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직책인지 관행적 호칭인지는 국가와 시대에 따라 다릅니다. 가끔은 본체보다 존재감이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성녀를 향해 욕설이나 비방이나 저질스러운 단어를 쓰지 맙시다.
성인을 욕보이게 하는 짓은 하지 맙시다.
강한 여성...지배...왜곡된 성욕......
육영수 | |
| 생년월일 | 1925년 11월 29일 |
|---|---|
| 사망일 | 1974년 8월 15일 |
| 국적 | 대한민국 |
| 출생지 | |
| 신장 | 170cm |
개요
대한민국 제5~8대 대통령 재임기 동안 영부인 역할을 맡았던 인물. 제5~9대 대통령 박정희의 배우자이며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의 어머니다. 1963년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 뒤 1974년 사망할 때까지 약 11년 동안 영부인으로 활동했다.[1]
육영수가 사망한 것은 박정희의 제8대 대통령 임기 중이었으며 이후 박근혜가 공식적인 법적 직책을 승계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 행사에서 사실상 영부인 역할을 대신했다. 따라서 "9대 영부인 권한대행" 같은 표현은 공식 직함이라기보다는 당시 박근혜가 수행했던 역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1974년 광복절 29주년 날, 1년하고도 일주일전이었던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한일관계가 악화되어 있던 상황에서 박정희를 겨냥한 재일동포 문세광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문세광의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당시 한국과 일본의 수사 결과가 달랐는데, 한국 정부는 조총련과 북한의 배후를 발표한 반면 일본 측은 문세광이 김대중 납치사건과 박정희 정권에 분개해 단독으로 범행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건의 구체적인 배후를 둘러싼 논란은 이후에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2]
결국 대통령을 죽이러 온 총알에 영부인이 대신 맞아 사망했고, 남편 박정희도 5년 뒤 10.26 사태에서 총 맞아 사망했다. 부부가 둘 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굵직한 암살사건에 들어가 버린 셈이다.
생애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나서 약 8천평짜리 집에서 살았다고하며 태어나던 1920년대에 이미 전화기와 자동차가 집에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육영수가 태어나 자란 옥천 교동집은 상당한 규모의 부잣집이었다. 아버지 육종관이 1918년 매입해 고쳐 지은 전통 한옥으로, 과수원까지 포함한 집안 부지는 약 8천 평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옥천군에 복원된 육영수 생가는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3]
키는 170cm로 본인 남편을 비롯한 당시 남자들보다도 훨씬컸다. 저 당시 한국 여성 평균키가 153cm 정도라고 하니깐 요즘 기준 이라면 약 178~179cm정도이다. 역대 영부인 가운데서도 상당한 장신으로 알려져 있다.
종교는 불교인데 법명이 '대덕화'이다. 1960년대 청담 스님에게 받은 법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도선사에서 불공을 올리고 보살계를 받았다는 일화도 전한다.[4] 노무현 마누라인 권양숙이 존경하는 사람이라고하며 권양숙의 법명도 '대덕화'로 똑같다.
배화여고를 졸업한 뒤 옥천여자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으며,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부산 피란 시기에 당시 육군 중령이던 박정희와 결혼했다.[5]
영부인 시절
영부인 시절 어린이와 사회복지 관련 활동을 많이 했다. 어린이회관 건립, 어린이대공원 조성, 여성회관 건립, 재해대책기금 조성, 고아원·양로원 및 한센인 정착촌 방문 등의 활동으로 알려졌다. 1967년에는 육영재단에서 어린이 종합잡지 《어깨동무》를 창간하기도 했다.[6]
박정희에게 재야와 일반 시민들의 불만이나 민원을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고 전해지며 이 때문에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다만 이것을 육영수가 박정희 정부의 통치방식 전체에 반대했다는 의미로 확대해서 해석할 근거까지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 이 문서에는 "박근혜이 최태민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육영수가 싫어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건 시점상 성립하지 않는다. 최태민이 박근혜에게 위로 편지를 보내 인연을 맺은 것은 육영수가 사망한 이듬해인 1975년이었다.[7]
육영재단과 이미지
사회복지와 어린이 관련 활동 때문에 생전부터 대중적으로 온화한 영부인 이미지가 강하게 형성됐고, 사망 후에도 이러한 모습이 주로 기억되어 왔다. 특히 1974년 저격 사건 직후에는 국민장이 치러졌고 대규모 추모가 이어졌다.[8]
한편 이러한 이미지가 박정희 정부 시기의 공식 홍보와 사후 추모 과정에서 더욱 강화됐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따라서 육영수 개인의 사회사업과 당시 정권의 정치적 이미지 형성은 구분해서 보는 편이 낫다.
이양반도 미화 오지게된 양반이라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도 이런 부분 때문이다. 다만 육영재단의 재산이 불법적으로 조성됐다고까지 단정하려면 별도의 근거가 필요하다. 재산 규모가 크다는 것 자체만으로 불법 조성을 증명할 수는 없다.
박정희때 만화책 분서갱유 해놓고 유일한 연재가능만화잡지가 육영재단 보물섬이였다는 이야기도 돌아다니는데, 이건 연대부터 맞지 않는다. 《보물섬》은 박정희 사망 3년 뒤인 1982년 10월 육영재단에서 창간됐다. 육영재단이 박정희 시대에 발행한 대표적인 어린이 잡지는 1967년 창간된 《어깨동무》다.[9]
그러니까 박정희 정부 시절의 만화 규제 문제와 육영재단의 만화·어린이 잡지 사업은 따로 따져야 한다. 시간축부터 섞어버리면 박정희가 죽은 뒤에 나온 잡지까지 유신정권 특혜물이 되는 타임머신이 완성된다.
8·15 저격 사건
1974년 8월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29주년 광복절 기념식 도중 재일교포 문세광이 박정희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박정희는 피했지만 귀빈석에 있던 육영수가 총탄을 맞았고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같은 날 오후 사망했다. 당시 행사에 참석했던 학생 장봉화도 총격 과정에서 사망했다.[10]
문세광이 실제로 발사한 총탄과 경호원의 대응 과정 등을 둘러싸고 이후 여러 의혹이 제기됐으며 일부 총탄의 행방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다. 다만 국가기록원과 공식 기록은 육영수를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으로 희생된 영부인으로 기록하고 있다.[11]
1974년 8월 19일 중앙청 광장에서 국민장 영결식이 거행됐으며 이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가족
- 아버지 육종관
- 어머니 이경녕
위의 가족관계를 보면 알겠지만 이후 정치와 각종 사회적 논란에 이름이 오르내린 가족이 많아서 육영수 사후에도 이 집안 이야기가 한국 현대사에서 사라질 날이 별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