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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 또는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너무 고대적이라 현대의 우리가 이해할 수 없거나 너무 미개한 것들 천지입니다. 고대에 사는 그들도 이 줫같은 삶이 끝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개요

기원전 8세기는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701년까지이다.

고대 지중해와 서아시아의 질서가 크게 재편된 시기다. 신아시리아 제국이 서아시아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해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팔레스타인 일대를 집어삼켰고, 이집트에서는 남쪽 누비아의 쿠시 왕국이 북상해 이집트 제25왕조를 세웠다. 그리스에서는 암흑시대를 벗어나 폴리스와 식민도시가 발전하면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고대 그리스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전통적인 연대에 따르면 로마도 이 세기에 건국되었다.

중국에서는 세기 말 서주가 붕괴하고 동주와 춘추시대가 시작됐다. 여러 지역에서 기존 청동기 시대의 왕국 체제가 무너지고 철기시대의 새로운 정치질서가 나타나기 시작한 세기라고 볼 수 있다.

세계의 상황

로마

로마 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를 건설하려다가 형제끼리 싸웠고,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인 뒤 초대 왕이 되어 로마 왕국을 세웠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후대 로마인들이 정리한 건국신화다. 기원전 753년이라는 정확한 연도도 공화정 말기의 학자들이 여러 전승을 계산해 만들어낸 연대이며, 로물루스가 실제 인물이었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고고학적으로는 기원전 8세기 무렵 팔라티노 언덕을 비롯한 로마의 여러 언덕에 있던 마을들이 점차 하나의 도시 공동체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기원전 753년 4월 21일 로물루스가 삽 들고 와서 로마를 만들었다"는 건 신화지만, 기원전 8세기에 로마라는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큰 틀 자체는 맞는다.

당시에는 훗날 지중해를 다 처먹는 제국 같은 건 아니고 라티움 지방의 조그만 도시국가였다. 이때 로마 보고 몇백 년 뒤 세계 최강국 된다고 하면 주변 에트루리아인들이 웃었을 듯.

그리스

오랫동안 이어진 그리스 암흑시대가 끝나고 아르카이크 시대가 시작되던 시기다. 아테네, 스파르타, 코린토스, 밀레투스 등 여러 폴리스가 발전하기 시작했고 그리스인들의 해외 식민 활동도 활발해졌다.

기원전 8세기 중후반에는 페니키아 문자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 문자가 등장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암흑시대 동안 사라졌던 문자 기록이 다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호메로스도 기원전 8세기경 활동한 것으로 보며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이 무렵 성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호메로스가 실제 한 명의 시인이었는지, 작품들이 여러 세대의 구전 서사시를 편집한 결과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있다.

기원전 776년에는 전통적인 기록상 최초의 고대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물론 그보다 앞서 비슷한 종교행사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리스인들은 훗날 기원전 776년을 올림피아 제전 연대 계산의 시작점으로 사용했다.

기원전 8세기 후반부터 그리스인들은 인구 증가와 무역 확대를 배경으로 남이탈리아, 시칠리아, 흑해 연안 등에 식민도시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제 그리스 세계가 에게해 안에서만 놀지 않고 지중해 전체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집트

이집트 제3중간기였다. 중앙권력이 약해지면서 이집트 제22왕조, 이집트 제23왕조, 이집트 제24왕조 등 여러 왕조와 지방세력이 동시에 존재해 이집트판 삼국지를 찍고 있었다.

22왕조와 23왕조의 세력이 약화된 사이 나일강 남쪽 누비아에서는 쿠시 왕국이 강해졌다. 기원전 8세기 후반 쿠시 왕 피예가 북쪽으로 진격해 여러 이집트 군주들을 굴복시키면서 이집트 대부분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의 후계자들인 샤바카 등을 거치며 이집트 제25왕조가 확립됐다.

즉 남쪽 누비아의 쿠시인들이 오히려 북쪽 이집트를 정복하고 파라오가 된 것이다.

제25왕조의 통치자들은 스스로를 외국인 점령자처럼 행동하기보다는 고대 이집트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부활시키려 했다. 옛 왕국 시대의 예술·종교 양식을 다시 유행시키면서 "우리가 진짜 정통 파라오다"를 시전했다.

그런데 하필 북동쪽에서는 신아시리아 제국이 미친 듯이 커지고 있었다.

다음 세기에는 둘이 제대로 붙는다.

페니키아

티레, 시돈, 비블로스 등의 페니키아 도시국가들은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고 서쪽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사르데냐, 이베리아반도까지 진출하면서 고대 지중해 최고의 상인집단으로 성장했다.

전통적인 연대에 따르면 티레인들이 북아프리카에 세운 카르타고도 기원전 814년경 건국되었다. 정확한 건국연대는 논쟁이 있지만 적어도 기원전 8세기 후반에는 카르타고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그냥 페니키아 식민도시 가운데 하나였는데 나중에는 본가보다 훨씬 커져서 서부 지중해의 패권국이 된다.

본토 상황은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신아시리아 제국이 서쪽으로 계속 진출하면서 페니키아 도시들은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거나 속국이 되었다. 티레 같은 곳은 섬이라는 지형을 이용해 저항하기도 했지만 아시리아의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결국 돈은 페니키아인이 벌고 조공은 아시리아가 받아갔다.

