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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타 다네타로 | |
| 국적 | 일본 제국 |
|---|---|
| 출생지 | 에도 막부 에도 |
| 학력 | 하버드 대학교 법학부 |
| 직업 | 관료, 법률가, 정치인 |
| 경력 | 일본 대장성 주세국장, 일본 귀족원 의원, 대한제국 재정고문, 한국통감부 재정감사장관, 일본 추밀고문관 |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 1853년 8월 25일 ~ 1926년 9월 10일)는 일본 제국의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대한제국에서 재정고문을 지내며 한국의 화폐·금융·재정제도를 일본에 종속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메가다 다네타로라는 표기로도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하버드 대학교 출신의 법률가이자 근대적인 조세제도 정비에 기여한 관료로 평가받으며, 센슈대학의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한국인들의 화폐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대한제국의 재정주권을 침탈한 인물로 기억된다.
개요
대한제국의 재정을 정리해 준다면서 국가의 돈줄을 통째로 일본에 넘겨 버린 놈.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에 따라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부임한 일본인 관료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을 벌이며 한반도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고 있었는데, 메가타는 한국 정부의 재정제도를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파견되었다.
문제는 이놈이 단순히 재정 문제를 상담해 주는 고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메가타가 체결한 고용계약에 따르면 대한제국 정부는 재정에 관한 주요 사항을 처리할 때 그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사실상 한국 정부의 예산과 세금, 화폐, 금융정책을 일본인 한 명이 감독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나라의 재정을 어떻게 운영할지 결정하는 사람이 그 나라의 황제도, 대신도 아닌 외국인 관료였다는 소리다.
~~회사 경영이 어렵다고 컨설턴트를 불렀더니 회사 통장과 법인카드부터 압수해 버리는 꼴이다.~~
물론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과 화폐제도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백동화의 과도한 발행과 위조화폐의 범람, 불안정한 조세제도 등은 실제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메가타의 재정개혁은 한국 경제의 자립을 돕는 방향이 아니라 일본의 금융·재정제도에 대한 종속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1905년부터 시행한 화폐정리사업은 한국인 상인들과 일반 국민들에게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혔으며, 한국의 화폐발행권과 금융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생애
출생과 미국 유학
메가타는 1853년 에도에서 막부의 가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일본은 아직 에도 막부 시대였으며, 미국의 매슈 페리 제독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면서 일본 사회가 거대한 변화에 직면하던 시기였다.
어려서부터 한학과 서양 학문을 배웠으며, 영어와 수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메이지 유신을 거쳐 근대국가로 전환하던 일본 정부의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870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1874년 하버드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귀국해 문부성에서 근무하다가 유학생 감독관으로 다시 미국에 파견되었으며, 1879년 귀국했다.
당시 일본에서 미국의 명문대학 교육을 받은 법률 전문가는 상당히 드물었기 때문에 그의 학력과 경험은 관료로서 출세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머리가 나쁜 놈은 절대 아니었다. 그 좋은 머리를 어디에 써먹었는지가 문제지.~~
일본에서의 관료 생활
귀국 후에는 법률가와 판사로 활동했으며, 1883년 일본 대장성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재정관료의 길을 걸었다.
대장성은 현재 일본 재무성의 전신으로, 국가의 예산과 조세, 금융정책 등을 담당하는 핵심 부처였다.
메가타는 요코하마 세관장과 대장성 주세국장 등을 역임하면서 일본의 근대적인 조세제도와 재정행정 정비에 참여했다. 특히 1894년 주세국장에 취임한 뒤에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조세제도 정비에도 관여했다.
1880년에는 다른 미국 유학파 인사들과 함께 센슈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이후 센슈대학으로 발전했으며,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1904년에는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메가타는 이미 일본 정부에서 상당한 경력을 쌓은 재정 전문가였으며, 바로 그해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파견되었다.[1]
대한제국의 재정고문
제1차 한일협약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동시에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같은 해 2월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의 근거를 마련했고, 8월 22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강요했다.
이 협약에 따라 대한제국은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으로 채용해야 했다.
