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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줍잖게 깝치다가는 싸구려 칠레산 홍어를 처먹게 될 것입니다.
주의! 이 글은 자ㅡ랑스러운 헬조선의 현실을 다룹니다. 이런 것들과 살아가는 당신에게 탈조선을 권합니다.
“

장세동: 광주 사태는 진주민란이나 홍경래의 난과 비슷한 사건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김재춘(前 중앙정보부장): 무슨 그따위 얘기를 아직도 하고 있는 거요.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가. 당신네들이 총칼 들고 정권 잡아가지고 저지른 짓을 무슨 홍경래 반란이라고?[1]

”

장세동(張世東, 1936년 9월 27일~)은 대한민국의 전 군인·정치인으로, 제5대 대통령경호실장과 제13대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지냈다.

육군사관학교 16기 출신으로 전두환의 핵심 측근이었고, 제5공화국 말기에는 사실상 5공 2인자까지 올라갔던 인간이다.

의리의 아이콘으로 엔두쿤의 심복.

전두환에게는 정말 끝까지 의리를 지켰는데, 문제는 그 의리의 대상이 전두환이었다.

군 경력과 12·12

육사16기로, 12.12쿠데타 당시 수경사 30경비단장으로 계급은 대령.

당시 장세동이 지휘하던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은 서울 종로구 경복궁 안에 있었고,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 측 지휘부가 모여 쿠데타를 지휘한 사실상 상황실 역할을 했다.

전두환, 노태우, 허화평, 허삼수, 장세동 등을 비롯한 신군부 핵심 인사들이 이곳에 집결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강제연행과 이후 병력 동원 상황을 지휘했다.

장세동은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소장의 지휘계통에 있었지만 전두환 측에 가담했다.

대한민국의 참 된 군인 장태완 소장을 배신한 배신자.

장태완은 신군부가 정승화를 불법 연행한 사실을 알고 병력을 동원해 반란군을 진압하려 했으나 이미 수경사 내부에도 장세동을 비롯한 신군부 측 인맥이 깊숙하게 들어가 있었고 결국 지휘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이후 1996년 12·12 및 5·18 사건 1심에서 장세동은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2]

즉 12·12를 그냥 "당시 군 내부의 갈등" 정도로 보는 게 아니라 법원에서도 군사반란으로 판단했고 장세동 역시 유죄판결을 받은 당사자다.

전두환 정권

12·12 이후 승승장구했다.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장세동은 준장을 거쳐 소장으로 진급했고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에서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등을 거쳐 결국 대통령경호실장까지 올라갔다.

이후 중장으로 전역하고 낙지가 쓰리 허 견제를 위해 경호실장으로 임명, 노신영이 물러나고 그 후임 안기부장으로 임명된다.

정확히는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대통령경호실장, 1985년부터 1987년까지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지냈다.

전두환의 측근 가운데 허화평·허삼수·허문도 이른바 쓰리 허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전두환이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장세동을 더 중용했다는 해석이 많다.

장세동은 전두환을 경호하는 방식이 거의 전설적인 수준이었다.

그가 만든 것으로 유명한 말이 심기 경호다.

대통령의 신체만 보호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의 기분까지 경호해야 한다는 개념이었다.

전두환이 산책하다 돌부리에 걸려 기분 나빠질까봐 산책로를 정비시키고, 대통령이 관심을 가진 프로야구 경기 일정이나 각종 사소한 정보를 기록한 큰 수첩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는 일화도 유명하다.[3]

그 정도로 전두환을 열심히 모셨다.

국가보다 전두환 심기가 더 중요했던 것 같다.

1985년에는 노신영의 뒤를 이어 국가안전기획부장이 됐다.

안기부장 시절에는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용팔이 사건, 언론 통제, 평화의 댐 논란 등 제5공화국 말기의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정권이 크게 흔들리면서 결국 안기부장 자리에서 물러났다.[4]

평화의 댐

평화의 댐도 이때 기획했다.

1986년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하자 전두환 정권은 북한이 댐을 터뜨릴 경우 서울이 물바다가 될 수 있다며 대대적인 국민 성금 모금과 평화의 댐 건설을 추진했다.

당시에는 북한이 수십억 톤의 물을 일시에 방류하면 서울 일부가 수몰될 수 있다는 식의 극단적인 시나리오까지 방송을 통해 반복적으로 홍보됐다.

1993년 감사원 조사에서는 당시 안기부가 정보판단과 대응댐 건설 결정을 주도했다는 정황이 확인됐으며,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 조사까지 검토됐다.[5]

다만 북한의 금강산댐 자체가 가짜였던 것은 아니다.

북한은 실제로 임남댐을 건설했고 이후 댐 안전 문제가 다시 제기되면서 평화의 댐 역시 2000년대에 추가 증축됐다. 따라서 북한 댐의 위험 자체는 실재했지만 당시 정부가 위협 규모를 과장해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쪽이 더 정확하다.[6]

수지 김 피살사건

수지 김 피살사건의 흑막이다.

