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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애미애비가 처뒤지신 역센징 분들은 빨리 애비애미

만나러 관짝으로 들어가주시기 바랍니다. 뒤진 애비애미 만나서 이산가족 상봉하셔야죠
아 그리고 넷우익 분들은 하루빨리 할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파일:Helen Kim.png

1899년 1월 18일 ~ 1970년 2월 10일

인천 출생 (즉 인천의 수치다)

ㄴ 출생일은 자료마다 1899년 1월 18일과 1899년 2월 27일이 같이 나오는데, 2월 27일을 양력 생일로 보는 자료도 많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자료에는 1월 18일로 기록되어 있고 이대학보 등에서는 2월 27일로 기록한다.

본명은 김기득(金己得)이었고 어릴 때 받은 세례명 Helen을 한자로 옮겨 활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

초기에는 여성운동과 농촌 계몽운동을 통해 여성 인권 신장에 기여했지만 일제말살통치 시기에는 변절해서[1] 죄 없는 조선 여성들더러 위안부에 가라고 지랄한 년이다.

ㄴ 앞부분은 진짜다. 1918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해 한국 최초의 여성 대학 졸업자가 됐으며, 3·1운동 때 비밀결사에 참여했고 YWCA 창설, 근우회 활동, 농촌 문맹퇴치 및 여성교육운동 등에도 참여했다. 1931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아 한국 최초의 여성 박사가 된 것도 맞다.

ㄴ 그래서 더 욕먹는다. 처음부터 친일만 하던 사람이 아니라 여성계몽과 민족운동까지 하던 엘리트가 1930년대 후반부터 대놓고 일제 전쟁협력자로 변절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ㄴ 다만 "조선 여성들에게 위안부로 가라고 직접 독려했다"는 표현은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다. 김활란이 학병·징병·징용과 여성의 전시동원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정신대 참여를 독려한 건 확인되지만, 당시의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는 같은 제도가 아니다. 특정 이화여대생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보냈다고까지 단정할 근거는 부족하다.

그렇다고 친일파라는 것 자체가 논란인 것도 아니다.

김활란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고, 대한민국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법률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결정한 사람이다. 그냥 인터넷에서 친일파라고 욕하는 수준이 아니다.

친일 행적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애국금차회의 발기인과 간사가 되었고, 1938년에는 이화여전·이화보육학교 학생 400여명을 동원해 이화애국자녀단을 만들고 직접 단장을 맡았다.

같은 해 일제의 관변조직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이사가 됐고, 이후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조선교화단체연합회, 국민동원총진회, 조선언론보국회, 조선국민의용대 등 일제가 전쟁 막판에 만든 단체에 거의 풀코스로 이름을 올렸다.

1942년에는 《신시대》에 징병제를 환영하면서 대충

“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반도 여성 자신들도 아름다운 웃음으로 내 아들이나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

”

라는 취지의 글을 썼다.

ㄴ 저런 말 하는 년이 자기 아들 보냈냐고 묻고 싶겠지만 애초에 평생 독신이라 아들이 없었다.

1944년에도 조선 여성들에게 훌륭한 군인을 만들어 전장으로 보내는 것이 어머니의 역할이라는 식의 글을 썼다.

즉 남의 아들 전쟁터 보내면서 황송해하라는 년.

1941년에는 창씨개명까지 해서 일본식 이름 天城活蘭(아마기 가쓰란)을 사용했다.

일제의 강요 때문에 창씨개명한 조선인은 존나 많았으니 창씨개명 하나만 가지고 친일파라고 하는 건 무리지만, 얘는 이미 앞뒤로 한 짓거리가 너무 많아서 별 의미가 없다.

심지어 이화여전 교장이 된 뒤 학생들을 황민화 단체에 조직하고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글과 강연까지 계속했으므로

“

학교를 살리려고 어쩔 수 없이 일본에 협조했다

”

만으로 모든 행적을 설명하기에도 존나 어렵다.

학교를 살릴 목적으로 어느 정도 타협했다는 변론은 있을 수 있지만 총독부가 시키는 최소한을 넘어 상당히 적극적으로 전쟁동원 선전에 참여한 기록이 남아있다.

해방 이후

그리고 해방됐다.

보통 여기서

“

일제에 이렇게까지 협력했으니 이제 좆됐겠네

”

라고 생각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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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 없다.

1945년 9월 미군정의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이 됐고 이화여전을 복구해 총장을 맡았다. 1946년 이화여전이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되자 초대 총장이 됐으며 1961년까지 총장으로 있었다.

1948년에는 제헌국회 선거에 서대문구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이후 유엔 총회 한국대표와 대통령 특사를 맡았다.

한국전쟁 중인 1950년에는 대한민국 공보처장까지 했다.

