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희 Jo Min-hui | |||||||||||||||||||||||||||
| 국적 | 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조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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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
| 본관 | 양주 조씨 | ||||||||||||||||||||||||||
| 직업 | 문신, 외교관, 관료, 정치인, 친일파 | ||||||||||||||||||||||||||
| 관련 사건 | 고종 강제 퇴위, 헤이그 특사 사건, 경술국치, 경술국적 | ||||||||||||||||||||||||||
추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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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민희(趙民熙, 1859년 11월 8일 ~ 1931년 1월 2일)는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외교관·고위 관료이자 일본의 국권 침탈과 식민통치에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양주(楊州)이며, 대한제국의 주미특명전권공사와 주일특명전권공사, 경상남도 관찰사, 평리원 재판장, 승녕부 총관 등을 역임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당시에는 평리원 재판장으로서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세 특사에 대한 형사재판을 담당했다.
이 재판에서 이상설에게 교수형, 이준과 이위종에게 종신형을 선고하도록 상주한 사실이 《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는 일본 황태자 환영운동과 동아개진교육회, 대동학회 등 여러 친일단체의 활동에 참여했다.
1910년 한일병합 과정에 협력한 인물로서 경술국적의 한 명으로 분류되었으며, 국권 피탈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 찬시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참의를 역임했고, 일본의 식민통치를 찬양하는 글을 발표했다.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외국으로 간 특사들에게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해 놓고, 정작 나라를 빼앗는 일본에는 충실하게 협력한 매국노 새끼다.
이 인간이 특히 독특한 이유는 집안 배경부터 시작한다.
조민희는 을사늑약 체결에 항의하여 자결한 조병세와 같은 집안의 인물이다. 조병세는 일본에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조민희는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하고 일본의 귀족 작위까지 받았다.
같은 집안의 어른은 을사늑약에 항의해 자결했는데, 이 인간은 일본에서 자작 작위와 5만 원짜리 공채를 받아먹었다.
게다가 이완용의 처남이기도 했다.
친일파 가운데서도 유명한 이완용과 인척 관계였으며, 실제로 조민희 역시 일본의 국권 침탈과 식민통치에 협력했다.
그런데 인생 후반부의 행적은 더욱 가관이다.
1910년 일본의 귀족이 되면서 상당한 경제적 혜택을 확보했고, 중추원 고문과 참의로 높은 수당까지 받았다.
그러나 도박과 낭비로 재산을 탕진하여 채권자들에게 소송을 당했고, 1927년에는 파산 선고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일본 정부가 그의 자작 작위에 따른 귀족 예우까지 정지했다.
나라 팔아먹는 데 협력해서 받은 귀족 작위와 돈을 결국 도박으로 말아먹고 파산한 것이다.
더욱 황당하게도 일본의 비밀문서인 《조선귀족약력》에는 조민희가 도박으로 여러 차례 적발되고도 귀족이라는 이유로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는 내용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혜택을 받고도 도박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 결과 1920년대 후반에는 재산을 잃고 파산한 조선귀족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매국으로 출세하고, 매국으로 얻은 돈을 도박으로 날리고, 일본에서도 귀족 대접을 중지당한 인간이다.
다만 조민희는 정식 을사오적이나 정미칠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는 1910년 한일병합에 협력한 경술국적으로 분류되며, 특히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의 재판과 이후의 친일 정치활동이 중요한 행적으로 평가된다.
생애
출생과 가문
1859년 음력 10월 14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859년 11월 8일에 해당한다.
일부 자료에서는 출생일을 1859년 10월 14일로만 표기하지만, 이는 음력 날짜를 그대로 기재한 것이다.
본관은 양주 조씨이며, 아버지는 조병익(趙秉翼)이다.
조민희는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양반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문과 유교 경전을 공부했다.
그의 가문은 조선의 중앙정계에 여러 관료를 배출한 집안이었다.
특히 훗날 을사늑약에 항의하여 자결한 조병세와 친족 관계였다.
조병세는 조민희보다 윗세대의 집안 어른에 해당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조민희를 조병세의 집안 조카로 설명한다.
일부 자료에서는 5촌 조카 관계로 소개하기도 한다.
이러한 친족관계는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정치적 선택을 비교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된다.
조병세와의 관계
조병세는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
조병세는 고종에게 조약의 폐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친일 대신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과 친일 내각은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조병세는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긴 현실을 개탄하며 자결했다.
정부는 광복 이후 그의 항일 행적을 기려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반면 조민희는 일본의 국권 침탈 이후 여러 친일단체에서 활동했고, 1910년 일본의 자작 작위를 받았다.
조병세는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겼다며 목숨을 끊었고, 같은 집안의 조민희는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서 귀족 작위를 받았다.
같은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이 정치적 선택까지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조적인 사례다.
물론 조병세의 항일행위가 조민희에게 자동으로 전해지는 것은 아니며, 조민희의 친일반민족행위 역시 그 개인이 실제로 수행한 행적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이완용의 처남
조민희는 이완용의 처남이었다.
이완용의 부인은 양주 조씨 가문 출신으로, 조민희의 누이였다.
따라서 이완용은 조민희의 매형에 해당한다.
이완용은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되는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했고,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을 주도했으며, 1910년에는 한일병합조약에 직접 서명했다.
조민희 역시 일본의 국권 침탈 과정에서 여러 친일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1907년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의 재판장으로서 항일 외교활동을 범죄로 취급하는 데 관여했다.
이후에는 일본 황태자 환영행사와 친일단체의 간부로 활동했고, 한일병합 이후에는 일본 귀족이 되었다.
매형은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조약에 서명했고, 처남은 나라의 독립을 주장하는 특사들에게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했다.
정말이지 대단한 인척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두 사람이 친척이었다는 사실만으로 특정 사건을 공모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각각의 친일반민족행위는 구체적인 기록과 행적에 따라 구분하여 평가해야 한다.
관료 생활
1885년 문과 급제
1885년 9월 조민희는 증광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당시 나이는 25세였다.
문과는 조선에서 고위 문관으로 진출하기 위한 국가시험이었다.
그는 같은 해 10월 승정원 가주서로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86년에는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승문원은 조선의 외교문서와 국가문서를 담당하던 기관이었다.
이후 1887년 3월 홍문관 부수찬으로 승진했다.
홍문관은 국왕의 정책 자문과 학문, 문서 편찬 등을 담당하는 중요한 중앙기관이었다.
조민희는 이러한 관직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문관으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지방관 생활
1887년 9월에는 양성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양성은 오늘날 경기도 안성시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같은 해 12월에는 용인현령으로 전임되었다.
조민희는 1889년까지 용인현령으로 재직하면서 지방행정을 담당했다.
1890년에는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었다.
성균관 대사성은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운영을 책임지는 고위 관직이었다.
이후 봉산군수와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1895년에는 전주부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조선은 갑오개혁으로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고 있었으며, 기존의 지방관 조직에도 여러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조민희는 이러한 개혁 과정에서 지방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평안남도·평안북도 관찰사
1897년 9월에는 평안남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평안남도 재판소 판사도 겸임했다.
1899년 2월에는 평안북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으며, 평안북도 재판소 판사도 함께 맡았다.
당시 평안도는 청나라와 인접한 국경 지역으로, 무역과 교통 및 군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했다.
