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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너무 고대적입니다.
이 문서 또는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너무 고대적이라 현대의 우리가 이해할 수 없거나 너무 미개한 것들 천지입니다. 고대에 사는 그들도 이 줫같은 삶이 끝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개요

기원전 11세기는 기원전 1100년부터 기원전 1001년까지이다.

청동기 시대의 붕괴 직후 동지중해와 서아시아의 기존 질서가 아직 제대로 복구되지 못한 시기였다. 미케네 문명과 히타이트 제국은 이미 사라졌고 이집트 신왕국도 끝나면서 고대 근동의 거대국가들이 전반적으로 약해졌다. 대신 페니키아 도시국가와 이스라엘계 정치집단, 아람인 등 새로운 세력들이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세기 중반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등장하면서 동아시아 정치질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세계의 상황

그리스

미케네 문명이 붕괴한 뒤 그리스 암흑시대가 진행되고 있었다. 궁전 중심의 정치체제와 선형문자 B가 사라지고 인구와 교역 규모도 크게 줄었다.

예전에는 이를 바다 민족의 침입과 북쪽에서 내려온 도리아인의 대침입으로 간단히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재는 너무 단순한 설명으로 본다. 미케네 문명의 붕괴에는 전쟁과 내부 혼란, 기근, 교역망 붕괴, 인구 이동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며, 도리아인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수십만 명이 쳐들어와 그리스를 갈아엎었다기보다 오랜 기간에 걸친 이동과 사회변화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높다.

기원전 11세기에는 펠로폰네소스와 여러 지역에서 기존 미케네 문화와 다른 양식이 나타났고, 그리스계 집단들이 에게해 섬과 소아시아 서해안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철제 무기의 사용도 점차 늘어나면서 청동기 시대와는 다른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즉 이 시기는 "도리아인 와서 다 때려부숨 → 암흑시대 시작" 정도로 끝낼 만큼 간단하지 않다.

이집트

이집트 신왕국의 마지막 왕조인 이집트 제20왕조가 막을 내렸다.

람세스 11세의 치세에는 이미 파라오의 권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고, 남쪽 테베에서는 아문 대신관들이 사실상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람세스 11세가 기원전 1070년경 죽은 뒤 북쪽 타니스에서는 스멘데스 1세가 이집트 제21왕조를 열었다.

이때부터 이집트 제3중간기가 시작된다.

다만 "20왕조가 단절되고 스멘데스가 나라를 통째로 물려받았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조금 다르다. 북쪽에서는 제21왕조의 파라오가 통치했지만 남쪽 테베에서는 아문 대신관들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 사실상 두 정치 중심지가 공존했다.

그래도 서로 죽자고 싸우는 남북조 수준은 아니었고 왕실과 아문 대신관 세력 사이에 혼인관계도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했다.

문제는 이제 이집트가 예전처럼 시리아까지 군대를 보내던 제국이 아니었다는 것.

신왕국 시절 동지중해의 패왕이었던 이집트는 이후 수백 년 동안 내부 분열과 외부 세력의 침입에 시달리게 된다.

페니키아

청동기 시대의 붕괴에서 살아남은 티레, 시돈, 비블로스 등의 가나안계 해안 도시들이 점차 우리가 말하는 페니키아 도시국가로 발전하고 있었다.

기존의 미케네와 히타이트, 이집트 세력이 약해지면서 동지중해 무역에 빈자리가 생겼고 페니키아 상인들은 이를 이용해 해상 교역망을 확대했다.

다만 원문의 "지중해의 페니키아 도시국가들이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설명은 기원전 11세기 전체에 적용하기에는 조금 이르다. 키프로스 등 동지중해와의 교류는 이미 활발했지만, 북아프리카·시칠리아·사르데냐·이베리아반도까지 이어지는 본격적인 서부 지중해 식민 활동은 주로 기원전 10~8세기에 더 뚜렷해진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식민제국을 이미 완성했다기보다는 페니키아 해상무역이 성장하면서 지중해 확장의 기반을 만들던 시기라고 보는 편이 맞다.

몇 세기 뒤에는 이 사람들이 만든 식민도시 카르타고가 본가보다 더 유명해진다.

이스라엘

전통적인 성경 연대에 따르면 기원전 11세기 후반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되면서 이스라엘 왕국이 등장했다.

당시 팔레스타인 해안 지역에서는 블레셋 세력이 강력했고, 여러 이스라엘계 부족들이 이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보다 중앙집권적인 왕권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성경의 설명이다. 사울 이후 세기 말 무렵 다윗이 등장하고, 그의 본격적인 통치는 다음 세기로 이어진다.

다만 이 역시 성경 기록을 그대로 역사책처럼 읽으면 안 된다.

