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준 Im Seon-jun | |||||||||||||||||||||||||||||||
| 국적 | 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조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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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
| 본관 | 풍천 임씨 | ||||||||||||||||||||||||||||||
| 직업 | 문신, 관료, 정치인, 친일파 | ||||||||||||||||||||||||||||||
| 관련 사건 | 헤이그 특사 사건, 정미7조약, 대한제국 군대 해산, 경술국치 | ||||||||||||||||||||||||||||||
추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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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임선준(任善準, 1860년 음력 12월 17일 ~ 1919년 2월 21일)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이자 고위 관료로, 일본의 국권 침탈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치경(穉慶), 호는 산남(山南)과 춘관(春觀)이다.
1885년 문과에 급제한 뒤 승정원과 홍문관, 성균관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1907년에는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내부대신은 오늘날의 행정안전부장관과 비슷한 역할을 담당했던 관직으로, 국가의 지방행정과 치안, 국내 행정 전반을 관리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데 임선준은 일본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려 하자 이러한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에 동조하면서 정미칠적의 한 명으로 지목되었으며,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까지 받았다.
1908년에는 탁지부대신으로 임명되어 국가 재정을 담당했다.
이 시기 그는 일본 소유의 군용지와 철도용지 등에 대한 세금을 면제하고, 의병에게 처단당한 인물들의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5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어 1919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다.
나라의 행정을 책임지는 대신이 일본에 내정권을 넘기는 데 협력하고, 재정을 책임지는 대신이 되자 이번에는 일본 소유 토지의 세금을 면제해 준 것이다.
한마디로 직책을 바꿔 가며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도와준 인간이다.
더욱 황당한 사실은 임선준이 이완용과 사돈 관계였다는 점이다.
임선준의 조카딸이 이완용의 장남과 혼인하면서 두 집안은 사돈이 되었다.
물론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매국행위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임선준은 실제로 이완용 내각에 참여하여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돈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건 좋은데, 하필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넘기는 일까지 같이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1911년에는 한일병합 1주년을 맞아 《매일신보》에 이를 축하하는 글까지 발표했다.
1933년 잡지 《별건곤》에는 임선준의 출세와 몰락을 비판적으로 회고한 글이 실렸으며, 2026년에는 그의 후손에게 친일재산 매각대금을 반환하도록 하는 법원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즉, 임선준의 행적은 단순히 1907년 정미7조약에 찬성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의 식민통치 협력과 친일재산 문제까지 이어졌다.
다만 임선준은 정식 을사오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을사오적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다섯 대신을 가리키며, 임선준은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정미칠적의 한 명이다.
생애
출생과 가문
1860년 음력 12월 17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861년 1월 27일에 해당한다.
따라서 일부 자료에서는 출생 연도를 1860년으로, 다른 자료에서는 1861년으로 표기한다.
본관은 풍천 임씨이며, 아버지는 교관을 지낸 임백희(任百熙)이다.
임선준의 가문은 전통적인 유학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양반 가문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과 유교 경전을 공부했고, 이후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가 되는 것이 전통적인 양반 가문에서 중요한 출세 경로였다.
임선준 역시 이러한 교육을 바탕으로 중앙정부의 관료로 진출했다.
1933년 《별건곤》의 「조선고관성쇠기」에는 임선준의 집안이 오랫동안 학문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그의 형 임대준과 임선준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 집안의 명성을 높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는 훗날 작성된 회고성 기사이므로, 가족의 성격과 개인적인 동기를 묘사한 부분은 당시의 평가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1885년 문과 급제
1885년 임선준은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별시는 국가의 특별한 경사나 중요한 행사를 기념하여 실시하던 과거시험이었다.
문과에 급제한 임선준은 승정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승정원은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왕실의 문서를 관리하던 중요한 중앙기관이었다.
이후 1886년 승정원 주서로 천거되었으며, 홍문관의 본관록과 도당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본관록과 도당록은 관료의 학문적 능력과 자격을 평가하여 홍문관 등의 직책에 추천하기 위한 제도였다.
따라서 임선준은 당시 관료사회에서 학문적인 능력을 인정받았던 인물로 볼 수 있다.
홍문관과 시강원
1890년 임선준은 규장각 직각권에 올랐으며, 시강원 사서로 임명되었다.
이후 1891년에는 시강원 필선과 문학 등을 역임했다.
시강원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당시 왕세자의 교육은 단순히 유교 경전을 읽는 일이 아니라 장차 국가를 통치할 군주의 정치적·도덕적 능력을 기르는 과정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시강원의 관료들은 높은 수준의 학문과 정치적 식견을 요구받았다.
임선준은 이러한 기관에서 근무하면서 왕실의 교육과 관련된 업무에 참여했다.
그는 이후에도 성균관과 궁중 관련 관직을 맡으며 전통적인 유교 관료로서의 경력을 이어갔다.
성균관 대사성
1892년 임선준은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성균관은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유교 경전과 학문을 가르치고 국가의 관료를 양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대사성은 성균관의 교육과 운영을 총괄하는 책임자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외국의 근대적인 교육제도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었지만, 성균관은 여전히 전통적인 유교교육의 중심지였다.
임선준은 이러한 기관의 최고 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는 전통적인 학문과 관료제도를 잘 이해하는 인물이었으며, 이후 여러 고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성균관의 교육을 책임졌던 전형적인 조선의 고위 문관이었다.
문제는 이후 정치적 상황이 바뀌자 그가 선택한 길이었다.
정치적 공백과 복귀
갑오개혁 이후
1894년 갑오개혁이 시작되면서 조선의 정치와 행정제도는 크게 변화했다.
기존의 과거제도와 관료 선발 방식이 폐지되었으며, 여러 중앙기관과 지방행정조직도 개편되었다.
특히 전통적인 유교 관료들의 지위가 약화되고 새로운 제도에 적응한 개화파 인물들이 정부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임선준은 이 시기에 중앙정계에서 한동안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33년 《별건곤》에는 그가 형 임대준과 함께 충청도 진천의 집안으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해당 기사는 이 시기의 임선준이 나라의 정치가 잘못되는 것을 비판하면서 은거를 자처했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같은 기사에서는 이후 임선준이 재산과 관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행동이 바뀌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는 임선준을 잘 알고 있던 당대 사회에서 그의 정치적 변화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주는 자료이다.
