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순 | |||||||||||||
| 국적 | 조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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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 신 안동 김씨 | ||||||||||||
| 직업 | 무신, 지방관 | ||||||||||||
| 관련 사건 | 홍경래의 난 | ||||||||||||
| 사망 | 1812년 | ||||||||||||
추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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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김익순(金益淳, 1764년 ~ 1812년)은 조선 후기 순조 재위기의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당시 평안도 선천부사(宣川府使)를 지냈던 인물이다. 반란군에 항복한 뒤 자신의 죄를 면하기 위해 반란군 간부의 수급을 매수해 공을 가로채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유명한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의 친할아버지로도 알려져 있다.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되면서 그의 가문은 폐족이 되었으며, 이 사건은 훗날 김삿갓의 생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김익순은 본래 안동 김씨 출신의 무관으로,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평안도 선천부사에 임명되었다. 특히 홍경래가 봉기를 준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관련자들의 체포를 지시하는 등 처음부터 반란군에 협력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로 봉기가 시작되자 제대로 저항하지 않고 항복했으며, 반란군으로부터 직책과 물자를 받아들이는 등 협력 행위를 했다. 이후 관군이 반격에 성공하자 자신이 반란군 간부를 죽인 것처럼 위장하여 처벌을 피하려 했지만, 수급을 제공한 당사자가 진상을 밝히면서 계획이 들통났다.
1812년 음력 3월 9일 모반죄로 처형되었으며, 사후 약 96년이 지난 1908년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관직이 복권되었다.
생애
가문과 관료 생활
김익순은 1764년 안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함경도 경원부사를 지낸 김이환(金履煥)으로, 여러 대에 걸쳐 관직에 진출한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김익순 역시 무과에 급제해 무관으로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중군 등의 군직을 거쳐 평안도 선천부사에 임명되었다.
선천은 당시 청나라와의 국경에 가까운 평안도 서북부의 주요 지역 중 하나였다. 특히 평안도는 의주를 중심으로 국제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상공업과 광산업의 발전으로 경제적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 정치에서 평안도 출신 인물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현상이 지속되었고, 지방관의 수탈과 세도정치의 폐해까지 겹치면서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김익순이 선천부사로 재직하던 1811년에는 이러한 불만이 홍경래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무장 봉기로 폭발하게 된다.
홍경래의 봉기를 알아채다
1811년 음력 12월, 홍경래와 우군칙, 김사용 등은 평안도 가산군 다복동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무장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초 봉기군은 음력 12월 20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있었으며, 여러 지역의 협력자들을 통해 관청을 장악할 계획을 마련했다.
그런데 김익순이 이러한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했다.
김익순은 민간에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음력 12월 18일 소문의 근원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는 최봉관(崔奉觀)이라는 인물을 심문하여 김창시(金昌始), 정복일(鄭復一), 박성신(朴聖信) 등이 봉기를 모의하고 있다는 정보를 확보했다.
이에 곽산으로 포교를 파견해 박성신과 장홍익 등을 체포하고 선천으로 압송하도록 했으며, 김창시에 대해서도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김창시는 체포를 피해 달아났으며, 김사용이 이끄는 봉기군은 체포된 동료들을 구출하고 곽산을 공격했다.
특히 김익순이 반란 모의를 알아채면서 봉기군은 준비하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결국 예정된 거사일을 이틀 앞당겨 음력 12월 18일 밤 봉기를 일으켰다.
즉,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을 처음부터 방관했던 관리가 아니라, 봉기 계획을 사전에 탐지하여 실제로 관련자 체포에 나섰던 인물이었다.
문제는 정작 봉기가 시작된 이후의 행동이었다.
선천부 함락과 항복
봉기가 시작되자 김사용이 지휘하는 북진군은 곽산을 점령한 뒤 선천 방면으로 진격했다.
당시 선천 내부에도 봉기군과 협력하는 인물들이 존재했으며, 이러한 내응 세력은 봉기군이 관청을 장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김익순은 봉기군의 진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선천부가 함락되었다.
이후 김익순은 반란군에 항복했다.
