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엄 | |
| 생년월일 | 1719년 (숙종 45년) |
|---|---|
| 국적 | 조선 |
| 출생지 | 조선 강원도 원주 일대 |
| 본관 | 풍양 조씨 (豊壤 趙氏) |
| 직업 | 문신, 외교관 |
개요
조엄(趙曮, 1719년 ~ 1777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외교관으로, 일본에서 고구마를 가져와 조선에 보급하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로 유명하다. 본관은 풍양 조씨이며,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영조 재위 시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동래부사, 경상도관찰사, 공조판서, 이조판서, 평안도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지방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조세 부담을 줄이고 곡물 운송체계를 개선하는 등 민생과 관련된 정책을 추진했으며, 1763년에는 조선통신사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어 일본을 방문했다.
오늘날 조엄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이유는 바로 이 통신사행에서 대마도의 고구마를 발견하고 조선에 종자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고구마가 척박한 환경에서도 재배할 수 있고 여러 방식으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흉년에 백성들의 굶주림을 덜어줄 수 있는 작물이라고 판단했다.
1763년 10월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구한 조엄은 일부를 부산진으로 보냈으며, 1764년 귀국길에도 다시 종자를 확보하여 재배를 시도하도록 했다. 이 사실은 조엄이 직접 남긴 《해사일기》(海槎日記)에 기록되어 있다.[1]
그러나 고구마를 조선에 가져온 일과 실제로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에 보급한 일은 구분해야 한다. 최초로 들여온 종자는 보관과 월동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후 강필리와 이광려 등 여러 인물들의 노력으로 재배기술이 발전했다.
따라서 조엄은 고구마를 조선에 도입한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재배되는 고구마를 혼자 힘으로 모두 보급한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이러한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조엄의 역사적 공헌은 상당하다. 조선 후기에는 흉년과 기근이 반복되어 많은 백성들이 식량 부족에 시달렸으며, 고구마는 기존의 곡식을 보완할 수 있는 구황작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외교사절로 갔다가 먹을 수 있는 뿌리작물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훗날 한반도의 식생활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조엄은 고구마 도입 외에도 상당한 관료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경상도관찰사 시절에는 조창을 설치하여 세곡 운송을 개선했으며, 평안도관찰사로 재임하면서 재정문제와 지방행정의 폐단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정치적인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한 뒤 홍국영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과거 평안도관찰사 재임 중의 부정 혐의가 다시 문제가 되면서 유배되었다.
이후 평안도 위원에서 경상도 김해로 유배지가 옮겨졌으나 1777년 귀양살이 도중 사망했다. 사후인 1794년에 신원되었으며, 1814년에는 좌찬성에 추증되었다.[2]
한편 조엄은 19세기 조선의 권력을 장악했던 풍양 조씨 세도정치 가문의 조상이기도 하다. 그의 손자인 조만영과 조인영은 순조와 헌종 시대에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했으며, 증손녀 신정왕후 조씨는 효명세자의 아내이자 헌종의 어머니가 되었다.
생애
출생과 가문
조엄은 1719년 풍양 조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원주와 연고가 깊은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에는 그의 묘역과 기념관이 남아 있다.
아버지는 조상경(趙尙絅)으로, 이조판서와 판돈녕부사 등을 지낸 고위 문신이었다. 할아버지는 조도보(趙道輔), 증조부는 조중운(趙仲耘)이었으며, 어머니는 이정태(李廷泰)의 딸이었다.
조엄은 이러한 관료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유교 경전과 문장, 정치와 행정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당시 조선에서는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거치는 것이 양반 남성의 주요한 관직 진출 경로였다.
풍양 조씨는 훗날 19세기 조선에서 중요한 외척 가문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조엄이 활동하던 18세기의 풍양 조씨와 이후 세도정치 시기의 정치적인 위상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조엄의 후손들이 왕실과 혼인하면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그의 사망 이후의 일이었다.
과거 급제
1738년(영조 14년) 조엄은 생원시에 합격했다. 이후 음보를 통해 내시교관과 세자익위사시직 등의 관직을 지냈다.
1752년(영조 28년)에는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면서 본격적인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사간원의 정언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사헌부 지평과 홍문관 수찬·교리 등을 역임했다.
정언과 지평은 각각 사간원과 사헌부에 소속된 관직으로, 왕에게 간언하거나 관리들의 잘못을 감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엄은 이러한 관직을 거치면서 중앙정치와 행정업무에 관한 경험을 쌓았다. 이후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실제 지역사회의 경제와 행정 문제를 담당하게 되었다.
동래부사
1757년 조엄은 동래부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동래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와 무역을 담당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은 외교관계를 재개했으며, 부산의 왜관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의 교역과 외교활동이 이루어졌다.
동래부사는 왜관의 일본인들을 관리하고 일본에서 파견된 사절들을 접대했으며, 양국 사이의 외교적인 문제를 처리했다. 또한 밀무역과 분쟁, 출입과 이동에 관한 규정을 관리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조엄은 동래부사로 재임하면서 일본인들과 접촉할 기회를 얻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조선통신사의 정사로 파견되었을 때 일본의 외교관행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동래부사를 지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이미 고구마에 관한 충분한 재배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의 기록에서는 일본 통신사행 도중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발견하고 그 활용 가능성을 파악한 과정이 중요하게 나타난다.[1]
경상도관찰사
1758년 조엄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관찰사는 조선의 지방행정을 총괄하는 고위 관직으로, 해당 도의 행정과 조세, 군사와 사법 등 여러 분야에 관여했다.
조엄은 경상도관찰사 재임기간에 지역의 조세 부담과 곡물 운송 문제를 개선하려고 했다. 당시 농민들은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뿐 아니라 세곡을 납부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운송과 노동의 부담도 지고 있었다.
