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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 (史記) | |
|---|---|
| 저자 | 사마천 |
| 작성 시기 | 기원전 1세기경 |
| 작성된 국가 | 전한 |
| 언어 | 상고 한어(한문) |
| 분량 | 130권 |
| 시기 | 전설상의 황제 ~ 한무제 태초 연간(기원전 104~101년경) |
| 치세 | 황제 ~ 한무제 |
| 원래 명칭 | 태사공서(太史公書), 태사공기(太史公記) |
| 형식 | 기전체 통사 |
| 구성 | 12본기·10표·8서·30세가·70열전 |
개요
《사기》(史記)는 중국인인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로 24사 중 첫 역사서이다.
중국의 첫 번째 기전체 통사이자 동아시아 역사 서술의 형식을 확립한 역사서.
전한의 역사가 사마천이 기원전 1세기 초에 완성한 역사서로, 중국에서 전승되는 가장 오래된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부터 한무제의 태초 연간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사마천은 역대 제왕과 제후, 관료와 장군뿐 아니라 학자, 협객, 상인, 외국의 여러 민족까지 폭넓게 기록했다.
전체 130권으로 구성되며, 12본기·10표·8서·30세가·70열전으로 나뉜다. 이는 후대 한서, 후한서, 삼국지 등 중국 정사들이 계승하게 되는 기전체 역사서의 기본적인 형식이 되었다.
《사기》는 이십사사의 맨 앞에 수록되지만, 중국에서 가장 먼저 작성된 모든 역사 기록이라는 뜻은 아니다. 《춘추》, 《좌전》, 《국어》 등 《사기》보다 앞선 역사 기록과 서적도 존재했다. 《사기》의 독창성은 이전의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장기간의 역사를 통일된 체계로 서술했다는 데 있다.
또한 최초부터 《사기》라는 제목으로 불렸던 것은 아니다. 한나라 시대에는 주로 《태사공서》(太史公書) 또는 《태사공기》(太史公記)로 불렸으며, 《사기》라는 명칭은 후대에 일반화되었다.[1]
원문 정보상자에서는 기록 범위를 기원전 2070년부터 기원전 101년까지, 총 1969년으로 설명했지만, 기원전 2070년은 하나라 성립에 관한 전통적 연대 추정 중 하나일 뿐이다. 《사기》는 하나라보다 앞선 황제·요·순 등의 전설적 시대부터 시작하므로, 해당 연도를 책 전체의 정확한 시작점으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특징
사마천과 궁형
참고로 사마천은 그때 고자였다. 황제에게 밉보여 참수형과 거세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는데 바로 이 사기를 계속 집필하기 위해 거세당했다고 카더라. 그래서 사기에 한무제를 존나 까는 내용을 적었다.
사마천은 전한 무제 때 태사령을 지낸 인물이다. 아버지 사마담 역시 역법과 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관리였으며, 사마천은 아버지가 완성하지 못한 역사 편찬 사업을 이어받았다.
사마담은 기원전 110년 무렵 세상을 떠났고,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역사서 집필에 전념했다. 기원전 104년 무렵 본격적으로 편찬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원전 99년 이릉 사건이 발생하면서 인생이 완전히 꼬여버렸다.
당시 한나라 장군 이릉은 흉노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뒤 항복했다. 한무제는 이에 격노했고, 사마천은 황제 앞에서 이릉이 처했던 군사적 상황과 개인의 능력을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로 변호했다.
문제는 이것이 한무제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황제를 기만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었고, 결국 궁형을 받게 되었다.
궁형은 남성의 생식기를 훼손하는 형벌로,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극심한 수치와 치욕을 동반했다. 당시에는 중형을 면하기 위해 거액의 돈을 납부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사마천은 이를 감당할 처지가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사마천이 이러한 치욕을 견디며 살아남은 중요한 이유는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은 역사서 집필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인 「보임안서」(報任安書)에서 자신이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저술을 완성하려는 이유를 설명했다.
| “ |
究天人之際,通古今之變,成一家之言。 |
” |
— 사마천, 「보임안서」
|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를 꿰뚫어 하나의 독자적인 역사관을 완성하겠다는 뜻이다.
궁형을 받은 뒤에도 사마천은 집필을 이어갔으며, 일반적으로 기원전 91년 무렵 《사기》의 초고를 완성한 것으로 본다.[2]
ㄴ 황제한테 찍혀서 인생이 망했는데 그 황제의 시대까지 역사서로 남겨버렸다.
ㄴ 황제는 사마천을 벌했지만 2,000년 뒤 사람들이 한무제의 시대를 연구할 때 읽는 책은 사마천이 쓴 것이다.
