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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곤스케 | |
| 국적 | 일본 제국 |
|---|---|
| 출생지 | 에도 막부 무쓰국 아이즈번 |
| 학력 |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 정치학과 |
| 직업 | 외교관, 관료 |
| 경력 | 주한 일본 특명전권공사, 주청 일본공사, 주이탈리아 일본대사, 주중 일본공사, 관동주 장관, 주영 일본대사, 궁내성 식부장관, 추밀고문관 |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1860년 3월 23일 ~ 1939년 6월 27일)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자 관료로, 대한제국 주재 일본 특명전권공사를 지내며 일본의 한국 침략과 국권 침탈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한자 이름을 한국식으로 읽은 임권조(林權助)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1904년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을사늑약을 일본 측 대표로 조인했으며,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군사적 자율권을 박탈하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시키는 과정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외교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되지만, 한국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대표적인 일본 제국주의 외교관으로 기억된다.
개요
대한제국을 보호해 주겠다고 찾아와서는 외교권부터 뜯어간 놈.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탈한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다면, 하야시 곤스케는 그 침탈을 실제 외교 현장에서 실행한 인물이었다.
1899년 주한 일본공사로 임명된 그는 1900년부터 대한제국에서 본격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으며,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확대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주요 협약에는 이놈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체결
-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 체결
-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 체결
- 1905년 8월 13일 한국 연안항행에 관한 협정 체결
-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하나같이 대한제국의 권리를 일본에 넘겨주는 데 이용된 협약들이다.
~~이 정도면 외교관이 아니라 국가해체 전문 계약직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물론 하야시 혼자서 이 모든 일을 계획한 것은 아니다. 일본의 총리대신과 외무대신, 군부가 결정한 대외정책을 현지에서 실행한 것이며, 최종적인 책임 역시 일본 제국 정부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본국에서 내려온 명령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에 그치지 않았다. 한국 정부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고 친일 성향의 대신들을 회유하거나 매수했으며,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을 활용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국가를 빼앗는 계획을 정치적으로 관철시켰다면, 하야시 곤스케는 그 계획을 조약과 외교문서로 현실화한 인물이었다.
생애
출생과 성장
하야시는 1860년 3월 23일 에도 막부의 아이즈번에서 번사 하야시 마타사부로(林又三郎)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늘날의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츠시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일본은 아직 도쿠가와 막부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메이지 유신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하야시의 집안은 막부를 지지하던 아이즈번의 무사 가문이었다. 할아버지인 하야시 야스사다(林安定)는 아이즈번의 군사 지휘관으로 활동했으며, 역시 하야시 곤스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1868년 보신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막부 측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어린 하야시 역시 아이즈와카마츠성에서 벌어진 농성전에 참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그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이후 메이지 신정부가 수립되면서 막부를 지지했던 아이즈번은 패배한 세력으로 전락했다. 하야시는 어린 시절 가족을 잃고 정치적 격변을 겪었지만, 이후 학업을 통해 새로운 정부의 관료사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메이지 신정부에 맞서 싸우더니, 커서는 그 정부의 제국주의 외교를 위해 남의 나라를 침탈하는 데 앞장섰다.~~
교육과 외무성 입성
하야시는 1879년 오사카전문학교에 입학했으며, 1881년에는 도쿄대학 예비문으로 옮겼다.
1887년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외무성에 들어갔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식 외교제도와 관료조직을 정비하고 있었으며, 근대적인 법률과 정치학을 공부한 인재들이 외무성에 진출하고 있었다.
하야시 역시 이러한 신세대 관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887년에는 중국 산둥반도의 즈푸(芝罘) 부영사로 발령받았고, 1888년 11월에는 조선의 인천 영사로 부임했다.
이후 1892년 상하이 영사, 1896년 영국공사관 1등서기관, 1898년 청국공사관 1등서기관 등을 역임했다.
특히 청국공사관에서 근무하던 시기에는 무술변법의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중국의 개혁사상가 량치차오를 지원하기도 했다.
