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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위기에서 넘어옴)
4단원 →V. 오늘날의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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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의 그 어느 장소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찾아봐도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는 뜨겁게 불타오르는 K-지옥불반도 헬조선만의 수우많은 자랑거리들!!!
이러한 헬조선의 암울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전세계와 우주가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이런 것들과 당신에게 탈조선을 권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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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한민국이 신자유주의 지상지옥으로 변한 원인이다. IMF는 돈을 빌려주는 대신 신자유주의를 강요한다.

본격적인 헬조선의 시작.

1970년대~1990년대 초반생들은 IMF 이전에는 행복했던 자신의 가정을 기억할 것이다.

땡삼 정부와 김영삼이라는 사람의 인생 최대 실책. 그러나 역사 교과서엔 서민의 과소비로 발생한 똥을 국가가 치운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하필 터진 직후 대선이 이뤄져 IMF와 더불어 2중으로 ㅈ될 뻔했지만 자랑스러운 노예들이 자발적으로 금모으기 운동을 시작해 무난하게 극복했다.

많은 병신들이 금모으기 운동 때문에 IMF 극복한 줄 아느냐며 되먹지도 않는 근거 대면서 좆문가 짓을 하는데, 금모으기 운동 덕분에 성공한 거 맞는 말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당시 전국민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금모으기 운동으로 225톤이 넘는 양의 금을 모았고 이게 당시 2조 5천억 달러의 가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정부는 그 외화로 사이버 코리아21 계획을 발표하여 IT산업 발전과 인프라 투자에 용썼다. 이것 덕분에 당시 IT업계 종사자들은 모두 군면제 됐다. ㅈ부럽 시발. 거기에 남북정상회담까지 열려서 경제 발전에 부스터가 걸리니 2000년 12월 초에 IMF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발표했다. 혹시 모를 후폭풍에 대비해 IMF 대책위원회 비슷한 곳은 2001년 중, 하순까지 유지되긴 했지만 극복한 날은 2000년 12월. 당연히 파산 직전인 대기업들에게도 융자 형식으로 지원금을 뿌려주었다. 근데 정작 외환 보유고엔 깜빡하고 안 쌓아놨다가 다 끝난 뒤에 떠올리고 황급히 다시 모았다. 이런 ㅂ...

ㄴ 사실관계 보충: 금모으기 운동의 규모가 225톤을 넘었다는 설명은 맞지만 2조 5천억 달러는 단위가 잘못된 수치다. 국가기록원은 약 351만 명이 참여해 금 227톤, 당시 약 18억 달러 상당을 모았다고 기록한다. 다른 역사자료에서는 약 225톤, 21억 7천만 달러로 집계한다. 집계 기준에 따른 차이가 있지만 어느 쪽이든 2조 5천억 달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액수다.[1][2]

ㄴ 추가 보충: 금모으기 운동이 외화 조달과 국민적 결속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외환위기 극복의 유일하거나 결정적인 재원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외국 은행들의 단기외채 만기 연장, 국제기구의 금융지원, 경상수지 흑자, 금융기관 구조조정 등이 함께 작용했다. 또한 IMF 차입금 전액 상환일은 2000년 12월이 아니라 2001년 8월 23일이며, 사이버 코리아21과 정보통신산업 지원을 금모으기 운동의 수출대금만으로 시행했다는 설명이나 IT업계 종사자 전체가 군 면제를 받았다는 설명은 부정확하다.[3]

근데 반전 하나 알려줄까? 그 와중에 삼성, 헬지, 현대 등 머기업 그룹들은 받은 금을 몰래 빼돌려 2조 원 상당의 금을 착복했다. 정확히는 금을 헐값에 팔아서 10%의 부가세를 받는 방식으로 세금을 포탈했다. 와 이 씨발 소시오패스 새끼들... 뭐 금을 싼 값에 판 것은 급전이 필요했다는 변명으로 어떻게든 퉁칠 수 있겠는데 저 탈세는 그야말로 빼도박도 못할 통수. 한마디로 이 사태를 불러온 인간들이 반성은커녕 국민성금으로 탈세나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만큼은 정부도 머리 끝까지 빡돌아서 관련자들을 모조리 구속했는데 당시 어떤 재벌께선 "성금으로 받은 금에 왜 세금을 먹이냐?"라는, 참으로 누구도 생각하지 하지 못할 일침을 날리셨다. 캬 역시 재벌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ㄴ 사건 구분: 금 유통을 이용한 대규모 부가가치세 포탈 사건이 실제로 적발된 것은 맞다. 2008년 검찰 수사와 언론보도에서는 LG상사와 삼성물산, 현대종합상사 등을 비롯한 기업들의 금괴 변칙거래와 이른바 폭탄업체를 이용한 탈세 구조가 문제 됐다. 그러나 해당 기업들이 금모으기 운동에 참여한 국민의 금을 직접 빼돌려 착복했다는 것과 금괴 유통과정에서 탈세가 발생했다는 것은 다른 주장이다. 당시 수사에서 드러난 변칙거래를 국민이 맡긴 금 전체에 대한 횡령사건으로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며, 원문의 2조 원이라는 숫자 역시 금 자체의 가치와 포탈세액을 구분해야 한다.[4]

뭐 어쨌거나 금모으기 운동은 타국에 자랑해도 좋을 역사에 기록될 운동이다. 니들이 폰 들고 갤질하면서 국산 운빨좆망현질 게임을 하고 있는 것도 이 운동으로 번 외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게 아니었으면 지금 쯤 나나 너네는 방금 막 오픈한 바람의나라, 크레이지 아케이드, 큐플레이, 그랜드체이스 같은 ㅈ고전 게임이나 하고 있었겠지. 특히 외환위기는 그나마 살 만한 90년대에 일어나서 이렇게 나라 살리려고 금 모았지 통수쳐맞은 지금 또 외환위기 터지면 그냥 금 모으기 운동이고 뭐고 오히려 한 번 망해보라면서 그냥 방관할 걸?

ㄴ 금 모아서 번 돈은 20억 달러고 그때 구제금융으로 받은 돈은 500억 달러다. 10%도 안 되는 돈으로 뭘 극복해 대가리 총 맞은 겜창 새끼야

ㄴ 정확하게 말하면 약 584억 달러는 IMF 단독 대출액이 아니라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 각국의 지원 약속을 포함한 전체 금융지원 계획의 규모였다. IMF가 실제로 승인한 대기성 차관은 약 210억 달러였고, 이 가운데 한국이 실제로 인출한 금액은 약 195억 달러였다. 따라서 금모으기 운동과 구제금융 전체를 단순히 나눠 위기 극복의 기여도를 계산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5][6]

그런데 이렇게 나라 경제를 말아먹고 수많은 사람들을 생활고와 가족단위 자살로 몰아넣고 빈부격차를 심화시킨 정치세력이 사라지기는커녕 아직도 기세등등한 나라가 있는데 그게 바로 헬조선이다.

아몰랑 국가가 힘든 건 미개한 국민 때문입니드앙

이게 다 샴페인을 터뜨려서 그래요.

국민들이 절약할 노오력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구요!

근데 요즘은 젊은이들이 너무 소비하지 않는다고 징징거린다. 나중엔 젊은이들이 없는 돈 긁어서 소비할 노오력이 부족했다고 징징거릴 듯.

ㄴ 안 그래도 요즘 젊은 새끼들 지갑 안 열어서 문제라는 말 슬금슬금 나오고 있다 ㅋㅋㅋ 진짜 개같은 틀딱 새끼들

현재의 음울한 인터넷 문화의 시발점이라 봐도 된다. 인터넷 주류인 10~30대는 IMF 경제와 삶을 같이 했다. 인생의 즐거운 기억이 없다는 말로 봐도 된다. 20대 후반부터는 상당수가 IMF 당시 아빠 잘리고 집안 분위기 씹창되던 기억폭력을 겪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엔 초창기였던 헬조선 게임 산업에도 이게 의외로 악영향을 많이 끼친다. 헬조선 게임의 주축중 하나인 현질 존나 하는 쓰레기 겜창들 상당수가 IMF당시 겪은 기억폭력이나 정신적 상처를 해소하겠다고 게임에 돈을 존나 싸지르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당시 학교를 다니던 중 일가족이 단체로 자살해서 어느날 갑자기 교실 책상 위에 국화꽃 놓인 사태를 겪은 학생들도 많다. 사회 전체가 엄청나게 암울했고 아이들이 단체로 학원을 끊거나 도시락이 급격히 부실해지거나 도시락을 못 싸오는 아이들이 엄청 늘었고 어린 아이들의 감성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TV만 틀면 부도...부도...부도...제대로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었고 각 학교에서는 뭔 뻘짓인지 아나바다(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자) 운동이라는 헛소리를 하며 아이들에게서 물건을 강제로 착출하기까지 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김영삼은 민주화의 거두, 하나회 족친 영웅 등에서 땡삼이, IMF로 불리게 되었다. 명실상부 땡삼이 인생의 가장 큰 오책이다. 흥선대원군도 다 잘해놓고 쇄국정책이랑 당백전으로 싹 다 말아쳐드신 것처럼 말이다. 특히 당백전은 19세기의 금융위기라 봐도 무방하다.

한 줄 요약: 김영삼 개새끼 십새끼 애미디진 새끼

개요

1997년 IMF 외환 위기는 1997년 하반기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외화 유동성 위기와 그에 따른 금융·기업 부실, 경기침체, 대규모 구조조정을 통틀어 가리키는 사건이다. 흔히 IMF 사태, IMF 외환위기, 1997년 외환위기 또는 국가부도 위기라고 부른다. 정식으로는 대한민국의 1997~1998년 외환·금융위기라고 설명할 수 있으며,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의 중요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

이 사건의 핵심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일반적인 의미의 재정파탄에 빠졌다는 것이 아니라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갚아야 할 외화부채에 비해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달러가 턱없이 부족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외국 금융기관들이 한국 금융기관에 빌려준 단기자금을 연장하지 않고 회수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외환시장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원화 가치가 떨어지자 달러로 표시된 부채를 갚는 부담은 더 커졌고, 이는 다시 금융기관과 기업의 부실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불러왔다.

1997년 11월 21일 김영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금융지원을 요청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후 12월 3일 IMF와 금융지원 조건에 합의했고, 12월 4일 IMF 집행이사회가 지원을 승인했다. 전체 국제금융지원 계획은 약 584억 달러 규모였으며, IMF 자체의 대기성 차관 승인액은 약 210억 달러였다.[7][5]

대한민국 정부가 2001년 8월 23일 IMF에서 빌린 차입금을 전액 조기 상환하면서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금융지원 체제는 종료됐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생한 대량실업과 기업 도산, 금융기관 통폐합, 고용구조 변화 등은 한국 사회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외환위기의 금융적 종료 시점과 그 사회경제적 후유증이 사라지는 시점은 서로 다르다.

