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으로 노력의 가성비가 조금이나마 올라갈 수 있도록 노오오오력합시다.
ㄴ당시 남한청년(지금의 5060대 틀딱아재들)에게선 보기힘든 180에 떡대도 있던 거구였다.

李雄平
프로필
- 출생 : 1954년 9월 28일 북괴 평안남도 대동군 청계리[1]
- 사망 : 2002년 5월 4일 분당 국군수도병원에서 간기능부전으로 사망.
- 본관 : 수안군
- 가족 : 사회안전부[2] 소좌 이광정(아빠), 맹성월(엄마), 그외 누나 2명, 누이동생 3명, 남동생 1명이 있었다. 귀순 이후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불이익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여러 자료에 등장하지만 전원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사망했다는 원문의 서술은 공개된 신뢰할 만한 자료로 확인하기 어렵다. 대한민국에서는 1984년 박선영과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 복무 : 북괴 공군 상위 (1975년 임관 후 귀순 이전까지), 대한민국 국군 공군 소령~대령
- 학력 : 북한 김책공군대학교,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36기
- 주요 경력 : 대한민국 공군 정보·안보 분야 근무, 공군대학 교수·정책연구위원·안보정책처장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설명
1983년 2월 25일 MiG-19를 몰고 귀순했던 귀순장병. 북한 공군 상위, 대한민국 계급으로 대위급 장교였다. 한국전쟁 이후 여러 북한 조종사가 비행기를 몰고 귀순했지만 이웅평 사건은 당시 북한의 주력 전투기였던 MiG-19를 그대로 가져왔다는 점과 수도권에 실제 대공경계경보까지 울린 사건이라 한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본래 나름 잘나가는 집안에서 태어나 북괴 공군의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했지만 좆같은 공산주의경제와 체제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이웅평은 1962~1966년 평양 장경국민학교, 1966~1971년 와산 중·고등학교를 거친 뒤 1971년 청진의 김책공군대학교에 들어갔다. 1975년 6월 1일 북한 공군 소위로 임관했다.[3] 원문에는 1977년부터 복무했다고 되어 있었지만 임관 시점은 1975년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귀순을 결심하기까지
이웅평은 귀순 후 기자회견과 인터뷰에서 북한 체제의 허구성과 경제적 현실에 점점 불만을 품었고, 몰래 남한 방송을 들으면서 남한 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그 유명한 삼양라면썰은 일종의 기폭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에서는 바닷가에서 떠내려온 삼양라면 봉지를 주웠는데 "불량품은 교환해드립니다"라는 문구를 보고 남한 기업은 이런 것도 책임지는구나 하고 충격받아 탈북했다는 이야기가 매우 유명하다.
다만 이 일화는 후대에 너무 예쁘게 정리돼 반복된 면이 있다. 이웅평 본인이 밝힌 공식적인 귀순동기는 훨씬 복합적이다. 그는 북한 정치와 사회주의 현실에 회의를 느끼고 남한 방송을 몰래 청취해왔으며, 1976년 소련 조종사 빅토르 벨렌코가 MiG-25를 타고 일본에 귀순한 사건과 1982년 중국 공군 조종사가 MiG-19를 타고 한국에 귀순한 사건을 보면서 자신도 실제로 탈출할 수 있다는 생각을 굳혔다고 밝혔다.[4] 즉 라면봉지 하나 보고 갑자기 탈북결심이 아니라 오랫동안 북한 체제에 불만을 품던 조종사에게 남한 사회에 대한 여러 정보가 쌓였고 실제 해외 조종사들의 귀순사례까지 보면서 결심한 것이다.
1983년 2월 25일
귀순을 결심한 그는 1983년 2월 25일 개천군비행장에서 미그기를 타고 편대를 따라 이륙했다. 당일은 로켓 사격훈련이 예정돼 있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오전 10시 35분쯤 개천비행장을 이륙했다.[5] 다른 당시 기록에는 10시 30분 이륙, 약 2분 뒤 편대이탈로 적힌 자료도 있어 세부 시각은 자료마다 몇 분 차이가 난다.
그는 갑자기 기수를 돌려 남쪽으로 시속 920km수준으로 빠르게 런하기 시작했고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50m ~ 100m의 고도를 유지하면서 남하했다. 고도를 이렇게 낮춘 이유는 북한 방공레이더의 탐지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전투기로 지면에서 고작 수십 미터 위를 시속 900km가 넘는 속도로 나는 것은 조금만 실수해도 그대로 땅에 박히는 짓이라 이 과정 자체도 상당히 위험했다. 해주 방면을 통과해 서해로 빠진 뒤 연평도 부근 북방한계선을 넘어 대한민국 영공으로 진입했다.
