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만약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 같이 떠들 사람? 노바위키 디스코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881년(헌강왕 7년) 신라 출신의 문장가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황소를 꾸짖고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 작성한 격문이다. 원래 제목은 격황소서(檄黃巢書)이며, 당나라의 장군이자 회남절도사였던 고변의 명의로 작성되었다.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작성한 대표적인 글로, 《계원필경》 제11권의 첫머리에 수록되어 있다. 화려한 대구와 반어적 표현, 역사적 고사를 활용한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며, 최치원의 뛰어난 문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특히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할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까지 이미 너를 죽이려고 의논하였다.」라는 구절이 유명하다. 후대에는 황소가 이 구절을 읽고 놀라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지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건이라기보다 최치원의 문장력을 강조하는 문학적 일화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원제 격황소서(檄黃巢書)
작가 최치원
작성 연도 881년 7월 8일
당시 국가 당나라
작성자의 출신 신라
발신 명의 고변(高騈)
수신인 황소(黃巢)
문학적 분류 격문, 사륙변려문
주요 목적 반란군 지도자 비판, 항복 권유, 심리전
관련 사건 황소의 난
수록 문헌 《계원필경》 제11권
관련 일화 황소가 격문을 읽다가 놀라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전승
문학사적 의의 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한문 산문 작품

개요

신라에서 유학 온 청년이 중국을 뒤집어엎고 황제 자리까지 차지한 반란군 수괴에게 보낸,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문의 공개 저격문 가운데 하나.

875년 당나라에서는 황소의 난이 발생했다. 당시 당나라는 지방의 절도사들이 세력을 키우고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는 등 여러 정치·사회적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기에 과중한 세금과 관리들의 부정부패, 경제적 불안이 겹치면서 백성들의 불만이 커졌으며, 결국 황소와 왕선지 등이 이끄는 반란군이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황소는 단순한 산적 두목 수준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대규모 반란군을 이끌고 중국 여러 지역을 휩쓸었으며, 880년에는 수도 장안까지 함락했다. 당나라 황제 당희종은 수도를 버리고 피신해야 했고, 황소는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제(大齊)라고 정했다. 그야말로 반란군이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 했던 것이다.

문제는 황소가 장안을 점령한 뒤에도 당나라의 다른 군사세력들이 모두 항복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나라 조정은 각지의 절도사들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했으며, 회남절도사 고변 역시 황소를 토벌하기 위한 군사작전에 참여했다.

당시 고변의 휘하에는 신라 출신의 젊은 관리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최치원이었다.

최치원은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과거시험에 급제한 수재였으며, 이후 고변의 막하에서 군사·행정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고변은 최치원의 문장력을 높이 평가했고, 황소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격문 역시 최치원에게 작성하도록 했다.

그런데 최치원이 작성한 글은 평범한 항복 권고문이 아니었다.

황소가 얼마나 형편없는 반역자인지, 지금까지 세운 공적이 얼마나 허망한지, 앞으로 얼마나 비참하게 죽을 것인지를 역사적 고사와 문학적 표현을 총동원하여 장황하게 설명한 뒤, 마지막에는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살려 주고 벼슬까지 줄 수 있다고 회유하는 내용이었다.

쉽게 말해서 중국 수도를 점령하고 황제를 자처하는 사람에게 신라 출신의 20대 청년이 '야 이 개새끼야, 너 지금 얼마나 좆된 상황인지 알고 있냐?'라는 내용을 존나 품격 있는 한문으로 작성하여 보낸 것이다.

그런데 막상 내용을 뜯어보면 초반에는 조상까지 들먹이며 욕을 하다가, 중반에는 천하 사람들과 귀신들까지 널 죽이려고 한다고 협박하고, 후반에는 지금 항복하면 좋은 자리 하나 챙겨 줄 테니까 생각 잘하라고 회유한다. 아주 정성스럽게 작성된 당나라판 최후통첩이다.

다만 토황소격문은 단순한 욕설 편지가 아니었다. 상대방의 정치적 정당성을 부정하고, 관군의 승리를 선전하며, 항복을 통해 반란군의 저항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공식적인 군사·정치 문서였다.

즉 최치원은 황소를 화나게 하려고 글을 쓴 것이 아니라, 황소와 반란군의 정치적·심리적 기반을 흔들기 위한 격문을 작성한 것이다.

