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거인 사건(王巨仁事件)은 888년 신라 제51대 국왕 진성여왕 재위 2년에 신라 조정의 정치를 비판하는 익명의 글이 등장하자, 조정이 문인 왕거인을 작성자로 지목하여 투옥한 사건이다. 왕거인 투옥 사건, 왕거인 필화 사건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당시 신라는 왕실 측근들의 권력 독점과 정치적 혼란으로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 조정을 비방하는 글이 나타나자 진성여왕은 작성자를 찾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범인을 찾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대야주에 은거하던 문인 왕거인을 의심하여 체포했다.
왕거인은 옥중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를 지었으며, 그날 저녁 천둥과 우박이 쏟아지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자 진성여왕이 두려워 그를 석방했다고 전한다.
이 사건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 말기의 정치적 혼란과 지식인들의 체제 비판, 국왕과 측근세력에 대한 불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 왕거인 사건(王巨仁事件) | |
|---|---|
| 발생 시기 | 888년(진성여왕 2년, 《삼국사기》 기준) |
| 발생 국가 | 신라 |
| 주요 장소 | 왕경 서라벌, 대야주 |
| 관련 국왕 | 진성여왕 |
| 주요 인물 | 왕거인 |
| 관련 인물 | 위홍, 부호부인 |
| 사건의 발단 | 신라 조정의 정치를 비판하는 익명 문서 등장 |
| 비방문의 형식 | 다라니를 흉내 낸 은어 형식(《삼국유사》 기록) |
| 주요 내용 | 국왕과 측근들의 정치적 부패 및 권력 독점 비판 |
| 전개 | 익명 비방문 등장 → 왕거인 지목 → 투옥 → 옥중 시 작성 → 석방 |
| 결과 | 왕거인 석방, 실제 작성자 불명 |
| 주요 사료 | 《삼국사기》 신라본기, 《삼국유사》 기이편 |
| 역사적 의의 | 신라 하대의 정치적 혼란과 지식인층의 불만을 보여주는 사건 |
개요
신라판 익명 정치 풍자문 사건. 그런데 범인이 누군지 모르겠으니 글 좀 쓸 줄 안다는 사람을 잡아다가 사형시키려 했던 사건이다.
888년 진성여왕 재위 당시 신라는 정치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여왕을 보좌하며 국정을 운영하던 위홍이 사망한 이후 왕실 내부의 권력구조가 흔들리고 있었으며, 국왕의 측근들이 권력을 독점한다는 비판도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라 조정으로 향하는 길목에 정치를 비방하는 글이 등장했다.
단순히 국왕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내용이 아니라,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저주하면서 여왕과 그 측근들을 직접 비판하는 상당히 과격한 글이었다.
특히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글은 불교의 다라니를 흉내 낸 암호 같은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문제의 글은 다음과 같다.
| “ |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 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 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하 |
” |
얼핏 보면 불경에 등장하는 주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왕과 측근들의 실정을 비판하고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1,100년도 더 전에 신라 사람들이 이미 정치인을 비꼬는 암호문을 만들어 유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진성여왕과 측근들은 격분했다.
여왕은 글을 작성한 사람을 찾아내도록 명령했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범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여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 “ |
이것은 반드시 뜻을 이루지 못한 문인의 소행일 것입니다. 아마도 대야주에 은거하는 거인일 것입니다. |
” |
근거는?
없었다.
적어도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왕거인이 실제로 그 글을 작성했다는 증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글을 잘 쓰는 사람 가운데 조정에 불만이 있을 만한 인물을 지목한 것이었다.
그런데 진성여왕은 이 말을 듣고 왕거인을 체포하여 수도의 감옥에 가두었다.
심지어 그를 처형하려 했다.
익명으로 정치 풍자문을 올렸는데 범인을 못 찾으니까 평소 글 좀 쓰던 사람을 잡아다가 사형시키려 한 셈이다. 당시 신라에는 IP 추적 기능도 없었으니 그냥 의심스러운 사람부터 잡아온 모양이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왕거인은 자신의 심정을 담은 한시를 감옥 벽에 적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저녁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고 천둥과 우박이 쏟아졌다고 한다.
진성여왕은 이 현상을 하늘이 왕거인의 억울함에 반응한 것으로 두려워하여 그를 석방했다.
증거도 없이 사형시키려다가 천둥이 치자 무서워서 풀어준 것이다.
