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극 Yi Jae-geuk | |
| 국적 | 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조선 |
|---|---|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 가문 | 조선 왕실 종친, 인평대군 후손 |
| 본관 | 전주 이씨 |
| 직업 | 문신, 관료, 정치인, 친일파 |
개요
이재극(李載克, 1864년 11월 6일 ~ 1927년 6월 1일)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호는 만송당(晩松堂)이며, 조선 왕실의 종친으로 법부대신과 학부대신, 궁내부대신 등을 지냈다. 국권 피탈 이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와 은사공채 2만 5천 원을 받고, 이왕직 장관과 친일단체 간부로 활동했다.
고종과 가까운 왕실 친척이면서도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인물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과정에서 궁내부대신이라는 직책을 이용해 조약안의 황제 재가 문제에 관여했다.
1907년 이후에는 통감부의 정책에 동조하는 단체에서 활동했고, 1910년에는 한일병합을 청원하는 단체의 부총재를 맡았다. 이후 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자 일본 정부로부터 귀족 작위와 거액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여기서 끝났다면 그나마 흔한 친일 관료의 사례로 남았겠지만, 이 인간은 일제강점기에도 식민통치를 찬양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1919년에는 제2대 이왕직 장관으로 임명되어 1923년까지 근무했고, 1924년부터는 동민회의 부회장과 회장을 맡아 내선융화와 일본의 식민통치를 선전했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황제 곁에서 국권 침탈에 협력하고, 나라가 망한 뒤에는 침략국에서 귀족 작위를 받아먹으며 끝까지 식민통치를 빨아준 매국노 새끼다.
특히 이재극은 정식 을사오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을사오적은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의 다섯 명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재극은 을사늑약 체결 당시 궁내부대신으로서 조약안의 황제 재가 문제에 관여했으며, 이후에는 일본에 대한 병합 청원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때문에 일부 인터넷에서는 이하영, 민영기와 함께 을사삼흉(乙巳三凶)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만 이 표현은 정식 학술 용어는 아니다.
을사오적 다섯 명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이 새끼는 그 이후의 매국 행적만으로도 충분히 이름값을 하고 있다.
가계와 출신
왕실 종친
이재극은 1864년 11월 6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이씨이며, 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이연응(李沇應)이다.
이재극은 조선의 왕족으로, 인조의 아들 인평대군의 후손이다.
인평대군은 인조의 동생인 능창대군의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에 족보상으로는 능창대군의 계통도 계승했다.
이재극은 인평대군가의 종손으로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고종과는 가까운 친척 관계였으며, 이러한 배경은 그가 궁내부와 왕실 관련 관직에 진출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조선 후기 왕실의 종친들은 일반 양반과 달리 궁중의 의례와 왕실 행정에 관여하거나 특정한 지위를 보장받는 경우가 있었다.
이재극 역시 이러한 왕실 종친의 지위를 바탕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조선 왕실에서 태어나 왕실의 보호와 지위를 누린 사람이 정작 그 왕실을 무너뜨리는 일본의 침략에 협력했다.
그냥 일반 관료가 아니라 왕실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황제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비판받는다.
아버지 이연응
이재극의 아버지 이연응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왕실의 종친이면서 고위 관직에 진출한 인물이었으며, 이재극은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
이재극은 어린 시절부터 한학과 유교적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관료로서 필요한 학문을 익혔다.
1879년에는 동몽교관에 임명되었다.
동몽교관은 어린 학생들에게 글과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직책으로, 당시 이재극의 나이는 불과 15세였다.
왕실 종친이라는 배경이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교육 관련 관직을 맡았다는 점은 그가 상당한 수준의 학문을 익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문과 급제
1893년 이재극은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당시 나이는 29세였다.
문과는 조선에서 고위 문관으로 진출하기 위한 중요한 관문이었다.
이재극은 왕실 종친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과거시험에도 급제하면서 관료로서의 자격을 확보했다.
이후 여러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정치적 지위를 높였다.
왕족 신분에만 기대어 놀고먹던 인간은 아니었다. 공부도 했고 과거에도 붙었으며 관료로서의 능력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국가를 운영하는 제도와 관료의 책임을 이해할 능력이 없어서 매국행위를 저질렀다고 변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관료 생활
여러 관직을 거치다
1893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이재극은 가주서와 비서감 우비서랑, 왕태자궁 우시독관 등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1896년에는 규장원 교서와 경연원 시독, 장례원 장례 등을 지냈다.
이후 규장각 직각과 비서원승 등을 거쳐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다.
특히 왕실의 의례와 행정, 황태자 교육과 관련된 관직을 다수 역임했다.
이는 이재극이 왕실의 내부 사정과 행정조직에 익숙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898년 흥선대원군의 장례에서는 지문 서사관을 맡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였으며, 그의 장례는 대한제국 왕실에서 중요한 국가적 행사였다.
이재극은 이러한 왕실 행사에 직접 참여하면서 황제와 궁내부에 대한 접근성을 유지했다.
경기도 관찰사
1899년 이재극은 내부협판과 의정부 참찬 등을 역임했다.