역사적 배경

당나라 말기의 혼란

9세기 후반의 당나라는 이미 전성기의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상태였다. 8세기 중반 발생한 안사의 난 이후 지방의 절도사들이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적 기반을 확보했으며, 중앙정부는 이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황실 내부에서는 환관과 관료들의 권력 다툼이 이어졌고, 지방에서는 과중한 조세와 토지 집중, 자연재해 등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악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나라의 소금 전매제도도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소금은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물품이었지만 국가가 그 유통과 판매를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높은 가격과 전매제도는 밀매 조직이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황소 역시 소금 밀매와 관련된 활동을 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활용하여 반란군을 조직하고 확대했다.

875년 왕선지가 반란을 일으키자 황소가 이에 호응했으며, 반란군은 산둥과 허난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왕선지가 878년 전사하자 황소는 세력을 통합하여 반란의 중심적인 지도자로 성장했다.

황소의 반란군은 당나라의 정규군과 정면으로 충돌하기도 했지만, 여러 지역을 빠르게 이동하면서 지방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했다. 이러한 전략은 당나라 조정이 반란군의 이동을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으며, 황소는 중국 남부까지 진출한 뒤 다시 북상하여 주요 도시들을 공격했다.

결국 880년 황소의 군대는 장안에 입성했다. 당희종은 수도를 버리고 서쪽으로 피신했으며, 황소는 황제에 즉위하여 새로운 정권을 세웠다.

나라가 망해 가는 와중에 반란군이 수도를 점령하고 황제까지 갈아치웠으니, 당나라 조정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개판이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황소를 향해 '너 이제 좆됐다'라는 격문을 날렸으니, 당나라의 실제 상황과 글의 기세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황소의 세력

황소는 당나라 말기의 대표적인 반란 지도자다. 그는 소금 밀매와 관련된 경제적 기반을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왕선지의 반란에 참여한 뒤 독자적인 세력을 확대했다. 특히 여러 지역을 이동하며 관군을 상대하고, 마침내 당나라의 수도를 점령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군사적·정치적 역량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소의 세력이 커졌다고 해서 그의 반란군이 안정적인 국가체제를 구축한 것은 아니었다. 장안을 점령한 뒤에는 기존 당나라의 관료와 군사세력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으며, 반란군의 약탈과 보복, 지방 군벌들과의 갈등도 이어졌다.

또한 당나라의 여러 절도사들은 황소에게 완전히 복종하지 않았다. 황소가 수도를 점령하고 황제를 자처했음에도 지방에는 당나라 황실을 지지하는 군사세력들이 남아 있었으며, 이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반란군에 맞서 싸웠다.

따라서 황소는 당나라의 수도를 점령한 강력한 지도자였지만, 중국 전체를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나라의 토벌군이 반란군의 지도자를 회유하고 내부의 동요를 유도하려 했던 것은 군사적·정치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다.

다만 황소의 난은 단순히 탐욕스러운 반역자 한 사람이 일으킨 사건이 아니었다. 당나라의 지배체제가 오랫동안 누적한 구조적 문제와 민중의 불만을 배경으로 발생한 대규모 반란이었으므로, 당시 관군 측의 선전문에 나타난 황소의 모습만으로 사건 전체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최치원의 당나라 생활

최치원은 857년 신라에서 태어났으며, 868년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했다. 그는 874년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급제했으며, 이후 당나라에서 관리로 활동했다.

최치원은 6두품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신라에서는 골품제에 따라 관등과 관직의 승진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진골 귀족들이 차지하는 고위 관직에 진출하기는 어려웠다. 반면 당나라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도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최치원은 이러한 제도를 통해 관료로 진출했다.

그는 당나라에서 율수현위 등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이후 880년 회남절도사 고변의 휘하에서 도통순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도통순관은 군사조직의 행정과 문서업무를 담당하는 관직으로, 최치원은 고변을 대신하여 각종 명령서와 외교문서, 군사적 선전문 등을 작성했다.

당시 고변은 황소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주요 군사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최치원은 그의 막하에서 자신의 문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그 결과 작성된 대표적인 글이 바로 토황소격문이다.[1]

격문의 작성

고변의 명의로 작성

토황소격문은 최치원이 작성했지만, 공식적인 발신인은 고변이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881년 7월 8일 작성된 격문의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廣明二年七月八日 諸道都統檢校太尉某告黃巢

광명 2년 7월 8일, 제도도통 검교태위 모(某)가 황소에게 고한다.

