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곤 Yi Jae-gon | |
| 국적 | 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조선 |
|---|---|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양주 |
| 본관 | 전주 이씨 |
| 직업 | 문신, 관료, 정치인, 친일파 |
| 관련 사건 | 헤이그 특사 사건, 정미7조약, 대한제국 군대 해산, 경술국치 |
개요
이재곤(李載崑, 1859년 3월 6일 ~ 1943년 7월 11일)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이자 고위 관료였으며,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동원(東園)이다. 조선 왕실과 가까운 종친으로, 진주부와 공주부의 관찰사, 경상북도 관찰사, 학부대신 등을 역임했다.
특히 1907년 이완용 내각의 학부대신으로 임명되어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며, 이 때문에 정미칠적 가운데 한 명으로 분류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5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했다.
왕실 종친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황제의 측근으로 출세해 놓고, 정작 황제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쫓겨날 때에는 앞장서서 퇴위를 압박한 매국노 새끼다.
이재곤이 특히 악명 높은 이유는 단순히 친일 내각에 참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왕실의 친척으로서 고종의 신임을 얻고 여러 관직에 진출한 인물이었다. 특히 1897년 고종의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의 선포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불과 10년 뒤인 1907년에는 일본에 협력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는 데 참여했다.
황제로 즉위할 때에는 옆에서 황제 만세를 외치고, 일본이 쫓아내려고 하니까 이번에는 퇴위에 찬성한 것이다.
이러한 행적은 당시 일본 측에서 작성한 비밀문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조선귀족약력》은 이재곤이 고종의 황제 즉위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인물이라는 점을 언급하면서, 이후 이완용과 함께 고종의 퇴위를 압박한 변화를 두고 세상 사람들이 놀랐다고 서술했다.
일본이 보기에도 변절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이재곤은 정식 을사오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을사오적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다섯 대신을 가리킨다.
반면 이재곤은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정미칠적의 한 명이다.
또한 1919년 3·1 운동 당시 일본 귀족 작위를 반납하겠다고 신청한 특이한 행적이 있다. 그러나 일본 당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재곤은 이후에도 일본의 전쟁 관련 행사와 친일 유림단체에서 활동했다.
따라서 작위 반납을 신청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친일 행적을 청산하고 독립운동가로 전향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반납하겠다고 말한 적은 있지만, 이후 행동까지 보면 일본 제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생애
출생과 가문
1859년 3월 6일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이씨이며, 호는 동원(東園)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술초(李述初), 할아버지는 이도본(李道本), 아버지는 이신응(李愼應)이다.
이재곤은 조선 왕실과 가까운 집안 출신이었다.
특히 친형은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이자 훗날 일본의 후작 작위를 받은 이재완이었다.
이재완은 고종의 사촌으로서 왕실 내부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가문적 배경으로 이재곤 역시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의 왕실 종친들은 일반 관료보다 황제에게 접근하기 쉬웠으며, 궁중의 행정과 의례 및 인사에 관여할 기회를 얻기도 했다.
이재곤 역시 왕실 관련 업무를 여러 차례 담당했으며, 이러한 경력은 훗날 고종의 신임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문제는 왕실과의 친분을 국가를 지키는 데 사용한 것이 아니라, 결국 그 왕실의 황제를 쫓아내는 데 사용했다는 점이다.
형 이재완
이재곤의 형 이재완은 대한제국의 정치인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1907년 이후에도 황실 관련 업무와 정치활동에 관여했으며, 1910년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다.
후작은 일본의 귀족 작위 가운데 상당히 높은 등급이었다.
반면 이재곤은 자작 작위를 받았다.
형제가 모두 일본으로부터 귀족 작위를 수여받은 것이다.
이재곤과 이재완은 서로 다른 관직과 활동을 거쳤지만, 대한제국의 국권이 상실된 이후 일본의 귀족제도에 편입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선 왕실의 후손으로 태어난 형제가 나란히 일본 귀족이 된 것이다.
다만 형제가 함께 작위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두 사람의 모든 친일 행적이나 정치적 책임이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재곤의 책임은 그가 직접 참여한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 이후의 식민통치 협력 등을 중심으로 평가해야 한다.
1880년 문과 급제
1880년 이재곤은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당시 나이는 21세였다.
문과는 조선의 고위 문관으로 진출하기 위한 대표적인 국가시험이었다.
이재곤은 과거에 급제한 뒤 승정원 가주서로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승정원은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왕실의 문서를 관리하는 중요한 기관이었다.
가주서는 승정원에서 문서 작성과 기록 등에 관여하는 직책이었다.
이재곤은 이러한 업무를 통해 궁중의 행정 절차와 국왕의 명령체계를 경험했다.
1882년에는 홍문관 교리로 임명되었다.
홍문관은 국왕의 학문과 정책 자문, 문서 편찬 등을 담당하던 기관이었다.
이러한 관직을 거치면서 이재곤은 유교 경전과 행정제도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정치적 경력을 쌓았다.
지방관 생활
1886년 이재곤은 거창부사로 임명되었다.
지방관은 해당 지역의 행정과 재정, 치안 및 백성들의 생활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다.
1895년에는 중추원 의관으로 활동하면서 진주부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공주부 관찰사가 되었다.
당시 조선은 갑오개혁 과정에서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고 있었다.
기존의 8도 체제와 지방관제에 변화가 발생했으며, 여러 지역에서 새로운 행정조직이 설치되었다.
이재곤은 이러한 개혁 과정에서 지방행정을 담당한 관료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후에도 경상북도 관찰사 등의 지방관을 역임했다.
이처럼 이재곤은 왕실 관련 직책뿐 아니라 지방행정과 중앙정부의 여러 주요 관직을 거치면서 정치적인 경험을 쌓았다.
《선원보략》 수정
1890년 이재곤은 조선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수정하는 사업에 참여했다.
《선원보략》은 조선 왕실의 계보와 왕족들의 혈연관계를 정리한 기록이다.
