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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1905년 · 5명
군부대신
학부대신
외부대신
내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을사삼흉 1905년 · 3명
궁내부대신
탁지부대신
법부대신
정미칠적 1907년 · 7명
군부대신
내각총리대신
탁지부대신
학부대신
법부대신
내부대신
농상공부대신
경술국적 1910년 · 8명
궁내부대신
승녕부총관
시종원경
친위부장관 · 시종무관장
내각총리대신
탁지부대신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경술국적(庚戌國賊)은 1910년 8월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는 과정에서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찬성하거나 협력한 여덟 명의 친일 관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술팔적(庚戌八賊)이라고도 한다.

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가 이에 해당한다.

개요

을사오적이 외교권을 팔아먹고 정미칠적이 내정권을 팔아먹었다면, 이놈들은 아예 나라 전체를 팔아먹은 새끼들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1907년 정미7조약을 통해 내정권까지 장악했다. 여기에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사법권과 경찰권까지 차례로 빼앗으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독립국가로서 기능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대한제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없애고 한국을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키려 한 것이다.

1910년 8월 일본의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관료들과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추진했다.

당시 대한제국의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있던 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 등 여덟 명은 이에 찬성하거나 협력했다.

이들이 바로 경술국적이다.

1905년에는 외교권, 1907년에는 내정권을 넘겨주더니 1910년에는 국가의 주권 전체를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한 것이다.

~~매국도 한두 번 하면 경력이 쌓이는지, 이완용을 비롯한 일부 놈들은 1905년부터 꾸준히 나라를 팔아먹고 있었다.~~

다만 여덟 명이 모두 한일병합조약에 직접 서명한 것은 아니다. 실제 조약에 서명한 인물은 대한제국 측 대표 이완용과 일본 측 대표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나머지 인물들은 내각회의와 어전회의, 황실 관련 업무 등에서 일본의 강제병합에 협력했다.[1]

명단

이름 당시 직책 주요 행적
이완용 내각총리대신 을사오적·정미칠적에도 포함된 인물.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한일병합조약에 직접 서명했다. ~~매국 그랜드슬램 달성.~~
윤덕영 시종원경 순정효황후의 백부로, 황실 내부에서 한일병합에 적극 협력했다. 이후 일본의 자작 작위를 받고 벽수산장이라는 호화 저택을 건설했다.
민병석 궁내부대신 대한제국 황실의 행정을 담당하면서 한일병합에 찬성했다. 이후 일본의 자작 작위를 받고 이왕직 장관과 조선귀족회 회장을 지냈다.
고영희 탁지부대신 정미칠적에도 포함된 인물. 대한제국의 재정을 담당하면서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했고, 한일병합 이후 자작 작위를 받았다.
박제순 내부대신 을사늑약 당시 외부대신으로 조약에 직접 서명한 을사오적의 일원. 1910년에는 내부대신으로 한일병합에 찬성했다. ~~외교권도 팔고 나라까지 팔았다.~~
조중응 농상공부대신 정미칠적에도 포함된 인물. 이완용과 함께 한일병합조약 초안을 사전에 논의했으며, 조약 체결에 적극 협력했다.
이병무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정미7조약 당시 군부대신으로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앞장섰으며, 1910년에는 한일병합에도 협력했다. ~~군대도 없애고 나라도 없앴다.~~
조민희 승녕부총관 황실 관련 고위 관료로서 한일병합에 협력했다. 이후 일본의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들 여덟 명은 모두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 또는 황실 측근이었다. 국가의 주권과 황실을 지켜야 할 위치에 있었지만, 오히려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는 데 협력했다.

특히 이완용과 박제순은 을사오적에도 포함되며, 이완용·고영희·조중응·이병무는 정미칠적에도 포함되는 인물들이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복적으로 협력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매국노 동창회라고 해도 될 지경이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1910년 7월 일본의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국에 부임하면서 한일병합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데라우치는 8월 16일 이완용과 조중응을 통감관저로 불러 병합조약의 초안을 보여주고 비밀리에 협의했다.

8월 18일에는 대한제국 내각회의에서 병합 문제가 논의되었다.

당시 학부대신 이용직은 병합에 반대했지만, 나머지 대신들은 일본의 요구에 협력했다. 이용직은 결국 병합을 승인하는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8월 22일에는 순종이 참석한 가운데 형식적인 어전회의가 개최되었으며,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넘기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같은 날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했다.