단순히 전투에서 패배해 포로가 된 것과 달리, 김익순은 봉기군에 항복 의사를 전달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명령에 따랐다.
《순조실록》에 따르면 그는 봉기군의 선봉이 도착하기도 전에 항복 문서를 보냈으며, 반란군이 발급한 군관 직책의 임명 문서를 받아들였다.
또한 관청의 인장과 군사 지휘에 사용되는 부신을 반란군의 요구에 따라 넘겨주었다.
심지어 봉기군의 지도부와 만나 술잔을 주고받았으며, 반란군으로부터 돈과 쌀을 받기도 했다.
이는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패전이나 직무유기를 넘어 반란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평안감사는 음력 12월 23일 조정에 올린 보고에서 김익순이 반란군에게 굴복한 사실을 지적하고 처벌을 요청했다.
관군의 반격
초기 홍경래 봉기군은 평안도 여러 고을을 빠르게 점령하면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안주 방면으로 진격하던 봉기군이 박천 송림 일대에서 관군에 패배하면서 전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조정은 중앙군과 지방군을 동원해 본격적인 진압에 나섰으며, 그동안 봉기군에 점령되었던 지역들이 차례로 관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북쪽으로 진격했던 김사용의 군대 역시 의주 방면에서 관군과 지방 세력의 저항을 받았다.
1812년 음력 1월에는 봉기군이 점령했던 선천과 철산 일대가 관군에 의해 수복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익순은 심각한 처지에 놓였다.
봉기군이 승리한다면 그들에게 항복하고 협력한 사실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었지만, 반대로 조선 정부가 승리한다면 자신은 반역자에게 투항한 관리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단순히 군대를 이끌고 후퇴한 것이 아니라 반란군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물자까지 수령한 상태였다.
결국 김익순은 자신이 살아남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김창시 수급 매수 사건
반란군 간부 김창시의 죽음
김익순의 몰락을 결정적으로 불러온 사건은 봉기군의 주요 인물인 김창시의 수급을 둘러싼 사기 행각이었다.
김창시는 홍경래의 난에 참여한 지식인 출신의 주요 모사로, 봉기의 명분을 마련하고 격문을 작성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관군의 반격으로 북진군이 패배하면서 김창시는 달아나게 되었다.
이때 김창시와 함께 이동하던 인물이 철산 출신의 농민 조문형(趙文亨)이었다.
조문형은 본래 봉기군에 참여했던 인물로, 김창시와 함께 도주하다가 구성 지역의 산골짜기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김창시는 잠시 잠이 들었으며, 조문형은 그 틈을 타 김창시의 칼을 빼앗아 그의 목을 베었다.
이후 조문형은 김창시의 수급을 관군에 바쳐 자신의 죄를 면하고 공로를 인정받으려 했다.
그런데 이를 알게 된 김익순이 조문형에게 접근했다.
천 냥에 수급을 사들이다
김익순은 조문형에게 돈 1,000냥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김창시의 수급을 자신에게 넘길 것을 요구했다.
당시 김창시는 봉기군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목을 베어 관군에 바친다면 상당한 군공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김익순은 이를 이용해 자신이 반란군을 토벌한 공로가 있는 것처럼 꾸미고, 과거에 봉기군에 항복했던 죄를 면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조문형은 김익순에게 수급을 넘겼다.
《비변사등록》과 관련 사료에 따르면 김익순은 1,000냥을 지급하기로 약속했으며, 수급을 넘겨받는 과정에서 이를 증명하는 문서까지 작성했다.
김익순은 이후 김창시의 수급을 가지고 관군의 진영을 찾아가 마치 자신이 반란군의 주요 인물을 처단한 것처럼 보고했다.
1812년 음력 1월 21일 《순조실록》에는 김익순이 김창시의 수급을 정주의 관군 진영에 가져왔다는 보고가 실제로 기록되어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반란군에 항복했던 관리가 뒤늦게라도 반란군 지도자를 처단해 충성을 증명한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문제는 정작 사람을 죽인 것은 조문형이었고, 김익순은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목만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돈을 주지 않았다가 들통나다
김익순의 계획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무너졌다.
조문형이 약속받았던 돈을 받지 못한 것이다.