대한민국은 전쟁난 줄 알았다
이웅평 본인은 자유 찾아 내려오고 있었지만 남한에서는 북한 전투기가 서울 쪽으로 내려온다로 보였으니 당연히 난리가 났다. 1983년 2월 25일 오전 10시 58분쯤 서울·인천·경기 일대에 실제 대공경계경보가 발령됐다. 당시 방송에서는 이 방송은 실제상황입니다라는 안내까지 나왔다.[6]
당시 한국군과 미군은 팀 스피릿 훈련 중이었다. 북한 공군기가 실제로 내려오자 방공부대는 당연히 북한의 기습이나 훈련상황과 관련된 상황일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대비했다. 경보 사이렌이 울리고 시민들이 차량을 멈추거나 대피하면서 수도권이 한동안 개판이 됐다. 당시 일부 방송에서 북한기가 인천을 폭격하고 있다는 식의 잘못된 경보가 전파됐다는 기록도 있다. 이 사건 이후 민방공 경보의 전달이 늦거나 경보방송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은 문제점이 확인돼 경보체계가 보완되기도 했다.[4]
F-5와 조우
이때 국군은 그의 미그기를 보고 요격을 위해 F-5를 보냈지만 미그기는 날개를 흔들어 귀순의사를 밝혔다. 전투기 조종사가 다른 기체에 귀순 의사를 표현할 때 흔히 사용하는 방식 중 하나가 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이다. 대한민국 공군 F-5 편대는 공격하지 않고 MiG-19를 수원비행장으로 유도했다.
이웅평은 오전 11시 4분 제10전투비행단이 있던 수원비행장에 착륙했다.[3] 개천에서 이륙한 뒤 불과 30여 분 만에 북한 공군 장교에서 대한민국 귀순자가 된 것이다. 당시 외신도 북한 공군 대위급 조종사가 중국제 MiG-19를 몰고 한국으로 귀순했다고 긴급보도했다.[7]
가져온 MiG-19
이웅평이 타고 온 기체는 북한 공군이 운용하던 중국제 MiG-19 계열 전투기였다. 당시 북한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전투전력이었다. 한국군 입장에서는 북한군 현역 조종사도 얻고 북한 주력 전투기의 실제 기체도 통째로 얻은 셈이었다.
군 당국은 이를 통해 MiG-19의 성능, 항전장비, 무장체계, 북한 공군 운용방식과 전술 등을 직접 분석할 수 있었다. 2002년 조선일보는 이웅평이 가져온 MiG-19가 당시 군 당국이 북한 공군의 전력과 전술을 파악하고 대응전략을 세우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줬다고 평가했다.[8] 북한 입장에서는 조종사 하나 잃은 것뿐 아니라 자기 전투기까지 남한에 갖다 바친 셈이라 보안사고도 이런 보안사고가 없다.
포상금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존나게 크게 쐈다. 당시 이웅평에게 지급된 포상금은 10억원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1997년 동아일보도 이철수 대위의 MiG-19 귀순 포상금을 보도하면서 1983년 이웅평이 10억원 이상을 받았다고 기록했다.[9]
인터넷에서는 15억 6천만원, 16억원 등의 구체적인 수치도 자주 보이지만 공식·당시 언론자료마다 액수가 조금씩 다르게 전해져 확실하게 확인되는 표현은 "10억원 이상" 정도다. 1983년에 10억원이면 지금처럼 로또 10억 받는 느낌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당시 서울 아파트 가격, 임금수준, 물가 등을 감안하면 엄청난 거금이었다. 특히 단순 귀순 보상금뿐 아니라 군사정보와 전투기를 가져온 데 따른 보로금 성격이 컸다. 한 사람이 전투기 한 대를 직접 배송했으니 정부 입장에서도 지급 명분은 충분했다.
대한민국 공군 복무
귀순후 1983년 5월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예편되었고
ㄴ 예편이 아니라 임관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85년 5월 소령 임관으로 적고 있으나, 당시 신문과 국가기록원·사후 부고 자료에서는 1983년 5월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임관한 것으로 기록한다.[5][10] 따라서 1983년 5월로 보는 자료가 더 많다.