하야시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서양 열강의 외교 관행을 익혔으며, 이후 일본의 대외정책을 수행하는 핵심 외교관으로 성장했다.[1]
주한 일본공사 부임
1899년 하야시는 일본 외무성 통상국장으로 발탁되었으며, 그해 주한 일본공사로 임명되어 1900년부터 대한제국에서 본격적인 외교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청일전쟁 이후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지만,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 다툼에 직면하고 있었다.
고종은 일본의 지나친 간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서양 열강을 활용하는 외교정책을 추진했으며, 일본은 이러한 움직임을 자신들의 한반도 지배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하야시는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러시아의 진출을 저지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러시아가 마산포 일대에 해군기지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했으며, 한국의 중립화를 둘러싼 논의에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입장에서 한국은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수행할 국가라기보다 일본의 안보와 대륙 진출을 위해 확보해야 할 전략적 지역이었다.
~~남의 나라 독립이 그렇게 걱정됐으면 그냥 독립국으로 놔두면 될 일인데, 그건 또 싫었던 모양이다.~~
대한제국 국권 침탈
친일파 매수 공작
하야시는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대한제국을 일본의 영향권 아래에 두기 위한 외교 공작을 진행했다.
1903년 9월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는 러시아와의 전쟁 가능성에 대비하여 한국을 일본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필요할 경우 비밀협약을 체결하도록 하야시에게 지시했다.
이에 하야시는 대한제국 정부의 내부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일본에 유리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1903년 10월부터는 이지용, 민영철, 이근택 등 일본에 협조적인 대한제국 관료들을 대상으로 매수 공작을 진행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에 따르면 하야시는 공작금을 사용하여 이들 관료를 움직였으며, 1904년 1월에는 일본과 대한제국 사이의 비밀협약이 체결되기 직전 단계에까지 이르렀다.[2]
당시 대한제국 정부 내부에는 일본에 협조적인 관료와 일본의 간섭에 반대하는 관료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하야시는 이러한 정치적 갈등을 이용하여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일 인사들을 확보했다.
그가 활용한 방법은 단순한 외교적 설득이 아니었다. 금전적인 회유와 정치적 압력, 일본군의 군사적 지원을 결합한 것이었다.
다른 나라의 외교관이 그 나라 대신들에게 돈을 뿌려 자기 나라에 유리한 조약을 맺도록 만든 것이다.
~~외교를 하랬더니 남의 나라 정부에 뒷돈 뿌리는 영업사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중립선언 무시
1904년 초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이 임박하자 대한제국 정부는 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대한제국의 중립선언을 사실상 무시했다.
1904년 2월 8일 일본군은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며 러일전쟁을 시작했고, 2월 9일에는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이 서울에 진입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수도는 일본군의 직접적인 군사적 압박 아래 놓이게 되었다.
하야시는 일본군의 진주와 동시에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하여 일본에 협력하도록 요구했다.
일본은 겉으로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군사적 요충지를 점령하고 대한제국의 외교정책을 일본의 전략에 종속시키려 했다.
당시 탁지부대신이었던 이용익은 일본의 군사적·경제적 침투에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1904년 2월 22일 밤 이용익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했다.
그 밖에도 길영수, 이학균, 현상건 등 일본의 요구에 반대하던 인사들이 감시와 추방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과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할 수 있을 리 없었다.[3]
한일의정서 체결
1904년 2월 23일 하야시는 대한제국 외부대신 임시서리 이지용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이 의정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군사와 내정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협약이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를 신뢰하고 시정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인다.
-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의 안전과 안녕을 보장한다.
- 일본은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한다.
- 일본은 군사전략상 필요한 장소를 상황에 따라 수용할 수 있다.
- 양국은 상대방의 승인 없이 의정서의 취지에 반하는 조약을 제3국과 체결할 수 없다.
얼핏 보면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하기 위한 협약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한국 영토의 전략적 지점을 군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조항이었다.
독립을 보장해 준다는 놈들이 정작 그 나라의 영토를 자기들 군대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집을 지켜주겠다면서 열쇠를 달라고 하더니 거실에 자기들 군대부터 들여놓는 꼴이다.~~
의정서 제4조는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장소를 확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으며, 제5조는 대한제국의 독자적인 대외관계를 제약했다.