조엄은 밭에 부과되는 세금의 감면 비율을 조정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줄였으며, 경상도 지역의 사노비들이 부담하던 노비공을 감면하는 정책도 추진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그는 경상도에서 약 1만 명에 이르는 사노비의 노비공을 감면하여 불만을 완화하려 했다.[2]
이러한 정책을 오늘날의 신분제 폐지나 노비 해방과 동일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당시 조엄이 추진한 것은 기존의 신분제와 조세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부담 경감 조치였다.
조창 설치와 조운 개선
조엄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하면서 남긴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조운(漕運) 제도의 개선이다.
조운은 지방에서 거둔 세곡을 배를 이용하여 중앙정부에 운송하는 제도다. 조선에서는 쌀과 곡물로 세금을 납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세곡을 효율적으로 운송하고 보관하는 일이 국가재정의 중요한 문제였다.
조엄은 창원의 마산창(馬山倉)과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등 조창을 설치했다. 이를 통해 경상도 연해지역에서도 조운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여 세곡 납부에 따르는 민폐를 줄이고 국가의 재정 수입을 안정시키려 했다.
이러한 정책은 고구마 도입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조선의 지방행정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조세를 징수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운송비용과 노동 부담을 줄이는 일은 지방민들의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조엄의 행정적 관심이 단순한 학문이나 문장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농민들의 생활과 국가재정의 운영에까지 미쳤다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
1763년 조엄은 일본에 파견되는 조선통신사의 정사로 임명되었다.
조선 통신사는 조선 국왕의 외교문서를 일본의 에도 막부에 전달하고, 양국 사이의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파견된 공식 사절단이다.
통신사는 보통 정사와 부사, 종사관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역관과 의원, 화원과 악사, 군관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동행했다.
1763년에 출발한 사절단은 계미년에 파견되었다는 이유로 계미통신사(癸未通信使)라고 불린다.
조엄이 파견된 목적은 일본의 제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취임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에도 막부의 통치 아래 있었으며,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는 주로 동래와 대마도를 연결하는 통로를 통해 유지되고 있었다.
조엄은 사절단의 최고 책임자로서 외교문서 전달과 의례, 수행원 관리 및 일본 측과의 협상 등을 담당했다.
영조의 격려
1763년 8월 3일 영조는 통신사 정사로 임명된 조엄에게 호왕호래(好往好來)라는 글을 하사했다.
이는 잘 다녀오고 무사히 돌아오라는 의미다.
당시 조선에서 일본까지 이동하는 여정은 상당한 위험을 수반했다. 바다를 건너야 했으며, 일본에 도착한 이후에도 대마도와 규슈, 세토 내해와 육로를 이용하여 에도까지 이동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기상악화와 질병, 선박 사고와 외교적 분쟁 등이 발생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국왕이 사절단의 안전한 귀환을 기원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조엄은 이러한 국왕의 명령을 받고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어 일본으로 출발했다.[1]
일본으로 출발
조엄 일행은 1763년 10월 6일 부산을 출발하여 대마도로 향했다.
이후 일본의 여러 항구와 도시를 거쳐 에도로 이동했다. 여정에는 수많은 수행원과 선박, 일본 측의 안내와 접대 인력이 동원되었다.
통신사는 외교문서를 전달하는 역할뿐 아니라 양국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학문과 문화를 교류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조선의 학자들은 일본의 문인들과 시문을 주고받았으며, 일본의 생활문화와 제도, 농업과 경제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조엄 역시 일본에서 관찰한 여러 사항을 자세히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은 훗날 《해사일기》라는 자료로 전해지게 되었다.
고구마의 도입
조엄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조선에 고구마를 도입한 것이다.
고구마는 원래 아메리카 대륙에서 재배되던 작물로, 이후 유럽인들의 해상활동과 무역을 통해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류큐, 일본 등지로 퍼져 나갔으며, 18세기에는 일본의 대마도에서도 재배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농업은 쌀과 보리, 조와 기장 등 여러 곡물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흉년이 발생하면 곡물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지역에 따라 심각한 식량 부족이 발생했다.
따라서 기존의 작물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구황작물을 확보하는 일은 국가와 백성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1763년 대마도에서 발견
1763년 10월 조엄은 대마도 북부의 사스나(佐須奈)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조선에서는 일반적으로 재배되지 않던 뿌리작물을 발견했다. 현지에서는 이를 감저(甘藷) 또는 효자마(孝子麻)라고 부르고 있었다.
조엄은 고구마의 생김새와 맛, 조리방법과 재배환경 등을 자세히 조사했다.
그가 《해사일기》에 남긴 기록에 따르면 고구마는 모양이 일정하지 않았으며 마와 무, 오이나 토란과 비슷하게 생긴 것도 있었다. 맛은 달면서도 밤과 비슷한 특징이 있었고, 날것으로 먹거나 구워서 먹을 수 있었다.
또한 삶아서 먹거나 곡식과 섞어 죽을 만들 수 있었으며, 떡과 여러 음식의 재료로 활용할 수 있었다.
조엄은 고구마가 여러 방식으로 먹을 수 있는 작물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아울러 흉년이 발생했을 때 부족한 식량을 보완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1]
일본에 외교사절로 파견되었는데, 일본의 정치와 외교만 조사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먹고살 수 있는 새로운 작물까지 찾아낸 것이다.
최초의 종자 반입
조엄은 고구마를 발견한 뒤 종자를 확보하여 조선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는 대마도에서 고구마 몇 말을 구해 부산진으로 보냈다. 당시 부산진첨사는 이응혁이었다.
이응혁은 조엄이 보낸 고구마를 받아 보관하고 재배를 준비했다.
