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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고적의 난(赤袴賊의 亂)은 896년 신라 제51대 국왕 진성여왕 재위 10년에 신라 서남부에서 일어난 무장세력인 적고적(赤袴賊)이 각지의 주현을 공격하고 수도 경주의 서쪽 외곽인 모량리까지 진격한 사건이다.

적고적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 붉은색 바지를 입었던 무장집단으로, 신라 말기에 등장한 초적(草賊)의 일종으로 이해된다. 이들은 지방의 주현을 공격하고 주민들을 살해하거나 약탈했으며, 마침내 신라의 수도 인근까지 진격하여 민가를 노략질했다.

그러나 적고적을 누가 조직하고 지휘했는지, 정확한 병력 규모와 활동지역이 어디였는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 사건은 원종·애노의 난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된 농민 봉기와 지방 무장세력의 성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며, 신라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수도 인근에서조차 약화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적고적의 난(赤袴賊의 亂)
발생 시기 896년(진성여왕 10년)
발생 국가 신라
최초 봉기 지역 신라 서남부 지역(정확한 위치 불명)
주요 활동지역 신라 서남부의 주현 및 왕경 서부 모량리
세력 명칭 적고적(赤袴賊)
명칭의 유래 붉은색 바지를 입어 다른 무리와 구별함
성격 농민 반란, 지방 무장집단의 봉기, 약탈 활동
지도자 불명
병력 불명
주요 활동 지방 주현 공격, 주민 살해 및 약탈, 경주 모량리 침입
관련 국왕 진성여왕
결과 모량리 약탈 후 철수. 이후 행적 및 최종 결말 불명
역사적 의미 신라 말 지방 통제력 약화와 왕경 방어체제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사건
주요 사료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 10년 기사, 《삼국유사》 손순매아조

개요

신라가 얼마나 망해 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 이제는 지방에서 일어난 도적떼가 수도 바로 앞까지 쳐들어와 약탈하고 돌아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9세기 말의 신라는 이미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상당 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진골 귀족들은 권력과 토지를 독점하고 있었으며, 지방에서는 과중한 조세와 경제적 빈곤으로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거나 무기를 들고 봉기하는 일이 잇따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의 유력자들과 무장집단들이 독자적으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889년에는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후에도 신라의 여러 지역에서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나타났다. 특히 견훤과 궁예 등은 지방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896년에는 이보다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신라 서남부에서 활동하던 무장집단이 각지의 주현을 공격하더니, 아예 신라의 수도인 경주 외곽까지 진격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붉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적고적(赤袴賊)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붉은 바지를 유니폼으로 맞춰 입은 도적떼였다. 중국에 노란 두건을 쓴 황건적이 있었다면 신라에는 빨간 바지를 입은 적고적이 있었던 셈이다.

문제는 단순히 옷차림이 특이한 무장집단이 나타났다는 것이 아니었다.

적고적은 지방의 행정구역인 주와 현을 공격하고 주민들을 살해했으며, 이후 신라 왕경의 서쪽 외곽에 해당하는 모량리까지 진격하여 민가를 약탈했다.

한때 한반도 대부분을 통일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했던 신라가 이제는 정체조차 명확하지 않은 지방 무장집단에게 수도 외곽을 공격당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전성기에는 당나라와 전쟁까지 벌였던 신라인데, 말기에는 빨간 바지 입은 도적떼가 수도 앞까지 쳐들어와 집을 털고 돌아가도 막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다만 적고적은 단순히 농민들의 권익을 위해 싸운 의로운 집단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삼국사기》에는 이들이 주현의 주민들을 살해하고 민가를 약탈했다는 내용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고적의 등장은 신라의 정치적·경제적 모순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과 함께,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무너진 상황에서 무장집단들이 일반 주민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는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

배경

신라 하대의 정치적 혼란

8세기 중반까지 신라는 비교적 안정적인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혜공왕 재위 말기부터 왕실과 진골 귀족들 사이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었으며, 780년 혜공왕이 반란 과정에서 살해된 이후 왕위 계승 분쟁이 반복되었다.

이후 신라에서는 유력한 진골 귀족들이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왕의 권위에 도전했다. 822년 김헌창의 난과 같은 대규모 반란이 발생했으며, 중앙 귀족들이 권력을 놓고 다투는 동안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점차 약화되었다.

