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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에볼라
본명Giulio Cesare Andrea Evola
사망일1974년 6월 11일
국적이탈리아
출생지이탈리아 로마
직업철학자, 작가, 화가, 밀교 사상가
분야철학, 전통주의, 밀교, 정치사상
사망지이탈리아 로마
사상전통주의, 마술적 이상주의
영향프리드리히 니체, 르네 게농
원어명Julius Evola
출생일1898년 5월 19일

율리우스 에볼라(Julius Evola, 본명 Giulio Cesare Andrea Evola, 1898년 5월 19일 ~ 1974년 6월 11일)는 이탈리아의 철학자·작가·화가·밀교 사상가이다. 초기에는 미래주의와 다다이즘 계열의 예술가로 활동했으나 이후 서양 밀교와 동양 종교, 프리드리히 니체, 르네 게농 등의 영향을 결합해 독자적인 전통주의(Traditionalism) 사상을 발전시켰다.[1]

그가 말한 전통은 단순히 옛날의 관습을 지키자는 보수주의가 아니었다. 에볼라는 고대의 여러 문명 배후에 초역사적인 영적 질서와 위계가 존재했다고 보았으며, 근대의 민주주의·평등주의·자유주의·물질주의와 대중사회를 그러한 질서가 붕괴한 결과로 해석했다. 대표작 《현대세계에 대한 반란》(Rivolta contro il mondo moderno, 1934)에서 이러한 역사관을 체계적으로 전개했다.[2]

정치적으로는 이탈리아 파시즘 및 나치 독일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국가 파시스트당에 가입한 적은 없었고 무솔리니의 실제 체제가 자신이 원하는 귀족적·제국적·영적 질서에 충분히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지만, 동시에 파시스트 언론에 지속적으로 기고했고 인종주의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독일에서는 SS 관계자들과 접촉했다. 학계에서는 그를 파시즘과 전후 네오파시즘 및 급진우파의 사상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다룬다.[1][3]

칼 슈미트와도 전후 편지를 주고받았다. 둘 다 자유주의적 근대질서에 비판적인 우파 사상사에서 자주 함께 언급되지만, 슈미트가 국가·법·주권과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분석한 법학자였다면 에볼라는 형이상학과 밀교, 고대적 위계를 중심으로 세계 전체를 해석한 인물이라는 차이가 크다.

칼 슈미트가 “정치란 무엇인가”를 파고들었다면, 에볼라는 아예 “근대세계 자체가 잘못된 거 아니냐”까지 간 셈이다.

생애

초기 생애

에볼라는 1898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줄리오 체사레 안드레아 에볼라(Giulio Cesare Andrea Evola)였다.

가톨릭계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청소년기에는 수학과 기술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로마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지만 학위는 취득하지 않았다. 본인은 나중에 학위라는 제도 자체에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았다고 설명했다.[1]

젊은 시절에는 오스카 와일드,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프리드리히 니체, 막스 슈티르너 등의 저작을 읽었으며, 특히 개인의 자기극복과 영웅주의, 기존 가치에 대한 반항에 관심을 가졌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시기에는 예술활동을 시작했다.

미래주의와 다다이즘

에볼라가 처음부터 철학책만 쓰던 사람은 아니었다.

1910년대 후반에는 자코모 발라 등 이탈리아 미래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했고, 회화와 시를 제작했다. 이후 트리스탕 차라와 연락하면서 다다이즘에 참여했다.

1920년에는 차라에게 공식적으로 다다 운동에 참여한다는 뜻을 밝혔으며, 당시 회화에서는 추상적 형태와 정신적·신비주의적 이미지를 결합했다.[4][5]

당시 작품은 에볼라가 스스로 신비적 추상주의라고 부른 경향과 연결된다.

하지만 1920년대 초를 지나면서 예술 자체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다. 그는 다다이즘의 기존 질서 파괴를 예술영역에만 국한하지 않고, 인간의 의식과 정신을 변화시키는 문제로 확장하려 했다.

화가로 시작했는데 그림 때려치우고 오컬트와 형이상학으로 직업 변경을 해버렸다.