다만 이러한 내용은 1933년의 회고성 기사이므로, 임선준의 실제 내면과 동기를 확인된 사실처럼 단정할 수는 없다.
1907년 성균관장
1907년 임선준은 성균관장으로 임명되었다.
성균관장은 대한제국 시기에 성균관의 운영을 책임지는 관직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이미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의 주요 정책에 개입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고위 관료 인사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선준은 다시 중앙정계의 주요 관직에 진출했다.
특히 그는 이완용과 사돈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후 이완용이 주도하는 친일 내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완용과의 관계
사돈 관계
임선준과 이완용은 사돈 관계였다.
임선준의 조카딸이 이완용의 장남과 혼인한 것이다.
따라서 두 사람은 직접적인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혼인을 통해 친족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완용은 원래 조선의 외교관과 개화파 관료로 활동했으며, 독립협회의 창립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하면서 을사오적의 한 명이 되었고, 1907년에는 친일 내각을 구성해 정미7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임선준은 이러한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두 사람이 사돈이었다는 점은 당시 정치적인 인맥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만한 사실이다.
그러나 임선준의 친일반민족행위는 단순히 이완용과 친척이었다는 이유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했고,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과 식민통치를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완용 덕분에 출세했는가?
1933년 《별건곤》의 「조선고관성쇠기」에서는 임선준이 이완용과의 사돈 관계를 통해 중앙정계에 복귀했다고 비판했다.
이 글은 임선준이 진천에서 생활하다가 이완용의 도움으로 성균관장이 되었으며, 이후 내부대신으로 출세했다고 서술한다.
당시의 필자는 임선준이 본래 학문과 예법을 중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후 재산과 관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행동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이것은 1933년 잡지에 실린 비판적인 인물평이다.
따라서 이완용의 인사 개입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까지 별도의 증거 없이 확정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두 사람이 사돈 관계였으며 임선준이 실제로 이완용 내각의 주요 대신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사돈 관계가 관직 진출에 얼마나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는 별개로, 정미7조약 체결에는 두 사람이 함께 협력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내부대신 취임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
1907년 5월 임선준은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내부대신은 대한제국의 지방행정과 국내 치안, 지방 관료의 관리 및 행정조직을 총괄하는 고위 관직이었다.
현대적인 직책으로 비유하면 행정안전부장관에 가까운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대한제국의 내정권은 일본의 강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뒤 지방행정과 경찰, 군사 및 재정에 대한 통제를 확대하려 했다.
특히 일본은 한국의 고위 관료들이 통감부의 정책을 따르도록 압박하고 있었다.
임선준은 이러한 상황에서 내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나라의 행정과 지방자치를 지켜야 할 내부대신이 일본의 내정권 침탈에 협력하는 내각의 일원이 된 것이다.
내정권의 중요성
국가의 내정권은 법률과 행정, 지방정부의 운영, 고위 관료의 임명 등 국가 내부의 중요한 정책을 독립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지만, 형식적으로는 황제와 정부가 존재했고 일부 국내 행정권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권한까지 완전히 장악하려 했다.
특히 대한제국이 자체적으로 관료를 임명하거나 법률을 제정할 수 있다면 일본의 침략정책에 저항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새로운 조약을 추진했다.
임선준은 내부대신으로서 바로 이 과정에 협력하게 되었다.
고종 강제 퇴위
헤이그 특사 사건
1907년 고종은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특사를 파견했다.
이들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회복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외교활동을 문제 삼았다.
특히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이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에 저항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의 강제 퇴위를 추진했다.
당시 일본은 군대와 헌병을 동원해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었으며, 친일 내각 역시 일본의 요구에 협력했다.
황제의 퇴위에 협력하다
1907년 7월 이완용 내각은 고종에게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임선준 역시 내부대신으로서 이러한 움직임에 협력했다.
당시 고종은 일본의 국권 침탈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작 자신의 정부를 구성하던 대신들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퇴위를 압박했다.
특히 이완용과 송병준 등은 고종의 퇴위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임선준 역시 고종의 강제 퇴위에 동조한 주요 대신 가운데 하나였다.
결국 고종은 1907년 7월 19일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황태자 순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황제가 자기 나라의 독립을 지키겠다고 외국에 특사를 보냈는데, 내부대신이라는 놈이 일본과 협력해서 그 황제를 쫓아내는 데 가담한 것이다.
당시 임선준이 담당했던 내부대신은 국가의 행정과 치안을 관리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는 국가의 독립적인 통치권을 유지하기보다 일본의 정책에 협력했다.
일본의 평가
일본은 고종의 강제 퇴위에 협력한 친일 내각의 대신들을 높게 평가했다.
특히 일본은 이들이 대한제국의 정치적 권한을 장악하는 데 기여했다고 판단했다.
임선준 역시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는 그가 단순히 황제의 퇴위에 관한 결정을 수동적으로 지켜본 사람이 아니라,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정치적 인물로 평가되었음을 보여준다.
정미칠적
정미7조약 체결
1907년 7월 24일 일본은 대한제국에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했다.
정미7조약은 한일신협약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의 중요한 행정처분과 법령 제정, 고위 관료 임명 등에 일본 통감의 승인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일본인 관리들을 대한제국 정부의 주요 관직에 임명하여 행정권을 직접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일본이 외교권에 이어 내정권까지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조치였다.
임선준은 내부대신으로서 이러한 조약 체결에 협력했다.
이 때문에 그는 정미칠적(丁未七賊)의 한 명으로 분류된다.
정미칠적 7명
| 인물 | 당시 관직 |
|---|---|
| 이완용 | 내각총리대신 |
| 임선준 | 내부대신 |
| 고영희 | 탁지부대신 |
| 이병무 | 군부대신 |
| 이재곤 | 학부대신 |
| 송병준 | 농상공부대신 |
| 조중응 | 법부대신 |
정미칠적은 1907년 일본의 대한제국 내정권 침탈에 협력한 일곱 대신을 가리킨다.
