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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원필경(桂苑筆耕)은 신라 말기의 문장가이자 학자인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작성한 시와 산문을 모아 886년(헌강왕 12년) 편찬한 시문집이다.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라고도 하며, 전체 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대한민국의 개인 문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한국 한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최치원이 당나라의 회남절도사 고변 휘하에서 종사관으로 활동하면서 작성한 군사문서와 외교문서, 격문, 시 등을 중심으로 편찬되었다. 전체적으로 시 50수와 산문 320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제11권에는 황소의 난 당시 반란군 지도자 황소에게 항복을 권유하면서 강하게 비난한 토황소격문(격황소서)이 수록되어 있다.

제목의 계원(桂苑)은 문장가들이 모여 있는 문학의 세계를 가리키며, 필경(筆耕)은 붓으로 밭을 간다는 뜻이다. 최치원은 서문에서 전쟁과 혼란 속에 군막에서 생활하며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이러한 제목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최치원은 885년 신라에 귀국한 뒤 자신이 당나라에서 작성한 방대한 분량의 시문을 정리하여 886년 1월 헌강왕에게 바쳤다. 당시 다른 시문집도 함께 바쳤지만, 오늘날 완전한 형태로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 20권뿐이다.

계원필경(桂苑筆耕)
다른 명칭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저자 최치원
저자의 출신 신라
저술 배경 당나라 회남절도사 막부
편찬 시기 886년(헌강왕 12년)
헌상 시기 886년 1월
헌상 대상 헌강왕
분류 시문집, 한문학
권수 20권
수록 작품 시 50수, 산문 320편
주요 문체 사륙변려문
주요 수록 작품 토황소격문, 기덕시(紀德詩),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 등
관련 인물 고변, 황소, 서거정, 서유구
대표적인 중간본 1834년 전주 간행본
문학사적 의의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개인 문집
주요 소장기관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개요

신라 출신의 천재 문장가가 당나라에 취업해서 남의 명의로 존나게 써 댄 공문서들을 모아 놓은,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

일반적으로 문집이라고 하면 작가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시나 인생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을 떠올리기 쉽다. 그런데 《계원필경》은 그런 종류의 작품만을 모아 놓은 책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내용은 최치원이 당나라의 고위 장군이었던 고변을 대신하여 작성한 공식적인 군사·행정문서이며,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업무용 보고서와 공문, 외교서한, 연설문, 선전문 등을 한데 모아 놓은 자료에 가깝다.

최치원은 12세에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유학한 뒤 과거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고변의 막하에서 문서업무를 담당했다. 특히 당시에는 황소의 난으로 당나라 전역이 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각지의 장군들은 황제에게 보고서를 올리고 다른 군사 지휘관들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반란군에 대한 군사작전을 조율해야 했다. 최치원은 이러한 상황에서 고변을 대신하여 수많은 문서를 작성했다.

이 과정에서 작성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토황소격문이다. 최치원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까지 점령한 반란군 지도자 황소에게 그의 출신과 행적을 비난하고, 지금이라도 항복하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격문을 작성했다. 이 글에는 천하의 사람들이 황소를 죽이려고 할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까지 그를 죽이려고 의논하고 있다는 유명한 표현이 등장한다.

이처럼 고변의 막하에서 작성한 글들이 쌓이자 최치원은 자신이 집필한 방대한 분량의 문서를 정리했고, 신라로 귀국한 뒤 그 가운데 일부를 선별하여 20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이 바로 《계원필경》이다.

요즘 말로 하면 당나라 대기업에 취업해서 4년 동안 상사 명의로 작성했던 보고서, 이메일, 기획안, 대외 공문들을 싹 모아서 20권짜리 포트폴리오로 만들고, 고향에 돌아와 국왕에게 제출한 셈이다.

그런데 그 포트폴리오에 적힌 주요 업무경력 가운데 하나가 '중국 수도를 점령한 반란군 수괴를 한문으로 존나게 갈굼'이었다. 이 정도면 문장력 하나만큼은 확실히 증명한 셈이다.

물론 이러한 특징 때문에 《계원필경》을 단순한 업무 문서 모음집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당시의 공식적인 문서는 문학적으로도 높은 수준의 표현을 요구했으며, 특히 사륙변려문을 활용하여 정교한 대구와 풍부한 역사적 고사를 사용하는 일이 중요했다. 최치원은 이러한 문체에 능숙했으며, 그의 글은 이후 고려와 조선의 문인들에게도 중요한 문학적 자료로 활용되었다.

