에 집결하여 일률적인 지휘를 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일부 지역의 의병부대는 명목상 연합군에 참여했지만 일본군과의 전투나 이동 문제로 실제 양주 집결에 합류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을 한곳에 모아 대규모 연합군을 구성했다는 사실 자체가 상당한 성과였다.[2]

조직 편제

1907년 말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연합조직을 구성하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했다.

조직의 공식적인 명칭은 13도 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였다.

여기서 '13도'는 당시 대한제국의 전국 13개 도를 가리키며, '창의'(倡義)는 의로운 뜻을 내세워 군사를 일으킨다는 의미다.

'대진소'(大陣所)는 여러 군사부대를 통합하여 지휘하는 본영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13도 창의대진소라는 이름에는 전국의 의병들을 하나로 모아 일본에 맞서 싸우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다만 명칭에 13도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실제 전국 13개 도에서 동일한 규모의 병력이 참여했다는 것은 아니다.

연합군의 중심은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였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참여 규모가 작거나 실제 집결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었다.

1907년 12월에는 연합군의 군사조직을 재편하여 지휘체계를 정비했다.

총대장은 이인영이 맡았고, 군사장에는 허위가 임명되었다.

또한 주요 지역별로 창의대장을 임명하여 각 지역의 의병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1907년 말부터 1908년 초까지 편제가 여러 차례 변경되었기 때문에 각 자료에 등장하는 지휘부 명단은 일부 차이가 있다.

주요 지휘관

이름 주요 직책 주요 행적
이인영 총대장 전국의 의병들을 규합하여 13도 창의군을 조직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했다.
허위 군사장 연합군의 군사작전을 지휘했으며, 약 300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 동대문 밖까지 진격했다.
민긍호 관동창의대장 원주 진위대 출신으로 해산 군인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했으며, 강원도 의병의 주요 전력을 담당했다.
이강년 호서창의대장 충청도 일대의 대표적인 의병장. 지휘부 명단에 포함되지만 실제 양주 집결에는 합류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문태수 전라창의대장·호남창의대장 전라도 의병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초기 연합군의 편제에 포함되었다.
박정빈 교남창의대장 지휘부 재편 과정에서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창의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권중희 진동창의대장 황해도와 경기도 방면의 의병활동에 참여했으며, 허위가 군사장으로 이동한 뒤 관련 직책을 맡았다.
방인관 관서창의대장 평안도 지역의 의병들을 이끌고 연합군에 참여했다.
정봉준 관북창의대장 함경도 지역의 의병들을 이끌고 연합군에 참여했다.
이은찬 관동창의군 중군장 등 이구재와 함께 이인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연합군의 결성을 추진했다.
이구재 관동창의군 총독장 등 의병 모집과 관동창의군 조직에 참여했으며, 연합군 결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이인영과 허위는 연합군 전체의 지휘를 담당했으며, 민긍호는 해산 군인들을 중심으로 한 주요 전력을 지휘했다.

그러나 지휘부 편제와 실제 전투 참여 여부는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강년은 호서창의대장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독립기념관의 이인영 관련 자료에는 그가 당시 충청북도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있어 실제 양주 집결에 합류하지 못했다고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지휘부 명단에 등장하는 모든 의병장이 실제 서울 진공 작전에 직접 참여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3]

병력과 무장

13도 창의군의 총병력은 일반적으로 약 1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당시 의병 연합군으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였다.

특히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의병에 합류한 군인들 가운데 약 3,000명이 포함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해산 군인들은 정규군에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근대적인 소총을 다루는 방법과 부대 편제, 행군 및 전술 등에 익숙했다.

이 때문에 기존 의병부대와 비교하여 전투력이 크게 강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 무장 상태는 부대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일부 해산 군인과 포수들은 근대적인 소총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상당수 의병들은 구식 총기와 화승총, 칼, 창 등의 무기를 사용했다.

탄약과 군수물자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체계도 부족했다.

