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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조선 말기의 무신. 한자로는 魚在淵. 신미양요 때 강화도 광성보에서 미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군이다.
쉽게 말하면 조선 말기판 “질 게 뻔한 싸움인데도 도망 안 간 사람”이다. 물론 이겼냐고? 졌다. 개박살났다. 근데 적어도 본인은 도망가지 않았고, 자기 위치에서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그래서 어재연은 조선 말기의 몇 안 되는 “욕하기 애매한 군인”이다.
당시 조선은 이미 서양 열강과 기술 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진 상태였다. 미군은 함포, 근대식 소총, 해병대식 상륙작전을 들고 왔고, 조선군은 화승총과 구식 포대, 성곽 방어에 의존했다. 말이 전투지 장비만 놓고 보면 스타크래프트에서 한쪽은 배틀크루저 뽑았는데 한쪽은 아직 창 들고 뛰는 꼴이었다.
그럼에도 어재연은 광성보에서 수자기를 세우고 끝까지 버텼다. 결과는 패배였지만, 그 패배는 적어도 비겁한 패배는 아니었다.
기본 정보
| 어재연 | |
|---|---|
| 한자 | 魚在淵 |
| 생몰 | 1823년 ~ 1871년 |
| 시대 | 조선 후기 |
| 직책 | 진무중군 |
| 주요 전투 | 신미양요, 광성보 전투 |
| 최후 | 광성보에서 전사 |
| 관련 인물 | 흥선대원군, 어재순, 고종 |
| 관련 유물 | 수자기 |
한줄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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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게 뻔한 싸움에서 런 안 치고 끝까지 버틴 조선 말기 장군.
생애
어재연은 1823년에 태어났다. 1841년 무과에 급제했고, 이후 여러 무관직을 거쳤다.
조선 후기 무관이라고 하면 이미지가 좀 애매하다. 나라가 이미 문치주의에 절여져 있어서 무관은 문관보다 낮게 취급받았고, 군대는 오래전부터 썩어 있었다. 임진왜란 때 그렇게 당하고도 조선은 이상하게 군사 개혁에 목숨 걸지 않았다. 대체 뭘 믿은 건지 모르겠다. 아마 성리학 도덕빔이면 대포도 막는다고 생각했나 보다.
어재연은 이런 나라에서 그래도 실무형 무관으로 활동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하자 광성진 수비에 참여했다. 이후 북쪽 변경 지역에서도 근무하며 비적을 토벌하고 치안을 안정시키는 일을 했다.
즉 그냥 이름만 장군인 장식품은 아니었다. 실제로 군무 경험이 있었고, 변경 방어와 요충지 방어를 맡을 정도의 무관이었다.
신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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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미국 아시아 함대가 조선에 접근하면서 신미양요가 터졌다.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 문제와 통상 요구를 명분으로 조선에 왔다. 조선 입장에서는 “저 양놈들이 또 문 열라 하네”였고, 미국 입장에서는 “통상 좀 하자는데 왜 자꾸 뻗대냐”였다. 물론 당시 제국주의 시대였으니 미국이 순수한 평화 사절단이었다고 믿으면 곤란하다. 그 시절 열강의 ‘통상’은 대체로 대포를 곁들인 방문판매였다.
처음에는 손돌목 일대에서 충돌이 벌어졌고, 이후 미군은 강화도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초지진, 덕진진이 차례로 공격받았고, 마지막으로 광성보가 격전지가 되었다.
이때 어재연은 진무중군으로 임명되어 광성보 방어를 맡았다. 휘하 병력은 약 600명 정도였다고 한다.
광성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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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전투는 신미양요의 핵심 전투였다.
미군은 함포 사격과 상륙부대를 동원했다. 반면 조선군은 구식 화기와 성곽 방어에 의존했다. 냉정하게 말하면 체급 차이가 너무 컸다. 조선군이 용감했다고 해서 총알이 근대식으로 바뀌는 건 아니다.
어재연은 광성보에 수자기를 세우고 방어했다. 수자기는 장수의 지휘 깃발이다. 가운데에 큼지막하게 ‘帥’, 즉 장수 수 자가 적혀 있었다. “여기가 본진이다”라는 표시다.
미군은 포격 후 돌격했고, 조선군은 격렬히 저항했다. 하지만 결과는 광성보 함락이었다. 어재연은 동생 어재순과 함께 전사했다.
미군 측 기록과 조선 측 기록은 조선군 전사자 수에서 차이가 있다. 미국 측 기록은 조선군 피해를 훨씬 크게 적었고, 조선 측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게 적었다. 이건 전근대 전투 기록에서 자주 보이는 일이다. 이긴 쪽은 적을 많이 죽였다고 쓰고, 진 쪽은 피해를 줄여 쓰는 게 국룰이다.
확실한 건 광성보가 함락되었고, 어재연이 그곳에서 죽었다는 점이다.
수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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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기는 어재연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광성보 전투 이후 미군은 어재연의 수자기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이 깃발은 훗날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었다.
2007년, 수자기는 장기 임대 방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하지만 영구 반환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것”은 맞지만 “완전히 반환된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집 나간 조상이 잠깐 외박 허가 받고 온 느낌이다.
