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응 Jo Jung-eung | |||||||||||||||||||||||||||
| 국적 | 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조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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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
| 본관 | 양주 조씨 | ||||||||||||||||||||||||||
| 직업 | 관료, 정치인, 교육계 인사, 친일파 | ||||||||||||||||||||||||||
| 관련 사건 | 정미7조약, 대한제국 군대 해산, 경술국치 | ||||||||||||||||||||||||||
추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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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중응(趙重應, 1860년 11월 4일 ~ 1919년 8월 25일)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일본의 국권 침탈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양주(楊州), 호는 낭전(琅田)이며, 초명은 조중협(趙重協)이다.
1894년 갑오개혁 시기에 외무아문 참의와 법부 형사국장 등을 역임했고,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6년 귀국한 뒤에는 일본 통감부의 촉탁으로 활동했으며, 이듬해 이완용 내각의 법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1907년 법부대신 재임 중 의병과 친일 대신 처단 운동 관련자들의 처벌에 관여했고,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했다. 이에 따라 정미칠적의 한 명으로 분류된다.
1910년에는 농상공부대신으로서 한일병합을 추진하는 핵심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특히 8월 16일 이완용과 함께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만나 병합조약 초안을 검토하고 찬성했으며, 8월 22일 병합조약 체결을 결정한 어전회의에도 참여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10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어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다.
또한 대정친목회 회장으로서 내선융화를 주장하고 일본의 식민통치를 찬양하는 글을 발표했으며, 일본의 전쟁 관련 행사와 식민통치 기념행사에도 참여했다.
나라를 지키겠다고 싸우는 의병들은 처벌하고, 나라를 빼앗는 일본에는 협력해서 귀족 작위와 돈을 받아먹은 인간이다.
특히 이 인간의 행적이 기가 막히는 이유는 법부대신과 농상공부대신이라는 두 직책을 각각 다른 매국행위에 활용했다는 점이다.
법부대신이었을 때에는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들의 처벌에 관여했고, 농상공부대신이 된 뒤에는 일본이 나라 전체를 병합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법을 담당할 때에는 독립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처벌하고, 산업을 담당할 때에는 나라 자체를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한 것이다.
1907년에 정미칠적, 1910년에 경술국적이라는 명단에 모두 이름을 올렸으니, 국가의 권한을 단계적으로 빼앗는 과정에서 역할을 바꿔가며 협력한 셈이다.
그런데도 이 인간의 행적은 1910년에서 끝나지 않았다.
나라가 사라지자 일본의 귀족이 되었고, 식민통치에 협력하는 단체들의 회장과 고문을 맡았으며, 한일병합을 찬양하는 글까지 발표했다.
나라가 망한 뒤에도 본인의 관직, 작위, 금융자산은 아주 잘 살아남았다.
다만 조중응은 정식 을사오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을사오적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의 다섯 대신이다.
조중응은 1907년 정미칠적과 1910년 경술국적에 포함된 인물이므로 세 명칭은 구분해야 한다.
생애
출생과 어린 시절
1860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주 조씨이며, 아버지는 조택희(趙宅熙)이다.
본래 이름은 조중협(趙重協)이었으나 1890년 조중응으로 개명했다.
호는 낭전(琅田)이다.
어린 시절에는 전통적인 유교교육을 받았다.
1866년부터 집안에서 한문과 유교 경전을 공부했으며, 1878년 12월에는 성균관 중학동재의 재임으로 선발되었다.
이후 약 2년 동안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1880년에는 전강유생으로서 유교 경전에 관한 강론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2월 초시에 합격했다.
전강은 국왕 앞에서 유교 경전을 강론하는 시험이었다.
따라서 조중응은 근대적인 정치와 법률을 배우기 이전부터 전통적인 유교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다.
이후 그는 외국의 정치제도와 국제정세에 관심을 가지면서 새로운 분야로 활동 범위를 확대했다.
서북변계 조사위원
1883년 10월 조중응은 서북변계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조선은 러시아가 동아시아로 세력을 확대하는 상황을 경계하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시베리아와 연해주로 진출하면서 조선과 인접한 지역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국제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북방 지역을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조중응은 조사위원으로서 만주와 외몽골, 러시아 및 바이칼호 일대 등을 답사했다.
당시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장거리의 현지 조사였다.
그는 약 1년 6개월 동안 여러 지역을 조사한 뒤 1885년 4월 귀국했다.
이러한 경험은 조중응이 국제정세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외교적 견해를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북방남개론
귀국한 조중응은 북방남개론(北防南開論)을 주장했다.
북방남개론은 북쪽의 러시아를 경계하는 한편 남쪽의 일본과는 적극적으로 교류해야 한다는 외교적 구상이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의 간섭과 일본의 경제적 진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동시에 대응해야 했다.
조중응은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보수적인 유생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특히 일본과의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통적인 대외관계를 유지하려는 세력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결국 조중응은 탄핵을 받아 전라도 보성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약 6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1890년 5월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다.
초기에는 러시아를 경계하고 일본과 친교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유배까지 갔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적 협력과 일본에 국가의 주권을 넘기는 행위는 엄연히 다른 문제다.
조중응은 훗날 이 경계를 넘어 일본의 국권 침탈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다.
개화파 관료로 복귀
1890년 유배에서 풀려난 조중응은 다시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이 시작되면서 정부의 주요 관직에 진출했다.
1894년 7월 의정부 전고과 주사로 임명되었으며, 보통문관시험위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기존의 과거제도와 관료 선발 방식을 개편하고 있었다.
이러한 개혁 과정에서 새로운 행정제도와 문관 선발제도를 이해하는 인물들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조중응은 전통적인 유학을 공부하면서도 외국의 정치제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 업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본 특파대사 수행
1894년 9월 조중응은 일본에 파견되는 특파대사 의화군 이강의 수행원으로 선발되었다.
당시 조선은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으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일본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조선 정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조선의 개화파 관료들은 일본의 근대적인 제도를 참고해 정치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조중응은 이강을 수행해 일본을 방문하면서 일본의 정치와 행정제도를 직접 접했다.
이후 귀국해 외무아문 참의로 임명되었다.
외무아문은 국가의 외교업무를 담당하던 기관이었다.
1895년 4월에는 외부 교섭국장으로 임명되었고, 각 항구의 외국인 거류지를 조사하고 정리하는 업무도 맡았다.
이후 법부 형사국장과 법률조사개정위원, 특별법원 판사 등을 역임했다.
이 시기 조중응은 외교와 법률, 사법행정 분야의 전문 관료로 성장했다.
아관파천과 일본 망명
김홍집 내각의 붕괴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발생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서 활동하던 김홍집 내각이 붕괴했다.
당시 김홍집을 비롯한 일부 관료들은 분노한 군중에게 살해되었으며, 일본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개화파 인물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조중응 역시 김홍집 내각에서 활동했던 인물이었으므로 정치적 책임을 추궁받았다.