오컬트와 마술적 이상주의

1920년대 에볼라는 서양의 연금술, 헤르메스주의, 마술과 신비주의 및 힌두교, 불교, 탄트라 등 동양 종교에 관심을 집중했다.

1925년 《마술적 이상주의에 관한 논고》(Saggi sull'idealismo magico)를 발표하며 이른바 마술적 이상주의(idealismo magico)를 발전시켰다.

그에게서 '마술'은 단순한 주문이나 초자연적 묘기를 의미하지 않았다. 인간이 평범한 자아의 한계를 넘어 자신의 존재를 능동적으로 변화시키고 더 높은 정신적 상태에 도달하는 수행의 문제에 가까웠다.[2]

1927~1929년에는 여러 밀교 연구자들과 함께 우르 그룹(Gruppo di Ur)을 운영했다. 이들은 서양과 동양의 마술·연금술·요가 등의 전통을 연구하며 《Ur》와 《Krur》라는 잡지를 발행했다.[1]

이 시기에 형성된 밀교적 관심은 이후 그의 정치사상과도 결합됐다.

전통주의

르네 게농의 영향

에볼라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르네 게농을 빼놓기 어렵다.

게농을 중심으로 형성된 전통주의 학파에서 전통은 어느 특정 국가의 옛 풍습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대 여러 종교와 문명의 배후에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원초적 전통이 존재하며, 근대세계는 이 전통과의 연결을 상실했다는 것이 핵심적인 발상이다.[6]

게농은 힌두교와 수피즘 등 동양의 종교전통을 중요한 전통의 현존 형태로 보았으며, 현대사회를 영적 중심을 상실한 쇠퇴기의 문명으로 평가했다.

에볼라는 이러한 전통주의적 역사관을 받아들이면서도 니체의 자기극복, 전사적 귀족주의, 로마 제국과 정치적 위계에 대한 관심을 결합했다.

따라서 에볼라의 전통주의는 게농의 사상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독자적으로 정치화된 형태였다.

현대세계에 대한 반란

1934년 출간된 《현대세계에 대한 반란》은 에볼라의 가장 유명한 저서다.

에볼라는 고대의 이상적 문명에서는 정치권력과 종교적·영적 권위가 결합돼 있었고, 사회는 질적인 차이에 따라 위계적으로 구성됐다고 주장했다.

반면 근대는 이러한 위계가 계속 뒤집혀온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의 설명에서는 대략

신성한 왕권 → 전사귀족 → 상업적 부르주아 → 대중사회

의 순서로 정치적·사회적 권력이 아래로 이동한다.

이를 진보가 아니라 퇴보로 보았다는 것이 핵심이다.[1]

민주주의와 보통선거, 개인주의와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서로 정반대의 사상으로 보지 않고 모두 전통적 위계가 붕괴하면서 나타난 서로 다른 형태의 현대성으로 해석했다.

남들은 왕정→민주주의를 발전이라고 보는데 에볼라는 반대로 “계속 망하고 있는 거임”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에볼라 자신의 철학적·역사관이며, 현대 역사학의 일반적인 시대구분이나 실증적 사회발전 이론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칼리 유가

에볼라와 게농 계열의 전통주의에서는 힌두교의 시간관에서 가져온 칼리 유가(Kali Yuga)라는 개념도 중요하다.

전통주의자들은 인류의 역사가 직선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완전한 시대에서 점차 쇠퇴하는 순환구조를 가진다고 해석했다.

현재의 현대문명은 이 가운데 가장 어두운 마지막 시대에 해당한다고 보았다.[6]

에볼라에게 물질주의와 대중정치, 경제 중심의 가치관, 전통적 권위의 해체는 이러한 쇠퇴의 증거였다.

이 때문에 그의 사상에서 근대화는 거의 긍정적인 의미로 등장하지 않는다.

정치사상

위계와 귀족주의

에볼라는 인간이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그는 전통사회가 서로 다른 정신적 능력과 역할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뛰어난 자질을 가진 소수의 엘리트가 사회의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

이런 엘리트는 단순히 돈이 많은 상류층을 뜻하지 않는다. 에볼라가 이상화한 엘리트는 자기통제와 전사적 윤리, 정신적 권위와 초월적 가치에 의해 구별되는 귀족적 인간형이었다.