이건 장세동 커리어에서 12·12 다음으로 존나 악질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다.

1987년 홍콩에 살던 윤태식이 아내 김옥분, 즉 수지 김을 살해한 뒤 북한으로 도망가려다 실패했다.

윤태식은 이후 "북한 공작원인 아내가 자신을 납북하려 했다가 자신이 탈출했다"는 거짓 이야기를 만들었다.

당시 안기부는 이를 북한 공작원의 납북미수 사건으로 대대적으로 발표했고 윤태식의 해외 기자회견까지 주선했다.

그런데 문제는 안기부가 진실을 몰랐던 게 아니다.

윤태식은 1987년 1월 9일 서울에 들어온 뒤 안기부 조사에서 자기가 수지 김을 죽였고 아내는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고 자백했다.

안기부는 사건 초기에 이미 살인사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7]

그런데 그대로 덮었다.

국가의 정권유지를 위해서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았고 죄가 없는 걸 알면서 피해자의 가족들에게까지 간첩 가족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안기부는 홍콩 경찰이 윤태식에 대한 수사 협조를 요청했는데도 대공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협조하지 않았고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막았다.[8]

수지 김은 결국 살해된 피해자인데도 14년 동안 북한 공작원으로 남았다.

피해자 가족들도 간첩 가족 취급을 받으며 감시와 조사, 사회적 불이익을 겪었다.

장세동 본인도 2002년 인터뷰에서 당시 안기부가 1월 9일 윤태식으로부터 살해 자백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윤태식을 검찰에 넘기려 했지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김만철 일가 귀순, 4·13 호헌조치, 대선 준비 등 여러 사건 때문에 미뤘다고 주장했다.[9]

그런데 사람 하나 죽이고 간첩으로 조작된 사건을 바빠서 검찰 송치 못했습니다 수준으로 설명하니 당연히 욕을 쳐먹었다.

2001년 검찰 수사에서는 당시 안기부가 사건의 실체를 알고도 조직의 위상과 정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고의로 은폐·왜곡했다고 판단했다.[10]

장세동 역시 은폐·조작 책임자로 수사 대상이 됐지만 공소시효 문제 때문에 형사처벌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시민단체들은 공소시효가 끝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장세동을 형사고발하기도 했다.[11]

그러니까 단순히 수지 김이 간첩인 줄 착각했다가 아니다.

살인사건인 걸 알고 있었는데도 이미 만들어놓은 간첩 프레임을 유지하기 위해 그대로 묻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정치 활동과 평가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5공 청산 과정에서 여러 차례 수사와 재판을 받았다.

1988년 국회 5공 청문회에도 출석했는데 전두환에게 불리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입을 존나게 닫았다.

이 때문에 역설적으로 의리의 돌쇠라는 별명을 얻었다.

5공 비리와 용팔이 사건, 12·12 관련 사건 등으로 여러 차례 구속과 수감을 반복했다.[12]

2002년 대통령 선거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전낙지가 지원을 안 해줘서 지지율이 전낙지 머리카락이 되어버려서 깨갱했다.

정확히는 2002년 10월 21일 무소속으로 제16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13]

전두환에게 먼저 찾아가 출마 의사를 밝혔는데 전두환이 나가지 마라. 이런 상황에서 되겠느냐는 취지로 직접 말렸다고 한다.[14]

그런데도 나갔다.

당시 지지율은 2%도 안 되는 군소후보 수준이었다.

장세동은 낮은 지지율 때문에 주요 후보 TV토론 참가 기준인 5%도 충족하지 못하자 모든 후보에게 토론기회를 달라며 가처분 신청까지 냈다.[15]

결국 투표 하루 전인 2002년 12월 18일 후보직을 사퇴했다.[16]

덕분에 후보등록 때 낸 기탁금 5억원도 못 돌려받았다.[17]

전두환 말 들었으면 5억은 아꼈다.

2004년에는 제17대 총선에서도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3위로 낙선했다.

이후에는 사실상 정치 일선에서 사라졌다.

전두환과의 관계

그래도 전땅크를 향한 의리 하나 만큼은 인정해줘야 한다.

장세동은 5공 청문회와 이후 각종 수사 과정에서도 전두환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의 하지 않았고, 전두환 퇴임 이후에도 연희동 자택을 꾸준히 찾아간 대표적인 측근이었다.

2019년 인터뷰에서도 전두환을 두고 자신은 그분을 모시는 데 정성을 다했고 전두환은 그 정성을 사랑으로 돌려줬다는 취지로 말할 정도였다.[18]

문어가 90세의 나이로 사망했을때도 제일먼저 달려와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2021년 11월 23일 전두환이 사망하자 장세동은 그날 아침 연희동 자택을 찾아갔고 이후 빈소에도 일찍 도착해 밤늦게까지 자리를 지켰다.[19]

기자들이 5·18 당시 발포 책임이나 전두환의 사죄 문제를 물었지만 대부분 답하지 않았다.[20]

끝까지 충성했다.