그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국사범으로 지목되었다.
결국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서 10년을 보내다
조중응은 1896년부터 1906년까지 약 10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했다.
일본 체류 기간에는 고마바 농학교에서 강습을 받았고, 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 교사로 근무했다.
또한 양잠과 차 재배 등 농업기술을 배우고 관련 실험에 참여했다.
일본의 정치와 법률제도에 관한 교육도 받았다.
이러한 활동은 그가 일본의 행정과 산업, 법률 및 정치체제를 이해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본 사회에서 장기간 생활하면서 여러 일본인 인사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다만 일본에서 공부하거나 조선어를 가르쳤다는 사실 자체가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가 귀국한 이후 일본의 통감부와 친일 내각에 협력해 국가의 권한을 침탈하는 데 참여했다는 점이다.
통감부가 설치되자 귀국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이후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의 외교와 주요 정책에 개입했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조중응은 1906년 3월 특별 사면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약 10년 동안의 일본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했다.
그런데 귀국한 이후 그가 들어간 기관은 대한제국의 독자적인 정치기구만이 아니었다.
1906년 10월 그는 일본 통감부의 촉탁으로 임명되었다.
통감부 촉탁은 일본의 통감부에서 특정 업무를 맡도록 고용하거나 위촉한 인물이었다.
조중응은 농업 관련 업무를 담당했고, 대한농회 부회장으로도 활동했다.
일본으로 망명해서 10년을 보내더니, 돌아와서는 일본이 설치한 통감부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았다는 점에서 이러한 경력은 그의 이후 정치적 행적을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계몽 및 교육 활동
《소년한반도》 창간
1906년 11월 조중응은 이인직, 이해조, 양재건 등과 함께 《소년한반도》를 창간했다.
《소년한반도》는 한국 최초의 소년잡지로 알려져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근대적인 교육과 출판문화가 발전하면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새로운 지식과 사회적 교훈을 전달하는 잡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소년한반도》 역시 이러한 계몽운동의 흐름 속에서 발행되었다.
조중응은 잡지의 창간에 참여하면서 출판과 교육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다만 근대교육이나 출판사업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지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 조중응은 당시 일본의 통감부 촉탁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는 일과 그 어린이들이 살아갈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하는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대동학회
1907년 2월 조중응은 대동학회 창립에 참여했다.
대동학회는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금을 받아 설립된 유교계 단체였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유교 지식인들을 포섭하여 식민지화 정책에 대한 반발을 줄이려 했다.
특히 유교의 전통적인 가치와 근대적인 교육을 결합한다는 명분으로 여러 정치적 활동을 추진했다.
조중응은 대동학회에서 지방총무와 평의원, 신서적 강사 등을 맡았다.
이 단체는 이후 친일적인 유교계 활동의 주요 기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조중응은 이처럼 교육과 유교 관련 활동을 통해 일본의 정책을 지지하는 사회적 기반을 확대하는 데 참여했다.
법부대신
이완용 내각에 들어가다
1907년 5월 조중응은 이완용 내각의 법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법부대신은 오늘날의 법무부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의 사법제도와 법률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조중응은 형법개정 총재도 겸임했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이미 장악한 상태였으며, 다음 단계로 사법과 행정, 군사 및 인사권을 통제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법부대신은 국가의 사법권을 보호해야 하는 중요한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중응은 일본의 정책에 협력하는 친일 내각의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그가 법부대신 재임 중 관여한 의병과 정치적 저항세력에 대한 처벌은 이후 역사적 평가에서 중요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의병장 민종식의 처벌
1906년 민종식은 충청도 홍주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대하면서 의병을 조직했고, 한때 홍주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의병부대는 패배했으며, 민종식은 이후 체포되었다.
1907년 조중응은 법부대신으로서 민종식과 관련 인물들의 재판 및 처벌 문제에 관여했다.
당시의 기록은 《고종실록》에 남아 있다.
1907년 7월 3일자 기록에는 법부대신 조중응이 평리원에서 올라온 민종식 등의 공술과 재판 내용을 보고한 사실이 확인된다.
특히 민종식은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병을 일으킨 이유가 국권을 회복하고 외국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대한제국 정부는 이러한 행동을 범죄로 취급했다.
조중응은 법부대신으로서 관련 사건의 처벌 절차에 관여했다.
나라를 지키겠다고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범죄자로 재판받고, 나라를 침략하는 일본에 협력하는 사람은 법부대신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상황 자체가 참으로 기가 막히다.
다만 조중응이 민종식의 모든 재판 과정을 개인적으로 직접 지휘했거나 특정 판결을 혼자 결정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확인되는 사실은 법부대신으로서 의병 관련 사건의 공술과 형벌을 황제에게 보고하고 처벌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의병들에게 중형을 요구하다
조중응은 법부대신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의병 관련 인물들에게 중형을 부과하는 데 협력했다.
특히 민종식과 이용규, 서은구 등의 의병 관련 사건에 관여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조중응이 법부대신 시절 이들의 중형 선고에 관여했다고 설명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그가 체포된 의병장들에게 종신형 등의 처벌을 상주했다고 기록한다.
당시 의병들은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대하면서 무장저항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과 친일 내각은 이러한 의병활동을 국가의 치안을 위협하는 범죄로 규정했다.
나라를 빼앗는 쪽은 통감부에서 정책을 만들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싸운 사람들은 감옥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처벌을 담당한 법부대신이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하던 조중응이었다.
이것이 그의 친일 행적 가운데 특히 중요한 부분이다.
을사오적 처단 운동 탄압
나인영의 거사
1905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당시 조약 체결에 찬성한 다섯 대신은 을사오적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다음과 같다.
이에 분노한 일부 인물들은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나철이었다.
나철은 당시 나인영(羅寅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오기호와 김인식, 김동필 등과 함께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했다.
이들은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고위 관료들이 국가의 독립을 위협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계획은 실행되기 전에 발각되었고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다.
조중응이 처벌을 상주하다
1907년 7월 6일 조중응은 법부대신으로서 나인영과 오기호, 김동필 등 관련자들의 진술과 처벌 문제를 황제에게 보고했다.
해당 내용은 《고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나인영은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되었고 고종의 정식 승인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의 국권 침탈과 친일 대신들의 행동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러한 거사를 모의한 인물들은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조중응은 관련자들의 유배형 등을 상주했다.
나라를 팔아먹은 대신들을 처단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체포되었는데, 그 사람들을 처벌하라고 황제에게 보고한 놈이 훗날 정미칠적이 되는 조중응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의 사법제도가 일본의 국권 침탈에 저항하는 세력을 억압하는 데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다만 나인영 일행의 계획은 실제로 특정 인물을 살해하려는 정치적 폭력 계획이었으므로, 당시의 형사사건으로서의 성격과 항일운동의 역사적 맥락을 함께 구분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조중응이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행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친일 대신을 보호하는 법부대신
당시 법부대신은 국가의 법률과 사법제도를 관리하는 책임자였다.