그래서 자본가가 사회를 지배하는 현대 자본주의 역시 그가 생각한 전통적 귀족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도 평등주의와 물질주의의 형태라고 비판했다.

국가보다 위에 있는 전통

에볼라는 강력한 국가 자체를 최종 목표로 보지 않았다.

국가는 초월적인 전통적 질서를 현실세계에서 구현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국가와 정치질서 그 자체를 분석한 칼 슈미트와 비교하면 차이가 뚜렷하다.

슈미트의 핵심 관심이 주권과 예외상태, 국가와 법질서, 친구와 적의 구별 등에 있었다면 에볼라에게 정치질서는 더 높은 영적·형이상학적 위계 아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에볼라는 현대의 대중적 민족주의에도 비판적인 경우가 있었다. 민족이나 인종의 단순한 생물학적·집단적 동일성이 정신적인 귀족성을 대신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파시즘과의 관계

파시스트였는가?

에볼라와 이탈리아 파시즘의 관계는 단순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Treccani 철학사전은 그의 파시즘 수용을 이념적인 것으로 설명하면서도 에볼라가 국가 파시스트당에는 가입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2]

1920년대 에볼라는 당시 무솔리니 체제에 비판적인 글도 썼다.

그가 보기에는 파시즘이 대중운동과 민족주의에 지나치게 의존했으며, 가톨릭교회 및 기존 사회세력과 타협하고 있었다.

1928년 《이교 제국주의》(Imperialismo pagano)에서는 파시즘이 고대 로마의 제국적·이교적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에도 강하게 반대했다.[1]

이는 당시 라테라노 조약을 추진하고 있던 무솔리니 정권의 실제 노선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즉 에볼라는

“파시즘 좋음” → 끝

이 아니라

“지금 파시즘도 내가 원하는 전통적 제국에는 한참 부족함”

이라는 위치에 더 가까웠다.

그렇다고 그를 반파시스트로 분류하는 것도 부정확하다.

1930년대 이후 파시스트 언론과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로베르토 파리나치가 발행한 《Il Regime Fascista》에서 1934년부터 1943년까지 문화·사상면인 Diorama filosofico를 담당했다. 《Il Popolo d'Italia》와 《La Difesa della razza》 등에도 글을 기고했다.[1]

따라서 파시스트당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파시즘 및 파시스트 국가의 정치·인종 담론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모두 함께 봐야 한다.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정신적 인종주의

에볼라는 1930년대 후반부터 인종문제를 자신의 정치사상에서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다만 독일 나치즘의 일부 이론처럼 인종을 혈액이나 두개골 측정 등의 생물학적 요소만으로 설명하는 방식에는 비판적이었다.

그는 인간의 인종에는

  • 육체의 인종
  • 성격·영혼의 인종
  • 정신의 인종

과 같은 여러 차원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흔히 정신적 인종주의(spiritual racism)라고 부른다.[7]

그러나 생물학적 결정론과 차이가 있었다고 해서 인종적 위계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에볼라는 이른바 아리아-로마적 인간형을 우월한 정신적 유형으로 설정했고, 인종적·정신적 위계를 정치질서와 연결했다. 역사학자 피터 스타우덴마이어는 그의 인종이론을 이탈리아 파시즘과 나치 독일의 인종사상을 연결하려는 시도 가운데 하나로 분석한다.[7]

1941년에는 《인종교리의 종합》(Sintesi di dottrina della razza)을 출간했고, 이 저서는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1]

반유대주의

에볼라의 저술에는 반유대주의 역시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는 유대교와 유대인을 근대의 자본주의·자유주의·합리주의 및 전통질서 해체와 연결하는 주장을 펼쳤다.[2]

1938년에는 반유대주의 위조문서인 《시온 의정서》의 이탈리아어 판본에 서문을 작성하기도 했다.[8]

《시온 의정서》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비밀회의를 열었다는 내용을 주장한 문서지만 실제로는 조작된 반유대주의 선전물이다. 이미 1920년대부터 표절과 위조 사실이 폭로됐으며 현대 역사학에서는 위조문서라는 점이 확립되어 있다.[9]

따라서 에볼라의 인종주의를 단순히

“생물학적 인종주의는 아니었으니 나치와 달랐다.”