여기서 제도도통은 황소의 난을 토벌하는 군사작전의 지휘권과 관련된 직책이며, 검교태위는 고위 관직의 명칭이다.

즉 격문의 작성자는 최치원이지만, 글 자체는 황소를 토벌하는 관군 지휘부의 공식적인 입장을 전달하는 문서로 작성되었다.

당시의 격문은 오늘날의 개인적인 편지나 문학작품과는 성격이 달랐다. 군사적 상대방에게 항복을 권유하거나 정치적 정당성을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쟁의 명분을 알리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토황소격문의 내용을 모두 최치원 개인의 사적인 감정이나 정치적 견해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다만 최치원이 이러한 글을 작성하면서 당시 당나라 지배층의 정치적 가치관과 문학적 표현을 활용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토황소격문의 목적

토황소격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황소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글에서는 황소가 당나라 황제에게 반기를 든 행위를 강하게 비판하고, 반란을 계속한다면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또한 지금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항복한다면 당나라 조정이 죄를 용서하고 높은 지위와 명예를 부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성은 당시의 군사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었다.

황소는 이미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한 상태였으며, 당나라 조정은 여러 군사세력을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하려 했다. 따라서 황소가 항복한다면 대규모 군사작전 없이도 전쟁을 끝낼 가능성이 있었다.

특히 황소의 지지세력을 분열시키고 관군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데에도 이러한 격문은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격문에 등장하는 관군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황소의 필연적인 패망에 관한 표현을 당시의 객관적인 전황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는 당나라 조정의 입장에서 작성된 선전적 표현이며, 실제로 황소의 반란군은 이후에도 수년 동안 관군과 싸웠다.

주요 원문과 해석

토황소격문의 전문은 상당한 분량의 한문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음은 《계원필경》 제11권에 수록된 내용 가운데 대표적인 구절들이다.

1. 현명한 사람은 때를 안다

夫守正修常曰道 臨危制變曰權 智者成之於順時 愚者敗之於逆理

대체로 다음과 같은 뜻이다.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한 도리를 닦는 것을 도라 하며, 위기에 처하여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시대의 흐름을 따르기에 성공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치를 거스르기에 패망한다.

격문은 처음부터 황소를 직접 욕하지 않는다.

먼저 올바른 도리와 시대의 흐름을 설명하면서 현명한 사람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곧 황소를 비판하기 위한 논리적 기반이 된다.

최치원은 당나라 조정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도리이며, 황소의 반란은 이를 거스르는 행동이라고 규정한다.

처음에는 무슨 유교 경전 해설이나 철학 강의처럼 시작한다. 그런데 읽다 보면 결국 '현명한 사람은 때를 알고, 멍청한 새끼는 상황 파악 못 하다가 좆된다'라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2. 네가 감히 황제 노릇을 하느냐

且汝素是遐氓 驟爲勍敵 偶因乘勢 輒敢亂常

너는 본래 변방의 백성에 불과했는데 갑자기 강대한 적이 되었으며, 우연히 시세를 타고 감히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혔다.

이 구절부터는 노골적인 비난이 시작된다.

최치원은 황소가 본래 평범한 백성 출신이었으며, 우연히 혼란을 틈타 세력을 키웠을 뿐 정당한 정치적 권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황소의 황제 즉위가 정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당나라의 기존 지배질서를 정당한 것으로 전제한 것이며, 황소의 난이 발생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충분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황소가 낮은 출신이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부분에서는 당시 지배층의 신분적 우월의식도 드러난다.

쉽게 말하면 '니가 원래 뭐 하던 놈인데 감히 황제 자리를 쳐먹고 있냐?'라는 소리다.

문제는 이 글을 쓰던 최치원 본인도 신라에서는 6두품이라는 이유로 승진 제한을 받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사람이 당나라에서는 황소에게 출신성분을 들먹이며 존나게 훈계하고 있으니 묘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3. 천하 사람들은 물론 귀신도 너를 죽이려 한다

不唯天下之人皆思顯戮 抑亦地中之鬼已議陰誅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너를 드러내 놓고 죽이려 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까지 이미 너를 몰래 죽이려고 의논하고 있다.

토황소격문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다.

최치원은 황소가 저지른 범죄가 너무나 심각하여 살아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들의 귀신까지 그를 처벌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히 반란이 잘못되었다는 수준의 비판이 아니다.