또한 《계원필경》은 9세기 후반 당나라의 정치와 군사, 지방사회, 외교관계 등을 보여주는 사료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내용이 중국에서 발생한 사건에 관한 것이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당나라 말기의 역사와 동아시아 국제교류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제목의 의미

계원(桂苑)

계원은 계수나무가 자라는 동산이라는 뜻이지만, 문학적인 의미로는 문장가들이 모인 곳이나 글을 짓는 세계를 가리킨다.

전통적인 한문문화에서 계수나무는 뛰어난 학문과 문학적 성취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따라서 계원은 단순히 나무가 자라는 정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과 학문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최치원은 이러한 표현을 활용하여 자신이 당나라에서 작성한 작품들을 하나의 문학적 성과로 정리하려 했다.

다만 《계원필경》에 수록된 작품들이 모두 개인적인 문학활동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고변의 막부에서 업무를 수행하면서 작성한 공식 문서였으며, 이러한 문서들을 정교한 문학적 표현으로 작성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필경(筆耕)

계원필경이라는 제목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이다.

필경은 붓으로 밭을 간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농부는 땅을 갈고 농작물을 재배하여 생계를 유지하지만, 최치원은 붓으로 글을 쓰면서 생계를 유지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계원필경》 서문에서 최치원은 당시 전쟁과 혼란을 겪으면서 군막에 머물러 생활했고, 글을 쓰는 일로 먹고살았기 때문에 필경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는 고변의 막하에서 군사와 행정 관련 문서를 작성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공식 문서가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

따라서 필경은 단순히 문학적인 멋을 내기 위해 붙인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실제 직업과 생활방식을 표현한 말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서 최치원 본인이 '남들은 밭 갈아서 먹고사는데 나는 글 써서 먹고산다'고 제목부터 대놓고 밝힌 것이다.

1,100년도 더 지난 오늘날로 치면 '문서 작성으로 생존한 직장인의 기록' 정도 되는 제목이다. 실제로 내용의 상당 부분이 상사를 대신해서 작성한 업무 문서라는 점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1]

편찬 배경

최치원의 당나라 유학

최치원은 857년 신라에서 태어난 인물로, 어려서부터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868년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했으며, 그곳에서 유교 경전과 한문학을 공부했다. 당시 신라와 당나라는 활발한 외교·문화 교류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신라의 여러 지식인들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학문을 배우거나 관직에 진출했다.

최치원은 874년 18세의 나이로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급제했다. 이후 당나라에서 관료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선주 율수현의 현위로 임명되어 지방행정의 실무를 경험했다.

그는 율수현위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글을 작성했고, 이 시기에 지은 작품들을 《중산복궤집》이라는 문집으로 정리했다. 또한 당나라의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시와 부 등 여러 문학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최치원의 당나라 생활은 평화로운 학문 연구와 관료생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당나라는 황소의 난으로 심각한 정치·군사적 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최치원은 회남절도사 고변의 막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고변의 종사관이 되다

고변은 당나라 말기의 대표적인 군사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러 전쟁에 참여하면서 군사적 경력을 쌓았다. 그는 회남절도사를 역임했으며,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최치원은 고변의 휘하에서 종사관으로 활동하면서 군사와 행정 관련 문서를 작성하는 업무를 맡았다. 당시 절도사는 단순히 군대만 지휘하는 직책이 아니라 일정 지역의 군사와 행정, 재정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방 권력자였다. 따라서 절도사의 막부에서는 황제에게 올리는 보고서와 다른 관료들에게 보내는 서신, 군사명령과 격문 등 다양한 문서가 필요했다.

최치원은 이러한 문서를 작성하는 담당자로서 자신의 문장력을 발휘했다.

특히 공식적인 문서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뿐 아니라 상대방의 지위와 정치적 상황에 맞는 표현을 사용해야 했으며, 역사적 고사와 문학적 수사법을 활용하여 설득력을 높이는 것이 중요했다.

최치원은 이처럼 복잡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수많은 문서를 작성했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훗날 《계원필경》에 수록되었다.

오늘날로 치면 고변이라는 군사·정치 분야의 거물 밑에서 대외협력과 전략기획, 공문서 작성까지 담당했던 셈이다. 그런데 하필 회사가 황소의 난이라는 초대형 위기 상황에 놓여 있어서 업무량이 존나게 많았다.