다만 정미7조약에 두 나라를 대표해 직접 서명한 인물은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였다.
따라서 임선준이 정미7조약의 정식 서명자였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의 책임은 내부대신으로서 친일 내각에 참여하고, 정미7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는 점에 있다.
을사오적이 나라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했다면, 정미칠적은 내정권까지 넘기는 데 협력한 놈들이다.
그리고 임선준은 바로 그 내정권을 담당하는 내부대신이었다.
정미7조약과 내부대신의 모순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주요 행정처분을 일본 통감의 승인 아래에서 시행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또한 고위 관료의 임명과 행정조직의 운영에도 일본의 통제가 확대되었다.
내부대신은 원래 국가의 국내 행정을 관리하고 독자적인 행정권을 행사해야 하는 직책이었다.
그러나 임선준은 그 행정권을 일본이 장악할 수 있도록 하는 조약에 동조했다.
행정부의 책임자가 자기 나라 행정권을 외국에 넘기는 데 협력했다는 것이 이 인간의 가장 대표적인 행적이다.
직책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면 상당히 모순적인 행동이었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일본의 군대 해산
정미7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당시 대한제국에는 수도를 방어하는 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 등이 존재했다.
일본은 이러한 군대가 남아 있을 경우 국권 침탈에 대한 무력저항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사력을 제거하기 위해 군대 해산을 추진했다.
1907년 8월 1일 군부대신 이병무는 대한제국의 장교들에게 군대 해산 명령을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자결했다.
박승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제국 군인들이 무장저항을 일으켰으며, 서울의 숭례문 일대에서 남대문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해산 군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미의병에 참여했다.
임선준의 책임
임선준은 군부대신이 아니었으므로 군대 해산 명령을 직접 전달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 역할은 이병무가 담당했다.
그러나 임선준은 군대 해산을 추진한 친일 내각의 내부대신이었다.
또한 군대 해산의 정치적 배경이 된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임선준이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 군대 해산에 적극적으로 찬동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임선준 역시 대한제국 군사력의 강제적인 해체에 협력한 내각의 구성원으로서 정치적 책임이 있다.
이병무가 자기 나라 군대를 해산시키는 명령을 전달했다면, 임선준은 그 군대가 속한 국가의 내정권을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직책을 통해 일본의 국권 침탈에 참여한 것이다.
다만 임선준이 남대문 전투에서 직접 일본군을 지휘하거나 대한제국 군인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다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행위와 친일 내각의 일원으로서 군대 해산에 동조한 책임은 구분해서 평가해야 한다.
일본의 훈장 수령
대한제국의 태극장
1907년 임선준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1등 태극장을 받았다.
태극장은 대한제국의 훈장 가운데 하나로, 국가에 공로가 있는 인물들에게 수여되었다.
그러나 임선준이 이 훈장을 받은 시기는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이 이루어진 해였다.
그는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친일 내각의 일원이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관직을 유지했다.
나라의 내정권은 일본에 넘어갔는데, 그 과정에 협력한 대신은 대한제국에서 훈장을 받은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정치가 일본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1907년 10월 임선준은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다.
이 훈장은 일본이 고위 관료와 외국의 주요 인물들에게 수여하던 고위 훈장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은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포상했다.
임선준 역시 이러한 포상의 대상이었다.
대한제국 입장에서는 주권을 빼앗긴 사건이었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훈장을 줄 만큼 큰 공로를 세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임선준은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뒤 정치적 지위와 명예를 유지했다.
일본 황태자 환영운동
1907년 10월 일본 황태자가 대한제국을 방문했다.
당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한 직후였다.
따라서 일본 황태자의 방문은 단순한 외교적 친선행사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이를 통해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조선인들의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황태자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한 단체인 신사회가 조직되었다.
임선준은 신사회의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친일 내각의 주요 관료로서 일본 황태자 환영행사에 협력했다.
자기 나라 황제가 강제로 쫓겨나는 데 협력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일본 황태자의 방문을 환영하는 단체에서 활동한 것이다.
이러한 행적은 당시 임선준이 어느 정치적 세력과 협력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탁지부대신
재정 책임자가 되다
1908년 6월 임선준은 탁지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탁지부대신은 대한제국의 재정과 세금, 국가 예산 등을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오늘날의 기획재정부 장관과 비슷한 역할을 담당했던 관직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은 이미 일본의 강한 간섭을 받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재정고문을 파견하고 통화제도를 개편하면서 대한제국의 경제적 자주권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국가의 재정권은 독립적인 정치와 군사활동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었다.
따라서 탁지부대신은 외국의 부당한 경제적 요구를 견제하고 국가의 재정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임선준은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경제적 이익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 소유 군용지 면세
임선준이 탁지부대신으로 활동하면서 추진한 대표적인 정책 가운데 하나는 일본 소유의 군용지에 대한 세금 면제이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과 대한제국의 보호국화 과정에서 한국 내 군사시설과 군용지를 확대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서울과 주요 항구, 철도 주변의 여러 지역에 주둔했으며, 군사적인 목적을 위한 토지를 확보했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 소유의 군용지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면 대한제국의 재정수입은 그만큼 줄어들 수 있었다.
임선준은 탁지부대신으로서 지방에 있던 일본 소유 군용지에 대한 면세조치를 시행했다.
나라의 재정을 책임지는 놈이 자기 나라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의 땅에 세금을 면제해 준 것이다.
대한제국의 국가 재정이 점차 일본의 통제를 받는 상황에서 이러한 정책은 일본의 군사적 주둔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만 확인되는 사실은 일본 소유 군용지에 대한 면세조치를 추진했다는 것이며, 전국의 모든 일본군 토지를 영구적으로 면세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본 소유 철도용지 면세
임선준은 일본 소유의 철도용지에 대해서도 세금을 면제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의 철도를 군사적·경제적인 목적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특히 경부선과 경의선은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교통시설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당시 군대와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철도를 활용했으며, 이후에도 한국의 경제와 교통망을 장악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소유 철도용지에 대한 세금을 면제하면 일본의 교통시설 운영에 경제적인 혜택이 제공될 수 있었다.