신라의 지방행정은 9주 5소경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중앙정부는 각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조세를 징수하고 군사력을 동원했다. 그러나 9세기 후반에 이르자 지방관들은 중앙정부의 명령을 제대로 집행하기 어려워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토착세력들이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귀족과 사원들의 토지 겸병이 확대되면서 일반 농민들의 경제적 기반도 약화되었다. 세금을 납부하지 못한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는 일이 늘어났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지방 유력자의 지배 아래 들어가거나 무장집단을 형성했다.

중앙에서는 귀족들이 권력을 놓고 싸우고, 지방에서는 농민들이 몰락하고 있었으며, 국가가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경주에서는 누가 왕이 될지를 놓고 싸우고 있었는데, 정작 지방에서는 누가 왕이든 관심 없이 자기들끼리 군대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원종·애노의 난

889년 신라에서는 전국적인 농민 봉기가 발생했다.

당시 《삼국사기》에 따르면 전국의 주와 군에서 조세와 공물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국가의 창고가 비어 버렸다. 국가재정이 부족해지자 진성여왕은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 납부를 독촉했지만, 오히려 이러한 조치는 백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도적과 반란군이 봉기했으며, 사벌주에서는 원종과 애노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진성여왕은 나마 관등의 영기를 보내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영기는 반란군의 진지를 보고 두려워하여 진격하지 못했다. 반면 현지의 촌주 우련은 반란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 사건은 신라 중앙정부가 지방에서 발생한 무장봉기를 제대로 진압할 능력을 잃어 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

적고적이 등장한 것은 이로부터 7년 뒤인 896년이었다.

그사이 전국의 무장세력들은 더욱 성장했으며, 지방에서는 호족과 초적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다만 원종과 애노가 직접 적고적을 조직했다거나, 두 봉기가 동일한 조직의 연속적인 활동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적고적의 난을 원종·애노의 난의 직접적인 후속 작전으로 이해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두 사건은 신라 하대의 사회경제적 위기라는 공통적인 배경 속에서 발생한 서로 다른 무장봉기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초적의 성장

신라 하대에 등장한 지방 무장집단 가운데에는 초적(草賊)이라고 불리는 세력들이 있었다.

초적은 일반적으로 농민이나 유망민 등을 기반으로 형성된 무장집단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당시 신라에서는 조세 부담과 토지 상실, 기근 등으로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는 일이 늘어났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무리를 지어 산악지역이나 교통의 요지에서 활동했다.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 소규모로 모인 사람들이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세력이 확대되면 자체적인 무장조직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무장집단은 지방의 행정기관을 공격하거나 군사시설을 장악하기도 했으며, 일부는 주민들에게 식량과 재물을 빼앗는 약탈 활동을 벌였다.

당시 신라 조정은 이러한 세력들을 대체로 '도적'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모든 초적이 동일한 성격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일부는 과중한 조세와 지방관의 수탈에 저항한 농민 봉기 세력이었고, 일부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재물을 약탈하는 무장집단이었다. 또한 규모가 커진 무장세력 가운데 일부는 지방의 호족이나 신흥 군사세력과 결합하기도 했다.

적고적 역시 이러한 신라 말기의 초적 가운데 하나로 이해된다.

다만 적고적이 정확히 어떤 계층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직적인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적고적의 봉기

붉은 바지를 입은 무장집단

896년 신라의 서남부 지역에서 새로운 무장집단이 등장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들은 자신들의 바지를 붉은색으로 물들여 다른 사람들과 구별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적고적이라고 불렀다.

적고적이라는 명칭은 한자로 赤袴賊이라고 쓰며, 각각 붉을 적(赤), 바지 고(袴), 도적 적(賊)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이라는 뜻이다.

당시 무장집단들은 자신들의 소속을 구별하기 위해 특정한 색깔의 옷이나 장식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신라 말기에도 서로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장세력들이 복장과 상징물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나타냈을 가능성이 있다.

적고적 역시 붉은 바지를 일종의 집단 표식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군복이나 단체 유니폼처럼 자기들끼리 알아보려고 빨간 바지를 맞춰 입었던 모양이다. 다만 이름부터 너무 직관적이라 신라 사람들의 작명 실력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적고적이 왜 하필 붉은색을 선택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붉은색이 특정한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사상을 상징했다는 증거도 없다. 따라서 이들이 어떤 특별한 종교적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거나 중국의 황건적을 직접 모방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확실한 것은 이들이 붉은색 바지로 자신들의 집단을 구별했고, 그 특징 때문에 적고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사실이다.