4년 동안 1만여 편을 쓰다

《계원필경》 서문에 따르면 최치원은 고변의 막하에서 약 4년 동안 활동하면서 1만여 수에 달하는 시문을 작성했다.

이 수치는 최치원 자신이 회고한 것이므로 오늘날의 문서 작성 건수처럼 정확하게 집계된 통계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매우 많은 분량의 글을 작성했다고 스스로 설명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특히 고변의 막부에서는 군사작전과 행정업무에 필요한 문서가 끊임없이 작성되었으므로, 최치원은 개인적인 시문을 짓는 것뿐 아니라 업무를 수행하면서 많은 글을 생산해야 했다.

최치원은 귀국 후 이러한 작품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을 제외하고 일부만 골라 20권으로 편집했다.

서문에는 1만여 수 가운데 열에 한두 편도 남기지 않았다는 설명이 등장한다. 이는 자신의 작품들을 상당히 엄격하게 선별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만, 실제로 어떤 기준에 따라 작품을 제외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그럼에도 현재 전하는 《계원필경》에는 수백 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어, 최치원의 문장력과 당시의 다양한 문서 형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4년 동안 1만여 편을 썼다는 설명을 그대로 계산하면 하루 평균 여섯 편이 넘는다. 물론 고대의 '수'를 오늘날의 문서 한 건과 정확하게 대응시킬 수는 없지만, 본인의 설명만 놓고 보면 업무량이 아주 살벌했던 셈이다.

그렇게 일하면서 쓴 글을 대부분 버리고도 20권이 남았으니, 최치원이 왜 붓으로 밭을 간다고 표현했는지 이해할 만하다.

귀국과 헌강왕에게의 헌상

최치원은 884년 10월 당나라의 회남 지역에서 귀국길에 올랐으며, 885년 3월 신라에 도착했다.

이후 그는 당나라에서 작성한 시문을 정리하여 886년 1월 헌강왕에게 바쳤다.

당시 최치원이 바친 문집은 《계원필경》만이 아니었다. 서문에 따르면 그는 《사시금체부》 1권과 《오언칠언금체시》 1권, 《잡시부》 1권, 《중산복궤집》 5권도 함께 바쳤으며, 이들을 모두 합하면 28권에 이른다.

그러나 오늘날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것은 《계원필경》 20권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계원필경》이 신라로 귀국한 뒤의 정치활동과 개혁운동을 정리한 문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책에 수록된 작품 대부분은 그가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작성한 것이며, 귀국한 뒤에는 이를 선별하고 정리하여 왕에게 바친 것이다.

따라서 894년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십여조는 《계원필경》의 수록 작품이 아니다.

최치원이 왕에게 이러한 문집을 바친 행위는 자신의 학문적 성취와 관료로서의 능력을 알리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신라에서는 중국의 학문과 제도를 이해하고 한문으로 공식 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한 정치적 자질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과거에 합격하고, 거기서 고위 장군의 문서 담당자로 일하다 돌아온 다음 '전하, 제가 외국에서 이런 일을 했습니다'라며 28권짜리 포트폴리오를 제출한 셈이다.

요즘이면 이력서 몇 장과 경력기술서로 끝낼 일을 무려 수십 권의 책으로 증명한 것이다. 물론 그만큼 글 잘 쓰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던 시대였으니, 당시로서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자기소개였을 것이다.

구성

《계원필경》은 전체 2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부분의 작품이 공식적인 산문이다. 특히 제1권부터 제16권까지는 고변을 대신하여 작성한 문서가 중심을 이루며, 제17권부터 제20권까지는 최치원 자신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과 시문이 비교적 많이 수록되어 있다.

각 권은 문서의 종류와 성격에 따라 구분되어 있으나, 일부는 작성 시기와 업무 내용에 따라 편집되었다.