판결은 사람이 내렸는데 최종 항소심은 하늘에서 열린 셈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를 실제 기상현상과 신의 존재가 직접 연결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건이 신라 말기 국왕과 측근세력에 대한 불만, 정치적 비판을 억압하려는 움직임, 지식인층의 저항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전해졌다는 점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배경
신라 하대의 정치적 혼란
9세기 후반의 신라는 이미 오랜 기간의 정치적 혼란으로 국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780년 혜공왕이 반란 과정에서 살해된 이후 신라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귀족들의 권력 다툼이 반복되었다.
특히 진골 귀족들이 왕권을 놓고 경쟁하면서 중앙정부의 정치적 안정성은 크게 약화되었다.
귀족들은 사병과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정치에 개입했으며, 국왕의 권위 역시 여러 차례 도전을 받았다.
822년에는 김헌창이 왕위 계승 문제에 불만을 품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건들은 신라의 중앙집권체제가 이미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은 왕실 내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지방에서는 귀족과 사원들의 토지 겸병이 확대되고, 국가의 조세제도가 점차 불안정해졌다.
일부 농민들은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고 고향을 떠났으며, 지방의 유력자들이 독자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경주의 귀족들은 계속 권력을 놓고 싸우고 있었지만, 정작 지방에서는 신라 조정의 명령이 점점 먹히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본사에서는 임원들끼리 사장 자리를 놓고 싸우고 있는데 지방 지사들은 이미 본사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진성여왕이 즉위했다.
진성여왕의 즉위
887년 신라 제50대 국왕 정강왕이 사망하자 그의 여동생 진성여왕이 즉위했다.
진성여왕은 경문왕의 딸이며, 헌강왕과 정강왕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 이어 신라 역사상 세 번째 여왕이었다.
진성여왕은 즉위 초기에 민심을 수습하려는 조치를 취했다.
전국의 주와 군에서 일정 기간 조세를 면제하도록 했으며, 죄인들을 사면하고 불교 행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 지방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완화하고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이해된다.
따라서 진성여왕이 처음부터 아무런 정치적 노력도 하지 않은 국왕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문제는 신라가 이미 오랫동안 누적된 정치적·사회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진성여왕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위홍이 사망하면서 왕실 내부의 권력구조까지 흔들리게 되었다.
위홍과 왕실 측근 정치
위홍은 경문왕의 동생이자 진성여왕의 숙부로, 신라 하대의 중요한 정치적 실력자였다.
그는 상대등을 비롯한 고위 관직을 지냈으며, 경문왕과 헌강왕·정강왕 시대에 걸쳐 중앙정치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진성여왕이 즉위한 이후에도 위홍은 여왕을 보좌하며 국정을 운영했다.
그는 정치적인 역할뿐 아니라 문화적인 사업에도 참여했다.
888년에는 대구화상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여 《삼대목》을 편찬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위홍은 같은 해 사망했다.
《삼국사기》는 위홍의 사망 이후 진성여왕이 젊고 용모가 뛰어난 남성 두세 명을 가까이하고 이들에게 중요한 관직을 맡겼다고 기록했다.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아첨하는 사람들이 총애를 받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며 상벌이 공정하지 못해졌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러한 기록은 후대 사서에 나타나는 당시 정치에 대한 평가이므로, 여왕의 사생활과 측근들의 행동을 모두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여성 국왕의 사생활을 강조하여 정치적 실패의 원인을 설명하는 서술에는 후대의 도덕적 평가가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록을 통해 당시 왕실 측근들의 권력 행사에 상당한 불만이 제기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1]
6두품 지식인들의 불만
왕거인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골품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의 정치적 지배층은 신분에 따라 관직 진출과 승진에 제한을 받았다.
특히 진골 귀족들은 최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6두품 출신의 지식인들은 학문적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신분에 따른 승진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9세기 후반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식인들과 유교적 정치이념을 가진 문인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관료로 활동할 정도로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라에서는 골품제와 진골 귀족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충분히 실현하기 어려웠다.
왕거인 역시 이러한 6두품 지식인층에 속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가 진골의 주요 성씨인 김씨나 박씨가 아니라 왕씨였으며, 중앙정치에서 벗어나 대야주에 은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러한 해석의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왕거인의 정확한 골품은 사료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왕거인이 6두품 출신이었다는 설명은 유력한 학설 가운데 하나이지 확정된 사실은 아니다.
