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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품제(骨品制)는 신라에서 개인의 혈통과 출신에 따라 신분을 구분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권한과 사회적 지위를 결정했던 신분제도이다. 골품제도(骨品制度)라고도 하며, 신라의 정치·사회·문화 전반을 지배했던 가장 중요한 제도 가운데 하나다.

골품제는 크게 왕족을 중심으로 한 성골(聖骨)과 진골(眞骨), 그 아래의 6두품(六頭品)·5두품(五頭品)·4두품(四頭品)으로 구분된다. 이 밖에 3두품·2두품·1두품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의 실제 성격과 운영 방식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골품제는 신라의 모든 주민에게 똑같이 적용된 제도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수도 서라벌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운영된 신분질서였다.

골품에 따라 오를 수 있는 관등과 관직이 제한되었으며, 혼인과 의복, 주택의 규모, 수레와 생활용품의 재질 등 일상생활의 여러 영역에도 차별적인 규정이 적용되었다. 개인의 능력이나 업적보다 태어날 때 정해진 신분이 사회적 지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진골 귀족들은 골품제를 통해 고위 관직과 정치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다.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지배층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신분에 따른 차별과 정치적 폐쇄성이 심화되었고, 이는 신라 하대에 지배층 내부의 갈등과 개혁 요구가 확대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결국 935년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면서 골품제를 기반으로 한 신라의 정치체제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골품제(骨品制)
국가 신라
성격 혈통 중심의 신분제도
형성 시기 신라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형성 과정(주로 5~6세기)
주요 정비 시기 법흥왕 시대의 율령 반포(520년) 전후
주요 신분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하위 두품 3두품·2두품·1두품(존재 및 성격에 관한 학설 있음)
구분 기준 출생과 혈통, 왕실 및 지배층과의 관계
적용 대상 주로 왕경의 지배층과 중앙 귀족
정치적 제한 관등 승진 상한, 관직 임명 및 고위 관직 진출 제한
사회적 제한 혼인, 의복, 주거 규모, 수레, 장신구, 생활용품 등
관련 관등제 신라의 17관등
주요 관련 제도 중위제, 경위, 외위, 화백회의
성골 소멸 654년 진덕여왕 사망 이후
대표적인 6두품 인물 설총, 강수, 최치원, 최언위, 최승우 등
주요 관련 사료 《삼국사기》 직관지·색복지·옥사지, 《삼국유사》, 성주사 낭혜화상탑비
소멸 신라 멸망과 고려의 통치체제 형성 과정

개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공을 많이 세워도 태어난 집안이 좋지 않으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출세할 수 없었던 신라의 신분제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황당한 제도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하고 정치적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6두품으로 태어났다면 제6관등인 아찬보다 높은 관등에 오를 수 없었으며, 그보다 낮은 5두품과 4두품은 각각 제10관등과 제12관등에서 승진이 제한되었다. 반면 진골 귀족들은 최고 관등인 이벌찬까지 오를 수 있었고, 국가의 핵심 관직도 대부분 차지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신라에서는 능력이나 실적보다 부모가 누구냐가 훨씬 중요했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6두품이라는 이유로 임원 승진이 막혀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골품제의 제한은 관직 승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신라에서는 신분에 따라 집을 지을 수 있는 규모와 사용할 수 있는 건축 재료, 옷감과 장신구, 수레의 장식까지 달리 정했다. 특히 834년 흥덕왕이 내린 사치 금령에는 신분별로 사용할 수 있는 물품과 주택의 규격이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진골은 주택의 주요 건물 규모가 24척을 넘지 못하도록 했으며, 6두품은 21척, 5두품은 18척, 4두품은 15척으로 제한했다. 같은 돈을 가지고 있더라도 골품이 낮으면 높은 신분의 사람과 같은 규모의 집을 지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규정은 신라의 지배층이 경제적 능력뿐 아니라 신분에 따라 생활 수준을 구분하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골품이 낮으면 집을 크게 지을 수 없었다. 부동산 시장에도 출생성분 제한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골품제는 개인의 출생과 가문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신분 상승도 매우 어려웠다. 물론 정치적 처벌이나 혼인, 왕실과의 관계에 따라 신분이 변화하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골품이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했다.

이러한 제도는 신라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왕실과 귀족, 지방에서 편입된 유력자들의 서열을 정리하고 정치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여러 지역을 정복하여 국가의 영역을 확대하던 시기에는 새롭게 편입된 지배층을 신라의 귀족체제 안에 포함시키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국가가 발전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이러한 신분질서는 점차 문제를 드러냈다. 능력이 뛰어난 6두품 지식인들은 진골 귀족들에게 고위 관직을 독점당하면서 정치적 한계를 경험했고, 일부는 유교적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개혁을 주장하거나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여 귀족들의 권력을 견제하려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지식인이었지만, 신라에서는 6두품이라는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려 개혁을 시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계에서 물러났다.