1900년에는 경기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관찰사는 지방의 행정과 사법, 군사 및 재정 등에 관한 업무를 감독하는 고위 관직이었다.
특히 경기도는 수도 한성을 둘러싸고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관찰사의 정치적 지위도 상당했다.
이재극은 이후 다시 궁내부 관련 관직으로 복귀했다.
1901년에는 궁내부 특진관과 비서원경을 지냈으며, 1902년에는 의정부 찬정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그는 궁내부와 정부의 여러 핵심 직책을 번갈아 맡으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법부대신
1902년 이재극은 법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법부대신은 오늘날의 법무부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국가의 사법행정과 법률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이재극은 법부대신을 비롯해 장례원경, 태의원경, 시종원경, 홍문관 학사 등 여러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과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 국내에서는 행정과 사법제도의 근대화가 추진되고 있었다.
이재극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정부의 핵심 관료로 활동했다.
학부대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이재극은 학부대신에 임명되었다.
학부대신은 오늘날의 교육부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외국의 교육제도와 학문을 도입하고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에서 유학 중이던 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이재극은 러시아 유학생들을 소환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후 그는 학문과 제도에 관한 시찰단을 이끌고 일본으로 향했다.
1904년 10월 일본을 방문하여 여러 교육기관과 제도를 시찰했다.
이때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당시 외교사절과 고위 관료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행위 자체는 외교적 의례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훈장 수여만을 독립적인 매국행위의 증거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후 이재극이 일본의 침략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실을 고려하면, 일본과의 관계가 그의 정치적 행적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궁내부대신
1905년 이재극은 궁내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궁내부대신은 황실의 행정과 의례, 재정 및 관련 기관들을 관리하는 고위 관료였다.
대한제국에서는 황실의 권한과 재정이 국가 운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므로 궁내부대신 역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특히 황제에게 가까이 접근하고 궁중의 내부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직책이었다.
이재극은 1907년까지 궁내부대신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 이 인간의 친일 행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본 천황 만세 사건
일본 천황의 생일잔치에 참석하다
1905년 11월 3일 일본 공사관에서는 일본 메이지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날은 일본의 천장절(天長節)이었다.
이재극은 대한제국의 궁내부대신 자격으로 행사에 참석했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대한제국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압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으며, 불과 2주 뒤인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황실을 대표하는 관료가 일본 천황의 생일잔치에 참석한 것이다.
외교적인 행사에 참석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의 전부는 아니었다.
문제는 거기서 이재극이 했다고 전해지는 행동이었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
1968년 5월 12일 《조선일보》의 역사 특집기사인 「개화백경」에는 이재극이 일본 천황의 생일잔치에서 일본 천황을 위해 만세를 삼창했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재극은 축배를 들면서 일본 천황의 만세를 세 차례 외쳤다고 한다.
그 소식이 고종에게 전해지자 고종은 이재극을 불러 크게 꾸짖었다.
당시 조선에서 만세라는 표현은 군주를 위해 사용하는 특별한 축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대한제국의 궁내부대신이 다른 나라 군주의 생일잔치에서 만세를 외쳤다는 사실은 황제에 대한 충성과 궁중의 예법이라는 측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고종은 이재극이 대한제국의 대신으로서 어떻게 외국 군주에게 만세를 외칠 수 있느냐고 질책했다.
그런데 이때 이재극이 내놓은 해명이 매우 유명하다.
만세가 아니라 반자이입니다
이재극은 고종에게 자신이 만세라고 외친 것이 아니라 일본말로 반자이(万歳)라고 외쳤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관모를 벗은 상태에서 외쳤으므로 대한제국 황제에 대한 예를 어긴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일본어로 반자이가 바로 만세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고종: 왜 일본 천황 만세를 외쳤느냐?
이재극: 만세라고 안 했고 반자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시발 그게 그거잖아.
일본말로 외쳤으니 대한제국의 만세와는 다르다는 식의 궤변을 늘어놓은 셈이다.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궁내부대신이라는 사람이 일본 천황을 축하하는 행사에 참석해 만세를 외쳐 놓고, 문제가 되자 단어의 언어만 다르다는 이유로 책임을 피하려 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일화는 당시 궁중에서 작성된 공식적인 실록 기사를 통해 확인되는 내용이 아니라, 후대의 신문 특집기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정확한 대화 내용과 고종의 반응까지 모두 사실로 확정해 서술하기보다는 후대에 전해지는 일화로 구분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일화가 이재극의 친일 행적 전체를 설명하는 유일한 근거인 것은 아니다.
이재극이 이후 일본의 병합정책에 협력하고 식민통치 관련 단체에서 활동한 사실은 별도의 기록으로 확인된다.
을사늑약과의 관계
을사늑약 체결 당시 궁내부대신
1905년 11월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했다.
당시 일본의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과 헌병을 동원해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했다.
1905년 11월 17일 경운궁 중명전에서 일본이 제시한 조약안을 놓고 대한제국 대신들이 회의를 진행했다.