만약 왕거인이 실제로 6두품 출신이었다면, 그의 사건은 신라 말기 진골 중심의 정치체제에 불만을 가진 지식인들이 국왕과 측근세력을 비판하던 상황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다.[2]
사건의 전개
익명의 비방문 등장
888년 신라 조정으로 향하는 길목에 정치를 비방하는 글이 등장했다.
《삼국사기》는 글을 작성한 사람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글의 구체적인 내용 역시 《삼국사기》에는 실려 있지 않다.
다만 당시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국왕과 측근들의 정치 운영에 공개적인 불만을 표시한 사건이었다.
당시 신라에서는 국왕이 국가의 최고 통치자였으며, 왕실과 고위 귀족들은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왕과 측근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글이 유포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상당히 심각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더구나 비방문의 작성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익명의 글 한 장이 신라 조정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누군가가 익명으로 정치 풍자문을 작성해서 길거리에 붙여 놓았는데, 조정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범인 색출 실패
비방문을 확인한 진성여왕은 작성자를 찾아내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조사에도 불구하고 작성자를 찾지 못했다.
당시에는 현대적인 수사기법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글의 필적이나 작성 경위를 조사할 수 있는 방법도 제한적이었다.
결국 비방문의 작성자를 밝혀낼 직접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여왕에게 비방문의 작성자는 뜻을 이루지 못한 문인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대야주에 은거하던 왕거인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가 실제로 비방문을 작성했다는 증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었다.
기록상으로는 단지 글을 작성할 능력이 있으며 정치적으로 불만을 가졌을 만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지목된 것이었다.
글을 잘 쓰는 데다 조정에 불만이 있을 법하다는 이유로 범인으로 몰린 것이다.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정치인을 욕했는데, 평소 글 좀 잘 쓰고 조정에 불만이 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잡아온 셈이다.
왕거인의 체포와 투옥
진성여왕은 왕거인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왕거인은 대야주에 은거하고 있었지만, 결국 체포되어 왕경의 감옥에 갇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조정은 그를 처형하려 했다.
그러나 왕거인이 실제로 비방문을 작성했다는 증거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왕거인이 조사 과정에서 범행을 인정했거나 다른 사람의 이름을 밝혔다는 내용도 없다.
따라서 그의 투옥은 명확한 범죄 사실이 확인되었다기보다 정치적 의심에 따른 처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사료가 짧기 때문에 당시 어떠한 심문이나 재판 절차가 있었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거인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를 지었다.
옥중 시 작성
왕거인은 감옥 벽에 한시를 적었다.
《삼국사기》에 실린 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 “ |
于公慟哭三年旱 鄒衍含悲五月霜 今我幽愁還似古 皇天無語但蒼蒼 |
” |
이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 “ |
우공이 통곡하자 3년 동안 가물었고, 추연이 슬픔을 품으니 5월에도 서리가 내렸네. 지금 나의 깊은 근심도 옛사람들과 같건만, 하늘은 말이 없고 다만 푸르기만 하구나. |
” |
이 시는 왕거인이 자신을 억울하게 누명을 쓴 중국 고대의 인물들과 비교한 내용이다.
우공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을 구하려 했던 중국 한나라 시대의 관리였으며, 추연은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억울하게 옥에 갇히자 한여름에도 서리가 내렸다는 전설이 전한다.
왕거인은 이러한 고사를 인용하여 자신 역시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하늘이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옛날에는 억울한 사람이 갇히면 하늘도 분노했다는데, 나는 이렇게 억울한데 왜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왕한테 아무리 억울하다고 말해 봐야 통하지 않으니 아예 하늘에 직접 민원을 넣은 셈이다.
이 시는 후대에 분원시(憤怨詩)로 알려졌으며, 신라 시대의 한문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소개된다.[3]
천둥과 우박
《삼국사기》에 따르면 왕거인이 감옥 벽에 시를 적은 바로 그날 저녁 갑자기 기이한 기상현상이 발생했다.
구름과 안개가 몰려오고 천둥이 치며 우박이 쏟아졌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자연현상을 하늘이 인간 세상의 일에 반응하는 징조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정치사상에서는 국왕이 부당한 정치를 하면 하늘이 재해와 이상현상을 통해 경고한다는 관념이 존재했다.
이러한 사상을 일반적으로 천인감응 사상이라고 부른다.