황소가 천하의 모든 사람과 귀신들에게까지 미움을 받고 있으며,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에 대한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실제로 귀신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황소의 죄가 하늘과 땅에 가득하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과장이다.

최치원: 너는 살아 있는 인간들한테만 미움받는 게 아니다. 땅속에 있는 귀신들까지 모여서 널 어떻게 조질지 회의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쯤 되면 그냥 세상 모두가 황소를 싫어한다는 수준을 넘어, 저승에서까지 황소 처형 안건이 통과되었다는 소리다.

당나라 군대가 수도도 되찾지 못한 상황에서 글로는 이미 인간계와 저승의 여론조사를 끝내 놓고 황소의 사형을 확정해 버린 것이다.

바로 이 구절과 관련하여 황소가 격문을 읽다가 놀라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4. 너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縱饒假氣遊魂 早合亡神奪魄

비록 잠시 숨이 붙어 있고 혼이 떠돌고 있을지라도, 이미 정신과 넋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앞서 천하의 사람들과 귀신들이 모두 황소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고 주장한 최치원은 이제 황소가 사실상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선언한다.

이 표현은 황소의 육체적인 생명과는 관계없이 이미 정치적·도덕적으로 패배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당시 황소가 당나라의 수도를 점령하고 황제를 자처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대담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관군의 승리를 강조하기 위한 선전적 문구다.

실제로 황소는 이 격문이 작성된 881년 이후에도 반란을 계속했고, 884년에 이르러서야 최후를 맞이했다.

격문을 작성하던 당시 황소는 장안을 점령한 상태였는데, 최치원은 편지에서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라고 선언했다.

현실에서는 적이 수도를 먹고 황제 놀이를 하고 있는데, 공문서에서는 '너 이미 뒤진 거나 마찬가지임 ㅋㅋ'라고 적어 보낸 것이다. 당나라 조정의 희망사항과 현실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5. 솥 안의 물고기와 장막 위의 제비

所謂燕巢幕上 謾恣騫飛 魚戲鼎中 則看焦爛

장막 위에 둥지를 튼 제비가 헛되이 날아오르고, 솥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곧 삶겨 죽을 줄도 모르는 것과 같다.

이 구절은 황소가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장막 위에 둥지를 튼 제비는 언제든지 둥지가 무너질 위험에 처해 있으며, 솥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는 당장에는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결국 불에 삶겨 죽을 운명이다.

최치원은 황소가 당나라의 수도를 점령하고 황제가 되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멸망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이 역시 상대방의 정치적 상황을 풍자하는 동시에 항복을 권유하기 위한 표현이다.

황소가 자기는 황제가 되었다며 좋아하고 있지만, 최치원의 눈에는 그냥 펄펄 끓을 솥 안에서 신나게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즉 '넌 지금 존나 신나겠지만, 사실 솥 안에 들어가 있는 물고기나 다름없다'라는 소리다. 문장 하나하나가 참 정성스럽게 사람을 긁고 있다.

6. 항복하면 살려 줄 수도 있다

與其叛而滅亡 曷若順而榮貴

반역하다 멸망하는 것보다 순종하여 영화롭고 귀하게 되는 것이 어찌 더 낫지 않겠는가.

격문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앞선 협박과 달리 회유의 내용이 등장한다.

황소가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당나라 조정에 귀순한다면 목숨을 보전하고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반란 진압을 위한 정치적 협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식이었다.

상대방을 완전히 몰아붙이기만 하면 항복할 명분이 없어질 수 있으므로, 항복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여 저항을 약화시키려 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토황소격문은 단순히 상대방을 비판하는 글이 아니라 실제 항복을 유도하려는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 격문이었다.

그렇게 조상과 출신성분까지 들먹이며 욕을 해 놓고, 마지막에는 '그러니까 지금 항복하면 벼슬 하나 챙겨 주고 살려 줄 수도 있다'라고 한다.

앞부분에서는 너를 죽이려고 저승 귀신들까지 대기 중이라고 협박하더니, 끝에 가서는 정중하게 이직 제안을 하는 셈이다.

황소가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일화

유명한 이야기

토황소격문과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일화는 황소가 글을 읽다가 크게 놀라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고려 시대 문인 이규보의 《백운소설》에는 황소가 격문을 읽다가 '천하 사람들이 모두 죽이려 하고 땅속의 귀신들까지 죽이려고 의논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놀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일화는 최치원의 문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당시 중국 대륙을 뒤흔들고 당나라의 수도까지 점령했던 황소가 신라 출신 청년의 글 한 편에 놀라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 자체가 매우 극적이기 때문에 후대의 교육과 문학에서 자주 인용되었다.

