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프 마리 드 메스트르(Joseph-Marie, comte de Maistre, 1753년 4월 1일 ~ 1821년 2월 26일)는 사르데냐 왕국의 사보이 출신 정치철학자, 법관, 외교관이자 가톨릭 사상가다.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한 대표적인 반혁명·반계몽 사상가로, 보수주의와 반동주의, 가톨릭 전통주의, 울트라몬타니즘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1] 오늘날의 프랑스 영토인 샹베리에서 태어났고 프랑스어로 저술했기 때문에 종종 프랑스 사상가로 소개되지만, 정치적으로는 프랑스인이 아니었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사보이는 사르데냐 왕국 영토였으며 메스트르는 평생 사보이아 왕가와 사르데냐 국왕에게 충성을 바쳤다. 프랑스 혁명군이 사보이를 점령한 뒤에도 프랑스 혁명정부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협력하지 않고 망명생활을 택했다.[2] 대표작으로 《프랑스에 관한 고찰》(Considérations sur la France), 《정치헌법과 다른 인간제도의 생성원리에 관한 논고》, 《교황론》(Du Pape),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Les Soirées de Saint-Pétersbourg) 등이 있다. 그의 정치사상을 존나 간단하게 요약하면
인간 이성만 믿고 사회를 백지에서 새로 설계하지 마라. 사회와 권위는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되는 것이며 그 뒤에는 종교·전통·역사와 신의 섭리가 있다.
정도가 된다. 다만 일반적인 온건 보수주의자와 달리 메스트르는 왕권, 종교적 권위, 교황의 권위, 처벌과 희생의 역할을 극단적으로 강조했기 때문에 흔히 에드먼드 버크와 함께 묶이는 동시에 버크보다 훨씬 급진적인 반혁명 사상가로 구분된다. 스탠퍼드 철학백과도 버크가 전통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 혁명을 비판했다면 메스트르는 전통적 권위를 지키기 위해 혁명을 비판했다고 대비한다.[3]
개요
| 항목 | 내용 |
|---|---|
| 본명 | Joseph-Marie de Maistre |
| 한국어 | 조제프 마리 드 메스트르 |
| 출생 | 1753년 4월 1일 |
| 출생지 | 사르데냐 왕국 사보이 샹베리 |
| 사망 | 1821년 2월 26일 |
| 사망지 | 사르데냐 왕국 토리노 |
| 직업 | 법관, 외교관, 정치철학자, 작가 |
| 활동국가 | 사르데냐 왕국 |
| 사상 | 반계몽주의, 반혁명주의, 군주주의, 가톨릭 전통주의, 울트라몬타니즘 |
| 주요 관심 | 정치철학, 역사철학, 종교철학, 정치신학 |
| 대표작 | 《프랑스에 관한 고찰》, 《교황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 |
| 동생 | 자비에 드 메스트르 |
생애
출생
1753년 4월 1일 샹베리에서 태어났다.[4] 현재 샹베리는 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 지역 사부아 데파르트망의 도시지만 당시에는 프랑스 왕국이 아니라 사르데냐 왕국의 사보이 공국에 속했다. 메스트르 가문은 사보이의 유력 법관 가문이었다. 아버지 프랑수아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사보이 원로원의 고위 법관을 지냈고 조제프 역시 자연스럽게 법률가의 길을 걸었다. 어린 시절 예수회 계열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토리노에서 법학을 공부했다.[5] 프랑스어뿐 아니라 라틴어·그리스어·이탈리아어·영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독일어 등 여러 언어의 문헌을 읽을 정도로 상당히 폭넓은 교육을 받았다.
법관
1770년대부터 사보이의 사법기관에서 근무했다. 1788년에는 사보이 원로원의 의원, 즉 당시 의미의 senator가 됐다.[6] 여기서 원로원이라고 해서 현대의 상원 국회의원 같은 자리는 아니다. 사보이의 Sénat는 최고법원 성격을 가진 사법기관이었다. 프랑스 혁명 전까지의 메스트르는 후대 이미지처럼 하루종일 왕과 교황만 외치던 정치선동가는 아니었다. 법관으로 안정적인 경력을 쌓으면서 당대의 계몽사상과 자연과학, 철학, 신비주의 문헌을 폭넓게 읽었다.
