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 폴록 | |
| 생년월일 | 1912년 1월 28일 ~ 1956년 8월 11일 |
|---|---|
| 국적 | 미국 |
| 출생지 | 미국 와이오밍주 코디 |
| 학력 |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 |
| 직업 | 화가 |
| 활동기간 | 1930년대 ~ 1956년 |
| 장르 | 추상표현주의, 액션 페인팅 |
| 영문 | Jackson Pollock |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본명 Paul Jackson Pollock, 1912년 1월 28일 ~ 1956년 8월 11일)은 미국의 화가로, 추상표현주의와 액션 페인팅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1940년대 후반부터 대형 캔버스를 바닥에 펼쳐놓고 붓이나 막대기, 깡통 등을 이용해 페인트를 흘리고 붓고 튀기는 드립 페인팅(drip painting) 기법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1][2]
폴록의 그림은 처음 보면 아무 방향으로나 페인트를 뿌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제작과정은 생각보다 통제된 것이었다. 그는 캔버스 주변을 걸어다니면서 페인트의 점도와 붓는 높이, 움직임의 속도 등을 조절했고, 필요하면 여러 차례 작업을 중단했다가 다시 들어갔다. National Gallery of Art는 폴록이 자신의 작업에서 페인트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다고 직접 강조했다고 소개한다.[3]
대표작으로는 《Mural》, 《Number 1A, 1948》, 《Autumn Rhythm (Number 30)》, 《Number 1, 1950 (Lavender Mist)》, 《Blue Poles》 등이 있다. 폴록은 단순히 물감을 흘린 기법 하나로 유명한 화가가 아니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미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기도 하다.[1]
생애
어린 시절과 뉴욕
잭슨 폴록은 1912년 1월 28일 와이오밍주 코디에서 태어났다. 다섯 형제 중 막내였으며 어린 시절 가족을 따라 애리조나주와 캘리포니아주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성장했다.[1]
1920년대 후반 로스앤젤레스의 Manual Arts High School에서 미술을 공부했지만 학교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후 1930년 형 찰스 폴록을 따라 뉴욕으로 이동해 Art Students League에서 미국 지역주의 화가 토머스 하트 벤턴에게 배웠다.[1]
벤턴은 당시 유럽 모더니즘에 비판적이었고 미국의 농촌과 노동자, 역사적 장면을 강한 리듬감으로 묘사하는 화가였다. 폴록은 나중에 완전히 추상적인 그림으로 넘어갔지만, 화면 전체를 휘감는 벤턴의 곡선과 운동감은 이후 작품에서도 어느 정도 흔적을 남겼다.
1930년대 폴록은 미국 연방정부의 예술지원사업인 Federal Art Project에도 참여했다. 대공황 시기 예술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프로그램이었으며, 폴록은 이 기간에도 꾸준히 그림을 제작했다.[1]
멕시코 벽화와 초기 영향
폴록의 초기 작업에는 멕시코 벽화운동의 영향도 강했다. 특히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가 1936년 뉴욕에서 운영한 Experimental Workshop에 참여하면서 기존의 붓질과 다른 재료 사용법을 접했다.[3]
시케이로스의 작업실에서는 산업용 페인트와 스프레이, 붓기, 흘리기 등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실험적인 방법이 사용됐다. 훗날 폴록의 드립 페인팅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발명은 아니며, 이런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나온 결과라고 보는 편이 맞다.