왕실의 혈통과 종친들의 지위를 확인하는 자료였으므로, 편찬과 수정 작업은 정치적·의례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이재곤은 찬수감인 종부정으로서 수정 작업을 감독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관품이 승진했다.
1891년에는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이재곤은 이처럼 궁중 문서와 왕실 족보, 왕실의 의례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면서 고종과 왕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궁내부와 중앙정부의 고위 관료
1896년 이재곤은 비서원승으로 임명되었다.
1898년에는 종정원경을 맡아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의 장례를 총괄했다.
당시 왕실의 장례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의례였으므로, 이를 담당하는 관료는 황실의 신임을 필요로 했다.
이재곤은 이후에도 태복사장과 내부협판, 의정부 찬정, 회계원경, 홍문관 학사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또한 평식원 총재와 궁내부 특진관, 내장사장, 중추원 찬의 및 제실회계 심사국장 등을 지냈다.
이러한 경력은 그가 대한제국의 황실과 행정, 재정 및 인사 관련 업무에 폭넓게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궁내부와 관련된 관직을 여러 차례 맡았다는 점에서 황실 내부의 정치적 상황에도 상당히 익숙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한제국 선포와 고종의 신임
황제 즉위에 협력하다
1897년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고 황제로 즉위했다.
이는 조선이 외국의 속국이 아닌 자주독립국가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고종은 청나라와의 전통적인 종속적 외교관계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에서 다른 국가의 군주들과 동등한 황제의 지위를 확보하려 했다.
이재곤은 이러한 황제 즉위와 국호 변경을 지지했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일본 측 비밀문서인 《조선귀족약력》에는 이재곤이 고종에게 황제의 존호를 올리고 대한제국의 국호와 연호를 정하는 데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한 이러한 활동으로 고종의 환심을 얻었으며, 이후 여러 주요 관직을 계속 맡을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는 일본이 이재곤의 정치적 행적을 평가하기 위해 작성한 자료이므로, 모든 내용이 객관적인 사실로 확정되었다고 단정하기보다는 당시 일본 측의 평가로 구분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이재곤이 대한제국 선포 전후로 황실의 주요 관료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고종의 측근으로 출세
이재곤은 왕실의 친척이라는 지위와 관료로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고종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특히 황실의 의례와 왕실 족보, 재정 및 행정 관련 관직을 여러 차례 맡았다.
이러한 업무는 황실의 신임이 없으면 수행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는 대한제국의 황제권을 강화하고 황실의 권위를 높이는 정책을 지지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1907년 일본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려 하자 이재곤은 이전과 다른 행동을 보였다.
그는 이완용 내각의 학부대신으로서 고종의 퇴위에 협력했다.
왕실의 권위를 높인다며 출세한 인간이 정작 그 왕실의 황제가 일본에 의해 쫓겨날 때에는 앞장서서 협력했다.
이러한 행적은 당시에도 변절로 인식되었다.
학부대신 취임
이완용 내각에 들어가다
1907년 5월 이재곤은 이완용 내각의 학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학부대신은 오늘날의 교육부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의 교육제도는 일본 통감부의 간섭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을 뿐 아니라 교육과 재정, 경찰 및 행정제도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일본은 교육제도를 통해 조선인들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순응하도록 만들려 했다.
이를 위해 일본어 교육과 일본인 교원의 배치, 교과서 편찬 및 학교 운영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재곤은 교육행정을 책임지는 학부대신에 임명되었다.
나라의 미래를 책임지는 교육부장관이라는 새끼가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하는 내각의 일원이 된 것이다.
물론 당시 모든 교육정책을 이재곤이 개인적으로 직접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통감부가 대한제국의 교육행정을 장악하려는 시기에 학부대신이라는 핵심적인 직책을 맡고 있었다.
학부대신의 책임
학부대신은 학교제도와 교육과정, 교원 임명 및 교육기관의 운영 등에 관한 주요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전국에서는 근대적인 교육기관이 증가하고 있었으며, 여러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학교를 설립해 국민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교육운동을 경계했다.
특히 사립학교들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국권회복운동의 기반이 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일본은 보통학교령과 외국어학교령, 교과서 관련 규칙 등을 통해 교육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재곤이 학부대신으로 활동한 시기는 이러한 교육 침탈이 확대되던 때였다.
국가의 교육정책을 책임지는 관료라면 외국의 간섭으로부터 교육의 자주성을 보호해야 했지만, 이재곤은 일본에 협력하는 내각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일본인 관리 임명에 대한 통감부의 개입
1907년 8월 2일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학부대신 이재곤에게 공식 문서를 보냈다.
이 문서는 오늘날 국가기록원에 보존되어 있다.
문서에는 한일신협약 제5조에 따라 일본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대한제국의 관리로 임명할 경우, 미리 통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특히 관리의 직명과 관등, 봉급 등을 정해진 양식으로 작성하여 일본 통감의 승인을 받도록 요구했다.
이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고위 인사뿐 아니라 실제 행정조직의 인사권까지 장악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이재곤은 이러한 명령을 전달받는 학부대신이었다.
대한제국 교육부장관이 자기 나라 관리 한 명 임명하려고 해도 일본 통감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꼴이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한제국이 정미7조약 이후 행정적 자주권을 얼마나 심각하게 상실했는지 보여준다.
다만 이 문서만으로 이재곤이 특정 일본인 관리를 직접 임명했거나 모든 인사에 개인적으로 동의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확인되는 사실은 일본 통감부가 이재곤에게 교육 관련 인사권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 지침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고종 강제 퇴위
헤이그 특사 사건
1907년 고종은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특사를 파견했다.
이들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회복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은 고종이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문제 삼았다.
특히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를 명분으로 고종의 퇴위를 추진했다.
일본은 이미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했지만, 고종이 국제사회에 일본의 침략을 알리려 하자 황제의 지위를 유지시키는 것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일본은 친일 내각을 이용해 고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하려 했다.
