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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김
본명김봉남(金鳳男)
출생지경기도 고양군
직업패션 디자이너
경력앙드레김 아뜰리에
가족아들 김중도
추가 정보
사망2010년 8월 12일
사망지서울특별시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수상화관문화훈장, 보관문화훈장, 금관문화훈장, 프랑스 예술문학훈장
원어명André Kim
출생1935년 8월 24일

앙드레 김(André Kim, 본명 김봉남(金鳳男), 1935년 8월 24일 ~ 2010년 8월 12일)은 대한민국의 패션 디자이너다. 1962년 남성 디자이너로서는 국내 최초로 패션쇼를 개최하며 데뷔했고, 1966년에는 한국 디자이너 최초로 프랑스 파리에서 패션쇼를 열었다.[1]

순백색 옷과 짙은 화장, 뒤로 넘긴 검은 머리, 영어가 섞인 독특한 말투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는 웬만한 연예인보다 얼굴이 더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이미지 뒤에는 1960년대부터 해외무대를 개척하고 1988 서울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 의상을 디자인했으며, 마이클 잭슨·브룩 실즈 등 해외 스타에게도 의상을 입힌 한국 패션 1세대 거물이 있었다.[1][2]

디자인에서는 흰색과 금색, 한국 전통문양, 자수와 아플리케, 풍성한 실루엣과 웨딩드레스를 즐겨 사용했다. 본인이 즐겨 사용했던 표현대로 판타스틱과 엘레강스를 추구했으며, 패션쇼도 단순히 모델이 걸어 나왔다 들어가는 행사가 아니라 음악·조명·이야기와 스타 모델을 총동원한 공연에 가깝게 만들었다.[1]

1999년 이른바 옷로비 사건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하면서 본명 `김봉남`이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이후 특유의 외모와 말투까지 개그프로그램의 단골 패러디 소재가 됐다.[3] 당시에는 본명 자체를 우스갯거리로 소비하는 분위기 때문에 본인이 큰 상처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 뒤 앙드레 김이라는 사람 자체의 대중적 인지도는 더 높아졌다.

한국 패션사에는 진지하게 이름을 남겼는데 대중문화사에는 흰옷 입고 “판타스틱해요” 하던 아저씨로도 동시에 박혀 있는 존나 희귀한 인물이다.

생애

어린 시절

1935년 당시 경기도 고양 지역에서 농사를 짓던 집안의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4]

현재 서울 은평구 진관동 일대에 해당하는 구파발 지역에서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그림과 외국 영화 속 의상에 관심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 자체가 지금처럼 정착돼 있지 않았고, 특히 남성이 의상을 디자인한다는 개념은 더욱 낯설었다.

국제복장학원

1961년 국내 여성 패션계의 선구자 최경자가 운영하던 서울 명동의 국제복장학원에 1기생으로 입학했다.[1]

이곳에서 약 1년간 패션 디자인을 공부한 뒤 1962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첫 패션쇼를 열었다.

같은 해 서울 소공동에 살롱 드 앙드레라는 의상실을 열고 본격적인 디자이너 생활을 시작했다.[1]

1960년대 초만 해도 남자가 여자 옷을 디자인한다고 하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보는 시대였는데 그냥 무시하고 가게 열어서 결국 대한민국 대표 디자이너가 됐다.

앙드레 김이라는 이름

본명은 김봉남이다.

외국에서도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주변의 권유를 받아 `André`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1]

법적으로 이름을 앙드레 김으로 바꾼 것은 아니며 디자이너로 활동할 때 사용하는 예명이자 브랜드명이었다.

1960년대 대한민국에서 활동명부터 `André Kim`으로 박아버렸으니 당시 기준으로는 브랜딩 감각이 상당히 앞서 있었다.

엄앵란의 웨딩드레스

1964년 당대 최고 스타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식에서 엄앵란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하면서 대중적으로 이름을 크게 알렸다.[1]

당시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은 전국적인 관심을 받은 연예계 대형 이벤트였기 때문에 앙드레 김의 이름 역시 함께 알려졌다.

이후 영화배우와 가수 등 유명 연예인들의 의상을 지속적으로 맡으면서 연예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해외 진출

파리 패션쇼

1966년 프랑스 패션협회의 초청을 받아 파리에서 컬렉션을 열었다.[1]

한국 디자이너가 파리에서 패션쇼를 연 첫 사례로 평가된다.

대한민국이 산업화도 제대로 끝내지 못했던 1966년에 한국 남자가 파리 가서 자기 이름 걸고 패션쇼를 했다는 얘기다. 지금 보면 그냥 해외진출 하나 같지만 당시에는 난이도가 존나 달랐다.

