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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너무 고대적입니다.
이 문서 또는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너무 고대적이라 현대의 우리가 이해할 수 없거나 너무 미개한 것들 천지입니다. 고대에 사는 그들도 이 줫같은 삶이 끝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개요

기원전 10세기는 기원전 1000년부터 기원전 901년까지이다.

청동기 시대의 붕괴 이후 혼란에 빠졌던 동지중해와 서아시아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던 시기다. 페니키아 도시국가들은 지중해 무역을 확대했고,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전통적인 연대상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가 전개되었다. 이집트는 중앙권력이 약한 이집트 제3중간기였으며, 중국에서는 주나라의 서주 체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철기의 사용도 점차 널리 퍼지면서 다음 몇 세기에 나타날 아시리아·그리스 폴리스·춘추시대 등의 기반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세계의 상황

그리스

그리스 암흑시대가 진행 중이었다. 미케네 문명이 붕괴한 뒤 궁전 중심의 정치체제와 선형문자 B가 사라지고 인구와 교역 규모도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다만 진짜로 아무것도 없었던 깜깜한 시대라는 뜻은 아니다.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일부 지역의 인구와 교역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고, 철제 무기의 사용과 새로운 도자기 양식도 확산됐다. 특히 아테네 일대에서는 프로토기하학 양식이 발전하면서 훗날 아르카이크 그리스 문화로 이어지는 변화가 나타났다.

즉 아직 아테네 민주주의도, 스파르타 군국주의도, 고대 올림픽도 없던 시기지만 그리스가 다시 기어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집트

이집트 제3중간기였다. 북쪽에서는 타니스를 수도로 한 이집트 제21왕조가 파라오를 배출했고 남쪽의 테베에서는 아문 대신관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사실상 나라가 북쪽과 남쪽으로 나뉜 것처럼 운영됐다.

기원전 10세기 중반 제21왕조가 끝나면서 쇼셍크 1세가 이집트 제22왕조를 열었다. 쇼셍크의 가문은 이집트에 정착한 리비아계 메슈웨슈 출신 군사 엘리트였으며, 제22왕조 역시 리비아계 왕조로 분류된다.

다만 "21왕조가 단절되자 갑자기 외국인이 쳐들어와 이집트를 먹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좀 다르다. 리비아계 주민과 군인들은 이미 여러 세대 동안 이집트에 정착해 있었고 왕실과 군부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쇼셍크 1세가 아예 갑툭튀한 외국인 침략자는 아니었다.

쇼셍크 1세는 오랜만에 이집트의 중앙권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군사원정도 벌였다. 성경의 열왕기에 등장하는 이집트를 침공한 '시삭'을 쇼셍크 1세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제22왕조 역시 장기적으로는 지방세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다음 세기부터 이집트는 다시 왕조가 여러 개로 쪼개지기 시작한다.

페니키아

티레, 시돈, 비블로스 등의 페니키아 도시국가들이 지중해 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청동기 시대 말기에 기존의 강대국들이 무너진 틈을 타 페니키아 상인들은 레반트와 키프로스, 에게해 등지를 오가며 해상무역망을 확대했다.

특히 기원전 10세기에는 티레가 강력한 도시국가로 성장했다. 성경 전승에서는 티레 왕 히람 1세가 다윗과 솔로몬에게 목재와 기술자를 제공하고 솔로몬 성전 건축에도 협력한 것으로 나온다.

페니키아인들의 본격적인 서부 지중해 식민 활동은 다음 세기부터 더 뚜렷하게 확인된다. 따라서 기원전 10세기에 이미 지중해 곳곳에 대규모 식민제국이 완성됐다고 쓰기보다는 해상 교역망을 확장하면서 훗날 식민도시 건설의 기반을 닦던 시기라고 보는 편이 낫다.

그리고 이들이 사용한 페니키아 문자는 이후 그리스인들에게 전해져 그리스 문자의 기반이 된다.

몇 글자 잘 만들어놓은 게 서양 알파벳 조상이 되어버렸다.

이스라엘

성경의 전통적인 연대에 따르면 기원전 10세기는 다윗과 솔로몬이 통치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전성기였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점령해 수도로 삼고 주변 세력을 복속시켰으며, 뒤를 이은 솔로몬은 대규모 건축사업과 국제무역을 통해 왕국을 발전시켰다고 전해진다. 특히 예루살렘에 최초의 성전을 건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이 부분은 고대사에서 논쟁이 존나 많은 영역이다.