임선준은 탁지부대신으로서 이러한 면세정책에 관여했다.
일본군의 땅에는 세금을 면제해 주고, 일본 철도의 땅에도 세금을 면제해 줬다.
정작 대한제국은 국가의 재정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일본이 한국에서 운영하는 군사시설과 철도시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데 협력했다.
재정 책임자가 누구의 세금 부담을 줄여 줘야 하는지 아주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의병 관련 보상금 지급
의병운동의 확대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이후 전국 각지에서는 항일 의병운동이 확대되었다.
특히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해산 군인들이 의병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의 조직과 전투능력이 강화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항일 무장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과 헌병, 경찰을 동원했다.
또한 친일 관료와 지방의 유력자들을 이용하여 의병의 활동을 억제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는 의병과 일본군, 친일 세력 사이에 여러 충돌이 발생했다.
특히 일부 친일적인 지방관과 협력자들은 의병에게 공격받거나 처단되었다.
의병에게 처단된 사람의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다
임선준은 탁지부대신으로 활동하면서 의병에게 처단당한 인물들의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민족문제연구소의 관련 자료에 이러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일본은 의병운동을 치안을 위협하는 반란이나 범죄로 규정했다.
반면 의병들은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대하고 국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임선준은 이러한 상황에서 의병에게 살해된 인물들의 유족에게 국가의 재정으로 보상금을 지급했다.
나라를 지키겠다고 싸우는 의병들은 일본군에게 쫓기고 있었는데, 의병에게 처단된 사람들의 가족에게는 국가 재정으로 보상금을 지급한 것이다.
이는 당시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의 침략정책에 협력하면서 의병운동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만 의병에게 살해된 인물이 모두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 의병운동과 관련된 충돌에서는 다양한 신분과 정치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개별 사망자의 신분과 행적은 별도의 자료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임선준이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운동이 확대되던 시기에 의병 관련 피살자 유족에 대한 보상정책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나라의 재정은 누구를 위해 사용됐는가?
탁지부대신은 국가의 재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국민의 세금이 적절하게 사용되도록 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임선준은 일본 소유의 군용지와 철도용지에 세금 혜택을 제공하는 한편 의병 관련 피살자 유족에 대한 보상정책도 추진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일본의 군사적·정치적 지배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특히 당시 대한제국은 이미 외교권과 군사적 자주권을 상당 부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국가 재정의 독립성도 위협받고 있었다.
내부대신일 때에는 나라의 행정권을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하고, 탁지부대신이 되자 나라의 재정을 일본에 유리하게 운영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임선준의 행적은 일본의 국권 침탈이 단순히 조약 몇 개를 체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행정과 재정정책까지 변화시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친일 사회단체 활동
대동학회
1908년 임선준은 대동학회에 참여했다.
대동학회는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을 받아 활동한 유교계 단체였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의 유림들이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와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따라서 유교계 인물들을 포섭하면 일본의 국권 침탈에 대한 저항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동학회는 이러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조직되었다.
임선준은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유교 관료였으므로, 유림사회에서 일정한 학문적·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대동학회에 참여했다.
유교에서 군주에 대한 충성과 국가의 도리를 배운 사람이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하는 단체에서 활동한 것이다.
물론 대동학회의 모든 회원이 동일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임선준은 실제로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했고, 일본의 정책에 동조하는 여러 활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그의 단체 활동 역시 그러한 행적과 함께 평가해야 한다.
대한여자흥학회
1908년 5월 임선준은 대한여자흥학회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대한여자흥학회는 여성의 교육과 학문 진흥을 목표로 활동했던 단체였다.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근대적인 여성교육의 필요성이 확대되면서 여러 여자학교와 교육단체가 설립되고 있었다.
임선준은 이 단체의 고문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여성교육을 지원하는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 그가 국권 침탈에 협력한 행적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교육과 사회활동에 참여한 사실은 그 자체로 구분해 평가할 필요가 있다.
대한산림협회
1908년 11월 임선준은 대한산림협회의 명예회원으로 활동했다.
대한산림협회는 산림의 관리와 이용, 임업 발전 등에 관심을 가진 단체였다.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근대적인 산림관리와 토지조사, 자원개발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역시 한국의 산림과 토지, 광산 등 경제적인 자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임선준은 이러한 환경에서 산림 관련 단체에 참여했다.
다만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만으로 특정 산림을 일본에 넘겼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승종교회
1909년 6월 임선준은 승종교회의 찬성장으로 위촉되었다.
승종교회는 유교의 진흥을 목표로 조직된 단체였다.
당시 대한제국의 유교계에서는 전통적인 학문과 도덕질서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임선준은 성균관의 고위 교육관료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러한 유교계 활동에 참여했다.
이처럼 그는 정치적인 관직뿐 아니라 교육과 유교, 산림 등 여러 사회단체에서도 활동했다.
경술국치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었다.
이로써 1897년 선포된 대한제국은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내정권을 장악한 뒤, 1910년 국가 전체를 병합했다.
임선준은 이러한 과정에서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주요 관료였다.
그러나 임선준을 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공식적인 서명자라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당시 조약문에 직접 서명한 인물은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또한 임선준은 일반적으로 경술국적의 구성원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그의 핵심적인 역사적 책임은 1907년의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하고, 이후 일본에 유리한 정책을 추진하며 식민통치에 협력한 행적에 있다.
1907년에 나라의 내정권을 넘기는 데 협력했는데, 1910년에는 그 나라가 아예 사라졌다.
그런데 임선준은 나라가 사라진 뒤에도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이 수여하는 귀족 작위와 경제적 보상을 받았다.
일본의 포상
자작 작위 수령
1910년 10월 7일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인물들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임선준은 이때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
자작은 일본의 화족제도에서 사용하던 귀족 작위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은 기존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와 왕족, 유력 인물들에게 작위를 제공하여 이들을 식민통치 체제에 포섭하려 했다.