북한 공군 상위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공군에서는 한 계급 높은 소령으로 임관했다. 이후 1990년 무렵까지 정보부대에서 북한 공군 정보 제공과 분석 업무를 담당했다. 그 뒤 공군대학에서 북한군, 안보정책 등을 가르쳤다. 남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한자와 영어를 새로 공부하고 경제학과 정치학도 개인교습을 받았다고 한다.[8]
1987년 중령으로 진급했고 1995~1996년 무렵 대령으로 진급했다. 공식 자료마다 1995년과 1996년으로 약간 차이가 있으나 1996년 1월 대령 진급으로 보도된 자료가 많다. 최종 보직 중 하나가 공군대학 안보정책처장이었다.
결혼
1984년 11월 2일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딸과 혼인해 1남 1녀를 두었다. 배우자의 이름은 박선영이다. 원문과 일부 인터넷 자료에서 다른 이름으로 알려진 경우가 있으나 2002년 동아일보·서울신문 부고기사에서 부인을 박선영이라고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10][11]
당시 이웅평은 큰 키와 호방한 성격, 엘리트 전투기 조종사라는 이미지 때문에 귀순 직후 상당한 유명인사가 됐다. 조선일보 회고기사도 "큰 키에 호방한 성격"이라고 묘사했다.[8]
북한에 남은 가족
그리고 북에 남은 그의 가족들은 모두.....
원문에는 귀순 이후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사망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 부분은 조심해서 봐야 한다. 북한에서 고위군인이나 조종사의 탈북은 가족에게 연좌제성 불이익이 가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고, 이웅평 역시 생전에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자신의 귀순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이야기에 괴로워한 것으로 보도됐다.[12]
하지만 가족 전원이 정치범수용소에서 사망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개된 북한 기록이나 신뢰도 높은 후속자료는 찾기 어렵다. 그래서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연좌제성 처벌과 불이익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도로 쓰는 것이 안전하다. 이웅평 본인에게도 이 문제는 평생 상당한 심리적 부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7년 김만철 일가 탈북
1987년 2월 김신조와 함께 대만으로가서 청진시에서 배타고 런해서 대만에 남았던 김만철일가에게 대한민국으로의 이주를 권유하기도 했다.
김만철 일가 11명은 1987년 작은 배를 타고 북한 청진을 탈출해 일본을 거쳐 대만에 도착했다. 최종 정착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일부 가족은 남한행에 불안감을 보였다. 이때 하루 먼저 대만에 도착한 이웅평이 직접 김만철 일가를 만나 자신의 남한생활 경험을 설명하며 대한민국행을 설득했다.
MBC 당시 보도에 따르면 특히 큰 처남 최정섭이 한국행을 두려워했지만 이웅평이 북한 선전과 달리 자신이 남한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취지로 설득한 뒤 한국행을 받아들였다고 전해졌다.[13] 원문의 대한민국이 북괴보다 압도적으로 잘산다는 것을 몰라서 그냥 대만에 눌러살 생각이었다라는 설명은 너무 단순하다. 당시 김만철 가족 가운데 일부가 대한민국행을 두려워한 것은 북한에서 받은 반남한 교육과 남한 사회에 대한 정보 부족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결국 가족 전원이 대한민국으로 왔다.
1996년 이철수 귀순
냄비근성에 명예훼손충, 형법의 악용, 적반하장, 무리한 공사, 안전불감증, 각종 비리 때문에
이 병신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고야 말았습니다.
당신의 역사를 기억해라. 아니면 반복하여 파멸을 맞이하라.
1996년 5월 23일에는 북한 공군 대위 이철수가 또 MiG-19를 몰고 대한민국으로 귀순했다. 13년 전 자기 모습을 그대로 보는 상황. 이웅평은 이철수 귀순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 조종사들은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 자신이 배운 사회주의 이론과 실제 현실 사이의 차이를 느끼면 실망이 커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 자신과 같은 처지인 이철수가 남한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돕겠다고 밝혔다.[14]
실제로 1996년 이철수 기자회견장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찍힌 사진도 남아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13년 전에 MiG-19 한 대 털렸는데 또 MiG-19 한 대를 조종사째 배달한 셈이다.
투병
1997년 공군대학 교수로 근무하던 중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 북한 시절부터 독한 술을 즐긴 것과 남한사회 적응 과정에서 받은 스트레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B형간염이 간경화로 악화된 것으로 당시 언론은 전했다.[11]
1997년 11월 쓰러진 뒤 치료를 받았으며 한때 생명이 위험할 정도였다. 1998년 10월 뇌사자의 간을 이식받아 간이식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했고 한동안 건강을 되찾았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기수를 삶으로 돌려라》라는 책도 냈다.