당시 조약 체결에 찬성한 다섯 대신은 다음과 같다.
이들이 정식으로 알려진 을사오적이다.
반면 참정대신 한규설은 조약 체결에 강하게 반대했으며, 탁지부대신 민영기와 법부대신 이하영도 반대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일본은 군사적인 위협을 통해 결국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이재극은 당시 회의에서 찬성 의견을 밝힌 을사오적의 일원은 아니었다.
그는 궁내부대신으로서 황실의 행정과 황제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조약안의 황제 재가 문제에 관여
을사늑약 체결 과정에서 이재극은 궁내부대신이라는 직책을 이용해 일본과 대한제국 황실 사이의 연결 역할을 담당했다.
경향신문의 2001년 1월 18일 관련 논설에 따르면 이재극은 강제로 통과된 협약안을 고종에게 전달하고 황제의 재가를 받아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일부 후대 자료에서는 그가 황실 내부의 동향을 친일파 관료들에게 전달하고 조약 체결에 협력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다만 당시 을사늑약에 대한 고종의 정식 승인 여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고종은 조약 체결을 거부했으며, 일본이 요구한 방식으로 정식 비준한 사실이 없다는 점이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강제성을 설명하는 주요 근거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이재극이 황제의 재가를 받아내는 임무에 관여했다는 기록을 곧바로 고종이 을사늑약을 자유롭게 승인하고 정식으로 비준했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이재극이 일본의 강압으로 진행된 국권 침탈 과정에서 황실 측의 주요 관료로서 협력했다는 사실이다.
황제를 보좌하고 왕실을 보호해야 할 놈이 정작 황제의 권한과 나라의 외교권을 침탈하는 과정에 협력한 것이다.
왕실 종친이면서 궁내부대신이었던 그의 지위는 일본이 황실에 접근하고 압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었다.
을사오적은 아니지만
이재극은 정식 을사오적 다섯 명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정식 을사오적이라는 명칭은 1905년 11월 17일 조약 체결에 찬성한 특정한 대신 다섯 명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당시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했던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명칭은 아니다.
이재극은 을사늑약 전후로 궁내부대신으로 활동했으며, 1907년 이후에는 통감부의 정책을 지지하는 여러 단체에 참여했다.
특히 1910년에는 한일병합을 적극적으로 청원하는 정치단체의 부총재를 맡았다.
오적 명단에는 못 들어갔지만, 결국 일본에 나라를 병합해 달라고 청원하는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 인터넷에서는 이재극을 이하영, 민영기와 함께 을사삼흉이라고 부른다.
다만 을사삼흉은 후대의 비공식적인 표현이며, 을사오적처럼 정식으로 확립된 역사적 분류는 아니다.
본격적인 친일 활동
동아개진교육회
1907년 1월 13일 이재극은 동아개진교육회의 임시회에 참여했다.
동아개진교육회는 일본 통감부의 식민정책에 동조하며 조선인들을 교화한다는 명분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특히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지고 있던 보부상들을 규합해 교육과 계몽활동을 추진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정당화하고 일본의 정책에 순응하도록 하는 방향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재극은 이 단체의 찬성원으로 참여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으며, 일본 통감부가 국가의 주요 정책에 직접 개입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정책에 동조하는 단체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이재극의 친일적인 정치적 입장을 보여준다.
일본 황태자 환영운동
1907년 일본 황태자의 한국 방문이 추진되자 이재극은 이를 환영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일본 황태자의 방한을 환영하기 위해 친일 성향의 정치인과 유력자들이 신사회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이재극은 신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일본 황태자 환영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09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황태자 도한기념장을 받았다.
물론 외국의 황태자를 외교적으로 환영하는 행위 자체가 언제나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재극은 이미 일본의 식민정책에 동조하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후에도 병합청원운동과 식민통치 찬양에 참여했다.
따라서 이러한 환영활동은 그의 지속적인 친일 행적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궁경의회와 신궁봉경회
단군과 일본 신화를 결합하다
1909년 이재극은 신궁경의회와 신궁봉경회의 부총재로 활동했다.
이 단체들은 한국의 시조로 여겨지는 단군과 일본 신화의 태양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함께 모시는 신궁을 건립하려 했다.
표면적으로는 한국과 일본의 종교적·문화적 화합을 강조하는 활동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국과 일본이 같은 조상과 역사를 공유한다는 일선동조론을 선전하는 성격이 있었다.
일선동조론은 한국과 일본이 본래 같은 계통의 민족이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 이론이다.
특히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두 민족이 원래 하나였다는 식의 논리를 활용하려 했다.
이재극은 이러한 단체의 부총재로 참여했다.
나라를 빼앗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조상까지 일본 신화와 묶어서 정리하려는 사업에 참여한 것이다.
민족의 역사와 신화를 식민통치의 논리에 맞게 해석하려는 움직임에 협력했다는 점에서 그의 친일 행적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다.
내선융화의 논리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기 전후로 한국인과 일본인이 하나의 국가와 문화 아래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확대했다.