그러나 조중응은 일본의 강압으로 진행된 국권 침탈에 저항하는 인물들의 처벌에 관여했다.
특히 을사오적 처단 운동 관련자들을 처벌한 이후 자신도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하면서 정미칠적의 한 명이 되었다.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던 사람들을 처벌하던 법부대신이, 몇 달 뒤에는 자신도 새로운 매국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당시 항일운동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는 데 협력한 사람들은 정부의 고위 관직을 유지하고, 그들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법률에 따라 처벌받았다.
조중응은 이러한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종 강제 퇴위
헤이그 특사 사건
1907년 고종은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특사를 파견했다.
이들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회복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은 대한제국이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문제 삼았다.
특히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를 구실로 고종의 강제 퇴위를 추진했다.
일본은 고종을 물러나게 한 뒤 순종을 즉위시켜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더욱 강하게 장악하려 했다.
이에 친일 내각이 협력했다.
고종의 퇴위에 협력
1907년 7월 이완용 내각은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조중응 역시 법부대신으로서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일본은 군사적 압력과 정치적 협박을 통해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 했다.
결국 고종은 1907년 7월 19일 강제로 퇴위했으며, 황태자 순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조중응은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의 정책에 협력한 주요 관료로 평가된다.
나라의 외교권을 되찾겠다고 국제사회에 특사를 보낸 황제를, 자기 나라 대신들이 일본과 함께 쫓아낸 것이다.
더욱이 조중응은 법부대신으로서 국가의 사법행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국가의 법률을 관리하는 사람이 일본의 강압으로 진행된 황제 퇴위에 협력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포상을 받다
조중응은 고종의 강제 퇴위에 협력한 이후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1907년 8월에는 훈2등 태극장을 받았으며, 정2품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즉,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대한제국의 내정권이 일본에 넘어가는 과정에서 협력한 뒤 양쪽 정부에서 포상을 받은 것이다.
황제는 쫓겨났는데, 황제를 쫓아내는 데 협력한 대신은 훈장과 승진을 챙겼다.
당시 국권 침탈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치적 출세의 기회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정미칠적
정미7조약 체결
1907년 7월 24일 일본은 대한제국에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했다.
정미7조약은 한일신협약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의 중요한 행정처분과 법령 제정, 고위 관료 임명 등에 일본 통감의 승인을 요구했다.
또한 일본인이 대한제국 정부의 차관급 관직을 맡을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데 이어 내정권까지 장악하는 과정이었다.
당시 조중응은 법부대신으로서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했다.
이 때문에 그는 정미칠적(丁未七賊)의 한 명으로 분류된다.
정미칠적 7명
| 인물 | 당시 관직 |
|---|---|
| 이완용 | 내각총리대신 |
| 임선준 | 내부대신 |
| 고영희 | 탁지부대신 |
| 이병무 | 군부대신 |
| 이재곤 | 학부대신 |
| 송병준 | 농상공부대신 |
| 조중응 | 법부대신 |
정미칠적은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일본에 넘기는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일곱 대신을 가리킨다.
다만 조약문에 직접 서명한 사람은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였다.
따라서 조중응이 두 나라를 대표해 조약문에 직접 서명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의 책임은 친일 내각의 법부대신으로서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했다는 점에 있다.
을사오적이 외교권을 넘기는 데 협력했다면, 정미칠적은 남아 있던 내정권까지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한 놈들이다.
조중응은 그 가운데 법과 사법제도를 담당한 인물이었다.
사법권 침탈의 기반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은 대한제국의 행정과 사법제도에 더욱 깊숙이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일본인 관리들이 정부의 주요 직책을 맡으면서 정책 결정과 행정 운영에 직접 관여했다.
대한제국의 법률과 재판제도 역시 일본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909년에는 일본이 사법권을 더욱 직접적으로 장악하는 기유각서가 체결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가 기능을 단계적으로 제거하는 정책의 일부였다.
조중응은 1907년 법부대신으로서 그 기반이 된 정미7조약에 협력했다.
따라서 그가 이후의 모든 사법권 침탈조치를 직접 결정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일본의 내정권 침탈에 협력한 정치적 책임은 분명하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
1907년 8월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당시 대한제국에는 수도를 지키는 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 등이 존재했다.
일본은 이러한 군대가 남아 있을 경우 식민지화 정책에 대한 무장저항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대한제국의 군사력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1907년 8월 1일 군부대신 이병무는 대한제국의 군대 지휘관들에게 해산 명령을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자결했으며, 이에 분노한 군인들이 남대문 전투를 일으켰다.
조중응은 당시 법부대신이었으므로 군대 해산 명령을 직접 전달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군대 해산의 정치적 배경이 된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친일 내각의 일원이었다.
이병무가 군대를 해산시키는 일을 맡았다면, 조중응은 그 군대가 속한 국가의 사법권과 행정권을 일본에 넘기는 정책에 협력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직책을 통해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했다.
황태자 이은의 일본 유학
1907년 일본은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을 일본으로 데려가 교육시키려 했다.
이는 단순한 유학사업을 넘어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의 후계자를 통제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이은은 아직 어린 나이였다.
일본은 황태자를 일본에 머물게 하면서 일본식 교육을 실시하고, 향후 조선 왕실을 일본의 지배체제에 편입시키려 했다.
조중응은 1907년 10월부터 1908년 4월까지 임시감독 궁중특별경위사무를 맡았다.
특히 이은이 1907년 12월 일본으로 떠나기 전까지 궁중에서 황태자의 호위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일본 황태자의 방한을 환영하기 위해 조직된 신사회에도 참여했다.
또한 한성부민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황태자 환영행사를 지원했다.
대한제국의 황태자는 일본으로 보내고, 일본 황태자가 오자 환영행사를 준비하는 데 협력한 것이다.
당시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에 행사하던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농상공부대신
농상공부대신으로 이동
1907년 12월 조중응은 농상공부대신 사무를 임시로 맡게 되었다.
이후 1908년 6월 정식 농상공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농상공부는 대한제국의 농업과 상업, 공업 및 산업 관련 정책을 담당하는 중앙 행정기관이었다.
농상공부대신은 오늘날의 농림축산식품부와 산업통상 관련 부처의 기능을 일부 함께 담당한 직책이었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의 철도와 항만, 광산 및 산업시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또한 한국의 경제적 자원을 일본의 산업과 군사적 목적에 활용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상공부대신의 역할은 중요했다.
조중응은 이 직책을 맡은 뒤에도 일본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동아개진교육회
조중응은 1907년 11월부터 1908년 8월까지 동아개진교육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동아개진교육회는 일본 통감부의 식민정책에 동조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보부상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교육과 계몽사업을 추진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그러나 일본의 정책에 협력하는 정치적 활동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조중응은 회장으로서 이러한 사업에 참여했다.