다만 사마천이 한무제를 비판한 모든 이유를 궁형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의 역사 서술에는 황제의 대외원정과 경제정책, 신하들의 권력투쟁 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나타나지만, 이는 정치적·역사적 판단과 개인의 경험이 결합한 결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명분보다 현실
또항 당시 유교사회인 한나라에서 중시하던 명분을 좆까라 하고 버린 다음 현실 위주로 작성했다. 그래서 항우를 패왕으로 인정하며 띄워주기도 했다.
정확히는 사마천이 유교적 가치관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공자와 《춘추》를 높이 평가했으며, 역사를 통해 인물의 도덕성과 정치적 책임을 판단하려 했다.
그러나 실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라면 형식적인 지위와 관계없이 역사 서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부여했다.
항우는 정식으로 중국 전체를 통일한 황제가 아니었지만, 초한전쟁 당시 실질적인 패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본기에 수록되었다. 여태후 역시 황제의 칭호를 가진 군주가 아니었으나 한나라 조정의 실권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본기에 수록되었다.
반대로 공자는 제후국의 군주가 아니었음에도 세가에 수록되었다. 진승도 왕조를 안정적으로 세운 제후가 아니었지만, 진나라에 반기를 든 반란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세가에 수록되었다.
즉, 명목상 황제인지 제후인지에만 집착하지 않고 그 인물이 실제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중시한 것이다.
이러한 편성은 후대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황제도 아닌 항우를 본기에 넣고, 왕조를 세우지 못한 진승을 세가에 넣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사기》의 독창성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ㄴ 유방이 황제가 되었으니 유방만 본기에 넣으면 되는데, 항우가 천하를 뒤흔들었다고 본기에 넣어버린 것이다.
ㄴ 한나라 역사서를 쓰면서 한나라를 세운 사람의 최대 라이벌까지 주인공급으로 대우했다.
기전체의 확립
중국 정사의 시작이며, 이후 중국 정사를 쓰는데에 자주쓰이는 형식인 '기전체'는 여기서 기인한다.
기전체(紀傳體)는 제왕의 역사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본기와 주요 인물의 전기인 열전 등을 결합하여 역사를 정리하는 서술 방식이다.
기전체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편년체 역사서와 국가별로 역사를 정리하는 방식 등이 널리 활용되었다.
《사기》는 역사 전체를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시각에서 서술하는 체계를 확립했다.
| 구성 | 분량 | 내용 |
|---|---|---|
| 본기(本紀) | 12권 | 제왕과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의 역사 |
| 표(表) | 10권 | 국가·제후·공신 등의 연대와 사건을 비교하는 표 |
| 서(書) | 8권 | 예악·군사·역법·천문·제사·치수·경제 등 제도의 역사 |
| 세가(世家) | 30권 | 제후국과 유력 가문,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의 기록 |
| 열전(列傳) | 70권 | 장군·관리·학자·상인·협객·주변 민족 등의 기록 |
| 합계 | 130권 | 기전체 통사 |
예를 들어 진시황의 행적을 알고 싶다면 「진시황본기」를 읽으면 되지만, 그 시대의 제도와 경제정책을 이해하려면 「서」를 읽어야 하고, 신하나 주변 민족에 관한 기록은 「열전」에서 찾아야 한다.
같은 역사적 사건이 여러 편목에 걸쳐 등장하기도 한다. 인물마다 다른 관점에서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기 때문에 역사 연구에서는 관련 편목을 함께 대조해야 한다.
문학적 가치
《사기》는 역사서인 동시에 중국 고전 산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사마천은 인물의 행적을 단순히 나열하지 않고 대화와 갈등, 결단, 패배, 몰락 등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했다.
대표적으로 항우가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우미인과 이별하는 장면이나,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떠나는 장면 등은 후대 문학과 연극,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백이열전」에서는 도덕적인 사람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화식열전」에서는 재산과 경제활동이 인간 사회에서 가지는 중요성을 논의한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와 인간에 대한 관찰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사기》는 단순한 사건 기록을 넘어 문학 작품으로도 읽힌다.
화식열전
부자에 관한 명언
사기 마지막 부분에 '화식열전'이라고 있는데 이 책에서 나온 유명한 말 중에 '사람은 자기보다 10배 잘난 사람을 헐뜯고, 100배 잘난 사람을 두려워하고, 1000배 잘난 사람에게는 고용당하고, 10000배 잘난 사람에게는 노예가 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정확히는 「화식열전」이 마지막 부분에 있는 것은 맞지만, 《사기》의 마지막 권은 130권 「태사공자서」이고 「화식열전」은 129권이다.