세계 각국의 패션쇼

이후 미국 뉴욕, 일본 도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등 여러 도시에서 패션쇼를 열었다.[5]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관련된 패션쇼에도 참여했으며 이집트 피라미드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같은 유적을 배경으로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5]

2006년 앙코르와트 패션쇼 역시 한국 디자이너로서는 처음 열린 행사였다.[2]

패션쇼 장소를 호텔 연회장에서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피라미드랑 앙코르와트까지 갔다. 무대팀 입장에서 보면 디자이너가 “이번엔 유적지에서 합시다” 할 때마다 존나 긴장됐을 것이다.

디자인

흰색

앙드레 김을 상징하는 색상은 단연 흰색이다.

평소 본인이 입는 옷도 거의 항상 흰색이었으며 작업실과 자동차 등 주변 물건도 흰색을 선호했다.[1]

자신의 의상에서는 한국의 `백의민족` 이미지와 순수함을 흰색으로 표현하려 했다.

현재 앙드레김 아뜰리에 역시 브랜드의 대표 미학을 흰색 바탕과 금색 문양의 조합으로 설명한다.[2]

이 사람이 검은 패딩 입고 길거리 돌아다녔으면 지인들도 못 알아봤을 가능성이 높다. 흰옷이 거의 사람 아이콘 수준이었다.

한국적 문양

전통적인 용문양·궁중문양과 한국적인 선을 서양식 드레스와 결합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국산 소재 위에 자수와 아플리케를 사용해 화려한 표면을 만들었으며 서양의 오트쿠튀르 실루엣과 한국적인 장식을 결합했다.[1]

그의 작품은 유행에 따라 몇 년마다 스타일을 완전히 갈아엎기보다 평생 비슷한 미학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편이었다.

덕분에 앙드레 김 옷은 브랜드 로고가 없어도 아 씨 이거 앙드레 김 냄새 존나 나는데 하고 알아볼 정도로 시각적 정체성이 강했다.

노출을 싫어했다

여성복을 주로 디자인했지만 노출을 강조하는 스타일은 선호하지 않았다.

몸을 직접 많이 드러내기보다 높은 목선과 긴 드레스, 풍성한 실루엣, 장식으로 우아함을 표현하는 방식을 즐겼다.[1]

당시 패션계에서 노출과 섹시함을 앞세운 스타일이 확산된 뒤에도 자기 취향은 거의 바꾸지 않았다.

겹옷 드레스

패션쇼 후반부에는 여러 겹의 천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를 한 겹씩 벗겨내며 새로운 디자인이 나타나는 겹옷 드레스가 자주 등장했다.[1]

한국 여성의 정서와 한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디자인으로 설명되기도 했으며 앙드레 김 쇼의 대표적인 연출이 됐다.

모델이 런웨이 한번 도는 동안 옷이 계속 변한다. 지금 보면 변신코스튬인데 이걸 수십 년 전에 패션쇼에서 계속 해먹었다.

패션쇼

스타 등용문

앙드레 김의 패션쇼는 전문모델뿐 아니라 유명 배우와 가수를 주인공으로 세우는 것으로 유명했다.

김희선, 이영애, 장동건, 최지우, 배용준, 김태희 등 당대 톱스타들이 무대에 올랐고, 연예계에서는 앙드레 김 패션쇼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유명세를 보여주는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6]

앙드레 김은 TV를 여러 대 동시에 보면서 신인 연예인을 관찰하고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을 패션쇼 모델로 발탁하기도 했다.[1]

지금으로 치면 인스타그램 뒤져서 신인 모델 찾는 걸 TV 5대로 했다.

이마 맞대기

패션쇼 피날레에는 남녀 스타 모델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서로 이마를 맞대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다.[6]

이 연출이 워낙 반복되다 보니 한국에서 `앙드레 김 패션쇼` 하면 긴 드레스보다 이마부터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남녀 배우 둘이 이마만 맞댔는데 당시 연예뉴스에서는 거의 결혼식급 그림으로 소비했다.

웨딩 피날레

패션쇼의 마지막은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이용해 사랑과 해피엔딩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1]

단순한 의상 발표보다 하나의 로맨틱 판타지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다는 것이 그의 패션쇼 철학이었다.

유명 인사와 의상

마이클 잭슨

마이클 잭슨도 앙드레 김의 의상을 착용한 해외 유명인 가운데 하나다.