최초 봉기 지역

《삼국사기》에는 적고적이 나라의 서남쪽에서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서남쪽이 정확히 어느 지역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 연구에서는 당시 견훤이 세력을 확보하고 있던 전라도 일대와 연결하여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적고적이 최초로 봉기한 장소가 오늘날의 전라도였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또한 신라의 수도 경주를 기준으로 서남쪽의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당시 신라에서는 이미 여러 지역에 독자적인 지방 무장세력이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고적 역시 기존의 중앙정부 통제에서 벗어난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적고적의 지도자와 근거지, 병력 규모 등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적고적이 특정한 성을 점령했거나 어느 지방 호족의 지휘를 받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사료의 근거를 넘어서는 설명이다.

지방 주현 공격

적고적은 봉기한 이후 신라의 여러 주현을 공격했다.

《삼국사기》에는 이들이 주현에서 사람들을 도륙하고 해를 입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주현은 신라의 지방행정 단위인 주와 현을 가리킨다. 적고적이 이러한 지역들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소규모 절도집단이 아니라 상당한 규모의 무장세력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로 몇 개의 주현을 공격했는지, 어떠한 군사시설을 점령했는지, 몇 명의 병력을 동원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적고적과 신라의 지방군 사이에 어떠한 전투가 벌어졌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일반 주민들에게도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적고적이 사람들을 죽이고 해를 입혔다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적고적을 단순히 부패한 귀족들에게 저항한 민중의 영웅처럼 묘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당시 신라 사회의 모순 속에서 등장한 무장집단이었지만, 그들이 실제로 저지른 약탈과 살육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경주 모량리 침입

수도 외곽까지의 진격

적고적의 활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경주 모량리 침입이다.

896년 적고적은 여러 주현을 공격한 뒤 동쪽으로 진격하여 신라 수도의 서쪽 외곽인 모량리에 도착했다.

모량리(牟梁里)는 오늘날의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일대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경주 시내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에 위치해 있었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는 오랫동안 중앙정부의 정치적·군사적 중심지였으며, 왕궁과 관청, 귀족들의 거주지가 집중된 지역이었다.

따라서 지방의 무장집단이 수도 인근까지 진격했다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신라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이제는 수도 주변의 안전조차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도 문제였는데, 이제는 지방의 도적떼가 수도 바로 앞까지 쳐들어와 집을 털고 돌아가는 수준이었다.

다만 적고적이 경주의 왕궁까지 진입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경주성을 함락하거나 진성여왕을 직접 공격했다는 내용도 없다.

확인되는 사실은 적고적이 왕경의 서쪽 외곽인 모량리까지 도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고적이 신라의 수도를 점령했다거나 왕궁을 포위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모량리의 약탈

모량리에 도착한 적고적은 주민들의 집을 공격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삼국사기》는 이들이 모량리의 민가를 노략질한 뒤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모량리에는 일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수도와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 주변에 위치했기 때문에 사람과 물자가 이동하는 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적고적은 이러한 지역에서 주민들의 재물과 식량 등을 빼앗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어떤 물품을 약탈했는지,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이들이 경주에서 약탈을 마친 뒤 어느 지역으로 이동했는지도 알 수 없다.

중요한 점은 신라의 중앙정부가 이러한 공격을 막았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적고적이 모량리까지 와서 노략질하고 떠났다고만 설명한다.

이는 신라의 왕경 방어체제가 상당히 불안정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적고적은 수도 외곽까지 진격해 약탈했지만, 사료에는 이들을 저지한 신라군의 전투나 진압 과정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도적떼가 수도 근처까지 와서 주민들 집을 털고 돌아갔는데, 정작 신라 조정이 무엇을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이쯤 되면 국가가 치안유지를 하고 있었는지부터 의심스러운 수준이다.

다만 신라군이 아예 출동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확정할 수는 없다.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 뿐, 당시 어떠한 군사적 대응이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삼국사기》의 기록

적고적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료는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 제11 진성왕 10년 기사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十年, 賊起國西南, 赤其袴以自異, 人謂之赤袴賊. 屠害州縣, 至京西部牟梁里, 劫掠人家而去.

이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10년(896)에 나라의 서남쪽에서 도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바지를 붉게 물들여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적고적이라고 불렀다. 주현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해를 입혔으며, 서울 서쪽의 모량리까지 와서 민가를 노략질하고 떠났다.