정도로 끝내면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게 된다. 실제로 그는 인종적·정신적 위계를 옹호했고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인종정책 논쟁과 반유대주의 출판활동에도 직접 참여했다.

나치 독일과의 관계

1930년대 중반 이후 에볼라는 독일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독일어권의 보수혁명 계열 사상가들과 교류했고 오스발트 슈펭글러, 에른스트 윙어, 칼 슈미트 등이 속한 독일 보수주의·반자유주의 사상계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Treccani에 따르면 그는 하인리히 힘러와 접촉했으며 SS 관련 집단에서 강연하기도 했다.[1]

그러나 에볼라와 나치즘의 관계도 일방적인 찬양관계는 아니었다.

그는 나치즘의 대중적 민족주의와 생물학 중심의 인종관을 비판했고, 독일의 일부 나치 기관 역시 에볼라의 초국가적이고 귀족주의적인 제국구상을 현실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았다. 연구자들은 그의 인종론이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스트·나치 관료 사이에서도 논쟁을 일으켰다고 지적한다.[7]

즉

나치와 접촉했다 = 나치의 모든 이론에 동의했다

도 아니고,

나치의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비판했다 = 나치즘과 관계가 없었다

도 아니다.

에볼라는 SS와 인종문제를 놓고 교류하면서도 자신만의 영적·귀족적 인종주의와 제국론을 더 높은 원칙으로 내세웠다.

제2차 세계 대전

1943년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이 무너진 뒤 에볼라는 독일로 이동했다.

이후 이탈리아 북부에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이 만들어지자 해당 지역을 거쳐 활동했으며, 다시 빈으로 이동했다. Treccani에 따르면 빈에서는 SS의 요청을 받아 독일이 압수한 프리메이슨 관련 문서를 조사하는 일에도 참여했다.[10]

1945년 4월 빈이 공습을 받던 중 폭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척수가 손상되면서 두 다리에 마비가 남았고 이후 평생 보행에 심각한 장애를 겪었다.[2]

그는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1948년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전후 활동

네오파시즘과 영향

전후의 에볼라는 직접 정당정치에 적극 참여하기보다는 저술과 출판활동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의 저서들은 이탈리아 사회운동(MSI) 내부와 그 주변의 젊은 급진우파 세력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50년 《Orientamenti》, 1953년 《폐허 속의 인간들》(Gli uomini e le rovine)을 통해 전후 우파 청년들에게 새로운 행동원칙과 엘리트주의적 정치관을 제시했다.

정치사 연구자 엘리사베타 카시나 볼프는 에볼라가 공개적으로는 아폴리티아(apolitìa), 즉 기존 정치세계와의 정신적인 거리두기를 강조했지만 실제로 그의 저술은 전후 이탈리아 네오파시스트 청년들에게 중요한 사상적 자원이 되었다고 분석한다.[3]

1960~70년대에는 오르디네 누오보 등 이탈리아 급진우파 세력에서도 그의 저작이 널리 읽혔다. 이후 프랑스의 누벨 드루아트와 유럽의 여러 급진우파·전통주의 집단에서도 에볼라가 반복해서 언급됐다.[11]

다만 전후 극우의 여러 조직이 에볼라의 사상을 동일하게 해석하거나 그대로 실천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영향의 정도와 네오파시즘과의 관계를 어떻게 분류할지는 연구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12]

1951년 재판

1950년 에볼라는 이탈리아의 네오파시스트 지하조직 혁명행동파(Fasci di Azione Rivoluzionaria, FAR) 사건과 관련해 체포됐다.

검찰은 그가 파시즘을 찬양하고 젊은 극우 활동가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1951년 재판에서 에볼라는 폭력사건의 직접적인 조직·지휘와 관련된 혐의를 부인했다.

결국 법원은 그를 해당 범죄사실과 연결할 충분한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1]

중요한 것은

“에볼라의 책을 읽은 극우단체가 있었다”

와

“에볼라가 그 단체의 테러를 직접 지휘했다”

는 서로 다른 주장이라는 점이다.

전자는 전후 이탈리아 우파사상사에서 확인되지만, 후자의 혐의는 1951년 재판에서 유죄로 인정되지 않았다.

