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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5월 15일은 음력 생일이다. 양력으로는 1918년 6월 23일이며 현재 역사자료와 서울시 관련 연구자료에서도 이 날짜를 사용한다.[1]
심영의 원수. 일본식 발음으로 '긴또깡'이라고도 한다.
김두환이 아니다.
파워후다. 182cm, 90kg.
ㄴ 신체정보는 자료마다 다르다. 후대 자료에는 176cm 전후로 기록된 것도 있어 182cm라는 수치를 확정된 공식 기록으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 한국인 기준으로 체격이 상당히 컸던 인물이라는 평은 공통적이다.
1972년 11월 21일 오렌지 병으로 사망했다.
송일국의 외할아버지이자 대한, 민국, 만세의 외증조부.
온갖 깡패 미화물로 영웅화 된, 그저 깡패 새끼 반공 틀딲...이라기엔 인생 후반으로 갈수록 진보를 가장한 빨갱이로 변해갔다. 이 깡패 놈은 말로는 반공을 외치면서 또 한편으론 독점적 자본주의를 해소할 것, 북유럽식 분배와 일본 공산당을 언급했다. 라디오에서는 미스터 팍이 다스리던 그 시절에 공산당을 사례로 들며 사회 보장 제도 확충을 주장하다가 사회자에게 제지 당하기도 했다. 사회자가 엄청 당황하며 화제 돌리는 게 포인트.
깡패라더니 인민군의 민간인 싹쓸이하는 모습을 보고는 똥오줌을 바지에 지리면서 눈물 콧물 다 짜며 도망쳤다는 희대의 쫄보이다. 그 이전에도 야쿠자 보면 뒤로 숨기 바빴다고 하니 원래부터 겁쟁이가 맞다. 그러니까 총은 물론이고 칼도 제대로 못 다뤘다는 소리다. 그래서 깡패틀은 뺐다.
ㄴ 이런 일화 상당수는 김두한 본인의 회고록이나 주변인 증언, 후대의 야인물에서 확대 재생산된 것이 많아서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반대로 실제 경찰·미군정 기록에서 확인되는 김두한의 폭력조직 활동과 정치테러는 상당히 많다. 싸움 한 번으로 전국구 짱 먹었다는 식의 전설보다는 조직을 거느리고 실제 폭력을 행사한 정치깡패였다는 쪽이 확실한 사실에 가깝다.[1]
노동운동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참여한 여러 정당 중에서 진보당, 노농당 등 진보적인 정당들도 있었으며 학생 운동가, 좌파 진영과 많이 어울리기도 했다. 마지막엔 민주당의 뿌리가 된 신민당에 입당했다.
ㄴ 실제로 1950년대 후반에는 자유당을 떠난 뒤 진보당, 노농당 등 여러 정당을 전전했고 1967년 총선에서는 신민당 후보로 수원에서 출마했다. 다만 이걸 현대적인 의미의 좌파 정치인으로 완전히 전향했다고 보기에는 반공 성향도 끝까지 강하게 남아 있어 정치적 행보가 상당히 뒤죽박죽이다.[2]
머한민국 1대 조폭 보스로 그의 싸움 실력은 깡패 미화물에서 존나게 신격화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냥 깡패 두목 총칼 한 번 안 다뤄본 무식한 윾교 꼰대 정치인이었다. 박정희 때 비로소 이런 놈들을 잡아넣었기에 망정이지 50년대에는 이런 깡패들의 전성기였다. 그래서 김두한의 병신짓은 50년대에 절정에 이르게 된다.
사실 드라마는 50년대를 중심으로 김두한의 생애를 다뤘으면 김두한과 조폭이 지배하는 자유당과 대한민국 시민의 비참한 현실을 그리는 드라마라는 평가도 받았을지도 모르겠으나 김두한이 별로 한 것도 없는 시기(1930~40년대, 1960년대)만 다룬 결과, 김두한 미화하는 쓰레기 드라마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김두한 막장 짓의 전성기라고 평가 받는 1950년대가 아예 잘렸다.
출생
김두한은 독립군 총사령관(정확히는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자 김을동 의원의 부친이다.