조약 제1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

대한제국의 모든 통치권을 일본에 영원히 넘겨준다는 내용이다.

~~외교권, 군사권, 재정권을 하나씩 팔아먹는 것도 귀찮았는지 이번에는 아예 나라 전체를 일괄 매각했다.~~

일본은 한국인들의 저항을 우려하여 조약 체결 사실을 일주일 동안 비밀에 부쳤으며, 1910년 8월 29일 조약을 공포했다.

이날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를 경술국치라고 부른다.[2]

을사오적·정미칠적과의 관계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은 모두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친일 관료들을 가리키지만, 각각 다른 시기의 사건을 기준으로 구분한다.

구분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연도 1905년 1907년 1910년
관련 사건 을사늑약 정미7조약 한일병합조약
주요 내용 외교권 박탈 내정권 장악 및 군대 해산 국권 전체 상실
인원 5명 7명 8명

이 세 집단에 모두 포함되는 인물은 이완용 단 한 명이다.

을사오적과 경술국적에 함께 포함되는 인물은 이완용과 박제순이며,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함께 포함되는 인물은 이완용·고영희·조중응·이병무다.

특히 이완용은 1905년 을사늑약에 찬성하고, 1907년 정미7조약에 직접 서명했으며,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도 직접 서명했다.

~~매국 분야에 업적 시스템이 있었다면 모든 도전과제를 달성했을 놈이다.~~

다만 세 집단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른 친일 관료들의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송병준은 경술국적 여덟 명에 포함되지 않지만, 친일단체 일진회를 이끌며 한일병합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던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경술국적은 어디까지나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과정에 협력한 주요 인물들을 구분한 명칭이다.

한일병합 이후

경술국적 여덟 명은 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이후에도 상당수가 높은 지위와 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일본 정부는 1910년 10월 한일병합에 협력한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들과 황족들에게 조선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경술국적 여덟 명 역시 모두 일본으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

이완용은 처음에는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후작으로 승작했다. 나머지 일곱 명은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나 이왕직의 고위 관료로 활동하면서 식민지 통치체제에서도 영향력을 유지했다.

특히 윤덕영은 한일병합 이후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 거대한 서양식 저택인 벽수산장을 건설했다. 이 건물은 당시에도 상당히 호화로운 건축물로 알려져 있었다.[3]

민병석 역시 일본의 자작 작위를 받고 이왕직 장관과 조선귀족회 회장 등을 지내면서 식민지 지배체제에 협력했다.[4]

이들은 나라의 주권을 지키는 대신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협력했고, 그 대가로 작위와 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나라가 망했는데 나라를 팔아먹은 놈들은 오히려 승진하고 부자가 되었다.~~

물론 이들의 작위 수여와 이후 행적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으며, 모든 인물이 동일한 규모의 재산이나 관직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술국적에 포함된 인물들이 일본의 강제병합에 협력하고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특권을 누렸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여담

  • 경술국적의 '경술'(庚戌)은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1910년의 육십갑자이며, '국적'(國賊)은 나라를 해친 역적이라는 뜻이다.
  • 경술국적은 모두 여덟 명이므로 경술팔적이라고도 부른다.
  • 한일병합조약에 직접 서명한 사람은 여덟 명 가운데 이완용 한 명이다. 일본 측 서명자는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 이완용은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되는 유일한 인물이다. ~~매국의 살아 있는 전설. 아니, 지금은 죽었으니 그냥 전설.~~
  • 박제순은 1905년 을사늑약 당시 외부대신으로 조약에 서명했으며, 1910년에는 내부대신으로 한일병합에 협력했다.
  • 이병무는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이후 1910년에는 한일병합에도 협력하여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되었다.
  • 윤덕영은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백부였다. 황실과 가까운 친족 관계를 이용하여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 경술국적 여덟 명은 모두 한일병합 이후 일본으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 일본은 이들을 한일병합의 공로자로 대우했다.
  • 이용직은 1910년 8월 18일 내각회의에서 한일병합에 반대한 대신으로 알려져 있다. 경술국적에 포함된 다른 관료들과는 대조적인 행적이다.
  • 일본은 한일병합조약을 1910년 8월 22일 체결했지만, 한국인들의 저항을 우려하여 일주일 뒤인 8월 29일에 공포했다.
  • 경술국적에 포함되지 않았더라도 송병준처럼 한일병합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친일파는 다수 존재했다. 따라서 경술국적 여덟 명만이 한일병합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이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