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만약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 같이 떠들 사람? 노바위키 디스코드

이 문서는 고인에 대해 다룹니다.
이 문서의 대상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1883년 4월 30일(1883-04-30)부로 고인이 되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생년월일 1832년 1월 23일
사망일 1883년 4월 30일
국적 프랑스
출생지 프랑스 왕국 파리
직업 화가, 판화가
활동기간 1850년대~1883년
장르 사실주의, 근대 회화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년 1월 23일 ~ 1883년 4월 30일)는 프랑스의 화가로, 19세기 중반의 전통적인 회화와 인상주의를 비롯한 현대미술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기존의 역사화와 신화화에서 사용하던 구도와 표현방식을 당대의 인물과 일상생활에 적용했으며, 평평한 색면과 분명한 명암 대비, 자유로운 붓질을 통해 근대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대표작으로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 《피리 부는 소년》,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등이 있다.[1]

마네는 클로드 모네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드가 드가, 베르트 모리조 등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화풍에도 변화를 주었다. 그러나 마네 자신은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열린 여덟 차례의 인상주의 그룹 전시회에 단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공식 살롱전의 권위를 비판하면서도 그 제도 안에서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상주의의 중요한 선구자이자 관련 화가로 다루어지지만, 인상주의 그룹의 정식 전시 참가자들과는 구분된다.[2]

마네의 작품이 처음부터 아름답고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1863년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낙선전에 출품됐을 때에는 옷을 입은 남성들 사이에 나체의 여성이 앉아 있다는 이유로 논란을 일으켰고, 1865년 《올랭피아》가 살롱전에 등장하자 당시 비평가와 관객들은 작품의 주제와 표현방식을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작품들이 이후에는 근대미술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다뤄지게 됐다.

“신화 속 여신이 벗고 있으면 고상한 예술인데, 파리에 사는 평범한 여성이 옷을 벗고 있으면 왜 문제가 되는가?” 마네의 작품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누드를 그려도 되는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기존 회화가 인물을 아름답게 이상화하는 방식과 관람객이 여성·계급·현대사회를 바라보는 태도까지 연결된 문제였다.

생애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화가

마네는 1832년 1월 23일 파리의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귀스트 마네는 법무부의 고위 관리였으며, 어머니 외제니데지레 푸르니에는 외교관 가문 출신이었다. 부모는 아들이 법조계나 해군 등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를 바랐지만, 마네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관심을 보였다.

마네는 해군사관학교 진학을 시도했으나 입학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 1848년에는 해군 훈련선에 승선해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를 방문했지만, 귀국 후에도 해군사관학교 입학에 실패했다. 결국 가족은 그가 화가의 길을 걷는 것을 허락했다.[3]

1850년부터 마네는 역사화가 토마 쿠튀르(Thomas Couture)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쿠튀르는 전통적인 미술교육을 받은 화가였지만, 마네는 스승의 작업방식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옛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고 네덜란드·이탈리아·독일 등 여러 나라의 미술관을 방문하면서 자신의 표현방식을 발전시켰다.

특히 디에고 벨라스케스프란시스코 고야, 티치아노 베첼리오 등 옛 거장들의 회화는 마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를 무시하거나 과거의 미술을 공부하지 않은 화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과거의 유명한 작품에서 구도와 표현방식을 가져온 뒤 그 안의 인물을 자신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로 바꾸는 실험을 즐겼다.

옛날 그림을 몰라서 전통을 깨뜨린 게 아니라, 옛날 그림을 열심히 공부하고 나서 자기 시대에 맞게 다시 그린 사람에 가까웠다.

살롱전과 첫 번째 성공

19세기 프랑스 미술계에서 화가가 이름을 알리는 가장 중요한 통로는 국가가 후원하는 공식 전시회인 살롱전(Salon)이었다. 작품을 출품하면 심사위원단이 전시 여부를 결정했고, 여기에서 상을 받거나 좋은 평가를 얻으면 화가의 명성과 판매 기회가 높아졌다.