임선준은 이러한 작위를 받아들였다.
나라가 망했는데 이 인간은 일본 귀족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국가의 내정권 침탈에 협력했던 관료가 국가가 사라진 이후에도 새로운 지배체제에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한 셈이다.
은사공채 5만 원
1911년 1월 임선준은 일본 정부로부터 5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은사공채는 일본이 조선귀족들에게 지급한 국채 형태의 경제적 보상이었다.
당시 5만 원은 일반적인 노동자나 농민이 쉽게 확보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특히 은사공채는 이자 수익을 발생시키는 금융자산이었다.
임선준은 일본의 귀족 작위와 은사공채를 통해 경제적인 혜택을 확보했다.
국가의 재정을 일본에 유리하게 운영하던 대신이었는데, 나라가 망하자 이번에는 일본에서 개인 금융자산까지 지급받았다.
이는 일본이 국권 침탈에 협력한 인물들을 어떻게 경제적으로 포섭했는지를 보여준다.
다만 이 금액을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정확하게 환산하기는 어렵다.
당시의 임금과 물가, 토지 가격 및 구매력을 어떤 기준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금액은 당시 지급된 은사공채 5만 원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식민통치 자문기관에 들어가다
1910년 10월 임선준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자문기관이었다.
이 기관에는 대한제국의 전직 고위 관료와 친일적인 유력 인물들이 다수 참여했다.
일본은 이들을 통해 식민통치에 대한 협력을 확보하고 기존 지배층을 새로운 정치체제에 편입시키려 했다.
임선준 역시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10년부터 1919년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대한제국에서는 일본에 내정권을 넘기는 데 협력했고, 나라가 망하자 일본 총독부의 고문으로 일한 것이다.
국가의 주권은 사라졌지만 자신의 관직과 사회적 지위는 계속 유지한 셈이다.
중추원의 실제 성격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형식적으로 총독에게 정책과 행정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의 중요한 정책을 독립적으로 결정하거나 총독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기관은 아니었다.
일본 총독은 식민지 조선의 행정과 입법, 군사 등에 관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따라서 중추원은 기존 대한제국의 지배층을 포섭하고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성격이 강했다.
임선준은 이러한 기관에 참여함으로써 일본의 지배체제에 협력했다.
한일병합 1주년 축사
나라가 망한 날을 축하하다
1911년 8월 29일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당시 일본은 병합 1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를 개최하고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선전했다.
특히 《매일신보》는 병합 1주년을 기념하는 특집을 발행했다.
임선준은 이 특집에 한일병합을 축하하는 글을 게재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의 축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 熙如皥如於千万年
이는 밝고 빛나는 상황이 천년만년 이어지기를 축원한다는 취지의 표현이다.
즉, 임선준은 한일병합을 축하하고 일본의 지배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성격의 글을 발표한 것이다.
나라가 망한 지 1주년 되는 날, 이 인간은 그걸 축하하는 글을 실었다.
당시 많은 한국인들에게 국권 피탈은 독립국가를 잃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임선준은 이러한 사건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정치적 입장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의 친일 행적이 단순히 1907년 정미7조약 체결 당시의 협력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매일신보》의 역할
《매일신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식민통치를 선전하는 데 활용된 신문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언론을 통해 식민통치가 한국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확산시키려 했다.
특히 한일병합의 기념일에는 친일 관료와 귀족들의 축사를 실어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했다.
임선준 역시 이러한 선전활동에 참여한 것이다.
그는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대가로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를 받은 상태였다.
따라서 한일병합 1주년 축사는 그의 식민통치 협력과 정치적 입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일본 천황 즉위대례식
1915년 임선준은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다이쇼 덴노의 즉위대례식에 참석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귀족들을 공식적인 황실 행사에 초대하여 일본 제국의 정치·사회질서에 편입시키려 했다.
임선준은 조선귀족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행사에 참여했다.
이는 그가 일본의 귀족 작위를 받은 이후에도 일본 황실과 관련된 공식적인 활동을 계속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일본의 천황 즉위대례식은 일본 제국의 정치적 권위와 국가적 질서를 상징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임선준의 참석은 그가 일본의 귀족질서에 편입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일제강점기의 사회활동
만주 시찰단 환영행사
1917년 임선준은 남북 만주 시찰단의 귀국을 환영하는 행사와 관련된 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만주는 일본이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일본은 조선의 유력 인사와 실업가들을 만주에 파견해 산업과 경제시설을 시찰하도록 하는 행사를 추진했다.
임선준은 귀족과 실업가 등이 참여하는 환영행사의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활동은 그가 일본의 식민통치 체제 아래에서 유력 인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만주 시찰단 환영행사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특정한 일본의 군사작전이나 식민지 정책을 직접 결정했다고 볼 수는 없다.
불교옹호회
1917년 임선준은 불교옹호회의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당시 일제는 한국의 종교단체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특히 불교와 유교 등 전통적인 종교조직을 식민통치에 순응하도록 만들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임선준은 불교옹호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이러한 종교 관련 단체에도 참여했다.
다만 이 사실만으로 그가 실제로 불교 신자였거나 종교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의 사회적 지위와 관료 경력 때문에 고문으로 위촉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사망
1919년 2월 21일 사망했다.
당시 만 58세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2026년 법무부의 친일재산 환수 관련 보도에서는 1919년 2월 21일을 사망일로 기록한다.
다만 일부 인터넷 자료에서는 1919년 2월 12일로 기재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본 문서에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공식적인 친일반민족행위 관련 자료에서 사용하는 2월 21일을 기준으로 한다.
임선준은 사망할 때까지 일본의 자작 작위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직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3·1 운동이 일어나기 불과 며칠 전에 사망했다.
따라서 3·1 운동 이후의 정치적 상황에 직접 참여하거나 이에 대한 입장을 발표한 사실은 없다.
다만 임선준이 생전에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했으며, 일본의 식민통치를 찬양하는 글을 발표했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아들 임낙호의 작위 승계
임선준이 사망한 이후 일본의 자작 작위는 아들 임낙호가 승계했다.