이러한 사상은 이후 내선일체와 내선융화라는 구호로 발전했다.
그러나 실제 식민통치 아래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의 지위는 평등하지 않았다.
일본인은 식민지 지배자의 위치를 차지했고, 한국인은 정치적인 권리와 경제적 기회에서 여러 차별을 받았다.
따라서 두 민족이 하나라는 주장은 실제로는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선전에 가깝게 사용되었다.
이재극은 이러한 논리를 지지하는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정책에 협력했다.
한일병합 청원운동
일진회의 병합청원
1909년 일진회는 대한제국을 일본에 병합해 달라는 청원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일진회는 송병준과 이용구 등을 중심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친일단체였다.
일진회는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과 국권 침탈을 지지했으며, 1909년에는 대한제국을 일본에 완전히 병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청원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었다.
특히 일본은 한국 내부에서도 병합을 원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선전하려 했다.
그러나 대한제국 내부에서는 일진회의 병합청원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상당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재극 역시 일진회의 병합청원에 반대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인간이 반대한 이유가 더 가관이다.
일진회가 주도하는 것은 반대한다
1910년 이재극은 이완용, 민영규, 이하영 등과 함께 일진회가 추진하던 병합청원운동에 반대했다.
그런데 이들의 반대는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 자체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이 한일병합 청원운동을 주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재극과 관련 인물들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정우회와 국민대연설회 등을 조직했다.
이재극은 정우회 부총재와 국민대연설회 부회장으로 참여했다.
이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행적이다.
즉, 이재극은 일진회의 병합청원에 반대하면서도 다른 단체를 통해 한일병합을 추진하려 했다.
일진회: 일본에 나라를 병합해 달라고 하겠습니다.
이재극: 안 됩니다!
일진회: 왜요?
이재극: 그건 우리가 해야 합니다.
아니 시발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도 주도권 경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국행위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누가 앞장서서 병합을 추진할 것인가를 두고 다투었다는 점에서 황당한 사건이다.
물론 당시 정치세력들의 이해관계는 복잡했으며, 일진회와 이재극 계열의 인물들은 조직적 기반과 정치적인 이해관계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일본에 의한 한일병합을 지지하거나 추진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정우회 부총재
정우회는 1910년 한일병합을 추진하기 위해 조직된 정치단체이다.
이재극은 부총재로 참여했으며, 이완용과 이하영 등 여러 친일 관료들과 협력했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으며, 이재극과 같은 친일 관료들은 이러한 정책을 지지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정우회는 일진회가 병합청원을 독점적으로 주도하는 것을 견제하면서 별도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려 했다.
나라가 사라질 위기인데 이 인간은 병합청원 단체의 부총재 명함을 하나 더 추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활동은 이재극이 단순히 일본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한 관료가 아니라, 일본의 국권 침탈을 정치적으로 지지하고 추진했던 인물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국민대연설회 부회장
이재극은 국민대연설회의 부회장으로도 참여했다.
국민대연설회 역시 한일병합 청원과 관련된 정치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였다.
당시 친일 관료들은 대중적인 집회와 연설을 통해 일본의 병합정책을 지지하는 여론을 형성하려 했다.
이는 대한제국의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원한다는 인상을 만들기 위한 정치적인 활동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친일단체들의 활동을 대한제국 국민 전체의 의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국내외에서는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대하는 의병과 애국계몽운동, 독립운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재극이 참여한 병합청원운동은 이러한 저항과 반대되는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경술국치와 포상
나라가 망하자 남작이 되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었다.
이후 일본 정부는 한국의 국권 침탈과 식민통치에 협력한 인물들에게 작위와 금전적인 보상을 지급했다.
1910년 10월 7일 일본 정부는 조선귀족 작위 수여 대상자를 발표했다.
이재극은 남작(男爵) 작위 수여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남작은 일본이 식민통치에 협력한 한국의 고위 관료와 유력자들에게 수여한 조선귀족 작위 가운데 하나였다.
이재극은 이러한 작위를 받아들였다.
나라가 망했는데 왕실 종친이라는 놈은 일본 제국의 귀족이 됐다.
왕실을 지켜야 할 사람이 일본의 국권 침탈을 지지하고, 이후에는 침략국이 주는 귀족의 지위를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일본이 수여한 작위는 단순한 명예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작위를 받은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여러 경제적·정치적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이재극 역시 조선귀족으로서 식민지 지배체제에 편입되었다.
은사공채 2만 5천 원
1911년 1월 13일 이재극은 일본 정부로부터 2만 5천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은사공채는 일본이 조선귀족들에게 수여한 국채 형태의 경제적 보상이었다.
당시 남작 작위 수령자에게 일반적으로 지급된 은사공채는 2만 5천 원이었다.
이는 당시의 물가와 소득 수준을 고려하면 상당한 거액이었다.
은사공채는 정기적인 이자 수익도 발생시키는 자산이었다.
당시 지급된 공채의 표면 이율은 연 5%였으므로, 2만 5천 원의 공채는 연간 1,250원의 이자에 해당한다.