권수 주요 내용
제1~2권 표(表) 20편. 고변이 당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공식 문서
제3권 장(狀) 10편. 군사·행정 관련 보고문
제4~5권 주장(奏狀) 20편. 황제에게 올리는 상주문
제6권 당장(堂狀) 10편. 관청의 공식 문서
제7~10권 별지(別紙) 80편. 다른 관료와 유력자에게 보내는 문서
제11권 격서(檄書) 4편과 서(書) 6편. 토황소격문 수록
제12~13권 위곡(委曲) 20편. 지시와 사정을 전달하는 문서
제14권 거첩(擧牒) 50편. 공적인 연락과 업무 처리에 사용된 문서
제15권 재사(齋詞) 15편. 주로 도교 관련 의식문
제16권 제문과 서·소·기 등 10편. 《보안남록이도기》 등 수록
제17권 계·장 등 10편 및 고변을 칭송한 《기덕시》 30수
제18권 서·장·계 등 25편
제19권 장·계·별지·잡저 등 20편
제20권 계·장·별지·제문·시 등 40편. 귀국 전후의 심정과 관련된 작품

이러한 구성은 《계원필경》이 단순한 시집이 아니라 다양한 공식 문서와 문학작품을 함께 수록한 종합적인 시문집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제11권의 격황소서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제 문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20권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당나라의 정치·군사·행정과 관련된 문서이며, 당나라 말기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2]

주요 수록 작품

토황소격문

《계원필경》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토황소격문은 881년 최치원이 고변의 명의로 작성한 격문으로, 황소의 난을 일으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령한 황소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치원은 이 글에서 황소의 정치적 정당성을 부정하고 반란이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역사적 고사와 비유를 활용하여 황소를 강하게 비난했다. 특히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죽이려고 할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까지 이미 그를 죽이려고 의논했다는 유명한 표현이 등장한다.

후대에는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크게 놀라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최치원의 문장력을 강조하는 문학적 일화로 이해해야 한다. 황소가 실제로 격문을 읽고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은 독립적인 당시의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으며, 그는 이 격문이 작성된 뒤에도 계속 반란을 이어 갔다.

그럼에도 토황소격문은 정교한 문체와 강렬한 표현을 활용하여 상대방을 비판하고 항복을 권유하는 격문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계원필경 전체가 20권이나 되는데, 결국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반란군 수괴에게 정중하게 쌍욕을 퍼붓고 귀신들까지 소환한 격문이다.

다른 문서들은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나 관료들에게 보낸 공문서인데, 정작 후세 사람들이 가장 열심히 기억하는 것은 '황소 이 새끼는 산 사람들뿐 아니라 죽은 귀신들까지 죽이려고 한다'라는 글이다. 역시 독한 글이 오래 살아남는다.

기덕시

기덕시(紀德詩)는 고변의 공적과 능력을 칭송하기 위해 작성한 시들로, 《계원필경》 제17권에 수록되어 있다.

전체 30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변을 중국 고대의 뛰어난 정치가와 군사 지도자들에 비유하면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고변을 장량을 비롯한 중국 역사의 유명한 인물들에 비교하여 천하를 안정시키고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영웅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고위 장군과 관료를 칭송하는 문학적 관행과 연결된다. 최치원은 고변의 막하에서 근무하는 종사관이었으며, 자신의 상관을 칭찬하는 공식적인 시문을 작성하는 것도 업무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후대에는 지나치게 노골적인 찬양 때문에 문학적 품격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특히 고변은 당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강력한 지방 군사세력을 이끌었던 인물이지만, 국가를 완전히 안정시키거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인물이라고만 평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최치원이 그를 역사상 최고의 영웅들과 비교한 표현을 그대로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제11권에서는 황소를 향해 '너는 이제 좆됐다'라며 온갖 역사적 고사를 끌어다가 비난하더니, 제17권에서는 자기 상사를 향해 '장군님은 중국 역사상 위대한 영웅들과 같은 분이십니다'라며 온갖 역사적 고사를 끌어다가 찬양한다.

한쪽에는 악플을 쓰고 다른 쪽에는 찬양글을 쓴 셈인데, 둘 다 직장 상사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작성한 공식 문서라는 점에서 재미있다. 고대에도 글 잘 쓰는 사람은 참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다.

보안남록이도기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는 《계원필경》 제16권에 수록된 글로, 당나라 시대 안남 지역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안남은 오늘날의 베트남 북부를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당시에는 당나라의 지배와 현지 세력의 저항이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 글은 해당 지역의 지리와 풍속, 역사적 상황 등을 이해하는 데 활용되는 자료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특히 《계원필경》은 한국 출신의 문장가가 작성한 문집이지만, 그 내용은 중국뿐 아니라 당시 당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던 주변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정보도 담고 있다.

따라서 《계원필경》은 한국 문학사뿐 아니라 중국사와 베트남사,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구에서도 활용된다.