또한 1908년 대동법률전문학교의 교장과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대한여자흥학회의 고문도 맡았다.
이는 그가 친일 정치활동뿐 아니라 교육과 사회단체의 운영에도 폭넓게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국시유세단 지원
1909년 조중응은 일본의 보호통치 정책을 선전하던 국시유세단을 지원했다.
국시유세단은 대한제국 각지에서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선전활동을 추진한 단체였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상당 부분 장악한 상태였지만, 전국에서는 여전히 의병과 여러 정치단체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에 일본은 한국인들이 일본의 정책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인상을 만들려 했다.
조중응은 국시유세단의 발기인 고희준에게 지방에 유세위원을 신속하게 파견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1910년 3월에는 국시유세단에 2,000원의 보조금이 지급되도록 주선했다.
일본이 나라를 빼앗는 데 협력하는 것만으로 모자라,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본의 지배가 정당하다고 홍보하는 조직에 자금까지 마련해 준 것이다.
조중응의 친일 행적이 정부 내부의 정책 결정에만 한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초대 통감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내정권 침탈, 고종의 강제 퇴위 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그의 사망은 대한제국과 일본의 정치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본에 협력하던 친일 관료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을 애도하는 행사를 추진했다.
당시 일본과 대한제국의 관계가 얼마나 불평등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에 조문사절로 파견되다
조중응은 대한제국의 황실과 정부를 대표하는 조문사절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당시 조문사절단에는 궁내부대신 민병석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중응은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의 국장과 관련된 업무에 참여했다.
다만 실제 국장 참석 여부에 관해서는 자료에 차이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조중응 항목에서는 그가 일본에서 열린 이토의 국장에 참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같은 백과사전의 동아찬영회 항목에서는 조문사절 일행이 일본에 도착했지만 현지 분위기 때문에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귀국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조중응이 조문사절로 일본에 파견되었다는 사실과 실제 국장에 참석했는지 여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장충단 추도회
1909년 11월 4일 서울 장충단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관민추도회가 개최되었다.
이 행사에는 이완용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주요 관료들이 참여했다.
조중응 역시 추도회의 발의와 준비에 관여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장충단은 본래 대한제국의 군인과 국가를 위해 희생된 인물들을 기념하는 공간이었다.
그런 장소에서 일본의 국권 침탈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회가 열린 것이다.
일본에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은 인물이 죽자, 그 인물을 추모하는 행사를 대한제국의 관료들이 앞장서 준비했다.
그 가운데 조중응도 있었다.
이후 조중응은 이토 히로부미 사망 50일을 기념하는 추도회에도 참석했다.
이러한 활동은 그가 일본의 침략정책을 주도했던 인물을 정치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일병합 추진
이완용과 병합 추진에 협력
1909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기 위한 정책을 구체화했다.
특히 보호국 체제를 유지하는 대신 대한제국을 일본의 영토로 직접 편입하려 했다.
당시 친일단체 일진회는 한일병합 청원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은 일진회가 병합운동의 주도권을 차지하는 것을 경계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한일병합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조중응 역시 이러한 움직임에 참여했다.
1910년 3월에는 이완용과 함께 병합찬성을 추진하던 정우회의 운영 경비를 지원했다.
정우회는 일진회와 경쟁하면서 별도의 병합 관련 정치활동을 전개한 단체였다.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문제를 놓고 친일 세력끼리 주도권 경쟁을 벌였는데, 조중응은 이완용 쪽의 병합 추진을 도운 것이다.
당시 이러한 활동은 일본의 한일병합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1910년 8월 16일
1910년 8월 16일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이완용과 조중응을 통감관저로 불렀다.
당시 조중응은 농상공부대신이었다.
데라우치는 두 사람에게 한일병합조약의 초안을 보여주고 관련 내용을 비밀리에 협의했다.
조중응은 병합조약안과 관련 각서에 찬성하는 의견을 밝혔다.
이 사건은 조중응의 친일 행적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이다.
그가 단순히 1910년 8월 22일 어전회의에 참석해 다른 대신들의 결정에 따라간 인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 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엿새 전, 이미 일본 통감이 이완용과 조중응을 따로 불러 조약 초안을 검토하게 했던 것이다.
일본의 한일병합 추진 과정에서 조중응이 중요한 협의 상대였음을 보여준다.
내각회의에서 병합을 결의
1910년 8월 18일 대한제국의 내각회의에서는 병합조약안이 논의되었다.
당시 일본은 이미 군사와 경찰, 행정조직을 통해 대한제국을 강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또한 언론과 집회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면서 병합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억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일 내각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병합조약안을 처리했다.
조중응은 농상공부대신으로서 내각회의에 참여했다.
일본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던 그가 병합조약안에 반대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미 8월 16일 데라우치와의 회의에서 병합조약안에 찬성한 상태였다.
8월 22일 마지막 어전회의
1910년 8월 22일 순종 앞에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본에 넘기는 한일병합조약이 논의되었다.
당시 일본은 서울의 주요 장소에 헌병과 경찰을 배치했으며, 병합에 반대하는 언론과 정치활동을 억압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회의는 자유로운 국가 간 협상을 통해 진행된 것이 아니라 일본의 강압 아래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절차였다.
조중응은 농상공부대신으로서 회의에 참석해 병합조약 체결을 지지했다.
이후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가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있다.
병합조약에 직접 서명한 당사자는 이완용과 데라우치였다.
조중응은 조약문에 두 나라의 대표로 서명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사전 협의에 참여하고 내각회의와 어전회의에서 병합에 찬성한 핵심 관료였다.
따라서 단순히 서명란에 이름이 없었다는 이유로 그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서명은 이완용이 했지만, 조중응은 그 서명을 가능하게 한 협상과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경술국적
1910년 8월 한일병합에 협력한 주요 인물들을 경술국적(庚戌國賊)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다음 여덟 명이 포함된다.
| 인물 | 당시 직책 |
|---|---|
| 이완용 | 내각총리대신 |
| 박제순 | 내부대신 |
| 고영희 | 탁지부대신 |
| 조중응 | 농상공부대신 |
| 민병석 | 궁내부대신 |
| 윤덕영 | 시종원경 |
| 이병무 |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
| 조민희 | 승녕부총관 |
경술국적은 1905년의 을사오적이나 1907년의 정미칠적과는 다른 명칭이다.
을사오적은 외교권 박탈, 정미칠적은 내정권 침탈, 경술국적은 국가 전체의 병합과 관련된 인물들을 가리킨다.
조중응은 정미칠적과 경술국적 양쪽에 모두 포함된다.
특히 정미7조약 체결 당시에는 법부대신이었고, 한일병합 당시에는 농상공부대신이었다.
1907년에는 나라의 내정권을 넘기는 데 협력하고, 1910년에는 아예 나라 자체를 넘기는 데 협력한 것이다.
그야말로 단계별 국권 침탈에 참여한 셈이다.