김익순은 조문형에게 수급의 대가로 1,000냥을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약속한 돈을 주지 않았다.
이에 조문형은 김창시를 죽인 사람이 자신이며, 김익순이 돈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수급을 가져갔다고 관군에 호소했다.
조문형의 진술에 따르면 자신이 김창시의 목을 베어 관군에 바치려던 상황에서 김익순이 수급을 요구했고, 주변 사람들도 이를 권유했다고 한다.
결국 조정은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1812년 음력 1월 25일 《비변사등록》에는 조문형이 김창시의 수급을 베었다고 주장한 사실과 김익순이 이를 매수하려 했다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변사는 김익순과 조문형의 진술을 대조해 사건을 조사했으며, 관련자들을 의금부로 압송해 자세히 심문하도록 요청했다.
조사 과정에서 김익순이 반란군에 항복한 사실뿐 아니라, 남의 공로를 가로채기 위해 수급을 매수한 정황까지 드러났다.
반란군에게 항복한 죄를 면하려고 남이 벤 목을 사들였는데, 그 돈마저 주지 않았다가 모든 것이 들통난 셈이다.
체포와 처형
모반죄로 추국받다
김익순은 결국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조정은 그가 반란군에 항복하고 협력했던 행위와 김창시의 수급을 매수한 사건을 함께 조사했다.
1812년 음력 3월 9일 《순조실록》에는 김익순을 추국하고 모반죄로 처형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조정이 정리한 죄목은 단순히 반란군에게 항복했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았다.
- 반란군의 선봉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항복 문서를 보낸 행위
- 반란군이 발급한 군관 임명 문서를 받아들인 행위
- 관청의 인장과 군사 지휘에 사용되는 부신을 넘겨준 행위
- 반란군 지도부와 만나 술을 마시고 돈과 쌀을 받은 행위
- 반란군 간부의 수급을 매수해 자신의 공로인 것처럼 꾸민 행위
이러한 행위는 조선의 법질서에서 국가에 대한 중대한 배신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지방의 군사와 행정을 책임지는 수령이었던 김익순이 적에게 항복한 것뿐 아니라 적극적인 협력까지 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김익순은 모반 대역죄로 처형되었다.
처형 방식
일부 후대 자료에서는 김익순이 참수형을 당했다고 소개한다.
그러나 《순조실록》 음력 4월 21일 기사에 수록된 홍경래의 난 관련 처형자 명단에는 김익순이 능지처사(凌遲處死) 대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능지처사는 반역과 같은 중대한 범죄에 적용되던 극형이다.
따라서 사료상으로는 김익순의 처형 방식을 단순한 참수로만 설명하는 것보다, 《순조실록》의 처형자 명단에 능지처사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함께 밝히는 것이 정확하다.
김익순이 처형된 것은 1812년 음력 3월 9일로, 정주성에서 홍경래가 최후의 저항을 벌이던 시기였다.
즉,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이 완전히 진압되기도 전에 처형된 것이다.
가문의 몰락
김익순이 처형되면서 그의 가족과 후손들 역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반역죄를 저지른 사람의 가족과 친족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연좌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특히 국가에 대한 중대한 반역죄로 처벌받은 경우에는 당사자뿐 아니라 자손의 관직 진출과 사회적 지위에도 큰 제약이 가해질 수 있었다.
김익순의 가문 역시 반역자의 집안으로 낙인찍혀 폐족이 되었으며, 가족들은 기존의 생활 기반을 잃고 여러 지역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는 단순히 한 사람의 처형으로 끝난 사건이 아니라, 그 후손들의 삶까지 크게 바꾸어 놓은 일이었다.
아들 김안근
김익순의 아들 김안근 역시 아버지의 처형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반역자의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에 가족이 사회적 불이익을 받게 되었으며, 기존의 양반 가문으로서 누리던 지위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김안근은 이후 젊은 나이에 사망했으며, 그의 자녀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손자 김삿갓
김익순의 손자 김삿갓은 본명이 김병연(金炳淵)인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이다.
김병연은 어린 시절 조부가 홍경래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되면서 집안이 몰락하는 일을 겪었다.