이완용과 함께 퇴위를 압박하다
1907년 7월 이완용 내각은 고종에게 퇴위를 요구했다.
이재곤 역시 학부대신으로서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재곤이 이완용 등과 함께 고종의 폐위를 모의하고 황제 양위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기록한다.
당시 일본은 고종을 퇴위시키고 황태자 순종을 즉위시켜 대한제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했다.
결국 고종은 일본과 친일 내각의 압력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고종의 황제 즉위를 지지했던 왕실 종친이, 이제는 일본과 함께 고종을 쫓아내는 데 협력한 것이다.
그것도 고종에게 여러 관직을 받고 정치적 지위를 확보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행적은 단순한 친일적인 정치적 선택을 넘어 황실과의 관계를 이용한 변절로 평가받는다.
1907년 7월 19일
1907년 7월 19일 고종은 강제로 퇴위했으며, 이후 순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순종은 일본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으며, 정치적인 권한을 자유롭게 행사하기 어려웠다.
고종의 퇴위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특히 일본은 새로운 황제와 친일 내각을 이용해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려 했다.
이재곤은 이러한 정치적 변화의 중심에 있던 친일 관료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일본 측 비밀문서의 평가
《조선귀족약력》
이재곤의 행적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자료 가운데 하나는 일본 측에서 작성한 비밀문서인 《조선귀족약력》이다.
이 문서는 일본이 조선귀족으로 편입시킨 인물들의 경력과 성향, 정치적 행적 등을 정리한 자료이다.
특히 이재곤에 대해서는 유교적 학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또한 그가 왕실과 가까운 관계를 이용해 고종의 신임을 얻고 요직을 계속 차지했다고 서술했다.
일본 측은 이재곤의 학문과 언변을 인정하면서도 정치적인 술책에 능해 안심하기 어려운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일본인들이 보기에도 마냥 믿을 만한 인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본도 놀란 변절
《조선귀족약력》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1897년과 1907년 이재곤의 행동을 비교한 대목이다.
이 문서는 이재곤이 1897년 고종에게 황제의 칭호를 올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는 데 노력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1907년에는 이완용과 함께 고종의 퇴위를 압박했다고 기록했다.
특히 이러한 변화를 두고 세상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는 취지로 서술했다.
이는 이재곤의 행동이 당대에도 상당히 극적인 정치적 변절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10년 전에는 황제로 만들자고 앞장섰던 놈이, 10년 뒤에는 황제 자리에서 쫓아내는 데 앞장섰으니 놀랄 만도 하다.
다만 이 문서는 일본 측에서 작성한 인물평가 자료이므로, 개인의 성격과 동기에 관한 평가를 무조건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이재곤이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에 협력했다는 사실은 다른 역사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정미칠적
정미7조약 체결
1907년 7월 24일 일본은 대한제국에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했다.
정미7조약은 한일신협약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의 주요 행정처분과 법령 제정, 고위 관료의 임명 등에 일본 통감의 승인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일본인 관리를 대한제국 정부의 차관급 관직에 임명해 주요 행정기관을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즉,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던 일본이 이번에는 내정권까지 실질적으로 장악한 것이다.
이재곤은 당시 학부대신으로서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했다.
그는 이완용 내각의 일곱 친일 대신 가운데 한 명으로 분류되며, 이들을 정미칠적이라고 부른다.
정미칠적 7명
| 인물 | 당시 관직 |
|---|---|
| 이완용 | 내각총리대신 |
| 임선준 | 내부대신 |
| 고영희 | 탁지부대신 |
| 이병무 | 군부대신 |
| 이재곤 | 학부대신 |
| 송병준 | 농상공부대신 |
| 조중응 | 법부대신 |
정미칠적은 1907년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일본에 넘기는 과정에서 협력한 대표적인 친일 대신들이다.
다만 정미7조약의 공식적인 서명자는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였다.
따라서 이재곤을 두 나라를 대표해 조약문에 직접 서명한 인물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의 책임은 학부대신으로서 일본의 요구에 동조하고 조약 체결에 협력했다는 점에 있다.
을사오적이 외교권을 넘기는 데 협력했다면, 정미칠적은 남아 있던 내정권까지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한 놈들이다.
이재곤은 그 가운데 국가의 교육을 담당하는 학부대신이었다.
교육부장관도 매국에 동참
이재곤이 정미칠적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교육행정의 관점에서도 중요하다.
국가의 교육제도는 장기적으로 국민의 언어와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든 이후에는 교육제도를 통제해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약화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을 책임지는 학부대신이 일본의 내정권 침탈에 협력했다.
결과적으로 대한제국의 교육행정 역시 일본 통감부의 통제를 더욱 강하게 받게 되었다.
미래 세대를 교육해야 할 사람이 그 미래 세대가 살아갈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한 것이다.
물론 일본의 교육 침탈은 이재곤 한 사람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일본의 통감부와 군사력, 친일 내각 전체의 협력을 통해 진행된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재곤이 그 내각의 주요 대신으로서 정미7조약 체결에 적극 협력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일본의 군대 해산
1907년 정미7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당시 대한제국에는 수도를 지키는 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 등이 존재했다.
일본은 이러한 군대가 남아 있을 경우 식민지화 정책에 대한 무력저항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일본군이 군사적인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도록 했다.
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 명령이 시행되었다.
당시 군부대신 이병무는 대한제국의 장교들을 일본군 사령관의 관저에 소집하고 군대 해산 명령을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자결했으며, 이에 분노한 군인들이 일본군에 저항하면서 남대문 전투가 발생했다.
이재곤의 책임
이재곤은 당시 학부대신이었으므로 군대 해산 명령을 직접 전달한 군부대신은 아니었다.
그 역할은 이병무가 담당했다.
그러나 이재곤은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을 가능하게 한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내각의 일원이었다.
또한 일본 정부가 1907년 10월 이재곤에게 수여한 훈장은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 군대 해산 등에 대한 협력의 공로를 인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재곤 역시 군사적 자주권의 침탈에 협력한 정치적 책임이 있다.