마네 역시 살롱전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으려 했다. 1859년에는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을 출품했으나 낙선했고, 1861년에는 《스페인 가수》와 부모의 초상화를 출품해 처음으로 살롱전에 입선했다. 특히 《스페인 가수》는 좋은 평가를 받아 장려상을 받았다.[4]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네는 점차 기존의 미술계가 기대하는 주제와 표현방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1863년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발표하면서 커다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낙선전

1863년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Le Déjeuner sur l'herbe)를 공식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심사에서 탈락했다. 같은 해에는 살롱전에서 탈락한 작품이 지나치게 많아 논란이 발생했고, 나폴레옹 3세의 결정으로 낙선작을 별도로 전시하는 낙선전(Salon des Refusés)이 열렸다.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당시 《목욕》이라는 제목으로 낙선전에 전시했다. 작품에는 옷을 입은 두 남성과 나체의 여성이 풀밭에 앉아 있고, 뒤쪽에는 물가에 서 있는 또 다른 여성이 등장한다. 마네는 라파엘로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판화와 티치아노의 《전원의 합주》 등 고전 회화에서 구도의 영향을 받았다.[5]

문제는 고전적인 그림에서 사용하던 구도와 누드의 표현을 19세기 파리의 현대적인 인물들에게 적용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관객들은 신화 속 여신이나 고대의 인물을 표현한 누드화에는 익숙했지만, 옷을 입은 현대적인 남성들과 함께 앉아 관람객을 바라보는 나체의 여성이 등장하는 그림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작품의 표현방식도 논쟁을 일으켰다. 인물과 배경이 기존의 아카데미 회화처럼 부드럽게 연결되지 않고, 여성의 피부와 옷을 입은 남성들 사이에는 강한 색채 대비가 나타난다. 배경의 원근법도 일관되게 처리되지 않아 뒤쪽 인물이 실제 공간에 비해 크게 보인다.

당시 비평가들은 이러한 표현을 부자연스럽거나 미완성된 그림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마네는 이후에도 현대적인 인물과 전통적인 회화의 구도를 결합하는 방식을 계속 발전시켰다.

《올랭피아》와 두 번째 논란

마네는 1863년 《올랭피아》(Olympia)를 제작했고, 이 작품은 1865년 살롱전에 출품되면서 다시 한번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그림에는 침대에 누워 관람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나체의 여성과 꽃다발을 들고 있는 흑인 하녀, 침대 끝에 서 있는 검은 고양이가 등장한다.

이 작품의 구도는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연결된다. 그러나 마네는 고대 신화의 여신처럼 이상화된 여성이 아니라 당시 파리에 살고 있을 법한 현대적인 여성을 그렸다. 올랭피아라는 이름과 꽃다발, 여성의 자세와 시선 등은 당시 관객에게 매춘과 관련된 이미지를 연상시켰다.[6]

특히 올랭피아는 관람객의 시선을 피하거나 수동적으로 누워 있지 않고 정면을 바라본다. 누드화를 감상하는 관람객이 그림 속의 여성을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관계가 흔들리는 것이다. 마네는 부드러운 명암으로 여성의 피부를 이상화하는 대신 밝고 어두운 색을 분명하게 대비시켰다.

당시 관객과 비평가들은 작품의 주제와 여성의 모습, 마네의 거친 표현방식을 비판했다. 일부는 작품이 도덕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주장했고, 다른 사람들은 전통적인 누드화와 비교해 인체의 표현이 아름답지 않다고 평가했다. 반면 작가 에밀 졸라 등은 마네가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회화를 발전시키고 있다고 옹호했다.

신화 속 비너스를 그린 줄 알았더니 관람객을 빤히 쳐다보는 현대 파리의 여성을 그려놓은 것이다. 당시 미술계가 어떤 표현을 고상한 예술로 인정하고 어떤 표현을 불편하게 받아들였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올랭피아》에 등장하는 흑인 여성 역시 오늘날 중요한 연구대상이다. 오랫동안 미술사에서는 화면 중앙의 백인 여성과 누드 표현을 중심으로 작품을 설명했지만, 최근에는 흑인 하녀의 존재와 당대 프랑스의 인종·계급 관계, 작품 속에서 두 여성이 표현되는 방식도 함께 살펴보고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과의 관계

인상주의의 선구자

마네는 1860년대부터 파리의 예술가·작가·비평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특히 바티뇰 지역의 카페 게르부아에는 마네와 클로드 모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드가 드가, 에밀 졸라 등이 모여 미술과 문학, 당대 사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러한 모임은 훗날 인상주의를 형성하는 화가들이 교류하는 장소 가운데 하나였다. 마네는 기존 회화의 소재와 표현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그림을 그리려는 젊은 화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 역시 이들의 작품에서 야외 풍경과 밝은 색채, 자유로운 붓질 등을 받아들였다.

특히 모네와 마네의 관계는 이름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더욱 자주 언급된다. 두 화가는 실제로 서로 알고 지냈으며, 마네는 모네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다.

다만 마네가 모네의 스승이었고 모네가 그대로 마네의 화풍을 이어받았다는 식으로 설명하면 정확하지 않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작품세계를 발전시켰고, 특히 풍경과 자연의 빛을 탐구하는 방식에서는 모네의 독자적인 역할이 컸다.