프리메이슨
의외의 경력. 젊은 시절 메스트르는 프리메이슨 활동에도 상당히 깊게 관여했다. 샹베리의 `Les Trois Mortiers` 로지에 참여했고, 장바티스트 빌레르모즈와 관련된 정비 스코틀랜드 의식 계열의 프리메이슨·기독교 신비주의 사상에도 관심을 가졌다.[7] 그래서 메스트르를 처음부터 완전히 닫힌 중세주의자로 보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그는 계몽주의 시대의 지적 환경 속에서 성장했고 프리메이슨과 신비주의까지 직접 경험했지만,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와 정치혁명에 극도로 적대적인 사상가가 됐다. 프리메이슨 출신 초강경 가톨릭 반혁명 사상가라는 묘한 이력이 생긴 셈.
프랑스 혁명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생했다. 초기부터 메스트르가 혁명의 모든 요구를 무조건 적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혁명이 급진화되고 왕정과 가톨릭교회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자 입장은 급격하게 강경해졌다. 1792년 프랑스 혁명군이 사보이를 침공했다. 사보이 왕국군이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무너지면서 수백 년 동안 이어진 기존 통치체제도 순식간에 붕괴했다.[8] 메스트르는 프랑스 통치에 협력하지 않고 사보이를 떠났다. 이 사건은 메스트르 인생을 완전히 바꿨다. 혁명이 없었으면 평생 지역 고등법원 법관으로 살았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혁명 때문에 재산과 직업을 잃고 망명하면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반혁명 사상가 가운데 하나가 됐다.
망명
1793년부터 1797년까지 주로 로잔에서 생활했다.[9] 이 시기 사르데냐 왕국의 정치선전 활동에도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반혁명 저술가가 됐다. 1793년에는 《사보이 왕당파의 편지》(Lettres d'un royaliste savoisien)를 익명으로 발표했다. 그가 유럽 지성계에 이름을 알린 것은 《프랑스에 관한 고찰》이었다.
프랑스에 관한 고찰
Considérations sur la France. 1796년에 집필·출판되기 시작해 1797년 널리 알려진 메스트르의 대표작.[10]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과 함께 프랑스 혁명에 대한 대표적인 보수·반혁명 비판서로 자주 언급된다. 하지만 접근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버크가 혁명을 역사적으로 축적된 제도와 자유를 한꺼번에 파괴하는 무모한 정치실험으로 비판했다면 메스트르는 한발 더 나아가 프랑스 혁명 자체를 신의 섭리 속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했다.[11]
혁명도 섭리다
흥미롭게도 메스트르는 혁명을 단순히
나쁜 놈들이 일으킨 사고
라고만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가 계몽주의와 종교적 타락을 유럽에 퍼뜨린 결과 혁명이라는 끔찍한 사건을 통해 징벌과 정화를 받고 있다고 해석했다. 즉 혁명가들은 스스로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더 큰 섭리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는 로베스피에르 같은 혁명가조차 역사의 최종 주체가 아니었다. 인간들이
우리가 새 시대를 만든다!
면서 사람들 목 자르고 다니고 있는데 메스트르 입장에서는
너희도 뭘 하는지 모르고 있다.
에 가까웠다.
왕정복고
메스트르는 프랑스 공화정이 장기간 유지될 수 없으며 결국 왕정이 복원될 것이라고 봤다. 실제로 나폴레옹 몰락 뒤 1814년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물론 메스트르가 예상한 형태와 모든 부분이 일치했던 것은 아니지만 반혁명 진영에서는 그의 명성을 크게 높여준 사건이었다.
헌법론
메스트르의 대표적인 정치사상. 그는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
오늘부터 이 나라의 헌법은 이렇게 하겠습니다.