골품제는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 성장하는 데 기여한 제도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국가의 변화와 개혁을 제약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성립 배경

사로국과 초기 신라의 지배층

골품제의 기원은 신라가 아직 한반도 동남부의 작은 정치체였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신라의 모체가 된 사로국은 경주 지역의 여러 집단이 결합하여 형성된 정치체였으며, 이들 집단의 지배자들은 서로 다른 혈연적·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의 신라는 박씨, 석씨, 김씨 등 여러 왕실 계통이 왕위를 차지하던 정치체였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김씨 왕실이 중심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그러나 국왕의 권력이 처음부터 다른 지배층을 압도할 정도로 강력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주요한 정치적 결정에는 여러 유력 집단들의 협력이 필요했다.

신라는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거나 병합하면서 지배영역을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지배층뿐 아니라 새롭게 편입된 지역의 유력자들에게도 정치적 지위를 부여해야 했으며, 여러 계층 사이의 서열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골품제는 이러한 국가 형성 과정에서 왕실과 귀족, 정복된 지역의 지배층을 일정한 신분질서 안에 편입시키면서 발전한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오늘날 알려진 성골·진골·6두품 등의 구분이 초기 사로국 단계부터 완성된 형태로 존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골품제는 신라가 국가의 규모를 확대하고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점차 형성되고 변화한 제도였다.

6부 체제와 골품

초기 신라의 정치체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조직이 신라 6부였다.

신라의 왕경은 여러 부(部)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 부에는 독자적인 전통과 유력한 지배집단이 존재했다. 신라 왕실은 이러한 집단들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정치적 기반을 형성했다.

골품제의 형성에는 왕실과 6부의 지배자들, 주변 소국에서 편입된 유력자들 사이의 관계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두품층의 기원에 대해서는 초기 신라를 구성한 여러 집단의 지배층이 서열에 따라 편입되었다는 견해가 널리 제시된다.

일부 연구에서는 6두품을 초기 신라의 유력한 대족장층과 연결하고, 5두품과 4두품을 그보다 낮은 지방 지배층이나 촌락의 유력자들과 연결하여 설명한다. 이러한 해석은 신라가 여러 지역과 집단을 통합하면서 기존의 정치적·사회적 서열을 새로운 신분질서로 재편했다는 관점에 기반한다.

그러나 골품제의 최초 형성 과정에 관한 직접적인 사료는 제한적이다. 따라서 각 두품이 정확히 어떤 집단에서 출발했는지, 6부의 서열과 어떻게 대응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법흥왕의 율령 반포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법흥왕의 율령 반포였다.

520년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의 법적·행정적 질서를 정비했다. 율령은 단순히 범죄를 처벌하는 법률에 그치지 않고 관료제와 국가 운영의 기본 원칙을 정하는 역할도 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신라의 관등체제도 더욱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신라는 이벌찬부터 조위까지 17개의 관등을 두었으며, 개인의 신분에 따라 어느 관등까지 승진할 수 있는지를 구분했다.

이러한 관등제의 정비는 골품제가 정치제도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다만 520년 율령 반포와 동시에 오늘날 알려진 모든 골품 구분과 생활 규정이 한꺼번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신라의 관등과 신분질서는 그 이전부터 형성되고 있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변화했다.

특히 골품제가 실제 사회에서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세한 기록은 통일신라 시대의 사료에 많이 남아 있다.

골품제의 신분 구조

골품제는 일반적으로 성골·진골과 6두품·5두품·4두품으로 구분된다. 성골과 진골은 왕실 및 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최상위 지배층이었으며, 두품층은 그 아래의 중앙 귀족과 지배층을 구성했다.

다만 성골은 7세기 중반 이후 사라졌으므로, 통일신라 시대의 주요 신분 구조는 진골과 6두품·5두품·4두품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골품 주요 지위 관등 승진 한계
성골 왕위 계승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졌던 왕실 최상위 혈통 왕실 신분. 654년 진덕여왕 이후 소멸
진골 왕족과 최고 귀족층, 국가의 핵심 관직 독점 제1관등 이벌찬까지
6두품 중앙의 유력 귀족, 중간 관리층과 지식인 제6관등 아찬까지
5두품 중하위 귀족 및 관료층 제10관등 대나마까지
4두품 하위 지배층과 관료층 제12관등 대사까지
3·2·1두품 존재와 실제 성격에 대한 학설 있음 구체적인 관등 제한 불명

성골

성골(聖骨)은 신라 골품제의 최상위 신분으로, 왕위 계승에서 특별한 자격을 가진 왕실 혈통을 가리킨다.

성골이라는 이름은 문자 그대로 성스러운 뼈라는 뜻이다. 여기서 뼈는 생물학적인 의미의 뼈라기보다 혈통과 가계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신라 중고기의 일부 왕실 혈통이 성골로 구분되었던 것으로 설명되며, 진흥왕과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등이 성골 계통의 국왕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누가 성골에 해당했으며 성골과 진골의 구분 기준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성골을 부모 모두가 왕족인 혈통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설명만으로 모든 성골·진골 구분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특히 성골이 특정한 왕실 계통에서만 인정되었는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관계에 따라 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중요한 것은 성골이라는 신분이 왕위 계승의 정당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632년 진평왕이 사망하자 그의 딸인 선덕여왕이 즉위했으며, 647년에는 진덕여왕이 즉위했다. 당시 성골 남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설명이 후대 사료에 등장하는데, 이러한 기록은 신라 왕위 계승에서 혈통의 중요성이 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654년 진덕여왕이 사망하면서 성골 계통의 왕위 계승은 끝났다.