하야시는 이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이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더욱 기가 막힌 점은 일본이 한일의정서에서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한다고 명시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은 바로 다음 해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고, 불과 6년 뒤에는 대한제국 자체를 병합했다.
독립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해놓고 그 독립을 없애 버린 셈이다.[4]
제1차 한일협약 체결
한일의정서가 일본의 군사적 개입과 내정간섭의 근거를 마련했다면, 1904년 8월 22일 체결된 제1차 한일협약은 대한제국의 외교와 재정에 대한 일본의 통제를 제도화한 협약이었다.
이 협약 역시 일본 측 대표는 하야시 곤스케였다. 대한제국 측에서는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가 서명했다.
협약의 핵심은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 고문들을 의무적으로 채용하고, 주요 재정·외교사무를 처리할 때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제3조에서는 대한제국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거나 외국인에게 이권을 제공하는 등의 중요한 외교 문제를 처리할 때 일본 정부와 사전에 협의하도록 규정했다.
이것은 대한제국이 외교와 재정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독자적으로 내리기 어렵게 만드는 장치였다.
국가의 외교와 재정을 담당하는 부처 위에 사실상 일본 정부가 감독권을 행사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한국 정부가 무슨 일을 하든 일본인에게 결재부터 받아야 할 판이었다.~~
이 협약에 따라 일본의 재정관료 메가타 다네타로가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파견되었다.
메가타는 이후 화폐정리사업을 시행하고 대한제국의 세입과 세출을 감독했으며, 일본 제일은행을 활용하여 한국의 금융체계를 장악하는 데 앞장섰다.
외교고문으로는 미국인 더럼 스티븐스가 임명되었다. 스티븐스는 형식적으로 대한제국 정부에 고용된 외국인 전문가였지만, 실제로는 일본 정부와도 별도의 계약 관계를 맺고 일본의 이익을 위해 활동했다.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는 스티븐스에게 대한제국의 외교 문제를 하야시 곤스케와 협의하도록 지시했으며, 이러한 이중계약은 비밀로 유지되었다.[5]
결국 대한제국의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은 모두 일본의 정책을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하야시는 이러한 고문제도의 도입을 강제한 일본 측 외교 책임자였다.
~~재정은 메가타한테 맡기고 외교는 스티븐스한테 맡겼는데, 둘 다 사실상 일본 편이었다. 이쯤 되면 대한제국 정부에 남은 것은 간판뿐이다.~~
제1차 한일협약은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실질적으로 제한한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이듬해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완전히 박탈되는 과정의 전단계가 되었다.[6]
통신기관 장악
하야시가 대한제국의 외교와 재정에만 손을 뻗은 것은 아니었다.
1905년 4월 1일 하야시는 대한제국 외부대신 이하영과 한일통신기관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따라 대한제국은 우편과 전신, 전화 업무에 관한 관리권과 행정권을 일본 정부에 넘겨주었다. 다만 대한제국 황실만을 위한 전화 업무는 예외로 규정되었다.
또한 기존의 통신시설과 관련된 토지, 건물, 장비 등도 일본 정부에 이관하도록 했다.
당시 우편과 전신은 단순한 민간 편의시설이 아니었다. 정부의 행정명령을 전달하고 외국과 연락하며 군사적 정보를 주고받는 데 필수적인 국가 기반시설이었다.
따라서 통신기관의 관리권을 상실한다는 것은 국가의 행정과 외교, 군사적 자율성이 크게 제약된다는 의미였다.
하야시는 이 협정을 통해 일본이 대한제국의 통신망을 직접 관리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관여했다.
~~남의 나라 외교권과 재정권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전화선과 우편함까지 가져간 것이다.~~
1905년 8월 13일에는 한국의 연안항행에 관한 협정도 체결했다. 일본 측 대표는 하야시였으며 대한제국 측 대표는 이하영이었다.