그러나 고구마는 추위에 약한 작물이다. 보관온도가 낮아지면 냉해를 입거나 썩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조선의 겨울을 견디도록 종자를 보관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결국 최초로 전달된 고구마는 월동에 실패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사실은 작물의 도입과 실제 재배가 서로 다른 문제라는 점을 보여준다. 새로운 작물을 발견하고 가져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해당 지역의 기후와 토양에 맞는 보관 및 재배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고구마를 재배할 때에는 건강한 씨고구마를 보관하고, 여기에서 자란 줄기와 순을 이용하여 재배하는 방식이 활용된다.
따라서 당시 기록에서 사용하는 '고구마 종자'라는 표현을 현대 식물학에서 말하는 씨앗과 완전히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일반적으로는 다음 재배에 사용할 씨고구마 등 번식 재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1764년 두 번째 반입
조엄은 일본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과정에서 다시 대마도에 들렀다.
1764년 6월 18일의 《해사일기》에는 귀국길에 고구마를 다시 확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처음 대마도를 방문했을 때 고구마를 구해 부산진에 보냈으며, 돌아오는 길에도 다시 종자를 구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동래의 관리에게 고구마를 전달하여 재배하도록 하고, 사절단의 다른 수행원들도 고구마를 가져갔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조엄의 고구마 도입은 단순히 우연히 고구마 몇 개를 가져온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작물을 조선에서 재배하기 위한 의도적인 시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원주시가 소개하는 조엄기념관 자료에서도 1763년 첫 반입과 1764년 두 번째 반입을 구분하고 있다.[3]
조엄이 고구마를 주목한 이유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온 이유는 단순히 낯선 외국의 식품을 맛보고 싶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의 고구마 재배와 식생활을 관찰하면서 이를 조선의 식량문제에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흉년이 발생하면 일반 백성들이 곡식을 구하기 어려워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국가에서 구휼정책을 시행하기도 했지만 지역에 따라 식량 공급에 한계가 있었다.
고구마는 따뜻한 지역에서 비교적 잘 자라며, 일정한 조건에서는 기존 곡물의 생산이 어려운 토지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또한 수확한 뿌리를 직접 먹거나 여러 음식의 재료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식량 부족에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고구마가 모든 흉년을 해결할 수 있는 만능작물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고구마 역시 기온과 강수량, 토양과 병해충, 저장기술 등에 영향을 받으며, 생산된 고구마를 보관하고 운송하는 과정에서도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마를 성공적으로 활용하려면 종자 확보뿐 아니라 실제 농민들이 재배할 수 있는 기술과 유통체계를 마련하는 일이 중요했다.
고구마 재배와 보급
초기 재배의 어려움
조엄이 고구마를 들여왔다고 해서 곧바로 조선 전역에서 재배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고구마는 원래 따뜻한 기후에 적응한 작물이므로 조선의 겨울에는 종자의 보관이 어려웠다. 또한 고구마를 언제 심고 어떤 방식으로 기르며, 어느 시기에 수확해야 하는지에 관한 실질적인 경험도 부족했다.
당시 농민들이 오랫동안 재배했던 벼와 보리, 콩 등과 비교하면 전혀 새로운 작물이었다.
고구마의 재배에 필요한 지식은 실제 실험과 실패를 통해 축적되어야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방관과 학자, 농민들의 협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엄은 도입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이후 다른 사람들의 시도와 연구를 통해 재배법이 점차 발전했다.
강필리의 역할
고구마의 실제 재배와 보급에서 중요한 인물이 강필리(姜必履)다.
강필리는 1764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문신으로, 조엄이 일본에서 가져온 고구마에 관심을 가지고 재배기술을 연구했다.
그는 고구마를 실제 농업현장에 정착시키기 위해 종자를 구하고 재배방법을 조사했다.
또한 고구마 재배법을 정리한 《감저보》(甘藷譜)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설명되어 왔으나, 이후 다른 문헌에 수록된 관련 내용이 확인되어 연구되고 있다.[4]
강필리의 활동은 조엄이 가져온 고구마가 조선에서 실제로 재배되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엄이 고구마를 발견해 가져온 사람이라면, 강필리는 그 고구마를 조선의 땅에서 어떻게 기를 수 있는지 연구하고 보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활동은 서로 경쟁적인 업적이라기보다 하나의 새로운 작물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한 사례다.
최초 재배 시점에 관한 논쟁
고구마가 조선에서 처음 재배된 정확한 연도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1763년 조엄이 종자를 보낸 뒤 1764년 부산 영도 등에서 재배가 시도되었다고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2015년 부산에서 개최된 학술 심포지엄에서는 강필리 가문의 기록을 근거로 본격적인 첫 파종 시점이 1765년 봄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당시 공개된 기록에는 1764년 조엄이 가져온 고구마를 다음 해인 1765년 봄 절영도와 동래에 심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자료를 공개한 연구자는 기존에 알려진 1764년보다 1765년이 실제 재배 시점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다.[5]
또 다른 자료에서는 1763년 첫 종자 반입 이후 이응혁이 시험 재배를 준비했고, 1764년 부임한 강필리가 다시 종자를 구해 1765년에 재배를 진행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조엄이 고구마를 조선에 처음 보낸 1763년이라는 시점은 문헌기록으로 비교적 명확하지만, 최초의 성공적인 재배가 정확히 언제 어디서 이루어졌는지는 기록의 해석과 재배 성공의 기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조엄이 직접 고구마를 심어 전국에 보급하는 데 성공했다고 단정하는 설명 역시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광려의 역할
이광려(李匡呂, 1720년 ~ 1783년)는 조선 후기의 학자로, 고구마 도입과 보급에 관심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조엄이 일본에서 고구마를 가져오기 이전부터 중국의 농업서적을 통해 고구마의 존재와 재배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1762년에는 중국에 다녀오는 사신을 통해 고구마 종자를 구하려 했으나 운송 과정에서 종자가 말라 죽으면서 실패했다.