이후 진골 출신인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면서 신라의 왕위는 진골에게 넘어갔다.

성골은 원래 왕위 계승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혈통이 단절되면서 진골이 왕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왕이 되려면 성골이어야 한다는 전통이 있었는데 정작 성골이 사라져 버리자, 결국 진골 가운데에서 왕을 뽑게 된 셈이다.

진골

진골(眞骨)은 성골 바로 아래에 위치한 신라의 최고 귀족층이었다.

진골은 왕실과 밀접한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국가의 중요한 관직과 정치적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다. 특히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의 관등은 진골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주요 관청의 장관과 고위 군사직은 대부분 진골의 영역이었다.

초기에는 성골이 왕위 계승에서 우선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654년 진덕여왕 이후에는 진골 출신의 김춘추가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신라의 국왕들은 모두 진골 계통에서 배출되었다.

진골은 단순히 왕의 직계 가족만을 의미하는 신분은 아니었다. 왕실과 혈연관계를 가진 유력한 귀족 가문들도 포함되었으며, 신라가 다른 나라를 병합하는 과정에서 일부 왕족들이 진골로 편입되는 사례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인 김유신의 가문이 진골에 속했다.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왕족 후손이었지만 신라의 정치체제 안에 편입되어 진골 귀족으로 활동했다. 이후 삼국통일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신라의 최고 지배층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진골이 동일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진골 내부에서도 왕실과의 혈연적 거리와 가문의 정치적 기반, 경제력 등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존재했다.

특히 신라 하대에는 진골 귀족들의 수가 늘어나고 왕위 계승 경쟁이 격화되면서 같은 진골 사이에서도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6두품

6두품(六頭品)은 진골 바로 아래에 위치한 신분으로, 왕족이 아닌 두품층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집단이었다.

이들은 신라의 중앙정치와 행정, 학문과 종교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유교적 지식을 갖춘 문인들과 중앙 관료들 가운데 6두품 출신이 많았으며, 일부는 왕권을 강화하는 데 협력하면서 진골 귀족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제6관등인 아찬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다.

그 위의 제5관등인 대아찬부터 최고 관등인 이벌찬까지는 진골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6두품은 중요한 행정업무를 담당할 수 있었지만, 국가의 핵심적인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데에는 제도적인 한계가 있었다.

공부를 아무리 잘하고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워도 진골이 아니라는 이유로 승진이 막혔다. 신라판 유리천장이었다.

6두품 출신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원효, 설총, 강수, 최치원 등이 있다.

원효는 불교 사상가로 활동하면서 신라 불교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아들 설총은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와 이두의 정리로 알려져 있다. 강수는 뛰어난 문장력을 바탕으로 신라의 외교문서를 작성했으며,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귀국한 뒤 신라의 정치개혁을 주장했다.

특히 6두품 출신의 지식인들은 학문과 행정능력을 바탕으로 국왕에게 중용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진골 귀족들이 장악한 정치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는 어려웠다.

한편 6두품은 득난(得難)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득난을 6두품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하지만, 일부 연구에서는 득난을 진골에서 분화된 별도의 신분층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성주사 낭혜화상탑비에 등장하는 기록의 해석과 관련된 문제로,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쟁이 존재한다.

5두품

5두품(五頭品)은 6두품 바로 아래의 신분으로, 중앙의 중하위 귀족과 관료층을 구성했다.

5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까지 승진할 수 있었으며, 그보다 높은 제9관등인 급찬 이상으로는 올라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국가의 주요 관청에서 장관이 되는 것은 어려웠으며, 주로 중하위 관직과 지방행정의 실무를 담당했다.

일부 연구에서는 5두품의 기원을 신라가 주변 지역을 병합하면서 편입한 촌락의 지배층이나 중소 규모의 지방 유력자들과 연결하여 설명한다.

특히 《삼국사기》에는 진촌주(眞村主)를 5두품에 준하는 신분으로 설명한 기록이 있다.

진촌주는 지방 촌락의 지배층 가운데 비교적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로 이해되며, 이와 관련하여 5두품이 지방의 중간 지배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다만 5두품에 속했다고 확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인물은 사료에서 많이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5두품의 실제 정치적·사회적 활동을 6두품과 동일한 수준으로 자세하게 복원하기는 어렵다.

4두품

4두품(四頭品)은 신라의 골품제에서 확실하게 확인되는 두품층 가운데 가장 낮은 신분이다.

4두품은 제12관등인 대사까지 승진할 수 있었으며, 주로 중앙과 지방의 하위 관직을 담당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5두품과 마찬가지로 지방의 유력자들과 연결되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정확한 기원과 운영 방식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하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차촌주(次村主)를 4두품에 준하는 신분으로 설명한 내용이 있다.

차촌주는 진촌주보다 낮은 지위를 가진 지방의 촌락 지배층으로 해석되며, 이는 신라가 지방의 유력자들을 일정한 신분질서에 따라 구분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4두품은 관등 승진뿐 아니라 생활 규제에서도 상당한 제한을 받았다. 특히 834년 흥덕왕의 사치 금령에서는 4두품의 주택 규모와 건축 재료, 장식 등에 비교적 엄격한 규정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4두품 역시 일반적인 평민이나 노비와 같은 신분은 아니었다.