정미칠적과 경술국적
조중응의 행적을 이해할 때에는 1907년과 1910년의 역할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 구분 | 1907년 | 1910년 |
|---|---|---|
| 관련 사건 | 정미7조약 | 한일병합조약 |
| 명칭 | 정미칠적 | 경술국적 |
| 당시 직책 | 법부대신 | 농상공부대신 |
| 주요 역할 | 정미7조약 체결 협력, 사법행정 담당 | 병합조약 사전 협의, 내각회의 및 어전회의 참여 |
| 결과 | 대한제국의 내정권 침탈 | 대한제국의 국권 상실 |
특히 조중응은 국권 침탈 과정에서 중요한 정부 직책을 계속 맡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행적을 단순히 조약 체결 당시 찬성한 관료 한 명으로 축소해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는 사법행정의 책임자이자 산업정책의 책임자로서 일본의 정책에 협력했다.
또한 1907년에는 의병과 항일운동 관련자들의 처벌에 관여했고, 1910년에는 병합조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사전에 협의했다.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을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에서 직접 업무를 맡은 것이다.
일본의 포상
자작 작위 수령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었다.
이후 일본 정부는 국권 침탈에 협력한 고위 관료와 유력 인물들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1910년 10월 7일 조중응은 일본으로부터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
자작은 일본의 화족제도에서 사용하던 귀족 작위였다.
일본은 기존 대한제국의 지배층을 식민통치 체제에 편입시키기 위해 이러한 작위를 제공했다.
조중응은 일본의 귀족 작위를 받아들였다.
대한제국은 사라졌는데 조중응의 귀족 신분은 새로 생겼다.
특히 그는 한일병합조약의 사전 협의와 체결 과정에 직접 참여한 인물이었으므로, 일본의 포상과 국권 침탈에 대한 협력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은사공채 10만 원
1911년 1월 조중응은 일본 정부로부터 10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은사공채는 일본이 조선귀족에게 지급한 국채 형태의 경제적 보상이었다.
당시 10만 원은 일반적인 조선인 노동자나 농민이 쉽게 확보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특히 은사공채는 이자 수익을 발생시키는 자산이었다.
조중응은 이러한 경제적 혜택을 통해 식민지 지배체제에서 상당한 재산을 확보했다.
나라를 팔아먹는 데 협력했더니 일본에서 귀족 작위와 금융자산을 한꺼번에 지급한 것이다.
당시 일반적인 자작 작위 수령자에게 지급된 은사공채가 5만 원인 경우도 있었다는 점에서 조중응이 받은 10만 원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이는 일본이 그의 협력을 높게 평가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조선귀족 일본관광단
1910년 11월 조중응은 조선귀족 일본관광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부인과 함께 일본의 여러 도시를 시찰했으며, 일본의 공식 행사에도 참석했다.
특히 메이지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행사에 참여하고 일본 천황이 내린 주병을 받았다.
이 행사는 일본이 새롭게 편입된 조선귀족들에게 일본의 정치와 사회, 산업시설을 소개하고 제국의 지배질서에 순응하도록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조중응은 관광단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나라가 망한 지 몇 달도 되지 않았는데, 일본 귀족 작위를 받고 일본 관광단까지 이끌고 다닌 것이다.
다만 이러한 방문은 일반적인 개인 관광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후원한 공식적인 정치·사회행사였다는 점에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식민통치 자문기관에 임명
1910년 10월 조중응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통치를 위해 설치한 자문기관이었다.
이 기관에는 대한제국의 전직 고위 관료와 친일적인 유력 인물들이 다수 참여했다.
일본은 중추원을 통해 기존 대한제국의 지배층을 포섭하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 했다.
조중응은 이러한 기관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10년부터 1919년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매년 1,600원의 수당
조중응은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이는 당시 일반적인 조선인의 소득 수준을 고려하면 상당한 금액이었다.
그는 이미 일본의 귀족 작위와 10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은 상태였다.
여기에 중추원 고문 수당까지 지급되었다.
귀족 작위에 은사공채 10만 원, 거기에 매년 고문 수당 1,600원까지.
대한제국의 국권은 없어졌지만 조중응 개인에게는 여러 경제적인 혜택이 제공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일본이 기존의 친일 지배층을 식민통치 체제에 포섭하기 위해 어떠한 보상정책을 사용했는지 보여준다.
한일병합 1주년 축사
1911년 8월 29일 조중응은 《매일신보》에 한일병합 1주년을 기념하는 글을 발표했다.
글의 제목은 「병합 일주년 감상」이었다.
당시 《매일신보》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선전하는 데 활용되던 신문이었다.
일본은 한일병합 1주년을 맞아 여러 공식 행사와 언론보도를 통해 식민통치가 정당하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려 했다.
조중응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병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글을 게재했다.
대한제국이 망한 지 1년 되는 날, 이 인간은 그걸 기념하는 감상문을 발표했다.
나라를 잃은 사람들에게는 비극적인 날이었지만, 조중응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찬양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이는 그가 1910년 병합 당시의 정치적 협력에 그치지 않고 이후에도 일본의 지배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식민통치 관련 단체 활동
조선구관연구회
1911년 조중응은 이완용과 박제순 등과 함께 조선구관연구회를 설립했다.
조선구관연구회는 조선의 기존 관습과 법률, 사회제도 등을 조사하기 위한 단체였다.
당시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기존의 관습과 법률을 조사하고 새로운 식민지 행정제도에 반영하려 했다.
조중응은 이와 관련된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과거 법부대신으로 근무하면서 사법제도와 법률에 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다만 조선의 관습을 연구했다는 사실 자체가 곧바로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미 식민통치에 협력하고 있던 인물이며, 일본의 행정적 지배체제 아래에서 이러한 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명농회
1910년 12월 조중응은 이완용, 민병석 등과 함께 명농회를 조직했다.
명농회는 농업과 관련된 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였다.
조중응은 일본 체류 기간에 농업기술을 배운 경험이 있었으며, 대한제국 시기에도 농업 관련 정책과 단체에 참여했다.
따라서 농업 분야에 대한 관심은 그의 초기 관료 생활부터 이어진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다만 농업 관련 활동과 국권 침탈 협력은 구분해 평가해야 한다.
그가 농업기술을 연구하거나 교육사업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정미7조약과 한일병합에 협력한 책임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조선물산공진회
1915년 일제는 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했다.
이 행사는 일본이 조선의 산업과 경제 발전을 선전하기 위해 개최한 대규모 박람회였다.
일본은 식민통치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주장을 강조했다.
조중응은 경성협찬회 부회장과 상의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특별유공회원으로 기부금을 냈다.
그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 성과를 선전하는 행사에 협력했다.
한일병합조약의 체결에 참여했던 사람이 5년 뒤에는 그 병합을 기념하는 박람회 운영까지 도운 것이다.
국가가 사라진 이후에도 일본의 정책에 대한 협력이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본의 전쟁을 축하하다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군 후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의 동맹을 바탕으로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전쟁에 참여했다.