또한 이 구절에서 말하는 비교 대상은 막연히 '잘난 사람'이 아니라 재산이 많은 사람이다.
| “ |
凡編戶之民,富相什則卑下之,伯則畏憚之,千則役,萬則僕,物之理也。 |
” |
— 《사기》 권129 「화식열전」
|
대략 다음과 같은 뜻이다.
| “ |
사람의 재산이 열 배 차이 나면 자신을 낮추고, 백 배 차이 나면 두려워하며, 천 배 차이 나면 그를 위해 일하고, 만 배 차이 나면 종처럼 섬기게 된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다. |
” |
— 「화식열전」의 취지를 옮긴 번역
|
여기서 원문의 '열 배 차이 나면 헐뜯는다'는 해석은 한문 원문과 다르다. 卑下之는 자신을 낮추거나 상대에게 비굴하게 대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또한 '만 배 부자에게 노예가 된다'는 표현도 실제 노예 신분으로 반드시 전락한다는 법칙이 아니라, 경제적 격차가 극단적으로 커지면 인간관계가 종속적으로 변한다는 설명이다.[3]
ㄴ 2,000년 전에 이미 자본주의의 불편한 진실을 간파했다.
ㄴ 사실 사마천 입장에서는 부자한테 아부하는 사람들 구경하다가 쓴 말일 수도 있다.
사마천의 경제관
「화식열전」은 《사기》에서 가장 독특한 편목 가운데 하나다.
사마천은 부자가 된 상인과 사업가들의 활동을 기록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동을 중요한 역사적 현상으로 인정했다.
고대 중국에서는 흔히 농업을 근본적인 산업으로 보고 상업을 말업으로 낮춰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사마천은 시장과 상품 유통, 생산과 소비의 중요성을 비교적 현실적인 관점에서 설명했다.
| “ |
故善者因之,其次利道之,其次教誨之,其次整齊之,最下者與之爭。 |
” |
— 《사기》 「화식열전」
|
백성을 잘 다스리는 방법은 그들의 자연스러운 경제활동을 따르는 것이며, 가장 좋지 않은 방법은 통치자가 직접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것이라는 취지다.
이는 사마천이 모든 국가 개입을 부정했다는 뜻은 아니지만, 경제활동을 통치자의 일방적인 명령만으로 통제하려는 태도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는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유만으로 상인을 무시하지 않았으며,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역사에 기록할 가치가 있는 인물로 보았다.
평준서와의 관계
「화식열전」과 함께 읽으면 좋은 편목은 30권 「평준서」다.
「평준서」는 한무제 시기의 재정과 경제정책을 다룬다. 한무제는 흉노와의 장기적인 전쟁과 대규모 사업으로 막대한 재정 지출을 했으며, 이를 충당하기 위해 소금과 철의 전매, 균수·평준 정책 등 국가의 경제적 개입을 확대했다.
「평준서」는 이러한 정책과 재정 운영의 변화를 기록하고, 「화식열전」은 상업과 부의 축적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다.
따라서 두 편목을 함께 읽으면 사마천이 경제 문제를 단순히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민간 경제의 관계라는 관점에서도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번역 및 주석
정사삼국지 번역을 씹창내서 쌍욕먹는 김원중이 번역했는데, 삼국지와는 달리 이건 번역을 아주 제대로 해놨다.
국내에는 김원중을 비롯한 여러 번역자와 연구자가 번역한 《사기》가 출간되어 있다.
김원중의 번역에 대한 평가는 독자마다 다를 수 있으며, 특정 번역자가 맡은 다른 역사서의 번역 품질이 곧바로 《사기》 번역의 정확성을 입증하거나 부정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사기》는 원문의 어휘와 인명, 관직명, 고대 지명, 역사적 배경 등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번역본을 선택할 때는 주석과 인명·지명 해설, 원문 대조 여부를 함께 살펴보는 편이 좋다.
사기삼가주
《사기》는 오랜 세월 여러 학자의 연구 대상이 되었으며, 그중 대표적인 주석 세 종류를 합쳐 사기삼가주(史記三家注)라고 한다.
- 《사기집해》(史記集解) - 남북조 시대 남조 송의 배송지와 동시대의 학자 배인(裴駰)이 편찬한 주석서이다. 여러 선행 주석과 사료를 모아 《사기》의 내용을 설명했다.
- 《사기색은》(史記索隱) - 당나라의 사마정이 편찬했다. 인명과 지명, 제도와 원문의 의미 등을 상세하게 해설했다.
- 《사기정의》(史記正義) - 당나라의 장수절이 편찬했다. 지리와 역사적 배경에 관한 설명이 풍부하다.
여기서 《사기집해》를 편찬한 배인과 《삼국지》의 주석을 편찬한 배송지는 서로 다른 인물이다. 둘 다 역사서 주석으로 유명하므로 혼동하기 쉽다.