이병무가 직접 군대를 해산시키는 명령을 내렸다면, 이재곤은 그 명령이 가능해지도록 일본의 내정권 침탈에 협력한 놈이었다.
다만 이재곤이 남대문 전투에서 직접 일본군을 지휘하거나 대한제국 군인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다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한 행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책임은 구분하여 평가해야 한다.
일본과 대한제국의 훈장
훈1등 욱일대수장
1907년 10월 18일 이재곤은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욱일대수장은 일본 정부가 수여하던 고위 훈장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은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 군대 해산 과정에서 협력한 대한제국 대신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이재곤 역시 이러한 포상의 대상이 되었다.
대한제국에서는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데 협력한 매국 관료였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훈장을 줄 만큼 일을 잘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포상은 일본이 친일 관료들의 협력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보여준다.
대한제국의 훈장까지 받다
더 기가 막히는 점은 이재곤이 일본뿐 아니라 대한제국 정부에서도 여러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1907년 9월 7일에는 훈1등 팔괘장을 받았다.
10월 25일에는 태극대수장을 받았으며, 12월 27일에는 특별히 종1품으로 승진했다.
이러한 포상은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 이후에 이루어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러한 포상에 대해 정미칠적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보상을 스스로 마련한 성격이 있다고 평가한다.
일본에 나라의 권한을 넘기는 데 협력한 뒤 일본에서 훈장을 받고, 정작 대한제국에서도 훈장과 승진까지 챙긴 것이다.
일반적인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주권이 침탈되고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이었지만, 친일 내각의 주요 대신들은 오히려 정치적 지위와 명예를 확보했다.
이러한 점은 당시 국권 침탈이 단순히 일본의 군사적 강압만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일부 대한제국 관료들의 협력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일본 황태자 환영운동
신사회
1907년 이재곤은 일본 황태자의 대한제국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조직된 신사회에 참여했다.
신사회는 전·현직 대신과 관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였다.
이재곤은 발기위원으로 참여했다.
당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장악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황태자의 방문은 단순한 외교적 친선행사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황태자의 방문을 통해 대한제국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하려 했다.
이재곤은 이러한 행사에 협력했다.
자기 나라 황제는 쫓아내는 데 협력해 놓고, 일본 황태자가 오자 환영행사를 준비하는 데 참여한 것이다.
그야말로 누구의 권력을 지지하고 있었는지 알기 쉬운 행동이다.
대동학회 활동
이재곤은 대동학회의 특별총회에도 참여했다.
대동학회는 일제 통감부의 후원을 받으면서 유교계 인물들을 포섭하려 했던 단체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유림들이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와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유림들을 친일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면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에 대한 저항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동학회는 이러한 정치적 환경에서 활동했다.
이재곤은 특별총회에 참석해 강연을 하고 조직의 활동을 지원했다.
그는 유교 경전에 익숙하고 학문과 언변에 능한 인물로 평가받았으므로, 유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활용될 수 있었다.
나라와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던 유교적 지식을 가지고, 정작 나라를 빼앗는 일본의 정책에 협력하는 단체를 도운 것이다.
유교의 충성이라는 개념을 생각하면 상당히 모순적인 행적이다.
다만 대동학회의 회원들이 모두 동일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재곤의 친일 행적은 그가 해당 조직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와 이후의 구체적인 활동을 통해 평가해야 한다.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한자통일회
1908년 6월 이재곤은 박제순 등과 함께 한자통일회를 발기했다.
한자통일회는 한국과 일본의 한자 사용을 통일하는 문제 등을 다루기 위해 조직된 단체였다.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한자를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문화적 전통이 존재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과 일본의 언어와 문화가 동일한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주장을 식민지 지배의 정당화에 이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한자의 사용을 통일한다는 활동 역시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분리해 이해하기 어렵다.
이재곤은 이러한 단체의 활동에 참여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자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초대 통감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내정권 침탈, 고종의 강제 퇴위 등에 핵심적으로 관여한 인물이었다.
이재곤은 한자통일회 지회장으로서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는 모임을 발기하고 개최했다.
즉, 자신이 속한 친일적인 단체를 통해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행사에 참여한 것이다.
대한제국의 황제를 쫓아내고 나라의 주권을 빼앗는 데 앞장선 일본 정치인이 죽자,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열었다.
자신이 어떠한 정치적 입장에 서 있었는지 상당히 분명하게 보여주는 행동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위는 단순한 개인적 애도뿐 아니라 일본의 정치적 입장에 동조하는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한일병합 관련 활동
일진회의 병합청원
1909년 일진회는 대한제국을 일본에 병합해야 한다는 청원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일진회는 송병준과 이용구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친일단체였다.
이들은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을 지지하면서 대한제국이 일본과 하나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진회의 병합청원은 일본의 정치적 목적과 연결된 활동이었다.
당시 일본은 한국 내부에서도 병합을 원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선전하려 했다.
그런데 일진회의 병합청원에 반대하는 친일 관료들도 있었다.
바로 이완용을 비롯한 일부 고위 관료들이었다.
이재곤 역시 이러한 움직임에 참여했다.
병합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1909년 12월 이재곤은 일진회의 병합청원에 반대하는 정치적 움직임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는 반드시 한일병합 자체를 저지하려는 입장과 일치하지 않았다.
당시 이완용 등 친일 관료들은 일진회가 병합청원운동의 주도권을 차지하는 것을 경계했다.
일진회가 일본의 병합정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으면 기존의 친일 관료들이 정치적으로 밀려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별도의 정치적 움직임을 통해 병합 문제에 관한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다.
이재곤은 이완용이 주도한 국민연설회에 참석하여 동조했다.
일진회가 나라를 병합해 달라고 하자 반대했는데, 그 이유가 나라를 지키려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친일 관료들 사이에서도 누가 일본의 병합정책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인지를 놓고 경쟁이 벌어졌다.