칼 슈미트와의 관계

칼 슈미트와 에볼라는 전간기와 전후 유럽의 반자유주의 우파 사상사를 살펴볼 때 종종 함께 등장한다.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근대 자유주의 질서와 의회주의, 보편적인 개인주의를 비판했으며 도노소 코르테스, 에른스트 윙어와 독일 보수혁명계 사상가들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두 사람 사이에는 개인적인 연락도 존재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등록된 두 사람의 서신자료에 따르면 슈미트의 개인문서에는 1951~1963년 에볼라가 슈미트에게 보낸 독일어 편지 8통이 남아 있다.[13]

에볼라는 특히 슈미트가 스페인의 가톨릭 반혁명 사상가 도노소 코르테스에 관해 쓴 저서를 이탈리아어로 번역·출판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두 사람이 베를린에서 만나 식사를 한 기록도 전해진다.

다만 에볼라와 슈미트를 하나의 학파나 긴밀한 공동연구자로 보는 것은 과장이다.

보존된 자료는 주로 에볼라가 슈미트에게 보낸 편지이고 슈미트의 답장은 남아 있지 않으며,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서지해설도 슈미트가 에볼라 자신의 저작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설명한다.[13]

사상적으로도 차이가 컸다.

칼 슈미트 율리우스 에볼라
주요 분야 법학·국가론·정치철학 형이상학·밀교·종교·정치사상
핵심 문제 주권, 예외상태, 정치적인 것, 국제질서 전통, 영적 위계, 근대의 쇠퇴, 귀족적 인간형
근대 자유주의 비판적 비판적
국가 정치적 질서의 핵심 문제 더 높은 전통적·영적 질서의 수단
종교·밀교 정치신학과 가톨릭적 정치사상에 관심 동서양 밀교·힌두교·불교·연금술 등을 폭넓게 결합

그래서 칼 슈미트에서 에볼라로 넘어오면 같은 반자유주의 우파사상 안에서도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진다.

슈미트 읽다가 에볼라로 넘어오면 법학책 보다가 갑자기 연금술·탄트라·아리아 전사귀족이 튀어나온다.

주요 저서

연도 저서 주요 내용
1925 《마술적 이상주의에 관한 논고》 에볼라 초기의 마술적 이상주의
1928 《이교 제국주의》 로마적·이교적 제국질서와 파시즘 비판
1930 《헤르메스적 전통》 연금술과 헤르메스주의의 상징적·영적 해석
1934 《현대세계에 대한 반란》 전통과 근대의 대립, 문명의 쇠퇴론
1937 《피의 신화》 당시 유럽의 인종이론에 대한 논의
1941 《인종교리의 종합》 육체·영혼·정신을 결합한 인종주의 이론
1943 《각성의 교리》 초기 불교 수행론에 대한 전통주의적 해석
1953 《폐허 속의 인간들》 전후 정치질서와 우파 엘리트론
1958 《성의 형이상학》 성과 에로스를 형이상학적으로 해석
1961 《호랑이 타기》 현대사회를 변화시키기 어렵다는 전제 아래 개인의 내적 태도를 논함

《호랑이 타기》(Cavalcare la tigre)에서 에볼라는 근대의 쇠퇴를 정치적으로 즉시 되돌릴 가능성에 이전보다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대신 현대세계 속에서 그 가치에 휩쓸리지 않고 내적인 독립성을 유지하는 이른바 차별화된 인간의 태도를 강조했다.[3]

연구상의 쟁점

에볼라를 어느 범주에 넣을 것인지는 연구자마다 표현이 조금씩 다르다.

그를

  • 전통주의자
  • 밀교사상가
  • 급진우파 사상가
  • 파시스트 지식인
  • 네오파시즘의 사상적 영향원

등으로 부르는 연구가 존재한다.