이 협정은 일정한 조건 아래 일본 선박이 대한제국의 연안과 내수에서 항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본 선박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면서 한국 내 수운과 상업활동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 역시 강화되었다.
이처럼 하야시는 군사와 외교뿐 아니라 통신과 교통 분야에서도 대한제국의 권리를 일본에 넘겨주는 협약들을 잇달아 체결했다.[7][8]
을사늑약 체결
하야시 곤스케가 대한제국에서 저지른 가장 결정적인 국권 침탈 행위다.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는 유리한 국제정세를 조성했다.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했으며,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이에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고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한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가 특파대사로 대한제국에 파견되었으며, 하야시는 현지 일본공사로서 조약 체결 과정에 참여했다.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에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도록 요구했지만, 고종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과 주요 지역을 포위하고 대신들을 압박했다.
1905년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조약 체결을 강요했으며, 하야시 역시 일본 측 대표로 참석했다.
당시 의정부 참정대신 한규설은 조약 체결에 반대했지만, 박제순, 이지용, 이완용, 이근택, 권중현 등 다섯 대신이 일본의 요구에 동조했다.
이들이 바로 훗날 을사오적으로 불리게 되는 인물들이다.
일본은 이들의 동의를 내세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협약을 강제로 성립시켰다.
그리고 그 협약에 일본 측 대표로 서명한 사람이 바로 하야시 곤스케였다.
을사늑약의 일본 측 서명란에는 다음과 같은 직책과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 “ |
特命全權公使 林權助 |
” |
대한제국 측 서명자는 외부대신 박제순이었다.
조약은 총 5개 조항으로 구성되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의 외교사무를 감독하고 지휘한다.
-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 없이 외국과 독자적으로 외교관계를 맺을 수 없다.
- 일본은 대한제국에 통감을 설치하고 각 지역에 이사를 배치한다.
-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장한다.
이 협약으로 대한제국은 사실상 외교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조약의 체결 과정에는 심각한 법적 문제가 있었다.
고종은 끝까지 조약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황제의 서명이나 옥새 날인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의 무력 위협 아래 조약 체결이 강요되었다는 점에서 그 유효성과 적법성이 부정되어 왔다.
대한제국은 당시 전제군주제 국가였으므로 황제의 승인 여부는 중요한 문제였다. 일본은 이러한 절차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조약이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강제로 집행했다.[9][10]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을 정치적으로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다면, 하야시는 일본의 현지 외교 책임자로서 그 조약에 직접 서명한 인물이었다.
~~역사책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놈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조약문을 펼쳐 보면 일본 측 서명란에 떡하니 이름이 적혀 있다.~~
결국 하야시가 서명한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이 독자적인 외교권을 상실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통감부 설치와 귀국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임명했다.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일본은 더 이상 공사관을 통한 일반적인 외교관계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대한제국은 독립국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외교권을 비롯한 중요한 국가 권한은 이미 일본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다.
하야시는 주한 일본공사로서 수행하던 역할을 마친 뒤 대한제국을 떠났으며, 1906년 주청 일본공사로 임명되었다.
하야시가 떠난 뒤에도 그가 조인했던 조약과 협약들은 계속 효력을 주장받으며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위한 제도적 기반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일본은 1907년 정미7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내정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강화하고 군대를 해산시켰으며, 1910년에는 한일병합을 강행했다.
하야시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직접 서명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병합에 앞서 대한제국의 외교적·군사적 자율성을 무너뜨리는 협약들을 체결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한국 병합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국가를 통째로 먹기 위한 밑작업을 다 끝내놓고 다른 나라로 발령받은 셈이다.~~
이후의 행적
중국과 이탈리아 근무
1906년 대한제국을 떠난 하야시는 청나라 주재 일본공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중국은 청나라 말기로, 일본과 서양 열강들이 중국의 정치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였다.
하야시는 중국에서도 일본의 외교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1907년에는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일본에서는 그의 외교적 공적이 인정받았지만, 그 공적에는 한국의 국권 침탈에 기여한 활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1908년에는 주이탈리아 일본대사로 임명되어 유럽에서 외교 활동을 수행했다.