사건 정보

1997년 대한민국 외환위기
발생 1997년 하반기 ~ 1998년
구제금융 요청 발표 1997년 11월 21일
IMF 금융지원 합의 1997년 12월 3일
IMF 이사회 승인 1997년 12월 4일
당시 대통령 김영삼
위기 수습 당시 대통령 김대중(1998년 2월 취임)
금융지원 계획 약 584억 달러(국제기구·국가별 지원 약속 포함)
IMF 실제 인출액 약 195억 달러
최저 가용 외환보유액 1997년 12월 18일 약 39억 4,000만 달러
1998년 경제성장률 약 -6.7% 또는 -6.9%(자료의 통계 기준·개정 시점에 따라 차이)
IMF 차입금 전액 상환 2001년 8월 23일
주요 결과 기업 및 금융기관 구조조정, 대량실업, 노동시장 변화, 외환보유액 확충, 금융감독체계 개편

1998년 경제성장률은 IMF의 당시 통계에서 -6.7%로 기록됐으며, 국가기록원 등 일부 자료에서는 -6.9%로 설명한다. 국민계정의 기준연도 개편과 통계 개정 등에 따라 수치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한 가지 숫자를 영구히 확정된 값으로 취급할 필요는 없다.[8][1]

사건의 진행

1996년: 선진국 클럽 가입과 불안한 기초체력

1996년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당시 정부는 이를 경제발전의 중요한 성과로 홍보했고, 언론에서도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는 평가가 등장했다. 그러나 OECD 가입 자체가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의 건전성을 자동으로 보증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경제는 이미 대규모 기업집단의 과도한 차입과 금융기관의 부실한 대출심사, 단기외채 의존 문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국내 금융기관들이 외국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 돈을 빌려와 국내 기업의 장기 투자나 해외사업에 공급하는 구조가 형성되면서 만기불일치 문제가 커졌다.

한편 정부가 금융시장 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단기자금의 유입과 금융기관의 외화차입에 대한 관리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IMF 독립평가국(IEO)의 사후평가에서도 이러한 불균형한 자본거래 자유화와 감독의 취약성이 위기의 주요 배경으로 지적됐다.[9]

1997년 상반기: 한보와 기아의 위기

1997년 1월 한보그룹의 핵심 기업인 한보철강이 부도 처리되면서 대기업의 과도한 차입과 금융기관의 부실대출 문제가 크게 드러났다. 이후 3월 삼미그룹, 대농과 진로그룹 등 여러 기업이 연이어 경영위기에 빠졌으며, 7월에는 기아그룹이 부도유예협약 대상이 됐다.

당시에는 재벌기업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인식이 존재했지만, 실제로는 무리한 사업확장과 높은 차입금, 취약한 수익구조를 가진 기업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이 연속해서 무너지자 국내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이 증가했고, 해외 금융기관들 역시 한국에 빌려준 돈을 회수할 수 있을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1997년 7월: 태국발 아시아 금융위기

1997년 7월 2일 태국이 바트화의 환율제도를 변경하면서 통화가치가 급락했고, 위기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로 확산됐다. 이후 국제투자자들은 외채 규모가 크고 금융기관이 취약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신뢰를 잃기 시작했다.

한국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산업구조가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해외 단기차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으며, 기업과 금융기관의 재무구조에도 문제가 존재했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금융위기가 확산되면서 한국 역시 해외 차입금을 연장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1997년 10~11월: 달러가 말라버리다

1997년 가을부터 외국 금융기관들은 한국 금융기관에 대한 신용공여를 줄이고 만기가 돌아온 외채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원화의 급격한 가치하락을 막으려 했지만 외환시장의 불안이 심화되면서 외환보유액은 빠르게 감소했다.

당시 외환보유액 가운데 상당 부분은 국내 금융기관에 예치되거나 대출된 상태여서, 통계상 보유액 전체를 즉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1997년 11월 말 가용 외환보유액은 약 73억 달러 수준이었으며, 12월 18일에는 약 39억 4,000만 달러까지 감소했다.[10][11]

1997년 11월 21일: 구제금융 요청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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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21일 김영삼 정부는 IMF에 긴급 금융지원을 요청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는 한국이 사실상 국가부도 직전에 몰렸다는 충격이 확산됐으며, 정부와 대기업, 금융기관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이 격화됐다.

다만 엄밀하게 말하면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국채의 원리금을 지급하지 못한다고 선언한 국가채무 불이행, 즉 소버린 디폴트를 공식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와 민간 금융기관 전체의 외화 지급능력이 심각하게 위협받았다는 의미에서 국가부도 위기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

1997년 12월: IMF 협약과 대통령 선거

1997년 12월 3일 정부는 IMF와 금융지원 조건에 합의했고 다음 날인 12월 4일 IMF 집행이사회가 긴급 금융지원을 승인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높은 금리를 통한 환율 안정, 금융기관의 구조조정, 기업지배구조 개선, 금융시장 개방 확대 등의 조치를 추진하기로 했다.

같은 달 18일 실시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승리했으며, 대한민국은 헌정사상 최초의 여야 간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경험하게 됐다. 그러나 선거가 끝난 뒤에도 금융시장 불안은 즉시 해소되지 않았고, 당선인과 정부는 국제금융기관 및 외국 채권은행과의 협의를 계속해야 했다.

1997년 말~1998년 초: 외채 만기 연장

구제금융 발표 이후에도 해외 금융기관들의 불신이 계속되면서 외환시장의 불안은 완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이에 IMF와 미국 등 주요국의 정책당국, 한국 정부는 해외 채권은행들이 한국 금융기관의 단기외채 만기를 연장하도록 협의했다.

1998년 1월에는 약 240억 달러의 단기 은행채무를 중장기 채무로 전환하는 데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는 한국 금융기관들이 짧은 시간 안에 갚아야 할 달러의 규모를 줄이고 외환시장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2]

1998년: 대량실업과 경기침체

1998년 한국 경제는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었다. IMF가 당시 집계한 실질 GDP 성장률은 약 -6.7%였으며, 실업률은 1997년 연평균 2.6%에서 1998년 약 6.8%로 상승했다. 1999년 2월에는 실업률이 거의 9%에 달하기도 했다.[13]

기업과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고, 가계의 소비와 기업의 투자도 급감했다. 기존의 평생직장이라는 인식이 흔들렸으며, 직장을 잃은 중장년층과 취업을 준비하던 청년층이 동시에 어려움을 겪었다.

1999~2001년: 회복과 조기 상환

1999년부터 한국 경제는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환율의 급격한 상승으로 수입이 감소하고 수출 경쟁력이 변화하면서 경상수지가 큰 폭의 흑자로 전환됐고,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신뢰도 점차 회복됐다.

2000년 12월에는 IMF 대기성 차관 협약 기간이 종료됐으며, 정부는 위기 극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IMF로부터 빌린 돈이 모두 상환된 시점은 그보다 뒤인 2001년 8월 23일이다. 이때 대한민국은 실제 인출했던 약 195억 달러의 IMF 차입금을 전액 조기 상환했다.[6][3]

정부가 주장하는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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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을 달고 싶으면 토론을 파십시오.
ㄴㄴ토론을 안 오니까 ㄴ을 달지.
ㄴㄴㄴ씨발 극혐.

김영삼이 욕을 많이 처먹은 이유. 국민의 과소비 때문에 IMF가 터졌다고 한다.

책임을 국민에게 떠넘기려는 헛소리다. 과소비를 하면 오히려 경제 활성화가 되지 왜 외환 위기가 터지냐. 과소비가 애미 팔아먹을 정도로 심하면 모를까 당시 다른 국가랑 비교해보면 한국은 평균보다 아주 조금 높은 수준이었다.

정부 말로는 한국인이 외제 수입, 해외 여행을 존나 해서 외화가 고갈됐다는 개소릴 치고 있다. 응. 니 애비 정태수.

지금은 그때보다도 외국산 소비재 소비량이 엄청나게 늘었으니 이미 망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근데 왜 안 망하냐? 소리 한방이면 아가리 닥치게 할 수 있다.

ㄴ 정확히는 7차교육과정 중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서 국민의 과소비를 IMF의 발생 원인으로 꼽은 내용이 나온다. 정부에서 그렇게 말했다고 스케일 크게 잡지 말아라...

ㄴ 중고등 교과서처럼 검정이면 모르겠는데 저건 교육부에서 냈는데 사실상 정부 입장일 텐데.

이렇게 정부의 실책을 국민에게 책임을 돌리는 방식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국민의 과소비가 원인이었는가?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을 국민의 외제품 소비나 해외여행으로 설명하는 것은 당시 위기의 금융구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주장이다. 외환위기가 발생한 직접적인 과정은 해외 금융기관들이 한국 금융기관에 빌려준 단기자금을 회수하면서 외화 유동성이 급격하게 부족해진 것이었다.

물론 수입과 소비가 지나치게 증가해 경상수지가 악화되면 환율과 대외지급능력에 부담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소비가 증가했다는 사실만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당시 한국에서는 기업의 높은 부채비율과 금융기관의 부실, 단기외채 의존, 외환시장 방어 실패 등이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원문이 언급한 과거 초등학교 교과서의 설명은 실제 판본과 해당 페이지를 확인해 검증해야 한다. 설령 특정 교과서에 과소비가 원인이라는 표현이 있었다고 해도, 이를 정부가 외환위기의 유일한 원인을 가계의 과소비라고 공식 확정했다는 의미로 확대하는 데는 주의가 필요하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당시 한국 경제를 비판할 때 자주 사용되던 표현 가운데 하나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말이다. 이는 경제성장과 OECD 가입 등의 성과에 취해 금융기관과 기업의 구조적인 취약성을 충분히 관리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담고 있다.

실제로 한국 경제는 외형적인 성장과 수출 확대에도 불구하고 금융기관의 감독과 기업의 회계투명성, 차입구조 관리에서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국가 전체의 낭비나 시민의 도덕성 부족으로만 설명하면 위기의 실제 발생 과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실제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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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응?? 사실인가??? 시발 모르겠다."

1.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화를 위해 빌렸던 돈을 후대 대통령들이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1979년 국가 채무 240조가 1997년까지 이어져 크게 기여했다. 애초에 갚을 능력도 없었는데 밑도 끝도 없이 빌렸다. 한마디로 지가 경제를 성장시켜놓고 뒤처리를 안 한 탓에 망해버린 셈이다. 그러게 적당히 처먹지.

ㄴ 갚기도 전에 재규어 발터ㅂ에 관통 당해서 뒤졌는데 뭐 어쩌라고? 애초에 땡전 정부 전까지만 해도 겨우 개발도상국 진입한 정도의 경제 수준이었다.

ㄴ [1] 이건 좀 억지인 게 1981년도 정부 예산이 7조 8천억 원이었다. 당시 240조 부채가 있었다면 씨발 지금 좆본이 헤븐으로 보일 수준이구만 뭔... 참고로 240조 국가채무 달성한 건 2005년도임. 대체 그거 어디서 가져온 '팩트'냐?

혹자는 박정희 때 대기업 위주의 경제 개발 때문에 IMF가 터졌다고 헛소리하는데, 간접적인 영향이 있을 수는 있어도 직접적으로는 전-혀 관계없다. 왜냐하면 전두환 노태우 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준 차이를 존나 좁혀놨고 국민 70% 이상이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소득의 분배가 잘 되어있었다. 근데 이 모든 걸 땡삼이 이 븅신 새끼가 다 말아먹었다.