나라가 망한 대가로 귀족 작위도 받고, 그 작위에 딸린 금융자산까지 챙긴 것이다.
그것도 국권 침탈에 반대하던 조선인들이 체포되거나 재산을 잃고 있었던 시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본이 이러한 보상을 제공한 목적은 기존 대한제국의 지배층을 새로운 식민통치 체제에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이재극은 그러한 정책의 수혜자가 되었다.
조선귀족 일본관광단
1910년 10월 이재극은 조선귀족 일본관광단에 참가했다.
이 관광단은 일본 정부의 후원을 받아 조직된 행사로, 조선귀족들에게 일본의 여러 도시와 산업시설을 보여주고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재극은 관광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해 천장절 행사에 참가했다.
또한 일본의 여러 지역과 산업시설을 시찰하고 일본 천황으로부터 주병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나라를 병합당하고 일본에서 귀족 작위를 받자마자, 이번에는 일본 관광까지 다녀온 것이다.
물론 당시의 방문은 일본 정부가 조직한 공식적인 행사였으므로 일반적인 의미의 관광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사가 식민통치에 협력한 조선의 지배층을 일본의 정치·사회질서에 편입시키기 위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일제강점기의 활동
병합 1주년 축사
1911년 8월 29일 이재극은 《매일신보》에 한일병합 1주년을 기념하는 글을 게재했다.
이 글에서 그는 한국과 일본이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았다.
《매일신보》는 당시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하는 언론매체로, 일본의 정책을 조선인들에게 선전하는 역할을 했다.
이재극은 이러한 신문에 병합을 기념하는 축사를 발표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 주민으로 살아가게 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재극은 이를 비극적인 사건으로 다루기보다 일본과 한국이 하나가 되었다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표현했다.
나라가 망한 지 1주년 되는 날, 이 인간은 애도문이 아니라 축하문을 실었다.
국권 피탈을 기념할 만한 사건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그의 식민통치 협력 행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귀족 보식원 조합
1911년 이후 이재극은 귀족 보식원 조합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 조합은 조선귀족과 자산가들이 참여한 경제조직으로, 삼림과 임야 관련 사업에 관여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의 임야와 삼림을 조사하고 관리하는 제도를 변경하면서 여러 토지와 산림 자원이 일본인과 유력자들에게 넘어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귀족 보식원 조합은 이러한 상황에서 임야와 삼림을 확보하고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이재극 역시 조합에 참여해 재산 증식과 관련된 경제활동을 했다.
이는 그가 일본의 귀족 작위와 은사공채를 받은 뒤에도 식민지 경제체제 속에서 재산을 확대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조선물산공진회
1915년 일제는 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했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일본이 조선의 산업과 경제 발전을 선전하기 위해 개최한 대규모 행사였다.
일제는 이를 통해 식민통치가 조선의 근대화와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만들려 했다.
이재극은 경성협찬회의 특별회원으로 참가하고 50원을 출연했다.
이는 그가 일본의 식민통치를 기념하는 행사에도 협력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조선물산공진회는 일제가 자신의 식민지 지배 성과를 선전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관련 활동은 당시의 식민통치 홍보정책과 연결되어 있었다.
기업활동
이재극은 일제강점기에도 여러 기업의 설립과 경영에 참여했다.
대표적으로 조선무역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 활동했으며, 경성제사주식회사의 취체역을 맡았다.
취체역은 오늘날의 회사 이사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이외에도 대한상업주식회사와 작잠주식회사, 종묘주식회사, 대륙어업회사 등 여러 기업의 설립에 관여했다.
이러한 활동은 이재극이 정치적 지위뿐 아니라 경제적 기반도 확보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기업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가 언제나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재극의 친일반민족행위는 한일병합 청원과 일본 귀족 작위 수령, 식민통치 선전 및 친일단체 활동 등 구체적인 정치적 행적을 중심으로 평가해야 한다.
제2대 이왕직 장관
왕실을 관리하는 일본의 관료가 되다
1919년 10월 20일 이재극은 제2대 이왕직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왕직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한 이후 조선 왕실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이었다.
이왕직은 일본 궁내성의 감독 아래 운영되었으며, 왕실의 재산과 의례, 생활 및 관련 시설을 관리했다.
대한제국이 존속하던 시절에는 황실이 국가의 최고 권위를 가진 존재였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지배 아래 놓인 왕공족으로 격하되었다.
이재극은 이러한 기관의 장관으로 임명되어 1923년 3월 1일까지 재임했다.
나라가 있을 때에는 황실의 대신이었고, 나라가 망한 뒤에는 일본이 관리하는 옛 왕실의 장관이 된 것이다.
어찌 보면 왕실 관련 업무의 경력만큼은 일관되게 유지한 셈이다.
문제는 그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가 대한제국에서 일본 제국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왕실 종친으로서의 모순
이재극은 조선 왕실의 종친이었다.
따라서 대한제국 황실과 일본의 식민통치 사이의 관계는 그에게 단순한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가문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제였다.