라며 정치질서를 처음부터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에게 진정한 헌정질서는
- 역사
- 관습
- 종교
- 제도
- 민족의 성격
- 우연처럼 보이는 역사적 사건
이 오랫동안 축적되며 형성되는 것이었다. 《프랑스에 관한 고찰》에서 그는 자유로운 헌법이 단순한 숙의와 설계의 결과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다고 주장했다.[12] 이 생각은 후대 보수주의의
사회는 기계가 아니라 유기체다
라는 관점과 닿아 있다. 다만 메스트르는 단순한 역사주의에 그치지 않고 그 역사적 형성 뒤에 신의 섭리가 존재한다고 봤다.
정치헌법의 생성원리
《Essai sur le principe générateur des constitutions politiques et des autres institutions humaines》. 한국어로는 대략 《정치헌법과 다른 인간제도의 생성원리에 관한 논고》 정도. 1800년대 후반에 집필했고 1814년 출판됐다.[13] 《프랑스에 관한 고찰》에서 제시했던 헌법관을 보다 일반적인 이론으로 확장했다. 메스트르에게 국가의 근본제도는 어느 날 제헌의회에서 사람들이 문서를 작성했다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문서화된 헌법보다
그 문서가 존재하기 전부터 사회에서 실제로 작동해온 권위와 관습
이 더 근본적이라고 봤다. 이 점에서는 에드먼드 버크의 관습적·역사적 정치관과 비슷하지만 메스트르는 여기에 훨씬 강한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다.
인간관
메스트르 정치사상의 출발점에는 인간 이성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이 이성을 사용해 낡은 제도와 미신을 비판하고 더 합리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기대했다. 메스트르는 프랑스 혁명을 보고 정반대 결론을 내렸다.
인간에게 무제한의 정치적 이성을 맡겨놓으면 합리적인 천국이 아니라 단두대부터 만들 수도 있다.
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합리적이고 선한 존재라는 관점에 회의적이었으며 인간의 욕망과 폭력을 억제하려면
- 권위
- 종교
- 법
- 전통
- 처벌
이 필요하다고 봤다. 이 때문에 후대 연구자들은 메스트르를 단순한 왕당파보다 훨씬 근본적인 반계몽주의 정치철학자로 다룬다.[14]
권위
메스트르 정치철학에서 자유보다 훨씬 중요한 개념. 어떤 정치공동체든 최종적으로는
여기서 논쟁은 끝이고 이 결정에 따라야 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권위가 필요하다고 봤다. 모든 정치원리를 개인의 판단에 무한히 맡기면 공동체를 유지하는 공통기준 자체가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메스트르가 현실의 모든 왕이 무조건 현명하다고 믿었던 것은 아니다. 개별 통치자의 능력과 별개로 정치질서 자체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정당성이 인정되는 최고권력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문제는 그 최고권력으로 왕과 교회를 존나 강하게 밀었다는 것.
군주제
메스트르는 군주제를 가장 안정적인 정치체제라고 봤다. 특히 역사적으로 형성된 세습왕정은 사회의 권위를 개인들의 순간적인 의사보다 높은 위치에 두기 때문에 안정성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충성을 바친 대상은 사보이아 왕가였다. 프랑스가 사보이를 점령한 뒤 상당한 개인적 손해를 입었지만 새로운 프랑스 체제에 편입돼 경력을 이어가기보다 망명을 택했다. 그래서 메스트르의 왕당파 사상은 그냥 책에서만
왕이 최고
라고 써놓은 것이 아니라 자기 직업과 재산을 날려가며 실제로 지킨 정치적 충성심이기도 했다.
가톨릭
메스트르에게 정치질서와 종교질서는 거의 분리되지 않았다. 사회의 도덕과 권위는 인간의 합리적 계약만으로 유지할 수 없으며 초월적인 종교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봤다. 특히 가톨릭을 유럽 문명의 핵심 제도로 평가했다. 개신교와 종교개혁에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개인이 종교적 진리를 스스로 판단하는 원리가 결국 정치에서도 개인의 판단을 최고기준으로 만들고 권위의 해체로 이어졌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는 현대의 종교 자유나 개인의 양심이라는 관점에서는 당연히 상당히 권위주의적으로 보인다.