이후 1916년에는 다시 중국 주재 일본공사로 부임했다.
당시 중국은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이 수립되었지만 군벌들이 권력을 다투면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야시는 일본의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중국의 정치적 상황에 개입했으며, 1917년 장쉰(張勳)이 청나라 황제의 복위를 시도한 사건을 둘러싼 정세에도 관여했다.
그는 일본의 이익에 부합하는 범위에서 중국의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는 외교 활동을 펼쳤다.
관동주 장관과 주영대사
1919년 하야시는 일본이 중국에서 조차한 관동주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관동주는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의 뤼순과 다롄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조차권을 넘겨받아 지배하던 곳이었다.
하야시는 이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면서 일본의 대륙 정책에 참여했다.
1920년에는 주영 일본대사로 임명되어 영국으로 부임했다.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 국제연맹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영국과의 외교관계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야시는 1920년대 초반 국제연맹 관련 외교 활동과 국제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여했다.
1925년 주영대사에서 물러난 후에는 영국에 머물면서 일본 황족인 지치부노미야의 유학 생활을 보좌했다.
1927년 일본으로 귀국했으며, 이후 궁내성의 식부장관과 추밀고문관 등을 역임했다.
또한 1931년에는 일본의 동양학 연구기관인 도요문고의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39년 6월 27일 도쿄에서 사망했다. 향년 79세.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데 앞장서고도 일본에서는 남작 작위에 대사, 추밀고문관까지 지내며 천수를 누렸다.~~[11]
평가
일본에서의 평가
일본에서는 하야시 곤스케를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초기까지 활동한 주요 외교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는 중국, 한국, 영국,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으며,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특히 일본의 대외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 정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07년 남작 작위를 받은 것도 그의 외교적 활동에 대한 보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주영대사와 추밀고문관 등 고위직을 지냈으며, 은퇴 후에도 일본의 정치·외교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일본의 일부 인물사전에서는 그를 한국 병합의 기반을 구축한 외교관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평가가 한국에 대한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국익을 위해 유능하게 활동했다는 사실과 다른 국가의 주권을 침탈했다는 사실은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평가
한국에서 하야시 곤스케는 일본 제국주의의 대한제국 침략을 실행한 핵심 외교관으로 평가된다.
그는 단순히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의 외교관계를 관리한 인물이 아니라, 한국 정부의 내부에 개입하여 일본에 유리한 협약을 체결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특히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정치적 갈등을 이용하고, 일본군의 무력을 배경으로 일련의 협약을 체결했다.
그가 관여한 협약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일의정서는 일본군의 한반도 주둔과 내정간섭의 근거를 마련했으며, 제1차 한일협약은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에 대한 일본의 감독권을 확대했다. 이후 통신기관협정 등을 통해 국가 기반시설의 관리권이 일본에 넘어갔고, 마지막으로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 자체가 박탈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우연히 발생한 개별적인 외교 사건들의 집합이 아니었다. 일본 정부가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대한제국을 자국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고 궁극적으로 병합하려 했던 정책의 연속적인 실행이었다.
하야시는 바로 그 과정의 현장 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대한제국의 정치적 자율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친일 성향의 관료들에게 접근하고 매수 공작을 벌였다.
이는 외교관으로서 다른 국가의 정치적 독립을 존중하기보다 해당 국가의 내부 정치에 개입하여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킨 행위였다.
결국 하야시는 외교관이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데 앞장선 인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외교관이 외교권을 빼앗으러 온다는 것부터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토 히로부미와의 관계
하야시 곤스케와 이토 히로부미는 모두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에 관여했지만, 담당한 역할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최고위 정치인으로서 대한제국의 보호국화와 통감부 설치를 정치적으로 추진한 인물이었다.
반면 하야시 곤스케는 대한제국 주재 일본공사로서 일본 정부의 정책을 외교적으로 실행하고 각종 협약을 체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을사늑약 체결 과정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직접 압박했으며, 하야시 곤스케는 일본 측 조약 서명자로 참여했다.