특히 일본은 중국 산둥반도의 독일 조차지와 태평양의 독일령 섬들을 공격했다.
조중응은 일본군의 전쟁 수행과 관련된 후원활동에 참여했다.
1914년에는 전쟁에 출정하는 일본군을 위한 경성군인후원회에 기부금을 냈다.
이는 그가 식민통치뿐 아니라 일본의 해외 군사활동을 지원하는 행사에도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칭다오 점령 축하회
1914년 11월 일본군은 중국의 칭다오를 점령했다.
당시 칭다오는 독일이 조차하고 있던 지역으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을 이용해 중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조중응은 일본군의 칭다오 점령을 축하하는 전첩축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후 회장으로 활동했다.
즉, 조중응은 일본군이 중국의 영토를 점령한 사건을 축하하는 행사를 조직했다.
자기 나라가 일본에 점령당했을 때에는 협력하더니, 일본이 다른 나라의 땅을 점령하자 이번에는 축하회 회장이 된 것이다.
침략과 점령에 대한 그의 정치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대정친목회
내선융화를 주장하다
1916년 조중응은 대정친목회의 설립에 참여했다.
대정친목회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친목 및 융화를 표방한 친일단체였다.
당시 일본은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해 한국인과 일본인이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선전했다.
그러나 실제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정치적 지위가 평등하지 않았다.
일본인은 지배자의 위치를 차지했고, 한국인은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기회에서 여러 제약과 차별을 받았다.
따라서 내선융화라는 표현은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선전으로 이용되었다.
조중응은 이러한 단체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사망할 때까지 회장
조중응은 1916년 11월 대정친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19년 사망할 때까지 회장직을 유지했다.
그는 대정친목회를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를 지지하고 내선융화를 주장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일제강점기 후반으로 갈수록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정치적·문화적 질서에 순응하도록 요구하는 주장이 확대되고 있었다.
조중응은 이러한 흐름에 협력했다.
1907년에는 나라의 내정권을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하고, 1910년에는 나라 전체를 넘기는 데 협력한 뒤, 1916년에는 일본과 조선이 잘 지내야 한다는 친일단체의 회장이 된 것이다.
그가 추구한 융화는 독립국가 사이의 대등한 협력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통치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순종의 일본 방문
1917년 6월 순종은 일본을 방문했다.
당시 순종은 이미 독립국가의 황제가 아니었으며,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 이왕이라는 지위로 격하된 상태였다.
일본은 이러한 방문을 통해 옛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의 왕공족 제도에 편입시키고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강조하려 했다.
조중응은 순종의 일본 방문에 수행원으로 참여했다.
이후 《매일신보》에 관련 감상을 발표했다.
그는 일본의 황실과 조선 왕실 사이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러한 활동은 조중응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일본의 정치체제에 편입시키는 과정에도 협력했음을 보여준다.
왕세자 이은의 혼인
1918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이은과 일본 황족 이방자의 혼인을 발표했다.
이방자의 본명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였다.
이 혼인은 조선 왕실과 일본 황실을 결합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이를 통해 한국과 일본이 하나의 정치적·문화적 공동체라는 주장을 선전하려 했다.
조중응은 1918년 12월 《경성일보》에 「동화의 좋은 모범 / 옛 일선관계를 재현」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두 사람의 혼인을 내선융화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했다.
또한 일반 조선인들도 일본과의 동화에 노력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전개했다.
나라가 망한 것도 모자라 옛 황태자가 일본 황족과 결혼하자, 이번에는 그 결혼을 일본과 조선의 동화를 위한 모범이라고 선전한 것이다.
조중응이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정치뿐 아니라 왕실과 문화적인 영역에서도 주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종의 국장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사망했다.
당시 고종의 죽음은 한국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부에서는 일본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까지 퍼졌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이후 3·1 운동이 일어나는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조중응은 고종의 국장과 관련된 장의괘에 임명되었다.
그는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에 협력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1919년에는 고종의 국장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1907년에는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쫓아내는 데 협력하고, 1919년에는 고종의 장례를 담당한 셈이다.
물론 장례 관련 관직에 임명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고종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1907년 행적과 1919년의 역할을 비교하면 상당히 대조적인 장면임은 분명하다.
사망
1919년 사망했다.
사망일은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1919년 7월 25일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 《매일신보》의 1919년 8월 26일자 사망 보도와 여러 전기자료에서는 1919년 8월 25일로 기록한다.
특히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에는 1919년 8월 26일자 《매일신보》의 「趙重應子薨去」라는 기사가 남아 있다.
따라서 본 문서에서는 당시의 신문보도와 여러 전기자료에서 제시하는 1919년 8월 25일을 기준으로 한다.
다만 백과사전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는 점은 함께 밝혀 둔다.
조중응은 사망할 때까지 일본의 자작 작위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대정친목회 회장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국권 침탈 이전부터 일본의 정책에 협력했으며, 일제강점기에도 이러한 관계를 지속한 것이다.
아들 조대호의 작위 승계
조중응이 사망한 뒤 일본의 자작 작위는 장남 조대호가 승계했다.
조대호는 이후 조선귀족으로서 활동했다.
1932년 조대호가 사망하자 양자 조원흥이 작위를 이어받았다.
이러한 사례는 일본이 수여한 조선귀족 작위가 개인적인 포상에 그치지 않고 가족들에게 세습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만 후손이 작위를 승계했다는 사실과 후손 개인이 어떠한 친일 행위를 했는지는 별도로 평가해야 한다.
조중응의 역사적 책임은 그가 직접 참여한 국권 침탈과 식민통치 협력에 근거한다.
친일재산 환수
2007년 국가귀속 결정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조중응과 관련된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키기로 결정했다.
친일재산 환수는 일제강점기 국권 침탈에 협력한 인물들이 그 대가로 취득한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기 위한 정책이다.
특히 2005년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국가가 친일재산을 조사하고 환수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마련되었다.
조중응은 정미7조약과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협력했고 일본의 작위와 경제적 보상을 받은 인물이므로, 재산조사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후손들의 소송
조중응의 후손들은 국가의 재산귀속 결정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했다.
문제가 된 재산은 경기도 남양주 일대의 토지 약 6,500㎡였다.
후손들은 해당 토지가 조중응이 친일 행위의 대가로 얻은 재산이 아니며, 이전부터 보유하던 재산의 소유권을 재확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8년 8월 14일 서울행정법원은 조중응의 후손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국가귀속 결정 취소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조중응이 한일병합 이후 친일 행위의 대가로 여러 특권과 경제적 혜택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했다.
또한 해당 토지가 친일 행위와 무관하게 취득되었다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은 친일파 후손이 직접 국가의 친일재산 환수 결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에 대한 초기 법원 판단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나라를 팔아먹는 데 협력했던 조중응의 재산 문제가 그가 죽은 지 거의 90년이 지난 뒤에도 법정에서 다뤄진 것이다.