중앙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으며, 왕경의 지배층을 구성하는 하위 신분이라는 점에서 일반 백성과는 구분되었다.

3두품·2두품·1두품

골품제를 설명할 때 6두품 아래에 5두품, 4두품, 3두품, 2두품, 1두품이 존재했다고 소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3두품·2두품·1두품은 4두품 이상과 달리 실제 운영 방식이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학설에서는 초기 신라에 이러한 낮은 두품들이 존재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일반 평민들과 구분되지 않게 되었고 결국 독립적인 신분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설명한다.

반면 일부 연구에서는 애초에 이러한 낮은 두품이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했는지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특히 통일신라 시대의 주요 사료에는 진골과 6두품·5두품·4두품의 신분 구분이 비교적 명확하게 등장하지만, 3두품 이하의 구체적인 권리나 관등 제한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3두품이 어떤 관직까지 승진할 수 있었고, 2두품이나 1두품이 어떤 생활 규제를 받았는지 등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또한 노비를 0두품이라고 설명하는 표현도 등장하지만, 0두품은 신라에서 실제로 사용된 공식적인 신분 명칭이 아니다.

노비와 일반 평민을 골품체계의 최하위 등급에 단순히 대응시키는 것은 신라의 신분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설명이다.

골품제와 관등제

신라의 17관등

골품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신라의 관등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신라는 이벌찬부터 조위까지 17개의 관등을 운영했는데, 이 관등은 오늘날의 공무원 직급과 비슷하게 관료의 서열을 나타내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오늘날의 공무원은 법적 자격요건과 승진제도에 따라 상위 직급으로 진출할 수 있지만, 신라에서는 태어날 때 정해진 골품에 따라 승진할 수 있는 관등의 상한선이 달랐다.

예를 들어 6두품은 아찬까지 승진할 수 있었지만 대아찬 이상의 관등을 받을 수 없었다. 5두품은 대나마, 4두품은 대사까지가 원칙적인 승진 한계였다.

반면 진골은 최고 관등인 이벌찬까지 오를 수 있었다.

순위 관등 최고 진출 가능 신분
1 이벌찬(伊伐飡) 진골 이상
2 이찬(伊飡)
3 잡찬(迊飡)
4 파진찬(波珍飡)
5 대아찬(大阿飡)
6 아찬(阿飡) 6두품 이상
7 일길찬(一吉飡)
8 사찬(沙飡)
9 급찬(級飡)
10 대나마(大奈麻) 5두품 이상
11 나마(奈麻)
12 대사(大舍) 4두품 이상
13 사지(舍知)
14 길사(吉士)
15 대오(大烏)
16 소오(小烏)
17 조위(造位)

표에서 '최고 진출 가능 신분'은 해당 관등에 오를 수 있었던 최저 골품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아찬은 6두품만 받을 수 있는 관등이 아니라 진골도 받을 수 있었지만, 6두품에게는 그 관등이 승진의 상한선이었다.

따라서 신라의 관등제는 단순히 관료의 능력과 경력을 평가하는 제도가 아니라, 골품에 따른 정치적 서열을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했다.[1]

관등과 관직의 차이

신라의 골품제를 이해할 때 관등과 관직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관등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서열이나 지위를 나타내는 등급이며, 관직은 실제로 맡고 있는 행정적·군사적 직책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어떤 관리가 아찬이라는 관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실제로 담당한 직책은 중앙 관청의 차관이나 특정한 행정업무일 수 있었다.

관등은 개인의 신분과 경력에 따라 부여되었지만, 관직은 국가의 필요와 인사에 따라 임명되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고위 관직에 임명되기 위해 일정 수준 이상의 관등이 요구되었으며, 관등 승진 자체가 골품에 따라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국 고위 관직도 진골에게 집중되는 구조였다.

6두품이 아무리 뛰어난 행정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진골만 받을 수 있는 관등이 필요한 관직에는 임명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능력이 부족해서 승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해당 직급의 지원자격 자체가 없었던 셈이다.

중위제

골품제의 승진 제한은 국가 운영에도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6두품 출신의 유능한 관리가 아찬까지 승진한 뒤에도 계속 공을 세운다면 그를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관등을 올려 주고 싶어도 다음 관등인 대아찬은 진골에게만 허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신라는 중위제(重位制)라는 제도를 운영했다.

중위제는 특정 관등에 중(重)이라는 글자를 붙여 같은 계열 안에서 추가적인 승진을 인정하는 방식이었다.

대표적으로 아찬에는 중아찬부터 4중아찬까지의 중위가 있었으며, 대나마에는 9중대나마까지의 중위가 존재했다.

또한 나마에도 중위가 설정되었다.

이러한 제도는 신분에 따른 승진 제한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으면서도, 일정한 범위 안에서 유능한 관료들의 공적을 인정하고 보상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중아찬이나 4중아찬을 받았다고 해서 6두품이 진골로 승격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6두품이었으며, 대아찬 이상의 관등에는 오를 수 없었다.