이후 조엄이 일본에서 고구마를 가져오자 이를 재배하려고 했지만 초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강필리 등의 고구마 재배 연구와 보급활동으로 이어졌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엄의 종자 반입이 이루어진 뒤 이광려와 강필리, 성해응과 서영보 등 여러 인물들의 연구와 교류를 통해 고구마가 조선 사회에 점차 확산되었다고 설명한다.[6]
이러한 사실은 고구마 도입이 조엄 한 사람의 우연한 발견으로만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조선의 일부 학자들은 이미 외국의 농업서적을 통해 새로운 작물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실제 종자를 확보하고 재배법을 익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조엄은 이러한 관심이 실제 작물의 반입으로 이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고구마의 전국적 확산
고구마는 도입 초기부터 전국적인 식량작물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기후가 비교적 따뜻한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재배가 시도되었다. 이후 종자의 보관과 재배방법에 관한 경험이 축적되면서 점차 재배지역이 확대되었다.
고구마의 보급에는 여러 농업서적도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김장순의 《감저신보》(甘藷新譜, 1813년)와 서유구의 《종저보》(種藷譜, 1834년) 등이 있다.
이러한 문헌들은 고구마를 재배하고 보관하는 방법을 정리하여 후대의 농업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고구마가 조선 사회에 광범위하게 정착하는 과정은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따라서 1763년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온 순간부터 전국의 백성들이 곧바로 고구마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고구마라는 이름
조엄이 남긴 《해사일기》에서는 고구마를 감저(甘藷) 또는 효자마(孝子麻)라고 기록했다.
감저는 달콤한 뿌리작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던 한자어다. 효자마라는 명칭은 고구마가 부모를 봉양하는 데 도움이 될 정도로 유용한 식량이라는 의미와 연결되어 설명되기도 한다.
조엄은 현지에서 이를 일본어로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다는 내용도 남겼다.
오늘날 한국어의 고구마라는 명칭이 이러한 일본어계 표현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이 널리 알려져 있다.
다만 고구마라는 이름의 정확한 어원과 발음 변화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따라서 《해사일기》에 고귀위마라는 음차표기가 등장했다는 사실과 현대 한국어 고구마의 어원이 완전히 확정되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고구마라는 명칭이 조엄의 《해사일기》에 기록된 일본어식 표현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소개하고 있다.[2]
감자와 고구마
오늘날에는 감자와 고구마를 서로 다른 작물로 구분한다.
감자는 가지과 식물이며, 고구마는 메꽃과 식물이다. 감자는 주로 땅속줄기가 커진 덩이줄기를 먹는 반면 고구마는 뿌리가 비대해진 덩이뿌리를 먹는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감자와 고구마를 가리키는 이름이 오늘날처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으며, 감저라는 표현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문헌에 감저라는 단어가 등장했다고 해서 언제나 현대적인 의미의 감자 또는 고구마 가운데 하나로 자동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헌이 작성된 시기와 기록된 작물의 특징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구마 도입의 역사적 의미
구황작물 확보
조엄의 고구마 도입은 조선 후기의 식량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기상재해와 흉년, 곡물 가격 상승 등으로 식량 부족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었다. 농민들은 쌀과 보리, 조와 콩 등 여러 작물을 재배했지만, 특정 지역에서 큰 흉년이 발생하면 식량 공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고구마는 기존의 곡물 생산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식량자원이었다. 재배환경이 적합하다면 수확량을 확보할 수 있으며, 다양한 조리방법으로 식량에 활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엄이 고구마를 구황작물로 주목한 것은 당시의 민생 문제와 연결된 판단이었다.
기술의 도입과 보급
고구마의 도입은 외국에서 새로운 물건을 가져오는 것과 그것을 실제 사회에 정착시키는 일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조엄이 종자를 가져온 뒤에도 고구마는 보관과 재배에서 여러 문제를 겪었다. 이후 강필리와 이광려 등 여러 인물들이 재배방법을 연구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기술을 축적했다.
이러한 과정은 농업기술의 발전이 단순히 외국의 작물을 들여오는 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환경에 맞추어 적응시키고 지식을 공유하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구마를 한 번 가져오는 것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할 수 있지만, 조선의 겨울을 견디게 하고 농민들이 매년 다시 심을 수 있도록 만드는 데에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교류
조엄의 고구마 도입은 조선통신사가 단순히 외교문서를 전달하는 조직만은 아니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통신사행에는 여러 분야의 학자와 기술자, 예술가들이 참여했으며, 이들은 일본의 문화와 기술, 제도와 생활방식 등을 관찰했다.
조엄 역시 일본의 농업과 생활문화를 조사하면서 조선에 활용할 수 있는 정보를 수집했다.
이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교류가 외교적인 의례뿐 아니라 농업기술과 생활문화 등 실제 사회의 여러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례다.
그러나 이러한 교류를 당시 조선이 일방적으로 일본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관계였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일본 역시 조선통신사를 통해 조선의 문학과 학문, 음악과 회화 등 여러 문화를 접했다.
해사일기
《해사일기》(海槎日記)는 조엄이 1763년부터 1764년까지 조선통신사의 정사로 일본을 방문하면서 작성한 기록이다.
정식 명칭으로 《조제곡해사일기》(趙濟谷海槎日記)라는 표현도 사용된다.