당연히 이들이 누구를 위해 일할지는 뻔했다.
일본은 메가타를 재정고문으로 추천했으며, 그는 같은 해 10월부터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재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형식적으로는 대한제국 정부에 고용된 외국인 전문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정책을 한국에 관철시키기 위한 감독관에 가까웠다.
실제로 1904년 10월 체결된 고용계약에서는 재정에 관한 모든 주요 사항에 메가타의 동의를 요구했다. 의정부와 각 부처 역시 재정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려면 그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한국 정부가 한국의 세금을 쓰는데 일본인의 허락부터 받아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쯤 되면 재정고문이 아니라 재정총독이다.~~
게다가 메가타를 해임하는 것 역시 대한제국 정부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다. 사실상 일본 정부가 한국의 재정정책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였다.[2]
이용익과의 대립
메가타의 재정 장악 과정이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정책을 주도하던 이용익은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대한제국의 독자적인 금융제도를 확립하고 일본의 간섭을 견제하려 했으며, 메가타가 추진하는 재정조사와 제도 개편에도 저항했다.
고종 역시 메가타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메가타를 지원하면서 그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메가타는 1904년 말부터 대한제국의 재정 상황을 조사했으며, 1905년 5월경 주요 조사를 마무리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한국의 기존 재정제도를 단순히 개선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사실상 처음부터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화폐제도의 개혁, 정부 지출의 긴축, 세입의 정리라는 세 가지 방향으로 재정정리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가 구상한 새로운 제도는 일본의 재정제도를 바탕으로 했으며, 재정운영에 필요한 자금과 감독인력까지 일본에 의존하는 구조였다.[3]
재정고문부 설치
메가타는 재정정리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인 관리들을 중심으로 재정고문부를 조직했다.
처음에는 중앙정부의 재정사무를 감독하는 역할에 집중했지만, 점차 지방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한국의 세입과 세출을 직접 감시하기 시작했다.
1905년 9월에는 평양, 대구, 전주 등에 재정고문부의 지부를 설치하고 일본인 재무관들을 배치했다. 이들은 각 지역의 재정사무를 감독했으며, 지방관들이 독자적으로 재정업무를 처리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기존에는 지방관들이 세금을 거두어 중앙정부에 상납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했지만, 메가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인 감독관들을 배치했다.
결국 조세행정의 개편을 통해 대한제국의 재정운영에 대한 일본의 통제가 한층 강화되었다.
~~부패한 한국 관료를 못 믿겠다면서 일본 관료들을 갖다 놓았는데, 그 일본 관료들이 충성하는 나라는 당연히 일본이었다.~~
화폐정리사업
메가타가 대한제국에서 시행한 정책 가운데 가장 악명 높은 것이 바로 1905년의 화폐정리사업이다.
이 사업은 한국의 화폐제도를 일본과 동일한 체계로 개편하고 기존 화폐를 새로운 화폐로 교환하는 작업이었다.
겉으로는 불안정한 화폐제도를 바로잡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화폐재산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한국의 화폐주권이 일본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백동화 문제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백동화라는 화폐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백동화는 구리와 니켈 등을 재료로 만든 화폐였는데, 대한제국 정부가 재정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양을 발행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여기에 사적으로 주조한 화폐와 위조화폐까지 유통되면서 화폐의 가치가 불안정해졌고,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화폐가 통용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상인들은 화폐의 진위와 가치를 구별하기 어려웠으며, 물가와 환율 역시 불안정했다.
즉, 당시 한국의 화폐제도에 실제로 상당한 문제가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이 반드시 일본의 금융제도에 종속되는 방식이어야 했던 것은 아니다. 대한제국은 이미 독자적인 화폐제도를 정비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지만, 일본의 경제적 간섭과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메가타는 이러한 상황에서 백동화의 과잉발행을 화폐 불안정의 주요 원인으로 판단하고 대대적인 화폐교환을 추진했다.
화폐 가치의 삭감
1905년 7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 화폐정리사업에서는 기존 백동화를 회수하고 새로운 화폐로 교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돈을 전부 제값으로 바꿔주는 것이 아니었다.