특히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일본, 청나라를 비롯한 외국의 영향력 확대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의 관찰사를 역임했다는 점은 조민희가 중앙정부에서 상당한 신임을 받은 관료였음을 보여준다.
법부 협판
1900년 조민희는 법부 협판으로 임명되었다.
법부 협판은 오늘날의 법무부 차관과 유사한 직책이었다.
그는 형법교정관도 겸임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전통적인 사법제도를 근대적인 법률과 재판제도로 개편하려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법률을 조사하고 형법을 정비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했다.
조민희는 법부 협판과 형법교정관으로서 이러한 업무에 참여했다.
이 시기의 경력은 훗날 그가 평리원 재판장에 임명되는 배경이 되었다.
법률과 사법제도를 담당하던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재판장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가 맡은 대표적인 정치적 재판 가운데 하나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주장한 헤이그 특사들에게 중형을 선고하는 사건이었다.
주미특명전권공사
미국 외교관으로 임명
1901년 조민희는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다.
처음에는 프랑스에 주재하도록 명령받았으나, 이후 미국으로 발령이 변경되었다.
그는 1901년부터 1904년까지 대한제국의 주미특명전권공사로 활동했다.
특명전권공사는 오늘날의 대사와 비슷한 역할을 담당하는 고위 외교관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과 러시아 등의 압력에 대응하려 했다.
특히 미국과의 외교관계는 대한제국이 국제사회에서 독립국가로 인정받고 여러 국가와 협력하기 위한 중요한 통로였다.
조민희는 워싱턴에서 외교업무를 담당하며 대한제국의 입장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한제국의 외교정책
대한제국은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후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89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에는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외교적인 경쟁이 심화되었다.
고종은 여러 열강과 외교관계를 유지해 국가의 독립을 보호하려 했다.
조민희가 주미공사로 활동한 시기는 이러한 외교적 노력이 계속되던 때였다.
당시 주미공사관에서는 외교문서의 발송과 접수, 교민 및 유학생 관련 업무, 공사관의 운영비와 직원의 봉급 문제 등을 처리했다.
관련 기록은 《주미내거안》 등에 남아 있다.
이는 당시 대한제국의 외교관들이 미국에서 실제로 어떠한 업무를 수행했는지 보여주는 자료이다.
다만 조민희가 미국의 대한제국 보호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다거나 미국 정부로부터 특정한 독립보장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주일특명전권공사
1904년에는 주일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미국에 이어 일본에서도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을 전후로 대한제국에 대한 군사적·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특히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대한제국은 일본군의 군사적인 압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다.
조민희는 이러한 시기에 일본과의 외교업무를 담당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모두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뒤에는 자신의 국가가 독립을 주장하며 해외에 파견한 특사들을 범죄자로 처리하는 재판에 관여했다.
외교관 시절에는 대한제국을 대표해서 외국에 다녔고, 재판장이 된 뒤에는 대한제국을 대표해 외국에서 독립을 주장한 사람들을 처벌하려 한 것이다.
정치적 경력의 모순이 상당히 뚜렷하다.
경상남도 관찰사
1906년 1월 조민희는 경상남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는 육군 보병 부령 계급을 가지고 있었다.
경상남도 관찰사는 지방행정과 치안, 재정 및 지역 관료들의 업무를 감독하는 고위직이었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뒤였으므로 지방행정 역시 일본의 강한 간섭을 받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의 행정과 치안, 사법제도를 단계적으로 장악하려 했다.
조민희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지방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그는 다시 중앙정부의 주요 관직으로 이동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의 재판장
고종이 특사를 파견하다
1907년 고종은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특사를 파견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상태였다.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의 외교와 주요 정책에 간섭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자신이 을사늑약을 정식으로 승인하지 않았으며, 조약이 일본의 군사적 압력으로 체결되었다는 점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다.
이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다.
특사는 다음 세 명이었다.
이들은 헤이그에서 일본의 국권 침탈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독립과 외교권 회복을 호소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외교활동을 대한제국이 일본과의 조약을 위반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의 강제 퇴위를 추진했다.
평리원 재판장 조민희
1907년 7월 조민희는 평리원 재판장으로 임명되었다.
평리원은 대한제국의 고등재판기관으로, 중요한 형사사건과 국가 관련 사건 등을 담당했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의 사법제도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법부와 평리원에는 일본인 법무보좌관들이 배치되어 재판업무에 개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민희는 헤이그 특사 사건의 재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세 특사를 대상으로 형사재판을 진행했다.
일본이 나라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았다는 사실을 알리러 해외에 간 사람들이, 정작 자기 나라의 법원에서 범죄자로 재판받게 된 것이다.
더욱 황당한 사실은 그 재판을 담당한 사람이 과거 미국과 일본에 주재했던 대한제국의 외교관이었다는 점이다.
특사들을 사칭범으로 취급하다
1907년 8월 8일 《순종실록》에는 법부대신 조중응이 평리원 재판장 조민희의 보고를 받아 헤이그 특사들의 처벌에 관한 사항을 상주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해당 기록에서 조민희는 이상설, 이위종, 이준이 해외에 나가 밀사라고 거짓으로 주장해 외교관계를 해쳤다는 혐의를 심리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적용된 법률은 《형법대전》의 사신 사칭 관련 조항이었다.
즉,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특사들을 공식적인 외교사절이 아니라 사신을 사칭한 범죄자로 취급한 것이다.
그러나 세 사람은 고종의 명령에 따라 외교활동을 수행했던 인물들이었다.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고 주장했으므로, 고종의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결국 친일 내각과 사법기관은 이러한 일본의 입장에 따라 특사들을 처벌하려 했다.
나라의 독립을 주장한 사람들을 사기꾼 취급하고, 나라의 주권을 빼앗은 일본의 요구는 법률처럼 집행한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사법권이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상설에게 교수형
조민희가 재판장으로서 상주한 형벌 가운데 가장 무거운 것은 이상설에 대한 교수형이었다.
당시 평리원은 이상설에게 《형법대전》 제352조를 적용하여 교형에 처하도록 했다.
교형은 목을 매어 사형을 집행하는 형벌이다.
즉,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외국에 파견된 대한제국의 특사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렸다는 이유로 사형이다.
그런데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대신들은 정부의 고위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사람이 사형 판결을 받고, 다른 쪽에서는 나라를 넘기는 데 협력한 사람이 관직을 유지하는 상황이었다.
이위종과 이준에게 종신형
이위종과 이준에게는 종신징역형을 적용했다.
평리원은 두 사람을 이상설의 행위에 따른 종범으로 판단하여 한 단계 낮은 형벌을 적용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더욱 황당한 사실이 있다.
이준은 이미 1907년 7월 14일 헤이그에서 사망한 상태였다.
그런데 대한제국의 법원에서는 그를 피고인으로 하여 종신형을 선고한 것이다.
당시 평리원은 세 사람의 소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체포한 뒤 형벌을 집행하도록 했다.
즉, 실제로 세 특사를 체포해 형벌을 집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준이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재판의 실효성과 절차에도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죽은 사람한테 종신형을 선고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살아서 싸우는 사람에게는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조민희의 관료 경력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건 가운데 하나다.
조중응과의 관계
당시 법부대신은 조중응이었다.
조중응은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정미칠적 가운데 한 명이다.