교황론
Du Pape. 1819년 출판.[15] 메스트르의 울트라몬타니즘을 대표하는 저서. 교황의 권위를 강력하게 옹호하면서 가톨릭교회가 하나의 보편적인 권위를 유지하려면 최종적인 판단권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교황은 단순히 가톨릭교회의 행정책임자가 아니라 유럽의 도덕적·정치적 질서까지 안정시키는 초국가적인 권위였다. 특히 교황의 무류성과 최고권위를 강하게 옹호했다.[16] 메스트르가 사망한 것은 1821년이고 교황 무류성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리로 공식 정의된 것은 1870년이다. 따라서 메스트르는 19세기 가톨릭 울트라몬타니즘의 중요한 선구자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울트라몬타니즘
`ultramontane`은 본래 알프스 너머 로마를 바라본다는 뜻에서 나온 표현. 프랑스 등 각 지역 교회가 상당한 자율권을 가져야 한다는 갈리아주의와 반대로 로마의 교황권을 강하게 강조했다. 메스트르는 교회 내부에서조차 최종적인 권위가 필요하며 그것이 교황이라고 생각했다. 왕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왕보다 더 보편적인 종교권위로 교황을 내세운 셈이다. 그래서 그의 정치사상을 그냥
절대왕정 만세
하나로 요약하면 부족하다. 그가 원하는 질서는 왕권과 교권이 결합하면서도 영적 문제에서는 교황이 최고의 보편적 권위를 갖는 가톨릭적 유럽질서에 가까웠다.
사르데냐
1790년대 후반 프랑스군이 이탈리아 북부까지 진출하면서 사르데냐 왕국의 본토 영토도 위협받았다. 메스트르는 왕실을 따라 여러 지역을 이동했고 1799년부터 1803년까지 사르데냐섬에서 왕국의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고위직을 맡았다.[17] 전쟁 때문에 왕국의 본토 대부분을 잃어버린 상태라 당시 사르데냐 정부의 형편도 좋지 않았다. 그 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긴 외교관 생활이 시작된다.
러시아
1803년 사르데냐 국왕의 외교대표로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파견됐다. 1817년까지 약 14년 동안 러시아 궁정에서 사르데냐 왕국을 대표했다.[18] 사르데냐 왕국은 당시 유럽 강대국도 아니었고 나폴레옹에게 본토 대부분을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에 외교대표라고 해도 엄청난 자원과 조직을 가진 자리는 아니었다. 메스트르는 꽤 열악한 재정상태에서 오랫동안 러시아에 머물렀다. 하지만 지적으로는 매우 생산적인 시기였다. 러시아 귀족·외교관·지식인들과 교류했으며 유럽 정치와 종교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가 가장 독특한 저술 가운데 하나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도 이 경험에서 나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
Les Soirées de Saint-Pétersbourg, ou Entretiens sur le gouvernement temporel de la Providence. 한국어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 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화》 정도로 번역된다. 메스트르가 러시아 생활을 바탕으로 집필한 철학적 대화편으로 1821년 사망 직후 출판됐다.[19] 등장인물들이 네바강 주변에서 저녁마다 대화를 나누면서
- 신의 섭리
- 악
- 고통
- 전쟁
- 범죄
- 처벌
- 희생
- 종교
등을 논한다. 메스트르의 사상 가운데 가장 어둡고 독특한 부분이 이 책에 몰려 있다.