김좌진이 서울에 잠깐 내려왔다가 만난 기생 여자와 사이에서 태어난 애라는 정황이 유력하다. 참고로 손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연예인 송일국이다.
ㄴ 김두한의 어머니는 일반적으로 김계월로 알려져 있다.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것은 김두한 본인의 생전 주장과 가족관계, 후대 기록에서 대체로 그렇게 취급됐지만, 이를 둘러싼 의문을 제기한 연구도 있다. 다만 홍성군에서 발간한 김좌진 관련 공식 자료에서도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명시하고 있다.[3]
병신 같은 깡패 생애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에 아들로 힘든 세월을 쪽바리에게 맞고 지냈지만 그후 쪽바리를 모두 박멸하고 신이 됨. 이 과정에서 몇몇 사람들은 깡패 생애라고 놀림 ㅠㅠ
쪽바리에게 맞았다는 건 본인 주장 뿐이고 실제론 민간인한테 삥 뜯고 깡패들 세력 싸움이나 했을 뿐이다. 더군다나 쪽바리 박멸은커녕 하야시랑 호형호제하던 놈이라서 세력권 노나묵은 걸 박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조선총독부에서 청년정신대(뭐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운영 자금 받아먹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건 김두한이 징용 가기 싫어서 만들었다고 카더라.
ㄴ 여기서 말하는 조직은 정확히는 반도의용정신대 계열이다. 1943년 조선총독부 고등계 형사 장명원이 불량청년들을 규합해 조직했고 김두한이 사실상 주도자로 활동했다는 반민특위 조사기록이 남아 있다. 반민특위는 장명원을 조사하면서 이 조직이 표면적으로 일제 정책에 협력하는 형태였다는 점도 기록했다.[4]
참고로 지 애미 이름도 기억 못하고 틀리게 말함. 한마디로 무뇌아. 그렇다고 친일파는 아닌 게, 일본 깡패들과 붙기도 했고 징용을 피하기 위해 총독부 산하 조직을 만들었다. 친일부역자는 맞지만 친일파라 보기엔 애매하다 하여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았다.
ㄴ 그래서 김두한의 일제강점기 행적은 독립운동가로 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친일인명사전에 정식 등재된 대표적 친일인사로 보기도 애매한 위치다. 반도의용정신대 활동처럼 일제 기관과 협력한 기록은 분명히 남아 있으므로 적어도 야인시대식의 순수 항일투사 이미지는 실제 역사와 거리가 크다.[4]
애매한 행보
어느 날 '와싱톤 정'이라는 사람이 형무소에 잡혀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 와싱톤 정은 생명이 위독한 상태로 형무소 밖에 내다버려졌는데 그걸 김두한이 의사양반을 협박해서 강제로 입원시켰다. 그리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강도질한 돈으로 와싱톤 정의 치료비를 지불했다. 주변 사람들을 있는 대로 쥐어짜고 탈탈 털어서 와싱톤 정을 살려냈다. 와싱톤 정의 생명의 은인이 되려고 천하의 날강도가 됐던 것이다. 이건 김두한이 자신을 의협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와싱톤 정이 비록 조지 워싱턴 미국 대통령 코스프레를 하고 있어도 일제의 앞잡이는 아니며 같은 동포였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김두한은 와싱톤 정과 깊은 친분이 생겼다.
ㄴ 다만 이 일화 역시 김두한 회고담에서 유명해진 이야기라 세부 과정까지 전부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김두한 관련 일화는 본인 자서전과 구술자료 의존도가 존나게 높다는 점을 항상 감안하고 봐야 한다.
해방 직후
김두한은 휘하 깡패를 3만 명이나 데리고 있을 정도로 위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기 동료였던 정진룡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친좌익 활동을 하게 되었고, 이걸 알게 된 김일성은 김두한에게 조선인민군 소장(대한민국 국군으로 치면 준장이다. 그렇긴 한데 저 당시 이 계급이면 사단장 급이다. 채병덕이 중장 계급으로 육군참모총장 하던 시절이었으며 김광협(김일성의 2번째 아내인 김성애의 오빠다. 2군단장으로 재직 중 직속상관인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때 낙동강 전선을 뚫지 못하는 바람에 소장으로 강등 먹은 후 동 부대(2군단) 참모장으로 좌천당했다.)이 조선인민군 중장(국군으로 치면 소장)으로 임명하고 조선인민군 소장 정복을 선물로 내줬다.