다만 이재곤이 이 자리에서 어떠한 발언을 했는지까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부분은 별도로 구분해야 한다.
확인되는 사실은 그가 이완용 계열의 정치적 움직임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경술국치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었다.
이로써 1897년 선포된 대한제국은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일본은 군사적·정치적 강압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내정권, 군사권을 단계적으로 장악한 끝에 국가 전체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재곤은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했던 인물이었으며, 이후에도 일본의 정책에 동조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재곤이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직접 서명한 인물이라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조약에 공식적으로 서명한 사람은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따라서 이재곤의 역사적 책임은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행적, 이후 일본의 병합정책에 동조한 활동 등을 중심으로 평가해야 한다.
1907년에 나라의 내정권을 넘기는 데 협력한 뒤, 1910년 나라가 완전히 사라지자 일본의 귀족 작위를 받은 것이다.
국가의 주권은 없어졌지만 이재곤 개인의 정치적·경제적 지위는 오히려 일본의 식민통치 체제 속에서 유지되었다.
일본의 귀족 작위
자작 작위 수령
1910년 10월 7일 이재곤은 일본 정부가 발표한 조선귀족 작위 수여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그에게 수여된 작위는 자작(子爵)이었다.
자작은 일본의 화족제도에서 사용하던 귀족 작위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기존 지배층을 식민통치 체제에 포섭하기 위해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이재곤 역시 일본의 귀족제도에 편입되었다.
고종의 황제 즉위를 지지하던 왕실 종친이 고종을 쫓아내는 데 협력하고, 결국 일본 제국의 자작이 된 것이다.
대한제국의 황실과 가깝다는 이유로 정치적 지위를 얻었던 사람이 이제는 일본의 귀족으로서 새로운 사회적 지위를 확보했다.
은사공채 5만 원
1911년 1월 13일 이재곤은 일본 정부로부터 5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은사공채는 일본이 조선귀족들에게 지급한 국채 형태의 경제적 보상이었다.
당시 5만 원은 일반적인 노동자나 농민이 쉽게 확보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특히 은사공채는 정기적인 이자 수익이 발생하는 금융자산이었다.
이재곤은 이러한 경제적 보상과 함께 일본의 귀족 작위를 유지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본인의 자산과 신분은 오히려 좋아지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다만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얼마에 해당하는지를 단순한 환율이나 물가상승률로 정확하게 환산하기는 어렵다.
일부 자료에서는 현재 가치로 수억 원에서 십억 원 수준이라고 설명하지만, 계산 기준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로 확정할 수 있는 금액은 당시 지급된 은사공채 5만 원이다.
조선귀족 작위의 의미
일본이 수여한 조선귀족 작위는 단순한 명예칭호가 아니었다.
작위를 받은 사람들은 일본의 귀족질서에 편입되었으며, 경제적인 보상과 사회적 예우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일본은 이들이 식민통치에 협력하는 역할을 계속 수행하기를 기대했다.
이재곤은 이러한 정책의 수혜자가 되었다.
특히 그는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뒤 작위를 받은 인물이었으므로, 일본의 포상과 그의 정치적 행적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식민통치 자문기관에 들어가다
1910년 10월 1일 이재곤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자문기관이었다.
중추원에는 대한제국의 전직 고위 관료와 조선귀족, 친일적인 유력 인물들이 다수 참여했다.
일본은 이들을 이용해 식민통치에 대한 협력을 확보하고 조선인 사회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다.
이재곤 역시 이러한 기관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10년 10월 1일부터 1920년 5월 10일까지 약 10년 동안 중추원 고문직을 유지했다.
대한제국에서는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했고, 나라가 망하자 이번에는 일본 총독부의 고문으로 일한 것이다.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였던 사람이 식민통치 체제에서도 새로운 직책을 확보한 셈이다.
고문직과 실제 권한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형식적으로는 총독에게 여러 정책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는 자문기관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의 중요한 정책을 독립적으로 결정하거나 총독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는 기관은 아니었다.
일본 총독은 식민지 조선의 행정과 입법, 사법 및 군사에 관한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중추원 고문이라는 직책은 국가의 독립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자리라기보다 식민통치에 협력한 유력 인물들에게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는 성격이 강했다.
이재곤은 이러한 직책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 지배체제와 관계를 유지했다.
한일병합 1주년 축사
1911년 8월 29일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당시 일본은 병합 1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를 개최했다.
또한 《매일신보》를 비롯한 친일적인 언론매체를 통해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선전했다.
이재곤은 《매일신보》의 병합 1주년 특집에 축사를 게재했다.
그가 발표한 글의 제목은 「찬수축천(攢手祝天)」으로, 두 손을 모아 하늘에 축원한다는 뜻이다.
이 글은 한일병합 1주년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성격의 글이었다.
나라가 망한 지 1년이 되는 날, 이 인간은 애도문이 아니라 축하문을 발표했다.
국권을 잃고 식민지 백성이 된 조선인들의 입장에서는 비극적인 날이었지만, 이재곤에게는 일본의 지배가 시작된 것을 축하할 만한 사건으로 표현한 셈이다.
이러한 행적은 이재곤의 친일 협력이 1907년의 정치적 결정에만 머물지 않고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의 활동
일본의 식민통치 기념행사
이재곤은 일제강점기에도 여러 일본의 공식 행사에 참여했다.
1912년 8월 1일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에는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15년에는 일본 천황 다이쇼의 즉위대례식에 조선귀족 자격으로 참석했다.
또한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이는 이재곤이 일본의 귀족제도와 공식적인 정치·사회질서에 편입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한일병합을 기념하는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일본이 그의 활동을 식민통치에 대한 협력으로 인정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불교옹호회
1917년 이재곤은 불교옹호회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의 종교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특히 불교와 유교, 기독교 등 여러 종교단체가 한국인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본은 이러한 조직을 관리하고 포섭하려 했다.
이재곤은 불교옹호회의 고문으로 참여하면서 종교계 관련 활동에도 관여했다.