이 기록은 적고적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지만, 분량은 짧다.

적고적의 봉기 장소와 특징적인 복장, 지방 주현에 대한 공격, 모량리 침입만 설명하고 있을 뿐 그 지도자와 조직, 구체적인 전투 과정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적고적을 진압한 인물이나 그들의 최후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사건을 상세하게 설명할 때에는 《삼국사기》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내용과 후대 역사학계의 해석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2]

《삼국유사》의 기록

적고적의 활동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사료는 《삼국유사》의 손순매아(孫順埋兒)조다.

이 이야기는 신라 흥덕왕 시대의 효자 손순에 관한 설화다.

손순은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를 극진하게 봉양했던 인물로, 자신의 아들이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것을 걱정하여 아내와 함께 아이를 묻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아이를 묻으려던 곳에서 신비한 석종을 발견하면서 결국 아이를 살렸고, 그의 효성을 알게 된 흥덕왕이 상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손순은 이후 자신이 살던 집을 절로 만들고 홍효사(弘孝寺)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이후의 일도 기록되어 있다.

진성여왕 시대에 백제의 횡포한 도적들이 모량리에 침입하면서 홍효사의 석종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백제횡적(百濟橫賊)이다.

이는 백제의 난폭한 도적이라는 의미로, 당시 신라의 서남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장세력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삼국사기》에서 적고적이 경주 모량리까지 진격했다고 기록한 사실과 《삼국유사》에서 백제횡적이 모량리에 들어와 석종이 사라졌다고 기록한 사실은 장소와 시대가 일치한다.

이 때문에 국사편찬위원회의 《삼국사기》 주석에서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백제횡적이 적고적과 동일한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하고 있다.[3]

다만 두 기록이 반드시 동일한 사건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특히 백제횡적이라는 표현이 반드시 견훤의 후백제 정규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서남부 지역에서는 견훤의 세력을 비롯하여 여러 독립적인 무장집단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삼국유사》의 백제횡적이 적고적과 동일한 집단이었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견훤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두 사료를 연결하면 적고적의 활동 범위와 모량리 침입의 피해를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적고적의 소속과 지휘관을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고적의 정체

농민 반란군인가, 도적떼인가?

적고적은 일반적으로 신라 말기의 농민 반란군 또는 초적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이들을 농민이라고 직접 기록하지 않고 '도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적고적은 농민 봉기 세력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약탈집단이었을까?

이 문제를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당시 신라에서는 과도한 조세 부담과 토지 겸병, 지방행정의 붕괴 등으로 농민들의 생활이 크게 악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농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무장집단에 참여했으며, 지방의 관청과 유력자들에게 저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장집단이 형성된 뒤에는 정치적 저항뿐 아니라 약탈과 살육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적고적 역시 이러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등장한 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적고적이 농민들의 조세 부담을 줄이거나 신라의 정치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반대로 단순히 약탈만을 목적으로 모인 범죄집단이었다고 확정할 근거도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적고적은 신라 하대의 사회경제적 위기를 배경으로 등장한 무장집단으로, 실제 활동 과정에서는 지방 주민에 대한 폭력과 약탈을 벌였던 세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신중한 설명이다.

붉은 바지의 의미

적고적이라는 이름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은 붉은 바지다.

당시의 많은 무장집단들은 이름을 지도자의 이름이나 활동지역에서 따왔지만, 적고적은 자신들이 입은 복장의 색깔 때문에 이름이 붙었다.

특정한 색깔의 옷을 집단의 표식으로 삼는 사례는 다른 시대에도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중국 후한 말기의 황건적은 누런 두건을 착용했으며, 원나라 말기의 홍건적은 붉은색 두건을 통해 자신들의 집단을 구별했다.

적고적 역시 이러한 사례와 마찬가지로 복장의 색깔을 통해 집단의 정체성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황건적은 노란 두건, 홍건적은 빨간 두건, 적고적은 빨간 바지다. 신라 말기의 무장집단들은 다른 부위도 많은데 굳이 바지를 선택한 모양이다.

그러나 적고적과 황건적, 홍건적 사이에 직접적인 조직적·사상적 연관성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특히 홍건적은 적고적보다 수백 년 뒤에 등장한 집단이므로, 적고적이 홍건적을 모방했을 가능성은 없다.