이 세 주석은 오늘날에도 《사기》의 원문을 읽고 해석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사용된다.[4]
후대의 보충과 원본 문제
현재 전하는 《사기》 130권이 사마천의 손에서 나온 원고 그대로 보존된 것은 아니다.
《한서》 「예문지」에는 《사기》 일부 편목이 제목만 남고 본문이 없어졌다는 취지의 기록이 있으며, 후대의 저소손 등이 결락된 내용을 보충했다고 전해진다.
대표적으로 12권 「효무본기」는 사마천의 원래 편명이 '금상본기'(今上本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전하는 「효무본기」의 상당 부분은 「봉선서」를 바탕으로 보충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일자열전」, 「귀책열전」, 「삼왕세가」 등에도 후대 보충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마천은 한무제와 같은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황제를 가리킬 때 '지금의 황제'라는 뜻으로 금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지금 전하는 제목은 한무제가 사망한 뒤의 시호를 사용한다. 이 자체가 후대의 편집이 개입되었다는 중요한 단서다.
따라서 《사기》를 읽을 때에는 역사서의 저술 시기와 현재 전하는 판본의 형성 과정을 구분해야 한다.
구성
《사기》는 130권으로 구성된다. 아래 목록은 통행본의 권수와 편목을 기준으로 하며, 본기·표·서·세가·열전의 순서를 따른다.
본기
본기(本紀)는 제왕의 계보와 정치적 사건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부분이다. 다만 항우와 여태후처럼 정식 황제가 아니어도 실제 최고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 포함되어 있다.
- 1권 - 오제본기
- 삼황오제의 오제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말한다. 사마천은 삼황을 허구로 보았으며 오제부터 실존하는 인물들이라고 주장했다. 주요 인물은 황제(공손헌원), 전욱, 제곡(고신), 요(방훈), 순(중화)이다.
- 다만 사마천이 삼황을 수록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삼황의 존재를 현대적인 의미에서 허구라고 판정했다는 뜻은 아니다. 고대 전승 가운데 역사서에 수록할 만한 기록을 선별한 것이며, 오제의 실존 역시 현대 역사학에서 그대로 확정된 사실은 아니다.
- 2권 - 하본기
- 황제 공손헌원부터 그의 후손들인 하나라의 17명의 왕(우왕~걸왕)까지를 기록했다. 서경의 하서를 짜집기한 내용들이다.
- 하나라의 왕계와 우왕의 치수 전승을 다룬다. 하나라가 실제로 어떤 형태로 존재했는지는 고고학적 유적과 문헌 기록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 3권 - 은본기
- 4권 - 주본기
- 주의 시조 후직부터 초대 무왕~37대 난왕까지를 기록했다.
- 주나라의 건국과 서주·동주, 왕실의 쇠퇴를 기록했다.
- 5권 - 진본기
- 6권 - 진시황본기
- 전국 통일 이후 시황제와 2세 황제, 진의 멸망까지를 기록했다.
- 진나라의 통일과 중앙집권정책, 대규모 토목사업, 진승·오광의 난과 진의 멸망을 다룬다.
- 7권 - 항우본기
- 패왕 항우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항우는 정식 황제가 아니었지만 진나라 멸망 이후 실질적으로 패권을 행사했으므로 본기에 수록되었다.
- 8권 - 고조본기
- 한 고조 유방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유방의 출신과 반진 활동, 초한전쟁, 전한 건국과 통치 등을 다룬다.
- 9권 - 여태후본기
- 한 혜제, 전소제, 후소제 시기를 다스린 실권자 여태후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여태후는 황제의 칭호를 갖지 않았지만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한 인물로 평가되어 본기에 수록되었다.
- 10권 - 효문본기
- 한 문제의 일대기.
- 한 문제의 통치와 문경지치의 기반이 되는 정책을 다룬다.
- 11권 - 효경본기
- 12권 - 효무본기
- 한 무제의 일대기.
- 현재 전하는 본문은 무제의 봉선과 제사에 관한 기록의 비중이 높다. 사마천의 원래 「금상본기」가 소실되고 「봉선서」 등을 이용해 보충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원본 그대로라고 보기는 어렵다.
- (보사기 - 삼황본기)
표
표(表)는 왕조와 제후국의 역사, 중요 인물과 사건의 연대를 비교할 수 있도록 정리한 부분이다. 서술식 역사서에서 서로 다른 국가의 동시대 사건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보완한다.
- 13권 - 삼대세표
- 하나라, 은나라, 통일 주나라 시대의 연표.
- 하·상·주 삼대의 계보와 연대 관계를 정리한 표다.