이 때문에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을 이야기할 때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이 널리 언급되는 반면, 하야시의 이름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편이다.
그러나 조약문에 실제로 서명한 일본 측 대표가 하야시였다는 사실은 그의 책임을 평가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으라고 압박했다면, 하야시 곤스케는 그 외교권을 빼앗는 조약에 직접 서명한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역할은 서로 달랐지만,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탈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메가타 다네타로와의 비교
메가타 다네타로 역시 하야시 곤스케와 비슷한 시기에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일본인 관료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담당한 분야는 달랐다.
하야시 곤스케는 외교관으로서 대한제국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압박하고, 일본의 간섭을 제도화하는 협약을 체결했다.
메가타 다네타로는 제1차 한일협약에 따라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파견되어 예산과 조세, 화폐, 금융제도를 일본의 통제 아래 재편했다.
즉, 하야시가 외교적·법적 기반을 마련했다면 메가타는 그 기반 위에서 경제적 지배를 실행한 셈이다.
두 인물의 활동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서로 맞물려 있었다.
~~한 놈은 국가의 외교권을 빼앗고 다른 놈은 국가의 돈줄을 빼앗았다. 둘이서 아주 역할 분담을 잘한 셈이다.~~
여담
- 하야시 곤스케의 이름은 한자 표기인 林權助를 한국식으로 읽어 '임권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한제국의 공식 문서에도 임권조라는 표기가 등장한다.
- 하야시는 1904년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을사늑약에 모두 일본 측 대표로 서명했다. 이 세 협약은 대한제국의 군사적·외교적 주권을 단계적으로 박탈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을사늑약의 서명자는 이토 히로부미가 아니라 하야시 곤스케였다. 이토는 조약 체결을 강제한 최고위 정치인이었지만, 일본의 정식 조약 서명자는 현지 공사였던 하야시였다.
- 하야시는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 이전부터 대한제국 관료들을 대상으로 매수 공작을 벌였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에서도 이러한 공작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 메이지 유신 당시 어린 나이에 막부 측으로 참전한 경험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보신전쟁에서 전사했다.
- 하야시의 할아버지인 하야시 야스사다 역시 '하야시 곤스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일본의 막부 말기 인물 기록을 확인할 때 동명이인인 할아버지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대한제국 주재 일본공사로 근무하기 이전에도 1888년 인천 영사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한국과의 인연이 1900년대에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 한일의정서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한다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그 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불과 6년 뒤 대한제국을 병합했다. 해당 조약의 내용과 일본의 실제 행동 사이에는 명백한 모순이 존재했다.
- 1905년 우편·전신·전화 업무의 관리권을 일본에 이관하는 협정에도 서명했다. 군사와 외교뿐 아니라 국가의 통신망까지 일본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하는 과정에 관여한 것이다.
- 1907년 일본의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주이탈리아 대사와 주영대사, 추밀고문관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에 관여한 경력은 당시 일본에서 오히려 외교적 공적으로 취급되었다.
- 일본의 동양학 연구기관인 도요문고의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도요문고는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소장한 연구기관이다.
-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는 직접 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에 서명했으므로, 일본의 한국 병합을 위한 중요한 전단계를 실행한 책임은 분명하다.
- 하야시가 대한제국에서 활동하던 무렵의 사진은 미국 코넬대학교 도서관의 자료에도 남아 있다. 이 사진은 1905년 무렵 서울에 주재하던 일본공사 하야시의 모습을 보여준다.[12]
외부 링크
각주
-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성과포털, 한국외교사전 - 하야시 곤스케
- ↑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제42권 대한제국 - 한일의정서와 부수협정의 체결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일의정서
-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 한일의정서
- ↑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의 이중계약과 그 의미
-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
- ↑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조실록사전 - 일한통신기관협정서
- ↑ 미국 국무부 역사실,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05 - Agreement Respecting the Coast Trade of Korea
-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 을사늑약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일병합조약
- ↑ 일본 도요문고 - 역사 속 인물, 하야시 곤스케
- ↑ Cornell University Library - H. E. Gonsuke Hayashi, Japanese minister 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