ㄴ 여기서 휘하 3만 명, 김일성이 직접 소장 계급과 정복을 제안했다 같은 구체적인 이야기는 김두한 자신의 회고에 크게 의존한다. 미군정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김두한이 해방 직후 좌익 청년조직에 잠시 관여했다가 대한민청 계열 우익 폭력조직의 핵심으로 돌아섰고 실제로 상당한 조직력을 행사했다는 정도다. 숫자와 김일성의 직접 제안까지 확정된 사료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김두한은 모종의 사유를 통해(백의사 출신 박용직과 내통해서 유진산에 의해 알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 김좌진이 공산당의 손에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그 소장 정복을 소각해버리고 김일성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해공 신익희를 두령으로 내세운 대한민주청년동맹의 행동 대장으로 활동하면서 9월 총파업 때 노동자를 죽창으로 찔러죽이는 등 많은 정치 테러와 공작을 벌였다. 좌우 합작위원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규식과 여운형에게 총을 꺼내기까지 했다.
ㄴ 해방 직후 김두한이 우익 정치깡패로 활동하며 좌익단체와 노동운동을 상대로 폭력행위를 벌였다는 큰 틀은 사실이다. 미군정도 김두한 일당의 폭력행위를 단순한 길거리 패싸움이 아니라 정치적 문제로 보고 결국 직접 체포·재판까지 했다.
하지만 1947년 조선청년전위대의 행동대장 정진룡과 수하들이 대한민청 본부에서 린치 당해 죽었다는 소식이 미군에 들어가자 같은 우익이 봐도 이건 너무했다 싶은지 조직을 공중 분해시켰다. 그리고 가담자인 김두한, 문영철, 김영태, 고경주 등 여러 간부들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지만 김두한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가석방되었다.
ㄴ 정진룡 사건은 기록으로 확실하게 확인된다. 1947년 4월 20일 대한민청 조직원들이 정진룡 등 조선청년전위대 인사들을 납치·폭행했고 정진룡 등 2명이 사망했다. 김두한은 미군정 군사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1948년 5월 맥아더의 재가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10월 이승만의 사면으로 풀려났다.[5]
대표적인 미화드라마 야인시대 등을 통해서 이때 오키나와 형무소로 갔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로는 김두한 자서전의 허풍이고 서울 근처의 형무소에서 사형을 대기하다가 장택상 등의 도움으로 집행이 면제되고 마찬가지로 가석방되었다.
ㄴ 실제 미군정 문서가 발굴되면서 최소한 오키나와 형무소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김두한은 용산 미군기지 내 미 제7사단 구금소에 수감돼 있었다.[5]
김두한이 석방되던 1948년에는 이미 공산주의자들이 말소되고 5.10 총선거가 끝나 국가의 기반이 잡히던 시절이었고, 김두한은 이승만을 찾아갔지만 이승만이 자신의 정치테러 행적을 디스하자 사이가 심하게 나빠졌다. 이것은 김두한이 야당 생활을 하는데 영향을 주게 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부산으로 자신의 조폭들을 몰고 피난했으나, 굴러온 돌과 박힌 돌이 만나면 충돌하는 법이라고, 부산을 장악한 마사이찌와 한탕 붙게 된다. 이때 명동의 서북청년단 출신 레슬링 선수 황병관이 마사이찌의 두목에게 총을 맞고 죽는 사건이 일어났고 마사이찌 두목은 헌병대로 연행되어서 사실상 김두한의 조직과 명동파가 부산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노동자들 등쳐먹으면서 여러 만행도 저질렀다.