5·18에 대한 인식

장세동은 5·18을 두고도 오랫동안 신군부 측의 시각을 유지했다.

1990년대 국회 증언 과정에서 5·18을 진주민란이나 홍경래의 난과 비슷한 사건으로 비유했고 이에 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이 공개적으로 강하게 반박한 것이 문서 상단의 일화다.

하지만 이후 법원은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무력진압 과정에서 신군부의 불법행위와 내란 관련 책임을 인정했다.[21]

그러니까 장세동이 말한 홍경래의 난 비슷한 거임이라는 설명은 대한민국 법원의 최종 판단과도 존나게 거리가 멀다.

여담

놀랍게도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고향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나.

당시 하나회 핵심이 영남 출신 군인들 중심으로 구성돼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호남 출신 장세동이 전두환 최측근까지 올라간 것은 상당히 특이한 사례다.[22]

  • 1936년생으로 육사 16기다.
  • 전두환과 육사 동기인 노태우보다 한 기수 아래다.
  • 12·12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장으로 신군부 지휘부의 핵심 거점인 30경비단을 제공했다.
  • 제5공화국 시절 대통령경호실장과 국가안전기획부장을 모두 지냈다.
  • 전두환 경호를 너무 열심히 해서 심기 경호라는 표현까지 유명해졌다.
  • 5공 말기에는 노태우와 함께 전두환 후계자로 거론될 정도로 권력이 강했다.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안기부장에서 물러났다.
  •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아 의리의 돌쇠라는 별명이 붙었다.
  • 12·12 군사반란과 관련해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 수지 김 사건 당시 안기부가 살인 사실을 알고도 사건을 북한 납치미수 사건으로 은폐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 2002년 전두환이 뜯어말리는데도 대통령 선거에 나갔다가 투표 하루 전에 사퇴했다.
  • 후보 사퇴 때문에 기탁금 5억원도 날렸다.
  • 2004년 총선에도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 전두환이 사망한 2021년까지도 관계를 유지했고 장례식장을 끝까지 지킨 측근 가운데 한 명이었다.

각주

  1.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10100020921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10-10&officeId=00020&pageNo=11&printNo=21966&publishType=00020
  2. ↑ 「12·12, 5·18 판결문」, 연합뉴스, 1996-08-26.
  3. ↑ 「'쓰리 허'와 장세동…5공 실세들의 현재는」, 연합뉴스, 2021-11-23.
  4. ↑ 「전두환 사망…5·18 사죄는커녕 측근들 침묵」, 연합뉴스, 2021-11-23.
  5. ↑ 「안기부 평화의 댐 감사…장세동·이학봉 소환 검토」, 조선일보, 1993-06-29.
  6. ↑ 「평화의댐건설」, 국가기록원.
  7. ↑ 「수지 김 사건 14년만에 베일 벗는 진실」, 동아일보, 2001-12-10.
  8. ↑ 「수지 김 사건 14년만에 베일 벗는 진실」, 동아일보, 2001-12-10.
  9. ↑ 「장세동씨 신동아에 15년만에 전모 털어놔」, 동아일보, 2002-01-17.
  10. ↑ 「수지 김 사건 14년만에 베일 벗는 진실」, 동아일보, 2001-12-10.
  11. ↑ 「'수지김 사건' 장세동씨 고발키로」, 조선일보, 2002-01-25.
  12. ↑ 「'쓰리 허'와 장세동…5공 실세들의 현재는」, 연합뉴스, 2021-11-23.
  13. ↑ 「장세동 前안기부장 21일 대선출마선언」, 동아일보, 2002-10-17.
  14. ↑ 「전두환씨 '장세동도 나이 드니 내 말 안들어'」, 동아일보, 2002-10-22.
  15. ↑ 「장세동 후보 'TV토론 기회달라' 가처분신청」, 조선일보, 2002-11-26.
  16. ↑ 「장세동씨 대통령후보직 사퇴」, 동아일보, 2002-12-18.
  17. ↑ 「장세동씨 기탁금 5억 못돌려받아」, 동아일보, 2002-12-18.
  18. ↑ 「'쓰리 허'와 장세동…5공 실세들의 현재는」, 연합뉴스, 2021-11-23.
  19. ↑ 「전두환 빈소…5공 실세 '묵묵부답'」, 연합뉴스, 2021-11-23.
  20. ↑ 「'5공 2인자' 장세동, 취재진에 '모른다' 일관」, 연합뉴스, 2021-11-23.
  21. ↑ 「12·12, 5·18 사건 대법원 판결문 요지」, 연합뉴스, 1997-04-17.
  22. ↑ 「'쓰리 허'와 장세동…5공 실세들의 현재는」, 연합뉴스, 2021-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