그러나 그는 국권 피탈 이후 일본이 수여한 귀족 작위를 받아들였으며, 일본이 왕실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이왕직의 장관으로 활동했다.
자기 가문의 왕조가 무너졌는데, 그 왕조를 무너뜨린 나라가 주는 직책을 맡아 옛 왕실을 관리한 것이다.
물론 이왕직의 업무에는 왕실 구성원들의 생활과 재산을 관리하는 실무적인 기능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재극의 경우 이전부터 일본의 병합청원운동에 참여했고 이후에도 식민통치 찬양을 계속했다는 점에서, 이왕직 장관 재임을 단순한 생계형 관직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데라우치 동상 건립 운동
1920년 이재극은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동상 건립을 추진하는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일본의 군인이자 초대 조선총독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초기의 군사적 식민통치를 총괄한 인물로, 무단통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헌병경찰제도와 언론·집회 통제, 각종 식민지 행정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런데 이재극은 이러한 식민통치를 주도했던 초대 조선총독의 동상을 건립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조선인에게는 억압적인 식민통치를 실시했던 총독이지만, 이 인간에게는 동상까지 세워 줄 만한 은인이었던 모양이다.
이 사건은 이재극의 친일 행적이 단순히 국권 피탈 당시의 협력에 그치지 않고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동민회 활동
내선융화를 주장하다
1920년대 이재극은 동민회에서 활동했다.
동민회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지지하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융화를 주장했던 대표적인 친일단체이다.
동민회는 내선융화를 표방하면서 한국인들이 일본의 식민지 체제에 순응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파했다.
그러나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의 지위는 평등하지 않았다.
일본인은 지배자의 위치를 차지했고, 한국인은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기회에서 여러 제약과 차별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내선융화라는 표현은 일본의 지배를 유지하면서 한국인들의 반발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었다.
이재극은 이러한 조직에서 지도부로 활동했다.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1924년 4월 이재극은 동민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1926년 10월까지 부회장을 맡았으며, 1926년 11월에는 동민회 회장과 재단법인 동민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1927년 사망할 때까지 이러한 직책을 유지했다.
또한 동민회의 기관지인 《동민》에 여러 차례 글을 게재했다.
이 글들은 내선융화와 일본의 식민통치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즉, 이재극은 단순히 명예직으로 이름만 올린 것이 아니라 조직의 지도부로서 식민통치 선전활동에 참여한 것이다.
나이 60이 넘어서도 친일단체 회장 자리를 맡고 있었으니, 매국 행적만큼은 정년퇴직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모양이다.
대정친목회
1925년에는 대정친목회에도 참여했다.
대정친목회는 내선융화와 관민의 협조, 산업 발전 등을 표방했던 친일단체이다.
이재극은 1925년 3월부터 이사와 회장을 역임했다.
동민회와 대정친목회는 서로 다른 조직이었지만 일본의 식민통치를 지지하고 한국인들의 순응을 유도하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이재극은 두 단체의 주요 직책을 맡으면서 친일적인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사망
1927년 6월 1일 사망했다.
당시 만 62세였다.
일본 정부는 사망 이틀 뒤인 6월 3일 이재극에게 정4위를 추서했다.
이재극은 사망 당시에도 일본의 남작 작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동민회 회장과 대정친목회 관련 직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1927년 9월 1일에는 장남 이인용이 남작 작위를 승계했다.
즉, 일본으로부터 받은 귀족 작위는 이재극이 사망한 이후에도 가족에게 이어졌다.
나라가 망할 때 귀족 작위를 받아먹었고, 그 작위는 죽은 뒤 아들에게까지 물려줬다.
다만 자료에 따라 사망 연도가 1925년이나 1931년으로 잘못 소개되는 경우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상세 생애 기록과 1927년 사망 당시 일본의 추서 기록, 작위 승계 기록을 기준으로 하면 1927년 6월 1일로 정리하는 것이 적절하다.
후손의 친일재산 반환 소송
죽은 뒤에도 재산 문제가 남다
이재극이 사망한 뒤 그의 가족은 여러 재산을 상속받았다.
특히 일본의 귀족 작위와 식민지 지배체제에서 확보한 재산은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재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가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등장했다.
그러나 광복 직후 친일파 청산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일부 친일파의 후손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주장하는 재산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이재극의 후손들 역시 이러한 소송에 참여했다.
2001년 재산 반환 소송
2001년 1월 이재극의 손자며느리는 국가를 상대로 부동산 소유권 관련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이재극으로부터 물려받은 부동산의 소유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01년 1월 17일 서울지방법원 민사합의14부는 원고의 청구를 각하했다.
법원은 대한민국 헌법이 3·1 운동의 정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민족의 이익을 배반하고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한 재산의 보호를 구하는 것은 정의와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은 당시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 반환 소송과 관련해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특히 이완용의 후손이 제기했던 재산 관련 소송에서는 다른 판단이 내려진 사례도 있었으므로, 법률적인 쟁점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나라 팔아먹고 챙긴 재산을 손자며느리가 국가를 상대로 되찾겠다고 나선 것이다.