다만 이 사실만으로 이재곤이 불교 신자였거나 불교 교리를 적극적으로 신봉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일제강점기의 종교 관련 조직에서도 사회적 지위를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3·1 운동과 작위 반납 신청
1919년의 변화
1919년 이재곤은 일본 귀족 작위를 반납하겠다고 신청했다.
이 행적은 이재곤의 생애에서 상당히 특이한 부분이다.
1919년 3월 1일 한국에서는 일본의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시민과 학생, 종교인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일본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이를 탄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재곤과 권중현은 일본 귀족 작위를 반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권중현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협력한 을사오적의 한 명이었다.
즉, 대표적인 친일 관료 두 사람이 3·1 운동 시기에 작위를 반납하려 한 것이다.
일본은 반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재곤과 권중현의 작위 반납 신청은 일본 당국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재곤이 1919년 3·1 운동 시기에 작위 반납을 신청했으나 각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재곤이 실제로 일본 귀족 작위를 반환하고 귀족의 지위에서 벗어났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또한 작위 반납 신청의 정확한 동기와 배경은 신중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재곤이 진심으로 일본의 식민통치에 반대하기 시작했는지,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정치적인 압력 때문에 작위 반납을 신청했는지, 혹은 다른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는지는 신청했다는 사실만으로 확정할 수 없다.
적어도 작위를 반납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해야 하지만, 그걸 곧바로 독립운동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로 전향한 것은 아니었다
이재곤은 1919년 작위 반납을 신청한 이후에도 일본의 식민통치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았다.
특히 일본의 귀족 작위는 계속 유지되었으며, 이후에도 일본의 공식적인 행사와 관련된 활동이 확인된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시국간담회에 참석했다.
또한 1939년에는 친일적인 유림단체인 조선유도연합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따라서 이재곤이 1919년을 계기로 모든 친일 활동을 중단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 기록과 맞지 않는다.
1919년에 일본 귀족 작위를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1939년에는 다시 일본의 전쟁정책에 협력하는 유림단체에서 활동한 것이다.
작위 반납 신청은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이지만, 전체적인 역사적 평가를 뒤집는 근거로 사용하기에는 이후 행적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
중일전쟁과 친일 활동
1937년 중일전쟁
1937년 일본은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확대했다.
이 사건은 중일전쟁으로 불리며, 일본이 동아시아 전역에서 군사적 팽창을 강화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식민지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더욱 적극적으로 동원하려 했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사회의 유력 인물들을 동원해 일본의 전쟁정책을 지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각종 시국간담회와 선전행사가 개최되었다.
이재곤은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시국간담회에 참석했다.
이는 그가 1919년 작위 반납을 신청한 이후에도 일본의 식민통치 체제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만 특정 시국간담회에 참석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전쟁에 관한 모든 정책을 직접 입안하거나 군사작전을 지휘했다고 볼 수는 없다.
확인되는 사실은 일본의 전쟁정책에 협력하는 정치적 행사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조선유도연합회
유교까지 일본의 전쟁에 동원되다
1939년 이재곤은 조선유도연합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조선유도연합회는 조선총독부의 지원 아래 설립된 전국적인 친일 유림단체였다.
이 단체는 유교적인 도덕과 사회질서를 내세우면서 일본의 전쟁정책과 황국신민화 정책을 지지했다.
특히 일본은 조선의 유림과 향교를 전쟁 수행과 식민통치에 동원하려 했다.
조선유도연합회는 이러한 정책을 뒷받침하는 조직 가운데 하나였다.
단체의 주요 목적에는 일본 천황을 중심으로 한 황도정신의 보급과 전시체제에 대한 협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조선의 전통적인 유교를 일본 제국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활용하려는 조직이었다.
이재곤의 참여
이재곤은 조선유도연합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이전부터 유교 경전에 밝은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1907년에도 대동학회와 같은 유교계 단체의 활동을 지원한 경력이 있었다.
일본은 이러한 인물의 학문적·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유림들을 친일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려 했다.
이재곤이 조선유도연합회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그의 활동이 일제강점기 후반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1907년에는 고종을 쫓아내는 데 협력하더니, 1939년에는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유림단체의 고문이 되었다.
왕실 종친이라는 신분과 유교적 학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지위를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력하는 방향으로 사용한 것이다.
1919년 작위 반납 신청과의 모순
이재곤의 조선유도연합회 참여는 1919년 작위 반납 신청과 비교할 때 더욱 주목할 만하다.
1919년에는 일본의 귀족 작위를 돌려주겠다고 신청했다.
그러나 20년 뒤에는 일본의 전쟁정책과 황국신민화를 지지하던 조직에서 활동했다.
이는 그가 일제강점기 내내 일관되게 식민통치에 저항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1919년 당시의 작위 반납 의사를 진심이 아니었다고 단정할 근거도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그의 행적은 당시의 신청 사실과 이후의 친일 활동을 모두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일본의 귀족 작위를 유지한 채 식민통치 관련 활동을 이어갔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사망
1943년 7월 11일 사망했다.
당시 만 84세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로 출세한 뒤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했으며, 일제강점기에도 조선귀족의 지위를 유지했다.
특히 1930년대 후반까지 일본의 전쟁 관련 행사와 친일단체에 참여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재곤은 일본의 패전과 대한민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손자 이해국의 작위 승계
이재곤이 사망한 뒤 일본의 귀족 작위는 손자 이해국에게 승계되었다.
1943년 11월 1일 이해국은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의 승계를 인정받았다.
이는 이재곤이 사망한 뒤에도 일본이 수여한 귀족 작위가 가족에게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다만 일본이 제공한 작위와 관련된 혜택을 후손이 승계했다는 사실과, 그 후손이 독자적으로 어떠한 친일 행위를 했는지는 구분해 평가해야 한다.
이재곤의 친일반민족행위는 그의 개인적인 정치적 선택과 구체적인 행적에 근거해 평가되는 것이다.
