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기원전 9세기는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801년까지이다.
철기 시대가 유라시아 여러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다. 서아시아에서는 신아시리아 제국이 다시 팽창해 훗날 중동 전체를 때려잡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지중해에서는 페니키아인들의 해상무역과 식민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리스는 여전히 암흑시대의 끝자락이었으며 중국에서는 서주 왕실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세계의 상황
그리스
그리스 암흑시대의 후반부였다. 미케네 문명이 무너진 뒤 인구와 도시 규모, 문자 기록이 크게 줄어든 상태였지만 기원전 9세기부터 에게해 각지의 정착지가 다시 성장하고 무역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도자기에서는 이른바 기하학 양식이 발전했고, 여러 지역 공동체가 훗날 폴리스로 발전할 기반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페니키아인들과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페니키아 문자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 문자가 등장할 환경도 조성됐다.
한편 마케도니아 왕국이 이 무렵 등장했다는 옛 설명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후대 마케도니아 왕실은 아르고스계 아르게아스 왕조의 기원을 아주 이른 시대로 끌어올렸고 카라노스나 페르디카스 1세를 시조로 내세웠지만, 초기 마케도니아 왕국의 정확한 성립 시기는 논쟁이 많다.
전통적으로는 기원전 7세기 무렵 왕조가 성립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았고, 최근에는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아르게아스 왕국의 형성을 기원전 6세기 초까지 늦춰보는 연구도 있다. 그러므로 기원전 9세기에 이미 마케도니아 왕국이 있었다고 확정해서 쓰기는 어렵다.
이집트
이집트 제3중간기였다. 기원전 9세기 초에는 리비아계 왕조인 이집트 제22왕조가 이집트의 주요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비교적 강력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중앙권력이 약해졌고 지방의 유력자와 아문 신관 세력들이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기원전 9세기 후반부터 제22왕조의 통제력이 크게 흔들리면서 여러 경쟁 세력이 등장한다.
이들을 전통적으로 이집트 제23왕조라고 부르지만, 상이집트가 깔끔하게 하나의 왕국으로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하면 좀 곤란하다. 실제로는 테베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 서로 다른 왕과 유력자들이 동시에 존재했던 복잡한 상황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파라오는 여러 명인데 다들 자기가 진짜 파라오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다음 세기에는 여기에 남쪽 누비아의 쿠시 왕국까지 올라오면서 이집트판 전국시대가 더 개판이 된다.
페니키아
티레, 시돈, 비블로스를 중심으로 한 페니키아 도시국가들이 지중해 무역을 활발하게 확대하고 있었다. 좋은 목재와 선박 건조기술, 항해술을 바탕으로 키프로스와 북아프리카, 이베리아반도 등 서부 지중해로 진출했다.
전승에 따르면 티레의 공주 엘리사가 고향을 떠나 북아프리카에 카르타고를 건설한 것이 기원전 814년이다. 훗날 로마를 거의 멸망시킬 뻔한 그 카르타고 맞다.
다만 기원전 814년은 고대 문헌에 전해지는 전통적인 건국연대이고, 고고학적으로 확실하게 확인되는 초기 유물은 대체로 기원전 8세기 쪽에 많다. 최근에는 방사성탄소 연대가 더 이른 시기를 지지하는 경우도 있어 정확한 건국연대는 계속 연구 중이다.
어쨌든 이 무렵 페니키아인들이 서부 지중해에 본격적으로 발을 뻗기 시작했다는 큰 흐름은 맞다.
그리고 몇백 년 뒤 본토 페니키아보다 이 식민지였던 카르타고가 훨씬 유명해진다.
이스라엘
원문의 "이스라엘 왕국에서 유다 왕국이 따로 분리되었다"는 것은 시기가 조금 이르다.
성경의 전통적인 연대에 따르면 솔로몬 사후인 기원전 10세기 후반, 대략 기원전 930년경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다만 실제로 다윗·솔로몬 시대에 성경에서 묘사하는 규모의 통일왕국이 존재했는지를 두고는 학계 논쟁이 있다.
어쨌든 기원전 9세기에 들어오면 북이스라엘과 유다가 별개의 국가로 존재했다는 것은 비교적 분명해진다.
특히 북이스라엘에서는 오므리가 기원전 9세기 전반 왕조를 세우고 사마리아를 새 수도로 건설했다. 그의 아들 아합 시기에는 북이스라엘이 상당한 지역 강국으로 성장해 아람-다마스쿠스 등 주변국들과 경쟁했다.