중위제는 골품제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제도가 아니라, 그 한계에서 발생하는 불만을 완화하기 위한 절충책이었다.

승진은 시켜 주고 싶은데 진골만 올라갈 수 있는 직급은 줄 수 없으니, 기존 직급에 중(重)을 붙여 새로운 단계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직급은 늘어났지만 신분의 벽은 그대로였다.[2]

일상생활의 제한

혼인과 혈통

골품제는 출생과 혈통을 바탕으로 한 신분제도였기 때문에 혼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신라의 지배층은 자신의 골품과 가문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비슷한 신분의 가문과 혼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왕실과 진골 귀족들은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고 다른 귀족 가문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혼인을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 때문에 왕실과 유력 귀족들 사이에서는 비교적 가까운 혈연관계의 사람들끼리 혼인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그러나 골품제가 동일 골품끼리의 혼인만을 예외 없이 허용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서로 다른 신분 사이의 혼인도 존재했으며, 이 경우 자녀의 신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또한 정치적 처벌이나 왕실과의 관계 변화 등으로 기존의 골품이 낮아지거나 드물게 상승하는 사례도 확인된다.

즉 골품은 기본적으로 혈통에 따라 결정되었지만 완전히 변화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분은 아니었다.

다만 이러한 변화는 예외적인 경우였으며,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 정해진 신분을 바꾸기가 매우 어려웠다.

의복과 장신구

골품제의 차별은 복식에서도 나타났다.

신라에서는 관등과 신분에 따라 착용할 수 있는 공복의 색깔과 의복의 재료, 장신구의 종류 등이 달랐다.

대표적으로 공복은 자색·비색·청색·황색 등으로 구분되었으며, 이러한 색깔은 관등의 서열을 표시하는 역할을 했다.

높은 관등의 관리들은 자색 계열의 공복을 착용할 수 있었으며, 낮은 관등의 관리들은 그보다 낮은 등급의 공복을 착용했다.

다만 공복의 색깔은 기본적으로 관등과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모든 진골이 언제나 자색 옷만 입고 모든 6두품이 언제나 비색 옷만 입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신분과 관등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골품에 따른 차별이 복식에도 반영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신라는 일반적인 의복뿐 아니라 모자와 신발, 허리띠, 장신구 등에 사용할 수 있는 재료도 규제했다.

특히 귀족들은 금과 은, 비단 등의 고급 재료를 활용하여 자신의 지위를 나타냈지만, 낮은 골품의 사람들은 이러한 재료를 사용하는 데 제한을 받았다.

이러한 규정은 단순한 사치 금지를 넘어 신분에 따른 외형적인 차이를 유지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신라에서는 어떤 관직에 있는지뿐 아니라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장신구를 착용했는지만 봐도 그 사람의 신분과 지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거 규모의 제한

골품제의 차별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는 주거 규모에 대한 규정이다.

834년 흥덕왕이 내린 사치 금령에는 신분에 따라 집의 주요 건물에 허용되는 길이와 너비가 정해져 있었다.

골품 주요 건물의 길이·너비 상한
진골 24척
6두품 21척
5두품 18척
4두품 15척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숫자가 오늘날의 주택 총면적이나 토지 면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삼국사기》 옥사조에는 실(室)의 길이와 너비를 제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여기서 실이 건물 한 채를 의미하는지, 주요 건물인 정침을 의미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따라서 6두품의 집 전체가 반드시 21척을 넘을 수 없었다고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럼에도 골품에 따라 주요 주거시설의 규모를 제한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한 주택의 크기뿐 아니라 지붕에 사용할 수 있는 기와와 장식, 계단과 담장, 건축 재료 등에 대해서도 별도의 제한이 존재했다.

이는 신라가 지배층의 생활 수준을 경제력만으로 결정하도록 두지 않고, 신분질서에 맞게 통제하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3]

수레와 생활용품

신라의 신분 규제는 수레와 생활용품에도 적용되었다.

특히 834년 흥덕왕의 금령에서는 수레를 장식하는 재료와 말의 장비, 그릇과 기타 생활용품의 재질을 골품에 따라 구분했다.

고급 금속과 장식품을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신분에 따라 달랐으며,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높은 신분의 귀족들이 사용하는 장식이나 재료를 사용할 수 없었다.

이러한 규제는 당시 신라의 지배층이 사치품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흥덕왕의 교서에는 사람들이 외국에서 들어온 진귀한 물품을 선호하고 국산품을 하찮게 여긴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는 통일신라 시대에 국제무역이 발전하면서 외국산 사치품이 귀족사회에 확산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러나 흥덕왕은 단순히 사치를 줄이려 한 것이 아니라, 신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물품을 구분함으로써 기존의 사회적 서열을 유지하려 했다.

골품제는 관리의 승진뿐 아니라 집을 어떻게 짓고 어떤 옷을 입으며 어떤 물건을 사용하는지까지 통제하는 신분제도였던 것이다.

왕경과 지방의 신분 차이

왕경 중심의 신분제

골품제를 이해할 때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은 신라의 모든 백성이 동일한 골품체계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골품제는 기본적으로 수도인 서라벌에 거주하는 지배층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왕경인(王京人)이라고 불렀다.