역사적 평가
공식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재곤은 대한민국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인물이다.
그의 행적은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등에 수록되어 있다.
주요 친일 행위는 다음과 같다.
-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과정에 적극적으로 협력
-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하여 정미칠적의 한 명으로 지목
-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공로로 훈1등 욱일대수장 수령
- 일본 황태자 방문 환영을 위한 신사회에 참여
- 대동학회와 한자통일회 등 친일 성향 단체에서 활동
-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발기하고 개최
- 1909년 이완용 계열의 병합 관련 정치활동에 동조
- 1910년 일본의 자작 작위 수령
- 1911년 은사공채 5만 원 수령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식민통치에 협력
- 《매일신보》에 한일병합 1주년 축사 게재
- 일본의 공식 행사와 식민통치 기념행사에 참여
-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의 시국간담회 참석
-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 고문으로 활동
이러한 행적은 이재곤이 국권 침탈과 식민통치에 장기간 협력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황실의 신임을 배반한 관료
이재곤의 친일 행적 가운데 가장 비판받는 부분은 왕실과의 관계를 이용해 출세한 뒤 고종의 강제 퇴위에 협력했다는 점이다.
그는 왕실과 가까운 가문 출신이었으며, 여러 궁중 관직을 맡아 고종의 신임을 얻었다.
특히 대한제국 선포 과정에서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데 노력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러나 1907년에는 일본에 협력해 고종의 퇴위를 추진했다.
이러한 행적은 당시 일본 측의 비밀문서에서도 특이한 변절로 평가되었다.
고종을 황제로 만드는 데 노력해서 출세한 뒤, 일본이 고종을 쫓아내려 하자 이번에는 그 일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국가와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던 조선의 정치문화에서 특히 모순적인 행적이다.
교육 책임자로서의 책임
이재곤은 1907년 학부대신이었다.
학부대신은 대한제국의 학교와 교육정책을 담당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당시 일본은 교육제도를 통제해 조선인들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순응하도록 만들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의 교육을 책임지는 대신이 일본의 내정권 침탈에 협력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특히 정미7조약 이후 일본은 고위 관료의 임명과 행정조직 운영에 더욱 깊숙이 개입할 수 있었다.
이재곤은 이러한 조약 체결에 협력한 인물이었다.
교육을 통해 나라의 미래를 준비해야 할 사람이, 정작 그 나라가 독립국가로 남을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데 협력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친일 행적은 단순히 정부 대신 한 명의 개인적인 정치적 선택을 넘어 국가의 교육과 행정적 자주권을 약화시킨 사건과 연결된다.
일본의 포상을 통한 협력
이재곤은 1907년 일본의 훈장을 받았으며, 1910년에는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에는 5만 원의 은사공채를 수령했다.
이러한 포상은 일본이 국권 침탈에 협력한 대한제국의 지배층을 식민통치 체제에 포섭하는 수단이었다.
특히 이재곤은 왕실과 가까운 종친이었으므로, 일본은 그를 포섭함으로써 기존 황실과 유력 인사들의 저항을 약화시키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재곤은 일본이 제공한 귀족 작위와 경제적 혜택을 받아들였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는 그의 친일 행적이 단순히 일본의 군사적 위협 때문에 한 차례 조약 체결에 협력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3·1 운동 당시의 작위 반납 신청
이재곤의 생애에서 가장 복잡한 평가가 필요한 부분은 1919년 작위 반납 신청이다.
그는 3·1 운동 당시 일본 귀족 작위를 반납하려 했지만 일본 당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작위 반납을 신청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이전 친일반민족행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후에도 일본의 전쟁 관련 행사와 친일 유림단체에서 활동한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재곤을 완전히 일관된 친일파로만 설명하는 것보다 작위 반납 신청이라는 예외적인 행동을 함께 소개하는 편이 정확하다.
그러나 전체적인 역사적 평가에서는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행적, 일본의 작위와 경제적 보상을 받은 사실, 식민통치 관련 활동을 계속한 사실이 중요한 근거로 남는다.
작위를 반납하겠다고 신청한 사실은 있지만, 그 이전에 나라를 팔아먹는 데 협력한 행적까지 함께 반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을사오적과 정미칠적의 차이
| 구분 | 을사오적 | 정미칠적 |
|---|---|---|
| 연도 | 1905년 | 1907년 |
| 관련 사건 | 을사늑약 | 정미7조약 |
| 주요 내용 |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 대한제국의 내정권 침탈 |
| 대표적인 인물 |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이병무, 이재곤, 송병준, 조중응 |
| 이재곤의 포함 여부 | 포함되지 않음 | 포함됨 |
이재곤은 정식 을사오적이 아니다.
을사오적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다섯 대신을 가리킨다.
반면 이재곤은 1907년 이완용 내각의 학부대신으로서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했다.
이 때문에 정미칠적의 한 명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이재곤을 을사늑약 체결에 직접 서명한 사람이라고 설명하거나 경술국적의 정식 구성원으로 단정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다만 정미칠적 역시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인물들이었다는 점에서는 역사적 책임이 크다.
을사오적 명단에 없다고 매국노가 아닌 건 아니다. 일본에 나라의 주권을 넘겨주는 과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이재곤은 그 다음 단계에서 활약한 놈이었다.