휴전 협정 이후에는 옛 부하인 이정재의 동대문상인연합회가 부쩍 커지자 위협을 느껴서 화해의 의미로 건중친목회라는 단체를 설립하는데 회장은 김관철이 맡았다. 하지만 김관철의 위세가 날로 기세등등해지고 조금씩 자신한테 대들기 시작하자 김관철과 식사 중 허공에 총포탄을 쏘면서 한 번 혼을 냈다. 이것은 나중에 김두한이 무소속으로 당선된 후 꼬투리가 잡혀 잠시 형무소에서 형을 살게 된다.
김두한이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단체를 완전히 해산시키고 부하들은 전부 고향으로 낙향했다.
병신 같은 정치권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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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패망 후 이승만 꼬붕 노릇을 하며 사람 참 많이도 죽였다. 이때 수표교 시절 친구인 정진영도 빨갱이가 됐다며 직접 때려죽인 이야기는 이 새끼가 어떤 놈인지 알려줌.
ㄴ 야인시대의 정진영은 실제 정진룡을 모티브로 각색한 인물에 가깝다. 실제 정진룡 살해사건은 김두한이 직접 맨주먹으로 때려죽였다는 식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아니라 대한민청 조직원들이 납치·폭행해 사망하게 한 집단 폭력사건으로 확인된다.[5]
...은 찌라시에 불과하고 김두한은 국회의원 복원을 대가로 이기붕과 협상하여 자유당에 입당한 선례가 있지만 동시에 자유당과의 투쟁을 대대적으로 선포했다. 실제로 그러고 나서 의석을 채워줘야 하는 법안 통과 자리에 바람처럼 나타나 반대 표를 던지고 도망가버리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승만이나 이기붕 같은 자유당 주축 세력에서는 눈엣가시로 보고 있던 게 맞다. 거기에 이정재의 배신까지 물렸으니 본인들이 직접 달려들기도 뭐한 상대인 만큼 이정재를 시켜서 감금과 암살을 지시한 바 있음. 반공은 단순히 자신의 아버지 김좌진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숙청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근데 또 이놈은 말로는 반공 외치면서 또 한편으론 독점적 자본주의를 해소할 것, 북유럽식 분배와 일본 공산당을 언급했으며, 노동운동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참여한 여러 정당 중 진보당, 노농당 등 진보 정당들도 있었으며 학생 운동가, 좌파 진영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엔 민주당의 뿌리가 된 신민당에 입당했다.
반공극우 깡패가 어쩌다 이렇게 변했는진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로 신익희, 유진산 등 극우 출신들이 민주당계로 들어가는 경우가 흔했다. 오히려 자유당은 온건 보수파들이 주류였고 야당에 과거 극우 인사들이 많았다.
이승만 빽이 아니라 김두한은 야당인 한민당 측 인사의 정치 깡패였다. 예전에 심복 이정재가 통수 때리고 자유당 편에 붙어서 빡쳐서 그쪽으로 붙은 것. 그걸 토대로 국회의원까지 되지만 일자무식에 조또 정치란 걸 모르는 김두한이는 쩌리가 되었고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인한 관련자 처벌을 논하는 회의중 회의가 늪에 빠지자 빡쳐서 국회에 똥물을 붓다가 의원직이 정지되고 구속이 됨. 그래도 나름 당시에 반응은 좋았다. 할배 할매들한테 똥투척 물어봐라.
ㄴ 김두한은 제3대 국회에서는 1954년 서울 종로구 을에 무소속으로 당선됐고, 이후 자유당에 들어갔다가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해 제명됐다. 제6대 국회에서는 1965년 용산구 보궐선거에서 한국독립당 후보로 당선돼 다시 국회에 들어왔다.[6][4]
사사오입 개헌에 처음부터 끝까지 반대한 두 사람중 한 명이다. 그냥 꼬장부린 걸 수도 있다.
ㄴ 이건 진짜다. 1954년 11월 29일 자유당이 사사오입 논리로 개헌안 부결을 뒤집었을 때 재석 125명 중 반대 의사를 유지한 사람은 김두한과 민관식 두 명이었다. 김두한은 애초 개헌안 발의 서명 때부터 자유당 소속 의원 가운데 유일하게 빠져 있었다.[7]
즉 머리 굴리는 일은 조또 못해서 오로지 원초적 행위로만 당시 인식이 별로였던 정부에 대립함으로써 민심을 얻어낸 것이다. 뭐 사나이답다, 결단력 있다, 미화를 아무리 해봐야 정치인 치고는 지나치게 다혈질이었다는 평이 많다.