ㄴ 사실관계 보충: 1979년 국가채무가 240조 원이었다는 주장은 명백하게 잘못된 수치다. 또한 산업화 시기의 국가채무와 1997년 당시 금융기관·기업의 단기외채를 동일한 종류의 부채로 취급해서도 안 된다. 정부의 국가채무와 민간기업 및 금융기관의 외채는 채무 주체와 상환 구조가 서로 다르다.

다만 정부 주도의 산업정책과 재벌 중심의 기업집단 구조가 장기간 형성되면서 대기업의 높은 차입 의존도와 금융기관에 대한 암묵적인 정부 보증 기대가 나타났다는 문제는 실제로 연구돼 왔다. 따라서 산업화 시기의 경제제도가 1997년 위기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도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이다.

2. 대기업 줄도산. 이것 때문에 삼성이 망하면 한국이 망한다는 헛소리가 나왔다. 망하든 말든 놔두면 될 걸 지들과 친하다고 어차피 망할 회사들 지원했다가 국고가 비어버렸다. 그렇게 해서 회사가 살아났으면 모를까... 다 망했다. 대기업 몰아주기 식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톡톡히 보여준 사례.

ㄴ 애초에 이때 망한 기업들 보면 사업 키운다고 회사 시가총액 300% 대출은 기본이었던 상황이다. 안 망하는 게 더 신기한 꼴이었다. 이때 대출 안 하던 회사들은 대체로 오히려 망한 회사들을 인수해서 커진 경우도 있다.

ㄴ 근데 이때 망한기업들 대부분 상태보면 정상이 아니다. 부채비율이 회사 시총의 200% 이상이 기본이었다. 무리하게 사업확장하다 말아먹은 케이스가 대부분, 더군다나 이새끼들은 정권이랑 유착해서 원래대로라면 이정도의 부채를 안고 운영할수 있는 회사들이 아니다. IMF 당시 가장 부각된 기업이 한보그룹인데 그새끼들 빛만 5조다.

ㄴ 이 여파로 현재의 한국 대기업들은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했을 때 편집증적으로 재정상태를 양호하게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경향이 있다. 다들 IMF 때 주변 대기업들이 어떻게 작살났는지 지켜보았기 때문.

ㄴ 경제적 설명: 기업의 부채비율은 통상 부채총액을 자기자본으로 나누어 계산하며, 원문처럼 시가총액 대비 부채를 일반적인 부채비율과 동일하게 설명하면 안 된다.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은 주가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기업의 장부상 자기자본과도 다르다.

1997년 한국 기업집단의 과도한 차입과 무리한 사업확장은 위기의 중요한 구조적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부실기업을 무조건 방치하는 정책과 모든 기업을 공적자금으로 구제하는 정책은 각각 다른 위험을 갖고 있다. 특히 은행과 대기업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경제에서는 대규모 기업의 갑작스러운 도산이 협력업체와 금융기관으로 확산될 수 있어, 개별 기업의 책임과 금융시스템 전체의 안정성을 구분해서 판단해야 한다.

3. 환율 정책 실패. 김영삼 대통령이 욕 먹는 이유 중 하나다. 국민소득 1만 달러(OECD 가입 조건)를 임기 끝까지 유지하고 싶어서 시행한 정책인데 패망했다. 정확히는 환율이 급등하기 시작한 11월에 하필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이 민감한 시기에 환율이 급등해서 지지율에 영향을 줄까 우려한 정부에서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환율 방어를 해버린 것이다. 처음엔 미국한테 도와달라고 얘기는 했지만 구조적으로 병신이라서 지원해도 한국이 일어설 수 없다고 여기고 거부했다. 금모으기 운동 아니었으면 현재의 그리스처럼 됐을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왜 이게 문제가 되었는지 부연 설명을 하면, 환율 방어를 위해 외환보유고의 달러를 전부 쏟아부어서 나중엔 보유한 외화가 달랑 2만 달러밖에 안 남아있었다. 당연히 외화가 부족해서 제 시간에 외채 상환하지 못 했고 결국 IMF에게 손 내밀었다.

그리고 환율 정책 실패는 관료나 정치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 김영삼 한 놈의 똥꼬집으로 인해 벌어진 거다. 그놈의 1만 불을 지키라고 하고 안 지키면 "니도 전두환 노태우처럼 골로 가고 싶냐?"라고 협박질을 하며 지랄 염병하니 밑에선 씨발거리면서 어떻게든 방어하다가 이 사단이 난 것이다. 어휴 이래서 민주팔이 새끼들은 지들 모르는 분야에는 신경 끄게 만들어야 한다.

ㄴ 근데 원래 닛뽄식 경제 발전 따라하면 금융, 환율 쪽이 존나 취약해진다. 지금의 중공을 떠올리면 된다. 이 새끼들이 괜히 금융 개방 안 하고 환율에 목숨을 거는 게 아니다. 한국이 어떻게 좆망하나 보고 배운 거다.(갓본은 쌓아놓은 게 워낙 많으니 버텼던 거고) 물론 김영삼이 금융 무리하게 개방하고 환율 정책 말아먹은 건 사실이라서 김영삼한테 면죄부는 못 준다.

ㄴ 사실관계 보충: OECD 가입을 위해 반드시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유지해야 한다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가용 외환보유액이 2만 달러밖에 남지 않았다는 주장은 잘못된 수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997년 12월 18일 가용 외환보유액의 최저치는 약 39억 4,000만 달러였다.[10]

다만 정부가 환율 하락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귀중한 외환보유액을 소모했고, 금융시장의 위험을 충분히 통제하지 못했다는 비판에는 근거가 있다. 그러나 환율 방어의 목적과 정책적 판단을 모두 김영삼 개인의 동기나 특정 협박 발언으로 확정하려면 당시 회의록이나 공신력 있는 증언 등 별도의 자료가 필요하다.

참고로 당시 한국이 이랬던 것과는 달리 말레이시아는 IMF의 요구 쎙까고 고정환율제로 방어했다. 덕분에 놀라울 정도로 외환공격의 방어를 성공했고 한국이 완벽히 외환의 노예가 된 정반대 사례로 말레이시아는 약간의 타격만 입고 주권을 보호했다.

ㄴ 말레이시아 사례의 실제 모습: 말레이시아는 1998년 9월 외환거래 통제와 링깃화의 달러 연동을 도입했다. 한국과 달리 IMF 구제금융을 받지 않고 자체적인 위기대응 정책을 시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위기에서 경미한 피해만 입었다는 설명은 틀리다. IMF의 1999년 자료에 따르면 말레이시아의 1998년 실질 GDP는 약 6.7% 감소했으며 금융시장과 고용에도 상당한 충격이 발생했다.[14]

말레이시아의 정책은 자본통제의 장단점을 연구하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 다만 당시 말레이시아와 한국은 금융기관의 대외차입 구조와 외환보유 상황, 경제적 여건이 달랐으므로 어느 한 나라의 정책을 다른 나라에 그대로 적용했다면 반드시 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4. 정부의 투자 방향 실패. 정부에선 국내 금융계에게 동남아에게 투자하라고 존나 권유했고 떨떠름한 국내 금융계는 "그거 나라에서 보증 못하면 못해줘."라고 뻐기자 정말 보증해버렸다. 그래서 동남아 애들이 줄줄이 폭망을 하니까 그 여파를 직격으로 맞았다. 정부 입장에선 한국이 고도성장한 것처럼 동남아 애들도 고도성장할 줄 알았나... 똥남아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거지 새끼들이었는데 뭘 봐줄 게 있다고 그렇게 투자를 종용했는지 모르겠다.

ㄴ 사실관계 보충: 한국 금융기관의 해외투자와 대외차입 확대, 금융감독의 취약성은 위기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모든 금융기관에 동남아시아 투자를 강요하고 이를 일괄적으로 국가 보증했다는 식의 설명은 당시 정책자료와 개별 금융거래를 확인해야 한다. 특히 외환위기의 핵심은 국내 금융기관 자체의 단기외채 만기불일치와 해외 금융기관들의 자금 회수였으므로 동남아 투자 손실만으로 한국의 외환위기를 설명할 수 없다.

5. 김대중을 비롯한 야당과 여권 신한국당 내의 이회창, 이인제 등 반땡삼파의 금융개혁법안 방해

“

국가부도 위기 속에서 치러졌던 1997년 대선에 비하면, 이번 대선은 적어도 경제적인 측면에선 평화로울 정도다. 그 당시 여당은 경제위기 책임론으로 정신이 없었고 야당은 그러한 경제가 더 망가지기를 바라듯이 국제 신용도 회복을 위해 정부가 그토록 원했던 금융개혁법안을 끝내 국회에서 승인해 주지 않았다.

”
 
— [파이낸셜뉴스 2002-12-08 17:10] [fn시론] 大選과 경제

이러고서 정작 머중이가 머통령이 되니까 태세 전환하고 원래 반대했던 금융 개혁 법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96년에 여대야소 상황이었으나 김대중을 비롯한 야권들은 정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협조하지 않았고 가뜩이나 임기말 레임덕에 시달렸던 김영삼의 여권 내 대권주자인 이회창과 이인제는 땡삼이 색채를 지우기 위해 거리를 두었고 고분고분 협조할 생각이 없었다. 이회창이 당권 잡은 후 신한국당을 한나라당으로 개칭할 정도였으니. 결국엔 97년 11월에는 피닉제가 자기 세력 이끌고 대거 탈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권도 분열되어 야당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했다. 물론 그중에서 김대중은 하겠다고 약속해놓고 통수 쳤고, 정권 바뀌자 반대했던 개혁법안을 다시 써먹는 더블 통수까지 보여줬다. 역시 책임 전가 마스터 정치 고인물 답다. 정치 생존 전문가 김대중의 전형적인 닉값하는 DJ스러운 '통'들링이다.

그리고 역시 땡삼이를 버린패로 생각하고 있던 이회창과 이인제도 뒤에서는 IMF요구 수용한다고 약속해놓고 앞에서는 김영삼의 개혁법을 사이좋게 반대했다. 당시에는 IMF + 레임덕이 겹쳐서 '이게 다 김영삼 때문이다'가 여론이었기에 영삼이의 측근 빼면 전부 김영삼 극딜했다. 김영삼이 금융개혁법 밀어붙일 수 있었다는 건 당연히 개소리고 김영삼빼고는 모두가 통수쳤다는 것도 사실이다. 가뜩이나 임기말 레임덕이어서 알맞게 통수칠 각이 또 잡혔잖아? 킹직히 이건 어쩔수 없지. 암 손절해서 꼬붕 이미지 세탁하고 대통령 먹어야제~

이런 당시 한국 정치상황을 포착한 IMF는 미리 대권 거물 주자 3인방에게 사실상 복종 각서를 쓰게 했고 막나가는 박정희라도 깡드쉬에게 개기는 건 불가능했다. 어쩌면 국가주도적인 경제발전을 택한 박정희가 더 혹독하게 당했을지도? 그리스 치프라스 새끼가 아가리 털다가 줘털리고 버로우 탄 거 봐라.

결정적으로 말하자면 원래 우리는 IMF 타격대상도 아니었다.