왕경에는 왕실과 진골 귀족, 6두품 이하의 중앙 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골품에 따라 관등과 관직, 생활방식에 제한을 받았다.

반면 지방의 주민들은 왕경의 귀족들과 동일한 신분체계로 분류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지방에도 촌주를 비롯한 유력자들이 존재했지만, 그들은 중앙 귀족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따라서 신라의 모든 주민을 성골부터 1두품까지 일렬로 세워 놓은 계급사회로만 이해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골품제는 신라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신분질서였으며, 지방민과 일반 백성의 신분체계까지 완전히 동일한 구조로 운영된 것은 아니었다.

경위와 외위

신라는 원래 왕경의 관료와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서로 다른 관등체계를 적용했다.

수도의 관료들에게는 이벌찬부터 조위까지의 17관등인 경위(京位)를 적용했으며, 지방의 유력자들에게는 외위(外位)라는 별도의 관등체계를 적용했다.

이러한 구분은 신라의 중앙 지배층과 지방 유력자들 사이에 신분적·정치적 차별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삼국통일 이후에는 지방의 통치체제가 재편되면서 변화가 나타났다.

674년 문무왕 시대에는 지방의 외위가 폐지되고 경위를 적용하는 방향으로 관등체계가 정비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신라가 통일 이후 확대된 영토와 다양한 지방세력을 하나의 통치체제 안에 통합하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외위가 폐지되었다고 해서 왕경인과 지방민의 사회적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수도의 지배층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경제적 특권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지방에서 중앙정치로 진출하는 데에는 여전히 여러 제약이 존재했다.[4]

골품제의 변화

성골의 소멸과 진골 왕권

골품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성골의 소멸이었다.

초기의 왕위 계승에서는 성골이 특별한 지위를 차지했지만, 654년 진덕여왕이 사망하면서 성골 계통의 왕위 계승이 끝났다.

이에 진골 출신인 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태종 무열왕이 되었다.

이 사건은 신라의 왕위 계승 원칙에 중요한 변화가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이후 신라의 국왕들은 진골 계통에서 배출되었으며, 진골은 국가의 최고 지배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진골 귀족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해졌다고 해서 국왕의 권력이 항상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 신문왕 등은 삼국통일전쟁과 통일 이후의 국가체제 정비를 추진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진골 귀족들의 특권을 유지하면서도 국왕 중심의 정치체제를 정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따라서 골품제와 왕권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통일신라의 발전과 6두품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한반도의 넓은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국가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행정업무가 복잡해졌고, 중앙정부에서는 학문과 문장에 능숙한 관료들의 필요성이 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6두품 출신의 지식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강수와 설총이다.

강수는 뛰어난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신라의 외교문서를 작성했으며, 설총은 유교 경전을 이해하고 이를 신라 사회에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일부 6두품 출신 인물들은 당나라로 유학하여 새로운 학문과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6두품의 관등 승진 한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는 신라의 관료제가 발전하면서 실제 행정능력과 신분질서 사이의 긴장이 점차 커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6두품들은 진골 귀족들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기 위해 국왕의 정치적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신라 중대 이후 골품제의 정치적 운영에서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흥덕왕의 사치 금령

834년 흥덕왕은 신라 사회의 사치 풍조를 규제하기 위해 교서를 내렸다.

이 교서에는 당시 사람들이 외국에서 들여온 진귀한 물품을 선호하고 지나치게 화려한 생활을 추구하면서 신분질서가 문란해지고 있다는 비판이 담겨 있었다.

흥덕왕은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의복과 수레, 생활용품, 주택의 규모 등에 관한 규정을 정비했다.

그런데 이 규정은 단순히 모든 사람에게 사치를 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었다.

골품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물품과 건축 재료의 종류, 주거 규모를 구분함으로써 신분적 서열을 다시 강조했다.

이는 당시 신라의 지배층 사이에서 경제적 격차와 사치문화가 확대되고 있었으며, 기존의 신분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국가가 기존의 골품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일상생활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규제하려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귀족들이 서로 사치품을 자랑하고 좋은 집을 짓기 시작하자 왕이 나서서 신분별로 어디까지 사치해도 되는지 정해 준 셈이다.[5]

신라 하대의 모순

8세기 후반부터 신라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780년 혜공왕이 반란 과정에서 살해된 이후 유력한 진골 귀족들이 왕위를 놓고 경쟁했으며, 국왕이 반란으로 교체되거나 귀족들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특히 822년에는 김헌창의 난과 같은 대규모 반란이 발생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진골 귀족들은 중앙정부의 주요 관직을 독점하고 경제적 기반을 확대했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의 관료들과 지방의 유력자들은 정치적 제약을 받았다.

또한 귀족과 사원들의 토지 겸병, 지방의 조세 부담, 농민들의 몰락 등 여러 사회경제적 문제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모두 골품제 하나의 결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골품제가 정치적 권력과 사회적 특권을 특정한 혈통에 집중시키는 구조였다는 점은 중요하다.

특히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유능한 인재를 폭넓게 등용하고 기존의 정치질서를 개혁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점에서 골품제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최치원의 개혁 시도

신라 하대에 골품제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은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6두품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급제했다.