'이스라엘'이라는 집단 자체는 이미 기원전 13세기의 이집트 메르넵타 비문에도 등장하므로 이 세기에 갑자기 처음 생긴 것은 아니다. 문제는 기원전 11세기에 정말 성경에 묘사된 것과 같은 통일된 왕국이 존재했는지다.

고고학적으로는 기원전 12~11세기 팔레스타인 고지대에 작은 농촌 정착지가 크게 늘어났으며, 이를 초기 이스라엘계 집단의 성장과 연결하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사울 왕국의 정확한 규모와 정치체제는 직접 확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기원전 11세기 후반 이스라엘 지역에서 왕국 또는 초기 국가 형태의 정치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정도로 보는 게 가장 안전하다.

메소포타미아

원문의 "중아시리아가 슬슬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는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기원전 11세기 초 중아시리아는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의 통치 아래 마지막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일대까지 원정을 벌였고 지중해까지 진출하면서 한때 아시리아의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그런데 그 뒤가 문제였다.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일대로 아람인 집단이 대규모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는 이들과 수십 차례 싸워야 했다. 그의 사후 아시리아 왕권은 약해졌고 아람계 집단들이 유프라테스와 하부르강 일대에 정착하면서 아시리아의 서쪽 영토와 교역로를 상당 부분 잠식했다.

기원전 11세기 후반에는 아시리아가 핵심 영토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가 됐다.

즉 이 시기는 신아시리아 제국이 성장하던 시기가 아니라 중아시리아 제국이 마지막으로 한번 힘을 냈다가 아람계 세력의 압박으로 수세에 몰린 시기다.

아시리아가 다시 깨어나는 것은 다음 세기 말 아다드 니라리 2세가 등장하면서부터다.

남쪽의 바빌로니아 역시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카시트 왕조가 이미 멸망한 뒤 여러 왕조가 교체되고 엘람과 아람계 부족들의 압박을 받으면서 메소포타미아 전체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청동기 시대 붕괴의 여파가 여기도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다.

인더스

베다 시대가 계속되고 있었다.

다만 기원전 11세기 전체를 후기 베다 시대라고 부르기에는 경계선에 걸쳐 있다. 보통 초기 베다 시대를 기원전 1500~1000년경, 후기 베다 시대를 기원전 1000~600년경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는 초기 베다 사회에서 후기 베다 사회로 넘어가던 과도기에 가깝다.

인도아리아계 부족들은 펀자브 일대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었고 점차 동쪽의 갠지스-야무나 지역으로 활동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여러 부족이 결합하면서 쿠루 같은 더 큰 정치집단도 성장하기 시작했고, 제사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브라만 계층의 영향력도 강해졌다.

철기의 사용도 이 무렵부터 북인도에서 조금씩 확인되기 시작하며, 다음 세기 이후 농경 확대와 갠지스강 유역 개척에 큰 영향을 끼친다.

중국

이 세기에 중국사의 왕조가 하나 갈아엎어진다.

기원전 11세기 전반까지는 상나라가 황허강 유역의 강국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서쪽의 주(周) 세력이 점차 강해졌고, 전통적인 연대에 따르면 기원전 1046년 주 무왕이 목야 전투에서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을 격파했다.

상나라는 멸망하고 주나라가 세워졌다.

이때부터 서주 시대가 시작된다.

주 무왕은 정복 직후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고 어린 주 성왕이 즉위했다. 이후 주공 단이 섭정하면서 상 왕조 잔존세력의 반란을 진압하고 새 왕조의 정치체제를 정비했다.

주나라는 왕족과 공신들에게 각 지역을 나누어주고 제후로 삼아 통치하게 했다. 이를 흔히 봉건제 또는 분봉제라고 부른다. 제후들은 자신들의 영지를 세습하면서도 주 왕실에 군사적·의례적 의무를 지는 구조였다.

또 주나라가 상나라를 무너뜨린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발전시킨 것이 유명한 천명(天命) 사상이다.

“

왕이 개판치면 하늘이 왕조 교체 허락함 ㅇㅇ

”

이라는 논리다.

상 왕조 역시 처음에는 하늘의 명을 받았지만 마지막 왕이 폭정을 벌였기 때문에 천명을 잃었고, 주나라가 이를 넘겨받았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이후 2천 년 넘게 중국의 왕조교체를 설명하는 기본 논리가 된다.

따라서 원문의 "오늘날 중국의 본격적 시조인 주나라"라는 표현은 좀 애매하다. 주나라 이전에도 상나라를 비롯한 국가가 분명히 존재했고 중국사의 시작을 주나라로 잡을 수는 없다.

다만 천명, 제후 분봉, 종법질서, 예악 등 후대 중국 정치·사회에 큰 영향을 준 제도와 관념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왕조라는 점에서는 중국 문명의 중요한 토대를 만든 왕조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