일제 때는 대동아전쟁 선전하고 해방되니 대한민국 정부 홍보책임자가 됐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대상은 통수가 존나 쎄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대상은 너의 통수를 존나게 때려서 기분을 잡치게 만들거나 멘탈 아웃되게 한다.
이보시오 의사양반 제 멘탈은.. 끄어어얽!!

어떻게 보면 시대적응력 하나는 존나게 뛰어나다.

1952년부터는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스》를 발행했고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유네스코 총회 한국대표 등 온갖 요직을 거쳤다.

1963년에는 대한민국장까지 받았고 사망 뒤에는 대한민국일등수교훈장까지 추서됐다.

낙랑클럽

심지어 해방 이후 한국전쟁 시기에는 자기 제자와 동문 후배들에게 미군이 다니는 술집에서 일을 시키기도 했다. 당시 북괴군 뚝배기 깨고 댕기던 갓원일 장군니뮤의 부인 홍은혜 여사님도 이 썅년에게 끌려가서 일했다고 한다.(자세한 건 모윤숙 문서로.)

ㄴ 이 부분은 원문보다 복잡하다.

김활란과 모윤숙이 미군·외교관·정부 고위인사를 접대하던 낙랑클럽이라는 사교단체에 관여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김활란이 총재, 모윤숙이 회장격으로 활동했고 영어가 가능한 이화여전·숙명여전 출신 여성들과 고위층 부인 등이 참여했다. 홍은혜도 관련 인물로 언급된다.

이들은 외국 고위인사와 미군장교를 상대로 파티와 사교활동을 하면서 민간외교 및 로비 역할을 했다. 미군 CIC가 낙랑클럽의 활동을 조사한 문건도 남아있다.

다만 김활란이 이화여대생들을 미군에게 성상납시켰다까지 사실로 박아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2024년 김준혁이 비슷한 발언을 했다가 존나게 논란이 됐는데, 당시 다시 공개된 CIC 자료를 검토한 보도에서는 일부 회원의 매춘 가능성을 언급한 첩보 자체가 출처와 세부내용이 없고 근거가 확인되지 않았으며, 이화여대생 성상납을 직접 입증하는 내용도 없었다.

그러니까 외국군·외교관을 상대로 여성을 동원해 접대와 로비를 벌인 낙랑클럽 자체는 실재했지만 "이대생을 술집에 끌고가 성상납시켰다"로 단정하는 건 현재 확인된 자료보다 한참 나간 주장이다.

이 년은 친일 기록만 갖고도 충분히 깔 게 넘쳐나므로 괜히 확인 안 된 것까지 얹어서 실드칠 구실을 만들어줄 필요가 없다.

자신 이름을 따서 만든 금란전도단이라는 이름의 전도단을 이끌고 종교활동을 했는데, 이년의 이름을 따서 만든 교회가 금란교회다.

정확히는 금란전도대이며 金活蘭에서 金과 蘭을 따서 이름 붙였다. 이후 이 전도활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교회가 현재 중랑구 망우동의 금란교회다.

여성운동

개신교의 우경화[2] 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자 보수주의 페미니즘[3] 의 시초(YWCA와 보수주의 페미니즘 단체 '한국여성단체협의회'의 시초가 바로 김활란과 이기붕 부인 박마리아다. 물론 그것 때문에 YWCA와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ㅈㄴ 까인다.)다. 재밌는 사실은 김마리아는 페미니스트이고 기독교 계열이면서도 저딴 짓은 안했다.

ㄴ 김활란의 여성운동 자체를 전부 친일 하나로 지워버리는 것도 사실관계상 맞지는 않는다. 여성교육, 여성의 고등교육 확대, YWCA와 근우회 활동, 농촌계몽 등 1920~30년대 초 활동은 한국 여성운동사에서 실제로 의미가 있다.

문제는 그 여성계 지도자라는 영향력을 나중에는 일제가 조선 여성들을 전시체제에 동원하는 데 써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활란 평가는

“

여성운동을 했으니 친일은 눈감아주자

”

도 아니고

“

친일했으니 초기 여성교육 활동도 존재하지 않았다

”

도 아니긴 하다.

참고로 4.19혁명 때는 이화여대생들의 행진을 막은 미친년이기도 한다.

ㄴ 김활란이 직접 교문을 틀어막고 학생들을 물리적으로 저지했다는 식으로까지 확인되는 자료는 애매하지만, 4·19 당시 이화여대가 학교 차원의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시위에 참여한 이대생은 있었지만 학교 이름으로는 참여하지 않았고 당시 총장이 김활란, 부총장이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였다. 4·19 직후에는 김활란의 교육행태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까지 벌어졌다.