임낙호 역시 조선귀족으로서 일본의 귀족제도에 편입되었다.
이는 임선준이 일본에서 받은 귀족 작위가 개인적인 포상에 그치지 않고 가족에게 세습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임낙호가 사망하자 작위는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나라를 빼앗는 데 협력해서 얻은 귀족 작위가 죽은 뒤에도 집안에 남은 것이다.
다만 작위를 승계했다는 사실과 후손 개인이 어떠한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는지는 구분해서 평가해야 한다.
임선준의 친일반민족행위는 그가 직접 참여한 정치적 결정과 식민통치 협력에 근거한다.
1933년 《별건곤》의 평가
조선고관성쇠기
1933년 9월 1일 발행된 잡지 《별건곤》 제66호에는 「조선고관성쇠기(朝鮮高官盛衰記)」라는 글이 실렸다.
필자는 백악생(白岳生)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 글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들이 어떻게 출세하고 몰락했는지를 회고한 기사였다.
특히 송병준, 이완용, 이근택, 임선준 등의 생애를 다루었다.
글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고위 관료들의 행적을 매우 비판적인 시각에서 서술했다.
임선준에 대해서는 그가 원래 학문과 예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후 재산과 관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행동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이완용과의 사돈 관계가 중앙정계 복귀에 영향을 주었다는 취지로 서술했다.
이러한 기록은 임선준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현대에 들어서야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학문을 하던 인물이 매국 관료로
《별건곤》의 글에서는 임선준이 정치적인 혼란기에는 지방에 머물며 학문과 농사에 종사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후 이완용과의 관계를 통해 다시 서울로 올라와 성균관장과 내부대신을 지냈다고 서술했다.
특히 정미7조약에 협력한 이후 탁지부대신과 일본 자작이라는 지위를 얻고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고 평가했다.
나라의 정치가 잘못된다며 지방에 물러나 있던 사람이, 나중에는 그 나라의 주권을 빼앗는 데 협력하는 대신이 되었다는 비판이다.
다만 해당 기사는 회고성 글이며 필자의 정치적·도덕적 평가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구체적인 재산 규모와 개인적인 동기에 관한 서술은 공식적인 재산자료나 행정기록과 구분해야 한다.
그럼에도 임선준의 출세와 친일 행적을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재산과 집안의 몰락
《별건곤》은 임선준의 사망 이후 집안의 재산이 감소하고 후손들도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특히 임선준이 생전에 상당한 재산을 확보했지만, 이후 여러 사정으로 집안의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었다고 서술했다.
이러한 내용은 임선준의 출세와 몰락을 교훈적인 이야기로 구성한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특정한 재산 규모와 후손의 생활상까지 객관적인 사실로 확정해 받아들이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당시 잡지에서 그의 집안을 도덕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나라의 주권을 넘기는 데 협력해서 출세했지만, 당시의 평가에서도 결코 존경받는 인물로 남지는 못했던 것이다.
친일재산 환수
친일재산 국가귀속의 법적 근거
2005년 대한민국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일제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한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기 위한 법률이다.
특히 러일전쟁이 시작된 시기부터 광복에 이르기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일본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한 재산이 주요 대상이었다.
이 법에 따라 친일재산을 조사하고 국가에 귀속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임선준 역시 정미7조약 체결과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하고 일본 귀족 작위와 경제적 보상을 받은 인물이었으므로 관련 조사의 대상이 되었다.
후손이 상속받은 토지
임선준의 후손은 경기도 여주시 소재 토지를 상속받았다.
이 토지 가운데 일부는 1993년부터 2000년 사이 제삼자에게 매각되었다.
이후 법무부는 해당 토지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매각대금을 환수하기 위한 절차를 추진했다.
문제가 된 토지는 여주시 소재 8필지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해당 토지 자체가 이미 제삼자에게 매각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국가가 토지를 직접 회수하는 대신 매각대금을 반환받을 수 있는지가 법적인 쟁점이 되었다.
2026년 4월 22일 판결
2026년 4월 22일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임선준의 후손을 상대로 한 친일재산 매각대금 반환소송에서 국가의 청구를 받아들이는 판결을 선고했다.
법무부는 2026년 1월 14일 임선준의 후손을 상대로 약 5,300만 원의 부당이득 반환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국가의 청구를 전부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임선준의 후손은 국가에 친일재산 매각대금을 반환해야 한다는 판단을 받았다.
해당 판결은 2026년 4월 24일 법무부의 발표를 통해 알려졌다.
연합뉴스를 비롯한 언론에서도 이를 보도했다.
임선준이 사망한 지 107년이 지난 뒤에도 그와 관련된 친일재산 문제가 법정에서 다뤄진 것이다.
특히 이 사건은 친일재산의 매각대금 반환청구와 소멸시효 문제를 둘러싼 법적 판단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소멸시효 문제
이번 소송에서 중요한 법적 쟁점 가운데 하나는 소멸시효였다.
일반적으로 금전채권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소멸시효가 완성될 수 있다.
그러나 친일재산과 관련된 소송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이 정당한지 문제가 될 수 있다.
법무부는 과거 대법원이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의 소멸시효 주장을 권리남용으로 판단한 법리를 근거로 환수소송을 진행했다.
2026년 4월의 판결은 이러한 법리와 관련해 법무부가 새롭게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한 사례로 보도되었다.
다만 이 판결이 임선준의 모든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켰다는 의미는 아니다.
해당 소송은 여주시 소재 특정 토지 8필지의 매각대금 약 5,300만 원에 관한 사건이었다.
또한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개인재산에 대해 책임을 물은 것이 아니라, 법률상 친일재산으로 인정되는 재산의 취득 및 처분과 관련된 법적 문제를 다룬 것이다.
역사적 평가
공식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임선준은 대한민국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인물이다.
그의 행적은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등에 수록되어 있다.
특히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제Ⅳ-15권에는 임선준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유서가 실려 있다.
주요 행적은 다음과 같다.