왕거인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를 지은 직후 천둥과 우박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관념과 연결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한층 더 극적으로 하늘이 감옥에 벼락을 내리쳤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두 사료의 서술이 다르므로 실제로 감옥에 벼락이 떨어졌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또한 해당 기상현상이 실제로 발생했는지, 후대에 왕거인의 억울함을 강조하기 위해 추가된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왕거인의 투옥을 부당한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 아무리 억울하다고 호소해도 못 들은 척하던 조정이 하늘에서 천둥 한 번 치니까 갑자기 겁을 먹은 것이다.
진성여왕의 석방 명령
천둥과 우박이 쏟아지자 진성여왕은 두려움을 느꼈다.
왕거인이 억울하게 옥에 갇혔기 때문에 하늘이 분노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여왕은 왕거인을 감옥에서 풀어주고 돌아가도록 했다.
이로써 왕거인은 처형될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비방문의 실제 작성자가 누구였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왕거인이 석방된 뒤 다시 조정에서 관직을 맡았는지, 대야주로 돌아가 은거를 계속했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한 기록이 없다.
범인은 못 잡았고, 억울하게 잡혀간 사람만 감옥에 갔다가 풀려난 것이다.
결국 조정에서는 정치 비방문을 작성한 사람을 끝내 찾지 못했고, 왕거인만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다가 천둥 덕분에 살아남았다.
문제의 다라니 비방문
다라니란?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조정을 비판한 글은 다라니를 흉내 낸 은어였다.
다라니(陀羅尼)는 불교에서 사용하는 주문이나 특정한 가르침을 기억하고 외우는 데 사용하는 문구를 가리킨다.
당시 신라에서는 불교가 사회 전반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여러 종류의 불교 의식과 주문이 사용되었다.
특히 9세기에는 밀교적인 신앙과 다라니가 확산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에게 다라니의 형식은 낯선 것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익명의 작성자는 이러한 불교적 표현을 정치 풍자에 활용했다.
진짜 종교적 주문이 아니라 주문처럼 보이도록 글을 꾸민 것이다.
불경을 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왕과 측근들을 비꼬는 내용이었다.
정치 비방문을 작성하는데 굳이 불교 주문처럼 위장했으니, 오늘날로 치면 정치 풍자를 암호문이나 밈으로 만들어 뿌린 셈이다.
비방문의 내용
《삼국유사》에 실린 비방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 “ |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 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
” |
각 표현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전한다.
| 표현 | 한자 | 의미 |
|---|---|---|
| 나무망국 | 南無亡國 | 불교의 귀의문을 흉내 내면서 나라의 멸망을 노골적으로 언급한 표현. |
| 찰니나제 | 刹尼那帝 | 진성여왕을 가리키는 은어. |
| 판니판니 소판니 | 判尼判尼 蘇判尼 | 두 명의 소판을 가리키는 표현. 소판은 신라의 고위 관등. |
| 우우삼아간 | 于于三阿干 | 여왕의 측근으로 권력을 행사하던 서너 명의 총신을 비꼬는 표현. |
| 부이사바하 | 鳧伊娑婆訶 | 부호부인을 가리키는 표현과 불교 주문의 마무리 구절을 결합한 말. |
《삼국유사》는 이 문구가 여왕과 측근들을 비방한 내용이라고 해설한다.
특히 '나무망국'이라는 표현은 나라의 멸망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과격했다.
당시 신라의 국왕과 귀족들 입장에서는 단순한 풍자문이 아니라 왕조의 권위를 부정하는 글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문구를 오늘날의 한국어로 정확한 하나의 문장으로 번역하기는 어렵다.
원래부터 음차와 언어유희를 활용한 표현이었으며, 《삼국유사》 역시 각 부분의 뜻을 풀이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왕과 측근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취지의 정치 풍자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4]
실제 작성자는 누구인가?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비방문을 실제로 누가 작성했느냐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글을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고 명시했다.
《삼국유사》에서도 비방문을 작성한 주체를 나라 사람들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왕거인이 직접 작성했다고 확정하지 않는다.
왕거인은 국왕과 권신들이 작성자로 의심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왕거인을 비방문의 실제 작성자로 단정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가 직접 작성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를 입증할 직접적인 사료 역시 없다.
일부 연구에서는 왕거인 개인의 행위보다 당시 6두품 지식인들과 왕경 주민들 사이에서 왕실 측근 정치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즉, 비방문이 특정한 개인의 불만을 넘어 당시 지식인층의 정치적 인식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왕거인이 범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신라 조정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차이
왕거인 사건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등장한다.