그는 당나라에서 관료로 활동하면서 뛰어난 문장력과 행정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이후 신라에 귀국하여 국가의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최치원은 신라에서 6두품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당나라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과 신라에서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은 별개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894년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라는 개혁안을 제출했다.

이 개혁안은 당시 신라의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알려져 있지만, 구체적인 조항의 원문은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진성여왕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였으나, 실제 정치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최치원은 중앙정치에서 물러나 은거했다.

최치원의 실패를 오직 골품제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당시에는 왕권의 약화와 진골 귀족들의 권력 다툼, 지방세력의 성장 등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능력이 뛰어난 지식인이 신분에 따른 제도적 한계와 정치적 저항에 부딪혀 개혁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골품제의 구조적 문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후삼국시대와 골품제의 붕괴

9세기 말에는 신라의 중앙집권체제가 더욱 약화되었다.

889년에는 원종·애노의 난이 발생했으며, 896년에는 적고적의 난이 일어나 수도 경주의 서쪽 외곽까지 무장집단이 진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지방의 호족들은 독자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특히 견훤과 궁예는 신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으며, 한반도는 후백제와 후고구려, 신라가 경쟁하는 후삼국시대로 접어들었다.

골품제를 기반으로 한 신라의 중앙 귀족체제는 이러한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왕경의 진골 귀족들은 여전히 정치적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방의 호족들은 반드시 신라의 관등과 골품에 의존하지 않고도 독자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일부 6두품 지식인들은 신라의 기존 정치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력에 참여했다.

대표적으로 최승우는 후백제의 견훤에게 출사했으며, 최언위는 고려의 왕건을 섬겼다.

이러한 움직임은 골품제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정치질서가 더 이상 모든 지배층을 포괄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935년 신라의 마지막 국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신라 왕조는 멸망했다.

이후 골품제를 기반으로 한 신라의 공식적인 정치제도 역시 사라졌으며, 고려는 새로운 관료제와 신분질서를 형성하게 되었다.

골품제의 소멸과 고려

고려의 새로운 정치질서

918년 건국된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신라의 진골 귀족과 6두품 지식인, 지방의 호족 등 다양한 세력을 받아들였다.

특히 왕건은 지방 호족들과의 혼인과 관직 수여 등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기반을 구축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라의 기존 골품은 고려의 관직 임명을 결정하는 공식적인 기준으로 유지되지 않았다.

물론 고려 역시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는 아니었다.

고려에는 문벌귀족과 일반 양민, 노비 등의 신분적 차별이 존재했으며, 가문의 배경은 관직 진출과 사회적 지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골품제가 사라졌다고 해서 곧바로 능력만으로 출세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신라처럼 진골이 아니면 특정 관등 이상으로 승진할 수 없도록 하는 골품 중심의 정치체제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다.

특히 고려는 958년 광종 시대에 과거제를 도입하여 유교적 학문능력을 기준으로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이러한 과거제 역시 신분에 따른 제약을 완전히 제거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라의 골품제와는 다른 인재 선발 원리를 제도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신라 귀족의 고려 진출

신라의 마지막 국왕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한 뒤 왕건으로부터 정치적 대우를 받았으며, 신라 왕실의 후손들은 고려의 귀족사회에 편입되었다.

또한 일부 진골 귀족과 6두품 출신 인물들도 고려의 중앙관료로 활동했다.

특히 최언위와 같은 6두품 지식인들은 고려에서 학문과 문장력을 바탕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는 신라의 골품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지배층 전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의 정치체제 안에 재편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골품제라는 신분제도는 사라졌지만, 그 안에서 활동했던 사람들과 가문들은 고려 사회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이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다른 신분제와의 비교

골품제는 혈통과 출생에 따라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구분했다는 점에서 다른 시대의 신분제도와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신라의 골품제는 고대 국가의 왕실과 중앙 귀족층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고려와 조선의 신분제도와 차이가 있었다.

구분 신라 고려 조선
대표 제도 골품제 양인·천인 구분 및 귀족적 신분질서 양천제·반상제 등
주요 기준 혈통과 골품 신분, 가문, 관직 및 경제력 법적 신분, 가문, 관직, 사회적 관행
고위 관직 진골 중심의 독점 문벌귀족과 관료층 중심 주로 양반 관료층 중심
관료 선발 골품과 관등을 통한 제한 과거제·음서 등 과거제·음서 및 기타 임용제도
특징 출생 신분에 따른 관등 상한선 가문과 관료제의 결합 법적 신분과 사회적 신분의 복합적 운영

다만 고려와 조선의 신분제도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했으며, 각 시대의 지배층을 하나의 고정된 구조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특히 조선의 양반은 신라의 진골처럼 국가가 모든 개인에게 부여한 고정적인 혈통 등급과 완전히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또한 고려의 문벌귀족 역시 신라의 골품처럼 법적으로 일률적인 승진 상한선이 정해진 신분계급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 시대 모두 가문과 출생이 개인의 정치적·사회적 지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의의와 평가

골품제는 신라의 정치·사회체제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살펴봐야 할 중요한 제도다.