사형집행인
메스트르를 악명 높게 만든 주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에서 그는 사회질서에서 사형집행인이 차지하는 역할을 길게 논한다. 그의 논리는 사형집행인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가 법과 질서를 유지하려면 궁극적으로 법을 강제로 집행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가장 불쾌하면서 극단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이 사형집행인이라는 것이다. 메스트르는 사람들이 법과 국가의 아름다운 겉모습은 좋아하면서 그 질서가 최종적으로 강제력을 통해 유지된다는 사실은 외면한다고 봤다. 그래서 처형인을 문명사회의 숨겨진 기반을 드러내는 존재처럼 묘사했다. 이 부분 때문에 스탕달은 그를 사형집행인의 친구라는 취지로 조롱했고 후대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메스트르의 잔혹성과 권위주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 됐다.[20]
폭력과 희생
메스트르는 역사에서 폭력이 단순한 예외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이라고 봤다. 전쟁, 처형, 종교적 희생을 서로 완전히 분리된 현상이 아니라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희생과 속죄의 구조라는 종교철학적 틀에서 해석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에 붙은 《희생에 관한 해명》에서도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21] 현대 독자가 읽으면 상당히 섬뜩하다. 이 때문에 메스트르는
질서에는 폭력이 필요하다고 솔직하게 인정한 현실주의자
로 읽히기도 하고
폭력과 권위에 지나치게 매혹된 반동 사상가
로 비판받기도 한다. 현대 연구에서는 메스트르가 폭력을 찬양했다는 단순화보다는 모든 정치질서가 폭력의 문제를 피할 수 없다고 본 사상가라는 해석도 존재한다.[22]
귀국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사보이아 왕가가 피에몬테 본토를 회복한 뒤 메스트르는 러시아 생활을 정리했다. 1817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사르데냐 왕국으로 돌아왔다. 1818년부터 왕국의 고위 사법직을 맡아 토리노에서 근무했다.[23] 1821년 2월 26일 토리노에서 사망했다. 향년 67세.
에드먼드 버크와 비교
둘 다 프랑스 혁명의 대표적인 비판자로 자주 같이 언급된다. 하지만 같은 종류의 보수주의자는 아니다.
| 에드먼드 버크 | 조제프 드 메스트르 | |
|---|---|---|
| 배경 | 영국·아일랜드 정치인 | 사보이 법관·외교관 |
| 혁명 비판 | 전통적 자유와 역사적 제도 파괴 비판 | 권위·종교·섭리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 |
| 정치전통 | 휘그적 입헌주의 | 반혁명 군주주의 |
| 종교 | 성공회적 기독교 전통 | 강경 가톨릭 |
| 교황권 | 핵심주제 아님 | 매우 강하게 옹호 |
| 인간이성 | 추상적 이성주의 비판 | 이성의 정치적 능력을 훨씬 더 강하게 불신 |
| 대표이미지 | 보수주의 | 반혁명·반동주의 |
스탠퍼드 철학백과는 이 차이를 버크는 전통적 자유를 위해, 메스트르는 전통적 권위를 위해 혁명을 비판했다는 식으로 설명한다.[24] 버크에게 의회와 전통적인 영국의 자유는 지켜야 할 유산이었다. 메스트르에게는 왕권과 종교적 권위 자체가 질서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둘을 그냥
보수주의자 두 명
으로 묶으면 메스트르의 훨씬 강한 권위주의적·신학적 성격이 사라진다.
계몽주의 비판
메스트르는 볼테르, 장자크 루소를 비롯한 18세기 계몽사상이 전통적인 종교와 정치권위를 붕괴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봤다. 특히
모든 제도는 인간의 이성으로 심사받아야 한다
는 태도를 위험하게 여겼다.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매번
내가 납득해야만 이 권위를 인정하겠다
라고 판단하기 시작하면 궁극적인 정치권위가 유지될 수 없다는 논리다. 현대 민주주의 관점에서는 당연히 비판할 부분이 많지만 메스트르가 제기한
정치질서는 단순한 합리적 논증만으로 유지되는가? 사람들은 왜 실제로 권위를 받아들이는가? 전통과 상징은 정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같은 문제는 이후 정치철학에서도 계속 논의됐다.
합리주의 비판
메스트르가 특히 싫어한 것은 현실사회를 수학문제처럼 취급하는 정치적 합리주의였다. 국가를
잘못 설계된 기계니까 부품을 전부 뜯고 더 합리적으로 다시 만들자
는 식으로 보는 사고 자체를 비판했다. 그에게 사회는 수많은 세대의 행동과 관습이 축적된 결과였다. 현재 사람들이 어떤 제도의 모든 기능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제도가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이 점은 후대의 보수주의적 제도관과 상당히 비슷하다. 하지만 메스트르는 여기서 다시 신의 섭리로 넘어간다.
오래됐으니 함부로 없애지 마라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역사 속에서 섭리가 작동한다
고 봤다.