책에서 그는 남한에 온 뒤 진급에 대한 욕심, 남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지지 않으려는 욕심 때문에 스스로를 몰아붙였다고 회고했다.[11] 귀순하면 돈 받고 편하게 살았다는 단순한 이미지와 달리 북한군 출신이라는 시선 속에서 대한민국 군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모양이다.
사망
간이식 뒤 건강을 회복했지만 2002년 3월부터 이식한 간에 거부반응이 나타났다. 병세가 다시 악화됐고 2002년 5월 4일 오후 10시 15분경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간기능부전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47세.[10]
ㄴ 당시 한국식 나이로 49세, 언론에서는 향년 48세라고 표기한 기사도 많다. 1954년 9월생이므로 만 나이로는 47세였다.
장례는 공군대학 총장장으로 치러졌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유족으로 부인 박선영과 1남 1녀가 있었다.
박종헌과 관련된 이야기
참고로 이웅평의 귀순을 도운 당시 F-5편대 편대장 박종헌소령은 이덕에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대장이 되어 32대 공군참모총장을 임했다.
ㄴ 큰 줄기는 맞지만 약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웅평의 MiG-19를 요격·유도하기 위해 출격한 대한민국 공군 F-5 조종사들 가운데 박종헌이 있었고 이 작전과 관련해 공적을 인정받았다. 박종헌은 이후 계속 진급해 공군 대장이 됐고 제32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다만 그가 공군참모총장이 된 것을 이웅평 한번 유도해서 별 넷 달았다라고 이해하면 당연히 안 된다. 1983년 이후에도 수십 년간 다양한 보직과 지휘관 경력을 거쳤다.
MiG-19 귀순의 군사적 의미
당시 대한민국 공군에게는 상당히 귀중한 정보였다. 1980년대 초만 해도 북한의 실제 현역 전투기를 완전한 상태로 직접 뜯어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MiG-19는 소련에서는 이미 구식으로 넘어가던 전투기였지만 북한에서는 상당수를 운용하고 있었다.
한국군은 이웅평이 가져온 기체를 분석해 비행성능, 레이더 및 항법장비, 무장체계, 조종석 구조, 북한군 정비상태, 북한 조종사의 실제 훈련과 전술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기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종사 본인이었다. 현역 북한 공군 조종사에게서 비행훈련 방식, 부대배치, 지휘체계, 조종사 선발과 교육, 출격절차, 방공체계, 북한군 내부생활 등을 직접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웅평은 대한민국 공군 임관 후 정보분야에서 오랫동안 활용됐다.
당대의 유명세
1983년에는 인터넷도 없고 북한 내부정보도 지금보다 훨씬 부족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 전투기 조종사가 자기 비행기를 몰고 생방송급으로 내려왔으니 거의 전국구 스타가 됐다.
1983년 3월 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도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정부는 이웅평의 귀순을 북한 체제의 열악함과 대한민국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당시 국립영화제작소도 《자유를 찾은 날개》라는 대한뉴스 영상을 제작했다.[5] 그래서 1980년대에 살았던 세대에게는 미그기 몰고 내려온 이웅평이라는 한 문장만으로 바로 알아듣는 인물이다.
북한 측 반응
북한 입장에서 이웅평 귀순은 군사적으로도 체면상으로도 대형사고였다. 정예 공군 조종사가 전투기까지 들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북한은 한미 팀스피릿 훈련을 이유로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있던 시기였다. 고도의 경계태세 속에서도 조종사가 전투기를 타고 남쪽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웅평의 귀순 이후 북한 공군 조종사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가 강화됐다는 증언들이 존재한다. 1996년 이철수가 다시 MiG-19를 몰고 귀순하면서 북한 공군의 조종사 사상통제 문제가 또다시 드러났다.
대한민국에서의 평가
냉전기 대한민국에서는 공식적으로 귀순용사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당시 정부와 언론이 반공선전의 상징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한 면도 있다. 하지만 이웅평 개인의 행적만 놓고 보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것은 사실이다. 귀순이 실패하면 본인이 바로 사망하거나 북한에 체포될 가능성이 높았고, 성공하더라도 북한에 남은 가족이 보복을 받을 가능성을 알면서도 탈출했다.
대한민국에 온 뒤에도 바로 민간인이 되어 포상금 들고 놀러다닌 게 아니라 공군에 다시 들어가 약 19년을 복무했다. 정보·안보교육 분야에서 근무하다 대령으로 생을 마쳤다.