단지 특정한 색깔의 복장을 집단의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이다.

견훤과 관련이 있었을까?

적고적은 신라의 서남부에서 봉기했다는 점 때문에 견훤의 세력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견훤은 892년 무렵 무진주 일대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으며, 이후 완산주를 중심으로 지배력을 확대했다.

그는 900년에 후백제의 건국을 공식화했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신라의 지방 통제에서 벗어난 군사세력을 이끌고 있었다.

따라서 적고적이 활동했던 896년은 견훤이 서남부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와 겹친다.

또한 《삼국유사》의 백제횡적 기록도 이러한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적고적이 견훤의 부대였다는 직접적인 기록이 없다.

《삼국사기》는 적고적을 견훤의 군대로 설명하지 않았으며, 적고적의 지도자나 소속을 기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국사편찬위원회의 주석에서는 적고적을 견훤과 궁예의 세력과는 별도로 형성된 초적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무리로 설명한다.

따라서 적고적이 견훤의 명령을 받아 경주를 공격했다거나 후백제의 정규군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다만 당시 서남부 지역에서 여러 무장세력이 성장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 적고적이라는 별도의 집단도 존재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적고적의 최후

알 수 없다.

적고적이 경주 모량리까지 진격하여 약탈하고 돌아갔다는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만, 그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들이 다시 다른 지역을 공격했는지,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는지, 다른 무장집단에 합류했는지에 관한 기록도 없다.

적고적의 지도자가 누구였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특정한 인물이 적고적을 진압했다고 설명할 수도 없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이들이 이후 진압되었거나 다른 농민 반란군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후대의 추정이며, 직접적인 사료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4]

따라서 적고적의 난이 신라군의 승리로 끝났다고 설명하거나, 적고적이 견훤 또는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붉은 바지를 입은 무장집단이 봉기하여 신라 수도 외곽까지 침입했다는 사실뿐이다.

빨간 바지를 입고 등장해서 경주 근처까지 털고 돌아갔는데, 그 뒤로는 기록에서 그대로 사라졌다. 이름은 특이한데 정작 그들의 정체와 최후는 아무도 모르는 셈이다.

동시대의 다른 무장세력

적고적이 활동했던 9세기 말에는 신라의 여러 지역에서 독자적인 무장세력이 등장했다.

사건·세력 주요 활동 시기 특징
원종·애노의 난 889년 사벌주에서 발생한 농민 봉기. 중앙정부가 파견한 진압 책임자가 진격하지 못했다.
기훤 890년대 죽주 일대에서 활동한 지방 무장세력의 지도자로, 초기 궁예가 합류했던 인물.
양길 890년대 북원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확대했으며, 궁예가 한때 그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견훤 892년 이후 신라 서남부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이후 후백제를 건국했다.
적고적의 난 896년 붉은 바지를 입은 무장세력이 경주 서쪽 모량리까지 진격하여 약탈했다.
궁예 890년대 이후 북부와 중부지역에서 군사력을 확대했으며,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했다.

이들 가운데 견훤과 궁예는 단순한 지방 무장세력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적고적은 왕조를 건국하거나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수립했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적고적의 병력 규모나 지휘체계가 어느 정도였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적고적을 견훤이나 궁예와 동일한 수준의 정치적·군사적 세력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들 모두 신라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적고적이 수도 외곽까지 진격했다는 사실은 신라의 정치적·군사적 기반이 얼마나 불안정해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신라의 몰락

진성여왕의 퇴위

적고적의 난이 발생한 이듬해인 897년 진성여왕은 왕위를 태자 효공왕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신라는 이미 전국적인 농민 봉기와 지방 세력의 성장으로 중앙집권체제가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진성여왕은 894년 최치원이 올린 시무십여조를 받아들이는 등 정치적 개혁을 시도했지만, 신라가 직면한 구조적인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결국 진성여왕은 897년 왕위를 넘겨주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다만 적고적의 난이 진성여왕의 퇴위를 직접적으로 초래했다는 기록은 없다.

적고적의 난은 당시 신라가 겪고 있던 정치적·사회경제적 혼란을 보여주는 여러 사건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후삼국시대의 전개

9세기 말 신라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견훤과 궁예 등의 군사세력은 점차 독자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견훤은 900년 완산주에서 후백제의 건국을 공식화했으며, 궁예는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했다.

이후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했지만,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신라의 지배권에 도전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궁예의 후고구려는 이후 마진과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했으며,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했다.

