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140년부터 149년까지의 연대. 2세기 중반부로, 동서양 할 것 없이 굵직한 사건들이 터지던 시기다. 로마 제국은 오현제 시대의 절정기를 달리며 역사상 손꼽히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고,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후한이 황제가 연달아 요절하며 외척과 환관들의 개판 파티가 시작됐다. 한반도 삼국은 각자의 방식으로 왕권 강화를 추진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대를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키워드는 안정과 혼돈의 공존이다.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교역이 활발했고, 로마 상인들이 파르티아를 우회해 인도·쿠샨까지 닿았다는 기록도 있다. 어떻게 보면 고대 세계화의 한 정점이었던 시기.
한국
고구려
이 시기 고구려의 가장 큰 떡밥은 단연 태조대왕 재위 기간 논란이다.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태조대왕은 53년에 즉위해서 146년에야 사망하는데, 이게 무려 94년 재위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숫자라 학계에서는 크게 두 가지 설로 나뉜다.
- 태조대왕 치세 기록이 실제로는 두 명 이상의 왕을 합산했다는 설
- 간지(干支) 계산 오류로 연대가 60년 밀렸다는 설
어느 쪽이든 간에 140년대에 태조대왕이 직접 나랏일을 챙기고 있었을 가능성은 극히 낮고, 사실상 차대왕이 이미 실권을 틀어쥔 상태였을 거라는 게 중론이다.
차대왕(재위 146년~165년)은 태조대왕의 동생으로, 즉위하자마자 전임 왕의 측근들을 대거 숙청하고 강압적인 왕권 중심 정치를 펼쳤다. 성격 자체가 꽤 독했던 모양인지 귀족들과의 마찰이 끊이질 않았다. 이 갈등이 결국 165년 명림답부의 쿠데타로 이어지는데, 명림답부는 고구려 역사상 최초로 왕을 시해한 인물로 기록된다.
대외적으로는 요동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시도가 계속됐고, 후한과의 긴장 관계도 지속됐다.
백제
개루왕(재위 128년~166년) 치세의 중반부. 140년대만 딱 잘라 보면 삼국사기에 별다른 기록이 없어서 연구자들도 난감해하는 구간이다.
다만 이 시기 백제의 전반적인 상황을 보면,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마한 잔존 세력을 서서히 흡수·통합하는 과정이 진행 중이었다. 초기 백제는 마한 소국들 사이에서 시작해 점점 몸집을 불린 케이스인데, 2세기 중반이면 이미 마한 전체에 대한 주도권을 상당 부분 확보한 상태였다.
기록이 없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고, 당시 백제가 농업 기반을 정비하고 철기 문화를 확산시키는 내실 다지기에 집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 시기를 흔히 조용한 성장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라
일성 이사금(재위 134년~154년) 시절. 이름이 좀 독특한데 "일성(逸聖)"이라는 묘호는 사후에 붙인 거고,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삼국사기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140년대 기록에서 눈에 띄는 건 크게 세 가지다.
- 대내 정책
- 농업을 국가적으로 장려하고 각지의 제방과 수리 시설을 정비했다. "백성들이 금은주옥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사치 억제보다는 재화를 군사·농업 투자로 돌리려는 실리적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 대외 군사
- 북쪽 말갈 세력의 침입을 격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 신라의 북방 국경은 아직 불안정했고, 말갈 계통 집단들과의 충돌이 심심찮게 발생했다.
- 문화 통합 정책
- 피지배 이민족들에게 신라 복식·풍습을 강제하는 동화 정책을 실시했다. 쉽게 말하면 "우리 식으로 살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메시지. 이사금(왕)의 권위를 중앙집권적으로 끌어올리려는 일환이었다.
일본
세이무 덴노(재위 131년~190년으로 기록됨) 치세. 그런데 이 재위 기간도 59년이라 신뢰성이 애매하다. 일본서기 특성상 초기 덴노들의 기록은 연대 과장이 심해서 역사학자들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이 시기는 야요이 시대 후기에 해당한다. 큐슈에서 시작된 벼농사 문화가 혼슈 동쪽으로 확산되는 중이었고, 청동기·철기 기술이 한반도에서 지속적으로 유입되면서 지역 수장 세력들의 성장을 뒷받침했다. 훗날 야마토 정권으로 이어지는 권력 집중의 씨앗이 이 무렵부터 뿌려졌다고 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세이무 덴노가 동쪽 지방을 순행하며 이민족(에미시 계통으로 추정)을 복속시켰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게 실제 사건인지 후대에 만들어진 영웅 서사인지는 불분명하다.
후한
한마디로 망조의 서막이다. 2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굴러가던 후한이 140년대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내리막을 타기 시작한다.
황제 교체 릴레이
140년대 10년 동안 황제가 무려 3번 바뀐다.
| 황제 | 즉위 | 사망 | 즉위 나이 | 비고 |
|---|---|---|---|---|
| 한충제(漢冲帝) | 144년 | 145년 | 만 1세 | 역대 최연소 즉위 |
| 한질제(漢質帝) | 145년 | 146년 | 8세 | 외척에게 독살 |
| 한환제(漢桓帝) | 146년 | 168년 | 15세 | 환관과 손잡고 외척 제거 |
- 한충제는 즉위할 때 나이가 만 1살이었다. 당연히 본인이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외척 양기(梁冀)가 사실상 전권을 행사했다. 재위 5개월 만에 사망.