조중응은 조민희가 제출한 재판 관련 보고를 받아 황제에게 상주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역할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 조민희 - 평리원 재판장으로서 헤이그 특사 사건을 심리하고 형벌 적용을 상주
- 조중응 - 법부대신으로서 평리원의 보고를 받아 황제에게 상주
실제로 1907년 8월 8일 《순종실록》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등장한다.
조중응이 조민희의 보고를 근거로 이상설에게 교수형, 이위종과 이준에게 종신형을 적용하도록 건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두 사람의 행적을 비교할 때 중요한 사료이다.
정미칠적 조중응이 법부대신이고, 경술국적 조민희가 재판장이었다. 그들이 재판한 사람들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활동한 헤이그 특사였다.
당시 대한제국의 정치와 사법제도가 어떠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승녕부 총관
고종이 태황제가 되다
1907년 7월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후 황태자 순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퇴위한 고종에게는 태황제라는 지위가 부여되었다.
이에 따라 고종의 거처와 의례 및 관련 행정을 담당하기 위한 승녕부가 운영되었다.
승녕부는 퇴위한 고종의 생활과 의례, 관련 업무를 관리하는 황실기관이었다.
당시 고종은 이미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상태였지만, 대한제국의 황실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인물이었다.
특히 고종은 일본의 국권 침탈에 대해 여러 차례 반대 의사를 밝혔던 인물이었으므로, 일본은 그가 정치적으로 다시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경계했다.
승녕부 시종장
1907년 8월 조민희는 승녕부 시종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훈1등 팔괘장도 받았다.
승녕부 시종장은 고종의 측근에서 의례와 일상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조민희는 이러한 자리에서 고종과 가까운 위치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까지 조민희는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특사들을 처벌하는 재판의 재판장이었다.
고종이 나라를 지키려고 보낸 특사들에게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한 인간이, 이번에는 고종의 측근으로 들어간 것이다.
정치적 상황을 생각하면 상당히 모순적인 인사였다.
다만 조민희의 임명이 고종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이루어졌는지, 일본이나 친일 내각의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별도의 사료 검토가 필요하다.
- 승녕부 총관
1907년 11월 조민희는 승녕부 총관으로 임명되었다.
총관은 승녕부의 업무를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그는 고종과 관련된 황실의 행정과 의례를 관리했다.
특히 1910년 한일병합 당시에도 승녕부 총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는 조민희가 한일병합을 앞두고 황실과 가까운 정치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박탈하기 위해 황실과 정부의 내부 상황을 통제하려 했다.
조민희는 이러한 시기에 승녕부의 최고 책임자로 활동했다.
친일단체 활동
신사회
1907년 10월 조민희는 신사회의 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신사회는 일본 황태자의 대한제국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였다.
당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이후 일본은 황태자의 방문을 통해 대한제국에 대한 자신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과시하려 했다.
신사회에는 대한제국의 전·현직 고위 관료와 유력 인물들이 참여했다.
조민희는 이러한 조직의 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황태자의 방문을 환영하는 행사에 협력했다.
고종이 보낸 특사들에게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하던 인간이, 일본 황태자가 오자 환영행사의 간부가 된 것이다.
일본과 대한제국을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동아개진교육회
1907년 11월 조민희는 동아개진교육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동아개진교육회는 통감부의 식민정책에 동조하는 단체로, 전국의 보부상들을 규합해 교육과 계몽활동을 추진하려 했다.
표면적으로는 조선인의 교육과 생활 개선을 내세웠지만,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에 대한 협력을 확대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조민희는 이러한 조직의 부회장을 맡았다.
당시 일본은 보부상을 비롯한 여러 사회조직을 포섭하여 한국인들의 정치적인 반발을 약화시키려 했다.
동아개진교육회 역시 이러한 정책과 연결되어 있었다.
조민희는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이자 황실 측근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조직에 참여하는 것은 일본의 정책을 지원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대동학회
1908년 2월 조민희는 대동학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대동학회는 일본 통감부의 지원과 후원을 받으면서 유교계 인물들을 포섭하려 했던 단체였다.
특히 일본은 조선의 유림들이 전통적인 유교교육과 군주에 대한 충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이용하려 했다.
이를 통해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키고 친일적인 여론을 형성하려 했다.
조민희는 이러한 단체의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젊은 시절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유교 관료였으므로, 유교계에서도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성균관에서 유교를 가르치던 관료가 일본이 유림을 포섭하는 단체에 참여한 것이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충성과 국가에 대한 의무를 생각하면 상당히 모순적인 행적이었다.
동양협회
1908년 가을 조민희는 동양협회의 한국지부에 가입했다.
동양협회는 일본에서 조직된 단체로, 일본의 동아시아 진출과 식민지 경영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일본의 대만과 한국 지배를 뒷받침하는 정책과 연결되어 있었다.
조민희는 이러한 조직의 한국지부에서 활동했다.
이는 그가 일본의 통감부 정책뿐 아니라 일본에서 조직된 대외 팽창 관련 단체에도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일본의 조선 지배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한국인 고위 관료가 이러한 조직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초대 통감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내정권 침탈, 고종의 강제 퇴위 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그의 죽음은 일본과 대한제국의 정치권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당시 대한제국에는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대하는 여론이 존재했으며, 여러 항일운동가들은 이토의 죽음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들였다.
반면 친일 관료들은 이토의 죽음을 애도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조민희 역시 이러한 추모활동을 전개했다.
고종의 조문 특사
조민희는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조문하기 위해 중국 다롄으로 향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시신은 일본으로 운구되는 과정에 있었다.
조민희는 고종의 명령을 전달하는 조문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고종이 나라를 지키려고 보낸 특사들을 처벌한 사람이, 이번에는 고종을 퇴위시키는 데 앞장선 일본 정치인을 조문하러 갔다.
조민희가 맡은 직책과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생각하면 상당히 대조적인 행적이다.
다만 조문사절로 파견된 행위는 황실의 공식적인 외교·의례 업무이기도 하므로, 이것만으로 조민희가 이토 히로부미의 모든 정책을 개인적으로 지지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후 조민희가 여러 친일단체에서 활동하고 일본의 귀족 작위를 받았다는 사실은 별도로 확인된다.
장충단 추도회
1909년 11월 서울 장충단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관민추도회가 개최되었다.
조민희는 이 추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당시 장충단은 원래 국가를 위해 희생된 군인과 충신 등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된 공간이었다.
그런 장소에서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을 주도한 일본 정치인을 추도한 것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장소에서 나라의 독립을 빼앗은 일본 정치인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 것이다.
조민희는 이러한 행사에 참여하면서 일본의 정책과 정치적 인물들을 지지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경술국치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다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기 위한 최종적인 절차를 추진했다.
당시 일본은 이미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내정권, 군사권 및 사법권을 상당 부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 병합에 반대하는 정치활동과 언론을 통제했다.
1910년 8월 22일 창덕궁 흥복헌에서 한일병합조약을 논의하는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대한제국의 주요 대신들과 황족 대표, 문무 원로들이 참석했다.
조민희 역시 승녕부 총관으로서 한일병합에 협력한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로 분류된다.
그는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경술국적의 일원으로 거론된다.
특히 당시 승녕부 총관은 퇴위한 고종의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황실의 중요한 직책이었다.
고종이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보낸 특사들을 처벌하던 인간이, 결국 고종이 다스리던 나라가 일본에 병합되는 과정에도 협력한 것이다.
이것이 조민희가 경술국적으로 분류되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다.