또한 약 1만 명이라는 규모는 연합에 참여한 전체 병력을 추산한 것이며, 실제로 모든 병력이 한꺼번에 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만 명이라는 숫자는 상당히 커 보였지만, 그 1만 명이 모두 똑같은 무기로 무장한 근대적인 정규군이었던 것은 아니다.

모여 있는 사람 숫자만 보면 일본군과 한번 붙어볼 만해 보였겠지만, 문제는 상대방은 근대적인 군대였고 이쪽은 무기도 편제도 제각각이었다는 것이다.

서울 진공 작전

작전 계획

13도 창의군이 결성된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서울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은 일본군과 한국통감부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대한제국 정부 역시 일본의 감독 아래 놓여 있었다.

의병들은 서울을 탈환하여 일본의 통치기관을 무너뜨리고,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 등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조약들을 파기하며 국권을 회복하려 했다.

이를 위해 의병 지도부는 각 지역의 병력을 서울 외곽으로 이동시킨 뒤 여러 방향에서 서울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특히 서울 동대문 밖 약 30리 지점에 병력을 집결시킨 다음 전열을 정비하여 서울로 진격하려 했다.

이 계획은 단순히 일본군과 몇 차례 전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직접 탈환한다는 점에서 매우 대담했다.

대한제국의 수도를 일본군의 손에서 되찾아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것이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의 허락 없이는 법률 하나 제대로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차라리 의병들이 서울로 쳐들어가 통감부를 없애버리겠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작전 목표와 비교하여 실제 군사적 준비는 충분하지 못했다.

의병부대들은 각자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대규모 병력을 정해진 시간에 동일한 장소로 이동시키기 위한 통신망과 보급체계가 부족했다.

또한 일본군이 이미 서울의 주요 군사시설과 교통망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하려면 강력한 일본군 방어선을 돌파해야 했다.

국제사회에 대한 호소

13도 창의군은 단순히 무력으로만 일본에 저항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이인영은 일본의 침략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의병을 정당한 교전단체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적 활동도 추진했다.

당시 일본은 의병들을 '폭도'라고 부르면서 범죄집단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이에 이인영은 의병들이 국가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싸우는 군사조직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그는 김세영을 서울에 잠입시켜 각국 영사관에 격문을 전달하도록 했으며,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도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특히 의병들이 단순한 범죄집단이 아니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교전단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시도는 의병운동이 국제법적으로도 정당한 전쟁행위라는 인정을 받으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주요 열강들은 이미 일본의 한국 지배를 사실상 인정하거나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의병들이 외교적인 지원을 얻기는 매우 어려웠다.

결국 국제사회에 대한 호소는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는 의미가 있었지만, 실제 군사적 지원이나 외교적 개입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4]

허위의 선발대 진격

1908년 1월 13도 창의군은 본격적인 서울 진공 작전을 시작했다.

군사장 허위는 약 300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선발대는 경기도 북부를 거쳐 서울 동대문 밖 약 30리 지점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동대문 밖 30리라는 거리는 약 12km에 해당하지만, 구체적인 위치는 사료에 따라 다르게 설명된다. 따라서 이들이 정확히 어느 지점까지 진격했는지를 하나의 현대 지명으로 확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장악한 수도의 외곽까지 의병부대가 접근했다는 것은 상당한 성과였다.

그러나 일본군도 의병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한강의 선박 운항을 통제하고 서울 동대문 일대에 기관총을 배치하는 등 방어를 강화했다.

또한 의병들이 서울로 진격하는 경로를 차단하기 위해 별도의 병력을 출동시켰다.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선제공격

일본군은 의병들이 서울 외곽에 집결한 뒤 본격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오히려 의병들의 진로를 차단하고 선발대를 먼저 공격하여 연합작전 자체를 무너뜨리려 했다.

허위의 선발대는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병력과 화력에서 상당한 열세에 놓여 있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후속 의병부대들이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선발대가 서울 외곽에 접근한 뒤 다른 지역의 의병부대들이 합류하여 대규모 공격을 진행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 지역의 부대들이 이동 과정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거나 연락이 끊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허위의 선발대는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야 했다.