이 책에는 일본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관찰한 여러 사실과 외교적인 업무, 사절단의 생활과 일본인들과의 교류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사행 과정에서 주고받은 외교문서와 시문, 수행원들의 활동, 여행경로와 풍속 등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고구마 도입에 관한 내용 역시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기록의 가치
《해사일기》는 단순히 여행 중의 감상을 남긴 일기가 아니다.
조선통신사의 최고 책임자가 공식적인 외교활동을 수행하면서 관찰하고 경험한 내용을 남긴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다.
이 책을 통해 당시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뿐 아니라 일본의 생활문화와 경제활동, 농업과 기술 등에 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선의 사신들이 일본의 정치와 사회를 어떤 관점에서 이해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기록이 현대적인 의미의 객관적인 조사보고서라고 볼 수는 없다. 조엄 개인의 관찰과 판단, 조선 관료로서의 정치적·문화적 입장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일본의 기록과 다른 조선통신사 수행원들의 문헌을 함께 살펴보면 보다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일본의 농업과 기술
조엄은 고구마 외에도 일본의 농업기술에 관심을 가졌다.
1764년 1월에는 일본에서 수차(水車)를 관찰했으며, 수행원들에게 제작방식을 조사하고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그는 이러한 수차를 조선의 농업에 도입하면 논에 물을 공급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여러 배를 연결하여 만든 배다리와 제방시설 등에 관심을 가지고 조선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했다.
이는 조엄이 새로운 작물 하나에만 관심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외국의 기술과 생활방식을 관찰하면서 조선의 농업과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1]
통신사 수행원 피살사건
조엄이 이끌었던 1763~1764년 통신사행에는 고구마 도입 외에도 심각한 외교적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1764년 오사카에서 발생한 조선통신사 수행원 최천종의 피살사건이다.
오사카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1764년 4월 7일 새벽 조선통신사의 수행원이었던 최천종이 일본 오사카의 숙소에서 흉기에 찔렸다.
그는 조선통신사의 집사와 도훈도 등의 업무를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최천종은 일본인에게 칼로 공격당했다고 진술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공식적으로 파견된 조선의 외교사절단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은 양국 사이의 심각한 외교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조엄은 사절단의 최고 책임자로서 일본 측에 사건의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건 초기에는 검시와 조사절차를 둘러싸고 양측 사이의 갈등이 발생했다.
조엄은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기 전까지 귀국길에 오를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으며, 사절단 내부에서도 안전에 대한 불안이 커졌다.
일본 측의 조사
사건 발생 이후 일본 측은 대마도의 통역관이었던 스즈키 덴조(鈴木傳藏)를 체포했다.
그는 최천종과의 다툼 끝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스즈키 덴조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조선 측은 범인의 처벌을 직접 확인할 것을 요구했으며, 결국 1764년 5월 2일 사형 집행을 참관했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 측 기록에서는 일본이 사건을 충분히 조사하지 않고 서둘러 종결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따라서 스즈키 덴조가 공식적으로 살인범으로 처벌되었다는 사실과 사건의 모든 배경이 완전히 밝혀졌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해사일기》에는 사건의 진행과 조엄의 항의, 일본 측과의 협상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7]
사건의 의미
최천종 피살사건은 조선통신사의 외교활동이 항상 평화롭고 원활하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통신사는 조선과 일본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사절단이었지만, 실제 방문 과정에서는 외교적인 의례와 수행원들의 행동, 사건 처리절차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조엄은 외교사절단의 최고 책임자로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오늘날 조엄은 고구마를 가져온 인물로 주로 기억되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최고 정치권력과 외교적인 문제를 협상하고 수행원의 피살사건을 처리해야 했던 외교관이었다.
통신사 귀국 이후
조엄은 1764년 일본 방문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귀국 이후에는 다시 중앙정부의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대표적으로 대사간과 한성부우윤, 예조참판과 공조참판, 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는 일본 방문에서 경험한 여러 사실을 《해사일기》로 정리했으며, 고구마의 도입과 관련된 공적으로도 후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관료 생활은 통신사행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후 이조판서와 평안도관찰사 등 고위직에 임명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행정에 관여했다.
평안도관찰사
1770년 조엄은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는 이조판서로 재임하고 있었으며, 영의정 김치인의 천거를 받아 평안도로 파견되었다.
평안도는 조선의 북서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중국과의 교역과 국경관리 등 여러 중요한 업무가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조엄은 평안도관찰사로서 감영의 재정문제와 지방행정의 폐단을 해결하려고 했다.
감영의 공채 징수
당시 평안도 감영에는 오랫동안 정리되지 않은 공채가 존재했다.
조엄은 약 30만 냥에 이르는 공채를 징수하여 감영의 재정을 정리하려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러한 조치를 지방행정의 오랜 폐단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으로 설명한다.[2]
그러나 공채를 징수하는 과정에서는 지방의 토호세력과 갈등이 발생했다.
조엄에 반대한 사람들은 그가 재정징수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웠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은 이후 그의 정치적 경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부정 혐의와 논쟁
조엄은 평안도관찰사 재임 중 탐학과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혐의의 성격과 실제 책임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엄에게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그가 강압적인 징수와 지방행정의 부정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반면 그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지방의 기득권 세력이 재정개혁에 반발하여 부당한 혐의를 제기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조엄은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정치적인 상황이 변화하면서 이전의 혐의가 다시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평안도관찰사 재임 시기의 논쟁을 단순히 완전히 결백한 청백리가 억울한 누명을 썼다거나 명백한 부패관료가 정당한 처벌을 받았다는 식으로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실제 행정행위와 당시의 정치적 갈등, 후대의 신원 과정 등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조 즉위와 몰락
정조의 즉위는 조선의 정치세력 사이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조정에서는 사도세자와 정조의 왕위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인물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정조는 즉위 이후 자신을 반대했던 정치세력에 대한 조치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홍인한과 정후겸 등 여러 인물이 처벌받았다.