인상주의 전시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1874년 모네와 르누아르, 드가, 피사로, 모리조 등 여러 화가는 파리에서 첫 번째 독립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는 이후 인상주의라는 명칭이 형성되는 계기가 됐으며, 1886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의 그룹 전시회가 개최됐다.

그러나 마네는 이 전시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는 공식 살롱전의 보수적인 심사방식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살롱전 자체를 떠나 별도의 예술운동에 참여하기보다는 공식 미술계 안에서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으려 했다.[7]

그렇다고 마네가 인상주의 화가들과 사이가 나빴거나 그들의 작품을 전부 부정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여러 인상주의 화가와 교류했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밝은 색채를 사용하는 등 인상주의와 연결되는 표현방식도 발전시켰다.

따라서 마네는 일반적으로 인상주의의 선구자이자 현대회화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든 화가로 설명된다. 인상주의 화가들과 함께 묶어 소개되는 경우가 많지만, 공식적인 인상주의 그룹 전시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베르트 모리조와의 관계

베르트 모리조는 인상주의 그룹의 창립 구성원 가운데 한 명으로, 마네와 가까이 교류한 화가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마네는 모리조를 모델로 여러 초상화를 제작했다.

특히 1868년부터 1869년 사이에 제작된 《발코니》에는 모리조가 등장하며, 1872년의 《제비꽃을 단 베르트 모리조》에서는 검은 옷을 입고 관람객을 바라보는 모리조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1874년 모리조는 마네의 동생 외젠 마네와 결혼하면서 두 사람은 가족관계로도 연결됐다. 그러나 모리조를 단순히 마네의 모델이나 가족으로만 소개해서는 안 된다. 그는 독자적인 화풍을 발전시킨 주요 인상주의 화가였으며, 마네와의 관계와 별개로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주요 작품

《풀밭 위의 점심 식사》

《풀밭 위의 점심 식사》(Le Déjeuner sur l'herbe, 1863)는 마네의 가장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다. 옷을 입은 두 남성과 나체의 여성, 뒤쪽에서 물가에 서 있는 또 다른 여성을 묘사한 그림으로, 1863년 낙선전에 전시되어 논란을 일으켰다.

이 그림의 구도는 르네상스 회화와 판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등장인물은 고대의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현대적인 옷을 입은 남성과 실제 여성 모델이다. 그림 속 남성들이 자연스럽게 앉아 있는 반면 여성이 옷을 벗고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은 당시 관객에게 불편하고 도발적인 장면으로 받아들여졌다.

작품은 오늘날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올랭피아》

《올랭피아》(Olympia, 1863)는 1865년 살롱전에 전시된 작품으로, 침대 위에 누운 여성과 흑인 하녀, 검은 고양이를 묘사한다. 고전적인 누드화의 구도를 활용하면서도 현대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전통적인 미의 기준과 관람객의 시선을 둘러싼 논쟁을 일으켰다.

작품의 모델은 빅토린 뫼랑(Victorine Meurent)으로,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도 등장한 인물이다. 뫼랑은 단순히 마네의 모델로만 활동했던 사람이 아니라 자신도 그림을 그렸으며, 1876년부터 공식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한 화가이기도 했다.[8]

《올랭피아》는 마네가 사망한 뒤에도 한동안 국가 미술관에 소장되지 않았다. 1890년 모네는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모금운동을 추진해 작품을 구입한 뒤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도록 했다. 이후 작품은 국가미술관에 소장됐으며 현재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9]

《피리 부는 소년》

《피리 부는 소년》(Le Fifre, 1866)은 군복을 입고 피리를 부는 소년을 묘사한 작품이다. 인물은 단순한 배경 앞에 서 있으며, 화면에는 기존의 사실적인 회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복잡한 원근법이나 풍부한 명암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붉은 바지와 검은 상의, 하얀 장식이 강한 대비를 이루고, 소년의 발 아래에는 최소한의 그림자만 나타난다. 마네는 인물의 형태를 복잡한 배경과 연결하기보다 평평한 화면 위에 분명한 색채와 윤곽으로 표현했다.

1866년 살롱전에서는 낙선했지만 이후 마네의 독자적인 인물표현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알려졌다. 작품은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L'Exécution de Maximilien)은 1867년 멕시코의 막시밀리아노 1세가 처형된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지원했던 멕시코 제2제국이 붕괴한 뒤 막시밀리아노와 두 장군이 총살당했으며, 마네는 이 사건을 여러 점의 회화와 판화로 표현했다.[10]

이 작품은 마네가 현대의 정치적 사건을 대형 역사화의 소재로 다룬 대표적인 사례다. 총을 겨누는 병사들과 처형당하는 인물들이 화면을 가로질러 배치되어 있으며,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비교되기도 한다.