ㄴ 금융개혁법 처리에 관한 보충: 1997년의 금융개혁법안 처리를 둘러싸고 여야가 대립하고 정치적 협상이 지연된 것은 사실이다. 다만 김영삼을 제외한 모든 정치세력이 의도적으로 외환위기 수습을 방해했다는 표현은 사실이라기보다 정치적 평가다. 또한 당시 대통령 후보들이 IMF 프로그램에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는 사실과 IMF가 이들에게 법적인 의미의 복종 각서를 강제로 작성하게 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실제로 1997년 12월 29일 국회는 금융개혁 관련 법안을 처리했고, 이 과정에서 한국은행의 독립성 확대와 금융감독체계의 개편 등이 추진됐다. 금융개혁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9]

또한 한국이 원래 IMF 지원 대상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인 취약성이 존재한 상황에서 아시아 금융위기의 확산이 직접적인 충격을 가한 것이며, 대외유동성 위기가 발생한 뒤 IMF 지원을 요청한 것은 한국 정부였다.

핵심 원인을 다시 정리하면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은 하나로 환원하기 어렵다. 학술연구와 IMF 사후평가에서 공통적으로 거론되는 문제는 기업의 높은 차입금, 금융기관의 부실대출과 감독체계의 취약성, 단기외채와 장기투자 사이의 만기불일치, 자본거래 자유화의 불균형, 외환당국의 위기대응 실패, 아시아 금융위기의 확산과 외국 금융기관의 자금 회수다.

이 가운데 어느 요인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연구마다 강조점이 다르다. 그러나 국민의 해외여행이나 소비생활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외부 충격과 내부의 구조적인 문제가 결합하면서 위기가 발생했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견해가 일치한다.[15][9]

민주화 운동 세력(운동권)의 근본적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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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니 친구야?으잉?", "선배랑 후배가 같냐?으잉?", "선생님이 학생이랑 같아?으잉?", "선임이랑 후임이 같냐?으잉?", "내가 선배님이니까.으잉?"
좆까 애미뒤진 꼰대새끼들아

머중이건 땡삼이건 결론부터 말하면 국정 운영은 좆도 모르는 새끼들이 권력 욕심만 좆나 많은 것이 문제다.

문민정부 시기

땡삼이를 보자.

그 당시 20대, 30대가 김영삼을 IMF로 기억하는 주된 이유가 뭐겠냐?

김영삼 가리켜서 '민주화 운동에 일생을 바친' 인간이라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민주화 운동'에만' 일생을 바쳐서 그 외에는, 특히 경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불통의 지도자였다.

수많은 경제 전문가들의 강력한 경고가 이어졌음에도 지를 공격하려는 구체제의 정치 공세로 몰아댔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그 시간에 민주 대통령 코스프레질, 포퓰리즘 정책으로 언론플레이를 하였다.

ㄴ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들을 반대하는 세력을 구체제의 정치적 모함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민주 대통령 코스프레에 포퓰리즘 정책? 이거 완전 '그 분' 아니냐...?

ㄴ근데 김영상이 오든 누가 오든 못 막을거라는게 정설 아닌가?

ㄴ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대통령 권한이 노무 큰 나라이기에 대통령이 경제에 관심이 있거나, 최소한 전문성이 있는 관료들을 자리에 배치해놨으면 최소한 치명타는 피할 수 있었음. 하지만 아무것도 안하고 손놓고 문제제기하는 전문가들 죄다 '정치공세'로 규정짓고 여론몰이해서 쫒아낸게 김영삼임. 경제를 '문민'이라는 정치의 도구로 사용한거임 마치 침팬지가 주운 엽총을 몽둥이인줄 알고 휘두르는것 처럼. 물론 위기 책임을 김영삼에게 전적으로 지울 수는 없지만 이 나라에서 최고로 큰 책임을 가지고 있는건 당시 대통령인 김영삼임.

ㄴ 내가 기억나는건 그 씹새끼 구 조선총독부 폭파한것외엔 기억나는게 없음 게다가 그 조선총독부 폭파도 나중엔 독으로 자극 했지

적어도 김영삼이 행정 분야는 본인이 영입한 손학규한테 넘겨줘서 손학규를 '실세 총리'로 만들어 줬어도 이 사단은 안 났을 거다. 손학규는 김영삼과 정반대로 정치감각은 드럽게 없는 새끼지만 적어도 행정능력 자체는 뛰어난 행정가이기 때문.

ㄴ 역사적 평가: 김영삼 정부가 외환위기 발생 당시의 정부였으므로 금융감독과 경제정책, 외환시장 대응의 정치적 책임을 논의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김영삼의 경제 전문성 부족만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했다거나 다른 특정 정치인이 행정권을 맡았다면 위기가 반드시 예방됐을 것이라는 주장은 반사실적 가정으로, 입증된 역사적 사실과 구분해야 한다.

김영삼 정부는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숙청, OECD 가입 등 여러 중요한 정책을 추진한 동시에, 금융시장 감독과 외화 유동성 관리에서 심각한 한계를 드러냈다. 따라서 민주화에 기여한 경력과 경제위기 당시의 정책적 책임은 각각 별도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

국민의 정부 시기

대중이를 보자.

http://www.parkjoosun.pe.kr/system/bbs/board.php?bo_table=story_2&wr_id=5

위 링크에서 박주선은 김대중 시절 청와대 법무비서관이었는데 이 새끼가 청와대 인사권 맡고 있었을 때는 능력과 전문성으로 사람을 뽑았는데, 법무비서관니뮤가 옷로비 사건 때 누명 쓰고 쫓겨난 뒤로는 대학 공부 안 하고 화염병이나 던지고 다녀서 지 전공 좆도 모르는 학생 운동권 새끼들, 슨상님이 민주화 운동 할 때부터 옆에서 도와준 사람들은 능력이 좆도 없어도 뽑아줬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슨상님 말기를 생각해봐라. 임기 말에 온갖 비리와 게이트로 난리였지 않았냐? 사실 페미니즘 문제도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 이희호 여사가 여성 운동권 대모로서 조언 같은 건 안 하고 그냥 방치하고 있었고 극단화됐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박주선은 난닝구들에게 배신자로 낙인 찍히고, 10년 후에는 유승민 센세가 비슷한 루트로 ㄹ혜에게 배신자로 낙인 찍힌다. 그리고 박주선과 유승민 둘이 안철수랑 짝짜꿍해서 바른미래당을 만들었다. 홍통일체 ㅗㅜㅑ

이것만 봐도 이 두사람은 70~80년대에는 민주주의 운동을 하다가 90년대에 권력을 잡으니 국민을 개돼지 취급을 했다.

ㄴ 참고: 김대중 정부 시기의 인사 문제와 권력형 비리 논란은 개별 사건별로 검증해야 한다. 특정 인사들이 민주화운동 출신이었다는 공통점만으로 경제정책의 실패나 비리의 원인을 일괄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 가운데 일부는 IMF 협약에서 비롯된 조치였고, 일부는 국내 정치·경제적 판단에 따라 시행된 정책이었으므로 그 책임도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IMF가 요구한 구조조정

고금리 정책

1997년 12월 IMF 금융지원 프로그램은 원화 가치의 급격한 하락을 막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통화긴축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당시 콜금리는 1997년 12월 초 12%대에서 20% 이상으로 상승했으며, 국내 기업들은 높은 금융비용과 대출 축소에 직면했다.[16]

고금리는 통화가치 하락을 억제하고 자금 유출을 막는 수단으로 활용됐지만, 동시에 이미 부채가 많았던 기업들의 이자 부담을 크게 증가시켰다. 그 결과 경영위기에 빠진 기업들이 추가로 도산하고 실업이 증가하면서 IMF의 초기 정책이 경기침체를 지나치게 심화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실제로 IMF 독립평가국의 사후평가에서도 초기 프로그램이 자금시장과 실물경제의 충격을 충분히 예상하지 못했다는 문제가 지적됐다. 따라서 당시 고금리 정책을 무조건 필요했다고 보거나 반대로 아무런 이유가 없는 정책이었다고 단정하기보다 외환시장 안정과 실물경제 침체 사이의 상충관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9]

금융기관 구조조정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부실 금융기관의 정리와 합병, 자본확충을 추진했다. 종합금융회사와 은행, 증권사 가운데 상당수가 퇴출되거나 다른 회사에 인수됐으며, 은행의 건전성과 금융감독체계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 개편도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공적자금이 대규모로 투입됐으며, 금융기관 경영진과 주주, 노동자 및 납세자 사이에 구조조정 비용을 누가 부담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다. 또한 지방에 기반을 둔 금융기관이 줄어들면서 지역경제가 받는 영향도 논쟁의 대상이 됐다.

노동시장 유연화

1998년에는 정리해고의 법적 요건을 정비하고 근로자파견제도를 도입하는 등 노동시장 제도에 중요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책은 경제위기 속에서 기업의 인력 조정과 고용구조 개편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의 고용불안과 비정규직 문제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다만 외환위기 이전에는 비정규직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 일용직과 임시직, 단기고용 등의 형태는 이전에도 존재했으며, 1998년 이후 새로운 노동시장 제도가 도입되면서 고용형태와 법적 규율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또한 노동시장의 변화가 모두 IMF의 명령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한국 정부와 기업, 노동계가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제도변화를 추진하거나 반대했으며, 외환위기 이후에도 국내의 노동정책은 여러 차례 개정됐다.

외국인 투자와 기업지배구조

외환위기 이후 한국 정부는 금융시장과 자본시장의 개방을 확대하고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추진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 기업의 지분을 더 많이 보유할 수 있게 됐으며, 회계와 공시제도, 기업의 부채 관리 등에 관한 요구도 강화됐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 경제의 국제화와 투명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지만, 동시에 기업의 단기적인 수익성 중심 경영과 구조조정, 노동자의 고용불안이 커졌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따라서 외국인 투자 확대가 한국 경제에 무조건 좋은 결과만 가져왔다거나 반대로 모든 사회문제를 만들어냈다고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금모으기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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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재평가되어야 하는 영웅입니다. 모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위해 잠시 묵념합시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16강 진출을 두팔걷고 도와주신 한반두가 있습니다.

1998년 초 대한민국에서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민적 운동으로 금모으기 운동이 전개됐다. 시민들은 결혼반지와 돌반지, 금목걸이, 각종 금제품을 금융기관 등에 맡겼으며, 운동선수와 종교인, 재외동포들도 참여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약 351만 명이 참여해 금 227톤을 모았으며, 당시 약 18억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이 조성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서는 약 225톤과 21억 7천만 달러로 기록하는 등 집계 기준에 차이가 있다.[1][2]

이 운동에서 모든 금이 아무런 보상 없이 기부된 것은 아니었다. 일정한 방식으로 금을 맡기고 그 가치를 원화로 돌려받는 절차도 존재했으며, 수출을 통해 달러를 조달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다. 따라서 금모으기 운동을 전 국민이 금을 무상으로 국가에 헌납한 행사로만 이해하면 실제 운영 방식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외환위기 극복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금모으기 운동은 약 18억~22억 달러 규모의 외화를 조달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한국이 당시 필요로 했던 국제금융지원은 수백억 달러에 달했으며,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서는 외채 만기 연장과 외환보유액 확충, 경상수지 개선 등이 필요했다.