특히 신라가 여러 소국을 통합하여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왕실과 귀족, 지방의 유력자들을 일정한 신분질서에 따라 편입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골품제는 국가의 핵심 지배층을 구분하고 관등과 관직, 혼인과 생활방식을 규제함으로써 기존의 지배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성은 동시에 폐쇄성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고위 관직과 정치권력이 진골 귀족들에게 집중되면서 낮은 신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능력과 업적을 바탕으로 정치적 지위를 높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특히 6두품 출신의 유능한 관료와 지식인들이 국가 운영에 기여하면서도 진골의 정치적 특권을 넘어서기 어려웠다는 점은 골품제의 대표적인 모순으로 지적된다.

또한 골품제는 정치적 영역뿐 아니라 의복과 주거, 생활용품에까지 신분적 차별을 적용했다.

이러한 규정은 당시 신라 사회에서 신분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골품제를 신라가 멸망한 유일한 원인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신라의 멸망에는 왕위 계승 분쟁과 중앙 귀족들의 권력 다툼, 농민들의 경제적 몰락, 지방의 호족 성장, 후삼국 세력의 군사적 팽창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골품제는 이러한 문제들 가운데 정치적 개혁과 지배층의 재편을 어렵게 만든 구조적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골품제가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 신라의 모든 귀족들이 무능했고 모든 6두품 출신들이 개혁적이었다고 설명할 수도 없다.

진골 출신 가운데에도 국가의 발전과 정치적 개혁에 기여한 사람들이 있었으며, 6두품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진골 귀족들에게 반발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골품제는 단순히 능력 있는 사람을 억압한 나쁜 제도로만 이해하기보다, 신라의 국가 형성과 지배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는 사회를 수용하는 데 한계를 드러낸 신분제도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

골품제는 신라를 지탱했던 중요한 제도였지만, 동시에 신라가 새로운 정치·사회적 변화에 대응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게 한 구조적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처음에는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만든 신분질서였는데, 나중에는 나라가 망해 가는 상황에서도 누가 진골이고 누가 6두품인지 따져야 했으니,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담

  • 골품제라는 이름은 골(骨)과 품(品)을 결합한 것으로, 개인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혈통의 등급을 의미한다. 다만 문자 그대로 사람의 뼈에 차이가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 골품제의 최상위 신분인 성골은 654년 진덕여왕의 사망 이후 소멸했다. 이후 신라의 국왕들은 진골 계통에서 배출되었다.
  • 성골과 진골을 구분하는 정확한 혈통 기준은 학계에서도 논쟁이 존재한다. 부모 모두가 왕족이면 성골, 한쪽만 왕족이면 진골이라는 설명은 간단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만 모든 역사적 사례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 신라의 골품제는 모든 백성을 동일한 기준으로 구분한 제도가 아니라 주로 왕경의 지배층에 적용되었다. 지방의 유력자들은 별도의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 일반적으로 골품제를 성골·진골·6두품·5두품·4두품·3두품·2두품·1두품의 여덟 등급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3두품 이하의 실체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부족하다.
  • 노비를 0두품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지만, 0두품은 신라의 공식적인 신분 명칭이 아니다.
  • 6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으며, 5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 4두품은 제12관등인 대사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 신라에는 중위제라는 제도가 존재했다. 아찬이나 대나마 등의 관등에 중(重)을 붙여 추가적인 승진을 인정했지만, 이를 통해 진골로 신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 834년 흥덕왕의 사치 금령에는 신분에 따라 주택의 규모와 사용할 수 있는 건축 재료, 의복과 생활용품의 종류 등이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 신라의 가옥 규정에 등장하는 24척·21척·18척·15척은 주택 전체의 대지 면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실(室)의 범위와 건축적 의미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해석이 다르다.
  • 골품제에서 공복의 색깔은 관등의 서열과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골품에 따라 복식이 달랐다는 설명은 옳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골품에 해당하는 한 가지 색깔의 옷만 입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은 자신의 골품과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혼인을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다만 서로 다른 골품 사이의 혼인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 김씨라는 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진골이었던 것은 아니다. 왕실에서 분화되어 신분이 낮아진 가문도 있었으며, 6두품에 속한 김씨 가문도 확인된다.
  • 김유신은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신라의 진골 귀족에 속했다. 이는 신라에 편입된 다른 나라의 왕족이 신라의 지배층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대표적인 6두품 출신 인물인 최치원은 당나라의 과거시험에 급제했지만, 신라에서는 골품제에 따른 정치적 제약을 받았다.
  • 최치원은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려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질적인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정계에서 물러났다.
  • 6두품은 득난(得難)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부 연구에서는 득난을 진골에서 분화한 별도의 신분층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 골품제가 신라의 멸망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되지만, 신라의 멸망을 골품제 하나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모순, 지방세력의 성장 등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
  • 오늘날에도 특정한 조직이나 사회에서 출신에 따라 승진과 대우가 달라지는 현상을 비유적으로 골품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히 학벌이나 출신 학교, 입사 경로, 직군 등에 따라 보이지 않는 서열이 존재하는 상황을 풍자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 이러한 현대적인 비유는 실제 신라의 골품제와는 법적·사회적 성격이 다르다. 따라서 오늘날의 조직문화에서 골품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서 신라의 혈통 중심 신분제도와 완전히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