1910년 8월 22일
1910년 8월 22일 어전회의에서는 한일병합조약안이 논의되었다.
당시 이완용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병합조약 체결이 불가피하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일본은 이미 대한제국의 주요 국가기관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군사적 압력을 통해 조약 체결을 강요하고 있었다.
결국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본에 넘기는 조약 체결이 결정되었다.
조민희는 당시 승녕부 총관으로서 이러한 결정에 협력한 인물로 평가된다.
다만 실제 어전회의의 모든 참석자가 개별적으로 어떤 발언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의견을 표시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제한적이다.
따라서 조민희가 특정한 발언을 하면서 조약 체결을 직접 주장했다는 식의 세부적인 장면을 근거 없이 만들어 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일본의 한일병합에 협력한 인물로 분류되었으며,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병합 관련 공로를 인정받아 귀족 작위를 받았다는 것이다.
한일병합조약의 서명자
한일병합조약에 직접 서명한 사람은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따라서 조민희가 조약문에 직접 서명한 당사자라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조민희의 책임은 승녕부 총관이라는 고위 관직에 있으면서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하고, 이후 일본의 작위와 경제적 보상을 받아들였다는 점에 있다.
서명은 매형 이완용이 했고, 처남 조민희도 국권 침탈의 협력자로 이름을 남긴 것이다.
두 사람의 역할은 다르지만 일본의 국권 침탈과 관련해 비판받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경술국적
조민희는 1910년 한일병합 과정에 협력한 인물들을 가리키는 경술국적(庚戌國賊)의 한 명으로 분류된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거론된다.
| 인물 | 당시 직책 |
|---|---|
| 이완용 | 내각총리대신 |
| 박제순 | 내부대신 |
| 고영희 | 탁지부대신 |
| 조중응 | 농상공부대신 |
| 민병석 | 궁내부대신 |
| 윤덕영 | 시종원경 |
| 이병무 |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
| 조민희 | 승녕부 총관 |
경술국적은 1905년 을사오적이나 1907년 정미칠적과는 다른 명칭이다.
을사오적은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가리킨다.
정미칠적은 1907년 내정권 침탈을 위한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일곱 대신을 가리킨다.
경술국적은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기는 과정에 협력한 주요 인물들을 가리킨다.
조민희는 이 가운데 경술국적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1905년에는 조병세가 나라를 지키겠다며 목숨을 끊었는데, 같은 집안의 조민희는 1910년 나라를 빼앗는 일본에서 공로를 인정받았다.
정말이지 집안의 이름을 남기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일본의 귀족 작위
자작 작위 수령
1910년 10월 7일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인물들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조민희는 이때 자작(子爵) 작위 수여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자작은 일본의 화족제도에서 사용하던 귀족 작위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기존 지배층을 식민통치 체제에 편입시키기 위해 작위를 제공했다.
특히 한일병합에 협력한 고위 관료와 유력 인물들에게 작위를 수여함으로써 이들이 일본의 통치에 계속 협력하도록 유도했다.
조민희는 일본의 자작 작위를 받아들였다.
나라가 사라졌는데 이 인간은 일본의 귀족이 되었다.
같은 집안의 조병세는 을사늑약을 반대하다 자결했지만, 조민희는 일본이 제공한 귀족의 지위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정치적 선택이 얼마나 달랐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은사공채 5만 원
1911년 1월 13일 조민희는 일본 정부로부터 5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은사공채는 일본이 조선귀족들에게 제공한 국채 형태의 경제적 보상이었다.
당시 은사공채에는 연 5%의 이자가 지급되었다.
따라서 5만 원의 공채라면 단순 계산으로 연간 2,500원의 이자 수익에 해당한다.
이는 당시 일반적인 노동자나 농민이 쉽게 확보할 수 없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조민희는 이러한 경제적 혜택을 통해 식민지 지배체제에서 상당한 재산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나라를 빼앗는 데 협력한 공로로 귀족 작위에 5만 원짜리 공채까지 지급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돈은 훗날 그의 경제적 몰락을 막아 주지 못했다.
조민희는 도박과 낭비로 재산을 탕진했고, 결국 파산에 이르렀다.
나라 팔아먹는 데 협력해서 받은 돈마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이다.
일본 관광단 참여
1910년 조민희는 일본 정부가 후원한 조선귀족 일본관광단에 참여했다.
이 관광단은 한일병합 이후 일본이 새롭게 편입된 조선귀족들에게 일본의 정치와 경제, 사회제도를 보여주고 제국의 지배질서에 순응하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당시 조선귀족들은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일본의 여러 지역을 시찰했다.
조민희는 일본의 천장절 행사에도 참석했다.
또한 일본에서 받은 환대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나라가 망하자마자 일본 귀족이 된 뒤 일본 정부의 지원으로 일본 관광까지 다녀온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문은 일반적인 개인 관광이라기보다 일본 정부가 조직한 정치적·사회적 행사였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귀족들에게 제공한 특혜와 사회적 예우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일병합 1주년 축사
1911년 8월 29일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일본은 이날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를 개최하고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선전했다.
특히 《매일신보》는 병합 1주년을 기념하는 특집을 발행했다.
조민희는 이 특집에 한일병합을 축하하는 글을 게재했다.
당시 《매일신보》는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력하는 언론매체였다.
일본은 이러한 신문을 통해 한일병합이 조선에 도움이 되는 사건이었다는 주장을 확산시키려 했다.
조민희는 이러한 선전활동에 참여했다.
나라가 망한 지 1주년이 되는 날, 이 인간은 그걸 축하하는 글을 실었다.
당시 한국인들에게 국권 피탈은 독립국가를 잃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조민희는 일본의 귀족이 된 뒤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정치적 입장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가 단순히 1910년 한일병합 당시의 정치적 협력에 그치지 않고 이후에도 일본의 지배를 지지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일본 천황 즉위식
다이쇼 천황 즉위대례식
1915년 조민희는 일본 천황 다이쇼의 즉위대례식에 참석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귀족들을 황실 행사에 초대해 제국의 정치적 질서에 편입시키려 했다.
조민희는 일본의 자작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으로서 행사에 참가했다.
이후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이러한 활동은 그가 일본 황실의 공식적인 행사에 참여하면서 일본 제국의 귀족이라는 지위를 누렸음을 보여준다.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1915년 11월 29일자 《경성일보》에는 조민희가 일본 천황의 즉위대례식에 참석한 뒤 발표한 감상문이 실렸다.
이 글에서 조민희는 일본 천황이 조선귀족들에게도 차별 없는 은혜를 베풀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일본 천황의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취지의 내용을 남겼다.
일본 천황에게 귀족 대접을 받았다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민희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키려고 했던 헤이그 특사들에게 중형을 선고하는 재판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자기 나라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사형을 선고하고, 자기 나라를 빼앗은 일본 천황에게는 감격해서 울었다.
정치적 입장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대비도 드물다.
물론 해당 글은 일본의 공식적인 행사에 참석한 뒤 발표된 감상문이므로 정치적인 수사와 의례적인 표현이 포함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조민희가 일본의 식민통치 체제에 적극적으로 편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별도로 확인된다.
조선물산공진회
1915년 일본은 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했다.
이 행사는 일본이 조선의 산업과 경제 발전을 선전하기 위해 개최한 대규모 박람회였다.