과학 비판
메스트르는 자연과학 자체를 단순히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과학과 자연철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광범위한 저술을 읽었다. 그가 비판한 것은 과학적 방법을 인간과 사회와 종교의 모든 문제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보는 과학주의에 가까웠다. 사후 1836년 출판된 《베이컨 철학의 검토》(Examen de la philosophie de Bacon)에서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근대 계몽적 과학주의의 지적 기원을 공격했다.[25]
주요 저서
| 연도 | 작품 | 내용 |
|---|---|---|
| 1793 | 《사보이 왕당파의 편지》 | 혁명에 대한 초기 반혁명 비판 |
| 1796~1797 | 《프랑스에 관한 고찰》 | 프랑스 혁명과 신의 섭리, 왕정복고 |
| 1814 | 《정치헌법과 다른 인간제도의 생성원리에 관한 논고》 | 헌법·제도의 역사적 생성 |
| 1819 | 《교황론》 | 교황의 보편적 권위와 울트라몬타니즘 |
| 1821 |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 | 섭리, 악, 고통, 폭력, 처벌, 희생 |
| 1836 | 《베이컨 철학의 검토》 | 근대 경험주의·과학주의 비판, 사후출판 |
반동주의
메스트르는 단순히 기존 제도를 천천히 바꾸자는 의미의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그의 사상이 흔히 reactionary, 즉 반동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가 글을 쓰던 시점에는 이미 혁명이 발생해 구체제가 파괴된 뒤였다. 따라서 그의 목표는 변화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원리를 부정하고 정당한 권위를 복원하는 것
이었다. 이 때문에 메스트르, 루이 드 보날, 후대의 후안 도노소 코르테스 등은 유럽 반혁명 사상의 계보로 함께 다뤄진다.[26]
루이 드 보날
메스트르와 거의 같은 시대 프랑스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반혁명 가톨릭 사상가. 둘 다
- 프랑스 혁명 반대
- 계몽주의 비판
- 군주제
- 가톨릭 권위
- 전통
을 강조했다. 그래서 정치사상사에서는 흔히
메스트르와 보날
을 한 세트처럼 언급한다. 다만 둘의 철학체계와 강조점이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영향
가톨릭 전통주의
《교황론》은 19세기 가톨릭에서 교황권을 강화하려는 울트라몬타니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메스트르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보다 수십 년 전에 이미 강력한 교황 최고권과 무류성에 가까운 논리를 전개했다.
후안 도노소 코르테스
19세기 스페인의 대표적인 가톨릭 반혁명 정치사상가. 메스트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인물로 평가된다.[27] 도노소 코르테스는 1848년 혁명 이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공격하며 더 직접적인 독재론까지 전개했다.
카를 슈미트
20세기 독일 정치법학자 카를 슈미트도 메스트르·보날·도노소 코르테스를 반혁명 정치사상의 중요한 계보로 다뤘다.[28] 특히 권위, 결정, 주권, 정치와 신학의 관계라는 문제에서 이들의 사상을 중요하게 평가했다.
샤를 보들레르
정치철학자뿐 아니라 문학가들에게도 읽혔다. 샤를 보들레르는 메스트르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작가 가운데 하나로 연구된다.[29] 보들레르 특유의 죄, 타락, 악, 종교적 이미지에 메스트르의 영향이 언급되곤 한다.
파시즘의 선구자인가?
논쟁적인 부분.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아이제이아 벌린은 메스트르를 분석한 유명한 글에서 그의 사상을 20세기 파시즘으로 이어지는 지적 흐름의 초기 형태로 해석했다.[30] 벌린이 주목한 부분은
- 이성주의에 대한 적대
-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
- 권위
- 위계
- 복종
- 정치적 폭력
이었다. 하지만 메스트르를 그냥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메스트르는 파시즘보다 100년 이상 전에 살았으며 근대 대중국가나 전체주의 정당을 주장한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지향한 것은 가톨릭교회와 세습군주제에 기반한 전근대적 유럽질서였다. 최근 연구에서는 메스트르를 곧바로 파시즘의 조상으로 연결하는 해석에 비판적인 견해도 있으며, 그의 폭력론 역시 폭력을 단순히 찬양했다기보다 모든 정치질서가 폭력과 강제력의 문제를 포함한다는 점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드러낸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31] 따라서
메스트르 = 파시스트
가 아니라
후대 권위주의·반혁명 사상가들이 자주 읽었고, 일부 연구자들이 파시즘의 지적 선구 가운데 하나로 해석했다
정도가 정확하다.