이후 가족과 함께 여러 지역을 떠돌며 성장했으며, 이러한 경험은 그의 삶과 문학 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김병연이 훗날 조부 김익순을 비판하는 시를 지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손자가 할아버지를 욕하다
김삿갓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에 따르면, 젊은 김병연은 영월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가했다.
당시 백일장의 시제는 홍경래의 난 때 끝까지 항거하다가 살해된 가산군수 정시(鄭蓍)의 충절을 칭송하고, 반란군에게 항복한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를 비판하라는 것이었다.
김병연은 뛰어난 문장력으로 정시를 찬양하고 김익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작성해 장원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자신이 비판한 김익순이 바로 친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병연은 조부를 욕되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해 삿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야기는 김삿갓의 방랑 생활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설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만 실제로 김병연이 백일장에 참가할 당시 조부의 정체를 몰랐는지, 해당 사건이 그의 방랑 생활을 시작하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였는지는 사료적으로 확정하기 어렵다.
어린 시절 이미 집안이 몰락한 이유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며, 김삿갓의 생애에는 후대에 전승된 이야기와 실제 역사적 사실이 혼재되어 있다.
그럼에도 김익순의 처형이 김병연의 가문과 성장 환경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후 복권
1908년 관직 복권
김익순은 반역죄로 처형된 이후 오랫동안 복권되지 못했다.
그가 속했던 안동 김씨 가문은 19세기 조선 정치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김익순의 경우 반역죄로 처형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공식적인 복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처형된 지 약 96년이 지난 1908년 상황이 달라졌다.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과거 반역죄 등으로 처벌받은 인물들의 죄명을 없애고 관직을 복권하는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908년 1월 30일 《순종실록》에는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이 과거 죄적에 오른 인물들의 죄명을 없애고 관작을 회복하는 문제를 상주한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김익순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1908년 4월 30일 이완용이 과거 처벌받은 인물 78명의 관직을 복권할 것을 상주했으며, 순종이 이를 윤허했다.
복권 대상에는 선천부사 김익순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김익순은 1812년 반역죄로 처형되었지만, 사후 96년 만에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선천부사 관직을 회복하게 되었다.
다만 이러한 사후 복권이 그가 실제로 반란군에 항복하거나 수급을 매수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판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당시 대한제국 정부가 과거 처벌받은 인물들의 죄명과 관작을 일괄적으로 정리한 정치적·행정적 조치의 일부였다.
복권의 역사적 의미
김익순의 복권은 대한제국 말기에 이루어진 광범위한 사면 및 관직 회복 조치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정부는 조선시대에 반역죄 등으로 처벌받았던 여러 역사적 인물들의 죄명을 없애거나 관직과 시호를 회복시켰다.
이 가운데에는 서로 다른 시대에 활동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처벌을 받게 된 정치적 배경과 행적 역시 다양했다.
따라서 김익순의 복권 역시 그의 행동이 충성스러운 행위로 재평가되었다는 의미보다는, 과거 국가가 내린 처벌을 사후에 해제한 조치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평가
반란군에게 항복한 관리
김익순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는 당시 조선 정부의 지방 수령으로서 군사와 행정을 책임지고 있었음에도 봉기군의 위협에 굴복해 항복했다.
특히 단순히 적군에게 생포된 것이 아니라 먼저 항복 문서를 보내고 반란군의 직책과 명령을 받아들였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다만 당시 선천부의 방어 상황이나 병력 규모, 지역의 내응 세력 등 구체적인 조건까지 고려하면 그가 반란군에 맞서 끝까지 싸우지 못한 이유를 단순히 개인의 비겁함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홍경래의 난 초기에는 여러 지역의 수령들이 봉기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도망치거나 항복했다.
그럼에도 김익순이 단순한 패배를 넘어 반란군과 협력한 사실은 《순조실록》에 구체적으로 남아 있다.
수급 매수 사건
김익순에 대한 비판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은 김창시의 수급을 매수한 사건이다.
김익순은 관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 공로를 세우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 반란군 간부를 추격하거나 직접 처단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베어 온 수급을 돈을 주고 사들여 자신의 공적처럼 꾸미려 했다.