특히 일본은 자신의 식민통치가 조선의 근대화와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주장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한국인들의 정치적 권리 박탈과 경제적 수탈 문제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다.
조민희는 조선물산공진회의 경성협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또한 특별회원으로 활동하며 행사에 기부했다.
나라를 빼앗은 지 5주년이 됐다고 일본이 개최한 홍보행사에 친일 귀족 조민희도 참여한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일본이 식민통치의 성과를 선전하는 데 조선의 유력 인사들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보여준다.
이왕직 찬시
일본의 관리 아래 놓인 옛 황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대한제국 황실은 더 이상 독립국가의 황실이 아니었다.
일본은 기존 대한제국의 황족을 일본의 왕공족제도에 편입시켰다.
또한 황실의 생활과 재산, 의례 및 관련 기관을 관리하기 위해 이왕직을 설치했다.
이왕직은 일본 궁내성의 감독 아래 운영되는 조직이었다.
이는 대한제국의 궁내부와 달리 독립적인 국가의 황실을 관리하는 기관이 아니었다.
조선의 옛 왕실이 일본의 정치적·행정적 체제에 편입된 결과였다.
이왕직 찬시로 임명
1918년 4월 조민희는 이왕직 찬시로 임명되었다.
이왕직 찬시는 황실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고위 관직이었다.
조민희는 1919년 11월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그는 과거 승녕부 총관으로서 고종과 관련된 황실 업무를 담당한 경험이 있었다.
이러한 경력은 이왕직에서 근무하는 데에도 활용될 수 있었다.
대한제국에서는 고종의 측근이었는데, 나라가 망한 뒤에는 일본이 관리하는 옛 황실의 관료가 된 것이다.
황실과 관련된 관직을 계속 맡았지만, 그 황실의 정치적 지위는 완전히 달라졌다.
고종의 국장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사망했다.
당시 고종의 사망은 한국인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일본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이후 3·1 운동이 일어나는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조민희는 이왕직 찬시로서 고종의 국장과 관련된 빈전 업무를 맡았다.
빈전은 왕이나 황제가 사망한 뒤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 시신을 모시는 공간이었다.
그는 빈전 주감으로서 관련 의례와 행정업무에 관여했다.
고종이 독립을 지키려고 보낸 특사들을 처벌했던 사람이, 훗날 고종의 장례를 담당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물론 고종의 장례업무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그가 고종의 사망에 직접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두 사건을 비교하면 조민희의 정치적 생애에서 상당히 대조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중추원 고문
1919년 11월 15일 조민희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통치를 위해 설치한 자문기관이었다.
이 기관에는 대한제국의 전직 고위 관료와 친일적인 유력 인물들이 다수 참여했다.
일본은 이들을 통해 기존의 조선 지배층을 포섭하고 식민통치에 대한 협력을 확보하려 했다.
조민희는 이러한 중추원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21년 4월까지 고문직을 유지했다.
당시 고문에게는 연간 1,600원의 수당이 지급되었다.
이는 일반적인 조선인의 소득과 비교하면 상당한 금액이었다.
귀족 작위와 5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은 것도 모자라, 일본 총독부 고문으로 또 수당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경제적 혜택을 가지고도 훗날 파산하게 된다.
중추원 참의
1921년 4월 28일 조민희는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다.
그는 1924년 4월 26일까지 참의직을 유지했다.
당시 중추원 참의에게는 연간 약 3,000원의 수당이 지급되었다.
이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경제적 혜택이었다.
조민희는 일본 정부가 제공한 귀족 작위와 공채뿐 아니라 중추원 참의 수당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그의 재정 상태는 점차 악화되었다.
일본에서 귀족 작위에 5만 원짜리 공채를 주고, 총독부에서도 매년 수천 원씩 지급했는데, 결국 그 돈을 다 말아먹은 것이다.
어지간해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조선귀족회
조민희는 일본의 귀족 작위를 받은 뒤 조선귀족들의 단체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1925년 4월까지 사단법인 조선귀족회 이사를 맡았다.
조선귀족회는 일본으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인물들이 참여한 단체였다.
당시 조선귀족들은 일본의 식민통치 체제에 편입되어 각종 사회적·경제적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일부 귀족들은 재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거나 사업 실패와 낭비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귀족회와 관련 단체들은 귀족들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이해관계를 유지하는 데 관여했다.
조민희 역시 이러한 조직의 이사로 활동했다.
나중에 귀족 예우까지 정지당한 인물이 한때는 조선귀족회 이사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조선귀족 사회의 흥망성쇠를 한 사람의 생애에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기업활동
권업주식회사
1912년 조민희는 권업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권업주식회사는 경제와 산업 관련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된 기업이었다.
조민희는 일본의 귀족 작위를 받은 이후 여러 경제적인 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일부 조선귀족들은 일본에서 받은 은사공채와 기존의 재산을 이용해 기업에 투자하거나 경영에 참여했다.
조민희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활동했다.
다만 특정 기업의 설립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가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친일 행적은 국권 침탈과 식민통치 협력, 일본의 포상 수령 및 관련 정치활동 등을 중심으로 평가해야 한다.
조선무역주식회사
1913년 조민희는 조선무역주식회사의 설립에도 참여했다.
당시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한국의 무역과 산업은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조민희는 이러한 환경에서 기업의 발기인으로 활동하며 재산을 확대하려 했다.
그러나 이후 그의 경제적 상황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특히 도박과 낭비로 인한 재산 손실이 누적되면서 채권자들에게 소송을 당하게 되었다.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다
일본 귀족의 몰락
조민희의 인생에서 가장 황당한 부분은 바로 말년의 도박과 파산이다.
그는 1910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에는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았으며, 이후에도 이왕직과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고위직을 맡아 수당을 지급받았다.
또한 여러 기업의 설립과 운영에도 관여했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상당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인 기반을 확보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재산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다.
조민희는 도박과 낭비로 가산을 탕진했고, 결국 채권자들에게 소송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나라 팔아먹는 데 협력해서 일본 귀족이 되었는데, 그 귀족 신분으로 받은 돈을 도박으로 날려 버린 것이다.
보통 매국노들이 일본에서 받은 돈과 재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려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특이한 사례다.
도박 현행범으로 여러 차례 적발
일본의 비밀문서인 《조선귀족약력》에는 조민희의 도박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조민희는 도박과 관련된 행위로 여러 차례 적발되었다.
그러나 조선귀족이라는 지위 때문에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처분에도 불구하고 조민희는 도박을 중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청이나 근무지에서도 도박을 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도박으로 여러 번 걸렸는데 귀족이라고 봐줬더니, 이번에는 관청에서까지 도박판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재산을 탕진한 원인을 찾기 위해 복잡한 경제분석을 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다만 이러한 기록은 일본의 비밀문서에서 조민희의 행실을 평가한 내용이므로, 개별 사건의 구체적인 장소와 날짜는 별도의 형사기록과 구분해야 한다.
그럼에도 조민희가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했다는 사실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이완용의 부인이 생활비를 지원하다
조민희의 재산이 크게 줄어들자 주변의 도움을 받아 생활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런데 생활비를 지원한 인물이 더욱 황당하다.
바로 이완용의 부인이었다.
이완용의 부인은 조민희의 누이였으므로, 남동생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돕기 위해 생활비를 지급한 것이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이완용의 부인은 조민희에게 매달 약 50원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도 그의 경제적 몰락을 막지는 못했다.