백동화는 품질과 무게, 형태에 따라 갑종·을종·병종의 세 등급으로 구분되었다.
- 갑종(甲種): 품질이 양호하다고 인정된 백동화로, 1개당 신화폐 2전 5리로 교환했다.
- 을종(乙種): 기준에 미달하는 백동화로, 1개당 1전의 가격으로 매수했다.
- 병종(丙種): 화폐로 인정하기 어려운 것으로 분류되어 교환이나 매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구백동화는 원래 5전의 법정 액면가치를 가진 화폐였으므로, 갑종으로 인정받더라도 새로운 금본위 화폐로는 절반의 가치만 인정받는 셈이었다. 물론 백동화의 실제 시장가치는 이미 법정 액면가보다 크게 하락해 있었기 때문에, 이 교환비율의 경제적 의미를 단순히 액면가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을종으로 분류되면 인정받는 금액이 훨씬 적어졌고, 병종으로 판정받으면 아예 화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어제까지 시장에서 돈으로 쓰던 물건을 가지고 갔더니 오늘부터는 쓰레기라고 하는 꼴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손실이 당시 백동화를 소유하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1905년 화폐정리 과정에서 상당한 양의 백동화가 교환되지 못하고 폐기되었으며, 한국인들이 보유한 화폐재산이 크게 감소했다.[4]
일본 제일은행의 금융 장악
메가타는 화폐정리사업의 실무를 일본의 제일은행에 맡겼다.
당시 제일은행은 일본의 민간은행이었지만 이미 한국에서 은행권을 발행하고 금융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메가타는 이 은행을 활용하여 한국의 화폐교환과 국고업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1905년 1월 대한제국 정부는 제일은행과 계약을 체결하고 화폐정리사업을 위한 자금 300만 원을 차입했다. 또한 제일은행에 국가의 세입과 세출, 화폐정리 등의 업무를 맡겼다.
결국 일본의 한 민간은행이 대한제국의 중앙은행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남의 나라 은행이 자기 나라 돈을 발행하고 국고까지 관리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제일은행이 발행한 은행권도 한국에서 공식적인 화폐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은행 하나의 영업이 확대된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통화체계가 일본의 금융제도에 종속되는 과정이었다.
메가타는 대한제국의 독자적인 화폐제도를 일본과 동일한 체계로 바꾸고, 일본 화폐와 은행권이 한국에서 자유롭게 통용되도록 했다.
~~화폐개혁을 맡겼더니 일본 은행에 국고와 발권업무를 외주 준 셈이다.~~
이러한 제도는 이후 한국의 금융기관과 화폐제도가 일본의 지배 아래 재편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한국 상인들의 몰락
화폐정리사업은 한국 상인들에게 특히 큰 타격을 입혔다.
기존 화폐의 가치가 삭감되거나 교환이 거부되면서 상인들이 보유한 유동자산이 감소했으며, 구화폐가 회수되는 속도에 비해 새로운 소액 화폐의 공급이 충분하지 않아 시장의 현금 부족 현상이 심화되었다.
당시 한국의 상인들은 현금과 어음을 활용하여 거래를 하고 있었는데, 통화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정상적인 거래를 이어가기 어려워졌다.
이러한 현상을 전황(錢荒), 즉 시중에 돈이 부족해지는 현상이라고 부른다.
특히 서울 종로 일대의 상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자금난으로 상점을 폐업하거나 파산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심각한 경제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상인들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존 백동화를 보유하고 있던 한국인들이 피해를 보는 사이, 화폐교환 업무와 새로운 금융체계를 장악한 일본 제일은행의 영향력은 오히려 확대되었다.
결국 한국의 금융시장에서는 일본계 금융기관의 지위가 강화되고 한국인 상인들의 자금 조달과 경제활동은 더욱 어려워졌다.
물론 당시의 경제적 혼란은 백동화의 과잉발행과 위조화폐 문제 등 기존의 구조적 문제에도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메가타가 주도한 급격한 화폐교환과 통화량 축소가 이러한 혼란을 더욱 심화시킨 것 역시 사실이다.