1만 명에 이르는 연합군을 조직했지만, 정작 서울 앞에서 싸우던 선발대는 약 300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1만 명이 모여 서울을 공격하기로 했는데 막상 선발대가 일본군과 싸우고 있으니 나머지 부대들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허위의 부대는 수 시간 동안 일본군에 저항했지만, 결국 병력과 화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이로써 13도 창의군의 첫 번째 서울 진공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5]

이인영의 귀향과 지휘체계 붕괴

이인영의 부친상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한 뒤 13도 창의군에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총대장 이인영의 아버지가 사망한 것이다.

1908년 1월 말 이인영은 부친의 부음을 전달받았다.

당시 이인영은 13도 창의군의 총대장으로서 전국 의병부대의 연합을 유지하고 서울 탈환을 계속 추진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의병 지휘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이인영은 군사장 허위에게 지휘권을 맡긴 뒤 경상북도 문경의 집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당시 유교적 관습에서는 부모가 사망하면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중요한 의무였다는 점이었다.

이인영 역시 이러한 유교적 가치관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부친의 장례를 치른 뒤에도 즉시 의병활동에 복귀하지 않았으며, 삼년상을 마친 뒤 다시 의병을 일으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기 직전인데 전국 의병군의 총대장이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전선을 떠난 것이다.

효도를 중시하는 유교적 가치관은 이해할 수 있지만, 하필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는 도중에 총사령관이 삼년상을 치르겠다며 집으로 돌아갔으니 나머지 의병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감했을 것이다.

당연히 의병들 사이에서도 이 결정에 대한 아쉬움과 비판이 있었다.

이인영이 부친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개인적으로 중요한 문제였지만, 연합군 전체를 지휘하는 총대장이 장기간 이탈한다는 것은 군사적으로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지휘권 이양

이인영은 귀향하면서 군사장 허위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허위는 연합군의 지휘를 이어받아 서울 탈환을 다시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첫 번째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하면서 연합군의 전투력과 사기가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일본군은 의병들의 이동 경로와 활동지역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각 지역의 의병부대들을 개별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연합군 내부에서도 병력과 군수물자 부족, 지역별 지휘관들의 이해관계 차이 등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허위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의병부대들을 다시 규합하여 두 번째 서울 탈환 작전을 추진했지만, 결국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이후 전국에서 모였던 의병들은 각자의 활동지역으로 돌아가 독자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다.

이로써 13도 창의군이라는 전국적인 연합조직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다만 허위가 이끄는 의병세력은 이후에도 경기 북부와 임진강 유역 등에서 일본군에 저항했으므로, 연합군의 해체가 곧 모든 의병활동의 종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패 원인

일본군과의 전력 차이

13도 창의군이 실패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일본군과의 군사력 차이였다.

일본군은 근대적인 소총과 기관총, 충분한 탄약과 보급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철도와 전신망을 활용하여 병력을 신속하게 이동시키고 서로 다른 지역의 부대들을 통합적으로 지휘할 수 있었다.

반면 의병들은 부대마다 무기와 장비가 달랐으며, 탄약과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도 어려웠다.

특히 서울처럼 일본군이 대규모로 주둔하고 있는 지역을 공격하려면 상당한 화력과 조직력이 필요했지만, 13도 창의군은 이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약 1만 명이라는 병력 규모만으로 이러한 전력 차이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통합 지휘체계의 한계

13도 창의군은 전국 의병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조직이었지만, 근대적인 의미의 단일 군대는 아니었다.

각 의병부대들은 원래 서로 다른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지휘관과 병력 구성, 무기, 전술도 제각각이었다.

연합군을 결성한 뒤 총대장과 군사장을 임명했지만, 이것만으로 전국의 의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대가 된 것은 아니었다.

서울 진공 작전 당시에도 의병부대들의 이동과 연락이 원활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허위의 선발대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상당수 후속부대들은 합류하지 못했다.

이는 연합군의 규모보다 실제 통합 지휘능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명목상 1만 명의 군대를 조직하는 것과 그 1만 명을 하나의 군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사람들을 제시간에 같은 장소로 이동시켜 함께 싸우도록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다.