특히 용문양이 들어간 화려한 의상을 선호했다고 전해진다.[1]

현재 앙드레김 아뜰리에도 브랜드 역사에서 마이클 잭슨과의 관계를 주요 사례로 소개한다.[2]

미국 팝의 황제가 한국 디자이너 옷 입고 공식석상 돌아다녔으니 당시 국내 패션계에서는 자랑할 만했다.

해외 스타

배우 나스타샤 킨스키와 브룩 실즈 등도 앙드레 김의 의상을 입었다.[6]

서울올림픽

1988년 1988 서울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대표선수단 선수복을 디자인했다.[1]

패션쇼 의상만 만든 사람이 아니라 국가대표팀 공식 의상까지 디자인한 것이다.

미스 유니버스

1980년 서울에서 열린 미스 유니버스 대회의 주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다.[2]

대중적 이미지

흰 옷과 화장

앙드레 김은 공식석상에서 거의 항상 흰색 의상을 입었고 얼굴에는 짙은 화장을 했다.

독특한 머리모양과 함께 워낙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가 완성돼 실루엣만 보여줘도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브랜드를 사람 몸에 직접 박고 돌아다닌 셈이다.

말투

한국어 사이에 영어 단어를 넣고 천천히 강조하는 특유의 화법도 유명했다.

특히 `판타스틱`, `엘레강스`, `로맨틱` 같은 표현이 방송에서 반복적으로 패러디됐다.

실제 본인은 이러한 말투와 패러디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지나치게 자신을 희화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표현하기도 했다.[7]

예능 단골 소재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코미디 프로그램과 광고에서 앙드레 김을 흉내 내는 캐릭터가 수도 없이 등장했다.

흰색 옷 입고 얼굴 하얗게 칠한 다음 영어 몇 마디 천천히 말하면 앙드레 김 패러디가 완성되는 수준이라 개그맨 입장에서는 가성비가 존나 좋은 캐릭터였다.

다만 이렇게 대중적인 이미지가 강해지면서 젊은 세대에게는 실제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업적보다 `패러디되는 유명 아저씨`라는 이미지가 먼저 자리잡기도 했다.

김봉남

옷로비 사건

1999년 이른바 옷로비 사건과 관련된 국회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했다.

증인석에서 이름을 앙드레 김이라고 말하자 당시 법사위원장이 법적인 본명을 밝힐 것을 요구했고, 이에 김봉남이라고 답한 장면이 TV로 전국에 방송됐다.[3]

당시 `앙드레 김`이라는 세련된 외국식 활동명과 전통적인 한국 이름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중이 본명을 웃음거리로 소비했다.

본인은 이후 부모가 지어준 이름인데 왜 웃음거리가 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상처를 받았다고 밝혔다.[8]

지금 보면 그냥 멀쩡한 한국 이름인데 당시 방송과 신문에서 본명 하나 밝혀졌다고 전국이 뒤집어진 게 오히려 시대 분위기를 보여준다.

사건 이후

옷로비 사건 자체와 별개로 이 장면을 통해 앙드레 김의 얼굴·이름·캐릭터가 패션에 관심 없던 사람에게까지 알려졌다.

이후 광고와 방송출연, 브랜드 라이선스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패션계 밖에서의 대중적 브랜드 가치도 커졌다.[1]

본인 입장에서는 인생에서 가장 불쾌했던 사건 가운데 하나였는데 사업적으로는 역설적으로 이름이 전국민 브랜드가 되는 결과까지 만들어냈다.

브랜드 사업

패션 밖으로 확장

2000년대 들어 `앙드레 김`이라는 이름은 의류를 넘어 다양한 상품에 라이선스됐다.

  • 보석
  • 도자기
  • 속옷
  • 골프웨어
  • 안경
  • 화장품
  • 침구
  • 가전제품
  • 자전거
  • 신용카드 디자인
  • 아파트 인테리어·디자인
  • 영화관 티켓

[1][9]

뭔가에 금색 꽃무늬 있고 `ANDRÉ KIM` 박혀 있으면 일단 상품 하나 나왔다. 옷 만들던 디자이너가 나중에는 카드·자전거·밥그릇까지 디자인했다.

디자인 협업

2008년 한국도자기와 식기제품을 출시했고, 2009년에는 삼천리자전거와 협업해 앙드레 김 브랜드 자전거도 출시했다.[1]

KD 운송그룹 승무원 제복과 대한민국 공군의 빨간 마후라 특별 디자인 등 의외의 분야에도 참여했다.[1]

한국외국어대학교 부설고등학교 교복도 디자인했다.