- 14권 - 십이제후연표
- 춘추 시대 12제후들의 연표.
- 주요 제후국의 사건을 주나라 왕실의 연대와 비교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
- 15권 - 육국연표
- 전국 시대 주나라와 전국 7웅의 연표.
- 전국시대 주요 국가들의 연대와 사건을 비교하는 표다. 제목은 육국연표이지만 진나라와 다른 국가들의 관계를 함께 다룬다.
- 16권 - 진초지제월표
- 진나라 2세 황제 이후 초나라와 한나라 전쟁의 연표.
- 진나라 말기에서 초한전쟁에 이르는 급격한 정세 변화를 월 단위로 정리했다.
- 17권 - 한흥이래제후연표
- 한 고조 이후 한나라 왕국들의 연표.
- 전한의 제후왕과 그 계보를 다룬다.
- 18권 - 고조공신후자연표
- 한나라 개국공신들의 연표.
- 유방의 건국에 기여하여 후작에 봉해진 인물들과 후손들의 계보를 정리했다.
- 19권 - 혜경간후자연표
- 한 혜제~경제 시기 제후들의 연표.
- 혜제와 경제 시기에 봉해진 제후들의 계보를 정리했다.
- 20권 - 건원이래후자연표
- 한나라 시대에 분봉된 제후들의 연표.
- 정확히는 한무제의 건원 연간 이후 봉해진 후작들을 중심으로 정리한 표다.
- 21권 - 건원이래왕자연표
- 기원전 130년~기원전 116년에 분봉된 제후들의 아들들의 연표.
- 한무제 시대에 제후왕의 자손들이 후작으로 분봉된 상황을 정리했다. 추은령 등 황실의 지방 제후 통제정책과 연결해서 읽을 수 있다.
- 22권 -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
- 한나라 시대의 여러 장수, 재상, 명신의 행적을 기록한 연표.
- 한나라 성립 이후 주요 관직의 재임자와 정치적 사건을 비교하는 자료다.
서
서(書)는 정치제도와 경제, 문화, 천문학과 군사 등 각 분야의 변화를 전문적으로 다룬 부분이다. 후대 정사의 지(志)에 해당하는 형식이다.
- 23권 - 예서
- 예의범절과 관련된 것을 기록했다.
- 국가의 의례와 예제, 사회질서에 관한 사상을 다룬다. 현재 전하는 내용에는 후대 보충의 문제가 있다.
- 24권 - 악서
- 음악과 관련된 것을 기록했다.
- 음악과 정치, 의례의 관계를 다룬다. 예서와 마찬가지로 원문의 전승 과정에서 결락과 보충 문제가 제기된다.
- 25권 - 율서
- 병법과 군사에 관한 것을 기록했다.
- 율관과 음률, 군사 및 전쟁과 관련된 내용을 함께 다루는 편목이다. 단순한 전쟁사만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 26권 - 역서
- 27권 - 천관서
- 천문학에 관한 것을 기록했다.
- 천체의 운행과 별자리, 천문 관측과 점성술적 해석 등을 다룬다. 현대 천문학과는 다른 고대의 우주관을 반영한다.
- 28권 - 봉선서
- 종묘와 제사에 관한 것을 기록했다.
- 황제의 봉선 의례와 국가 제사, 불로장생 및 신선술에 대한 한무제의 관심 등을 다룬다.
- 29권 - 하거서
- 치수 사업에 관한 것을 기록했다.
- 황하 등 주요 하천의 치수와 수리사업, 운하 건설을 다룬다.
- 30권 - 평준서
- 재정과 경제에 관한 것을 기록했다.
- 한무제 시기의 재정정책과 소금·철 전매, 균수·평준 정책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편목이다.
세가
세가(世家)는 원래 제후국과 유력한 가문의 역사에 해당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정식 제후가 아닌 공자나 진승, 소하와 장량 등에게도 역사적 중요성에 따라 세가를 부여했다.
- 31권 - 오태백세가
- 태백·중옹부터 부차까지의 오나라 역사를 기록했다.
- 오나라의 계보와 흥망을 다룬다.
- 32권 - 제태공세가
- 강태공부터 강공까지의 제나라 역사를 기록했다.
- 강태공을 시조로 하는 강성 제나라의 역사다.
- 33권 - 노주공세가
- 34권 - 연소공세가
- 35권 - 관채세가
- 관나라, 채나라, 조나라의 역사를 기록했다.
- 여기서 조나라는 전국시대의 조나라(趙)가 아니라 춘추시대의 조나라(曹)다. 관·채·조 세 나라의 역사를 함께 다룬다.