나라 팔아먹는 데 협력해서 일본에서 돈을 받았는데 그 돈을 도박으로 날리고, 결국 매형 이완용의 집안에서 생활비를 받아먹은 것이다.
매국노 친척에게 생활비를 지원받는 매국노라니, 참으로 기가 막힌 가계도다.
물론 누이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동생을 돕는 행동 자체를 비난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조민희가 일본의 귀족 작위와 거액의 은사공채, 고위직 수당까지 받았음에도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했다는 사실이다.
채권자들의 소송
빚을 갚지 못하다
1920년대에 들어 조민희의 재정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여러 채권자들에게 돈을 빌렸지만 이를 제대로 상환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채권자들이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1923년 중반부터는 채권자들과의 법적 분쟁이 계속되었다.
당시 조민희는 이미 일본의 귀족 작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과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과 참의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지위가 채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그는 법정에 출석하지 않으면서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재판 출석도 거부하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조민희는 파산 관련 재판에서 20여 차례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구인장까지 발부되었다.
조선귀족이 채무 관련 재판에서 소환에 불응해 구인장을 받는 일은 당시에도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조민희는 과거 법부 협판과 평리원 재판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자기가 재판장일 때에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더니, 정작 자기가 빚 때문에 재판받을 처지가 되자 법원에 나오지도 않은 것이다.
더욱이 그는 과거 대한제국의 법률과 사법제도를 담당했던 고위 관료였다.
따라서 재판절차와 법원의 소환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여러 차례 소환에 불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파산 선고
1927년 12월
1927년 12월 조민희는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파산 선고를 받았다.
이는 그의 경제적 몰락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사건이었다.
그는 과거 일본의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았으며, 여러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상당한 경제적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도박과 채무 문제로 재산을 잃고 결국 파산에 이른 것이다.
나라 팔아먹는 데 협력해서 거액의 국채를 받고도 빚을 갚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력한 대가로 확보한 경제적 기반이 개인적인 도박과 낭비로 무너진 사례다.
당시 조선에서는 여러 친일 귀족들이 재산을 탕진하거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조민희의 경우 도박으로 인한 재산 손실과 반복적인 채무 관련 소송이 있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받았다.
귀족 예우 정지
1928년 2월 29일 일본은 조민희의 자작 작위에 따른 귀족 예우를 정지했다.
당시 조선귀족령에는 일정한 사유가 발생하면 귀족에 대한 예우를 정지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조민희는 파산 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규정의 적용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의 귀족으로서 누리던 예우가 정지되었다.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공로로 받은 귀족 대우를, 이번에는 도박과 파산 때문에 일본에서 정지당한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 결말이다.
다만 중요한 구분이 있다.
조민희의 자작 작위 자체가 박탈된 것은 아니었다.
정지된 것은 그 작위에 따른 예우였다.
따라서 조민희가 사망한 뒤에도 아들 조중수가 자작 작위를 승계할 수 있었다.
즉, 일본은 조민희를 귀족으로 대우하는 것을 중단했지만, 작위의 세습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언론의 조롱거리로 전락
1928년 3월 3일 《조선일보》에는 조민희의 파산과 귀족 예우 정지를 다룬 기사가 실렸다.
당시 신문은 여러 조선귀족들의 재산이 줄어들고 몰락하는 상황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도했다.
특히 조민희가 파산으로 인해 귀족 예우까지 정지당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는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했던 인물들 가운데 일부가 1920년대 이후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라 팔아먹고 귀족이 된 인간이 이제는 도박으로 파산해서 신문에까지 나오는 처지가 된 것이다.
1930년대 이전부터 이미 당시의 언론과 사회에서는 조선귀족의 경제적 몰락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했다.
조민희는 이러한 몰락의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조선귀족의 몰락
친일 귀족의 경제적 특권
일본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기존 대한제국의 지배층 가운데 일부에게 귀족 작위와 은사공채를 제공했다.
이를 통해 기존 지배층을 식민통치 체제에 포섭하려 했다.
특히 귀족 작위를 받은 인물들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여러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조선귀족들은 경제적으로 몰락했다.
특히 사업 실패와 도박, 낭비 및 채무 문제로 재산을 잃는 사례가 발생했다.
조민희는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3·1 운동 이후의 변화
1919년 3·1 운동 이후 한국인 사회에서는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이 더욱 확대되었다.
특히 기존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와 일본의 귀족 작위를 받은 인물들에 대한 비판도 강해졌다.
일본 역시 3·1 운동 이후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 방향을 변경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귀족 외에도 언론인과 지식인, 기업인 등 다양한 계층의 협력자들이 등장했다.
따라서 기존 조선귀족들의 정치적·사회적 중요성이 점차 줄어드는 변화가 나타났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일부 조선귀족들의 경제적 몰락과 연결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조민희의 경우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한 개인적인 요인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식민지 지배체제의 혜택을 받은 것도 모자라 자기 돈 관리까지 개판으로 했으니, 결국 일본에서도 보호해 주기 어려운 신세가 된 것이다.
창복회의 지원
1920년대 후반 일부 조선귀족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일본은 이러한 귀족들을 지원하기 위해 창복회라는 단체를 운영했다.
창복회는 생활이 어려운 조선귀족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민희 역시 파산 이후 이러한 지원과 관련된 기록에 등장한다.
일부 자료에는 1930년 창복회로부터 170원의 교부금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과거 일본의 귀족 작위와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았던 그의 전성기와 비교하면 상당히 다른 상황이었다.
한때는 일본에서 5만 원짜리 국채를 받을 정도의 귀족이었는데, 말년에는 귀족 구제단체의 지원을 받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력한 기존 지배층 가운데 일부가 정치적·경제적인 지위를 잃어 가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망
1931년 1월 2일 사망했다.
당시 만 71세였다.
일부 인터넷 자료에서는 사망 연도를 1930년으로 기록하기도 하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여러 근현대사 연구자료에서는 1931년 1월 2일로 기록한다.
따라서 본 문서에서는 1931년을 기준으로 한다.
조민희는 일본에서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았고, 일제강점기에도 여러 고위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도박과 채무 문제로 경제적으로 몰락했고, 일본의 귀족 예우까지 정지당했다.
매국으로 출세해서 일본 귀족이 되었지만, 결국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파산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본의 패전과 대한민국의 광복을 보지 못했다.
아들 조중수의 작위 승계
1931년 2월 16일 조민희의 장남 조중수가 일본의 자작 작위를 승계했다.
조민희는 생전에 파산 선고를 받아 귀족 예우가 정지된 상태였다.
그러나 작위 자체가 박탈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아들은 작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당시 조선귀족제도에서 작위의 세습과 귀족의 예우 정지가 서로 구분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도박으로 파산해 귀족 대접까지 정지당했지만, 귀족 작위는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조중수가 작위를 승계했다는 사실과 아들 개인의 친일반민족행위는 구분하여 평가해야 한다.
조민희의 친일 행적은 그가 직접 수행한 정치적 활동과 일본의 국권 침탈에 대한 협력에 근거해 판단해야 한다.
역사적 평가
공식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조민희는 대한민국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인물이다.
그의 행적은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수록되어 있다.
특히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제Ⅳ-16권에는 조민희의 친일 행적에 관한 조사와 결정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주요 행적은 다음과 같다.
