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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 카와이하다능... 쿰척쿰척
저격당한 육영수 여사
문세광
생년월일1951년 12월 26일
사망일1974년 12월 20일
국적대한민국
출생지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별명난조 세이코(南条 世光)
추가 정보
학력세이키 상업고등학교 중퇴
직업무직
사망원인교수형
영문Mun Se-gwang
한자文世光

1951년 12월 26일 ~ 1974년 12월 20일

일본식 이름으로 난조 세이코(南条 世光)

김재규와 함께 대국적인 인물로 불린다. 는 지랄

조총련의 사주를 받고 파견된 재일 한국인으로 김대중 납치사건에 풀발기하여 이듬해 8.15 광복절 축사 행사에서 대국적 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본의 아니게 반인반신의 배우자 육영수를 쏘게 되었다.

다만 조총련과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는 부분은 당시 한국 정부의 수사 결론이고, 일본 정부의 수사 결론은 달랐다. 한국 수사당국은 문세광이 조총련에 포섭되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박정희 암살을 시도했다고 발표했지만 일본 측은 조총련이나 북한이 직접 범행을 지시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김대중 납치사건과 박정희 정권에 분개한 문세광의 단독범행으로 결론 내렸다.[1][2]

그러니까 문세광이 총 들고 서울까지 와서 사람을 쏜 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본인 책임이지만 누가 머릿속에 뭘 집어넣었고 어디까지 조직적으로 지원했느냐는 부분은 지금도 한국과 일본의 당시 수사결과가 서로 다르다.

이후 암살미수사건을 조사하던 차에 문세광과 행사 경호 관계자들 사이에 몇건의 찌라시가 있었던 것이 발견되었으나 묵살당하고 결국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사건 이후로 박종규 경호실장이 해임되고 어떤 간신배새끼가 박정희를 미친 노인네처럼 만들어서 김재규에게 암살 당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이건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다룬다.

재규어 의사와 함께 유머감각 킬러로 유명하다.

허나 재규어 의사께서 강철같은 신념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사를 치르셨다면 문세광은 ㄹ혜 아빠에 대한 평가는 제쳐두고 북한 선동에 낚여서 총들고 영웅행세 한 것 뿐이다. 본인도 경찰에게 체포되고 조사받던 도중 은근 기대하면서 사람들 반응은 어떤가? 라고 물었다가 이용당한걸 알게되고 유언으로 '육영수 여사에게 죄송하다'라는 말과 '내가 속았다'라고 남겼으니. 병신

이 마지막 부분은 당시 수사검사였던 김기춘의 훗날 회고에서도 비슷하게 전해진다. 김기춘은 문세광이 육영수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고개를 떨구며 미안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사형 집행 때 자신이 바보였으며 조총련에 속았다는 취지의 최후진술을 했다고 증언했다.[3] 다만 이는 수사 당사자의 후일 증언을 통해 전해지는 내용이라는 점은 감안하자.

한편 몇십년 뒤 한국에는 전혀 대국적이지 않고 문의 의지를 넘겨받은 재앙이 나타나는데...

생애

문세광은 1951년 12월 26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다. 본적은 경상남도였지만 실제 생활 기반은 태어나서부터 일본이었고, 일본식 통명으로 난조 세이코(南条世光)를 사용했다.[4]

고등학교까지 일본에서 다니다 중퇴했고 이후 정치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여기서 의외인 점은 처음부터 조총련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민단 쪽 조직에 가입해 활동했다.

당시 재일교포 사회 자체가 꽤 복잡했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졌듯 일본의 재일동포 사회도 남한을 지지하는 민단과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 그리고 양쪽 어디에도 확실하게 속하지 않는 사람들로 갈라져 있었다. 남북한 정부도 각각 이 조직들을 통해 재일동포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5]

1970년대 민단 내부도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지지하는 중앙 지도부와 이를 반대하는 청년·학생 세력이 충돌하고 있었다. 한국청년동맹과 한국학생동맹 등 일부 산하단체가 민단에서 제명될 정도였다.[6]

쉽게 말해 문세광이 20대 초반이던 시절의 재일교포 사회는 한국계냐 북한계냐, 박정희를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일본 사회에서 나는 대체 누구냐 같은 문제가 정치와 개인 정체성에 동시에 처박혀 있던 동네였다. 재일동포에게 민족 정체성 문제가 남북분단 때문에 하나의 국가와 단순하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후 연구에서도 지적된다.[7]

물론 환경이 복잡했다고 총 들고 사람 쏘는 게 정상이라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수많은 재일교포가 똑같은 시대를 살고도 암살하러 가지 않았다. 다만 왜 오사카에서 태어나고 자란 22세짜리 재일교포 청년 머릿속에 대한민국 대통령을 죽여 남한에서 혁명을 일으킨다는 발상이 들어갔는지를 보려면 이런 시대배경은 빼놓기 어렵다.