- 36권 - 진기세가
- 호공부터 민공까지의 진나라 역사와 동루공부터 간공까지의 기나라 억사를 기록했다.
- 정식 편명은 진기세가(陳杞世家)다. 이때의 진(陳)은 춘추시대 진나라로, 진시황의 진나라(秦)와 다르다.
- 37권 - 위강숙세가
- 위강숙부터 군 각까지의 위나라 역사를 기록했다.
- 춘추시대의 위나라(衛)를 다룬다. 전국시대의 위나라(魏)와 혼동하기 쉽다.
- 38권 - 송미자세가
- 미자계-미중연부터 강왕까지의 송나라 역사를 기록했다.
- 상나라 왕실의 후손이 세운 송나라의 역사다.
- 39권 - 진세가
- 당숙우부터 정공까지의 진나라 역사를 기록했다.
- 춘추시대의 강국 진나라(晉)를 다룬다. 영성 진나라(秦)와는 별개의 국가다.
- 40권 - 초세가
- 웅역부터 부추까지의 초나라 역사를 기록했다.
- 초나라의 성장과 쇠퇴를 다룬다.
- 41권 - 월왕구천세가
- 무여부터 무강까지의 월나라 역사를 기록했다.
- 월왕 구천과 오월쟁패 등의 내용을 포함한다.
- 42권 - 정세가
- 환공부터 강공까지의 정나라 역사를 기록했다.
- 춘추시대의 정나라를 다룬다.
- 43권 - 조세가
- 진나라에서 갈라져 나와 숙대부터 왕 천, 대왕 가 형제까지의 조나라 역사를 기록했다.
- 전국시대의 조나라(趙)의 역사를 다룬다.
- 44권 - 위세가
- 필만부터 왕 가까지의 위나라 역사를 기록했다.
- 전국시대의 위나라(魏)를 다룬다.
- 45권 - 한세가
- 경후부터 왕 안까지의 한나라 역사를 기록했다.
- 전국시대의 한나라(韓)를 다룬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漢)와는 다른 국가다.
- 46권 - 전경중완세가
- 제나라 강공 폐위 이후 진경중완부터 왕 건까지의 제나라 역사를 기록했다.
- 강성 제나라를 대신한 전씨 정권, 즉 전씨 제나라의 역사를 다룬다.
- 47권 - 공자세가
- 공자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공자는 제후가 아니었지만 역사적·사상적 영향력을 인정받아 세가에 수록되었다.
- 48권 - 진섭세가
- 진승과 오광의 난을 일으킨 진승과 오광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진승·오광의 난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진승을 세가에 수록한 편목이다.
- 49권 - 외척세가
- 한나라의 황후들과 그들의 친척들을 기록했다.
- 한나라 황실의 혼인관계와 외척 세력의 형성을 다룬다.
- 50권 - 초원왕세가
- 한 고조 유방의 동생인 초원왕 유교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초원왕 유교와 그 자손들의 역사다.
- 51권 - 형연세가
- 유방의 친척인 유가와 유택, 그 후손들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형왕 유가와 연왕 유택의 가문을 다룬다.
- 52권 - 제도혜왕세가
- 유방의 서자이자 장자인 제도혜왕 유비와 후손들의 일대기를 다뤘다.
- 전한 초기 제나라 제후왕의 역사다.
- 53권 - 소상국세가
- 소하와 후손들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소하는 황제나 제후왕이 아닌 재상이지만 한나라 건국의 공로를 인정받아 세가에 수록되었다.
- 54권 - 조상국세가
- 조참과 후손들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조참은 소하의 뒤를 이어 재상을 지냈으며, 무위의 통치와 관련된 고사로 유명하다.
- 55권 - 유후세가
- 장량과 후손들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장량은 한나라 건국에 중요한 공을 세운 책사로, 유후에 봉해졌다.
- 56권 - 진승상세가
- 진평과 후손들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진평의 책략과 한나라 초기 정치 활동을 다룬다.
- 57권 - 강후주발세가
- 주발과 후손들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주발과 그 가문의 역사를 다루며, 여씨 일족 제거와 문제 즉위 과정 등을 기록한다.
- 58권 - 양효왕세가
- 한 문제의 아들 양효왕 유무와 형제들, 후손들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양효왕 유무를 중심으로 한 전한 제후왕 가문의 역사다.
- 59권 - 오종세가
- 한 경제의 다섯 제후 아들들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경제의 아들들 가운데 다섯 제후왕 계통의 역사를 다룬다.
- 60권 - 삼왕세가
- 한 무제의 세 제후 아들들의 일대기와 사마천 당대 교지, 공문, 상소, 책봉문 등을 기록했다.