국회 오물 투척 사건
1966년 9월 삼성 계열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지자 김두한은 9월 22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정일권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들을 상대로 오물을 투척했다. 미리 양철통에 가져온 인분을 "이것은 밀수한 사카린이다"라는 취지로 말하며 국무위원석에 뿌린 그 사건 맞다.[8]
이 사건으로 내각이 일괄사표를 제출할 정도로 파장이 컸고 김두한은 구속된 뒤 의원직을 자진사퇴했다. 지금은 야인시대 합성물 때문에 개그 장면처럼 소비되지만 실제 당시 국회에서는 존나 큰 정치사건이었다.[9]
오물 투척 이후 5.16 군부에게 완전히 찍혀서 1967년에는 반공법 위반으로 연행되고 고문 당하는 중 배를 갈리든지 이빨을 뽑히든지 하는 고문을 당해서 사람을 완전히 못 쓰게 만들었다. 정계의 야(만)인이던 놈을 이렇게라도 힘을 빼야 중앙정보부와 김형욱 입장에서는 편했기 때문이었다.
ㄴ 1967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것 자체는 사실이다. 당시 신민당 후보로 수원에서 선거운동을 하면서 "북한 농촌에도 전기가 들어가는데 우리 농촌은 헐벗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돼 구속됐고 같은 해 11월 보석으로 풀려났다.[4][10] 다만 배를 가르고 이빨을 뽑았다는 식의 구체적인 고문 내용은 김두한 본인과 주변인들의 후대 증언 의존도가 높아 어느 수준까지 사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1972년 11월 19일에 호텔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됐고 병원으로 옮겨지고 20일 퇴원해서 21일 자택에서 뇌출혈로 죽었다.(야인시대에선 오렌지병으로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은 걸로 각색했다)
ㄴ 사망일은 1972년 11월 21일이 맞다. 당시 기록에서는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정릉동 자택에서 사망한 것으로 정리되며, 뇌출혈 또는 고혈압성 뇌질환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10]
암살 당했다는 음모론이 있다. 오랜 지병으로 쓰러졌다고 하지만 여기에는 의문점이 많다. 비록 고문을 당하긴 했지만 여전히 곳곳에서 박정희를 공공연히 욕하고 다닌다든지 사업에 손을 댄다든지(물론 사기당해서 망함) 라디오 방송에 나와서 정치 테러 행적을 미화하고 다닌다든지 여러 짓거리를 계속 했다. 그렇게 멀쩡한 사람이 출근하던 중 갑자기 쓰러진다는 것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ㄴ 하지만 현재까지 암살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사료나 수사결과는 확인되지 않는다. 건강이 나빠진 상태였고 당시 자료도 고혈압에 따른 사망으로 기록하므로 암살설은 말 그대로 음모론으로 보는 것이 맞다.
야인시대 방영 전후에 백만 불 미스터리라는 프로그램에서 김두한의 사망에 대해 다룬 것이 있는데 야인시대에 나온 실존인물 이만섭과 조일환을 섭외해서 인터뷰까지 따냈다. 여기서 이만섭은 김두한을 바른 말 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우리가 아는 미화된 김두한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데 이것 때문에 과연 어디까지가 미화이고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의문점이 제기되곤 한다.
의외의 능력
세간에는 김두한이 주먹질만 하는 골 빈 새끼로 알려졌지만 의외로 두뇌는 잘 돌아가던 사람이었다. 최소한 순발력이나 임기응변, 깡패짓 중 야부리 터는 과정에서 숙성된 말빨은 확실했다.