특히 약속한 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수급을 제공한 사람이 직접 진상을 밝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다만 실제로 김창시를 죽인 조문형 역시 원래 봉기군에 참여했던 인물이므로, 이 사건을 단순히 충신의 공로를 김익순이 빼앗은 이야기로만 이해하는 것도 부정확하다.
두 사람 모두 관군이 우세해진 상황에서 자신의 처벌을 피하거나 공로를 인정받으려는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김익순의 행위는 이러한 혼란을 이용해 거짓 공로를 만들어내려 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당시 조선 사회의 모순
김익순의 행적은 홍경래의 난 당시 지방관들이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봉기군이 빠르게 세력을 확대하는 동안 일부 수령들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으며, 반란군에게 협력했던 인물들은 관군이 반격하기 시작하자 자신의 죄를 면하기 위해 다시 조선 정부에 충성을 증명하려 했다.
이러한 태도는 당시 지방 행정체계가 대규모 무장 봉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전쟁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바꾸는 인물들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홍경래의 난이 단순히 충신과 역적의 대립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사건이었음을 보여준다.
김익순은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생존과 처벌 회피를 위해 행동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과정에서 저지른 행위 때문에 더욱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여담
- 안동 김씨 출신으로, 당시 조선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가문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홍경래의 난에 연루되어 모반죄로 처형되었다.
-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 관련자들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체포령을 내린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봉기군이 거사일을 앞당기게 된 배경에도 영향을 주었다.
- 정작 봉기군이 선천으로 진격하자 항복했고, 반란군이 내린 군관 임명 문서까지 받아들였다.
- 김익순이 직접 김창시를 죽였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김창시의 목을 벤 사람은 철산 출신의 조문형이며, 김익순은 그 수급을 돈을 주고 사들였다.
- 수급을 매수하기로 약속한 금액은 1,000냥이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이었으며, 김익순은 이를 통해 자신의 목숨을 구할 만한 공로를 확보하려 했다.
- 결국 약속한 돈을 지급하지 않아 조문형이 사건을 폭로했다. 돈을 아끼려다 목숨을 잃었다는 식의 풍자가 가능하지만, 실제 처벌에는 앞서 반란군에 항복하고 협력한 행위 역시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 《순조실록》에는 김익순의 항복과 수급 매수 사건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김삿갓과 관련된 민간 전설에만 등장하는 인물은 아니다.
- 일부 자료에서는 김익순이 참수되었다고 설명하지만, 《순조실록》의 처형자 명단에는 능지처사 대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 홍경래의 난이 완전히 진압되기 전인 1812년 음력 3월 9일에 처형되었다. 홍경래 본인은 같은 해 음력 4월 19일 정주성 함락 과정에서 사망했다.
- 손자인 김삿갓이 백일장에서 자신의 할아버지를 비판하는 글을 지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다만 이 이야기에는 후대의 설화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 1908년에는 이완용의 건의로 사후 복권되었다. 김익순의 관직 복권은 《순종실록》 1908년 4월 30일 기사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 김익순이 복권되었다고 해서 역사적으로 그가 반란군에 항복한 사실이나 수급 매수 사건 자체가 부정된 것은 아니다.
관련 문서
외부 링크 및 출처
- 《순조실록》 순조 11년 12월 23일 - 평안 감사가 관리들의 토적 대처 상황에 대해 치계하다
-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 홍경래 난의 전개과정
- 《순조실록》 순조 12년 1월 21일 - 김창시와 김익순 관련 보고
- 《비변사등록》 순조 12년 1월 25일 - 김창시 수급 매수 사건
- 《순조실록》 순조 12년 3월 9일 - 모반 죄인 김익순을 복주하다
- 《순조실록》 순조 12년 4월 21일 - 적도를 정법한 질
- 《순종실록》 1908년 1월 30일 - 죄명을 없애고 관작을 회복하는 조치
- 《순종실록》 1908년 4월 30일 - 김익순 등 78명의 관작 복권
- KBS WORLD - 삿갓을 쓰고 세상을 방랑한 시인, 김병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