- 현재 전하는 이 편목에도 후대 보충의 흔적이 있으며, 내용 가운데 황실의 책봉 관련 문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열전
열전(列傳)은 《사기》에서 분량이 가장 큰 부분으로, 개인의 전기뿐 아니라 정치집단과 사회 계층, 주변 민족과 국가들의 역사를 다룬다.
사마천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 사람이라면 황제나 관료뿐 아니라 협객과 상인, 의사, 점술가까지 기록했다.
- 61권 - 백이열전
-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를 다루며 함께 사마천이 기록을 후세에 전하려는 것이 자기 소명임을 기록했다.
- 역사 기록과 인간의 도덕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편목이다. 선한 사람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라는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 62권 - 관안열전
- 63권 - 노자한비열전
- 64권 - 사마양저열전
- 사마양저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고대 중국의 군사사상과 관련된 인물인 사마양저의 기록이다.
- 65권 - 손자오기열전
- 66권 - 오자서열전
- 오자서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오나라의 정치와 오초 관계, 오자서의 복수와 몰락을 다룬다.
- 67권 - 중니제자열전
- 안회, 자로, 자공 등 공자의 72명의 제자들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공자의 제자들에 관한 기록이다. 72현이라는 전통적 분류와 실제 수록 인원의 관계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 68권 - 상군열전
- 상앙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진나라의 법가 개혁과 상앙의 몰락을 다룬다.
- 69권 - 소진열전
- 소진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전국시대 합종책과 관련된 소진의 활동을 다룬다.
- 70권 - 장의열전
- 장의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장의의 연횡책과 외교활동을 다룬다.
- 71권 - 저리자감무열전
- 저리질과 감무, 감무의 손자 감라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진나라의 정치가와 책사들의 활동을 다룬다.
- 72권 - 양후열전
- 진나라 소왕의 어머니인 선태후와 그 동생인 양후 위염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정확히는 양후 위염을 중심으로 한 편목이며, 선태후와 진나라의 권력관계도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 73권 - 백기왕전열전
- 74권 - 맹자순경열전
- 75권 - 맹상군열전
- 76권 - 평원군우경열전
- 77권 - 위공자열전
- 위나라 신릉군 위무기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신릉군의 구원활동과 정치적 행적을 다룬다.
- 78권 - 춘신군열전
- 초나라 춘신군 황헐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춘신군 황헐의 활동을 다룬다.
- 79권 - 범수채택열전
- 80권 - 악의열전
- 악의와 그 가문의 열전을 기록했다.
- 악의의 제나라 원정과 정치적 행적을 다룬다.
- 81권 - 염파인상여열전
- 82권 - 전단열전
- 악의를 무찌른 전단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전단이 제나라의 영토를 회복하는 과정을 다룬다.
- 83권 - 노중련추양열전
- 84권 - 굴원가생열전
- 85권 - 여불위열전
- 진시황의 아버지 자초를 왕으로 즉위시킨 여불위의 열전을 기록했다.
- 여불위의 정치적 부상과 몰락을 다룬다. 여불위가 진시황의 친부였다는 이야기는 《사기》에 나타나는 전승 가운데 하나이지만 확정된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 86권 - 자객열전
- 조말, 전저, 예양, 섭정, 형가의 열전을 기록했다.
- 형가의 진시황 암살 시도를 비롯한 고대 중국 자객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 87권 - 이사열전
- 진 시황제의 승상 이사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이사의 개혁과 진나라 멸망기의 정치적 사건을 다룬다.
- 88권 - 몽염열전
- 몽염과 그 할아버지, 아버지, 동생의 열전을 기록했다.
- 몽염과 몽씨 가문을 다룬다.
- 89권 - 장이진여열전
- 90권 - 위표팽월열전
- 91권 - 경포열전
- 92권 - 회음후열전
- 93권 - 한신노관열전
- 한(韓)나라 왕 한신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회음후 한신과는 다른 인물인 한왕 신과 노관의 행적을 다룬다.
- 94권 - 전담열전
- 95권 - 번역등관열전
- 96권 - 장승상열전
- 장창을 비롯한 한나라의 재상들의 열전을 기록했다.
- 장창과 전한 초기 재상들의 행적을 다룬다.
- 97권 - 역생육가열전
- 98권 - 부근괴성열전
- 99권 - 유경숙손통열전
- 100권 - 계포난포열전
- 101권 - 원앙조조열전
- 102권 - 장석지풍당열전
- 103권 - 만석장숙열전
- 석분, 위관, 직불의, 주문, 장숙의 열전을 기록했다.
- 한나라의 관리들과 청렴한 관료의 사례를 다룬다.