기원전 853년에는 아시리아 왕 살만누아사리두 3세의 서방 원정을 막기 위해 여러 나라가 연합한 카르카르 전투가 벌어졌는데, 아시리아 측 기록에는 이스라엘 왕 아합이 상당한 규모의 병거와 병력을 보냈다고 적혀 있다.
즉 성경 밖의 기록에서도 북이스라엘 왕이 직접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남쪽의 유다 왕국은 북이스라엘보다 규모가 작았지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계속 존속했다. 둘은 서로 싸우기도 하고 동맹을 맺기도 하면서 주변의 모압·에돔·아람계 왕국들과 계속 정치질을 했다.
메소포타미아
신아시리아 제국이 본격적으로 부활한 세기다.
기원전 10세기까지 아시리아는 아람인들의 압박을 받아 상당한 영토를 잃었지만, 기원전 911년 아다드 니라리 2세가 즉위하면서 반격이 시작됐다. 이후 투쿨티 니누르타 2세를 거쳐 아슈르나시르팔 2세가 등장하면서 아시리아는 다시 주변 지역을 존나게 패기 시작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반란을 일으킨 도시를 잔혹하게 진압하고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켰으며, 이 과정을 자랑스럽게 비문에 기록했다.
아시리아 왕들 특유의
| “ |
반란을 일으켰길래 죽이고 가죽 벗기고 머리 쌓았습니다. |
” |
를 국가 홍보물에 당당하게 적던 시대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기존의 종교적 중심지였던 아슈르 대신 칼후, 즉 오늘날의 님루드를 대대적으로 재건해 새로운 수도로 만들었다. 기원전 879년에는 새 수도 완공을 기념해 무려 6만 9천여 명을 초대해 열흘 동안 잔치를 벌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뒤를 이은 살만누아사리두 3세 역시 시리아·아나톨리아 방면으로 계속 원정을 벌였다. 기원전 853년 카르카르 전투에서는 다마스쿠스와 이스라엘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대규모 연합군과 싸웠다.
아시리아는 이 전투에서 자기가 이겼다고 기록했지만 이후에도 같은 지역을 계속 공격해야 했던 걸 보면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키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기원전 9세기 말이면 아시리아는 이미 서아시아에서 가장 무서운 군사국가 중 하나가 되었고, 다음 세기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등장하면서 진짜 제국으로 완성된다.
인더스
후기 베다 시대였다.
베다인들의 중심지가 펀자브와 인더스강 일대에서 점차 동쪽의 갠지스강 유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초기 베다 시대의 반유목적인 부족사회에서 벗어나 농경과 정착생활의 비중이 커졌고 여러 부족들이 연합하거나 통합되면서 더 큰 정치집단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쿠루와 판찰라 같은 왕국들이 중요한 세력으로 성장했고 브라만들이 제사를 주도하면서 종교와 사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로 사회를 구분하는 바르나 체계도 점차 뚜렷해졌다. 다만 훗날의 복잡한 카스트 제도가 이때 이미 완성됐다고 보면 안 된다.
철기 역시 점차 확산되면서 갠지스 유역의 울창한 숲을 개간하고 농경지를 넓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음 몇 세기에 걸쳐 이런 변화들이 쌓이면서 십육대국, 도시화, 불교와 자이나교가 등장하게 된다.
중국
주나라는 왕족과 공신들에게 여러 지역을 맡기고 이들이 주 왕실을 중심으로 정치·군사적 관계를 유지하는 봉건(封建) 질서를 통해 황허강 일대의 넓은 영역을 통치했다.
다만 이것을 중세 유럽의 봉건제와 완전히 같은 제도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현대 역사학에서는 보통 주나라의 제후 분봉체제를 별도로 설명하거나 봉건제(fengjian)라고 구분해 부른다.
기원전 9세기에는 주 왕실의 권위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주 여왕의 폭정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기원전 841년 수도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여왕은 도망가 사실상 폐위됐다.
이후 약 14년 동안 왕 없이 나라를 운영한 공화(共和) 시기가 시작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원전 841년이다.
중국 역사에서 연도를 현대적으로 비교적 확실하게 연속 추적할 수 있는 최초의 시점이 바로 이 해로 여겨진다. 그 이전의 하·상·서주 초기 연대는 문헌과 고고학 자료를 가지고 계속 맞춰봐야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 연표는 기원전 841년부터 해마다 이어지는 연대를 제공한다.
이후 기원전 828년경 주 선왕이 즉위하면서 왕정이 복구됐고 한동안 주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 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각지의 제후들은 점점 강해지고 왕실은 점점 약해졌다.
다음 세기인 기원전 771년에는 결국 수도가 견융에게 털리고 서주가 멸망한다.
아직 춘추시대는 아니지만 이미 서버 종료 공지가 슬슬 뜨고 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