따라서 금모으기 운동 하나만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반대로 전체 구제금융 규모에 비해 금액이 작았다는 이유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운동이었다고 폄하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특히 국가적인 위기 속에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과 당시 사회의 공동체 의식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다만 국민의 희생정신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정부와 금융기관, 기업의 위기관리 책임이 희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도 함께 제기된다.

극복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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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서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단 기간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한 나라라고 국뽕을 쳐 빨아댔는데 사실 극복한 게 아니다. 임시방편만 해둔 거다.

집으로 따지면 너희 집 빨간 딱지 날아와서 세간살이 다 뽑혀나가고 집도 경매로 날아가고 월세방 전전하는 신세에 직장도 잘려서 매일 인력사무소 나가는 노가다 아재가 되어서 죽지 못해 사는 꼬라지가 됐는데 극복은 무슨 얼어 죽을 극복이냐.

IMF에선 노동 유연성 확보하라고만 했을 뿐인데 두 술 더 떠서 아예 비정규직 공화국으로 만들어버린 시점에서 이미 극복은 개소리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단 빚은 갚았다. 근데 정말로 빚'만' 갚았다.

김대중 정부는 빚을 갚기 위해서 공기업 민영화, 수많은 기업들을 외국에 팔았고 지방의 은행들을 강제로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지방 경제가 씹창났고 대형 은행들만 살아남았다. 결과적으로 현재 대기업 위주의 헬조선의 기틀이 완성된 거다.

헬조선의 빈부격차가 존나 심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한마디로 제대로 돈을 잘 벌어서 갚은 게 아니라 차압 딱지 붙은 물건들을 이리저리 빼앗기고 남은 살림을 팔아서 빚을 갚았단 소리다. 희대의 통수인 금모으기 운동은 덤.

또한 해고 규제를 완화해서 비정규직이라는 걸 만들어냈다. 이거 때문에 진신류가 김대중을 극혐한다. 이때 노동자들이 존나 데모했는데 김대중은 그 노동자들은 무참하게 탄압했다. 이랬던 새끼가 현재 자칭 깨시민 새끼들한테 후장까지 빨리고 있다.

결론은 IMF는 극복한 게 아니고 나중으로 미룬 거다. 그니까 한방에 훅 하고 가는 걸 막는 대신 천천히 뒤지는 길을 택한 거다. 근데 교과서에서는 이걸 존나 포장해서 마치 국민과 김대중 정부가 합심해서 극복했고 김대중의 업적처럼 적어놨는데 당연히 개소리고 아직도 극복하지 못했다. 지금의 20대가 겪고 있는 취업난 같은 것도 근본 원인은 IMF 사태에 있다. 진짜로.

참고로 1998년 IMF에서 차관을 받는 조건으로 가스, 수도, 철도, 의료 등의 민영화를 약속했었다. 근데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서 IMF는 10년의 유예 기간을 주었다. 근데 10년 후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유예기간이 끝나가자 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민영화에 반발했고 IMF는 또 8년이라는 유예기간을 주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현재 또다시 민영화 문제로 치고받고 싸운다.

ㄴ 중요한 정정: IMF가 1998년 한국에 수도·철도·의료 등 공공서비스 전반의 민영화를 요구하고, 10년 뒤인 2008년과 다시 8년 뒤까지 유예기간을 연장했다는 이야기는 확인된 공식 협약 내용과 맞지 않는다. 당시 구조조정과 민영화가 여러 분야에서 추진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IMF가 주기적으로 유예기간을 연장하는 하나의 장기계약처럼 설명할 근거는 없다. 이 주장은 당시의 IMF 협약문과 한국 정부의 정책을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7][16]

이렇게 말하면 "그럼 당장 뒤지게 생겼는데 당시에는 이런 임시방편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놈들이 있는데 이런 새끼들 보면 열에 아홉은 좆팔육 새끼들이다. 지들 뒤지기 싫다고 후손인 현재 2~30대와 급식충과 미래 후손들에게 똥 처리를 떠넘긴 거다.

최소한 청년들이라면 김대중이 IMF 극복했다고 말하지 않길 바란다.

ㄴ근데 한방에 뒈지나 천천히 뒈지나 이래저래 청년층은 ㅈ된 거 아니냐.

빚갚았다고 뻔뻔하게 자기들 공이라고 주장하는데 다른 나라들은 안 갚고도 잘만 버티는걸 보면 굳이 안 갚아도 되는거 그냥 스텟딸딸이칠려고 막은게 분명하다.

다른 나라는 병신이라서 안 갚았나 천천히 갚아도 되는걸 이 꼴 나는거지.

금융적 극복과 사회적 후유증

1997년 외환위기에서 벗어났다는 표현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사용하는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외화 유동성 위기가 해소되고 환율과 금융시장이 안정됐다는 의미에서는 대한민국이 위기를 극복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은 2001년 8월 23일 IMF 차입금을 전액 상환했으며, 외환보유액도 2001년 9월 1,000억 달러를 넘어섰다.[10][3]

그러나 위기 과정에서 발생한 실업과 가계의 빈곤, 고용구조 변화가 같은 시점에 모두 해결됐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대량해고와 구조조정을 경험한 중장년층과 청년층의 경제적인 상처는 오랫동안 이어졌으며, 비정규직과 노동시장 양극화 문제를 둘러싼 논쟁도 계속됐다.

다만 현재의 모든 청년 취업난과 빈부격차를 1997년 외환위기 하나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이후의 저출산과 고령화, 산업구조 변화, 교육 및 노동시장 제도, 부동산시장과 세계경제 환경 등 다양한 요인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2000년과 2001년의 차이

2000년 12월에는 IMF의 3년짜리 대기성 차관 협약이 종료됐다. 이는 새로운 차입과 프로그램 심사 등이 종료됐다는 의미이며, 반드시 IMF에 대한 모든 채무를 완전히 상환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실제로 정부는 2001년 8월 23일 잔여 차입금을 전액 조기 상환했다. 따라서 외환위기 극복을 2000년 12월로 설명하는 경우에는 IMF 협약의 종료와 정부의 위기 극복 선언을 의미하는 것이고, 2001년 8월 23일은 실제 차입금 전액 상환이라는 점을 구분해야 한다.

코로나19

“내년이면 나라빚 1000조원 시대…韓, 재정위기관리 가장 소홀”, <중앙일보>

2021년 말과 2022년 초부터 국가채무 1000조원이 됐다. 문재인 케어와도 연관이 있는 문제라 꽤 심각하다.

국민들이 다시 운동권이 빚을 갚기 위해 중산층에게만 압류를 걸어 대기업만 보호하는 상황을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이미 경제력이 반시체가 된 나라를 다시 반시체로 만들면 가망이 있을까.

ㄴ 경제지표의 구분: 2020년대에 증가한 국가채무와 1997년 외환위기 당시의 외화 유동성 부족은 성격이 다르다. 1997년에는 기업과 금융기관이 해외에서 빌린 단기 외화부채가 만기 연장에 실패하면서 위기가 발생했다. 반면 원화 표시 국채를 중심으로 한 정부의 국가채무는 상환 통화와 만기구조, 중앙은행 및 금융시장 제도 등이 다르므로 단순히 금액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종류의 외환위기가 발생한다고 볼 수 없다.

쓰러진 기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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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사태로 인해 대한민국의 기업들은 이름만 들어도 입이 쩍 벌어지는 머우를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대기업들도 수십 개나 쓰러졌고 중소기업은 그야말로 몇천 개가 떼몰살 당해버렸다. 특히 대기업보다 더 큰 기업인 초대기업 삼대장의 구성원인 삼성, 현대, 대우 중에서 대우가 쓰러져 버린 것은 대한민국 경제의 크나큰 타격이었다.

이렇게 많은 기업들이 IMF때 쓰러져 버렸다. 중소기업은 많이 죽었고 대기업은 죽거나 중소기업으로 강등먹었다.

  • 철강 기업 한보(기업랭킹 14위) - 단숨에 참수 당해버렸다. 사실 외환위기의 스타트를 끊은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얘네가 무너지면서 협력사들도 폭삭 망하고 경제가 시궁창되기 시작한 거니까. 김현철 정치 생명이 끝난 것도 얘네한테 뇌물 먹어서. 사실 한보는 노태우 때부터 뇌물질이었다. 정확히는 김현철에게 뇌물 먹인 이유가 뒈져가니까 빨리 공적자금 투입해서 살려달라는 거였는데 공적자금으로 메꿔보기엔 워낙 한보가 판을 크게 벌려서 살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김현철 더민당 들어갔다. 착한 적폐행
  • 라면 기업 삼미(기업랭킹 26위) - 흘린 피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죽었다.
  • 소주 기업 진로 - 역시 피를 많이 흘렸지만 살긴 살았다. 난 소주 싫어하지만 참이슬 좀 많이 사 먹어주자. 얘들 피 많이 흘렸다.

ㄴ 진로는 형제끼리 경영권 분쟁으로 싸우면서 헤지펀드 끌어들였다가 자기들끼리 망한 ㅄ이다. 그 시기에 망해서 그렇지, 외환위기 여파로 망한 게 아님

  • 빵 기업 삼립 - IMF전에는 대기업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중소기업으로 강등. 안 죽은 게 다행이다.

ㄴ 해태와 마찬가지로 얌전히 빵이나 팔지 별 병신 같은 곳에 다 손대다가 적자가 늘어서 망한 기업. 반면 같은 형제 기업 샤니는 빵집 외길 인생으로 묵묵히 나가더니 망한 삼립을 먹어버려서 다시 합체했다.

  • 백화점 기업 미도파 - 죽은 후 그 자리에는 한약백화점이 생겼다. 죽고 나니까 치료물약이 드롭되는 신기하고 놀라운 상황...
  • 미도파 모기업 대농 - 사실 얘가 죽어서 미도파도 덩달아 죽은 거다.
  • 건설기업 한신공영
  • 자동차기업 기아자동차(기아그룹) - 얘들도 죽었다. 현대가 인수함.
  • 팬티기업 쌍방울 - 국내 넘버원 팬티 기업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여기도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강등. 더 슬픈 것은 산하의 야구단 쌍방울 레이더스가 아예 해체된 것이다.
  • 과자기업 해태 - 일부 품목을 롯데나 빙그레에게 넘기고 죽었다. 정확히는 크라운제과 밑으로 들어감.