-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재판한 평리원 재판장으로 활동
- 이상설에게 교수형, 이위종과 이준에게 종신형을 적용하는 재판에 관여
- 일본 황태자 환영을 위한 신사회의 부장으로 활동
- 동아개진교육회 부회장으로 일본 통감부의 정책에 협력
- 대동학회 평의원과 동양협회 한국지부 회원으로 활동
- 이토 히로부미 조문사절로 파견되고 관련 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여
- 한일병합에 협력한 인물로 경술국적에 포함
- 일본의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 원 수령
- 《매일신보》에 한일병합 1주년 축사 발표
- 다이쇼 천황 즉위식에 참석해 일본 천황의 은혜에 감격했다는 글 발표
-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발기인 및 특별회원
- 이왕직 찬시로 일본의 관리 아래 놓인 옛 황실 관련 업무 수행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참의로 식민통치에 협력
- 조선귀족회 이사로 활동
이러한 행적은 조민희가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 전후로 여러 친일 정치활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헤이그 특사 재판의 책임
조민희의 역사적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헤이그 특사 사건이다.
당시 특사들은 대한제국의 독립과 외교권 회복을 위해 활동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문제 삼아 고종의 강제 퇴위를 추진했고, 친일 내각은 특사들을 형사처벌하려 했다.
조민희는 평리원 재판장으로서 이러한 재판을 담당했다.
특히 이상설에게 교수형, 이위종과 이준에게 종신형을 적용하도록 상주한 사실이 《순종실록》에 직접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후대의 비판이나 소문이 아니라 당대의 공식적인 역사기록으로 확인되는 행적이다.
대한제국의 독립을 주장한 특사들에게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하는 재판을 담당했다는 점만으로도 조민희의 역사적 책임은 매우 크다.
특히 이미 사망한 이준에게 종신형을 적용했다는 사실은 재판의 비정상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외교관 출신이라는 모순
조민희는 미국과 일본에 주재한 대한제국의 외교관이었다.
그는 국제사회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업무를 경험했다.
따라서 외교사절이 어떤 지위와 권한을 가지고 활동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특사들의 외교활동을 범죄로 취급하는 재판에 관여했다.
자신은 외교관으로 해외에 파견되어 출세했으면서, 다른 사람이 국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해외로 나가자 사형을 선고하려 한 것이다.
물론 당시 일본의 군사적 압력과 친일 내각의 정치적 결정이 재판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조민희가 실제 재판장으로서 형벌 적용을 상주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조병세와의 대비
조민희는 을사늑약에 항의해 자결한 조병세와 같은 집안의 인물이었다.
조병세는 일본의 국권 침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반면 조민희는 일본의 국권 침탈과 식민통치에 협력했으며, 일본의 귀족 작위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차이는 당시 같은 사회적 배경과 가문을 가진 인물들 사이에서도 정치적 선택이 크게 달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같은 집안의 어른은 나라를 지키겠다고 죽었고, 조민희는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서 귀족이 되었다.
가문과 신분이 개인의 정치적 책임을 대신해 주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친일 귀족으로서의 경제적 혜택
조민희는 일본의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았다.
또한 이왕직과 중추원에서 여러 고위직을 맡으면서 상당한 수당을 지급받았다.
이러한 혜택은 일본이 기존 대한제국의 지배층을 식민통치에 협력하도록 포섭한 정책과 연결된다.
특히 일본의 귀족 작위는 단순한 명예칭호가 아니라 경제적·사회적인 혜택을 수반하는 제도였다.
조민희는 이러한 정책의 수혜자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혜택을 누리고도 개인적인 도박과 낭비로 재산을 탕진했다.
이는 식민통치에 협력한 대가로 받은 경제적 기반이 개인적인 능력이나 재산 관리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도박과 파산의 역사적 의미
조민희의 도박과 파산은 그의 친일반민족행위와는 구별되는 개인적인 경제적 행적이다.
따라서 도박으로 파산했다는 사실 자체가 한일병합에 협력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대한 역사적 범죄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조민희가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대가로 귀족 작위와 경제적 혜택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의 경제적 몰락은 역사적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일본 정부가 귀족 예우를 정지할 정도로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잃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귀족제도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나라 팔아먹는 데 협력해서 일본에서 거액의 돈을 받고도 도박으로 파산했다는 점에서, 조민희의 말년은 상당히 상징적이다.
그가 한일병합에 협력했다는 사실과 파산했다는 사실은 별개의 사건이지만, 두 사건을 함께 살펴보면 그의 정치적·경제적 생애를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을사오적·정미칠적·경술국적의 차이
| 구분 | 을사오적 | 정미칠적 | 경술국적 |
|---|---|---|---|
| 연도 | 1905년 | 1907년 | 1910년 |
| 관련 사건 | 을사늑약 | 정미7조약 | 한일병합조약 |
| 주요 내용 |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 대한제국의 내정권 침탈 | 대한제국 국권의 완전한 박탈 |
| 조민희 포함 여부 | 포함되지 않음 | 포함되지 않음 | 포함됨 |
조민희는 정식 을사오적이나 정미칠적이 아니다.
을사오적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다섯 대신이며, 정미칠적은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일곱 대신이다.
반면 조민희는 1910년 한일병합에 협력한 경술국적으로 분류된다.
다만 그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의 재판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국권 침탈에 대한 협력은 1910년 이전부터 확인된다.
을사오적과 정미칠적 명단에는 이름이 없지만, 나라의 독립을 지키려는 특사들을 처벌하고 나중에는 일본의 귀족이 된 인간이다.
명단에 어떤 이름이 붙어 있는지가 그의 전체적인 친일 행적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주요 행적 정리
| 연도 | 주요 행적 |
|---|---|
| 1859년 | 음력 10월 14일 한성부에서 출생 |
| 1885년 | 증광별시 문과 급제 |
| 1887년 | 양성현감과 용인현령 역임 |
| 1890년 | 성균관 대사성 임명 |
| 1894년 | 승정원 동부승지 |
| 1895년 | 전주부 관찰사 |
| 1897년 | 평안남도 관찰사 |
| 1899년 | 평안북도 관찰사 |
| 1900년 | 법부 협판, 형법교정관 |
| 1901년 | 주미특명전권공사 임명 |
| 1904년 | 주일특명전권공사 임명 |
| 1906년 | 경상남도 관찰사 |
| 1907년 7월 | 평리원 재판장으로 헤이그 특사 사건 담당 |
| 1907년 8월 8일 | 이상설 교수형, 이위종·이준 종신형 관련 상주 |
| 1907년 8월 | 승녕부 시종장 |
| 1907년 10월 | 신사회 부장으로 일본 황태자 환영운동 참여 |
| 1907년 11월 | 동아개진교육회 부회장, 승녕부 총관 |
| 1908년 | 대동학회 평의원, 동양협회 한국지부 가입 |
| 1909년 | 이토 히로부미 조문사절로 파견 |
| 1909년 11월 | 장충단 이토 히로부미 관민추도회 발기인 |
| 1910년 | 승녕부 총관으로 한일병합 관련 협력, 경술국적으로 분류 |
| 1910년 10월 7일 | 일본의 자작 작위 수령 |
| 1910년 | 조선귀족 일본관광단에 참여 |
| 1911년 1월 | 은사공채 5만 원 수령 |
| 1911년 8월 | 《매일신보》에 한일병합 1주년 축사 발표 |
| 1912년 | 한국병합기념장 수령, 권업주식회사 설립 참여 |
| 1913년 | 조선무역주식회사 설립 참여 |
| 1915년 | 조선물산공진회 관련 활동 |
| 1915년 | 다이쇼 천황 즉위식 참석,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글 발표 |
| 1917년 | 불교옹호회 고문 |
| 1918년 | 이왕직 찬시 임명 |
| 1919년 | 고종의 국장 빈전 업무 담당 |
| 1919년 11월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임명 |
| 1921년 |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임명 |
| 1923년 | 채권자들의 소송과 재산 문제 확대 |
| 1925년 | 조선귀족회 이사 활동, 도박 관련 문제 기록 |
| 1926년 | 일본 종3위에 승서 |
| 1927년 12월 | 경성지방법원에서 파산 선고 |
| 1928년 2월 29일 | 자작 작위에 따른 귀족 예우 정지 |
| 1928년 3월 | 파산과 귀족 예우 정지가 신문에 보도됨 |
| 1931년 1월 2일 | 사망 |
| 1931년 2월 16일 | 아들 조중수가 자작 작위 승계 |
여담
- 경술국적의 한 명이다. 정식 을사오적이나 정미칠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 본관은 양주 조씨이며, 아버지는 조병익이다.