디에고 리베라, 시케이로스 같은 멕시코 벽화가들의 거대한 화면 역시 폴록에게 영향을 줬다. 이후 폴록 작품이 점점 커지고 관람자의 시야 전체를 뒤덮는 규모로 발전한 데에도 이런 배경이 있었다.[1]
이 시기 폴록은 파블로 피카소, 호안 미로 등의 유럽 현대미술과 북미 원주민의 모래그림, 신화적 이미지 등에도 관심을 가졌다. 초기 작품에는 인간이나 동물을 연상시키는 형태와 상징이 많이 등장하며 후기 드립 페인팅처럼 완전히 비구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페기 구겐하임과 Mural
폴록의 경력에서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미술수집가이자 갤러리스트 페기 구겐하임이다. 구겐하임은 1940년대 뉴욕의 Art of This Century Gallery를 통해 폴록을 지원했고 1943년 첫 개인전을 열어줬다.[1]
같은 해 구겐하임은 자신의 뉴욕 집 벽에 설치할 대형 작품을 폴록에게 의뢰했다. 이 작품이 《Mural》이다. 작품은 약 2.4m 높이에 6m가 넘는 거대한 캔버스로 제작됐으며, 폴록이 이후 대형 추상작품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4]
원래는 집 벽에 직접 그릴 예정이었지만 마르셀 뒤샹의 조언으로 이동 가능한 캔버스에 제작됐다. 덕분에 작품은 나중에 다른 장소로 옮길 수 있었고, 구겐하임은 훗날 이 작품을 아이오와 대학교에 기증했다.[5]
《Mural》은 아직 본격적인 드립 페인팅은 아니지만 화면 전체에 반복되는 수직 형태와 빠른 움직임이 퍼져 있어 후기 폴록으로 가는 과정이 상당히 잘 보인다.
리 크래스너와 롱아일랜드
1945년 폴록은 화가 리 크래스너와 결혼했다. 크래스너 역시 중요한 추상표현주의 화가였으며 폴록의 작업과 경력을 이해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1]
두 사람은 같은 해 뉴욕시를 떠나 롱아일랜드 동쪽의 Springs 지역으로 이주했다. 집 옆의 헛간이 폴록의 작업실이 됐는데 넓은 바닥을 사용할 수 있었던 이 공간은 이후 그의 작업방식을 크게 바꿨다.[3]
폴록은 캔버스를 이젤에 세우지 않고 바닥에 펼치기 시작했다. 캔버스 주변을 사방으로 걸어다니며 모든 방향에서 작업했고, 필요하면 캔버스 위로 직접 들어가기도 했다. 그림을 앞에서 바라보며 붓질하는 전통적인 화가와는 물리적으로 완전히 다른 작업방식이었다.
명성과 말년
1947년 무렵부터 폴록은 본격적인 드립 페인팅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1948년부터 1951년 사이에 가장 유명한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2]
1949년 《LIFE》지는 폴록을 소개하면서 그가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생존 화가일 수 있는지를 묻는 도발적인 제목을 사용했다. 이 기사는 폴록의 대중적 명성을 크게 높였고 그를 전후 미국미술의 스타로 만드는 데 영향을 줬다.[6]
1950년에는 사진가 한스 나무트가 폴록의 작업과정을 사진과 영화로 기록했다. 검은 옷을 입은 폴록이 바닥에 놓인 캔버스 주변을 이동하면서 페인트를 붓고 튀기는 모습은 이후 대중이 폴록을 기억하는 대표적인 이미지가 됐다.
그러나 1951년 이후 드립 페인팅에서 점차 벗어나면서 작품의 성격도 변했다. 검은색 에나멜을 주로 사용한 이른바 Black Pourings를 제작했고 이후 다시 부분적으로 형상적인 이미지가 등장했다.[1]
1950년대 중반에는 작품 제작량도 감소했다. 1956년 8월 11일 롱아일랜드 이스트햄프턴 인근에서 자신이 운전하던 자동차가 도로를 벗어나 충돌하는 사고로 사망했다. 향년 44세였다.[1]
작품세계
추상표현주의
잭슨 폴록은 마크 로스코, 윌럼 데 쿠닝, 바넷 뉴먼, 클리퍼드 스틸, 리 크래스너 등과 함께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분류된다.
추상표현주의는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뉴욕을 중심으로 발전한 미국 현대미술의 흐름으로, 대형 화면과 추상적 형태, 강한 몸짓이나 색면을 특징으로 한다.
다만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은 상당히 다르다. 로스코가 넓은 색면을 조용하게 겹쳐놓았다면 폴록은 캔버스 전체를 선과 물감의 움직임으로 뒤덮었다.
이런 차이 때문에 추상표현주의는 흔히 폴록·데 쿠닝 등의 액션 페인팅과 로스코·뉴먼 등의 색면회화로 나눠 설명되기도 한다.
드립 페인팅
폴록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드립 페인팅이다.