ㄴ정확히는 과자나 팔고 있었으면 안 망할 건데 해태 전자니 별 미친 사업으로 확장해서 적자가 무지막지했고 외환위기가 와서 숨통이 끊긴 거. 내재적 요인이 더 큰 병신이었다.
ㄴ덤으로 해태 타이거즈가 성적 좆망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 백화점 기업 뉴코아 - 이랜드에게 인수됨.
  • 여행 기업 온누리여행사
  • 금융 기업 고려증권
  • 건설 기업 한라그룹 - 얘도 겨우 살았다.
  • 금융 그룹 동서증권
  • 자동차 기업 쌍용 - 노동자 급여를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지급을 못하고 있다.
  • 건설 기업 청구 - 피를 흘린 끝에 살았지만 2009년에 죽었다.
  • 의류 기업 나산
  • 건설 기업 극동 - 겨우 살아서 지금은 웅진에게 인수됐다.
  • 라면 기업 삼양 - 농심에게 1위 자리를 뺏기고 우지파동으로 인해서 골골대며 어렵게 살았지만 피는 참 많이 흘렸다.
  • 우유 기업 파스퇴르 -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했다...는 롯데한테 먹혔다.
  • 자동차 그룹 대우(기업랭킹 3위) - 살아있었으면 삼성 및 현대와 동급이었을 기업이다. LG보다 훨씬 덩치가 컸다. 하지만 그 덩치는 거품으로 불린 덩치라서 나중에 실상을 안 사람들이 저딴 식으로도 기업 경영이 되냐고 궁금해 했다. 그 방식이란 대출을 받아 공장을 차리면 그 공장을 담보로 또 대출을 받아 공장을 세우는 식으로 무한 확장을 하는 것이었다. 연구개발엔 좆도 투자 안 하고 덩치 불리기에만 투자하니 안 망 하는 게 이상하다.

ㄴ 망해버린 대기업중 탑 오브 레전드, 김우중놈이 경영욕심만 안 가졌으면 안 망했을수도 있다.

  • 이름 모를 중소기업 수천 개 - 싹 멸망해버렸으며 그중에는 회장이 자살한 기업도 수십~수백 개다.
  • 단국대학교 - 대학의 급이 내려가는 진통을 겪은 끝에 간신히 살았다.
  • 큐닉스 컴퓨터

작성자가 다 조사하진 못했지만 여기 언급되지 않은 기업들 중에서도 쓰러진 기업들이 장난 아니게 많다.

아마도 동서고금을 통틀어 이렇게 많은 기업이 한꺼번에 폭망한 전례는 찾기 힘들 것이다.

ㄴ 1929년 세계 대공황: ???, 2008년 세계금융위기: ??? 대공황, 금융위기 앞에서 한국 외환위기는 좁밥입니다. 대공황 때 미국 경제성장률이 3년 동안 -40%를 찍었는데? 경제성장률이 -40%라고.

ㄴ 기업 목록 정정: 원문의 삼미는 라면기업이 아니라 특수강·철강 등을 중심으로 사업을 영위했던 삼미그룹이다. 또한 기아자동차는 기아그룹의 경영위기와 법정관리 이후 현대자동차 측에 인수됐지만 기업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우그룹의 본격적인 해체 역시 1997년이 아니라 1999년부터 진행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시기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기업별로 부도와 법정관리, 화의, 워크아웃, 인수합병 등 서로 다른 과정을 거쳤으므로 모든 기업이 완전히 파산하거나 사라졌다고 설명하는 것도 부정확하다. 특히 삼양식품이나 진로처럼 외환위기 당시의 경영위기와 별도로 이전부터 존재했던 재무 및 경영상의 문제를 함께 고려해야 하는 기업도 있다.

또한 세계 대공황 당시 미국의 경제규모가 크게 축소된 것은 사실이지만, 특정 3년 동안의 경제성장률이 단순히 -40%였다는 설명은 실제 GDP 통계의 기준과 기간을 확인해야 한다. 한 해의 성장률과 여러 해 동안 누적된 GDP 감소율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대표적인 기업들의 몰락

한보그룹

1997년 1월 한보철강의 부도는 한국 경제의 취약성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한보그룹은 대규모 철강설비 투자와 높은 차입금을 바탕으로 급격한 사업확장을 추진했으나 자금난에 빠졌으며, 금융기관과 정치권의 유착 문제가 수사 대상이 됐다.

한보 사태는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시작일과 동일한 사건은 아니지만, 당시 대기업의 높은 부채비율과 금융기관의 부실대출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였다.

기아그룹

기아그룹은 1997년 7월 부도유예협약 대상이 되면서 심각한 경영위기에 빠졌다. 이후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됐으며, 현대자동차 측이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면서 국내 자동차업계의 판도가 크게 바뀌었다.

기아라는 자동차 브랜드 자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므로 기아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독립적인 기아그룹의 지배구조가 무너졌다는 점에서 당시의 위기가 자동차산업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대우그룹

대우그룹은 1990년대 후반까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대기업집단 가운데 하나였지만, 해외사업 확장과 높은 차입금으로 재무구조가 악화됐다. 외환위기 이후에도 사업확장을 지속했으나 결국 1999년 대규모 구조조정과 해체 과정을 겪었다.

대우그룹의 몰락은 외환위기로 드러난 기업집단의 취약성이 위기 발생 이후에도 장기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대우그룹이 1997년 12월 구제금융 요청과 동시에 무너졌다고 설명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부정확하다.

금융기관

기업의 도산과 함께 은행과 종합금융회사, 증권사 등 금융기관도 대규모 구조조정을 겪었다. 일부 금융기관은 퇴출됐고 다른 금융기관은 합병되거나 인수됐으며, 부실채권을 정리하기 위한 대규모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이러한 변화는 금융시스템의 건전성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노동자의 실직과 지역 금융기관의 축소, 금융산업의 집중 문제를 낳았다는 평가도 받는다.

외환 위기 이전 한국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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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리운 옛날이여!
  • 식당 입구에서 문 열어주고 인사하는 직원 존재. 참고로 당연히 정규직이다.
  • 대기관 혹은 대기업 큰 빌딩이나 백화점마다 엘리베이터 걸이라고 층수 눌러주는 여자 존재. 당연히 정규직이다.
  • 중졸도 막말로 나사만 돌릴 줄 알면 취직해서 진급함. 그리고 이때 취직한 놈년들이 현재 공장장... 진짜로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자기 이름을 한문 내지 영어로 쓸 줄 모르는 국졸들이 공장장을 지내고 그랬다.
  • 은행이율 10%가 평균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이자가 10%가 넘었다.
  • 하도 부사관 하겠다는 인간이 없어서 중졸 초졸들이 병장에서 하사로 진급해서 부사관을 하고 그런 인간들이 현재 주임원사...
  • 경찰관 및 소방관도 하겠다는 인간들이 너무 없어서 순경&소방사는 물론이고 경찰종합학교&소방종합학교조차 지원이 곧 합격이었음. 아예 경찰종합학교&소방종합학교는 매 해마다 미달크리 먹었음.

ㄴ 참고로 이건 전두환-노태우 때 군부정권 불만 잠재운답시고 범죄와의 전쟁 등 치안 위주 정책 펼쳐서 경찰관들&소방관들 수가 부쩍 늘어난 탓도 있다. 특히 경찰관들의 경우 뒷돈이 일상화된 상태라 (비공식적) 상당한 고소득 공무원이였고. 소방관들 역시 피해자들을 무사히 살려서 구조시켜주면 피해자들 가족들로부터 뒷돈을 받기도 했다.

  • 대학 나와서 9급 공무원하면 가족들 및 친척들한테 욕 먹고 호적에서 파였음. 그리고 이때 공무원 한 놈년들 대부분이 현재 과장, 계장, 팀장...(수정 전에는 그냥 공무원으로 했는데 옛날에는 판검사가 더 권력 있었다. 그때도 판검사는 쩔었다.)
  • 대학에서 공부 왜 함? 졸업장만 따면 원하는 대기업들 골라가는데... 그래서 이때 대학가는 놀자판이었고 술 마시고 담배 피고 기타 치고 띵가띵가 놀았다. 그러다가 노는 것조차 지겨우면 데모를 했다. 그래도 데모 존나 하거나 대놓고 빨갱이 짓 해서 빨간줄 안 그이면 취직 잘도 했다.
  • 알바만 해도 대학등록금 충분히 벌었다. 참고로 이때는 비정규직이 없었기 때문에 알바가 전부 정규직이었다. 그래서 대학등록금 벌려고 알바했다가 그걸 직장으로 가지게 된 놈년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학원 선생들, 인강 강사들, 학습지 선생들은 거의 90%가 이 테크 탔다고 보면 됨.
  • 대기업 특히 건설사는 신입사원 수 백 명씩 뽑음. 이때 뽑힌 놈년들은 대부분 IMF 때 모가지가 날아갔지만 살아남은 놈년들은 대기업 고위직으로 근무하고 있다. 지금은 정년퇴직 했겠지?
  • 자영업자는 사장님 소리 들으면서 주변 사람들한테 대접받고 말 그대로 가게를 오토로 돌려도 생활이 충분히 가능한 개꿀같던 시절. 내가 치킨집 사장 아들이라고 하면 금수저 대우 받았다.
  • 비정규직 따위가 존재하지 않아서 전원 정규직행. 한번 취직하면 범죄같은 사고만 안 치면 공무원처럼 평생직장행.
  • 서울 양천 목동 지역의 아파트 한 채가 8000만원(지금 5억 후반)
  • 사교육? 없다. 국가에서 사교육을 금지했다. 그 대신에 만든 게 EBS다. 그래서 금수저든 흙수저든 공부 환경 조건은 거의 똑같았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ㄴ미친 리얼 헤븐조선이네

ㄴ90년대 초반생인데 어릴적의 한국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지금이랑 너무 달라서 소름끼친다. 밖에 나가면 웃는 얼굴로 정겹게 대해주는 사람이 많았고, 서구 사회의 개방성과는 다르지만 나름의 정신적 여유가 가득한 분위기였다.(지나가던 손님한테도 같이 밥 먹고 가시라고 붙잡았던 시절이다. ㄹㅇ 몇 번이나 모르는 사람이랑 밥 먹었었던 기억이 분명히 있다.)

자신의 삶이나 미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었고.(물론 시민의식 및 정신의학에 대한 인식이 심하게 떨어져서 그런 것도 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항상 내일이 오늘보다 더 성장한다는, 긍정적 경험들로 가득찬 디즈니 애니속 동산 같은 느낌이 있었다.

당시 뉴스에서는 김영삼 정부가 OECD와 같은 대부분 선진국들이 회원으로 있는 세계 국제 기구에 잇달아 가입하면서 우리도 이제 "세계에서 인정한, 인증받은, 공인하는 선진국입니다" 라고 허구한날 홍보하는 멘트를 썻다. 당시 정부와 관료들은 당당히 선진국 클럽 반열에도 올랐으니 아시아권에서 우리를 유일하게 뛰어넘는 국가를 중국과 일본이라 하면서 따라잡을 일이 머지않을 것이라고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거. 힘든 사람은 도와줘야 하고,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을 이간질하는 새끼를 개새끼라고 공감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지금처럼 서로 금수저들이 만들어놓은 콜로세움 안에서 니가 더 병신이니 내가 더 잘났니 하며 쥐 잡듯이 매일 전쟁을 벌여대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상상할 수 없었다.

참고로 이 시기에 개꿀빤 세대가 바로 586세대다.

ㄴ ㄹㅇ 지금도 임금체불 밥 먹듯이하며 노오력 타령하는 틀딱들이 바로 이때 취업 날로드신 좆팔육 새끼들이다

지나가다 한마디 한다. 이건 일본 버블경제때도 동일했었다. 아니 오히려 더했지. 오죽하면 일본 전재산 털면 미국땅 중국땅 전부 다 산다는 얘기까지 나왔으니까.