김대중 납치사건과 급진화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벌어졌다. 일본 국내에서 한국 정부기관이 야당 정치인을 납치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한국 정부의 주권 침해라는 비판까지 일었다.

문세광 역시 이 사건 이후 김대중 구출대책위원회 활동에 참여했다. 한국 측 조사에서는 이 무렵 문세광이 조총련과 더욱 가까워졌으며 이후 조총련 관계자의 영향을 받아 박정희 암살을 결심한 것으로 파악했다.[8]

아까 말했듯 일본 수사는 여기서 결론이 달랐다. 일본 정부는 문세광이 김대중 납치사건에 분노하고 자기가 박정희를 제거하면 한국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망상에 빠진 소영웅주의자였다고 판단했으며, 북한이나 조총련의 직접 지령은 입증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9]

반대로 한국 측 수사결과대로라면 이야기가 좀 더 심각해진다. 아직 20대 초반이던 문세광에게 조총련 관계자들이 남한에서 박정희가 죽으면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식의 명분을 주고 범행을 부추겼다는 구조가 되기 때문이다. 문세광이 스스로 선택하고 실행했으니 책임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사실이라면 총 쥐여주고 젊은 놈 하나 앞세운 어른들도 좋은 새끼들은 아니다.

8·15 저격 사건

19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제29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다. 문세광은 박정희가 참석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38구경 권총과 실탄을 가지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웃기는 건 문세광에게 정상적인 입장 비표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일본어를 사용하며 VIP인 것처럼 행동하자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고 행사장 남측 후문을 통해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10]

국가원수 있는 광복절 행사의 경호가 일본어 좀 하니까 VIP인가보다 하고 들여보내주는 수준이었다.

박정희가 경축사를 읽던 중 문세광이 총을 꺼내 발사했다. 박정희 암살에는 실패했고 총탄에 영부인 육영수가 맞았다. 육영수는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같은 날 오후 사망했다. 행사장에 있던 여학생 장봉화도 총격 과정에서 사망했다.[11]

문세광은 현장에서 즉시 붙잡혔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실제로 달성한 건 자신이 목표로 삼은 박정희 암살도 아니고 혁명도 아니고 아무 관계없는 영부인과 여학생이 죽은 것이었다.

배후 논쟁

이 사건에서 지금까지 가장 말이 많은 게 이것이다.

그래서 북한이 시킨 거냐, 문세광 혼자 미친 거냐?

한국 정부는 수사 결과 문세광이 조총련과 한국청년동맹 관계자들을 통해 북한의 지령을 받아 범행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문세광이 조총련에 포섭됐으며 조총련 관계자로부터 암살을 부추기는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한국 측의 설명이었다.[12]

반면 일본 정부는 100일 넘게 수사한 뒤 1974년 12월 25일 북한 및 조총련의 직접적인 배후를 입증할 증거가 없다며 문세광의 단독범행이라는 결론을 발표했다. 일본 측은 문세광이 김대중 납치사건에 분노해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겠다는 생각으로 범행을 벌였다고 판단했다.[13]

웃긴 건 수십 년 뒤인 2014년 일본 국회에서도 한 의원이 문세광 사건을 거론하며 조총련 관계자가 문세광을 부추기고 사격훈련 등을 지원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즉 일본 안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해석이 완전히 한 방향인 것은 아니다.[14]

더 묘한 자료도 있다. 공개된 구동독 외교문서에 따르면 사건 두 달 뒤 김일성은 소련 대사와의 대화에서 문세광을 자신들의 공작원이라고 인정하기는커녕 김대중을 추종하는 민단 좌익계 인물이라는 취지로 이야기하며 책임을 돌렸다.[15]

결국 한국 정부는 북한·조총련 배후라고 했고, 일본 정부는 단독범행이라고 했으며, 북한은 자기들과 관계없다고 했다. 사건의 조직적 배후가 어디까지였는지는 현재까지도 완전히 합의된 결론이 없다.