고려는 후백제와 대립하면서 세력을 확대했으며, 결국 935년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고 936년 후백제까지 멸망하면서 후삼국을 통일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적고적의 난은 신라의 지방 통제력이 왕경 외곽에서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896년에 적고적이 수도 근처까지 진격한 지 불과 몇 년 뒤, 신라의 지방 무장세력들은 아예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 한반도를 통일했던 신라가 지방의 도적떼에게 수도 외곽까지 공격당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지방의 장군들이 각자 나라를 세우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의의와 평가

적고적의 난은 신라 말기의 사회경제적 혼란과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 붕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특히 이 사건은 신라의 수도 경주가 더 이상 외부의 무장세력으로부터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889년 원종·애노의 난이 발생했을 당시에는 지방의 사벌주에서 중앙정부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지만, 896년 적고적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수도 서쪽 외곽의 모량리까지 진격했다.

이는 신라의 정치적·군사적 위기가 지방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적고적을 단순히 농민들의 권익을 위해 싸운 정의로운 반란군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삼국사기》에는 이들이 주현의 사람들을 죽이고 민가를 약탈했다는 기록이 명확하게 남아 있다.

따라서 적고적의 활동에는 당시 신라 사회의 경제적 모순에 대한 저항이라는 배경이 있었을 가능성과 함께, 일반 주민들에게 폭력과 피해를 입힌 무장집단이라는 성격이 공존한다.

또한 적고적의 활동이 신라 중앙정부에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군사적 타격을 입혔는지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모량리 침입은 확인되지만, 적고적이 수도를 함락하거나 왕궁을 점령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지방에서 봉기한 정체불명의 무장집단이 경주 서쪽 외곽까지 진격하여 약탈한 뒤 돌아갔다는 사실 자체가 신라의 국가적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적고적의 난은 신라가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던 국가에서 지방의 호족과 무장집단들이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다만 이러한 변화는 적고적의 난 하나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누적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모순, 지방세력의 성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신라의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빨간 바지를 입은 도적떼가 수도 외곽까지 쳐들어온 사건만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 것이다.

여담

  • 적고적의 난은 896년 진성여왕 10년에 발생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다.
  • 적고적(赤袴賊)이라는 이름은 붉은색 바지를 입은 도적이라는 뜻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들의 독특한 복장 때문에 붙인 명칭이다.
  • 적고적이 왜 붉은 바지를 입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특정한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사상을 나타냈다는 직접적인 증거도 없다.
  • 중국의 황건적과 홍건적 역시 특정한 색깔의 복장을 집단의 표식으로 사용했다. 다만 이들 세력과 적고적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는 근거는 없다.
  • 적고적은 신라 서남부에서 봉기한 것으로 기록되지만, 정확히 어느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 적고적이 경주 모량리까지 진격한 사실은 확인되지만, 신라의 왕궁이나 수도 전체를 함락시켰다는 기록은 없다.
  • 모량리는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일대에 해당한다. 경주 시내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에 위치한 지역이다.
  • 《삼국유사》 손순매아조에는 진성여왕 때 백제의 횡포한 도적들이 모량리에 침입하면서 홍효사의 석종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도적들이 적고적과 같은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 적고적을 견훤의 후백제군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지만, 실제로 견훤이 적고적을 지휘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 적고적의 지도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원종과 애노처럼 지도자의 이름이 기록된 농민 봉기와는 달리, 적고적은 집단의 명칭만 전해진다.
  • 적고적의 병력 규모와 무기, 구체적인 조직체계 역시 알 수 없다.
  • 《삼국사기》에서는 적고적이 주현에서 사람들을 살해하고 민가를 약탈했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적고적을 단순히 일반 백성을 보호하려 한 민중 봉기 세력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 적고적이 신라군에게 진압되었는지, 다른 무장집단에 흡수되었는지,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 905년 궁예의 세력에 귀부한 무장집단 가운데 붉은 옷과 누런 옷을 착용했던 세력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896년의 적고적과 동일한 조직이었다는 근거는 없다.
  • 적고적의 난이 발생한 다음 해인 897년 진성여왕은 효공왕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다만 적고적의 난이 여왕의 퇴위를 직접적으로 일으켰다는 기록은 없다.
  • 적고적의 난은 원종·애노의 난과 함께 신라 말 농민 봉기와 지방 무장집단의 성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언급된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