재사

《계원필경》 제15권에는 재사(齋詞) 15편이 수록되어 있다.

재사는 종교의식이나 제사와 관련하여 작성한 글로, 이 작품들은 특히 당나라 시대의 도교와 관련된 의식문이라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당나라에서는 도교가 황실과 귀족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가의 안녕과 개인의 복을 기원하는 여러 의식이 이루어졌다.

최치원이 작성한 재사에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반영되어 있으며, 당시 도교적 의례와 문학적 표현을 이해하는 자료로 활용된다.

이는 최치원의 저술이 유교적 정치이념과 공식적인 행정문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귀국을 앞둔 작품들

《계원필경》 제20권에는 최치원이 당나라 생활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가기 전의 심정을 담은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귀국을 허락받은 데 대해 감사하는 내용을 담은 《사허귀근계》(謝許歸覲啓) 등이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부분 고변을 대신하여 작성한 앞부분의 문서와 달리 최치원 개인의 처지와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최치원은 어린 나이에 고국을 떠나 오랫동안 당나라에서 생활했으며,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관료로 활동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당나라에서는 황소의 난을 비롯한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최치원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장기간 군막 생활을 이어 갔다.

따라서 귀국을 앞둔 그의 글에는 오랫동안 떠나 있던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당나라에서 겪은 생활에 대한 회고 등이 나타난다.

이는 《계원필경》에서 상대적으로 드물게 확인되는 최치원 개인의 감정과 생활을 보여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서문

아버지의 훈계

《계원필경》의 서문은 최치원 자신의 성장 과정과 당나라 유학 경험을 직접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서문에 따르면 최치원이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을 떠날 때 아버지는 매우 엄격한 훈계를 남겼다.

十年不第進士 則勿謂吾兒 吾亦不謂有兒

그 뜻은 다음과 같다.

10년 안에 진사 시험에 급제하지 못하면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마라. 나 역시 아들을 두었다고 하지 않겠다.

최치원은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학문에 정진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지 약 6년 만에 과거시험에 급제했으며, 이후 당나라에서 관료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 기록은 최치원이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배경과 당시 가족들이 그에게 기대했던 학문적 성취를 보여주는 자료다.

다만 서문은 최치원 자신이 왕에게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글이므로, 자신의 노력과 성취를 강조하는 서술적 특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2살짜리 아들을 유학 보내면서 '10년 안에 과거에 붙지 못하면 넌 내 아들도 아니다'라고 했으니, 오늘날의 극성 학부모들도 한 수 접어야 할 수준이다.

그런데 아들은 그 협박을 듣고 진짜로 6년 만에 당나라 과거에 합격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자랑스러웠겠지만, 최치원 입장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인생의 난이도가 상당히 높았던 셈이다.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다

최치원은 서문에서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전 작성했던 시와 부에 대해 비교적 낮은 평가를 내렸다.

그는 어린 시절 작성한 작품들이 상자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지만, 과거시험에 급제한 뒤에는 이를 미숙한 작품으로 여기고 버렸다고 설명했다.

이후 율수현위로 재직하면서 다시 작품들을 모아 《중산복궤집》을 편찬했고, 고변의 막하에 들어간 뒤에는 더욱 많은 공식 문서를 작성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4년 동안 작성한 1만여 수의 작품 가운데 대부분을 제외하고 일부만 골라 《계원필경》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내용은 최치원이 자신의 작품을 단순히 모두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글들을 선별하여 문집을 편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이 책을 왕에게 바치면서 자신의 미약한 노력이라도 인정받고자 하는 뜻을 드러냈다.

따라서 《계원필경》의 서문은 단순한 책 소개를 넘어, 최치원이 자신의 학문적 경력과 문학적 성취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전적 자료다.

문학적 특징

사륙변려문

《계원필경》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특징은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의 사용이다.

사륙변려문은 네 글자 또는 여섯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들을 짝지어 배치하면서 대구와 운율, 문장의 형식적 균형을 강조하는 한문 산문 양식이다.

이러한 문체는 중국의 남북조시대부터 발전했으며, 당나라에서도 공식적인 문서와 문학작품을 작성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황제에게 올리는 상주문이나 고위 관료들 사이의 서신, 군사적 격문에서는 품격 있는 표현과 풍부한 역사적 고사가 중요하게 여겨졌다.