그러니 `북한 선동에 낚였다`고 적으려면 한국 수사결과를 전제로 하는 서술이라고 보면 되고, 북한의 직접 지령이 역사적으로 100% 확정된 사실인 것처럼 쓰는 것도 곤란하다.

재일교포라는 배경

문세광의 행동을 이해할 때 꽤 중요한데 자주 빠지는 부분.

이 사람은 한국에서 태어나 박정희 시대를 직접 살다가 반정부운동을 한 사람이 아니다. 태어나서 성장기 전체를 일본에서 보낸 재일교포 2세였다.

당시 재일동포들은 일본 사회에서는 조선인·한국인이라는 소수자였고, 동시에 고향이라고 불리는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다. 재일동포 사회 내부에서도 민단과 조총련이 경쟁하면서 남북한의 정치싸움이 일본에 그대로 복사되어 있었다.[16]

그래서 문세광 같은 재일 2세 입장에서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완전히 일본인도 아니고, 조선계 뿌리를 갖고 있지만 그 조국은 남북 두 국가로 나뉘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기묘한 환경이었다.

이게 문세광의 범죄를 대신 설명해주는 면죄부는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이런 정체성과 정치적 혼란을 가지고 있던 젊은 사람이 과격한 이념에 빠졌을 때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에 가깝다.

한국 측 수사결과처럼 조직적인 선동과 지원까지 있었다면 22살짜리 재일교포 청년에게 조국을 위해 거사를 하면 영웅이 된다는 식의 명분을 집어넣고 총 들고 가게 만든 사람들의 책임 역시 별도로 물을 수 있다. 반대로 일본 측 결론대로 조직적 지시가 없었다면, 문세광 자신이 정치적 분노와 소영웅주의를 확대해 결국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사건이 된다.

어느 쪽을 택해도 정작 총에 맞아 죽은 육영수와 장봉화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사정이었다.

사건 이후

문세광 사건은 단순히 암살미수 한 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총기의 출처가 일본 경찰서였고 문세광이 일본에서 활동하던 재일교포였기 때문에 한일 외교문제로 바로 번졌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문세광의 배후조직 수사와 조총련 단속을 요구했고, 대응이 미흡할 경우 국교 단절까지 검토하겠다고 압박했다. 서울에서는 일본대사관에 시위대가 난입하는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한일관계가 최악의 수준으로 악화됐다.[17]

박정희 개인에게도 영향이 컸다. 최근 공개된 1974년 주한미국대사관 비밀전문을 보면 미국 측은 사건 직후 박정희가 이 암살미수를 자신의 강경 통치가 필요하다는 근거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으며 온건한 방향으로 갈 것 같지 않다고 판단했다.[18]

그러니까 이 사건이 유신체제를 만든 원인은 아니다. 유신은 이미 1972년에 시작돼 있었다. 다만 영부인이 자기 바로 옆에서 총 맞아 죽은 사건이 박정희의 안보 불안과 경호 의존, 정권의 강경한 반공 분위기를 더 강화시키는 계기가 된 것은 당시 미국 외교문서에서도 읽힌다.

그리고 원문에 적혀 있듯 경호실장 박종규가 결국 물러났고 그 자리에 차지철이 들어왔다. 약 5년 뒤 차지철과 김재규의 갈등은 10.26 사태의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된다.

문세광은 박정희를 죽이는 데 실패했는데, 그의 범행 이후 일어난 인사 변화까지 길게 이어서 보면 한국 현대사에 남긴 후폭풍은 묘하게 컸다.

재판과 최후

문세광은 1974년 8월 24일 검찰에 송치됐고 9월 12일 내란목적살인과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같은 해 12월 1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으며 불과 3일 뒤인 12월 20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됐다.[19]

23번째 생일을 불과 6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앞서 적었듯 사형 직전 자신이 속았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만 최후진술의 정확한 문구는 전언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김기춘은 문세광이 자신이 바보였으며 조총련에 속아 과오를 범했고 박정희와 육영수에게 미안하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훗날 증언했다.[20]

결국 22살에 대통령을 죽여 세상을 바꾸겠다고 총을 들고 왔다가 대통령은 멀쩡히 살아남고, 아무 죄 없는 사람 둘이 죽고, 본인까지 넉 달 뒤 교수대에서 죽었다.

본인이 기대했던 영웅도 혁명도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