- 김일성의 제안 거절: 김두한의 입지를 보고 감탄한 김일성은 김두한의 친구 정진룡도 공산주의자이니까 정진룡을 적극 이용해 김두한을 꼬셔서 사단장 시켜주려고 했다. 그런데 김두한이 이걸 거절한 건 신의 한 수였다. 물론 백의사 측에서 김좌진이 공산당에게 죽은 걸 알려준 것이었지만 그래도 계급에 현혹되지 않은 건 진짜 현명한 판단이었다. 만약 계급에 눈이 멀어 이걸 응했더라면 김두한은 1950년대까지는 대우 받았겠지. 저 유명한 김좌진의 후광도 있었겠다. 하지만 남일처럼 명예는 그대로 남겨진 채 목숨만 지워졌을 것이다. 김정일이 어떤 인간인지 생각해보면 답은 뻔하다. 지 애비 밑에서 온갖 물밑 공작을 쳐하던 새끼가 바로 김정일이며 실제로도 남일을 차로 들이받아 죽인 것 역시 김정일이다.
- ㄴ 앞부분의 김일성 제안 자체가 김두한 회고에 크게 의존하므로 실제로 이런 제안이 있었는지를 확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남일의 1976년 교통사고 사망을 김정일이 자동차로 들이받아 죽였다고 확정할 만한 자료도 없다. 북한 권력투쟁과 관련된 암살설 가운데 하나 정도로 보는 게 맞다.
- 심영 저격: 심영을 저격하기 위해 그를 미행했고 딱 종로구와 중구의 경계선인 광교 일대에서 저격했다. 굳이 구 경계선에서 저격한 이유는 종로구와 중구 중 어느 쪽의 담당구역인지 애매하게 만들어서 서로 책임을 떠넘기게 하려는 의도였다. 김두한이 의도대로 종로구와 중구는 서로 심영이 저격당한 사건을 떠넘기느라 사건이 흐지부지 되었다.
- ㄴ 심영이 해방 직후 우익 폭력배의 총격을 당한 사건 자체는 알려져 있지만, 김두한이 직접 미행하고 행정구역 경계선을 계산해서 저격 장소를 고른 것까지는 김두한 계열 회고담에서 나온 이야기다. 야인시대의 상하이 조가 총으로 고자를 만드는 장면도 당연히 극적 각색이 상당히 들어갔다.
- 5.16 군사정변: 반인반신이 정권을 잡자마자 바로 그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하고 그와 기념 사진도 촬영하면서 최대한 친한 척을 하였고 자신의 조직 역시 반공청년단 비슷하게 둔갑시켰다. 빠른 권모술수를 부려 살아남음은 물론, 국회의원까지 획득한 김두한은, 아직도 지들 세상인 줄 알고 멍청하게 앉아있다가 골로 가버린 이정재, 임화수 패거리들보다 머리가 훨씬 좋았음이 틀림없다.
- ㄴ 다만 김두한이 다시 국회의원이 된 것은 5.16 직후가 아니라 1965년 11월 용산구 보궐선거였다. 한국독립당 후보로 당선됐고 직후 한독당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됐으나 재판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4]
국회의원 경력
김두한은 깡패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국회의원도 잠깐 한 번 해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제3대와 제6대 국회의원을 지낸 재선 의원이다.[1]
1954년 제3대 총선에서는 서울 종로구 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8,762표, 28.6%를 얻어 당선됐다.[6] 이후 자유당에 들어갔지만 사사오입 개헌을 끝까지 반대해 자유당에서 제명됐다. 1958년 제4대 총선에서는 다시 종로구 을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5년에는 용산구 보궐선거에서 한국독립당 후보로 당선돼 제6대 국회에 복귀했다. 그러나 다음해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의원직을 자진사퇴했다. 1967년에는 신민당 후보로 수원에서 출마했으나 반공법 사건까지 겹치면서 낙선했고 이것이 사실상 마지막 본격적인 선거 도전이 됐다.[4]
그렇다고 정치철학이 한결같았던 사람은 아니다. 무소속, 자유당, 진보당, 노농당, 한국독립당, 신민당 등 정말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반공 우익 정치깡패 출신이 자유당의 개헌에 반대하고 나중에는 야당 후보로 군사정권을 까고 다닌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정치의 혼종 그 자체다.
김두한 신화와 실제
김두한을 둘러싼 문제는 실제 기록과 본인 자서전, 주변인들의 회고, 영화와 드라마에서 만들어낸 신화가 뒤죽박죽 섞였다는 것이다.