동상

아니 도대체 이화여대 재단은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아직도 이딴년을 대학교 내에서 동상 세우고 기리고 있다는 게 말이 되냐? 꽃다운 조선 처녀들을 일제에 팔아넘긴 주제에, 현재 꽃다운 나이의 여대생들이 버젓이 다니는 학교 내부에 저딴년 동상이 있다니?

ㄴ 고대도 김성수 동상 세운 거 보면 정상적인 새끼들은 아닌 거 같다. 정유라 사건도 그렇고 하여튼 이대생들 존나 불쌍하다.

ㄴ근데 평생교육원 만든다고 했을 땐 본관점거 농성까지 했으면서 이건 왜 철거 시위 안 하냐? (미안한데 하고 있단다.)

ㄴ 진짜 존나 오래전부터 하고 있다.

2005년에도 이대 학생들이 동상 철거를 요구했고, 2013년에는 학생·졸업생들이 동상에

“

내가 사랑하는 이화에 부끄러운 딱 한 가지

”

같은 포스트잇 300여장을 붙이는 플래시몹을 했다.

2016년 미래라이프대학 사태 당시에는 동상에 페인트와 계란이 날아갔고, 2017년에는 재학생들이 '이화는 친일파 김활란의 동상이 부끄럽습니다'라는 친일행적 알림팻말을 제작했다.

무려 1,022명의 학생이 1천원씩 모아 만든 팻말이었다.

학교 측은 규정상 허가받지 않은 영구설치물이라는 이유로 이 팻말을 철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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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은 안 치우고 친일행적 설명판을 치움.

2024년에도 김준혁의 이대생 성상납 발언이 논란이 되자 일부 이화여대 졸업생들이

“

김준혁의 잘못된 발언을 비판하는 것과 김활란의 친일행적을 덮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

라며 학교 앞에서 다시 김활란 친일청산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2026년 현재도 동상은 있다. 이화여대 공식 캠퍼스 안내의 교내버스 정류장에도 아예 '김활란 동상'이라고 적혀 있다.

ㄴ한국 여자 박사 1호란 칭호가 아쉬웠나 보다. 남자박사 1호나 여자 박사 1호나 제대로 된 새끼가 없다.

ㄴ 한국 최초 여성 박사라는 건 실제로 존나 큰 역사적 타이틀이긴 하다. 문제는 그 이후의 경력을 어디까지 같이 기릴 것이냐는 것이다.

정말 기가 막히는 사실은 김활란이 주장했던 자유주의 페미니즘 계열이나 보수주의 페미니즘에서는 적어도 친일 행적에 대해서 비판하는데, 주류 래디컬 페미니즘은 친일행적마저도 빤다는 것이다. 실제로 얘네들 기독교와 민족주의 가지고 지랄을 쳐하고 있다. 역시 68혁명시기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주체사상급 막장사상답다.

ㄴ 이건 너무 한 덩어리로 묶은 서술이다. 김활란을 여성교육의 선구자로 높게 평가하거나 친일문제와 분리해서 보려는 학자·단체가 있는 것은 맞지만 래디컬 페미니즘 전체가 김활란 친일을 찬양한다고 볼 근거는 없다. 오히려 이화여대 내 친일청산 운동도 여성주의 성향 학생과 졸업생들이 상당수 참여했다.

평가

정리하면 존나 기묘한 사람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 대학 졸업자이자 최초의 여성 박사였으며 YWCA, 근우회, 여성교육, 농촌계몽 등에 참여해 한국 여성교육사에서 빼놓기 어려운 인물인 건 사실이다.

그런 사람이 중일전쟁 이후에는 애국금차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 온갖 친일 관변단체에 들어가고 조선인 청년에게 일본군으로 입대하라고 선전했다.

그래놓고 해방 뒤 별다른 청산도 없이 이화여대 총장, 정부 공보처장, 유엔대표, 여성단체 지도자로 다시 승승장구했다.

일제 때 여성들에게 황국신민으로서 남편과 아들을 기쁘게 전쟁터에 보내라고 하던 사람이 해방 몇 달 뒤에는 대한민국 여성 지도자가 되어있었다.

이런 놈들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는 게 한국 현대사의 친일청산 문제를 설명할 때 김활란 이름이 계속 나오는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건 정치성향에 따라 누가 붙인 인터넷 별명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공식 결정한 사항이다.

깔 거면 확인된 걸로 까자.

확인된 것만 모아도 존나 많다.

  1. ↑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대두 나혜석은 이걸 거부했다.
  2. ↑ 일제시대만 해도 개신교는 오히려 진보 포지션에 있었고, 유교나 불교가 보수 포지션에 있었다. 하지만 신사 참배, 해방 이후 8.27 법난 등을 거치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물론 유교는 항상 보수적인 사상이었다.
  3. ↑ 원래 김활란은 개신교계를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주장했지만 개신교계의 신사 참배와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정부와 유착한 이후 우경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