씹덕들은 잘 알테지만 일본 버블경제때 나온 애니메이션들이 죄다 수작업으로 작화 때려박아서 쩌는 애니들이 많았었다. 지금보면 구데기이지만서도

우리나라 IMF 논할려면 플라자 합의가 빠질 수 없다. 그때 미국 레이건 정부가 플라자 호텔에서 독일, 일본측 앉혀다가 환율 조정하려했는데 애새끼들이 말을 안들어 쳐먹어서 아예 냅킨에다 '이 정도로 환율줄여 ㅇㅋ?' 이런 씹깡패짓을 했다. 지금 같아선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그땐 그랬다.

지금 트럼프가 중국 조지듯이 레이건 역시 일본을 줘팸했는데, 이걸 잘 파고든게 바로 전두환 정부였다. 전낙지 욕 많이 쳐먹어도 이때 노저은 건 신의 한수였다.

어떻게 일본을 벗겨먹었는지 레이건 정부와 짜고 F-16 전투기를 일본 차관으로 땜빵쳐서 국내 도입했다. ㅆㅅㅊㅌ

위에 설명한 헤븐조선이 이때부터가 시작된거. 일본 환율이 치솟으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우리나라 공산품이 북미시장에서 팔려나가기 시작하고 기업들이 사업해먹기 좋은 환경이 된거다.

근데 어쩌다 헬조선 됐냐고? 위에 죄다 설명 나와있잖아. 땡삼이가 정치를 개같이 해서 좆된거지 뭐겠냐.

1인 소득 1만 달러 밀어붙일려고 경제전문가들 경고 다 좆까고 해외 외환시장 요동치는거 모르고 지랄싸다 외환 바닥난게 첫번째고, 두번째는 일본이 통화 스와핑 응 좆까 시전한거.

시발 총독부 건물 때려부수고 독도에 전투기 보내고 이 지랄하는게 뭐가 이뻐서 해주겠냐. 일본이 통화 스와핑 해줬으면 IMF로 이렇게 개쳐맞진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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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은 단순히 권위주의나 독재가 아니라 극도로 권위주의적, 전체주의적, 국가주의적, 군국주의적, 극단주의적인 것입니다.

근데 경제적으로는 플라자 합의 영향으로 풍요해도, 사회 문화적으로는 군사독재 시절에 곯았던 교육, 노동, 종교, 군대, 빈부격차 등 온갖 사회 분야의 음지에 잠겨있었던 불만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시절이었다. 당장 외환위기 이전에 땡삼이 정권의 별명이 사고공화국이라고 불린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민주화가 되면서 자유 체제의 성격을 갖는 경제 발전 속도에 따라오지 못한 권위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회제도와 시민의식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1997년 이전이 정말 유토피아였는가?

원문에 담긴 1980~1990년대 초반의 생활상과 당시 사람들의 기억은 경제성장기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자료로 볼 수 있다. 특히 높은 경제성장률과 기업의 고용 확대, 국민소득 증가 등은 실제로 당시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전의 모든 노동자가 정규직이었고 대졸자는 원하는 대기업에 아무 제한 없이 취업했으며 사교육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 당시에도 임시직과 일용직, 비공식 노동과 노동시장 내 격차가 존재했으며, 사교육에 대한 법적 규제와 실제 사교육 시장의 존재는 별개의 문제였다.

또한 공무원과 경찰, 소방공무원 등이 모두 지원만 하면 합격했다는 주장 역시 직종과 채용 시기별 자료를 확인해야 한다. 특정 시기에 경쟁률이 낮았던 분야가 있었다고 해서 전국 모든 공공부문의 채용이 무제한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고도성장기에는 국민소득과 생활수준이 빠르게 개선됐지만 동시에 장시간 노동과 산업재해, 성차별, 노동권의 제약, 기업과 정부의 유착 등 여러 문제가 존재했다. 따라서 당시의 경제성장과 사회적 희망을 인정하는 것과 과거 전체를 이상적인 사회로 묘사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플라자 합의와 한국 경제

플라자 합의는 1985년 미국과 일본, 서독, 영국, 프랑스의 주요 5개국이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환율 조정에 합의한 사건이다. 이후 엔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일본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과 국제무역 구조에 변화가 나타났다.

당시 한국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생산비용과 수출 경쟁력을 바탕으로 일부 시장에서 기회를 얻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한국의 수출 확대에 영향을 미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한국 경제의 호황을 플라자 합의 하나의 결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국제유가와 금리, 달러 가치, 국내 산업구조와 생산성 등의 요인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원문에서 언급한 미국이 일본 차관으로 한국의 F-16 전투기 도입을 지원했다는 이야기나 일본이 한국에 통화스와프를 제공하지 않은 이유가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때문이라는 주장은 당시의 외교문서와 금융거래 기록을 통해 별도로 검증해야 한다. 특히 한일관계의 정치적 갈등과 외환위기 당시의 금융지원 문제를 직접적인 단일 인과관계로 연결하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

사회적 영향

평생직장 신화의 붕괴

외환위기 이전 한국에서는 대기업과 은행, 공기업 등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하면 오랫동안 근무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했다. 물론 모든 근로자가 실제로 평생고용을 보장받은 것은 아니지만, 대기업의 장기근속과 연공서열 중심 인사제도는 당시의 중요한 고용관행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대량실업과 구조조정이 발생하면서 이러한 인식이 크게 흔들렸다. 특히 오랫동안 한 회사에서 근무하던 중장년층이 갑자기 퇴직하거나 명예퇴직 대상이 되는 일이 늘어나면서 안정적인 직업에 관한 사회적 기대가 변화했다.

청년 취업난

외환위기는 당시 취업시장에 진입하던 청년층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기업들이 신규채용을 줄이고 기존 근로자의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대졸자와 고졸자 모두 취업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했다.

이후 청년층에서는 공무원과 전문직, 안정적인 공기업 등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화됐다는 평가도 등장했다. 다만 현재 청년 취업난 전체를 1997년의 외환위기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으며, 이후의 산업구조와 인구구조, 교육 및 노동시장의 변화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가족과 일상생활의 변화

외환위기는 직장을 잃은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가계의 소득이 줄어들면서 교육비와 식비, 주거비 등을 줄여야 하는 가정이 증가했으며, 일부 가정에서는 실업과 부채로 인해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다.

특히 당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 가운데 부모의 실직과 가계경제의 악화, 가족 구성원의 경제적 불안을 기억하는 사례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경험은 세대별 경제관과 직업관, 소비와 저축에 대한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러나 외환위기의 경험이 오늘날 특정 세대의 모든 심리적 특성이나 인터넷 문화를 직접적으로 결정했다는 주장은 별도의 연구와 검증이 필요하다. 시대적 경험과 개인의 심리 사이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공무원 선호의 증가

외환위기 이후 안정적인 고용을 제공하는 직업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공무원과 교원, 공기업 등의 직업적 매력이 높아졌다는 평가가 등장했다. 특히 대기업 직원들도 갑자기 해고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더라도 고용안정성이 높은 직업의 가치가 재평가됐다.

이는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의 취업문화를 비교할 때 자주 거론되는 변화 가운데 하나다. 다만 공무원 시험 경쟁률과 채용규모 등은 연도와 직렬별로 달라지므로 모든 직종에서 동일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20년 후

그런데 헬조선넘들은 기억력이 붕어수준인지 자기네를 이꼴로 만든 김영삼을 민주화의 거두라고 열심히 찬양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밑에서 소통령으로 온갖 패악질부리던 아들인 김현철이 민주당 입당하자 국민통합이니 뭐니...

헬조선 네버 체인지...

ㄴ민주화의 거두는 맞지. 외환위기는 별개로 열심히 까주면 되고. 근데 김현철은 민좆당 지지자들조차 영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왜 입당시킨건지.

반대로 역시 진보는 나라를 망치는 원흉이고 보수가 집권해야 경제가 산다는 괴상한 신념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ㄴ애초에 뭐 전두환이 물러난 이후로 군부 독재 계파가 사실상 맥이 끊겼는데 김영삼 아니었으면 걍 그대로 보수 멸망이었다.

ㄴ문재앙 집권시절은 헬조선도 경제대국이다. 이미 커질대로 커져서 성장이 힘든것이다.

ㄴㄴ지랄한다 잠재적 달창새끼야 ㅋㅋㅋㅋㅋ 성장이 힘들면 제자리걸음이라도 해야지 떨어지는 건 뭐냐?

ㄹㅇ 이해안가는게 진보가 정권잡으면 경제망한다고 앵무새처럼 외치는 새끼들 원류는 띵삼이다.

그럴거면 차라리 자기들 당파의 시조는 전두환, 박정희라고 하든가

어째서인지 운동권은 IMF를 막지 못해 죄송하다고 사죄하는 대신 자기들이 정권을 잡든 안 잡든 웰빙과 힐링 문화를 밀기 시작했다.

IMF 당시의 혼란스러운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카페와 명품과 쇼핑과 패션을 밀어서 위화감과 괴리감이 심했다.

마치 IMF 시대까지의 모든 흔적을 구시대로 싸잡아서 쓰레기통처럼 집어던지고 억지로 신시대를 쫓고 신시대에 모든 것을 거는 느낌이었다. 원피스를 보고 망상병이라도 걸렸는지 위대한 항로로 가서 보물을 찾겠다고 미친 느낌과 똑같았다.

김영삼이 만든 죄악을 IMF 당시 일반 국민들한테 전가하고 이후 세대에게 새 삶을 살게 해주겠다고 운동권이 정신줄을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IMF 당시 신용불량자들만 사라지면 더러운 것들이 죄다 사라지고 새로운 깨끗한 세대가 올 것이라 편집증적 결벽증이라도 걸렸는지 외면하는 분위기.

내실이 튼튼하지 않은데도 외적으로 화려한 괴리감이 넘치는 문화가 K-POP 혹은 인스타 감성으로 드러났다.

왜 잘못은 운동권의 거물인 한 대통령이 했는데 일반 국민들에게 모른 척하라고 강요한 걸까.

신용카드를 사용해야 한다고 가이드를 만들지 않아놓고서 갑자기 가이드를 어겼으니 철퇴를 날려야겠다고 이중잣대를 보인 김영삼

'IMF 당시 빚쟁이들만 사라지면 어린 니들은 상속포기권이 있으니까 이제부터 마음대로 해도 되잖아'라는 듯 강요하는 분위기가 싫었다.

상속을 포기한다고 해도 카드 돌려막기와 상관없는 피해자가 가족 중 돌려막기를 한 사람 때문에 피해를 봐서 효도하고 구해주고 싶었는데 못했다는 좌절과 절망감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빚쟁이 되기 싫어 자기 꿈과 상관없이 할부라는 이름 앞에 현실적으로 N포세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청춘들의 한숨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운동권은 운동권이 아닌 사람에게 경제를 책임지지 못한 책임을 지긴커녕 지금도 일반 국민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경제를 망쳐놓고 사과하기 싫다는 듯 자존심과 오만함으로 목을 꼿꼿이 세울 자격이 있을까.

경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호언장담하기 싫으니까 자꾸 다른 주제로 돌리는 운동권 특유의 잘못된 방어기제는 이제 그만 보고 싶다. 현실도피를 커다란 정치 스케일로 하니까 이 사단이 나지.