다만 이 소송은 특정 토지가 관련 특별법의 국가귀속 요건에 해당하는지에 관한 법적 분쟁이었다.
따라서 조중응의 모든 재산이 친일 행위로 취득되었다거나, 그의 후손들이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의미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 평가
공식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중응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인물이다.
그의 행적은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특히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7권에는 조중응의 친일 행적과 관련된 결정이유서가 실려 있다.
주요 행적은 다음과 같다.
- 1906년 일본 통감부 촉탁으로 임명
- 1907년 법부대신으로서 항일 의병 및 을사오적 처단 운동 관련자들의 처벌에 관여
-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에 협력
-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
- 일본의 통감부 정책을 지지하는 사회단체에서 활동
-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추도행사 관련 활동
- 1910년 정우회 등의 한일병합 추진활동 지원
- 1910년 병합조약의 사전 협의에 참여
- 1910년 병합조약을 결정한 내각회의와 어전회의에 참여
- 일본의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10만 원 수령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식민통치에 협력
- 일본의 식민통치를 찬양하는 언론활동
- 일본의 전쟁 관련 행사와 친일 사회단체에 참여
- 대정친목회 회장으로 내선융화 운동 전개
이러한 행적은 조중응이 1907년과 1910년의 국권 침탈 사건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도 장기간 일본의 지배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법부대신으로서의 책임
조중응의 행적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은 법부대신 재임 중 항일 의병과 정치적 저항세력의 처벌에 관여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법률과 사법제도는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의 주권을 보호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중응은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과 친일 대신 처단 운동 관련자들에게 형벌을 부과하는 과정에 관여했다.
특히 그가 법부대신으로서 관련 사건을 황제에게 상주한 기록은 《고종실록》에 남아 있다.
따라서 이는 단순히 후대의 비판이나 소문만으로 형성된 평가가 아니다.
구체적인 관직과 공적인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행적이다.
법을 담당하는 대신이 일본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처벌에 관여했고, 얼마 뒤에는 자신도 일본에 국가의 내정권을 넘기는 데 협력했다.
이것이 그의 정치적 책임을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이다.
한일병합의 사전 협의자
조중응은 한일병합조약의 사전 협의에 직접 참여한 인물이다.
1910년 8월 16일 데라우치가 이완용과 조중응을 불러 병합조약 초안을 보여주었다는 기록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에서 확인된다.
이는 조중응이 병합조약 체결 과정의 핵심적인 협의 상대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그는 병합조약안에 찬성한 뒤 내각회의와 어전회의에도 참여했다.
따라서 조중응의 행적은 단순히 일본의 압력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조약에 동의한 관료의 행동으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일본이 병합조약을 구체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 직접 협력했다.
일본이 병합조약 초안을 미리 보여줄 만큼 신뢰했던 대한제국 대신이 조중응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정치적 위치를 설명한다.
정미칠적과 경술국적
조중응은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되는 인물이다.
이 두 명칭은 서로 다른 사건을 기준으로 한다.
정미칠적은 1907년 정미7조약에 협력한 일곱 대신을 가리킨다.
경술국적은 1910년 한일병합 과정에 협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을 가리킨다.
조중응은 두 사건 모두에서 중요한 정부 직책을 맡고 일본의 정책에 협력했다.
특히 1907년에는 법부대신, 1910년에는 농상공부대신이었다.
나라의 내정권을 넘길 때에도 참여했고, 나라 전체를 넘길 때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친일 행적은 대한제국이 단계적으로 국권을 상실하는 과정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근대화 활동과 친일 행적
조중응은 초기에는 근대적인 외교와 행정, 법률 및 교육제도에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북방 지역을 답사하고 일본에서 정치와 법률, 농업기술을 배웠으며, 귀국한 이후에는 교육과 출판사업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 가운데 일부는 근대적인 지식과 기술의 도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적이 이후의 친일반민족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조중응은 일본의 국권 침탈이 진행되던 시기에 통감부 촉탁과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등을 맡으며 일본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또한 일본으로부터 작위와 경제적 보상을 받은 이후에도 식민통치 찬양을 계속했다.
따라서 그의 생애를 평가할 때에는 초기의 근대화 관련 활동과 이후의 국권 침탈 협력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농업기술을 배웠다고 나라를 넘기는 데 협력한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어린이 잡지를 만들었다고 의병 탄압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식민통치의 경제적 수혜자
조중응은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10만 원을 받았다.
또한 중추원 고문으로서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도 여러 경제단체와 기업활동에 참여하며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이 국권 침탈에 협력한 지배층을 경제적으로 포섭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광복 이후 조중응의 재산 일부에 대한 국가귀속 결정이 내려지고, 후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패소 판결이 나왔다는 사실은 그의 친일 행적과 경제적 혜택 문제가 오랜 기간에 걸쳐 법적·사회적 쟁점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주요 행적 정리
| 연도 | 주요 행적 |
|---|---|
| 1860년 | 한성부에서 출생 |
| 1878년 | 성균관 중학동재 재임으로 선발 |
| 1880년 | 전강에 참여하고 초시에 합격 |
| 1883년 | 서북변계 조사위원 임명 |
| 1883~1885년 | 만주와 러시아, 외몽골 등지 답사 |
| 1885년 | 북방남개론 주장, 탄핵으로 유배 |
| 1890년 | 특별 사면, 조중협에서 조중응으로 개명 |
| 1894년 | 갑오개혁 관련 관직에 참여, 의화군 이강 수행 |
| 1895년 | 외무아문 참의와 법부 형사국장 등 역임 |
| 1896년 | 아관파천 이후 일본으로 망명 |
| 1896~1906년 | 일본에서 조선어 교사와 농업·법률 관련 활동 |
| 1906년 | 사면 후 귀국, 통감부 촉탁 임명 |
| 1906년 | 《소년한반도》 창간에 참여 |
| 1907년 | 대동학회 창립에 참여 |
| 1907년 5월 | 이완용 내각의 법부대신 임명 |
| 1907년 | 의병장과 을사오적 처단 운동 관련자들의 처벌에 관여 |
| 1907년 7월 |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 |
| 1907년 | 정미칠적의 한 명으로 지목 |
| 1907년 | 일본 황태자 환영을 위한 신사회에 참여 |
| 1907~1908년 | 동아개진교육회 회장 |
| 1908년 | 농상공부대신 임명 |
| 1909년 | 국시유세단 활동 지원 |
| 1909년 | 이토 히로부미 조문사절로 파견, 추도행사 관련 활동 |
| 1910년 3월 | 정우회의 병합 관련 활동 지원 |
| 1910년 8월 16일 | 이완용과 함께 데라우치를 만나 병합조약 초안 협의 |
| 1910년 8월 18일 | 병합조약안의 내각회의 처리에 참여 |
| 1910년 8월 22일 | 병합조약을 결정한 어전회의에 참여 |
| 1910년 10월 | 일본의 자작 작위 수령,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임명 |
| 1910년 11월 | 조선귀족 일본관광단을 이끌고 일본 방문 |
| 1911년 | 은사공채 10만 원 수령 |
| 1911년 8월 | 《매일신보》에 「병합 일주년 감상」 발표 |
| 1914년 | 일본군 칭다오 점령을 축하하는 전첩축하회 회장 |
| 1915년 |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활동 |
| 1916년 | 대정친목회 회장 취임 |
| 1917년 | 순종 일본 방문 수행, 내선융화 관련 글 발표 |
| 1918년 | 이은과 이방자의 혼인을 내선융화의 모범으로 찬양 |
| 1919년 | 고종의 국장 관련 업무 참여 |
| 1919년 8월 | 사망 |
| 2007년 | 조중응 관련 토지 국가귀속 결정 |
| 2008년 | 후손들의 재산귀속 취소소송 원고패소 |
여담
- 정식 을사오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대신 1907년 정미칠적과 1910년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되는 인물이다.