확실히 기록으로 남은 것만 봐도 일제강점기 종로 일대의 폭력조직 인물이었고, 해방 뒤에는 우익 정치깡패 조직의 핵심으로 활동했으며 정진룡 사건으로 미군정 재판에서 사형까지 선고받았다. 국회의원으로서는 사사오입 개헌 반대와 국회 오물 투척 사건처럼 실제로 상당히 튀는 행동도 했다.[5][7][8]
반면 일본 야쿠자를 혼자 박살냈다든지, 김일성이 직접 장군 자리를 들고 찾아왔다든지, 심영 저격 장소를 행정구역 경계로 골라 경찰을 농락했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김두한 자신의 회고나 후대 야인물의 영향이 크다.
즉 실제 김두한도 평범한 인간은 절대 아니었는데, 후대 작품들이 굳이 거기에 DLC를 존나게 깔아준 셈이다.
김두한 역할 배우들
- 공화국 시리즈
- 강인덕: 원조 김두한. 실제로 시흥시에서 김두한 부하들한테 술 얻어 마셨다.
- 무풍지대
- 야인시대
- 곽정욱: 10대 김두한. 딱히 임팩트는 없다. 어린이 김두한이라서 그렇다.
- 안재모: 20대 김두한. 실제 김두한 얼굴을 최대한 미남으로 만들면 나오는 얼굴이 안재모 얼굴이다. 그리고 미모의 차이가 커서 그렇지(안재모가 너무 미남이라서 그렇지) 김영철보다 훨씬 김두한을 많이 닮았다.
- 김영철: 40대 김두한. 정말 실존인물 김두한과는 하나도 안 닮았지만 야인시대 제작팀이 태조 왕건도 제작했기 때문에 거기서 궁예로 나온 김영철이 여기에도 캐스팅 되었을 뿐이다. 같은 원리로 김학철 역시 태조 왕건에서는 박술희로 나온 것이 인연이 되어 야인시대에서도 조병옥 박사로 나온다.
- 장군의 아들
- 박상민: 인상만 김두한과 좀 비슷하지, 그냥 다르게 생겼다.
- 왕초
여담
- 김두한의 호는 의송(義松), 가송(嘉松)으로 알려져 있다.
- 제3대·제6대 국회의원을 지낸 재선 의원이다.[1]
-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때 자유당 소속 의원 가운데 개헌안 서명을 거부했고, 번복 가결 때도 민관식과 함께 끝까지 반대했다.[7]
- 1947년 정진룡 사건으로 미군정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기록이 실제로 남아 있다.[5]
- 1966년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은 드라마 설정이 아니라 진짜로 일어난 사건이다.[8]
- 1967년 신민당 후보로 수원에서 출마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으며 같은 해 11월 보석으로 풀려났다.[4]
- 1972년 11월 21일 사망했는데 하필 이날은 유신헌법 국민투표가 실시된 날이기도 하다.[10]
- 현재 대중에게는 실제 정치깡패 김두한보다 야인시대의 안재모·김영철 버전과 심영 합성물 속 김두한이 훨씬 유명하다.
각주
- ↑ 1.0 1.1 1.2 1.3 서울특별시 - 서울지역 민주·평화·근대역사유적의 스토리텔링 연구
- ↑ 경향신문 - 1950년대 김두한 정치활동
- ↑ 홍성군 -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
- ↑ 4.0 4.1 4.2 4.3 4.4 4.5 4.6 이영재, 「유신과 강제, 1970년대 액션영화와 법범의 서사」
- ↑ 5.0 5.1 5.2 5.3 5.4 서울신문 - 김두한 미7사단 구금소 수감 문건
- ↑ 6.0 6.1 서울역사편찬원 - 현대 서울의 정치
- ↑ 7.0 7.1 7.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사사오입 개헌
- ↑ 8.0 8.1 8.2 동아일보 - 1966년 김두한 국회 오물투척
- ↑ 국회사 주요연표 - 1966년 9월 22일
- ↑ 10.0 10.1 10.2 수원사랑 2015 봄 - 김두한과 수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