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기원전 7세기는 기원전 700년부터 기원전 601년까지이다.
신아시리아 제국이 고대 서아시아 최강국으로 군림하다가 세기 말 갑자기 무너지고, 그 빈자리를 신바빌로니아 제국과 메디아가 차지하기 시작한 시대다. 그리스에서는 폴리스가 성장하고 지중해 식민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중국에서는 춘추오패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철기 문화가 유라시아 곳곳에 널리 퍼지고 도시와 국가의 규모도 커지면서, 다음 세기부터 나타나는 페르시아 제국·그리스 철학·불교·유교 같은 고대사의 굵직한 이벤트들을 준비하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세계의 상황
로마
로마 왕국 시대였다. 전통적인 로마 연대기에 따르면 이 시기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안쿠스 마르키우스 등의 왕들이 통치하며 주변 라틴계 도시들과 전쟁을 벌이고 로마의 영역을 넓혔다.
원문의 "원로원이 이때 등장했다"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로마 전승에서는 원로원의 창설을 초대 왕 로물루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리므로, 전승을 그대로 따른다면 원로원은 기원전 7세기보다 이미 앞서 존재했던 셈이다.
물론 로물루스부터 초기 왕정까지의 기록 자체가 후대에 전승된 반전설적인 역사라 실제 원로원이 언제 어떤 형태로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때의 로마는 훗날의 로마 제국을 생각하면 안 된다. 아직 라티움 지방에서 옆동네들과 싸우고 있던 도시국가였다.
그리스
고대 그리스의 아르카이크 시대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아테네, 스파르타, 코린토스, 밀레투스 같은 폴리스들이 성장했고 그리스인들은 흑해·소아시아·시칠리아·남이탈리아 등에 식민도시를 세우며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중장보병인 호플리테스와 팔랑크스 전술이 확산되면서 귀족 기병 중심이던 전쟁 방식도 변했고, 여러 도시에서는 귀족정과 참주정이 교차하면서 기존 정치질서가 흔들렸다.
솔론과 탈레스도 이 세기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보지만, 우리가 이들에게서 떠올리는 중요한 활동은 주로 다음 세기인 기원전 6세기에 이루어졌다. 솔론의 아테네 개혁은 보통 기원전 594년경으로 잡는다.
따라서 "기원전 7세기에 솔론과 탈레스가 민주주의와 철학의 토대를 닦았다"기보다는 그들이 등장할 수 있는 그리스 폴리스 사회가 이 세기에 성숙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집트
기원전 7세기 초 이집트 제25왕조, 즉 누비아계 쿠시 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었다.
문제는 북쪽에 신아시리아 제국이 있었다.
아시리아의 에사르하돈은 기원전 671년 이집트를 침공해 멤피스를 함락했고, 이후 아슈르바니팔도 재차 원정을 벌였다. 제25왕조는 계속 저항했지만 결국 상이집트 남쪽으로 밀려났다.
기원전 664년경 아시리아의 지원을 받은 사이스의 프삼티크 1세가 이집트 제26왕조를 열었다. 다만 이집트 전체를 완전히 장악한 시점은 기원전 656년경으로 본다.
처음에는 아시리아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잡았지만 프삼티크 1세는 아시리아가 약해지는 틈을 이용해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했고, 이후 이집트는 제26왕조 아래에서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전성기 가운데 하나를 맞는다.
그러니까 "아시리아가 왕조 하나 꽂아놓고 계속 지배했다"기보다는 아시리아가 꽂아놓은 놈이 아시리아가 바빠진 틈에 독립해버렸다에 가깝다.
페니키아
티레, 시돈, 비블로스 등의 페니키아 도시국가들은 대부분 신아시리아 제국에 조공을 바치거나 직접 지배를 받았다.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최고의 항해·무역 민족이었지만 육군으로 아시리아를 상대할 깡은 없었다.
그래도 반란은 계속 일어났고 티레 같은 도시는 섬에 위치한 지형을 이용해 아시리아의 공격을 여러 차례 버텨냈다.
세기 말 신아시리아가 멸망하면서 시리아·페니키아 지역을 놓고 신바빌로니아 제국과 이집트 제26왕조가 경쟁하기 시작했다. 다만 페니키아 전역이 본격적으로 신바빌로니아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것은 주로 다음 세기 초의 일이다.
이스라엘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은 이미 기원전 722년경 신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한 뒤였다. 그래서 기원전 7세기에 남아 있던 히브리계 왕국은 유다 왕국뿐이었다.
유다는 대부분의 세기 동안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살아남았다. 히즈키야가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었다가 센나케립의 침공을 받았고, 예루살렘은 함락되지 않았지만 주변 지역은 제대로 털렸다.
이후 므낫세 시기에는 아시리아에 순응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존속했고, 세기 후반 요시야는 아시리아가 쇠퇴하자 세력을 확대하고 종교개혁을 시행했다.
그런데 아시리아가 망한다고 자유가 온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609년 요시야는 이집트 제26왕조의 네카우 2세와 싸우다 므깃도에서 전사했고 유다는 한동안 이집트의 영향 아래 들어갔다. 기원전 605년 카르케미시 전투에서 바빌로니아가 이집트를 박살낸 뒤에는 다시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영향권으로 넘어갔다.
유다 입장에서는 아시리아가 망해서 좋아했더니 이집트가 오고, 이집트를 밀어냈더니 바빌로니아가 왔다.