홍국영의 탄핵
홍국영은 정조 즉위 초기 중요한 권력을 행사한 정치인이다.
그는 정조의 왕위 계승을 지원했으며, 즉위 이후에도 왕의 측근으로 활동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대했다.
조엄은 홍인한과 정후겸 등 정조에게 반대했던 정치세력과 관련되어 있다는 혐의를 받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홍국영이 조엄이 이러한 세력과 결탁했다고 무고했다고 설명한다.[2]
이러한 상황에서 조엄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또한 평안도관찰사 시절의 부정 혐의가 다시 문제가 되면서 정치적인 입지가 더욱 약화되었다.
유배
조엄은 결국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다.
당시 위원은 조선의 북서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는 과거 지방관으로 재임할 때 백성들에게 부당한 부담을 지웠다는 혐의 등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아들 조진관이 아버지의 처벌에 대해 호소하면서 사형을 면할 수 있었으며, 유배지는 경상도 김해로 변경되었다.
조엄은 김해에서 귀양살이를 계속하다가 1777년 사망했다.
조선에 새로운 구황작물을 들여오고 이조판서까지 지냈던 고위 관료가 말년에는 정치적인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생을 마친 것이다.
이러한 생애는 조선 후기의 관료들이 국왕의 교체와 정치세력의 변화에 얼마나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사후 신원
조엄은 사망 이후에도 오랫동안 정치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1794년(정조 18년) 좌의정 김이소와 평안도안핵어사 이상황 등의 노력으로 조엄의 신원이 이루어졌다.
이는 과거의 처벌과 관련하여 명예를 회복하는 조치였다.
1814년(순조 14년)에는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다만 사후에 신원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평안도관찰사 재임 중에 발생했던 모든 행정적 갈등과 혐의가 역사적으로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신원과 추증은 당시 국가권력이 고인의 정치적인 명예와 지위를 회복하는 조치이므로 실제 행정행위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는 구분해야 한다.
풍양 조씨와 후손
조엄의 후손들은 19세기 조선의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아들 조진관과 손자인 조만영, 조인영이다.
조진관은 문신으로 활동했으며, 조엄이 유배되었을 때 아버지의 구명을 위해 호소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조만영
조만영(趙萬永)은 조엄의 손자로, 조선 후기의 고위 문신이다.
그의 딸은 효명세자와 혼인하여 훗날 신정왕후 조씨가 되었다.
따라서 조엄은 신정왕후의 증조부이며, 헌종에게는 외가의 고조부에 해당한다.
조만영은 이러한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조인영
조인영(趙寅永)은 조만영의 동생이자 조엄의 손자다.
그는 순조와 헌종 시대에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했으며, 영의정에 오르는 등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조만영과 조인영 형제는 안동 김씨와 함께 조선 후기의 외척정치를 대표하는 세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흐름은 일반적으로 풍양 조씨 세도정치라고 불린다.
그러나 조엄이 살아 있을 때부터 이러한 세도정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조엄은 1777년 사망했으며, 후손들이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대한 것은 수십 년 뒤의 일이었다.
따라서 조엄 자신의 정치적 활동과 후손들의 세도정치를 구분하여 평가할 필요가 있다.
신정왕후 조씨
신정왕후 조씨는 조엄의 증손녀이자 조만영의 딸이다.
그녀는 효명세자와 혼인했으며, 이후 헌종의 어머니가 되었다.
훗날 철종이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고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조엄은 조선 후기 왕실의 계보에서도 의미를 가진 인물이다.
고구마를 가져온 외교관의 증손녀가 훗날 조선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고, 그 후손들은 세도정치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한 것이다.
조엄의 묘역과 기념관
원주 조엄 묘역
조엄의 묘역은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에 위치한다.
묘역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9호로 지정되었으며, 조엄의 무덤과 신도비 등이 남아 있다.
신도비는 1835년(헌종 원년)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남공철이 짓고 김이재가 글씨를 썼으며, 김재창이 새겼다.
이러한 신도비는 조엄의 생애와 관직, 사후의 평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8]
조엄기념관
조엄기념관은 조엄의 생애와 고구마 도입에 관한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시설이다.
원주시 지정면 간현웃말길 46에 위치하며, 조엄이 일본에서 고구마를 발견하고 조선에 가져온 역사 등을 소개한다.
원주시는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온 공로를 지역의 역사·문화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조엄의 이름을 활용한 고구마 상품과 지역 홍보활동도 진행해 왔다.[3]
조엄고구마
오늘날 원주에서는 조엄의 이름을 활용한 조엄고구마 등의 지역 브랜드가 사용된다.
이는 조엄이 원주와 연고가 있는 역사적 인물이며, 고구마의 조선 도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서 유래했다.
다만 조엄이 고구마를 처음 가져왔다는 사실과 오늘날 원주에서 판매되는 특정 품종의 고구마가 18세기에 조엄이 가져왔던 고구마와 유전적으로 동일하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오늘날의 농업에서는 새로운 품종이 개발되고 재배방식도 변화하기 때문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활용한 상품이 반드시 당시의 원래 품종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산 영도와 조내기 고구마
부산광역시 영도구는 조선에서 고구마 재배가 처음 시도되었던 지역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당시 영도는 절영도(絶影島)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일본의 대마도와 비교적 가까운 남부 해안지역이었다.
조엄이 가져온 고구마는 부산진과 동래 지역의 관료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이후 영도와 동래에서 재배가 시도되었다.