다만 후손의 법적 권리와 이재극 본인의 친일반민족행위는 별개의 법적 문제이며, 친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후손에게 개인적인 역사적 책임이 자동으로 부과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해당 재산이 친일반민족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인지, 그리고 국가에 귀속될 법적 요건을 충족하는지 여부였다.
2007년 국가귀속 결정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친일재산 환수를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후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조사위원회는 친일반민족행위와 관련하여 취득한 재산을 조사하고 국가에 귀속시키는 업무를 수행했다.
2007년 5월 2일 조사위원회는 첫 국가귀속 결정을 내렸다.
당시 귀속 대상에는 이완용과 송병준, 권중현, 조중응 등 여러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재산이 포함되었다.
이재극 역시 국가귀속 결정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조사위원회는 총 9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관련된 토지 154필지, 약 25만 4,906㎡를 국가에 귀속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토지들의 당시 공시지가 총액은 약 36억 원이었다.
다만 이 수치는 이재극 한 사람의 재산 규모가 아니라 당시 9명과 관련해 국가귀속이 결정된 토지의 전체 규모이다.
이러한 결정은 일제강점기에 취득된 친일재산을 국가에 환수하기 위한 정책의 중요한 사례였다.
역사적 평가
왕실 종친으로서의 책임
이재극의 행적에서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그가 조선 왕실의 종친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인평대군의 후손으로서 왕실의 지위와 보호를 누렸으며, 궁내부대신으로 황실의 핵심적인 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일본의 국권 침탈이 진행되자 왕실과 국가의 자주권을 보호하기보다 일본의 정책에 협력했다.
특히 을사늑약 체결 과정에서 황제의 재가 문제에 관여했다는 사실은 그의 왕실 관련 지위가 국권 침탈 과정에서 이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후에는 한일병합을 청원하는 단체에서 활동했고, 국권 피탈 뒤에는 일본 귀족 작위를 받아들였다.
조선 왕실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얻은 지위를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는 과정에 활용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재극의 행적은 단순히 한 명의 친일 관료가 출세하기 위해 일본에 협력한 사례를 넘어 왕실 종친 일부가 국권 피탈 과정에서 어떠한 선택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한일병합 청원운동
이재극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평가되는 중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는 한일병합 청원운동에 직접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진회와 일부 친일 관료들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재극은 일진회가 주도하는 병합청원에는 반대했지만, 자신들이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병합청원을 추진하려 했다.
이러한 행적은 그의 정치적 입장이 단순히 일본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수준을 넘어섰음을 보여준다.
특히 정우회 부총재와 국민대연설회 부회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는 점에서 조직적인 친일 정치활동에 참여한 사실이 분명하다.
이 인간은 나라를 팔아먹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 게 아니라, 누가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앞장설 것인가를 놓고 다퉜다.
이것이 그의 친일 행적에서 특히 비판받는 부분이다.
식민통치에 대한 지속적인 협력
이재극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도 친일적인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1911년에는 병합 1주년을 기념하는 축사를 발표했으며, 1919년에는 이왕직 장관이 되었다.
1920년에는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동상 건립에 참여했고, 1924년 이후에는 동민회와 대정친목회에서 지도부로 활동했다.
이는 그의 친일 행적이 국권 피탈 전후의 일시적인 정치적 선택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특히 동민회의 회장으로서 내선융화와 식민통치 옹호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정치적 선전활동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친일재산의 문제
이재극은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와 은사공채 2만 5천 원을 받았다.
이러한 포상은 일본이 조선의 기존 지배층을 식민통치 체제에 포섭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었다.
또한 이재극은 일제강점기에 여러 기업과 경제조직에 참여하며 재산을 관리하고 확대하려 했다.
그의 사망 이후에도 재산과 관련된 문제가 이어졌으며, 2000년대에는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을 둘러싼 법적 분쟁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건은 친일반민족행위로 취득한 재산의 처리가 광복 이후에도 장기간 해결되지 못했던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재극의 모든 재산이 친일반민족행위로 취득한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재산의 국가귀속 여부는 취득 시기와 경위, 관련 법률과 증거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주요 행적 정리
| 연도 | 행적 |
|---|---|
| 1864년 | 한성부에서 출생 |
| 1879년 | 동몽교관 임명 |
| 1893년 | 정시 문과 급제 |
| 1900년 | 경기도 관찰사 임명 |
| 1902년 | 의정부 찬정 및 법부대신 역임 |
| 1904년 | 학부대신으로 일본 시찰, 일본 욱일대수장 수령 |
| 1905년 | 궁내부대신 임명 |
| 1905년 | 을사늑약 체결 과정에서 황제 재가 문제에 관여 |
| 1907년 | 동아개진교육회 찬성원으로 참여 |
| 1907년 | 신사회 발기인 및 일본 황태자 환영위원 |
| 1909년 | 신궁경의회·신궁봉경회 부총재 |
| 1910년 | 정우회 부총재, 국민대연설회 부회장 |
| 1910년 |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 수여 |
| 1911년 | 은사공채 2만 5천 원 수령 |
| 1911년 | 《매일신보》에 한일병합 1주년 축사 발표 |
| 1915년 |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특별회원 |
| 1919년 | 제2대 이왕직 장관 임명 |
| 1920년 | 데라우치 마사타케 동상 건립 발기인 |
| 1924년 | 동민회 부회장 |
| 1926년 | 동민회 회장 |
| 1927년 | 6월 1일 사망, 장남 이인용이 남작 작위 승계 |
| 2001년 | 이재극 후손의 재산 반환 소송에서 법원이 청구 각하 |
| 2007년 | 이재극 관련 친일재산 국가귀속 결정 |
여담
- 조선 왕실의 종친 출신으로, 인평대군의 후손이다. 고종과도 가까운 친척 관계였다.