최치원은 이러한 문체에 능숙했으며, 《계원필경》에 수록된 많은 작품에서 대구법과 비유, 역사적 고사를 정교하게 활용했다.

대표적으로 토황소격문에서는 과거의 반란 지도자들과 역사적 사건들을 인용하여 황소의 행위를 비판하고, 결국 반란이 실패할 것이라는 주장을 전개했다.

이는 단순히 문장을 화려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적 사례를 활용하여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체는 지나치게 형식적인 표현에 치중하여 작가 자신의 독창적인 감정이나 사상이 충분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공식 문서와 문학의 결합

《계원필경》에 수록된 글들은 대부분 실제 정치·군사업무와 관련된 문서다.

황제에게 올리는 표와 장, 다른 관료들에게 전달하는 공식적인 서신, 반란군에 대한 격문 등은 모두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작성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문서에서도 높은 수준의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한문에 능숙한 관리들은 역사적 고사를 자유롭게 인용하고, 상황에 적절한 비유와 문장을 구성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했다.

이러한 점에서 《계원필경》은 실용적인 문서와 문학작품의 경계가 오늘날과 달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공문서가 간결하고 명확한 정보 전달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당나라 시대의 일부 공식 문서는 화려한 문장과 고사를 활용하여 작성자의 학식과 권위를 드러내기도 했다.

따라서 《계원필경》은 단순한 관료의 업무 기록이 아니라 당시의 문학적 취향과 정치문화가 결합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선전과 설득

《계원필경》에는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작성한 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특히 격문은 적군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관군의 우위를 강조하여 상대방의 저항을 약화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문서는 실제 군사적 상황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기보다 작성자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전황을 강조하거나 상대방을 비판하는 특징을 가진다.

따라서 《계원필경》을 역사적 사료로 활용할 때에는 글에 등장하는 주장과 실제로 발생한 사건을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토황소격문에서 최치원은 황소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당시 관군의 승리를 선전하고 반란군의 항복을 권유하기 위한 표현이었다.

또한 기덕시에서 고변을 중국 역사상 뛰어난 영웅들에 비유한 표현 역시 상관을 찬양하기 위한 문학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계원필경》이 당시의 정치적 선전과 공식적인 문서 작성 방식을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임을 보여준다.

역사적 가치

당나라 말기의 역사 연구

《계원필경》은 한국의 문학작품이면서 동시에 당나라 말기의 중요한 역사적 자료다.

특히 당나라의 중앙정부와 지방 절도사들 사이의 관계, 황소의 난과 관련된 군사활동, 지방 관료들의 행정업무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나라 말기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고 지방 군벌들이 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절도사들은 독자적인 군사조직과 행정체계를 운영했으며, 다른 지방세력이나 중앙정부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최치원이 작성한 문서들은 이러한 정치·군사적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후대에 편찬된 정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세부적인 행정업무나 외교적 의사소통이 《계원필경》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서가 고변의 입장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공식적인 주장도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의 실제 상황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구당서》와 《신당서》, 《자치통감》 등 다른 사료와 비교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 국제교류

최치원은 신라인이었지만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관료로 활동하면서 중국의 정치·군사문서를 작성했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한문과 유교적 학문이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지식인들의 공통적인 문화적 기반으로 활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신라의 지식인이 당나라의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지방 절도사의 막하에서 중요한 문서 작성업무를 담당할 수 있었다는 점은 양국 사이의 학문적·인적 교류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계원필경》에는 당나라가 관계를 맺고 있던 주변 지역과 관련된 자료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중국과 베트남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지역의 역사와 문화교류를 연구하는 데에도 활용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한 국가의 문학작품을 넘어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문화적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신라 말기 지식인의 모습

《계원필경》은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활동하면서 작성한 작품들이 중심이므로, 신라 국내의 정치상황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나 최치원이라는 인물의 생애와 연결해서 보면 신라 말기 지식인의 학문적 성취와 사회적 한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최치원은 6두품 출신으로, 신라의 골품제 아래에서는 고위 관직 진출에 일정한 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당나라에서는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관료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경험은 최치원이 귀국 이후 유교적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신라의 개혁을 주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그는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려 정치적 개혁을 시도했지만, 신라의 기존 정치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따라서 《계원필경》은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어떠한 경험과 능력을 쌓았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며, 이후 신라에서 전개한 정치적 활동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의미가 있다.

다만 이 책 자체가 신라의 골품제를 직접 비판하기 위해 작성된 정치개혁서는 아니다.