중국을 뒤집어엎고 수도 장안까지 함락한 인간이, 신라에서 유학 온 젊은이가 쓴 문장을 읽다가 놀라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글빨로 사람을 물리적으로 넘어뜨렸다는 전설이다. 칼도 활도 안 썼는데 격문만 읽혔더니 보스가 자빠진 것이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

다만 황소가 실제로 격문을 읽다가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다.

이 일화는 최치원의 문장력을 강조하는 후대의 문학적 전승으로 알려져 있으며, 황소가 격문을 읽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독립적인 당시의 기록은 부족하다.

특히 황소는 토황소격문이 작성된 881년에 항복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에도 장안을 장악하고 당나라군과 싸웠으며, 883년 관군의 공세로 수도에서 물러난 뒤에도 저항을 계속했다. 결국 884년 황소의 난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

따라서 황소가 격문을 읽자마자 항복했다거나, 최치원의 글 한 편으로 황소의 난이 끝났다는 설명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토황소격문의 문학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실제로 최치원이 작성한 격문으로 《계원필경》에 수록되어 있으며, 후대에 뛰어난 문장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문장력이 뛰어났다는 사실과 황소를 글 한 편으로 굴복시켰다는 주장은 별개의 문제다.[2]

결국 황소는 최치원한테 글로 뒤지게 욕을 먹고도 3년 가까이 반란을 더 이어 갔다. 그러니 '격문을 읽고 놀라 침상에서 떨어졌으므로 황소의 난이 진압되었다'라는 이야기는 실제 역사와 상당한 거리가 있다.

글이 존나 잘 쓰였다는 건 맞는데, 그 글 한 편으로 중국 대륙을 휩쓸던 반란군이 항복했다면 애초에 수많은 장수들과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고생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황소의 난의 실제 결말

토황소격문이 작성된 뒤에도 황소의 난은 계속되었다.

당나라 조정은 여러 절도사와 지방 군사세력을 동원하여 황소의 반란군에 대응했지만, 반란은 단기간에 진압되지 않았다. 황소는 881년 이후에도 장안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했으며, 관군은 주요 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이어 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황소의 반란군 내부에서도 갈등이 발생했고, 일부 지휘관들이 당나라에 투항했다. 대표적으로 주온은 원래 황소의 부하였지만 이후 당나라로 귀순하여 반란군을 공격하는 데 참여했다.

또한 사타족 출신의 장수 이극용이 관군 측에 합류하면서 반란군은 점차 군사적으로 불리해졌다.

883년 황소는 장안을 포기하고 철수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지역에서 저항했으나 세력이 약화되었다.

결국 884년 황소는 패배하여 사망했다.

그런데 황소의 난이 진압되었다고 해서 당나라가 다시 안정된 국가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쟁 과정에서 지방 절도사들의 군사력이 더욱 강해졌으며, 당나라 조정은 이들에 대한 통제력을 계속 상실했다.

특히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던 주온은 이후 군사적·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고, 907년 당나라를 멸망시킨 뒤 후량을 건국했다.

이는 황소의 난을 진압한 세력 가운데 일부가 훗날 당나라를 직접 멸망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역설로 평가된다.

최치원은 황소에게 당나라의 질서를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한다고 경고했다. 황소는 실제로 멸망했지만, 정작 그를 진압하는 데 참여한 주온이 나중에 당나라 황제를 밀어내고 새 왕조를 세워 버렸다.

황소를 죽이기 위해 끌어들인 장수들이 당나라를 살려 놓은 것이 아니라, 훗날 당나라의 명줄을 끊어 버린 것이다. 이쯤 되면 왕조 말기의 정치질서라는 게 얼마나 개판이었는지 알 수 있다.

문학적 특징

사륙변려문

토황소격문은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사륙변려문은 주로 네 글자와 여섯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을 짝지어 배치하고, 문장의 길이와 구조를 정교하게 맞추어 운율과 형식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문 산문 양식이다.

이러한 문체는 중국의 남북조시대부터 발전하여 당나라에서도 공식적인 문서와 문학작품에 널리 활용되었다.