유생 중심의 지휘부

13도 창의군의 또 다른 한계는 지휘부가 주로 양반과 유생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었다.

을미의병 이후 의병운동에는 평민과 포수, 해산 군인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지만, 지도부에서는 여전히 신분과 문벌이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신돌석이다.

신돌석은 평민 출신의 의병장으로, 경상북도 영해 일대에서 일본군과 활발하게 싸웠다.

그는 초기 13도 창의군의 지휘부 편제에 교남창의대장으로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후 지휘부가 개편되는 과정에서 신돌석은 제외되고 박정빈이 교남창의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일부 연구에서는 신돌석이 평민 출신이라는 점이 이러한 배제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홍범도와 김수민 등 다른 평민 출신 의병장들 역시 연합군의 주요 지휘부에 참여하지 못했다.

다만 신돌석의 경우 실제로 연합군에 합류하지 못한 과정에는 지역적 거리와 일본군과의 교전, 의병부대 간의 연락 문제 등도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단순히 신분 때문에 배제되었다고 모든 원인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유생 중심의 신분질서가 전국적인 의병연합의 형성에 한계를 가져왔다는 점은 역사학계에서도 지적된다.[6]

일본군과 싸우려면 총 잘 쏘고 전투 잘하는 사람이 필요할 텐데, 지휘부에서는 여전히 양반이냐 평민이냐가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인영의 전선 이탈

총대장 이인영의 귀향 역시 연합군이 해체되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이인영은 전국의 의병들을 규합한 중심인물이었으며, 각 지역 의병장들 사이에서 상당한 명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총대장직에서 물러나자 연합군의 결속력이 약화되었다.

물론 이인영은 허위에게 지휘권을 맡겼으므로 아무런 대책 없이 군대를 버리고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총대장이 장기간 전선에서 이탈했다는 사실은 분명한 문제였다.

특히 이인영이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의병활동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은 유교적 가치관이 군사적 판단에 영향을 미친 사례로 평가된다.

이인영의 귀향만으로 서울 진공 작전의 실패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미 전투력과 조직력이 약화된 연합군을 다시 통합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초래했다.

효도도 중요하고 나라를 지키는 것도 중요한데, 총사령관이 없는 동안 나라가 없어질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주요 인물들의 이후 행적

이인영

이인영은 13도 창의군의 총대장직에서 물러난 뒤 경상북도 문경으로 돌아가 부친상을 치렀다.

그는 삼년상을 마친 뒤 다시 의병을 일으킬 생각이었지만, 일본군과 헌병들은 그를 계속 추적하고 있었다.

결국 1909년 6월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이인영은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일본의 국권 침탈에 저항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1909년 9월 20일 경성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향년 40세였다.

결국 그가 계획했던 삼년상 이후의 의병 재기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허위

허위는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한 뒤에도 의병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경기 북부와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의병들을 규합하고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또한 연합부대를 다시 조직하고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활동도 전개했다.

1908년에는 통감부에 고종의 복위와 외교권 회복, 일본인 관리의 철수 등을 요구하는 활동도 벌였다.

그러나 1908년 6월 11일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도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활동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1908년 10월 21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허위는 일제에 의해 서대문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된 초기의 대표적인 항일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7]

다른 의병장들

13도 창의군이 해체된 이후에도 여러 의병장들은 자신들의 활동지역으로 돌아가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다.

민긍호는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계속 싸웠으나 1908년 전사했다.

이강년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이어가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1908년 처형되었다.

문태수는 전라북도와 경상남도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계속했으며, 이후에도 일본군에 저항했다.

이처럼 전국적인 연합조직은 해체되었지만, 그 구성에 참여했던 의병세력의 항일무장투쟁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후 1909년 일본군이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실시하는 등 의병 진압을 강화하면서 국내의 의병운동은 점차 약화되었다.

그러나 일부 의병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하여 이후 독립군의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의의와 평가

13도 창의군은 한국 근대 의병운동에서 전국적인 연합군을 구성하여 일본의 지배 중심지를 공격하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전의 의병운동은 주로 지역별로 전개되었으며, 각 의병부대들이 독자적으로 일본군과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3도 창의군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전국의 의병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공동의 군사작전을 추진했다.