평가
메스트르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비판하는 쪽에서는
- 권위주의
- 왕권 옹호
- 교황권 절대화
- 처벌과 폭력 강조
-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한 적대
때문에 근대 자유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적 가운데 하나로 본다. 반면 사상사적으로는 인간 사회가 순수한 이성적 설계만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 관습
- 종교
- 정당성
- 상징
- 비합리적 요소
- 역사적 우연
이 정치질서에서 실제로 엄청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일찍부터 파고든 독창적인 사상가로 평가되기도 한다.[32] 중요한 건 메스트르를
옛날 왕 좋아하던 꼰대
정도로만 보면 왜 200년 뒤에도 정치사상사 책에 계속 나오는지 설명이 안 된다는 점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 제기한
인간이 이성으로 사회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가장 극단적으로
아니. 그 생각부터가 재앙이다.
라고 대답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자비에 드 메스트르
동생 자비에 드 메스트르 역시 작가와 군인으로 유명하다. 형 조제프가 정치·종교철학으로 유명하다면 자비에는 《내 방 여행기》(Voyage autour de ma chambre) 같은 문학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두 형제 모두 사보이 출신이지만 활동분야는 상당히 달랐다.
국적 문제
메스트르를 소개할 때 조금 귀찮은 부분. 현재 출생지가 프랑스이고 저술도 프랑스어로 했기 때문에
프랑스 철학자
라고 소개하는 자료가 많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사보이 출신 사르데냐 왕국 신민
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1753년 출생 당시 샹베리는 프랑스 영토가 아니었다. 1792년 혁명 프랑스가 사보이를 합병했지만 메스트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망명했으며 계속 사르데냐 국왕의 관료와 외교관으로 일했다. 사망한 1821년에도 토리노는 사르데냐 왕국의 수도였다. 사보이가 최종적으로 프랑스에 편입된 것은 메스트르 사망 후인 1860년이다. 그러니 메스트르에게
프랑스 사상가인데 프랑스 혁명을 존나 싫어했다
라고만 쓰면 중요한 맥락 하나를 빼먹는 셈이다.
여담
- 1753년 4월 1일 태어났다.
- 현재 프랑스 영토인 샹베리 출신이지만 당시 국적은 사르데냐 왕국이었다.
- 평생 사보이아 왕가에 충성했다.
- 프랑스어로 저술했기 때문에 프랑스 사상사에도 포함된다.
- 직업은 원래 철학 교수가 아니라 법관이었다.
- 1788년 사보이 원로원의 법관이 됐다.
- 프랑스 혁명군이 1792년 사보이를 점령하면서 인생이 완전히 꼬였다.
- 그런데 그 덕분에 역사에 남는 정치철학자가 됐다.
- 혁명이 없었으면 그냥 사보이의 고위 법관으로 평생 살았을 수도 있다.
- 젊을 때 프리메이슨 활동을 했다.
- 이후 가톨릭 교황권을 존나 강하게 옹호하는 사상가가 됐다.
- 프리메이슨 경력 때문에 단순히 처음부터 중세적 가톨릭 보수주의자였다고 보는 것은 부정확하다.
- 대표작 《프랑스에 관한 고찰》은 프랑스 혁명을 신의 섭리라는 틀에서 해석했다.
- 혁명에 반대하면서도 혁명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우연한 사고라고 보지는 않았다.
- 혁명가들조차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섭리의 도구라고 봤다.
- 프랑스 공화정이 오래가지 못하고 왕정이 복원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 1814년 실제로 부르봉 왕정복고가 일어났다.
- 물론 그 사이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유럽을 한바퀴 조졌다.
- 헌법을 사람들이 백지에서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싫어했다.
- 진짜 헌정질서는 역사와 관습 속에서 성장한다고 봤다.
- 이 점은 에드먼드 버크와 닮았다.
- 하지만 버크보다 왕권과 종교적 권위를 훨씬 강하게 밀었다.