이 차이가 생기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에볼라가 실제 파시즘 체제와 거리를 두면서도 동시에 파시스트와 나치 기관·언론에 적극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 파시스트당의 당원이 아니었고 무솔리니 체제를 여러 차례 비판했다. 그러나 그 비판은 민주주의나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파시즘이 자신이 원하는 전통적·귀족적 질서에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다는 방향에서 나온 경우가 많았다.[1]

마찬가지로 나치 독일의 생물학적 인종론을 비판했지만 인종주의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며, 별도의 정신적 인종주의와 아리아적 위계를 발전시켰다.[7]

따라서

“파시즘을 비판했다 → 반파시스트”

또는

“나치 인종론을 비판했다 → 반인종주의자”

라는 식으로 정리하면 그의 실제 입장을 설명하기 어렵다.

반대로 에볼라의 모든 사상과 저술을 단순히 무솔리니 또는 히틀러의 공식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도 그의 독자적인 전통주의와 파시스트·나치 당국과의 충돌을 설명하지 못한다.

말년과 죽음

전후 에볼라는 로마에서 생활하며 기존 저작을 다시 출판하고 새로운 책과 논문을 계속 집필했다.

휠체어를 사용하면서도 여러 잡지와 우파 출판물에 기고했으며, 젊은 독자와 활동가들이 자택을 찾아와 그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1974년 6월 11일 로마에서 76세로 사망했다.

Treccani에 따르면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됐으며 유골은 알프스의 몬테로사에 안치됐다.[14]

여담

  • 본명은 Giulio Cesare Andrea Evola다.
  • 1898년 로마에서 태어나 1974년 같은 도시에서 사망했다.
  • 대학에서는 공학을 공부했지만 학위를 받지 않았다.
  • 젊은 시절에는 실제로 화가였다.
  • 다다이즘에 참여했으며 트리스탕 차라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 뉴욕 현대미술관의 다다 관련 전시에도 그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4]
  • 이후 그림보다 철학·밀교·종교연구에 집중했다.
  • 니체와 르네 게농 모두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두 사람의 사상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 서양의 연금술과 헤르메스주의뿐 아니라 힌두교, 불교, 탄트라와 도교 등에도 관심을 가졌다.
  • 에볼라가 말하는 전통은 “옛날 것이 좋다”는 일반적인 전통주의와 의미가 다르다. 고대 여러 문명의 배후에 존재한다고 믿은 초월적인 영적 원리를 뜻한다.
  • 민주주의·자유주의·공산주의뿐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역시 전통질서의 붕괴와 연결해 비판했다.
  • 국가 파시스트당에 가입한 적은 없다.
  • 그렇다고 파시즘과 무관했던 것도 아니며 파시스트 언론과 인종정책 논쟁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 1930년대에는 독일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SS 관계자들과 접촉했다.
  • 나치의 생물학적 인종론을 비판했지만 별도의 정신적 인종주의를 주장했다.
  • 1938년 반유대주의 위조문서 《시온 의정서》의 이탈리아판에 서문을 썼다.
  • 1941년 《인종교리의 종합》을 발표했다.
  • 1945년 빈 공습으로 척수를 다쳐 이후 두 다리에 마비가 남았다.
  • 1951년 극우 지하조직 FAR 관련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지만 범죄행위를 지휘했다는 혐의는 인정되지 않아 무죄를 선고받았다.
  • 전후에는 이탈리아의 젊은 네오파시스트와 급진우파에게 상당한 사상적 영향을 미쳤다.
  • 칼 슈미트에게 1951~1963년 사이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다.
  • 프랑스 국립도서관 자료에는 현재 슈미트 문서고에 에볼라의 편지 8통이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13]
  • 에볼라는 슈미트의 도노소 코르테스 관련 저서를 이탈리아에 번역·소개하려고 했다.
  • 둘이 같은 사상가 그룹의 공동지도자였던 것은 아니다. 슈미트는 법학·국가론, 에볼라는 형이상학·전통주의가 핵심이었다.
  • 에른스트 윙어와 오스발트 슈펭글러 같은 독일 보수혁명계 인물의 저작도 이탈리아에 소개했다.
  • 인생의 흐름만 보면 화가 → 다다이스트 → 오컬트 연구자 → 전통주의 철학자 → 인종이론가 → 전후 급진우파의 사상적 참고인물로 장르 변화가 상당히 심하다.
  • 저작의 정치적 내용 때문에 논쟁이 많지만 밀교·비교종교·현대성 비판과 관련해서도 계속 연구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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