- 1859년 음력 10월 14일 태어났다. 양력으로는 1859년 11월 8일이다.
- 을사늑약에 항의해 자결한 조병세의 집안 조카이다. 조병세와 조민희의 정치적 선택은 완전히 달랐다.
- 이완용의 처남이다. 이완용의 부인이 조민희의 누이였다.
- 1885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1887년 양성현감과 용인현령을 지냈다.
- 1890년에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 전주부 관찰사와 평안남도·평안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 법부 협판과 형법교정관으로 활동하면서 사법행정에도 관여했다.
- 1901년부터 1904년까지 미국에 주재하는 특명전권공사로 활동했다.
- 이후 일본 주재 특명전권공사도 역임했다.
- 외교관으로 해외에 파견되었던 사람이 훗날 독립을 위해 해외에 파견된 헤이그 특사들을 처벌하는 재판의 재판장이 되었다.
- 1907년 평리원 재판장으로서 헤이그 특사 사건을 담당했다.
- 《순종실록》에는 조민희가 이상설에게 교수형, 이위종과 이준에게 종신형을 적용하도록 보고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이준은 이미 헤이그에서 사망한 상태였는데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이 사건에서 평리원의 보고를 황제에게 상주한 법부대신은 조중응이었다. 조중응은 정미칠적 가운데 한 명이다.
- 1907년 승녕부 시종장과 승녕부 총관으로 활동했다. 승녕부는 퇴위한 고종과 관련된 황실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 일본 황태자의 대한제국 방문을 환영하기 위한 신사회에서 부장으로 활동했다.
- 동아개진교육회 부회장과 대동학회 평의원 등 여러 친일단체의 간부로 활동했다.
-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사살되자 고종의 조문 특사로 다롄에 파견되었다.
- 서울 장충단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의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 1910년 한일병합에 협력한 인물로서 경술국적에 포함된다.
- 한일병합조약에 직접 서명한 사람은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조민희는 조약의 직접 서명자가 아니다.
- 1910년 10월 7일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 1911년에는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았다.
- 일본이 후원한 조선귀족 일본관광단에도 참여했다.
- 1911년 《매일신보》에 한일병합 1주년 축사를 발표했다. 나라가 망한 날을 축하하는 글을 쓴 것이다.
- 1915년에는 다이쇼 천황 즉위대례식에 참석했다.
- 당시 《경성일보》에는 일본 천황의 은혜에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는 취지의 조민희 감상문이 실렸다.
- 대한제국의 독립을 주장한 사람들에게는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하고, 일본 천황에게는 감격해서 울었다는 것이다.
- 조선물산공진회 관련 행사에도 참여했다.
-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이왕직 찬시로 활동했다.
- 고종의 국장 빈전 업무를 맡았다. 과거 고종이 보낸 헤이그 특사들을 처벌하는 재판의 재판장이었다는 점에서 대조적인 행적이다.
- 1919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중추원 참의로 근무했다.
- 중추원 고문과 참의로 활동하면서 높은 수준의 수당을 받았다.
- 조선귀족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 기업의 설립과 경영에도 참여했으며, 권업주식회사와 조선무역주식회사 등이 관련되어 있다.
-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했다. 이 사실은 일본의 비밀문서인 《조선귀족약력》에도 기록되어 있다.
- 도박으로 여러 차례 적발되었으나 귀족이라는 지위 때문에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 그럼에도 도박을 중단하지 않았으며 관청 등에서 도박을 벌였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 일본에서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아먹고도 도박으로 재산을 날려 버린 것이다.
- 경제적으로 몰락한 이후에는 누이인 이완용의 부인으로부터 매달 50원의 생활비를 지원받았다.
- 1923년부터 채권자들의 소송이 계속되었으며, 파산 관련 재판에서 20여 차례 소환에 불응했다.
- 결국 구인장까지 발부되었다.
- 평리원 재판장까지 지냈던 인간이 정작 자기 재판에는 나오지 않아 구인장을 받은 것이다.
- 1927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파산 선고를 받았다.
- 1928년 2월 29일 일본 정부가 조민희의 귀족 예우를 정지했다.
- 이 사건은 1928년 《조선일보》에도 보도되었다.
- 다만 자작 작위 자체가 박탈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아들이 작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 1931년 1월 2일 사망했다. 일부 자료의 1930년 사망 표기는 1931년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 장남 조중수가 1931년 2월 16일 자작 작위를 승계했다.
- 같은 집안의 조병세는 나라를 지키려다 자결했고, 매형 이완용은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조약에 서명했으며, 조민희 본인은 독립을 주장한 헤이그 특사들을 처벌하는 재판을 맡았다.
-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서 귀족이 되었으나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했고, 결국 일본 정부가 귀족 예우까지 정지했다.
- 매국으로 얻은 작위와 재산을 후손에게 물려주기는커녕 도박으로 말아먹고, 매형 집안의 생활비 지원까지 받아야 했던 인물이다.
- 조민희의 생애를 요약하면 외교관으로 출세하고, 독립운동가를 재판하고, 일본 귀족이 되어 돈을 챙기고, 그 돈을 도박으로 날려 파산한 인간이다.
관련 문서
외부 링크 및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민희
- 민족문제연구소 - 「전도유망했던 조선귀족, 왜 세상의 조롱 받았나」(2024년 4월 22일)
- 조선왕조실록 - 순종 즉위년 1907년 8월 8일, 조민희의 헤이그 특사 관련 재판 보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헤이그 특사 사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평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주미내거안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일병합조약
- 조선왕조실록 -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 관련 어전회의
- 국사편찬위원회 -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관보, 한일병합조약
- 서울신문 -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에선 무슨 일이」(2010년 8월 21일)
- KBS 월드 - 한일병합의 전개 과정
- 디지털집현전 - 친일반민족행위 증거사료 12(조민희)
- 《친일인명사전》 제3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6,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 《조선귀족약력》, 조선총독부 비밀자료.
- 《순종실록》.
- 《조선총독부관보》.
- 《매일신보》 1911년 8월 29일.
- 《경성일보》 1915년 11월 29일.
- 《동아일보》 1925년 4월 6일.
- 《조선일보》 1928년 3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