일반적인 회화에서는 캔버스를 이젤에 세운 뒤 붓으로 표면을 직접 칠한다. 폴록은 대형 캔버스를 바닥에 펼치고 액체 상태의 에나멜과 유성페인트 등을 위에서 흘리고 떨어뜨리고 튀겼다.[2]
도구 역시 붓만 사용하지 않았다. 막대기, 붓자루, 깡통 등 여러 도구를 사용했고 경우에 따라 페인트 통에서 직접 붓기도 했다. NGA는 폴록이 칠면조 요리에 사용하는 바스터 같은 도구까지 사용했다고 소개한다.[3]
이렇게 만들어진 선은 붓이 캔버스에 직접 닿아서 생기는 일반적인 붓자국과 다르다. 페인트는 중력과 속도에 따라 떨어지면서 길고 가느다란 선이나 굵은 얼룩을 만든다.
그렇다고 단순히 물감통 뒤집어놓고 운에 맡긴 것은 아니다. 폴록은 작업과정에서 선의 밀도와 색, 방향을 조절했고 여러 층을 반복해서 쌓았다. 결과적으로 화면 전체가 복잡한 선의 망으로 뒤덮이지만 자세히 보면 굵기와 색, 속도가 서로 다른 여러 층이 존재한다.
액션 페인팅
폴록의 작업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다.
이 용어는 미술평론가 해럴드 로젠버그가 1950년대 초 미국의 새로운 회화를 설명하면서 사용해 유명해졌다. 완성된 그림만큼이나 그림을 만드는 과정과 작가의 신체적인 행동을 중요하게 보는 개념이다.
폴록의 드립 페인팅은 액션 페인팅을 설명하기에 거의 교과서 같은 사례다. 캔버스에 남은 선 하나하나가 그가 팔을 움직이고 몸을 이동시킨 흔적이기 때문이다.[3]
전통적인 회화에서 작품은 작가가 어떤 대상을 묘사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지만 폴록 작품에서는 그림 자체가 제작행동의 기록처럼 보인다. 페인트가 어디서 떨어졌고 어느 방향으로 움직였는지가 화면에 그대로 남는다.
올오버 구성
폴록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올오버(all-over) 구성이다.
전통적인 회화에서는 화면 중앙에 주요 대상이 있고 주변부가 이를 보조하는 경우가 많다. 폴록의 대표적인 드립 페인팅에서는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거의 없다.
화면 전체에 비슷한 강도의 선과 색이 퍼져 있기 때문에 특정한 한 지점을 중심으로 보기 어렵다. 어디를 잘라내도 비슷한 밀도의 패턴이 계속 이어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올오버 구성은 이후 미국 추상미술에 큰 영향을 줬으며 폴록을 지지했던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도 이런 평면성과 화면 전체의 통일성을 중요하게 평가했다.
바닥에서 그리기
폴록이 캔버스를 바닥에 놓은 것은 단순히 큰 그림을 그리기 편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바닥에서 작업하면 캔버스 주변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고 네 방향 모두에서 접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Number 1, 1950 (Lavender Mist)》 역시 롱아일랜드 작업실 바닥에 캔버스를 펼쳐놓고 제작했다.[7]
이 방식에서는 위아래 방향도 작업 초기에는 고정되지 않을 수 있다. 그림이 벽에 걸리기 전까지는 어느 방향이 최종적인 위쪽인지 결정되지 않은 채 작업할 수 있었다.
또한 캔버스 주변뿐 아니라 내부까지 들어가 작업하면서 자신의 몸을 사실상 작품 제작도구의 일부로 사용했다.
숫자 제목
1940년대 후반부터 폴록은 작품 제목에 구체적인 이름 대신 숫자를 많이 사용했다.
《Number 1A, 1948》, 《Number 5, 1948》, 《Number 1, 1950》 같은 식이다.
MoMA에 따르면 리 크래스너는 숫자가 중립적이기 때문에 관람객이 제목에서 특정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대신 그림 자체를 보게 만든다고 설명했다.[8]
그림 제목이 《폭풍 속의 영혼》 같은 것이면 관람객이 억지로 폭풍이나 영혼을 찾으려 할 수 있지만 《Number 1》이라고 해놓으면 그런 힌트 자체를 없애버리는 셈이다.
다만 일부 작품에는 나중에 부제가 붙거나 제목이 변경되기도 했다. 《Number 1, 1950》은 이후 《Lavender Mist》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고 《Number 11, 1952》는 《Blue Poles》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9]
통제와 우연
폴록 그림은 우연과 통제가 동시에 작동한다.