그리고 다음 세기에 진짜 나라까지 망한다.
메소포타미아
기원전 7세기 대부분은 신아시리아 제국의 최전성기였다.
센나케립, 에사르하돈, 아슈르바니팔이 연달아 등장하면서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를 넘어 시리아·팔레스타인·아나톨리아 일부와 이집트까지 영향력을 뻗쳤다. 특히 기원전 671년 에사르하돈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신아시리아 제국은 역사상 최대 영역에 도달했다.
아슈르바니팔은 엘람을 파괴하고 바빌로니아의 반란까지 진압했으며 수도 니네베에 방대한 도서관을 만들었다.
이 정도면 천년제국 갈 것 같았는데...
20년도 못 버텼다.
아슈르바니팔 사후 왕위 분쟁과 각지의 반란이 겹치면서 제국이 급속히 흔들렸고, 기원전 626년 바빌로니아에서 나보폴라사르가 반란을 일으켜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세웠다.
여기에 동쪽의 메디아까지 참전하면서 게임이 끝났다.
기원전 614년 메디아군이 아시리아의 옛 수도 아슈르를 함락했고, 기원전 612년에는 메디아와 바빌로니아 연합군이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켰다. 남은 아시리아 세력도 하란으로 도망가 저항했지만 기원전 609년 무너지면서 신아시리아 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러므로 "나보폴라사르가 아시리아를 멸망시켰다"라고만 하면 메디아가 섭섭하다. 바빌로니아와 메디아가 같이 때려잡았다고 보는 게 맞다.
이후 서아시아의 패권은 신바빌로니아와 메디아가 나눠 갖게 됐고, 몇십 년 뒤 이 둘의 판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통째로 집어먹는다.
인더스
후기 베다 시대였다.
아리아계 집단의 중심지는 인더스강 일대에서 점차 갠지스강 유역으로 이동했고 철제 농기구의 사용과 농경지 확대에 따라 정착사회와 여러 정치집단이 성장했다.
브라만을 중심으로 한 제사의 중요성이 커졌고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로 구성되는 바르나 질서도 점점 뚜렷해졌다.
다만 "이때 카스트 제도가 완전히 고착되었다"라고 쓰는 것은 너무 이르다. 네 계층으로 나누는 바르나 개념은 자리잡고 있었지만, 후대 인도에서 보이는 수많은 세습 직업집단인 자티까지 포함한 복잡한 카스트 체계가 이 시기에 완성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원전 7세기 말부터 북인도의 도시화와 국가 형성이 빨라졌고, 다음 세기에는 십육대국과 불교·자이나교가 등장하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중국
춘추시대가 진행되었다.
주 왕실은 이미 실질적인 힘을 잃었고 제후국들이 서로 패권을 놓고 싸웠다. 그 과정에서 천자를 명목상 받들면서 다른 제후들을 통솔하는 패자라는 존재가 등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제환공이다.
제환공은 명재상 관중을 등용해 제나라를 부국강병시키고 기원전 7세기 전반 여러 제후들을 규합해 첫 번째 패자로 인정받았다. 이후 진문공이 기원전 636년 즉위해 성복 전투에서 초나라를 격파하면서 다시 패권을 잡았다.
따라서 이 세기는 말 그대로 춘추오패의 전성기가 시작된 시기다.
남쪽에서는 초나라가 강력하게 성장해 중원 국가들과 경쟁했고, 진(晉)·제·초 같은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면서 중국 전체가 거대한 외교질에 들어갔다.
전국시대처럼 아예 서로 왕을 칭하고 멸망전까지 벌이는 단계는 아니었지만 이미 주나라 천자는 거의 명예직이 돼가고 있었다.
한국
이 부분은 기존 문서의 수정이 필요하다.
기원전 7세기에 '조선후'라는 특정 인물이 중국 역사서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
중국 문헌 가운데 고조선과 관련된 가장 이른 기록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관자》에 나오는 발조선(發朝鮮)이다. 이 기록에서는 제나라 환공과 관중의 대화 속에서 발조선의 특산물인 문피, 즉 표범가죽이 언급된다.
이를 당시 제나라와 고조선 계통의 세력 사이에 교역이 존재했다는 기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만 《관자》는 관중 본인이 직접 쓴 책이 아니라 전국시대 이후 여러 시대의 글이 모여 만들어진 책이므로, 이 내용이 정말 기원전 7세기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지는 논쟁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발조선이 후대의 고조선과 정확히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한편 조선후(朝鮮侯)가 연나라와 대립하다 스스로 왕을 칭했다는 기록은 《위략》에 나오는데, 이것은 대략 기원전 4세기 후반의 일로 본다. 기원전 7세기의 조선후와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 “ |
조선후라는 인물이 한국인 최초로 역사서에 언급되었다. |
” |
는 서술은 빼는 게 맞다.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세웠다는 전통적인 연대는 《삼국유사》 등 훨씬 후대의 기록에 나타나는 건국신화이므로 그대로 역사적 연대로 인정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기원전 7세기가 곧바로 "한국사의 진짜 시작"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한반도와 요동 일대에는 이미 그 이전부터 청동기 문화와 여러 정치집단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다만 문헌 기록을 기준으로 보면 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 '조선'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 집단이 중국 기록에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정도로 정리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