그놈의 웰빙과 힐링 문화가 막장 드라마스럽게 미쳐서 신도시에서 갑질하고 싶은 졸부 새끼들이 수두룩해져 신도시 하면 서민들에게 부럽지만 닮고 싶지 않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신도시의 품격 좋아하시네.

어쨌든 푸틴 개새끼가 전쟁을 쳐일으켜 물가 급등으로 IMF 시즌2가 올 거라 정치권과 언론까지 불안에 떨고 있다. 웃긴 건 조져버려할 가장 큰 원흉인 푸틴 새끼는 냅두고 국민들끼리 분열이나 쳐한다는 거지. 씨발 이러니까 IMF에 거지같이 당하지. 20년이나 지나놓고 아직도 달라진 게 없냐.

국민들을 이끌겠다는 헛된 욕망은 그만해라 찢갈이까지의 계보들아. 1997년부터 그건 니들이 가져선 안 되는 생각이었다.

정치적 책임과 역사적 평가

1997년 외환위기는 김영삼 정부에서 발생했고, 김대중 정부에서 본격적인 구조조정과 위기 수습이 진행됐다. 따라서 두 정부의 경제정책과 정치적 책임을 평가할 때에는 위기의 발생과 대응, 구조조정, 회복 과정을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영삼은 민주화운동과 문민정부의 출범에 기여한 인물이며, 동시에 외환위기 당시 대통령으로서의 정책적 책임을 논의할 대상이다. 두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민주화에 관한 공적이 존재한다고 해서 외환위기 관련 비판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외환위기가 발생했다고 해서 이전의 민주화 활동이 역사에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김대중 정부에 대해서도 외환시장 안정과 IMF 차입금 조기 상환 등 경제적 성과를 검토할 수 있지만, 구조조정 과정에서 나타난 실업과 고용불안, 빈부격차 등에 관한 비판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 이러한 정책의 효과와 비용은 여러 경제주체에게 다르게 나타났으므로 단순히 성공 또는 실패라는 한 단어로 정리하기 어렵다.

후대의 기억

외환위기는 단순히 경제지표에 기록된 사건을 넘어 한국 사회의 집단기억으로 남아 있다. 특히 당시 직장을 잃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게 외환위기는 국가경제가 회복됐다는 발표 이후에도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경험이었다.

이는 세대별 인식 차이와도 연결된다. 외환위기 이전의 고도성장기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당시의 경제적 안정감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기억할 수 있지만, 외환위기 이후 취업시장에 진입한 사람들은 구조조정과 고용불안을 보다 강하게 기억할 수 있다.

다만 세대 전체의 경제관을 단일한 경험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며, 같은 시대를 살았더라도 계층과 지역, 직업, 가정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경험을 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긍정적 평가

마치 지옥에 떨어진 연쇄살인마가 '으~따 따듯한 물이 펑펑 솟아나는 게 올 겨울 난방비는 걱정 없겠구마이!'라는 식의 초긍정평가를 해보자.

IMF 이전의 한국 경제는 사실상 폐쇄적인 지역 경제 구조였는데 이것은 한국 자본주의가 일본 자본주의를 그대로 벤치마킹 해서 설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갓본과 체급 자체가 다른 한국 자본주의는 외자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어버린 것이다.

IMF 체제로 한국 자본주의는 이전과 확연히 다르게 세계화 되었고, 각종 대기업들에게 외래 주주들이 빼곡히 들어섰으며 영미권의 자본의 깊숙한 개입이 이루어졌다.

즉 폐쇄된 한국 자본주의가 강제 개방, 개혁되어서 영미 금융으로 대표되는 외래 글로벌 경제와 완벽하게 호환되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당시에도 한국 자본주의는 수출 주도의 체제였고, 대부분의 수출이 일본의 하청, 중간재 재수출로 이루어져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IMF가 가져온 신시대 신체제는 이런 판도를 방만 투자에서 선택 집중형으로 바꿔놓았고 그 결과 삼성 전자 등 몇 개 '확실히 돈이 될 만한' 기업들에게 집중 투자가 이루어져서 결국 2010년대의 삼성의 가공할 체급화가 완성되었고 예전 같았으면 하청이나 받고 머슴 일이나 해주었던 일본 회사들을 상대로 이제는 대등하게 경쟁을 벌여서 나와바리에서 몰아냈으며, 현재 반도체로 한국 경제가 꿀 빠는 결과를 가져왔다.

ㄴ 근데 이것도 반론이 있는 게 현재 반도체 수출이 잘 되어도 고용에 도움이 되는 낙수효과가 줄어든 것은 일본으로부터의 중간재 수입 때문이다. 소위 말해서 "가마우지 경제".

반도체로 코스피 올라가봤자 있는 놈이 더 많이 갖고, 없는 놈은 알거지로 살아야 하는 격차 사회에서는 서민에게 거의 의미도 없고 IMF 이전에 비해서 양극화가 어마어마하게 심각해졌지만, 지금 한국의 롤모델이었던 일본 경제의 몰락 현상을 볼 때 과연 한국 자본주의가 IMF를 통한 체질 개선을 하지 않았더라도 지난 미국발 모기지 사태 등을 무사히 넘기면서 오늘날 같은 성장 지속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ㄴ 일본 경제의 부진은 고령화된 인구 구조가 가장 큰 원인이고 그 다음이 병신 같은 토목공사에 돈 날린 짓과 버블 경제 때 부동산 투기질한 것 정도지, 경제 몰락 현상은 기존의 다른 유럽 강대국들도 마찬가지거나 더 심한 경우도 있는 만큼 딱히 일본의 모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이 지금 헬조선거리는 이유도 우선적으로 '일본보다 더 빠른 고령화'와 청년층 실업률, 고용률, 그리고 일본과 다르게 모아둔 1인당 국민 순자산 자체도 적다는 점 등이다. 일본 또한 틀딱들이 각계의 요직을 점거하고 있을 때 지금의 헬조선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청년 취업난이 있었지만, 80년대 갓본 시절과 버블 때 떡상한 순자산으로 지옥의 잃어버린 20년을 나름대로 버텨서 지금 좀 경기가 풀릴락 말락 하는 형국이다. 근데 한국은 그 정도의 가계 내 자산을 갖추진 못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 정도가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이다.

뭐 여기에 추가적인 긍정적 평가라면 사양산업을 물갈이했다는 점 정도일거다. 산업화 초기에 주력으로 밀던 섬유, 방직공업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을 IMF전까지 못놓다가 IMF터지고 대출로 연명하던 회사들이 대거 갈려나가면서

섬유 방직공업은 나가리되고 그자리를 IT쪽이 채우게 된다. 구로디지털단지같은곳이 그런 케이스다. 다만 IT 현황이 좋다는건 아니다. 미싱은 잘도도네 시발 존나 잘도네

즉 어차피 엎질러진 물 담을 수 없다면 그냥 가능한 한 좋은 면만 보고 사는 게 우리로 하여금 스트레스를 덜 받게 할 것이다.

그렇지 땡삼씹새야? 지옥탕은 뜨듯하냐?

주의. 이 문서는 중증 미뽕이 작성했습니다.
이 글엔 샘 아재의 은총과 자유의 향기가 가득합니다. 'MURICA!!!! Fuck Yeah!!!'

사실 해고 존나 자주 하고 정규직 잘 안 해주는게 미국식 경제 형태인데...(물론 미국은 이러면서도 엄청나게 많은 임금을 받고 복지혜택이 훌륭한데다가 재취업이 쉬운 장점이 있다.)

ㄴ미국식 경제와는 다르다. 애초에 거기는 육체 노동직(생산직)이든 정신 노동직(사무직)이든 둘 다 임금은 많이 받고 복지혜택도 뛰어난데다가, 말 그대로 한 만큼 받고 승진하거나 못 한 만큼 못 받고 짤린다.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의 효과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기업들은 높은 부채비율과 무리한 사업확장의 위험성을 보다 강하게 인식하게 됐다. 금융기관에서도 부실채권을 정리하고 자본적정성과 위험관리, 기업의 재무상태를 평가하는 제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확대됐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 기업과 금융기관의 재무건전성을 높이고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구조조정 과정에서 실업과 고용불안, 기업의 해외매각, 소득격차 등의 문제가 발생했으며, 그 비용을 노동자와 가계가 과도하게 부담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특히 경제 전체의 생산성과 효율성이 개선됐다는 평가와 개별 노동자나 가계의 경제적인 삶이 개선됐다는 평가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국가의 외환보유액과 기업의 재무구조가 안정됐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국민의 생활수준과 고용안정성이 함께 개선됐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산업구조의 변화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서는 정보통신산업과 첨단 제조업, 서비스업 등 새로운 산업분야가 성장했다. 동시에 일부 전통적인 제조업과 금융기관, 대기업집단에서는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특히 삼성전자 등 주요 기업은 이후 반도체와 정보통신산업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대했으며, 이러한 성장은 한국의 수출구조와 산업 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만 이러한 발전을 외환위기의 결과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반도체산업에 대한 투자와 기술개발, 수출시장 확대는 외환위기 이전부터 장기간 진행됐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구조의 변화가 기업과 국가경제에 가져온 이익이 노동자와 가계에 동일하게 분배됐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평가가 필요하다. 따라서 외환위기 이후 경제의 효율성이 높아졌다는 주장과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됐다는 주장은 반드시 양자택일해야 하는 의견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측면을 지적하는 평가일 수 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와 비교

2008년 세계금융위기는 미국의 주택금융시장과 금융기관의 부실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확산된 사건이다. 대한민국 역시 환율과 금융시장, 수출 등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1997년과 같은 방식으로 IMF 구제금융을 요청하지는 않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외환보유액을 크게 확충하고 금융기관의 외화 유동성 관리와 건전성 감독을 강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에 대응하는 데 일정한 도움이 됐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그러나 2008년에도 한국 경제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아니다. 원화의 가치가 급격하게 하락하고 금융시장이 불안해졌으며, 세계경제의 침체로 수출과 고용 등에 충격이 발생했다.

따라서 1997년 외환위기를 통해 한국 경제가 모든 종류의 경제위기에 완전히 안전해졌다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외화 유동성 관리와 금융감독체계의 중요성에 관한 경험을 축적했다는 점에서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역사적 평가

1997년 IMF 외환위기는 대한민국의 경제정책과 금융구조, 기업 경영방식, 노동시장, 사회문화 등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외화 유동성 부족이라는 직접적인 문제는 2001년까지 해소됐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실업과 구조조정, 가계의 경제적 상처는 장기간 이어졌다.

이 사건은 국가경제가 성장하고 수출이 증가하더라도 금융기관과 기업의 재무구조가 취약하고 외화부채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경제위기를 수습하기 위한 정책이 금융시장 안정과 실물경제 회복, 노동자의 고용안정이라는 서로 다른 목표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을 요구한다는 사실도 보여줬다.

외환위기를 둘러싼 정치적 책임과 정책적 평가는 지금도 논쟁의 대상이다. 다만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려면 정부와 금융기관, 기업 및 국제금융시장의 역할을 구분하고, 실제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과 당시 사람들이 남긴 분노와 풍자를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에서 국가경제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과 그 위기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삶이 회복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강하게 남긴 사건이다.

관련 문서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