그러나 두 사료는 사건의 발생 배경과 세부 내용에서 차이를 보인다.
| 구분 | 《삼국사기》 | 《삼국유사》 |
|---|---|---|
| 시기 | 888년으로 기록 | 즉위 후 몇 년이 지난 시기라고 서술 |
| 비방문 | 시정을 비판하는 익명의 글 | 다라니 형식의 은어 |
| 작성자 | 신원 불명 | 나라 사람들이 작성한 것으로 설명 |
| 왕거인 | 대야주에 은거하던 문인 | 국왕과 권신들이 의심한 인물 |
| 투옥 | 수도의 감옥에 수감하고 처형하려 함 | 옥에 가두었다고 기록 |
| 자연현상 | 구름·안개·천둥·우박 | 하늘이 감옥에 벼락을 내림 |
| 석방 | 여왕이 두려워하여 석방 | 하늘의 신이한 작용으로 석방 |
발생 시기의 차이
《삼국사기》는 사건을 진성여왕 2년인 888년의 기록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여왕이 즉위한 지 몇 년이 지나고, 정치적 혼란으로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난 상황에서 비방문이 등장했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삼국사기》에서 전국적인 농민 봉기가 확대된 시기를 889년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일부 연구에서는 《삼국유사》의 서술이 실제로는 889년 이후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따라서 사건이 정확히 어느 달에 발생했는지까지 확정하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는 《삼국사기》의 편년을 따라 888년의 사건으로 설명하지만, 두 사료의 시간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홍에 대한 기록의 차이
《삼국사기》는 위홍이 888년에 사망한 뒤 진성여왕이 새로운 측근들을 가까이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었다고 기록한다.
반면 《삼국유사》는 진성여왕의 유모인 부호부인과 그의 남편으로 서술된 위홍, 그리고 몇 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독점했다고 설명한다.
이는 두 사료가 왕실 측근 정치의 문제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위홍이 사망한 시점과 비방문이 작성된 시점의 관계를 고려하면 두 기록을 문자 그대로 하나의 연속적인 사건으로 합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위홍이 비방문 사건 당시 직접 범인 색출을 지휘했다거나, 왕거인의 체포를 명령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왕실 측근 정치에 대한 비판이 당시의 정치적 혼란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옥중 시의 차이
두 사료에 실린 왕거인의 옥중 시 역시 서로 다르다.
《삼국사기》에는 우공과 추연의 고사가 등장하며, 하늘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푸르기만 하다고 한탄한다.
반면 《삼국유사》에는 연나라 태자 연단과 추연의 고사가 등장하며, 하늘이 왜 상서로운 징조를 내려주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두 작품은 모두 왕거인의 억울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고사를 인용하는 방식과 구체적인 문장은 차이가 있다.
이는 시가 오랜 기간 구전되거나 여러 문헌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표현이 달라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두 시를 무조건 같은 원문이라고 취급해서는 안 된다.
왕거인의 정체
왕거인은 신라 하대에 활동한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그를 거인(巨仁)이라고 기록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왕거인(王居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다만 왕거인의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출신 가문과 정확한 골품 역시 확인되지 않는다.
왕거인은 당시 대야주에 은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야주는 오늘날의 경상남도 합천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다만 888년 당시 대야주는 신라의 9주 가운데 하나로 존재하던 공식 행정구역 명칭이 아니었다.
《삼국사기》에서 대야주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과거 대야주가 설치되었던 지역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된다.
왕거인은 이러한 지방에서 은거하며 문학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중앙정부의 어떤 관직에 임명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연구에서는 왕거인이 진골 귀족이 아닌 6두품 출신의 문인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다만 앞서 설명했듯 이는 확정적인 사실이 아니다.
왕거인은 《삼국사기》 열전에도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나 김부식은 왕거인을 비롯하여 박인범, 원걸, 김운경, 김수훈 등의 문인들이 글을 남겼으나 구체적인 행적을 확인할 수 없어 별도의 전기를 작성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왕거인이 당시 이름이 알려진 문인이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실제 생애를 복원할 자료가 극히 적다는 사실도 보여준다.[5]
사건의 역사적 의미
왕실 측근 정치에 대한 비판
왕거인 사건은 신라 하대의 국왕과 측근세력에 대한 비판이 공개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당시 진성여왕은 측근들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정치적 기강이 문란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특히 위홍의 사망 이후 왕실 내부의 권력관계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불만이 확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익명의 비방문은 이러한 정치적 불만이 왕경의 공개적인 공간에서 표현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당시 신라에 현대적인 언론의 자유나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국왕과 측근을 비판하는 일은 중대한 처벌을 받을 수 있는 행위였다.