이스라엘

이 세기 초에는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이 모두 존재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계속 불안정했고 동쪽에서는 신아시리아 제국이 서진하고 있었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기원전 730년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대규모 원정을 벌여 이스라엘 왕국의 상당한 영토를 빼앗고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후 북이스라엘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살만누아사리두 5세가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했다. 기원전 722년경 살만누아사리두 5세와 그의 후계자 사르곤 2세 시기에 사마리아가 함락되면서 북이스라엘 왕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아시리아는 많은 주민을 제국 각지로 강제 이주시켰고 다른 지역 사람들을 사마리아 지역으로 옮겼다. 여기서 훗날 유명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열 지파 전승이 나온다.

남쪽의 유다 왕국은 일단 살아남았다. 아하스 왕은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며 속국이 되었고, 히즈키야 시기에는 아시리아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센나케립이 기원전 701년 유다를 침공해 여러 도시를 함락시키고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예루살렘 자체는 함락되지 않았지만 유다는 다시 아시리아에 굴복해 조공을 바쳐야 했다.

북쪽은 삭제됐고 남쪽은 목숨만 건졌다.

메소포타미아

신아시리아 제국이 진짜 제국다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시기다.

기원전 8세기 전반에는 한동안 왕권이 약해지고 우라르투 등 주변국의 압박을 받았지만, 기원전 745년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군제를 개혁해 상비군을 강화하고 기존의 속국들을 아예 아시리아의 직할 속주로 편입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여러 왕국들을 정복하고 북이스라엘을 크게 약화시켰으며, 아시리아를 단순한 정복왕국에서 거대한 중앙집권적 제국으로 바꾸었다.

바빌로니아도 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다만 원문의 "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켰다"는 것은 틀리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기원전 729년 바빌론을 점령한 뒤 바빌로니아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바빌론 왕위까지 겸임했다.

즉

“

아시리아 왕인데 오늘부터 바빌론 왕도 제가 합니다.

”

가 된 것이다.

뒤를 이은 살만누아사리두 5세는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했고, 그의 사후 즉위한 사르곤 2세 시기에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이 확정되었다.

사르곤 2세 역시 우라르투와 시리아 일대에서 계속 전쟁을 벌여 제국을 확장했다. 세기 말에는 그의 아들 센나케립이 즉위해 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기원전 701년 유다 왕국까지 공격했다.

이후 다음 세기에 아시리아 제국은 이집트까지 쳐들어가며 역사상 최대 영역을 찍는다.

인더스

후기 베다 시대가 진행되고 있었다.

초기 베다인들의 중심지였던 펀자브와 인더스강 일대에서 동쪽 갠지스강 유역으로 정착지가 점점 확대됐다. 철기 사용도 증가하면서 숲을 개간하고 농경지를 넓히기가 쉬워졌고 부족 중심 사회가 점차 더 큰 영토국가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쿠루와 판찰라 같은 정치세력이 성장했고 브라만 중심의 제사 체계와 바르나 질서도 점점 체계화되었다.

다만 아직 마우리아 왕조 같은 통일제국은커녕 십육대국 시대도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다. 다음 세기부터 도시와 국가들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인도 고대사의 판이 더 커진다.

종교적으로는 《베다》의 제례 중심 전통이 발전하는 동시에 인간과 우주, 윤회 등에 대한 사색이 점차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우파니샤드 철학과 불교·자이나교가 등장할 토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중국

기원전 8세기 대부분은 서주 후기였다.

주나라 왕실의 힘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고 제후국들은 점차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기원전 771년 터졌다.

주 유왕이 왕비 신후와 태자 의구를 폐하고 포사를 총애하면서 정치적 갈등이 발생했고, 이에 신후의 친정 세력과 서쪽의 견융이 수도 호경을 공격했다.

유왕은 살해되고 호경은 약탈당했다.

전승에서 유명한 "포사를 웃게 하려고 봉화를 장난으로 올렸다가 진짜 견융이 왔을 때 제후들이 아무도 안 왔다"는 이야기도 이 사건에서 나온다. 다만 이 봉화 드립은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유왕의 아들 주 평왕은 제후들의 지원을 받아 즉위했고 기원전 770년 수도를 동쪽의 낙읍, 즉 오늘날 뤄양 일대로 옮겼다.

이때부터 동주 시대가 시작된다.

그리고 동주 전반부를 춘추시대라고 한다.

그러므로 원문의

“

이때부터 동주 시대 즉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

는 반쯤 맞다.

동주가 시작된 것은 맞지만 바로 전국시대까지 시작된 것은 아니다. 기원전 770년부터 대략 기원전 5세기까지가 춘추시대이고 전국시대는 그 뒤에 이어진다.

수도를 동쪽으로 옮긴 뒤 주 왕실의 실질적인 영토와 군사력은 크게 줄어들었고 왕은 점점 제후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신세가 됐다.

천자는 아직 천자인데 힘이 없다.

결국 다음 세기부터 제나라, 진나라(희성), 초나라 같은 강대국들이 왕 대신 중국 정치판을 주도하면서 춘추오패의 시대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