토황소격문 역시 대구법과 대조법, 역사적 고사 등을 풍부하게 활용하여 문장의 형식적인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황소를 비난할 때에는 비슷한 의미의 표현을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상대방의 죄악을 강조하고, 관군의 군사력을 설명할 때에는 웅장한 표현과 과장된 비유를 사용하여 압도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

이러한 문체는 읽는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효과를 가졌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형식적인 문장에 집중하여 작가의 독자적인 사상이나 감정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토황소격문은 신라 말기 한문학의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는다.

역사적 고사의 활용

토황소격문에는 중국 고대사와 역사서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과 사건이 인용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황소를 비난하는 과정에서 유요, 왕돈, 안록산, 주차 등 중국 역사에서 반란과 관련된 인물들을 언급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시대에 활동한 인물들이었지만, 최치원은 이들의 공통점을 이용하여 황소 역시 결국 실패한 반역자들과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당나라의 전통적인 정치질서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반란군의 지도자인 황소를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인물들과 같은 범주에 배치하려는 의도였다.

특히 고대 중국의 역사적 사례를 자유롭게 인용했다는 사실은 최치원이 중국의 경전과 역사서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비교는 관군의 정치적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황소가 역사적으로 반드시 이들과 동일한 성격의 인물이었다고 판단하기보다는, 최치원이 격문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어떠한 역사적 사례를 활용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적절하다.

협박과 회유의 결합

토황소격문의 또 다른 특징은 협박과 회유를 함께 사용했다는 점이다.

격문의 앞부분에서는 황소가 저지른 죄악을 강조하고 그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또한 천하의 모든 사람과 귀신들까지 황소를 죽이려 한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심리적인 압박을 가한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황소가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목숨을 살려 주고 높은 지위와 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선택에 따라 서로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특히 당시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고 황제를 자처하고 있었음에도 최치원은 그를 정당한 군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당나라 조정에 복종한다면 황소 역시 새로운 정치적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이러한 표현은 반란군의 지도자를 굴복시키는 동시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도 항복의 가능성을 보여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토황소격문은 상대방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글이면서도, 실제로는 항복이라는 정치적 결과를 유도하기 위한 설득문이었다.

최치원에게 미친 영향

당나라에서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다

토황소격문은 최치원의 문장력이 당나라에서 널리 알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치원은 외국인 유학생 출신의 관리였지만, 고변의 막하에서 공식적인 군사문서를 작성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토황소격문은 격문의 목적에 맞게 상대방을 비판하고 회유하는 내용을 정교한 문장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최치원은 이러한 활동을 통해 당나라에서 관직과 명예를 얻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공식 문서를 작성하면서 문장가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당나라에서 작성한 시문 가운데 일부를 선별하여 《계원필경》이라는 문집으로 정리했다.

《계원필경》은 현존하는 한국의 개인 문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평가되며, 최치원의 학문과 문학적 성취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다.[3]

신라로 귀국한 이후

최치원은 885년 신라로 귀국했다.

그는 당나라에서 뛰어난 문장력과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으므로, 신라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수 있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골품제와 진골 귀족 중심의 정치체제가 유지되고 있었으며, 지방에서는 사회경제적 불안과 정치적 혼란이 확대되고 있었다.

최치원은 이후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려 국가의 개혁을 주장했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결국 중앙정치에서 물러나 은거생활을 했으며, 이후의 구체적인 행적과 사망 시점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생애는 최치원이 당나라에서는 문장력을 인정받았지만, 고국인 신라에서는 6두품이라는 신분적 한계와 정치적 현실 때문에 자신의 뜻을 충분하게 펼치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당나라에서는 수도를 점령한 반란군 수괴에게 격문을 써서 천하에 이름을 떨쳤는데, 정작 신라에 돌아와서는 자기 나라 귀족들한테 개혁안 하나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남의 나라에서는 황제를 참칭한 반란군에게 '네가 감히 황제가 되려고 하느냐'라며 호통을 쳤지만, 정작 자기 나라에 돌아오니 진골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치적인 한계를 겪은 것이다. 최치원의 인생도 참 기구하다.

의의와 평가

토황소격문은 신라 말기의 문장가 최치원이 당나라의 정치적·군사적 상황 속에서 작성한 대표적인 한문 산문이다.

특히 이 작품은 격문이라는 실용적인 문서에 정교한 문학적 표현을 결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최치원은 역사적 고사와 비유, 대구법 등을 활용하여 황소의 정치적 정당성을 부정하고 관군의 승리를 강조했으며, 마지막에는 항복을 권유함으로써 실제 군사적·정치적 효과를 추구했다.