왕거인이 실제로 체포되어 처형될 위기에 놓였다는 기록 역시 이러한 상황을 보여준다.
정치에 대한 불만은 존재했지만, 그 불만을 표현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정치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는 의심만으로 사람을 사형시키려 했으니, 당시 신라의 정치적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는지 알 만하다.
지식인층의 정치적 불만
왕거인 사건은 6두품을 비롯한 지식인들의 정치적 불만과 관련하여 해석되기도 한다.
당시 신라에서는 진골 귀족들이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능력 있는 문인들이 신분적 한계 때문에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어려웠다.
일부 지식인들은 이러한 현실에 불만을 품고 중앙정치에서 물러나 지방으로 이동했다.
왕거인 역시 대야주에 은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부류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특히 당시 조정이 비방문의 작성자를 찾지 못하자 뜻을 이루지 못한 문인의 소행일 것이라고 추측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정치적 불만을 가진 지식인들이 당시 국왕과 측근들에게 잠재적인 비판세력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왕거인이 실제로 어떠한 정치적 개혁안을 주장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그가 골품제를 철폐하려 했다거나 특정한 정치세력의 지도자였다고 설명하는 것은 사료의 범위를 넘어서는 주장이다.
다라니를 이용한 정치 풍자
왕거인 사건은 신라 말기의 불교문화가 정치적 풍자에도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당시 신라에서는 불교가 사회 전반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다라니와 밀교적인 신앙도 널리 확산되고 있었다.
익명의 비방문은 이러한 종교적인 표현을 정치적 비판에 활용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익숙하게 접하던 종교적 형식과 언어유희를 결합하여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일부 연구에서는 이러한 다라니 형식의 비방문이 단순한 국왕 비판을 넘어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불교 세력에 대한 불만까지 표현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는 후대 연구자의 해석이며, 비방문이 실제로 어떤 종교세력을 겨냥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다.
또한 이 사건의 이야기가 후백제와 고려가 신라의 정치적 정통성에 도전하던 시기에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연구도 존재한다.
이러한 해석은 왕거인 사건이 단순한 정치적 탄압 사건을 넘어 신라 말기와 후삼국시대의 정치적·사상적 변화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신라의 지방 통제력 약화
왕거인 사건이 발생한 이듬해인 889년에는 원종·애노의 난이 발생했다.
당시 전국의 주와 군에서 조세와 공물이 제대로 납부되지 않아 중앙정부의 재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진성여왕은 세금 징수를 독촉했지만 오히려 농민들의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사벌주에서는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신라 조정이 파견한 진압 책임자는 반란군의 진지를 보고 두려워하여 진격하지 못했다.
이후 신라에서는 지방의 호족들이 성장했고, 궁예와 견훤 등이 독자적인 군사세력을 구축하면서 후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왕거인 사건이 이러한 농민 봉기와 후삼국 성립을 직접 일으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왕거인 사건은 중앙의 정치적 혼란을 보여주고, 원종·애노의 난은 지방의 사회경제적 위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다.
888년에는 수도에서 정치 비방문이 등장하고, 889년에는 지방에서 대규모 농민 봉기가 발생한 것이다.
경주에서는 익명으로 국왕을 욕하고 있었고, 지방에서는 아예 무기를 들고 일어나고 있었다. 신라가 정말 망해 가고 있었다는 뜻이다.
평가
왕거인 사건은 신라 하대의 정치적 혼란과 지식인층의 불만, 왕실 측근 정치에 대한 비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특히 작성자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은 비방문 때문에 한 문인이 체포되어 처형될 위기에 놓였다는 기록은 당시 신라의 정치적 억압과 불안정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사건의 역사적 성격을 평가할 때에는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첫째, 왕거인이 비방문을 실제로 작성했는지는 알 수 없다.
왕거인은 당시 조정에서 용의자로 지목된 인물일 뿐이며, 비방문의 작성자가 확인되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진성여왕과 측근들의 부패에 관한 기록은 후대 사서의 도덕적 평가가 포함된 서술이다.