-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에 협력
-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하여 정미칠적의 한 명으로 지목
-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동조
-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수령
- 일본 황태자 환영을 위한 신사회에 참여
- 1908년 일본 소유 군용지·철도용지에 대한 세금 면제
- 의병 관련 피살자 유족에 대한 보상금 지급
- 대동학회 등 친일 성향 단체에 참여
- 1910년 일본 자작 작위 수령
- 1911년 은사공채 5만 원 수령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식민통치에 협력
- 《매일신보》에 한일병합 1주년 축사 게재
- 일본의 공식적인 정치·사회행사에 참여
이러한 행적은 임선준이 단순히 1907년의 조약 체결에 한 차례 협력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고종 강제 퇴위와 내정권 침탈에 협력한 뒤에도 일본에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이후 식민통치 체제에서도 활동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책임이 크다.
내부대신으로서의 책임
임선준의 가장 대표적인 친일 행적은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일이다.
당시 내부대신은 대한제국의 국내 행정을 담당하는 최고 책임자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지방행정과 치안, 행정조직의 운영 등 국가의 독립적인 통치권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임선준은 일본의 내정권 침탈을 위한 조약 체결에 동조했다.
이는 국가의 행정권을 보호해야 할 관료가 그 권한을 외국에 넘기는 데 협력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내부대신이 자기 나라의 내정권을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했으니, 직책의 존재 이유부터 부정한 셈이다.
탁지부대신으로서의 책임
임선준은 1908년 탁지부대신으로 임명된 뒤에도 일본에 유리한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일본 소유 군용지와 철도용지에 대한 세금 면제는 국가의 재정과 일본의 군사적·경제적 이익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조치였다.
그는 또한 의병에게 처단된 인물들의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과 친일 내각의 운영 방향을 보여준다.
물론 개별 정책이 모두 임선준 개인의 독자적인 결정만으로 시행된 것은 아닐 수 있다.
일본의 통감부와 친일 내각 전체의 정치적 결정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임선준이 해당 정책을 담당한 탁지부대신이었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나라의 세금을 관리하는 사람이 일본군의 땅에 세금을 면제해 줬다는 점이 핵심이다.
사돈 관계와 정치적 협력
임선준은 이완용과 사돈 관계였다.
이완용은 을사오적이자 정미칠적이며, 이후 한일병합조약에 직접 서명한 인물이다.
임선준은 이러한 이완용이 이끄는 친일 내각의 내부대신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두 사람은 개인적인 친족 관계뿐 아니라 실제로 일본의 국권 침탈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협력한 관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완용과 사돈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임선준의 정치적 행적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의 친일반민족행위는 구체적인 관직과 정책, 조약 체결에 대한 협력 및 일본의 포상 수령 등을 통해 평가해야 한다.
이완용과 사돈이라는 사실은 흥미로운 배경이지만, 임선준은 자기 이름으로 남긴 매국 행적만으로도 충분히 역사적 책임을 진다.
경제적 혜택과 친일재산
임선준은 일본의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았다.
또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하며 식민통치 체제에서 사회적 지위를 유지했다.
이는 일본이 국권 침탈에 협력한 관료들에게 명예와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면서 이들을 포섭한 사례이다.
특히 2026년에는 그의 후손이 상속받아 매각한 친일재산에 관해 국가가 약 5,300만 원을 반환받도록 하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따라서 임선준의 친일 행적은 역사적 평가에만 머물지 않고 현대 대한민국의 친일재산 환수 문제와도 연결된다.
다만 국가귀속의 대상이 되는 친일재산은 법률이 정한 요건에 따라 판단해야 하며, 임선준의 모든 재산이 자동으로 친일재산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을사오적과 정미칠적의 차이
| 구분 | 을사오적 | 정미칠적 |
|---|---|---|
| 연도 | 1905년 | 1907년 |
| 관련 사건 | 을사늑약 | 정미7조약 |
| 주요 내용 |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 대한제국의 내정권 침탈 |
| 대표 인물 |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이병무, 이재곤, 송병준, 조중응 |
| 임선준 포함 여부 | 포함되지 않음 | 포함됨 |
임선준은 정식 을사오적이 아니다.
을사오적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다섯 대신을 가리킨다.
반면 임선준은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정미칠적 가운데 한 명이다.
따라서 임선준을 을사늑약에 직접 서명한 인물로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또한 1910년 한일병합을 결정한 경술국적 명단에 포함된 인물로 분류하는 것도 일반적인 역사적 분류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의 국권 침탈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1907년 내정권 침탈과 군대 해산, 1910년 한일병합으로 이어지는 여러 단계를 거쳐 진행되었다.
임선준은 이 가운데 1907년의 중요한 국권 침탈 과정에 협력했다.
을사오적 명단에 이름이 없다고 매국노가 아닌 것은 아니다. 이 인간은 1907년에 나라의 내정권을 넘기는 과정에서 역할을 맡았다.
주요 행적 정리
| 연도 | 주요 행적 |
|---|---|
| 1860년 | 음력 12월 17일 한성부에서 출생 |
| 1885년 | 별시 문과 병과 급제 |
| 1886년 | 승정원 주서 천거, 홍문관 본관록·도당록에 이름을 올림 |
| 1890년 | 규장각 직각권, 시강원 사서 |
| 1891년 | 시강원 필선·문학 역임 |
| 1892년 | 성균관 대사성 임명 |
| 1907년 | 성균관장 임명 |
| 1907년 5월 |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 임명 |
| 1907년 7월 | 고종 강제 퇴위에 협력 |
| 1907년 7월 24일 | 정미7조약 체결에 동조, 정미칠적의 한 명으로 지목 |
| 1907년 8월 |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동조 |
| 1907년 10월 | 일본 황태자 환영을 위한 신사회 평의원 |
| 1907년 | 대한제국 훈1등 태극장, 일본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수령 |
| 1908년 | 대동학회 참여 |
| 1908년 5월 | 대한여자흥학회 고문 |
| 1908년 6월 | 탁지부대신 임명 |
| 1908년 | 일본 소유 군용지·철도용지 등에 대한 면세조치 |
| 1908년 | 의병에게 처단된 인물들의 유족에 대한 보상금 지급 |
| 1908년 11월 |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 |
| 1909년 6월 | 승종교회 찬성장 |
| 1910년 10월 7일 |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 수령 |
| 1910년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임명 |
| 1911년 | 은사공채 5만 원 수령 |
| 1911년 8월 29일 | 《매일신보》에 한일병합 1주년 축사 발표 |
| 1915년 | 다이쇼 천황 즉위대례식 참석 |
| 1917년 | 남북 만주 시찰단 환영행사 관련 활동 |
| 1917년 | 불교옹호회 고문 |
| 1919년 2월 21일 | 사망 |
| 1919년 | 아들 임낙호가 자작 작위 승계 |
| 1933년 | 《별건곤》에 임선준의 출세와 몰락을 비판한 회고 기사 게재 |
| 2026년 4월 22일 | 임선준 후손의 친일재산 매각대금 약 5,300만 원 반환 판결 |
여담
- 정미칠적 가운데 한 명이다. 정식 을사오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 본관은 풍천 임씨이며, 자는 치경, 호는 산남과 춘관이다.