페인트를 공중에서 떨어뜨리는 순간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모든 선을 연필처럼 정확하게 제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페인트의 양과 점도, 붓는 높이, 손의 속도, 이동방향을 조절하면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
폴록 역시 자신의 작업이 단순한 우연이나 혼돈이라는 해석에 반발했다. NGA는 폴록이 페인트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으며 사고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설명한다.[7]
그래서 폴록을 따라 물감 몇 통 바닥에 던졌는데 그림이 이상하게 나오면 폴록 작품이 사실 아무렇게나 만든 게 아니었다는 걸 매우 빠르게 체험할 수 있다.
주요 작품
Mural
《Mural》은 1943년 제작된 대형 회화로 폴록의 초기 대표작이자 후기 추상작업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작품이다.
페기 구겐하임이 자신의 맨해튼 주택을 위해 의뢰했으며 크기는 약 242×604cm에 달한다.[4]
작품 전체에는 검은색과 녹색, 노란색, 분홍색 등의 굽은 형태가 반복된다. 여전히 붓으로 그린 흔적이 강하고 후기 드립 페인팅과는 다르지만 화면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움직임으로 연결되는 특징이 이미 나타난다.
1951년 아이오와 대학교로 옮겨졌으며 현재 Stanley Museum of Art의 대표적인 소장품 가운데 하나다.[5]
Number 1A, 1948
《Number 1A, 1948》은 폴록의 전성기 드립 페인팅을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캔버스 위에는 검은색과 흰색, 회색, 갈색 계열의 선과 얼룩이 겹겹이 얽혀 있으며 일부 영역에는 폴록 자신의 손자국도 남아 있다.[8]
MoMA는 폴록이 이 시기에 작품에 구체적인 제목 대신 숫자를 붙이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그림을 가까이서 보면 선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방향과 속도로 움직이고 멀리서 보면 전체가 거대한 그물처럼 연결돼 보인다.
Autumn Rhythm (Number 30)
1950년 제작된 《Autumn Rhythm (Number 30)》은 폴록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가로폭이 5m가 넘는 대형 화면으로 검정·흰색·갈색 계열의 물감이 복잡하게 겹쳐져 있다.
작품 제목에는 가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만 나무나 낙엽을 직접 묘사한 작품은 아니다. 폴록의 드립 페인팅에서 나타나는 리듬과 화면 전체의 움직임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Number 1, 1950 (Lavender Mist)
《Number 1, 1950 (Lavender Mist)》는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가 소장한 대표작이다.
폴록은 작업실 바닥에 대형 캔버스를 펼친 뒤 유성페인트·에나멜·알루미늄 페인트 등을 흘리고 붓고 튀겨 제작했다.[7]
작품에는 검정과 흰색, 회색, 연한 분홍색과 청록색 등이 복잡하게 겹쳐 있다. 실제로 라벤더색 물감이 중심적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인상에서 보랏빛 안개 같은 느낌을 본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Lavender Mist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알려져 있다.[7]
작품 일부에는 폴록의 손자국도 남아 있다. 페인트를 붓는 작업이 대부분이지만 필요하면 실제 손이나 붓을 화면에 직접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Blue Poles
《Blue Poles》는 1952년 제작된 대형 작품으로 원래 제목은 《Number 11, 1952》였다.[9]
작품에는 폴록 특유의 드립과 스플래시 위에 굵고 짙은 파란색 선 여덟 개가 수직에 가깝게 배치돼 있다.
크기는 약 2.1×4.9m에 이르며 에나멜과 알루미늄 페인트, 유리 등이 사용됐다.[9]
1973년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미술관이 당시 130만 호주달러에 구입하면서 큰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기준으로 매우 높은 가격이었기 때문에 호주 언론과 정치권에서 세금으로 정체불명의 물감자국을 샀다는 식의 비판이 쏟아졌다.[10]
현재는 해당 미술관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취급된다.
Black Pourings
1951년 무렵부터 폴록은 화려한 색의 드립 페인팅에서 벗어나 검은색 에나멜을 주로 사용한 작품을 제작했다.