마네는 사건을 여러 차례 수정해 그렸으며, 현재 보스턴 미술관과 런던 내셔널 갤러리, 독일 만하임 미술관 등에 서로 다른 판본과 관련 작품이 남아 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멕시코 개입과 막시밀리아노의 처형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에 작품과 관련 판화의 공개에도 제약이 가해졌다.[11]

《에밀 졸라의 초상》

《에밀 졸라의 초상》(Portrait d'Émile Zola, 1868)은 소설가 에밀 졸라를 그린 작품이다. 졸라는 《올랭피아》를 비롯한 마네의 작품을 옹호했던 작가로, 마네는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그림 속 졸라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들고 있으며, 뒤쪽에는 《올랭피아》의 복제 이미지와 스페인 회화의 판화, 일본 판화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마네와 졸라가 관심을 가졌던 문학과 미술, 서로 다른 문화의 시각적 표현을 함께 보여준다.[12]

특히 일본 판화가 화면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당시 프랑스 예술계에 확산되던 자포니슴과도 연결되는 작품이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Un bar aux Folies Bergère, 1882)은 마네가 생전에 완성한 마지막 주요 작품 가운데 하나다. 파리의 유명한 공연장 폴리 베르제르에서 일하는 바텐더를 묘사한 그림으로, 여성의 뒤쪽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어 공연장의 관객과 화려한 실내공간이 비친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여성의 정면 모습과 거울에 비친 뒷모습의 위치가 직관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거울 속에는 한 남성 고객과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의 모습이 나타나지만, 실제 여성은 정면을 바라보며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공간구성은 여러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단순히 거울과 원근법을 잘못 묘사했다는 설명도 가능하지만, 마네가 관람객의 위치와 거울 속 공간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구성했다고 이해하는 미술사적 해석도 존재한다. 작품을 소장한 코톨드 갤러리는 거울에 비친 인물과 병의 위치가 실제 공간과 어긋나도록 구성된 점을 작품의 중요한 특징으로 설명하고 있다.[13]

이 작품은 1882년 살롱전에 출품됐으며, 현재 영국 런던의 코톨드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화풍과 표현방식

평평한 색면과 명암 대비

마네의 회화에서는 전통적인 아카데미 회화에서 강조하던 부드러운 명암의 연결보다 밝고 어두운 색채의 분명한 대비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인물의 피부와 의복, 배경을 세밀한 명암으로 연결하기보다 비교적 넓은 색면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올랭피아》에서는 여성의 밝은 피부와 어두운 배경이 강하게 대비되고, 《피리 부는 소년》에서는 단순한 회색 배경 위에 붉은 바지와 검은 상의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표현은 사물과 인체가 실제 공간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전통적인 회화의 깊이감을 약화시키고, 관람객이 그림의 평평한 화면과 색채를 직접 인식하도록 만든다.

다만 마네가 언제나 평평하고 단순한 형태만 그린 것은 아니다. 초기의 어두운 인물화와 후기의 밝고 자유로운 풍경화는 서로 다르며, 작품의 소재와 시기에 따라 화풍에도 변화가 있었다.

현대적인 소재

마네는 당대 파리의 거리와 술집, 공연장과 카페, 현대적인 의복을 입은 인물들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고전적인 회화의 구도를 활용하면서도 그림 속 인물을 자신과 같은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로 바꿨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러한 작품들은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변화와도 연결된다. 파리는 도시개조와 산업화, 상업시설의 확장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소비문화와 대중오락, 도시인의 생활이 발전하고 있었다.

마네는 이러한 환경을 고전적인 신화나 역사적 사건의 배경으로 바꾸지 않고 현대적인 도시 자체를 그림의 소재로 다뤘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에서 실제 상표가 보이는 맥주병과 공연장 관객을 묘사한 것은 이러한 관심을 보여준다.

고전 회화와의 관계

마네가 새로운 회화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해서 그가 전통적인 미술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유명한 작품들을 공부했고, 그 구도와 표현방식을 자신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고전 회화와 판화에서 구도의 영향을 받았으며, 《올랭피아》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연결된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은 고야의 역사화와 비교되며, 초기의 인물화에서는 스페인 회화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마네의 작품은 단순히 “옛날 그림은 다 틀렸으니까 새로 그리자”는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 과거의 회화가 가지고 있던 형식과 주제를 자신의 시대에 맞게 바꾸면서 기존 미술제도의 관습에 도전한 것이다.