- 한질제는 8살에 즉위했는데,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양기를 향해 "이 발호장군(跋扈將軍)놈"이라고 대놓고 욕했다가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 어린이한테 독 먹인 거라 당시에도 여론이 극히 안 좋았다고.
- 한환제는 양기 견제용으로 옹립된 케이스였는데, 나중에 환관 세력과 손을 잡고 159년에 양기를 실각·자살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그 이후엔 이번엔 환관들이 날뛰기 시작하는 아이러니.
외척 양기의 전횡
양기(梁冀)는 이 시기 후한 정치의 핵심 악당 포지션이다. 여동생이 한순제의 황후였던 덕분에 황제 세 명(충제·질제·환제)을 줄줄이 옹립하면서 20년 넘게 권력을 틀어쥐었다. 황제를 독살하고 황제를 갈아치우고, 재산을 긁어모으는 데도 열심이었다. 양기가 죽을 때 몰수당한 재산이 당시 국가 세수의 절반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민심 이반의 시작
위에서 권력자들이 싸우는 동안 아래에서는 조용히 민심이 썩어가고 있었다. 세금 부담, 지방 호족의 토지 겸병,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유민이 속출했다. 훗날 184년 황건적의 난으로 폭발하는 민중 불만의 뿌리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됐다고 봐야 한다.
파르티아
볼로가세스 3세에서 볼로가세스 4세로 왕위가 넘어가는 시기(147년경). 파르티아는 이 무렵 사방에서 압박을 받고 있었다.
- 서쪽 (로마)
- 로마와는 표면적으로 평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주도권 다툼이 꾸준히 불씨로 남아 있었다. 잠시 후인 161년~166년에는 결국 로마-파르티아 전쟁이 터진다.
- 동쪽 (쿠샨)
- 동쪽에서는 카니슈카 대왕 이후 전성기를 달리던 쿠샨 왕조와의 국경 긴장이 계속됐다. 쿠샨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 북부를 아우르는 거대 세력이었다.
로마 제국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년~161년)의 전성기. 오현제(五賢帝) 시대의 네 번째로, 역사가들이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시대"라고 부르던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절정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라는 인물
원래 원로원 귀족 출신으로 행정 경험이 풍부했다. 선황 하드리아누스가 후계자로 지명했는데, 하드리아누스 사후에 원로원이 하드리아누스의 기억을 말살하려 하자 이를 막고 신격화시켜준 게 "피우스(경건한 자)"라는 별칭의 유래다.
재임 23년 동안 로마 바깥으로 거의 나가지 않고 수도에 머물며 행정에 집중했다. 정복 전쟁보다 내치를 선호했고, 원로원과의 관계도 역대급으로 원만하게 유지했다. 세금을 낮추고 재정을 안정시켰으며, 곡물 공급망도 잘 관리했다. 황제 개인의 사생활도 검소하기로 유명했다.
주요 사건
- 142년 - 안토니누스 방벽(Antonine Wall) 축조
- 브리타니아 총독 퀸투스 로리우스 우르비쿠스가 지휘해 현재 스코틀랜드 중부에 방벽을 세웠다. 기존 하드리아누스 방벽보다 160km가량 더 북쪽에 위치한다. 길이 약 63km, 잔디와 흙을 쌓아 만든 토루(土壘) 형식으로 석조인 하드리아누스 방벽보다 구조적으로 약했다. 목적은 북쪽 픽트족 견제였지만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수십 년 후 포기하고 다시 하드리아누스 방벽으로 후퇴한다.
- 마우레타니아 반란 진압
- 북아프리카 마우레타니아(현재 모로코·알제리 일대)에서 지역 세력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로마 입장에서는 별로 크지 않은 사건이었지만, 이 시기 북아프리카가 로마 곡물 생산의 핵심 지대였음을 감안하면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법률 개혁
-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에는 법학이 발달했다. 특히 노예와 피지배민에 대한 처우를 약간이나마 개선하는 방향의 법령들이 이 시기에 나왔다. 노예를 이유 없이 죽이는 것을 살인죄로 규정하는 법도 이 무렵 명문화됐다.
- 후계자 교육
- 안토니누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제위 후계자로 교육시켰다. 마르쿠스는 이 시기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사상을 흡수하며 훗날 철인황제의 기틀을 다졌다.
이 시기 로마의 문화
안정된 시기인 만큼 학문과 예술도 꽃피었다.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이 무렵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며 『지리학』과 『알마게스트』를 저술했다. 이 책들은 이후 1,000년 넘게 서방 세계 지리학·천문학의 표준 교과서로 군림하게 된다. 의사 갈레노스도 이 시기에 성장하며 훗날 서양 의학의 기틀이 되는 연구들을 쌓아가는 중이었다.
기타 세계
쿠샨 왕조
카니슈카 대왕 사후 쿠샨 왕조는 여전히 중앙아시아~인도 북부를 아우르는 강대국이었다. 이 시기 쿠샨은 동서 교역의 중간 허브 역할을 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고 있었고,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실크로드를 따라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파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초기 기독교
이 시기 기독교는 로마 제국 내에서 아직 비합법 상태였지만 꾸준히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에는 대대적인 박해는 없었고, 황제가 일부 지역의 기독교 박해를 중단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신학자 유스티누스가 이 무렵 로마에서 활동하며 기독교를 철학적으로 변호하는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