영도에서는 이러한 역사와 관련하여 조내기 고구마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오늘날에는 조내기 고구마 역사공원과 관련 기념시설 등을 통해 지역의 고구마 도입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다만 조내기라는 이름의 정확한 어원과 명칭이 처음 사용된 시기 등에 관해서는 지역에서 전하는 설명과 문헌기록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영도에서 최초 재배가 이루어진 정확한 시점 역시 1764년과 1765년을 제시하는 자료가 존재한다.
따라서 부산 영도가 고구마의 초기 재배지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과 조선에서 최초로 성공적인 재배가 이루어진 장소와 연도가 완전히 확정되었다는 주장은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
문익점과의 비교
조엄은 일본에서 고구마를 가져왔다는 이유로 목화를 들여온 문익점과 비교되기도 한다.
문익점은 고려 말기에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목화는 이후 한반도의 의생활과 직물 생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고구마는 농업과 식량 공급에 영향을 미쳤다.
두 인물 모두 외국에서 새로운 작물의 번식 재료를 가져와 한반도의 사회경제적인 변화에 기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가져온 작물의 용도와 전파 과정은 서로 달랐다.
목화는 주로 섬유와 직물의 생산에 활용되었으며, 고구마는 식량과 구황작물로 이용되었다.
또한 두 작물이 한반도에 정착하는 과정에는 여러 농민과 기술자, 학자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문익점이나 조엄이 작물 하나를 가져왔다는 사실만으로 이후의 모든 재배기술과 산업적 성과를 혼자 만들어 냈다고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문익점이 한반도의 의생활에 영향을 미친 작물을 들여온 인물로 기억된다면, 조엄은 식생활에 영향을 미친 작물을 가져온 인물로 기억되는 셈이다.
다만 역사적 인지도가 얼마나 높은지와 실제로 남긴 사회경제적 영향의 크기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평가
농업과 민생에 대한 관심
조엄의 고구마 도입은 조선 후기 관료가 외국의 농업기술과 작물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국내에 활용하려 한 사례다.
그는 동래부사와 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내면서 민생과 지방재정의 문제를 경험했으며,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과정에서도 농업과 생활기술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경력을 고려하면 고구마 도입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라기보다 지방행정과 민생에 관한 관심이 반영된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오기 이전에도 이광려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고구마의 존재를 알고 재배를 시도했다는 사실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조엄의 공로는 외국의 새로운 농업지식을 발견한 유일한 인물이라는 데 있다기보다 실제 종자를 확보하여 조선에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 있다.
지방행정가로서의 능력
조엄은 고구마 도입 외에도 여러 지방관직을 역임했다.
경상도관찰사 시절에는 조세 부담을 줄이고 조창을 설치했으며, 평안도관찰사 재임 시기에는 감영의 재정을 정리하려 했다.
이러한 활동은 그가 실제 행정과 재정운영에 관심을 가진 관료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평안도관찰사 재임 중의 재정징수 문제를 둘러싸고 부정 혐의가 제기되었다는 사실도 존재한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민생을 개선하려 했던 정책과 실제 행정 과정에서 발생했던 갈등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치적인 몰락과 사후 신원
조엄은 영조 시대에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했지만 정조 즉위 이후 정치적인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이는 조선의 관료가 국왕의 교체와 정치세력의 변화에 따라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유배생활 중 사망했으나 사후 1794년에 신원되었다.
따라서 조엄의 생애를 고구마를 가져온 선량한 관리가 평생 존경받으며 살았다는 미담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실제로는 고위 관료로서 여러 정책을 추진했고, 정치적인 갈등에 휘말려 유배지에서 사망했으며, 이후 후손들이 왕실의 외척으로 성장하는 복잡한 삶과 가문의 역사를 남겼다.
주요 관직
| 시기 | 관직 및 활동 |
|---|---|
| 1738년 | 생원시 합격 |
| 1752년 | 정시 문과 급제 |
| 1753년 | 사간원 정언 |
| 1750년대 |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교리 |
| 1757년 | 동래부사 |
| 1758년 | 경상도관찰사 |
| 1760년대 초 | 대사헌, 부제학, 승지, 이조참의 등 |
| 1763~1764년 | 조선 통신사 정사 |
| 1764년 이후 | 대사간, 한성부우윤, 예조참판, 공조참판, 공조판서 등 |
| 1770년 | 이조판서, 평안도관찰사 |
| 1770년대 | 이조판서 등 역임 |
주요 연표
| 연도 | 사건 |
|---|---|
| 1719년 | 풍양 조씨 가문에서 출생 |
| 1738년 | 생원시 합격 |
| 1752년 | 정시 문과 급제 |
| 1753년 | 사간원 정언 임명 |
| 1757년 | 동래부사 임명 |
| 1758년 | 경상도관찰사 임명, 조세 및 조운제도 개선 |
| 1763년 | 조선통신사 정사로 일본에 파견 |
| 1763년 10월 |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발견하고 종자를 부산진으로 보냄 |
| 1764년 | 귀국길에 고구마 종자를 추가로 확보 |
| 1764년 4월 | 오사카에서 통신사 수행원 최천종 피살사건 발생 |
| 1764년 6월 | 일본 방문을 마치고 귀국 |
| 1764~1765년 | 부산·동래·영도 지역에서 고구마 재배 시도 |
| 1770년 | 이조판서 재임 중 평안도관찰사로 파견 |
| 1776년 | 정조 즉위 이후 정치적 탄핵으로 파직·유배 |
| 1777년 | 김해 유배 중 사망 |
| 1794년 | 사후 신원 |
| 1814년 | 좌찬성 추증 |
| 1835년 | 원주 묘역의 신도비 건립 |
여담
- 조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일본에서 고구마를 가져온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1719년에 태어나 1777년에 사망했다. 영조 시대에 관료로 활동했으며 정조 즉위 이후 유배되었다.