- 1860년 음력 12월 17일 출생했으며,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861년 1월 27일이다.
- 아버지는 교관을 지낸 임백희이다.
- 1885년 문과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 성균관 대사성과 성균관장 등을 역임한 전통적인 유교 관료 출신이다.
- 이완용과는 사돈 관계였다. 임선준의 조카딸이 이완용의 장남과 혼인했다.
- 1933년 《별건곤》은 임선준이 이완용과의 사돈 관계를 통해 중앙정계에 복귀했다고 비판했다. 다만 구체적인 인사 개입 경위는 별도 사료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 1907년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이 되었다. 내부대신은 국가의 국내 행정과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중요한 관직이었다.
- 국가의 내정권을 보호해야 할 내부대신이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했다.
-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 정미7조약에 직접 서명한 대표는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였다. 임선준은 친일 내각의 주요 대신으로서 협력한 인물이다.
-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도 동조했다. 다만 군대 해산 명령을 직접 전달한 군부대신은 이병무였다.
- 일본은 이러한 협력을 인정해 임선준에게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수여했다.
- 대한제국에서도 훈1등 태극장을 받았다. 나라의 내정권을 넘기는 데 협력했는데 일본과 대한제국 양쪽에서 훈장을 받은 것이다.
- 1907년 일본 황태자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조직된 신사회에서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 1908년에는 탁지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현대적인 직책으로 비유하면 국가 재정과 조세를 담당하는 장관이었다.
- 탁지부대신 재임 중 일본 소유 군용지와 철도용지에 대한 세금을 면제했다. 일본의 군사시설과 교통시설에 경제적인 혜택을 제공한 것이다.
- 같은 시기 의병에게 처단된 인물들의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 1908년 대동학회에 참여했다. 대동학회는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을 받은 유교계 단체였다.
- 대한여자흥학회 고문과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 등 여러 사회단체의 직책도 맡았다.
- 1909년에는 승종교회의 찬성장으로 위촉되었다.
- 1910년 10월 7일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 1911년에는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았다. 당시 일반적인 노동자나 농민에게는 상당한 거액이었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어 1919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다.
- 1911년 《매일신보》의 한일병합 1주년 특집에 축사를 발표했다. 나라가 망한 날을 축하하는 글을 실은 것이다.
- 1915년에는 일본 다이쇼 천황의 즉위대례식에 조선귀족 자격으로 참석했다.
- 1917년에는 만주 시찰단 환영행사에 관련된 활동을 했으며, 불교옹호회 고문으로도 위촉되었다.
- 1919년 2월 21일 사망했다. 이는 3·1 운동이 일어나기 불과 8일 전이었다.
- 일부 인터넷 자료에서는 사망일을 2월 12일로 기록하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관련 공식 보도에서는 2월 21일로 기재한다.
- 일본의 자작 작위는 아들 임낙호가 승계했다.
- 1933년 잡지 《별건곤》에는 임선준의 출세와 몰락을 비판적으로 회고한 기사가 실렸다.
- 해당 기사는 임선준이 젊었을 때 학문과 예법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이후 재산과 관직을 추구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이는 당시 필자의 인물평으로 구분해야 한다.
- 2026년 4월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임선준의 후손에게 친일재산 매각대금 약 5,300만 원을 국가에 반환하도록 하는 판결을 내렸다.
- 문제가 된 재산은 경기도 여주시 소재 토지 8필지의 매각대금이었다.
- 해당 판결은 후손의 개인적인 정치적 입장을 평가한 것이 아니라 법률상 친일재산에 해당하는 재산의 처분과 반환을 다룬 사건이었다.
- 이완용과 사돈이었고, 이완용 내각에서 내부대신으로 정미7조약에 협력했으며, 탁지부대신이 된 뒤에는 일본 소유 토지에 세금을 면제했다. 나라가 망하자 일본의 자작이 되었고, 5만 원의 은사공채까지 받았다.
- 1907년에 나라의 행정권을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하고, 1908년에는 일본에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1911년에는 한일병합을 축하하는 글을 발표했다. 친일 행적이 아주 일관성 있게 이어진 인물이다.
관련 문서
외부 링크 및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임선준
- 민족문제연구소 -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내정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겨준 정미칠적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 현대사료 DB - 《별건곤》 제66호, 「조선고관성쇠기」(1933년 9월)
- 연합뉴스 - 「'고종 강제퇴위' 임선준 후손에 친일재산 5천300만원 반환 승소」(2026년 4월 24일)
- 파이낸셜뉴스 - 임선준 후손 친일재산 반환 판결(2026년 4월 24일)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 정미칠적 처단 운동 관련 자료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 27결사대 관련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일병합조약
-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5,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임선준 결정이유서, 96~109쪽.
- 《고종실록》.
- 《순종실록》.
- 《조선총독부관보》 1910년 10월 7일, 1910년 10월 12일, 1919년 2월 28일.
- 《대동학회월보》 제1호, 1908년 2월.
- 《대한협회회보》 제3호, 1908년 6월.
- 《조선귀족열전》, 오무라 도모노조, 1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