정정할 점
원문의 내용을 현재 확인되는 자료와 비교하면 다음 부분은 정정할 필요가 있다.
- 북한 공군 복무 시작 : 1977년이 아니라 1975년 소위 임관으로 확인된다.
- 귀순 시각 : 자료에 따라 개천비행장 이륙이 10시 30~35분으로 조금씩 다르지만 수원기지 착륙은 오전 11시 4분으로 대체로 일치한다.
- 대한민국 공군 소령 : 귀순 뒤 소령으로 예편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임관해 계속 복무했다.
- 대령 진급 : 1995년이라고 적힌 자료도 있으나 당시 부고 등에서는 1996년 1월로 보도됐다.
- 배우자 : 박선영.
- 북한 가족 전원 정치범수용소 사망 : 확인되지 않는다. 귀순에 따른 가족의 불이익은 알려져 있으나 전원 사망으로 단정할 근거가 부족하다.
- 삼양라면 때문에 귀순 : 유명한 일화지만 실제 귀순동기는 북한 체제에 대한 오랜 회의, 남한방송 청취, 해외 조종사 귀순사건 등의 복합적인 요인이었다.
- 포상금 16억원 : 여러 수치가 돌아다니지만 당시 언론에서 확실하게 확인되는 것은 10억원 이상.
- 사망 : 2002년 5월 4일 간기능부전증으로 사망.
여담
- 북한 공군에서는 상위였다. 대한민국의 대위에 해당한다.
- 귀순 당시 28세였다.
- 북한 김책공군대학교 출신의 엘리트 전투기 조종사였다.
- 키가 약 180cm로 알려져 당시 한국 남성 평균키를 생각하면 상당히 큰 편이었다.
- 개천비행장에서 수원비행장까지 약 30분 만에 넘어왔다.
- 북한 레이더를 피하려고 고도 50~100m 수준으로 비행했다.
- 시속 약 920km로 남하했다는 당시 기록이 있다.
- 귀순 때문에 서울·인천·경기에 실제 대공경계경보가 발령됐다.
- 그가 타고 온 MiG-19는 대한민국 군이 북한 공군 전력을 분석하는 데 활용됐다.
- 대한민국에서 10억원 이상의 보상금을 받은 것으로 당시 언론에 기록돼 있다.
- 귀순 뒤 공군 소령으로 임관해 대령까지 진급했다.
- 대한민국 공군에서 거의 20년을 더 근무했다.
- 1987년 김만철 일가의 대한민국행을 직접 설득했다.
- 1996년 이철수가 똑같이 MiG-19를 몰고 귀순하자 사회적응을 돕겠다고 나섰다.
- 1998년 간이식 수술을 받았다.
- 간이식 경험을 담은 《기수를 삶으로 돌려라》라는 책을 냈다.
- 2002년 간기능부전증으로 사망했다.
-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 1983년 보국훈장 천수장을 받았다.[3]
같이 보기
각주
- ↑ 대한민국기준 대동군 임원면 청계리, 現 북괴령 평양직할시 용성구역 청계동
- ↑ 초기 북괴에서 주민통제를 했던 비밀경찰기관으로 혹부리 뒤진뒤에 이래저래 개편되어 현재의 북한 내무·치안기관 계통으로 이어졌다.
- ↑ 3.0 3.1 3.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웅평
- ↑ 4.0 4.1 수원시정연구원 - 수원비행장 관련 연구자료
- ↑ 5.0 5.1 5.2 국가기록원 - 이웅평 북한 공군조종사 미그기 몰고 귀순
- ↑ 동아일보, 책갈피 속의 오늘 - 1983년 이웅평씨 미그기 타고 귀순
- ↑ UPI, North Korean pilot defects to South Korea, 1983-02-25
- ↑ 8.0 8.1 8.2 조선일보, 별세한 이웅평 공군대령, 2002-05-05
- ↑ 동아일보, 미그기 귀순 이철수대위 4억8천만원 받아, 1997-01-26
- ↑ 10.0 10.1 10.2 동아일보, '미그기 귀순' 이웅평씨 별세, 2002-05-05
- ↑ 11.0 11.1 11.2 서울신문, 귀순용사 이웅평대령 사망, 2002-05-06
- ↑ 조선일보 아카이브 - 1983년 이웅평 대위 MIG-19 귀순
- ↑ MBC 뉴스데스크, 김만철씨 일가 대만 체류 22시간, 1987-02-09
- ↑ 서울신문, "탈북자 증가는 북 경제난 때문" 이웅평 대령 인터뷰, 1996-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