다윗 왕조 자체가 완전한 창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원전 9세기의 텔 단 비문에서 일반적으로 다윗의 집으로 해석되는 표현이 발견되어 다윗이라는 왕조 시조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성경에 묘사된 것처럼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이 시리아에서 홍해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한 통일왕국이었는지, 아니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비교적 작은 왕국이 후대에 뻥튀기된 것인지는 학계에서 계속 논쟁 중이다.

솔로몬 사후 왕국이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했다는 전승도 있는데, 전통적인 연대에서는 대략 기원전 930년 전후로 잡는다.

따라서 원문의

“

이스라엘 왕국에서 다윗과 솔로몬이 전성기를 이룩했다.

”

는 성경 전승을 기준으로는 맞지만, 역사적으로 확정된 사실처럼 쓰기보다는 논쟁이 있다는 점을 붙여주는 것이 좋다.

메소포타미아

원문의 "중아시리아가 신아시리아 제국으로 거듭나면서 메소포타미아의 최강국으로 성장했다"는 설명은 시기를 조금 조정해야 한다.

기원전 10세기 대부분의 아시리아는 오히려 힘든 시기였다. 기원전 11세기 말부터 아람인 집단들이 메소포타미아 북부와 시리아 일대로 대규모 이동하면서 아시리아의 영토가 줄어들었고 여러 교역로와 농경지역도 잃었다.

그래도 아시리아 국가 자체가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수도 아슈르와 티그리스강 상류 핵심지역을 지키면서 버텼고, 세기 말 아다드 니라리 2세가 기원전 911년 즉위하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아다드 니라리 2세는 아람계 세력들을 공격해 잃었던 영토를 되찾고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보통 그의 즉위를 신아시리아 제국의 시작으로 본다.

따라서 신아시리아 제국은 기원전 10세기의 마지막 10년 정도에 등장한 셈이다. 다음 세기부터 아슈르나시르팔 2세와 살만누아사리두 3세 같은 미친놈들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정복전쟁이 시작된다.

반면 남쪽의 바빌로니아는 왕조가 자주 교체되고 아람계·칼데아계 부족들이 유입되면서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

이 시점만 보면 몇백 년 뒤 아시리아가 이집트까지 먹을 거라고 예상하기 어렵다.

인더스

후기 베다 시대가 시작되던 시기다.

인도아리아계 집단의 주요 활동지역이 기존의 펀자브와 인더스강 유역에서 점차 동쪽의 갠지스강 상류로 이동했고, 반유목적 부족사회도 점점 정착농경사회로 변해갔다.

쿠루 왕국 같은 비교적 규모가 큰 정치집단이 형성되면서 여러 베다 전통과 제사 의례가 체계화됐다. 《사마베다》·《야주르베다》·《아타르바베다》 등의 전승도 후기 베다 시대에 정리되어갔다.

브라만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위계와 바르나 질서도 점차 강해졌지만 아직 후대의 복잡한 카스트 제도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철기도 조금씩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갠지스 평원의 농업 개발과 국가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중국

주나라의 서주 시대였다.

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에 상나라를 무너뜨린 뒤 왕족과 공신들을 각지에 제후로 보내 넓은 지역을 통치했다. 왕은 제후들에게 토지와 통치권을 인정하고 제후들은 왕에게 군사적·의례적 의무를 지는 방식이었다.

이를 전통적으로 봉건제라고 부른다. 다만 중세 유럽 봉건제와 완전히 동일한 제도라는 뜻은 아니므로 보통 주나라식 봉건 또는 분봉제라고 구분한다.

기원전 10세기에는 주 성왕, 주 강왕, 주 소왕, 주 목왕 등이 통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성왕과 강왕 시기는 후대 중국에서 서주의 태평성대로 기억됐고, 주 왕실의 권위도 아직 상당히 강했다.

왕실과 제후들은 청동 제기를 제작해 조상 제사를 지냈고, 이 청동기에 남긴 금문은 당시 정치·사회상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됐다.

다만 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왕실과 제후 사이의 관계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고 각 지역의 제후 세력은 점차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했다.

아직 춘추시대까지는 한참 남았지만 나중에 주 왕실을 개무시하게 될 제후들이 열심히 몸집을 불리고 있던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