당시 신라 정치가 혼란스러웠다는 점은 여러 사료로 확인되지만, 국왕의 사생활과 관련된 세부적인 기록까지 모두 객관적인 사실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셋째, 왕거인이 옥중에서 시를 쓰자 천둥과 우박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는 신이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하늘이 왕거인의 억울함을 증명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투옥을 부당한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설화적 기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넷째, 왕거인이 반드시 6두품 출신이었으며 조직적인 정치개혁운동을 벌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의 신분과 정치적 입장은 직접적인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신라 말기에 국왕과 귀족 중심의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이 상당한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왕거인의 옥중 시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신라 후기 지식인들의 문학 수준과 정치적 인식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왕거인 사건은 익명의 정치 비방문 하나가 왕실을 흔들고, 무고한 인물로 의심받은 문인이 처형될 위기에 놓였다는 점에서 신라 하대의 정치적 혼란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신라 조정은 나라가 망해 가는 와중에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누가 자신들을 욕했는지 찾아내는 데 더 열심이었던 모양이다.
여담
- 왕거인 사건은 일반적으로 888년 진성여왕 2년의 사건으로 설명된다. 이는 《삼국사기》의 편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삼국유사》의 서술은 사건의 시기가 다소 불분명하므로 정확한 발생 시점에 대해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 사건의 주인공은 왕거인(王巨仁)이라고 부르지만, 《삼국사기》에서는 성을 생략한 거인(巨仁)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왕거인(王居仁)이라는 표기도 등장한다.
- 왕거인은 대야주에 은거하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의 경상남도 합천 일대에 해당하지만, 888년 당시 대야주가 신라의 공식적인 9주 가운데 하나였던 것은 아니다.
- 왕거인의 정확한 골품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일부 연구에서는 왕씨 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중앙정치에서 벗어나 은거했다는 점을 근거로 그가 6두품 출신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 비방문을 실제로 작성한 사람은 확인되지 않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왕거인이 작성자라고 확정하지 않는다.
- 비방문에는 '나무망국'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불교의 귀의문을 흉내 내면서 나라의 멸망을 언급한 상당히 과격한 정치 풍자였다.
- 《삼국유사》에서는 비방문이 불교의 다라니 형식으로 작성되었다고 설명한다. 당시 신라의 불교문화와 언어유희가 결합된 사례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 진성여왕은 왕거인을 체포하여 처형하려 했지만, 그가 감옥 벽에 시를 적은 뒤 천둥과 우박이 쏟아지자 두려워하여 석방했다고 한다.
- 《삼국유사》에서는 하늘이 감옥에 벼락을 내리쳤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실제로 왕거인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 왕거인이 감옥 벽에 적었다는 시는 분원시(憤怨詩)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린 시는 내용이 일부 다르다.
- 《삼국사기》에는 우공과 추연의 고사가 등장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연나라 태자 연단과 추연의 고사가 등장한다.
- 왕거인 사건은 위홍의 사망 이후 왕실 측근 정치에 대한 불만이 확대되던 시기에 발생했다. 그러나 위홍이 직접 왕거인의 체포를 명령했다는 근거는 없다.
- 왕거인은 《삼국사기》 열전에서도 신라의 대표적인 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구체적인 행적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별도의 전기는 작성되지 않았다.
- 2010년 발표된 전기웅의 연구에서는 왕거인 사건을 6두품 지식인들과 왕경 주민들이 왕실 측근 정치에 불만을 표출한 사건으로 해석했다.
- 왕거인 사건이 발생한 이듬해인 889년에는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났다. 이는 당시 신라의 정치적 혼란이 지방의 사회경제적 위기와 함께 심화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왕거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설화적인 요소가 각색되어 있으므로 실제 역사 기록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 《삼국사기》 진성왕 2년, 거인을 옥에 가두었다가 풀어주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 《삼국유사》 정사가 문란해지고 왕거인을 가두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 《삼국유사》 왕거인의 시와 다라니의 은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왕거인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진성여왕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 《삼국사기》 열전, 기타 신라의 유학자들
- 국사편찬위원회 - 신라의 한시선
- 한국학술지인용색인 - 《삼국유사》 진성여대왕 거타지조 해석의 새로운 시각
-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 《삼국유사》 소재 진성여대왕 거타지조 설화의 검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진성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