주요 행적 정리
| 연도 | 주요 행적 |
|---|---|
| 1859년 | 3월 6일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 |
| 1880년 | 증광시 문과 급제 |
| 1882년 | 홍문관 교리 임명 |
| 1886년 | 거창부사 임명 |
| 1890년 | 《선원보략》 수정사업 참여 |
| 1891년 | 동부승지 임명 |
| 1895년 | 진주부 관찰사와 공주부 관찰사 역임 |
| 1896년 | 비서원승 임명 |
| 1897년 | 고종의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 선포 관련 활동 |
| 1898년 | 종정원경으로 여흥부대부인 장례 총괄 |
| 1907년 5월 | 이완용 내각의 학부대신 임명 |
| 1907년 7월 |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 |
| 1907년 8월 | 일본 통감이 학부의 일본인 관리 임명 절차를 통제 |
| 1907년 9월 | 대한제국의 훈1등 팔괘장 수령 |
| 1907년 10월 | 일본 훈1등 욱일대수장과 대한제국 태극대수장 수령 |
| 1907년 | 신사회와 대동학회 관련 활동 |
| 1908년 | 한자통일회 발기 |
| 1909년 |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개최에 참여 |
| 1909년 12월 | 이완용 계열 국민연설회에 참석 |
| 1910년 10월 | 일본 자작 작위 수령,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임명 |
| 1911년 | 은사공채 5만 원 수령 |
| 1911년 8월 | 한일병합 1주년 축사 발표 |
| 1915년 | 일본 다이쇼 천황 즉위대례식 참석 |
| 1917년 | 불교옹호회 고문 |
| 1919년 | 3·1 운동 시기 일본 귀족 작위 반납 신청, 각하됨 |
| 1920년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퇴임 |
| 1928년 | 일본 쇼와대례기념장 수령 |
| 1937년 |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 시국간담회 참석 |
| 1939년 | 조선유도연합회 고문 |
| 1943년 | 7월 11일 사망 |
| 1943년 11월 | 손자 이해국이 자작 작위 승계 |
여담
- 정미칠적 가운데 한 명이다. 정식 을사오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 전주 이씨 출신으로, 조선 왕실과 가까운 종친이었다.
- 형은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이재완이다. 이재곤 본인은 자작 작위를 받았다.
- 1880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1882년에는 홍문관 교리로 임명되었다.
- 진주부 관찰사와 공주부 관찰사, 경상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 수정사업에도 참여했다. 왕실 족보를 관리하던 놈이 훗날 그 왕실의 황제를 쫓아내는 데 협력한 것이다.
- 1897년에는 고종의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 선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일본 측 기록이 남아 있다.
- 그런데 1907년에는 이완용과 함께 고종의 강제 퇴위에 협력했다. 일본 측 비밀문서에서도 이러한 변절이 놀라웠다는 취지로 평가했다.
- 1907년 학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오늘날의 교육부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 학부대신으로서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했다. 이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주요 행정처분과 고위 관료 인사에 일본 통감의 승인이 필요하게 되었다.
- 1907년 8월에는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이재곤에게 일본인 관리 임명 절차에 관한 지침을 전달했다. 국가기록원에 관련 문서가 남아 있다.
- 정미7조약에 직접 서명한 대표는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재곤은 친일 내각의 학부대신으로서 조약 체결에 협력한 인물이다.
- 1907년에는 일본으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 같은 해 대한제국에서도 팔괘장과 태극대수장을 받았으며, 종1품으로 승진했다. 나라의 주권을 넘기는 데 협력했는데 양쪽에서 훈장을 받은 것이다.
- 일본 황태자 방문을 환영하기 위한 신사회에 발기위원으로 참여했다.
- 유림들을 친일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려 했던 대동학회에서도 활동했다.
- 1908년에는 박제순 등과 함께 한자통일회를 발기했다.
-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사살되자 추도회를 발기하고 개최했다. 자기 나라의 국권을 빼앗은 인물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었던 것이다.
- 1909년에는 일진회의 병합청원에 반대하는 이완용 계열의 국민연설회에 참석했다. 당시 친일 관료들은 병합 문제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서로 경쟁했다.
- 1910년 10월 7일 일본에서 자작 작위를 받았다.
- 1911년 1월에는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았다.
- 1911년 8월에는 《매일신보》에 한일병합 1주년 축사를 실었다. 글의 제목은 「찬수축천」이었다.
- 나라가 강제로 병합된 날을 맞아 축하하는 글을 썼다는 점에서 당시의 정치적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약 10년 동안 활동했다.
- 1919년 3·1 운동 당시 일본 귀족 작위를 반납하겠다고 신청했다. 함께 신청한 인물은 을사오적 가운데 한 명인 권중현이었다.
- 일본 당국은 작위 반납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실제로 귀족 작위를 반환한 것은 아니었다.
- 작위 반납 신청의 구체적인 동기는 확정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 사실만으로 그가 독립운동가로 전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 1937년에는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의 시국간담회에 참석했다.
- 1939년에는 친일 유림단체인 조선유도연합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작위는 반납하겠다고 했지만 이후에도 일본의 식민통치 관련 활동은 계속했다.
- 1943년 7월 11일 사망했다. 일본의 패전과 대한민국의 광복을 보지 못했다.
- 같은 해 11월에는 손자 이해국이 자작 작위를 승계했다.
- 이름의 한자는 李載崑이며, 일부 자료에서는 李載崐으로도 표기한다.
- 《조선귀족약력》에서는 이재곤을 학식과 언변이 뛰어나지만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로 평가했다. 이는 일본 측의 인물평가이므로 객관적인 성격 묘사와는 구분해야 한다.
- 이재곤의 친일 행적은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 일본의 작위 및 경제적 보상 수령, 이후 식민통치 관련 활동 등을 통해 확인된다.
- 고종을 황제로 만드는 데 참여해 출세했다가, 나중에는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쫓아내는 데 협력했다. 일본에서 훈장과 귀족 작위를 받은 뒤에는 나라가 망한 날을 기념하는 축사까지 발표했다. 황실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와 이익을 지키는 데 충실했던 인물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관련 문서
외부 링크 및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재곤
- 민족문제연구소 -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내정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겨준 정미칠적
- 국가기록원 - 1907년 8월 2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학부대신 이재곤에게 보낸 인사 관련 문서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통감부의 교육 정책
-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 일본인 교원 배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일병합조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선유도연합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3·1 운동
- 친일맵 - 정미칠적 관련 기록과 공식 사료
-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3,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 Ⅳ,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8.
- 《조선귀족약력》, 조선총독부 비밀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