2024년에는 이 수자기가 다시 미국으로 반환되었다. 이 때문에 영구 반환 요구가 다시 나왔다. 솔직히 전리품이라고 계속 갖고 있는 것도 좀 쪼잔하다. 19세기 제국주의 전리품 자랑은 이제 박물관 설명문에서나 할 일이지, 21세기에도 “우리 거임 ㅅㄱ” 하는 건 좀 없어 보인다.
평가
어재연은 평가가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대단한 개혁가도 아니고, 권력투쟁의 주역도 아니며, 외교 전략가도 아니다. 그냥 조선 말기 무관으로서 자기 자리를 지키다 죽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 “그냥 자기 자리 지킨 것”이 조선 말기에는 꽤 귀했다. 나라 위에서는 고종과 민씨 세력, 대원군 세력이 권력다툼을 하고 있었고, 밖에서는 열강들이 문 열라고 대포 들고 찾아왔다. 그 와중에 현장에 있던 장수는 도망가지 않고 싸웠다.
그래서 어재연은 조선의 승리를 상징하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조선의 패배를 상징한다. 그런데 동시에, 그 패배 속에서도 최소한의 군인다운 태도는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쉽게 말하면 “나라가 병신이어도 군인은 군인답게 죽을 수 있다”를 보여준 케이스다. 이게 멋있긴 한데, 동시에 존나 슬프다. 개인의 용기로 국가 시스템의 후진성을 메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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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싸움
어재연의 가장 큰 장점은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광성보 전투는 조선군에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장비, 화력, 전술, 해군 지원 모든 면에서 미군이 우세했다. 그래도 어재연은 방어선을 지켰고, 결국 전사했다.
이건 적어도 군인으로서는 존중받을 만하다.
조선 말기 무인의 체면을 세움
조선 후기는 무관들이 별로 빛을 못 보던 시대였다. 문관 중심 사회에서 군사력은 계속 뒤로 밀렸고, 실전 대비도 약했다.
그런데 어재연은 최소한 전장에서 무관의 체면을 세웠다. 조선군이 약했던 건 사실이지만, 조선군 전체가 겁쟁이였던 건 아니다. 어재연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자기로 기억됨
어재연의 수자기는 단순한 깃발이 아니다. 신미양요, 광성보 전투, 조선 말기 저항의 상징이다.
수자기가 미국으로 넘어갔다가 2007년에 한국에 돌아왔고, 다시 반환 문제가 불거진 것만 봐도 이 깃발이 단순 천 조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역사 유물은 그냥 물건이 아니라 기억의 저장장치다.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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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어재연 개인의 잘못은 아니지만, 광성보 전투는 냉정하게 말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조선은 이미 군사기술에서 크게 뒤처져 있었다. 성곽에 틀어박혀 화승총과 구식 포로 근대 해군과 해병대를 막는 건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용감해도 화력 차이는 못 이긴다.
이건 어재연의 한계라기보다는 조선이라는 국가 시스템의 한계다.
전략은 없고 결사항전만 있었다
광성보 전투는 장렬했지만, 전략적으로 보면 처참했다.
조선은 서양 세력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고, 군사력 현대화도 늦었다. 그러니 현장 지휘관에게 남은 선택지는 “버티다 죽기”뿐이었다. 이건 명예롭지만, 국가 운영 차원에서는 최악이다.
개인의 충성심으로 국가의 무능을 포장하면 안 된다. 어재연은 훌륭했을 수 있지만, 그를 그렇게 죽게 만든 조선은 훌륭하지 않았다.
흥선대원군과의 관계
어재연은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과 분리해서 보기 어렵다.
흥선대원군은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펼쳤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척화 노선을 강화했다. 어재연은 그 정책의 최전선에서 싸운 장수였다.
다만 어재연을 두고 “쇄국 꼰대의 하수인”이라고만 보면 너무 단순하다. 당시 무관은 국가 명령을 수행하는 위치였다. 정책 방향을 정한 사람은 흥선대원군과 조정이었고, 어재연은 그 명령을 현장에서 수행한 군인이었다.
즉 대원군이 문 닫고 버티겠다고 선언한 사람이라면, 어재연은 그 문 앞에서 실제로 총 맞은 사람이다.
여담
- 동생 어재순도 광성보 전투에서 함께 전사했다.
- 광성보에는 신미양요 당시 전사자들을 기리는 시설이 있다.
- 어재연의 수자기는 신미양요 관련 유물 중 가장 상징성이 큰 물건이다.
- 미국 입장에서는 전리품이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약탈 문화재에 가깝게 받아들여진다.
- 광성보 전투는 이겼다고 정신승리하기도 어렵고, 졌다고 비웃기도 어려운 전투다. 그냥 조선 말기의 비극을 압축한 사건이다.
관련 문서
결론
어재연은 조선 말기의 영웅이라기보다는 패배 속에서 기억되는 장수다.
그는 나라를 구하지 못했다. 미군을 물리치지도 못했다. 광성보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자기 자리에서 싸웠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조선이 강해서 기억되는 사람이 아니라, 조선이 약했는데도 끝까지 버텼기 때문에 기억되는 사람이다.
이게 어재연의 비극이고, 동시에 어재연이 역사에 남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