브랜드 자체가 상품

말년에는 패션디자이너 개인을 넘어 `앙드레 김`이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처럼 운영됐다.

2010년 당시 언론은 각종 라이선스 상품을 포함한 앙드레 김 브랜드의 연간 매출이 1,000억 원대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9]

자선활동

앙드레 김은 패션쇼를 이용한 자선활동도 장기간 진행했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의 문화예술 특별대표로 활동하다 2003년 친선대사로 임명됐으며, 어린이를 위한 자선행사와 기금모금 패션쇼를 여러 차례 열었다.[10]

정부 역시 2010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면서 유니세프 친선대사 활동과 국제백신연구소 기금마련 패션쇼 등 사회공헌 활동을 주요 공적으로 언급했다.[11]

화려하게 돈 쓰는 패션쇼만 한 게 아니라 그 쇼를 그대로 모금행사로 돌리는 데도 꽤 열심이었다.

가족

앙드레 김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1982년 아들 김중도를 입양했다.[6]

아들에게는 상당히 가정적인 아버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2005년에는 쌍둥이 손자를 얻었다.[6]

김중도

앙드레 김 사후 브랜드 경영은 아들 김중도가 이어받았다.

2010년 기존 의상실은 앙드레 김 디자인 아뜰리에라는 법인으로 전환됐고 김중도가 대표이사를 맡았다.[12]

현재도 김중도가 대표를 맡아 ANDRÉ KIM ATELIER를 운영하며 맞춤복과 남성복, 추모 패션쇼 등을 이어가고 있다.[2]

2024년에는 앙드레 김의 디자인을 계승하는 추모 패션쇼 《바람이 되어 만나다》가 열렸다.[2]

디자이너 본인은 2010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브랜드는 아직 살아 있다.

수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1997년 화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8년에는 더 높은 등급인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13]

별세 다음 날인 2010년 8월 13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문화훈장 최고등급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11]

패션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 패션산업 발전과 자선활동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됐다.

해외 훈장

1982년 이탈리아 정부의 문화공로훈장을 받았으며, 2000년에는 프랑스 정부의 예술문학훈장을 받았다.[5]

앙드레 김의 날

199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패션쇼 개최를 기념해 11월 6일을 André Kim's Day로 선포했다.[6]

한 번도 아니고 외국 도시에서 사람 이름으로 기념일을 받아냈다. 흰옷 아저씨 캐릭터만 알고 있으면 이런 경력이 갑자기 튀어나와 당황스럽다.

투병과 사망

앙드레 김은 2005년 대장암과 담석 수술을 받고 이후 항암치료를 받아왔다.[14]

2010년 7월 폐렴 증세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했으며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2010년 8월 12일 오후 7시 25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망했다.[14]

의료진이 밝힌 최종적인 사망 원인은 폐렴 합병증이었다.[15]

사망 직전인 2010년 3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행사에서도 직접 패션쇼 무대에 올랐으며, 입원 직전까지 다음 작품을 준비했다.

향년 표기는 한국식 나이 계산을 사용한 당시 기사에서 75세라고 보도됐지만 만 나이로는 74세였다.

장지는 부모가 안장돼 있던 충청남도 천안의 천안공원묘원으로 정해졌다.

평가

한국 남성 패션디자이너의 선구자

앙드레 김은 한국 최초의 남성 패션디자이너로 평가된다.[1]

1960년대에는 국내 패션산업 자체가 초기 단계였고 여성복 제작은 여성의 영역이라는 사회적 인식도 강했기 때문에 남성 디자이너로 독립적인 의상실을 운영한 것 자체가 새로운 일이었다.

이후 남성 패션디자이너가 자연스러운 직업이 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패션쇼를 대중문화로 만들었다

전문 패션업계 사람들만 찾아오는 컬렉션이 아니라 유명배우·가수, 화려한 조명과 음악, 스토리텔링을 사용해 일반 대중도 관심을 갖는 쇼를 만들었다.

연예인을 패션쇼 주인공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한 방식은 현대적인 스타 마케팅과도 연결된다.

패션에 관심 없는 아저씨도 앙드레 김 패션쇼에서 이마 맞대는 거는 알고 있었으니 대중화 하나는 확실히 성공했다.

작품세계에 대한 평가

패션계에서는 그의 화려하고 낭만적인 디자인이 독창적인 한국적 스타일을 만들었다는 평가와 함께, 시대의 변화와 관계없이 비슷한 미학을 반복했다는 비판도 존재했다.