~~경제가 개판이라서 고쳐 달라고 했더니 시장에 돌아다니는 돈부터 증발시켜 버렸다.~~
화폐정리사업은 형식적으로는 근대적인 화폐제도를 확립했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화폐주권을 침탈하고 한국인들의 재산에 큰 피해를 입힌 정책으로 평가된다.[5]
재정주권의 침탈
예산과 세입의 통제
메가타의 재정정리사업은 단순한 화폐개혁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대한제국 정부의 예산 편성과 지출을 통제하고, 세입을 늘리기 위한 조세제도 개편을 추진했다.
당시 대한제국의 조세행정에는 부정부패와 비효율적인 운영 등 여러 문제가 존재했다. 메가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의 회계법과 징세제도를 도입하고 재정고문부의 감독을 강화했다.
지방관들이 담당하던 징세업무도 점차 일본인 재무관들의 감독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 대한제국 정부는 스스로 조세를 거두고 예산을 집행할 권한을 크게 제한받았다.
그가 추진한 재정정리는 일본인 관료의 감독 아래 일본의 제도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행정체계는 점차 일본에 의존하게 되었다.
~~부패한 관료들을 정리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새로 들어온 놈들이 한국 정부가 아니라 일본 정부를 위해 일했다는 것이다.~~
차관과 재정 종속
메가타는 재정정리사업에 필요한 자금과 정부의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했다.
이러한 차관은 단기적으로 정부의 재정운영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었지만, 동시에 일본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심화시켰다.
메가타가 재정고문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도입된 차관은 약 1,150만 원에 달한 것으로 분석된다. 일본은 차관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담보와 재정운영에 대한 영향력도 확대했다.
여기에 한국의 조세수입과 정부 지출을 일본인 재정고문과 그 산하 조직이 감독하게 되면서 대한제국은 독자적인 재정정책을 수행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일본에서 돈을 빌리고, 일본인이 예산을 감독하며, 일본 은행이 국고를 관리하는 구조가 완성된 것이다.
국가가 재정주권을 잃으면 군대와 행정조직을 유지하고 독자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능력도 약화된다. 메가타가 진행한 재정정리사업은 이러한 점에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통감부 체제로의 편입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1906년에는 한국통감부가 설치되었다.
메가타는 이후에도 대한제국의 재정정리사업에 계속 관여했으며, 1907년에는 통감부의 재정감사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일본은 대한제국의 재정과 행정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 메가타가 구축한 재정감독 체계 역시 통감부의 지배체제와 결합되었다.
1907년 정미7조약 이후 일본의 대한제국 내정 장악이 한층 심화되면서, 기존의 재정고문 제도 역시 새로운 통치구조로 재편되었다.
메가타가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기간은 대략 3년이었지만, 그가 도입한 금융·재정제도와 일본인 감독조직은 이후의 식민지 지배체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09년에는 일본 제일은행의 한국 내 중앙은행 업무를 계승하는 구 한국은행이 설립되었으며, 1910년 한일병합 이후 한국의 금융·재정체계는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메가타가 이러한 모든 변화를 혼자 만들어 낸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경제적 주권을 일본에 종속시키는 제도를 설계하고 실행한 핵심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후의 행적
메가타는 대한제국에서의 재정고문 활동 이후에도 일본의 고위 관료로 활동했다.
1907년에는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7년에는 일본 정부의 재정·경제 관련 특별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했다. 1923년에는 일본의 추밀고문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의 법률 및 재정제도 발전에 참여한 관료로서 상당한 명성을 유지했으며, 교육 분야에서도 센슈학교 설립에 참여한 인물로 기억되었다.
1926년 9월 10일 사망했다. 향년 73세.