- 본래 이름은 조중협(趙重協)이었으며, 1890년 조중응으로 개명했다.
- 본관은 양주 조씨이며, 호는 낭전(琅田)이다.
- 어린 시절 성균관에서 유교 경전을 공부했으며, 1880년 초시에 합격했다.
- 1883년부터 약 1년 6개월 동안 러시아와 만주, 외몽골 등을 답사했다.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드문 장거리 국제정세 조사 경험이었다.
- 북쪽의 러시아를 경계하고 남쪽의 일본과 교류해야 한다는 북방남개론을 주장하다가 보성으로 유배되었다.
-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약 10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했다.
- 일본에서는 조선어 교사로 활동하면서 농업과 정치, 법률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 1906년 귀국한 뒤 일본 통감부의 촉탁으로 임명되었다.
- 이인직, 이해조 등과 함께 《소년한반도》 창간에 참여했다.
- 1907년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설립된 대동학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 법부대신 시절 항일 의병장 민종식과 관련된 재판 및 처벌에 관여했다.
- 당시 민종식의 공술에는 일본의 국권 침탈을 비판하고 의병활동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 나철 등이 추진한 을사오적 처단 운동 관련자들의 처벌에도 관여했다.
-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던 사람들의 형벌을 상주한 법부대신이 이후 정미칠적이 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아이러니한 인물이다.
-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에 협력했다.
- 같은 해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했으며, 이 때문에 정미칠적의 한 명으로 분류된다.
- 정미7조약에 직접 서명한 대표는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였다. 조중응은 법부대신으로서 조약 체결에 협력한 인물이다.
- 고종 퇴위 이후 대한제국에서 태극장과 승진을 받았으며, 일본에서도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 일본 황태자의 대한제국 방문을 환영하는 행사에도 참여했다.
- 1908년에는 농상공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조문사절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실제 국장 참석 여부는 관련 자료 사이에 서술 차이가 있다.
- 장충단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에도 관여했다.
- 일본의 보호통치를 선전하던 국시유세단에 2,000원의 보조금을 주선했다.
- 1910년에는 이완용과 함께 한일병합을 추진하던 정우회의 경비를 지원했다.
- 1910년 8월 16일에는 이완용과 함께 데라우치의 관저에 불려 가 병합조약 초안을 사전에 검토했다.
- 8월 22일 병합조약을 결정한 마지막 어전회의에도 참여했다.
- 한일병합조약에 직접 서명한 대표는 이완용과 데라우치였다. 조중응은 사전 협의와 내각 및 어전회의에 참여한 주요 인물이다.
- 1910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 1911년에는 은사공채 10만 원을 받았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 1911년에는 한일병합 1주년을 기념하는 글을 《매일신보》에 발표했다. 나라가 망한 날짜를 기념하면서 감상문까지 쓴 것이다.
- 1914년 일본군이 칭다오를 점령하자 이를 축하하는 전첩축하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 일본의 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 운영에도 협력했다.
- 1916년에는 내선융화를 주장하는 대정친목회의 회장이 되었으며, 사망할 때까지 회장직을 유지했다.
- 1917년 순종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수행원으로 참여했다.
- 1918년에는 이은과 이방자의 혼인을 내선융화의 모범으로 찬양하는 글을 발표했다.
- 1919년 고종의 국장과 관련된 업무에도 참여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에 협력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대조적인 행적이다.
- 사망일은 자료에 차이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1919년 7월 25일로 기재되어 있지만, 당대의 신문자료와 여러 전기에서는 1919년 8월 25일로 기록한다.
- 사망 이후 장남 조대호가 일본의 자작 작위를 승계했다.
- 조대호가 사망한 뒤에는 조원흥이 작위를 이어받았다.
- 2007년 조중응과 관련된 친일재산이 국가귀속 대상에 포함되었다.
- 2008년에는 후손들이 경기도 남양주의 토지 약 6,500㎡에 대한 국가귀속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 초기에는 서북변계 조사와 외교, 법률 및 교육 분야에서 활동했던 관료였으나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했다.
- 법부대신일 때에는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과 친일 대신 처단 운동 관련자들의 처벌에 관여했고, 농상공부대신이 된 뒤에는 한일병합조약의 사전 협의에 직접 참여했다. 국권이 사라진 뒤에는 일본의 귀족 작위와 10만 원의 은사공채, 총독부 고문 수당을 받았다.
관련 문서
- 을사오적
- 정미칠적
- 경술국적
- 정미7조약
- 한일신협약
- 을사늑약
- 한일병합조약
- 경술국치
- 고종 강제 퇴위
- 헤이그 특사 사건
- 대한제국 군대 해산
- 정미의병
- 홍주의병
- 민종식
- 나철
- 박승환
- 이완용
- 임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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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라우치 마사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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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정친목회
- 조선물산공진회
- 조선구관연구회
- 제1차 세계대전
- 칭다오
- 매일신보
- 친일파
- 친일반민족행위자
- 친일재산 환수
외부 링크 및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중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일병합조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등박문추도회
- 민족문제연구소 -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내정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겨준 정미칠적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일제의 한국병합
- 조선왕조실록 - 1907년 7월 3일 조중응의 민종식 관련 보고
- 조선왕조실록 - 1907년 7월 6일 조중응의 나인영 등 관련 보고
- 조선왕조실록 - 1909년 11월 4일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 조선왕조실록 - 1910년 8월 26일 조중응 등에게 훈장 수여
-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 1919년 8월 26일 조중응 사망 보도
- 위키미디어 공용 - 조중응 사진
- 주간경향 - 조선백성의 탈을 쓴 황국의 신민들
- 매일신문 - 역사 속의 인물: 조중응
- 서울신문 - 친일파 재산 첫 환수
- 서울신문 - 친일파 후손 재산 환수소송 패소
- 연합뉴스 - 친일파 후손 재산소송 패소 판결
-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7,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조중응 결정이유서, 163~1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