이른바 Black Pourings 또는 black paintings라고 불리는 작품들에서는 이전보다 화면의 빈 공간이 더 많이 드러나고 검은 선 사이에서 사람이나 얼굴 같은 형태를 연상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1]
폴록이 평생 같은 드립 방식만 반복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가장 유명한 전성기 방식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집중돼 있다.
평가와 영향
뉴욕 미술계의 상징
폴록의 성공은 한 개인 화가의 명성 이상으로 의미가 컸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국제 현대미술의 중심은 사실상 파리였다. 전쟁을 피해 많은 유럽 예술가와 지식인이 미국으로 이동했고 전후에는 뉴욕에서 새로운 세대의 미국 작가들이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폴록은 이 변화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됐다.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미국 언론은 폴록을 새로운 미국 미술을 대표하는 인물로 다뤘고, 그의 국제적인 명성은 뉴욕이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클레멘트 그린버그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폴록의 초기 지지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린버그는 화면의 평면성과 재료 자체의 특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 미술을 중요하게 평가했고 폴록의 올오버 구성과 추상성을 높게 봤다.
그린버그의 강력한 지지는 폴록의 명성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줬으며, 동시에 이후에는 특정 미술사조와 작가를 비평가가 지나치게 강하게 밀어준 것 아니냐는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스 나무트의 사진과 영화
1950년 사진가 한스 나무트는 롱아일랜드의 폴록 작업실에서 그가 그림을 제작하는 모습을 촬영했다.
이 사진과 영화는 폴록의 작품 못지않게 유명해졌다. 바닥에 놓인 거대한 캔버스 주변을 이동하면서 손과 팔 전체를 이용해 페인트를 흘리는 모습은 액션 페인팅이라는 개념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보여줬다.
미술가의 작업과정을 사진과 영상으로 대중에게 보여준 사례로도 중요하다. 작품만 봤을 때는 그냥 복잡한 선이지만 제작장면을 보면 각 선이 몸의 움직임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훨씬 분명하게 보인다.
아이도 그릴 수 있다는 비판
폴록 작품에 대한 가장 유명한 비판 가운데 하나는 애들도 저렇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선과 얼룩만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인체 비례나 원근법, 사실적인 묘사 같은 전통적인 회화기술이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폴록의 작업에서는 무엇을 사실적으로 그렸는지가 평가기준이 아니다. 화면 전체의 밀도와 리듬, 색의 층, 재료의 흐름, 거대한 크기와 관람자의 신체적인 경험 등이 중요하다.
게다가 물감을 아무렇게나 튀긴다고 폴록 작품과 비슷해지는 것도 아니다. 작품을 실제로 따라 해보면 화면 한쪽에 물감이 몰리거나 선이 뭉개지고 색이 탁해지기 쉬운데, 폴록의 대표작은 복잡하면서도 화면 전체의 균형과 층위가 상당히 세밀하게 유지된다.
그렇다고 폴록 작품을 보고 반드시 감동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미술사적으로 중요하다는 것과 개인적으로 좋은 그림이라고 느끼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후 미술에 미친 영향
폴록은 이후의 회화뿐 아니라 퍼포먼스아트와 프로세스 아트, 설치미술에도 영향을 줬다.
특히 완성된 작품보다 작품이 만들어지는 행위 자체를 중요하게 본 태도는 이후 미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3]
그가 작품을 바닥에 놓고 사방에서 작업한 방식 역시 회화를 단순한 벽걸이 이미지가 아니라 작가의 신체와 공간이 직접 참여하는 행위로 확장했다.
앨런 캐프로 같은 작가는 폴록의 작업에서 영향을 받아 이후 해프닝과 퍼포먼스 중심의 미술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대중문화 속 이미지
폴록은 현대미술가 가운데 대중문화에서 특히 알아보기 쉬운 이미지가 있는 인물이다.
바닥에 대형 캔버스를 펼쳐놓고 페인트를 휘두르는 장면 자체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영화나 광고, 만화에서 추상화가를 묘사할 때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
문제는 이 이미지가 너무 유명해져서 추상화 전체가 그냥 물감 던지는 미술인 것처럼 오해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실제 폴록 역시 초기에는 인물과 신화적 형상을 그렸고 말년에는 드립 페인팅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의 작업을 시도했다.