말년과 죽음

마네는 1870년대 후반부터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다리 통증과 보행장애 등을 겪었으며, 1880년대에는 병세가 더욱 심해졌다. 그럼에도 초상화와 정물화·파스텔 작업을 계속했고, 1882년에는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을 살롱전에 출품했다.

1881년에는 살롱전에서 상을 받았고, 같은 해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오랫동안 공식 살롱전에서 낙선과 비판을 경험했지만 생애의 마지막에는 국가적 예술제도 안에서도 일정한 인정을 받은 셈이다.[14]

1883년에는 다리의 병세가 악화되어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수술 이후에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고, 같은 해 4월 30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향년 51세.

마네가 사망한 뒤 1884년 파리의 국립미술학교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생전에는 기존의 미술제도와 끊임없이 충돌했던 그의 작품이 사후에는 근대회화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영향과 평가

마네는 전통적인 회화와 근대 회화 사이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기존 회화의 구도와 형식을 활용하면서도 현대적인 인물을 등장시키고, 평평한 색면과 분명한 명암 대비, 자유로운 붓질을 통해 현실을 표현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특히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는 관람객이 누드화와 인물화에서 어떤 표현을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는지를 질문하게 만든다. 고전적인 신화화에서 익숙하게 사용되던 구도를 당대의 현실적인 인물에게 적용하자 작품의 의미와 관람객의 반응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마네는 이후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그 자신은 공식 살롱전에서 작품을 인정받으려는 태도를 유지했다. 또한 빛과 색채의 순간적인 변화뿐 아니라 현대적인 도시생활과 고전 회화의 재해석, 역사적 사건 등을 폭넓게 다뤘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인상주의 하나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의 작업은 이후 폴 세잔파블로 피카소 등 여러 화가의 작품에서도 새롭게 해석됐다. 특히 피카소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바탕으로 여러 회화와 드로잉을 제작했으며, 마네의 작품은 20세기 미술에서 고전적인 이미지가 어떻게 다시 활용되고 변형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됐다.

여담

  • 이름은 에두아르 마네이며, 클로드 모네와는 다른 사람이다.
  • 모네보다 여덟 살 연상이다.
  • 두 사람은 실제로 교류했고 서로의 작품에도 영향을 주고받았다.
  • 마네의 이름 때문에 마네와 모네를 같은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꽤 있다.
  • 1832년 파리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는 법무부의 고위 관리였다.
  • 가족은 마네가 법조계나 해군 등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를 바랐다.
  •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두 차례 실패한 뒤 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
  • 젊은 시절 루브르 박물관에서 옛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공부했다.
  •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프란시스코 고야의 영향을 받았다.
  • 1861년 《스페인 가수》를 살롱전에 출품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1863년 공식 살롱전에서 낙선했지만 같은 해 낙선전에 전시됐다.
  • 《올랭피아》는 1863년에 제작됐으며, 1865년 살롱전에 출품됐다. 제작연도와 전시연도가 다르다.
  •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에서 여성 모델로 등장한 빅토린 뫼랑은 자신도 화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 에밀 졸라는 마네의 작품을 옹호했으며, 마네는 1868년 졸라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 베르트 모리조와 가까이 교류했으며 그의 초상화를 여러 점 제작했다.
  • 모리조는 1874년 마네의 동생 외젠과 결혼했다.
  • 마네는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인상주의 그룹 전시회에는 단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 마네가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상주의 화가들을 싫어했다는 뜻이 아니다.
  •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은 멕시코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에서는 거울 속 인물과 실제 인물의 위치가 어긋나 있어 관람객의 공간감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 1881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 1883년 다리 절단 수술을 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 마네가 사망한 뒤 모네는 《올랭피아》를 프랑스 국가미술관에 기증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추진했다.
  • 현재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는 모두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은 런던의 코톨드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 당대에는 그림을 이상하게 그린다고 욕먹었는데 오늘날에는 기존 회화의 규칙을 바꾼 사람으로 소개된다. 게다가 정작 본인은 공식 살롱전에서 인정받기를 원했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주요 작품

  •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858~1859)
  • 《스페인 가수》 (1860)
  •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3)
  • 《올랭피아》 (1863)
  • 《피리 부는 소년》 (1866)
  •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867~1869)
  • 《에밀 졸라의 초상》 (1868)
  • 《발코니》 (1868~1869)
  • 《생라자르역》 (1873)
  • 《아르장퇴유》 (1874)
  • 《제비꽃을 단 베르트 모리조》 (1872)
  •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1882)

같이 보기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