- 교황의 최고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 1819년 《교황론》을 출판했다.
- 교황 무류성이 공식 교리로 정의된 1870년보다 약 반세기 전이다.
- 약 14년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르데냐 왕국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 러시아 생활 중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을 집필했다.
- 사형집행인에 대한 기묘하고 강렬한 논의 때문에 존나 유명하다.
- 전쟁·처벌·희생·피를 신학적으로 연결해 설명해서 읽다 보면 이 사람이 왜 반동사상의 끝판왕 취급을 받는지 금방 이해된다.
- 그렇다고 실제로 사람 죽이는 것을 취미로 한 인간은 아니다. 평생 직업은 법관과 외교관이었다.
- 1821년 토리노에서 사망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은 사망한 해에 출판됐다.
- 《베이컨 철학의 검토》는 사망 15년 뒤인 1836년에 출판됐다.
- 동생 자비에 드 메스트르도 유명한 작가다.
- 후안 도노소 코르테스를 비롯한 19세기 가톨릭 반혁명 사상에 큰 영향을 줬다.
- 카를 슈미트도 메스트르를 반혁명 정치사상의 중요한 선배로 다뤘다.
- 샤를 보들레르 역시 메스트르를 읽고 영향을 받았다.
- 아이제이아 벌린은 그를 파시즘의 지적 기원과 연결해 해석했다.
- 다만 메스트르 자신을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시대적으로 말이 안 된다. 파시즘이라는 운동이 생기기 약 100년 전에 죽었다.
- 오늘날에는 보통 에드먼드 버크·루이 드 보날 등과 함께 프랑스 혁명 이후 보수·반혁명 정치사상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 다만 버크식 보수주의와 메스트르식 반동주의는 꽤 차이가 크다.
- 자신의 정치사상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인간이 존나 똑똑한 줄 알고 사회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려고 하지 마라"에 가깝다.
-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러니까 왕과 교황 말 잘 들어라"까지 간다는 것.
같이 보기
외부 링크
각주
- ↑ Encyclopedia.com, 「Joseph De Maistre」
- ↑ Encyclopedia.com
-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Conservatism」
- ↑ Encyclopedia.com, 「Joseph de Maistre」
- ↑ Encyclopedia.com
- ↑ Encyclopedia.com
- ↑ Carolina Armenteros, 「Joseph de Maistre (1753–1821): Heir of the Enlightenment, Enemy of Revolutions, and Spiritual Progressivist」
- ↑ Jean-Louis Darcel, 「The Roads of Exile, 1792-1817」
- ↑ Jean-Louis Darcel, 「The Apprentice Years of a Counter-Revolutionary: Joseph de Maistre in Lausanne, 1793-1797」
- ↑ Cambridge University Press, 「Maistre: Considerations on France」
- ↑ Cambridge University Press, 「Reflections on the Ways of Providence in the French Revolution」
- ↑ Cambridge University Press, 「On Divine Influence in Political Constitutions」
- ↑ Encyclopedia.com, 「Joseph de Maistre」
- ↑ Richard A. Lebrun, 「Joseph de Maistre's Life, Thought, and Influence」
- ↑ Encyclopedia.com, 「Joseph de Maistre」
- ↑ Encycloped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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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ncyclopedia.com
- ↑ Encyclopedia.com
- ↑ Cambridge University Press, Joseph de Maistre 관련 해설
- ↑ Encyclopedia.com
- ↑ Cambridge University Press
- ↑ Encyclopedia.com
-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Conservatism」
- ↑ Encyclopedia.com
- ↑ Cambridge University Press, 「Conservatism and Its Discontents」
- ↑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Juan Donoso Cortés」
- ↑ The Review of Politics, 「Juan Donoso Cortés and Political Theology」
- ↑ PMLA, 「Poetic Practice and Historical Paradigm: Charles Baudelaire's Anti-Semitism」
- ↑ Modern Intellectual History, 「Isaiah Berlin's Liberal Reformation」
- ↑ Cambridge University Press, Joseph de Maistre 해설
- ↑ Richard A. Lebrun, 「Joseph de Maistre's Life, Thought, and Influ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