전승과 간행

고려와 조선 시대의 전승

《계원필경》은 886년 최치원이 편찬하여 헌강왕에게 바친 이후에도 오랫동안 전해졌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최치원의 문장력이 높이 평가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한문학과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문인들에게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되었다.

특히 《계원필경》은 사륙변려문의 다양한 표현과 고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였기 때문에 공식 문서를 작성하거나 한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참고하기에 적절했다.

그러나 책이 오랫동안 전승되는 과정에서 일부 글자가 바뀌거나 누락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모든 시대의 간행본이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아니므로, 초기 판본의 구체적인 모습과 각 시대의 간행 경위를 완전히 복원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는 고전 문헌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계원필경》은 최치원이 886년에 직접 작성한 원본이 아니라, 후대에 여러 차례 필사되고 간행되는 과정을 거쳐 전해진 문헌이기 때문이다.

1834년 서유구의 간행

조선 후기인 1834년에는 서유구가 《계원필경》을 다시 간행했다.

당시 홍석주는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계원필경》의 간행을 서유구에게 부탁했으며, 서유구는 기존의 편목과 체제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잘못된 글자를 교정하여 전주에서 책을 간행했다.

이렇게 간행된 판본은 오늘날 전해지는 《계원필경》의 주요한 저본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특히 서유구의 간행 작업은 최치원의 문집이 오랜 시간 전승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를 교정하고, 후대에 책을 안정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판본을 바탕으로 한 20권 4책의 활자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다만 《계원필경》이 처음부터 20권 4책이라는 현재의 물리적 형태로 제작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20권은 작품을 구분한 권차이며, 4책은 특정 간행본에서 책을 묶은 물리적인 단위를 의미한다.

현대의 번역과 연구

현대에는 《계원필경》에 관한 영인본과 번역본이 간행되면서 일반 독자와 연구자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1972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최문창후전집》에는 《계원필경》 전문이 수록되었으며, 1990년 민족문화추진회가 발간한 《한국문집총간》에도 수록되었다.

이후 한국고전번역원은 《계원필경집》을 완역하여 현대 한국어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역사적 고사와 당나라의 관직, 당시의 정치적 사건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세한 주석과 사료 검증이 필요하다.

따라서 현대의 《계원필경》 연구는 문학적인 표현을 분석하는 것뿐 아니라 당나라 말기의 역사와 정치, 종교, 국제교류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한국 최초의 현존 개인 문집

《계원필경》의 가장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한국 최초의 개인 문집이라는 점이다.

물론 최치원 이전에도 신라의 지식인들이 다양한 시문을 작성했으며, 국가의 공식 문서와 금석문, 문학작품 등도 존재했다.

따라서 《계원필경》을 한국인이 처음으로 글을 쓰거나 문학작품을 창작한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저자가 자신이 작성한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선별하여 편찬한 문집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특히 9세기 후반에 편찬된 20권의 문집이 오랫동안 전승되었다는 점은 한국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조선 전기의 문인 서거정은 《계원필경》을 한국에서 전하는 시문집의 개산비조(開山鼻祖), 즉 문집 전통의 시초로 높이 평가했다.

이는 최치원의 문학적 성취뿐 아니라 《계원필경》이 후대 한국 한문학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

《계원필경》은 문학적인 가치뿐 아니라 당나라 말기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특히 중앙정부와 지방 절도사의 관계, 황소의 난, 군사적 선전과 외교적 의사소통, 도교의 의식과 주변 지역에 관한 기록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계원필경》은 한국의 문장가가 작성한 자료이면서도 중국과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문헌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만 수록된 글들이 대부분 공식적인 문서이므로, 그 안에 담긴 정치적 주장과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고변을 칭송하는 시나 황소를 비판하는 격문은 당시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작성된 문서이므로, 그 표현들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문학적 한계와 비판

《계원필경》은 뛰어난 문장력으로 높이 평가받았지만, 모든 시대의 문인들에게 일관되게 찬사를 받은 것은 아니다.