- 본관은 풍양 조씨다. 자는 명서, 호는 영호이며 시호는 문익이다.
- 아버지 조상경 역시 조선의 고위 문신이었다.
- 1738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1752년 문과에 급제했다.
- 동래부사와 경상도관찰사, 이조판서와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 1763년에는 조선통신사의 정사로 일본을 방문했다.
- 통신사행에 앞서 영조는 조엄에게 호왕호래(好往好來)라는 글을 하사했다. 무사히 다녀오라는 의미였다.
- 조엄은 일본의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발견하고 이를 조선에 가져오기로 했다.
- 당시 대마도에서는 고구마를 감저 또는 효자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 조엄은 고구마가 흉년의 식량 부족을 보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 1763년 10월 처음으로 고구마 종자를 부산진에 보냈다.
- 그러나 처음 보낸 종자는 추위와 보관상의 문제로 실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764년 귀국길에는 다시 고구마를 구해 조선에서 재배하도록 했다.
- 고구마가 조선에서 처음 성공적으로 재배된 정확한 시점에 대해서는 1764년과 1765년을 제시하는 기록이 존재한다.
- 따라서 조엄이 1763년에 고구마를 가져왔다는 사실과 그해 바로 전국적인 재배에 성공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 조엄이 직접 모든 고구마를 재배하고 전국에 보급한 것도 아니다.
- 강필리와 이광려 등 여러 인물들이 재배방법과 보관기술을 연구하면서 고구마의 정착에 기여했다.
- 강필리는 고구마의 재배법을 정리한 《감저보》를 저술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 이광려는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오기 이전부터 중국의 농서를 통해 고구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 따라서 고구마 도입은 조엄 개인의 발견과 여러 학자들의 농업기술 연구가 연결된 사례다.
- 조엄은 일본에서 고구마만 조사한 것이 아니었다. 수차와 배다리 등 조선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에도 관심을 가졌다.
- 일본 방문 중 관찰한 여러 사실을 《해사일기》에 기록했다.
- 《해사일기》에는 외교문서와 일본인들과의 교류, 시문과 여행경로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조엄이 이끌었던 통신사행에서는 1764년 오사카에서 수행원 최천종이 일본인에게 피살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 조엄은 사건이 제대로 해결될 때까지 귀국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일본 측에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 결국 일본 측은 스즈키 덴조를 범인으로 체포하고 사형에 처했다.
- 조엄은 범인의 처벌과 관련된 외교적인 절차를 처리해야 했다.
- 따라서 조엄의 일본 방문은 고구마를 가져온 평화로운 여행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외교적인 협상과 수행원 피살사건 등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 경상도관찰사 재임기간에는 조창을 설치하고 조운제도를 개선했다.
- 당시 조세와 곡물 운송제도의 개선은 농민들의 부담을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평안도관찰사로 재임할 때에는 감영의 공채 약 30만 냥을 징수하며 재정을 정리하려 했다.
-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지방세력과 갈등이 발생했으며, 이후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았다.
- 정조 즉위 이후에는 홍국영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다가 김해로 유배지가 옮겨졌으며, 1777년 귀양살이 중 사망했다.
- 이후 1794년 신원되었으며 1814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 고구마를 가져와 백성들의 식량문제 해결에 기여한 관료였지만, 정작 자신의 말년은 정치적 몰락과 유배로 끝난 것이다.
- 조엄의 손자는 조만영과 조인영이다. 두 사람은 훗날 풍양 조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 신정왕후 조씨는 조엄의 증손녀다.
- 신정왕후는 효명세자의 아내이자 헌종의 어머니이며, 훗날 고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따라서 조엄은 조선 후기 왕실의 외척 계보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지정면에는 조엄의 묘역과 기념관이 있다.
- 원주에서는 조엄의 고구마 도입을 기념하여 조엄고구마 등의 지역 브랜드를 활용하고 있다.
- 부산 영도구 역시 고구마 초기 재배와 관련된 역사적인 장소다.
- 영도에는 조내기 고구마라는 명칭과 관련 기념시설이 존재한다.
- 조엄은 목화를 들여온 문익점과 비교되기도 한다.
- 그러나 조엄과 문익점 모두 외국에서 작물을 가져온 인물이라는 사실과 이후의 모든 재배기술을 혼자 개발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 문익점이 목화와 연결되어 기억되는 것처럼 조엄은 고구마와 연결되어 기억되는 인물이다.
- 조엄이 일본에서 가져온 고구마는 조선 후기의 식량문화와 농업기술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 다만 고구마의 전국적인 보급은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농민과 학자, 지방관들의 노력으로 점차 진행되었다.
- 오늘날 흔히 먹는 고구마가 원래 한반도에서 자생하던 작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조엄의 통신사행이 남긴 영향은 상당히 흥미롭다.
- 250여 년 전 조선의 한 외교관이 대마도에서 우연히 발견한 작물이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익숙한 간식과 식재료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관련 문서
각주
- ↑ 1.0 1.1 1.2 1.3 1.4 동북아역사재단, 「조엄, 백성의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고구마를 들여오다」
- ↑ 2.0 2.1 2.2 2.3 2.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엄
- ↑ 3.0 3.1 원주관광 - 조엄기념관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강필리
- ↑ 연합뉴스, 「고구마 국내 첫 재배 시기는 1765년」 문헌 공개, 2015년 10월 12일
- ↑ 국사편찬위원회 - 조선 후기의 대표 구황작물: 고구마
- ↑ 경향신문, 「1763년 조선 외교관 오사카 피살사건…고구마 종자에 묻혔다」, 2021년 7월 19일
- ↑ 원주관광 - 원주 조엄 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