~~대한제국의 경제를 뒤흔들어 놓고 일본으로 돌아가서는 남작에 고위 관직까지 누리다가 천수를 누렸다.~~
평가
일본에서의 평가
일본에서는 메가타를 메이지 시대의 근대화를 이끈 관료이자 재정·법률 전문가로 평가하는 시각이 존재한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일본의 조세제도와 재정행정을 정비하는 데 참여했으며, 센슈대학의 전신인 센슈학교를 설립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인물 자료에서는 그를 관료이자 법률가로 소개하면서 조세제도 정비와 한국의 재정·금융제도 개편 등을 주요 경력으로 기록하고 있다.[6]
센슈대학 역시 그를 학교의 주요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다만 일본의 근대적인 재정제도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이 대한제국에서 수행한 정책의 제국주의적 성격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는 유능한 재정관료였을지 몰라도, 그 유능함이 대한제국에서는 경제적 지배를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평가
한국에서는 메가타를 일본의 경제적 침략과 재정주권 침탈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한다.
그가 시행한 화폐정리사업은 불안정한 화폐제도를 정비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인의 화폐재산이 큰 피해를 입었고 한국의 금융체계가 일본에 종속되었다.
또한 재정고문부와 일본인 감독관들을 통해 대한제국의 예산과 조세행정을 장악하면서 국가의 재정주권을 약화시켰다.
그의 정책은 단순히 경제제도를 근대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이 대한제국의 정치적·경제적 지배권을 확보하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실제로 메가타가 구축한 재정감독 체계와 일본인 관료조직은 이후 통감부와 식민지 통치체제의 기반으로 기능했다.
물론 대한제국의 화폐와 재정제도에 구조적인 문제가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며, 이러한 문제를 개혁할 필요성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과 시행 방식이 일본의 이익에 종속되어 있었고, 그 피해가 한국인에게 집중되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역사적으로 메가타의 역할은 이토 히로부미처럼 외교와 정치를 통해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탈한 인물들과 구별된다.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정치적 자율성을 박탈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면, 메가타는 재정과 금융을 장악하여 국가가 독자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킨 인물이었다.
정치적 주권이 빼앗기기 전에 경제적 주권부터 잠식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일본군이 총 들고 들어오는 동안 이놈은 장부 들고 들어온 셈이다.~~
여담
- 메가타의 이름은 '메가타 다네타로', '메가다 다네타로', '메가타 타네타로' 등 여러 형태로 표기된다. 일본어 원문은 目賀田種太郎이며, 일본어 발음은 'めがた たねたろう'이다.
- 출생일은 일본의 옛 달력인 음력 가에이 6년 7월 21일로 기록되기도 한다. 이를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1853년 8월 25일이 된다.
-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당시 일본의 엘리트 관료였다. 일본의 근대적인 재정제도를 정비하는 데에도 참여했으므로, 재정에 관한 전문성이 없었던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전문가라서 더 무서웠던 사례다.~~
- 1880년 센슈학교의 설립에 참여했으며, 이 학교는 현재의 센슈대학으로 발전했다. 일본에서는 교육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 일본의 근대적인 재정제도와 조세행정 정비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파견된 뒤에도 화폐와 세금, 예산 등 광범위한 분야에 개입할 수 있었다.
-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이라는 직책은 형식적으로는 한국 정부에 고용된 외국인 전문가였지만, 실제로는 일본 정부의 정책을 관철시키는 감독관에 가까웠다. 한국 정부가 그의 동의 없이 주요 재정사무를 처리하기 어려웠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 메가타의 화폐정리사업으로 한국의 근대적 화폐제도가 확립되는 효과도 있었지만, 동시에 화폐주권이 일본에 종속되고 한국인들의 재산이 큰 피해를 입었다. 근대적인 제도를 도입한다는 명분이 반드시 그 나라 국민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례다.
- 당시 일본 제일은행은 한국의 중앙은행에 준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화폐정리와 국고업무까지 담당했다. 일본의 민간은행이 다른 나라의 금융체계를 사실상 장악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특이한 사례다.
- 메가타가 설치한 재정고문부는 1907년까지 존속했다. 이후 재정고문부 소속 일본인 관료들 가운데 상당수가 식민지 통치기에도 한국에서 활동하거나 금융·경제 분야로 진출한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