그러나 유행을 계속 따라가기보다 자신이 정한 흰색·금색·한국적 문양·웨딩 판타지라는 방향을 수십 년 동안 유지했다는 점 자체가 강력한 개인 브랜드를 만드는 원인이 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주제로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들고 패션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한다.[1]

대중 이미지가 본업을 가렸다

1999년 이후에는 말투·화장·본명이 워낙 유명해지면서 디자이너보다 TV에 나오는 특이한 유명인처럼 인식되는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파리 진출, 올림픽 의상, 해외 패션쇼 등 수십 년 경력을 쌓은 상태였다.

패러디로 유명해진 디자이너가 아니라 이미 존나 유명한 디자이너였기 때문에 패러디가 전국적으로 먹힌 것이라는 순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담

거의 항상 흰옷이었다

옷장에는 비슷한 흰색 의상이 수십 벌 있었고 자동차와 작업공간도 흰색을 선호했다고 한다.[1]

디자이너가 매일 다른 옷 입을 것 같지만 본인 옷은 사실상 유니폼처럼 고정돼 있었다.

남들 옷은 수천 가지 디자인하면서 자기는 흰옷 원툴이었다.

술·담배·커피를 하지 않았다

자기관리에 상당히 엄격해 술과 담배는 물론 커피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1]

다른 사람 앞에서 식사하는 모습도 잘 보여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정보수집

사회와 문화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여러 대의 TV를 동시에 켜고 많은 신문을 구독했다고 한다.[1]

TV에서 신인 연예인을 발견하면 패션쇼 모델로 섭외하기도 했다.

지금 시대였으면 유튜브 다섯 창 띄우고 인스타그램 열다섯 계정 돌리고 있었을 인간이다.

본명은 부끄러운 이름이 아니다

`김봉남`이라는 이름은 1999년 청문회 이후 한동안 개그 소재가 됐지만 앙드레 김 본인은 부모가 지어준 소중한 이름이라는 입장을 밝혔다.[8]

`외국식 예명과 토속적인 본명의 대비가 웃기다`는 당시의 감각 자체가 지금 보면 꽤 촌스럽다.

마이 판타지

2002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마이 판타지』를 출간했고, 2010년에는 『앙드레김 My Fantasy』가 출간됐다.[1]

사진

위키에 사진을 사용할 경우 Wikimedia Commons의 `ANDRE KIM.070828.jpg` 파일은 저작권자가 GFDL로 배포한 사진이라 라이선스 조건을 지키면 사용할 수 있다.[16]

주요 연혁

연도 내용
1935 경기도 고양 출생
1961 국제복장학원 1기 입학
1962 반도호텔에서 첫 패션쇼, 살롱 드 앙드레 개업
1964 신성일·엄앵란 결혼식 웨딩드레스 디자인
1966 한국 디자이너 최초 파리 패션쇼
1980 미스 유니버스 대회 주 디자이너
1982 이탈리아 정부 문화공로훈장
1988 서울올림픽 대한민국 대표선수단 선수복 디자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관련 패션쇼
1997 화관문화훈장
1999 옷로비 사건 청문회 출석, 미국 샌프란시스코 `앙드레 김의 날`
2000 프랑스 예술문학훈장, 시드니 올림픽 관련 패션쇼
2003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
2006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패션쇼
2008 보관문화훈장
2010.08.12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망
2010.08.13 금관문화훈장 추서

[5][1][11]

주요 용어

용어 설명
앙드레 김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1세대 패션디자이너.
김봉남 앙드레 김의 본명.
살롱 드 앙드레 1962년 개업한 초기 의상실.
앙드레김 아뜰리에 사후에도 브랜드를 계승하고 있는 패션 브랜드.
김중도 1982년 입양한 아들이자 현재 브랜드 대표.
흰색 본인의 복장과 작품세계 모두를 대표하는 색상.
금관문화훈장 2010년 사후 추서된 대한민국 문화훈장 최고등급.

검색할 때

관련 자료를 찾을 때는 앙드레김, 앙드레 김, André Kim, Andre Kim fashion, 앙드레김 김봉남, 앙드레김 패션쇼, 앙드레김 파리 패션쇼, 앙드레김 마이클 잭슨, 앙드레김 옷로비, 앙드레김 이마, 앙드레김 아뜰리에, 앙드레김 김중도 등의 검색어를 함께 사용하면 좋다. 오래된 기사에서는 `앙드레김`처럼 성과 이름을 붙여 적는 경우도 많으므로 띄어쓰기 두 형태를 모두 검색하는 편이 낫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