특히 서울 진공 작전은 단순히 일본군의 지방 주둔지를 공격하는 수준을 넘어 통감부를 타도하고 국권을 회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도 컸다.

또한 이인영이 각국 영사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의 국제법적 지위를 인정받으려 했다는 사실은 당시 의병 지도자들이 무장투쟁뿐 아니라 외교적인 방법까지 고려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군사적으로는 실패한 작전이었다.

일본군과의 무기 및 조직력 차이, 연합군의 불안정한 지휘체계, 군수물자 부족, 의병부대 사이의 연락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또한 유생 중심의 지휘부가 평민 출신 의병장들과 충분히 협력하지 못했다는 점도 중요한 한계로 지적된다.

이인영의 부친상으로 인한 지휘권 이양 역시 연합군이 해체되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만으로 13도 창의군의 역사적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

당시 대한제국의 정부는 이미 일본의 감독 아래 놓여 있었으며,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전국의 의병들은 독자적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서울을 탈환하려 했다.

국가의 정규군이 사라진 상황에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연합군을 조직하여 수도를 되찾으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13도 창의군은 비록 서울을 탈환하지 못했지만, 이후 항일무장투쟁이 전국적인 연합과 조직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으며, 의병운동에서 독립군 활동으로 발전하는 과정의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나라의 정부는 일본에 넘어가고 군대는 해산당했는데, 정작 전국의 의병들이 나라를 되찾겠다고 서울로 진격했던 것이다.

여담

  • 13도 창의군의 정식 조직 명칭은 '13도 창의대진소'였다. 오늘날에는 13도 창의군 또는 십삼도창의군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된다.
  • 이름의 13도는 당시 대한제국의 전국 13개 도를 의미한다. 다만 실제로 모든 도에서 동일한 규모의 의병들이 집결했다는 뜻은 아니다.
  • 연합군의 총병력은 약 1만 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당시 기록에 근거한 추산이다. 모든 병력이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 모여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 13도 창의군은 약 48개 의진을 규합한 것으로 기록된다. 이후 지휘체계를 정비하면서 부대를 재편했기 때문에 일부 기록에는 다른 편제 숫자도 등장한다.
  • 전체 의병 가운데 해산 군인이 약 3,000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모든 해산 군인이 근대적인 소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 전체 무장 수준도 부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 경상북도의 의병장 신돌석은 초기 지휘부 편제에 이름이 등장하지만 이후 개편 과정에서 제외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의병 지휘부의 신분적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 이강년은 호서창의대장으로 기록되지만 실제 양주 집결에는 합류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합군의 지휘부 명단에 포함되었다는 사실과 실제 서울 진공 작전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구분해야 한다.
  • 서울 진공 작전에서 허위가 이끈 선발대는 약 300명이었으며, 서울 동대문 밖 약 30리 지점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후속부대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후퇴했다.
  • 13도 창의군은 서울을 공격하기 전에 각국 영사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는 의병들이 자신들의 무장투쟁을 정당한 독립전쟁으로 인정받으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총대장 이인영은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한 뒤 부친상을 당해 귀향했다. 이후 삼년상을 마치고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했지만 1909년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 군사장 허위는 연합군이 해체된 뒤에도 의병활동을 계속하다가 1908년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한 이후에도 의병전쟁은 계속되었다. 1908년에는 강원도와 경기 북부, 1909년에는 전라도가 주요 의병활동 지역으로 부상했다.
  • 일본은 전국의 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작전을 강화했으며, 1909년에는 호남 지역에서 대규모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실시했다.
  • 서울 중랑구 망우동의 망우역사문화공원 일대에는 13도 창의군의 항일정신을 기리는 13도 창의군탑이 세워져 있다.
  • 13도 창의군은 조직의 성격상 하나의 근대적인 정규군이라기보다 전국 각지의 의병부대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결성한 연합군에 가까웠다. 이러한 특징은 연합군의 규모를 확대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통합 지휘와 보급에는 한계를 가져왔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