특히 조선 후기의 일부 문인들은 최치원이 사용한 사륙변려문이 지나치게 형식적인 표현에 치중하고 있으며, 이미 중국에서도 유행이 지난 문체를 모방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고변을 찬양하는 기덕시와 같은 작품은 표현이 지나치게 노골적이어서 문학적 품격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이러한 비판은 최치원의 문장력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 작품이 형식적인 아름다움과 고사 인용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관한 문제 제기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계원필경》의 많은 작품은 고변을 대신하여 작성한 공식 문서이므로, 최치원 개인의 감정과 사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글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따라서 최치원의 개인적인 삶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원필경》뿐 아니라 그의 다른 시문과 비문, 후대의 기록 등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계원필경》은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면서도, 동시에 한 시대의 정치적·사회적 상황과 작가의 직업적 역할이 반영된 문헌이라는 점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여담

  • 《계원필경》은 886년 1월 헌강왕에게 바쳐졌다. 헌강왕이 사망하고 정강왕이 즉위한 것은 같은 해 7월이므로, 886년 전체를 일률적으로 정강왕 원년이라고 표기하여 헌상 당시의 국왕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으며, 18세에 빈공과에 급제했다. 《계원필경》의 서문에는 아버지가 10년 안에 과거시험에 급제하지 못하면 아들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훈계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 《계원필경》이라는 제목의 필경은 붓으로 밭을 간다는 뜻이다. 최치원이 전쟁 중 군막에서 글을 작성하여 생계를 유지했던 자신의 생활을 표현한 것이다.
  • 전체 2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시 50수와 산문 320편이 수록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 최치원은 고변의 막하에서 약 4년 동안 활동하면서 1만여 수의 시문을 작성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이후 귀국하여 그 가운데 일부만을 골라 문집을 만들었다.
  • 《계원필경》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제11권에 수록된 토황소격문이다. 그러나 전체 문집에서 차지하는 분량은 극히 일부이며, 대부분은 공식적인 군사·행정문서다.
  • 《계원필경》에 수록된 많은 문서는 최치원이 고변의 명의로 작성한 것이다. 따라서 문서의 공식적인 발신인과 실제 문장을 작성한 사람을 구분해야 한다.
  • 토황소격문에는 천하의 사람들과 귀신들이 모두 황소를 죽이려 한다는 유명한 표현이 등장한다. 후대에는 황소가 이를 읽다가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졌지만, 실제로 그러한 일이 발생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 제17권의 《기덕시》는 고변의 공적을 칭송하는 작품으로, 지나치게 노골적인 찬양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 제15권에는 도교와 관련된 재사 15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제16권의 《보안남록이도기》는 당나라 시대 안남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활용된다.
  • 제20권에는 최치원이 귀국을 앞두고 작성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다른 권과 비교하여 개인적인 감정과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다.
  • 최치원은 《계원필경》 외에도 여러 문집을 편찬하여 헌강왕에게 바쳤지만, 함께 바친 다른 문집들은 오늘날 완전한 형태로 전하지 않는다.
  • 《계원필경》은 한국 최초의 문학작품이 아니라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개인 문집으로 평가된다. 최치원 이전에도 한국인들이 작성한 다양한 문학작품과 문헌이 존재했다.
  • 중국의 《신당서》 예문지에도 최치원의 《계원필경》 20권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 기록에서 최치원을 고려인이라고 부른 표현은 후대 중국 측의 역사적 명칭 사용을 고려하여 이해해야 하며, 최치원이 고려 왕조의 사람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 《계원필경》은 1834년 서유구가 전주에서 다시 간행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판본이 오늘날 주요 도서관과 연구기관에 전한다.
  • 조선 전기의 서거정은 《계원필경》을 한국에서 전하는 시문집의 개산비조라고 높이 평가했다.
  • 《계원필경》이 편찬된 뒤 약 8년 후인 894년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렸다. 따라서 시무십여조가 《계원필경》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 최치원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과거시험에 붙으라는 압박을 받았고, 당나라에 취업해서는 1만여 편의 글을 작성했다고 하니, 공부와 업무 양쪽에서 존나게 굴러다녔던 인물인 셈이다.
  • 그렇게 20권짜리 문집을 왕에게 제출했는데 정작 오늘날 가장 유명한 글은 황소에게 욕을 먹인 격문이다. 1만여 편을 써 놓고 최종적으로 기억되는 업적이 고급 악플이라는 점이 상당히 웃기다.
  • 그나마 다행인 점은 현대의 직장인들과 달리 본인이 상사를 대신하여 작성한 공문서들을 자기 이름으로 문집에 수록하여 후세에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나라의 공식 문서는 고변의 명의로 나갔지만, 문장력의 명예는 결국 최치원에게 돌아갔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