주요 작품
| 연도 | 작품 | 특징 |
|---|---|---|
| 1943 | 《Mural》 | 페기 구겐하임 의뢰, 대형 추상작업으로의 전환점 |
| 1947 | 《Full Fathom Five》 | 초기 대표 드립 페인팅 |
| 1948 | 《Number 1A, 1948》 | 손자국과 복잡한 드립이 결합된 대표작 |
| 1948 | 《Number 5, 1948》 | 갈색·검은색·노란색 계열의 복잡한 올오버 구성 |
| 1950 | 《Autumn Rhythm (Number 30)》 | 전성기 대형 드립 페인팅 |
| 1950 | 《Number 1, 1950 (Lavender Mist)》 | NGA 소장 대표작 |
| 1950 | 《One: Number 31, 1950》 | 대형 올오버 드립 작품 |
| 1952 | 《Blue Poles》 | 여덟 개의 굵은 파란색 선이 특징 |
| 1953 | 《The Deep》 | 후기의 어두운 색채와 넓은 여백이 특징 |
이름
본명은 Paul Jackson Pollock이며 일반적으로 중간 이름인 Jackson을 사용해 Jackson Pollock으로 활동했다. 한국어로는 잭슨 폴록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검색할 때는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 잭슨 폴록 드립 페인팅, Jackson Pollock drip painting, 잭슨 폴록 추상표현주의, action painting, Lavender Mist, Blue Poles, Jackson Pollock Mural 등의 검색어가 많이 사용된다.
여담
- 1912년 와이오밍주 코디에서 태어났다.
- 다섯 형제 가운데 막내였다.
- 1930년 뉴욕으로 이동해 토머스 하트 벤턴에게 미술을 배웠다.
-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의 실험적 작업장에서 산업용 페인트와 새로운 제작기법을 접했다.
- 1943년 페기 구겐하임의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 같은 해 구겐하임의 의뢰로 대형 작품 《Mural》을 제작했다.
- 1945년 리 크래스너와 결혼했다.
- 롱아일랜드 Springs의 헛간을 작업실로 사용했다.
- 1947년경부터 본격적인 드립 페인팅을 제작했다.
- 페인트를 붓고 튀기는 데 붓뿐 아니라 막대기와 여러 도구를 사용했다.
- 작품 일부에는 직접 찍은 손자국도 남아 있다.
- 1940년대 후반부터 작품에 구체적인 이름 대신 숫자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 1949년 《LIFE》지의 대대적인 기사 이후 미국 대중에게도 유명해졌다.
- 사진가 한스 나무트가 촬영한 작업장면이 매우 유명하다.
- 가장 유명한 드립 페인팅 시기는 대략 1947~1951년에 집중된다.
- 1951년 이후에는 검은색 중심의 작품과 부분적으로 형상적인 작업도 제작했다.
- 《Blue Poles》는 1973년 호주 정부의 고가 구입 때문에 현지에서 큰 정치·문화 논쟁을 일으켰다.
- 1956년 자동차 사고로 44세에 사망했다.
- 현대미술을 별로 모르는 사람에게도 바닥에 캔버스 놓고 물감 뿌리던 미국 화가라고 설명하면 높은 확률로 이 사람이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 Museum of Modern Art - Jackson Pollock
- National Gallery of Art - Jackson Pollock
- National Gallery of Art - Number 1, 1950 (Lavender Mist)
- Stanley Museum of Art - Mural
-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 Blue Poles
- Museum of Modern Art - Number 1A, 1948
- ↑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National Gallery of Art - Jackson Pollock
- ↑ 2.0 2.1 2.2 Museum of Modern Art - Jackson Pollock
- ↑ 3.0 3.1 3.2 3.3 3.4 3.5 National Gallery of Art - The Energy and Motion of Jackson Pollock's Number 1, 1950 (Lavender Mist)
- ↑ 4.0 4.1 University of Iowa Stanley Museum of Art - Jackson Pollock, Mural
- ↑ 5.0 5.1 Stanley Museum of Art - History
- ↑ TIME - Jackson Pollock: Early Photos of the Action Painter at Work
- ↑ 7.0 7.1 7.2 7.3 National Gallery of Art - Number 1, 1950 (Lavender Mist)
- ↑ 8.0 8.1 Museum of Modern Art - Number 1A, 1948
- ↑ 9.0 9.1 9.2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 Blue Poles
- ↑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 Jackson Pollock's Blue Po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