- 왕실 종친이었지만 1893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법부대신과 학부대신, 궁내부대신 등 여러 고위 관직을 지냈다.
- 1904년 학부대신으로 일본을 시찰했으며,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 1905년 11월 일본 천황 생일잔치에서 만세를 외쳤다가 고종에게 꾸중을 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해당 일화에서 이재극은 자신이 만세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일본말로 반자이라고 말했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반자이가 만세라는 뜻이다. 이쯤 되면 변명인지 개그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 다만 만세와 반자이 일화의 구체적인 대화는 후대의 신문 특집기사에서 전해지는 것이므로 당대의 공식 기록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 을사늑약 당시 궁내부대신으로서 조약안의 황제 재가 문제에 관여했다.
- 정식 을사오적 다섯 명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하영, 민영기와 함께 비공식적으로 을사삼흉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1907년에는 일본 통감부의 식민정책에 동조하던 동아개진교육회의 찬성원으로 참여했다.
- 일본 황태자의 방한을 환영하는 신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 1909년에는 단군과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함께 모시려던 신궁경의회와 신궁봉경회의 부총재로 활동했다.
- 1910년 일진회의 한일병합 청원에 반대했다. 그런데 병합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병합청원을 주도하려고 반대한 것이었다.
- 실제로 정우회 부총재와 국민대연설회 부회장으로 참여하며 한일병합 청원운동을 추진했다.
- 나라가 망한 뒤인 1910년 10월 7일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 1911년에는 은사공채 2만 5천 원을 받았다.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거액이었다.
- 일본이 수여한 은사공채에는 연 5%의 이자가 지급되었다. 2만 5천 원의 공채라면 연간 이자에 해당하는 금액은 1,250원이다.
- 1910년 조선귀족 일본관광단에 참여해 일본을 방문했다. 나라가 강제로 병합된 직후 일본의 귀족 작위를 받아 일본 천황의 생일행사에 참석한 것이다.
- 1911년에는 《매일신보》에 한일병합 1주년을 축하하는 글을 실었다. 나라가 망한 날을 기념일로 삼아 축사를 발표한 셈이다.
- 1915년 일본의 식민통치 5주년 기념행사인 조선물산공진회의 경성협찬회 특별회원으로 참여했다.
- 1919년부터 1923년까지 제2대 이왕직 장관을 지냈다. 대한제국의 옛 왕실을 일본의 관리 아래에서 운영하는 기관의 장관이었다.
- 1920년에는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동상 건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식민지 지배자를 기념하는 사업까지 도운 것이다.
- 1924년에는 동민회 부회장이 되었고, 1926년에는 회장으로 활동했다.
- 동민회의 기관지 《동민》에 내선융화와 일본의 식민통치를 옹호하는 글을 여러 차례 발표했다.
- 1925년에는 대정친목회에도 참여해 이사와 회장을 맡았다.
- 1927년 사망한 뒤 일본 정부가 정4위를 추서했다.
- 남작 작위는 장남 이인용이 승계했다. 친일로 얻은 귀족 작위가 부자간에 세습된 것이다.
- 2001년에는 이재극의 손자며느리가 재산을 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서울지방법원은 청구를 각하했다.
- 2007년에는 이재극과 관련된 친일재산이 국가귀속 결정 대상에 포함되었다.
- 왕실 종친이면서 국권 침탈에 협력하고, 일본 귀족 작위를 받아 식민통치에 참여했으며, 친일단체의 회장으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초기에는 조선의 관료, 후기에는 일본의 협력자라는 식으로 역할만 바뀌었을 뿐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히 집요했던 인물이다.
관련 문서
외부 링크 및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재극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을사늑약
- 민족문제연구소 - 「'만세' 아닌 '반자이'… 친일파의 황당한 변명」
- 오마이뉴스 - 김종성의 히스토리, 이재극
- 경향신문 - 「친일파의 재산」
- 서울신문 - 친일파 후손 재산 반환 소송 각하
- 연합뉴스 - 친일파 재산 환수 작업
- 연합뉴스 - 친일재산 첫 환수 결정
- 전북일보·연합뉴스 - 이재극 등 친일파 9명 관련 재산 국가귀속
- 국립민속박물관 - 조선귀족 작위와 은사공채
- 《친일인명사전》 제3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3,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