또한 신라 출신의 문장가가 중국의 공식적인 군사문서를 작성하고, 그 문장이 후대에까지 유명한 작품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한문과 유교적 학문이 공통적인 지식문화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토황소격문을 평가할 때에는 작품의 문학적 완성도와 실제 역사적 효과를 구분해야 한다.

최치원의 문장력이 뛰어났다는 것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지만, 그가 쓴 격문 한 편 때문에 황소가 항복했거나 황소의 난이 진압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격문에 등장하는 황소에 대한 비난과 당나라 조정의 정당성에 관한 주장을 당시의 객관적인 현실이라고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당나라 말기의 정치적 혼란과 부정부패, 지방 군벌의 성장, 경제적 착취 등은 황소의 난이 발생한 중요한 배경이었다. 따라서 황소의 반란군이 저지른 폭력과 파괴를 비판하는 것과 별개로, 기존 당나라 지배체제가 가지고 있던 문제 역시 함께 살펴봐야 한다.

토황소격문은 황소의 난을 한순간에 끝낸 마법의 문서가 아니라, 당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작성된 뛰어난 정치적 선전문이자 신라 한문학의 중요한 성취였다.

쉽게 말해서 최치원은 글을 존나 잘 썼다. 황소는 그 글을 받고도 한동안 더 싸웠다. 그리고 당나라는 황소의 난을 진압하고도 결국 망했다.

그러니 이 작품의 진정한 위대함은 격문 한 장으로 황소를 죽였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1,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와 이거 진짜 존나 잘 긁었네'라며 읽고 있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여담

  • 토황소격문이라는 제목은 '황소를 토벌하기 위한 격문'이라는 뜻이다. 원래 제목은 격황소서(檄黃巢書)이며, 현대에는 두 명칭이 함께 사용된다.
  • 881년 7월 8일에 작성되었으며, 당나라의 연호로는 광명 2년에 해당한다.
  • 작성자는 최치원이지만 공식적인 발신 명의는 당나라의 장군 고변이었다. 따라서 최치원이 개인적으로 황소에게 편지를 보낸 사건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 최치원은 당시 신라 출신의 유학생으로 당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한 뒤 관리로 활동하고 있었다.
  • 토황소격문은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작성한 문서들을 모은 《계원필경》 제11권의 첫머리에 수록되어 있다.
  • 작품의 가장 유명한 구절은 '천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 할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고 의논했다'라는 내용이다.
  • 황소가 이 구절을 읽고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일이 발생했다는 독립적인 당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 황소는 토황소격문이 작성된 881년에 항복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에도 장안을 점령한 상태에서 반란을 계속했고, 884년에 사망했다.
  • 최치원은 격문의 앞부분에서 황소를 비난하고 협박했지만, 마지막에는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목숨과 지위를 보전할 수 있다고 회유했다.
  • 격문의 문체는 사륙변려문으로, 네 글자와 여섯 글자로 이루어진 대구와 정교한 문장구조를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 글에서는 황소를 유요와 왕돈, 안록산과 주차 등 과거 중국의 반란 관련 인물들에 비교하면서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 황소가 낮은 출신이라는 점을 비판하는 내용도 등장한다. 이는 당시 당나라 지배층의 신분질서와 정치적 정당성에 관한 인식을 보여준다.
  • 최치원 본인도 신라에서는 6두품 출신이었으며, 귀국 이후 골품제에 따른 정치적 한계를 경험했다.
  • 황소의 난을 진압한 당나라의 군사세력 가운데 일부는 이후 더욱 강한 권력을 확보했다. 특히 주온은 907년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했다.
  • 토황소격문은 당나라에서 작성된 문서지만, 신라 출신의 문장가가 지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한국 한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토황소격문을 읽다가 황소가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전승을 그대로 믿으면, 최치원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적장을 넉다운시킨 최초의 문학계 격투가 가운데 하나가 된다.
  • 반란군 지도자에게 '천하 사람들도 널 죽이려고 하고 귀신들도 이미 회의 끝냈다'라는 문장을 써 보냈다는 점에서, 최치원이 상당히 독한 키보드 워리어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 다만 아무리 글을 잘 써도 현실의 군사적 문제까지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당나라는 격문으로는 황소를 이미 죽여 놓았지만, 실제 전쟁은 3년이나 더 치러야 했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