- 104권 - 전숙열전
- 105권 - 편작창공열전
- 106권 - 오왕비열전
- 107권 - 위기무안후열전
- 108권 - 한장유열전
- 한안국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한안국의 정치적·군사적 활동을 다룬다.
- 109권 - 이장군열전
- 이광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 이광의 흉노 원정과 비극적인 말년을 다룬다.
- 110권 - 흉노열전
- 흉노족의 역사를 기록했다.
- 흉노의 정치체제와 한나라와의 관계를 다룬다. 흉노 내부의 역사를 한나라 측의 시각에서 기록했다는 한계도 있다.
- 111권 - 위장군표기열전
- 112권 - 평진후주부열전
- 113권 - 남월열전
- 조타가 건국한 남비엣의 역사를 기록했다.
- 남월의 건국과 한나라에 의한 병합을 다룬다.
- 114권 - 동월열전
- 민월의 역사를 기록했다.
- 민월과 동구 등 중국 동남부 월계 국가들의 역사를 다룬다.
- 115권 - 조선열전
- 116권 - 서남이열전
- 촉 지방과 남만 이민족 정벌기를 기록했다.
- 정확히는 중국 서남부 여러 민족·정치체와 한나라의 교류, 정복과 지배 확대 등을 다룬다. 오늘날의 특정 민족집단과 고대의 명칭을 무조건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 117권 - 사마상여열전
- 사마상여의 열전을 기록했다.
- 문인 사마상여의 문학과 정치적 활동을 다룬다.
- 118권 - 회남형산열전
- 119권 - 순리열전
- 덕망 있는 관리들의 열전을 기록했다.
-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린 관리들의 사례를 다룬다.
- 120권 - 급정열전
- 121권 - 유림열전
- 유생들과 유학자들의 열전을 기록했다.
- 유교 경전 연구와 전한 시기의 유학자들을 다룬다.
- 122권 - 혹리열전
- 가혹한 관리들의 열전을 기록했다.
- 엄격한 법 집행과 가혹한 통치로 악명을 얻은 관리들의 사례를 다룬다.
- 123권 - 대완열전
- 124권 - 유협열전
- 협객들과 조폭들의 열전을 기록했다.
- 당시 국가권력의 질서 밖에서 활동하던 협객들의 행적을 다룬다. 현대적인 의미의 조직폭력배와 완전히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 125권 - 영행열전
- 황제에게 아부해 권력을 얻은 이들의 열전을 기록했다.
- 황제의 총애를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얻은 인물들을 다룬다.
- 126권 - 골계열전
- 드립으로 황제에게 충언한 이들의 열전을 기록했다.
- 재치와 유머, 풍자를 이용하여 군주에게 충고하거나 사회적 문제를 지적한 인물들의 이야기다.
- 127권 - 일자열전
- 태양을 관찰해 점을 치는 이들의 열전을 기록했다.
- 여기서 '일자'(日者)는 단순히 태양을 관측하는 천문학자가 아니라 날짜의 길흉 등을 판단하는 점술가를 가리킨다. 따라서 점복과 관련된 인물들의 열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 128권 - 귀책열전
- 거북이 등껍질로 점을 치는 이들의 열전을 기록했다.
- 거북의 등껍질 등을 이용한 점복과 점술의 사례를 다룬다.
- 129권 - 화식열전
- 돈을 벌어 성공한 자본가들과 한나라의 특산품에 대해 기록했다.
- 상업과 생산, 유통, 재산 축적에 관한 사마천의 현실적인 경제관이 드러나는 편목이다.
- 130권 - 태사공자서
- 사마천 가문의 내력과 사마천 본인의 사기 저술과 관련된 자서전을 기록했다.
- 정확한 편명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다. 사마천 가문의 계보와 저자의 경험, 집필 목적, 130편의 구성을 설명하는 《사기》의 마지막 편목이다.
한국사와의 관계
조선열전
《사기》가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중요한 이유는 115권 「조선열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조선열전」은 위만이 조선으로 들어와 권력을 장악한 과정과 위만조선의 정치·외교 관계, 한무제의 침공과 멸망을 기록한 자료다.
그 시작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 “ |
朝鮮王滿者,故燕人也。 |
” |
— 《사기》 「조선열전」
|
위만이 본래 연나라 사람이었다는 기록이다.
이 문장은 위만의 출신과 정체성을 논할 때 자주 인용되지만, 당대의 민족 개념과 오늘날의 국적·민족 개념이 다르므로 현대적인 의미의 중국인 또는 한국인이라는 구분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조선열전」은 한나라 측의 기록이므로 위만조선 내부의 관점에서 작성된 사료는 아니다. 따라서 위만조선의 멸망 과정이나 한사군의 설치 문제를 연구할 때는 다른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를 함께 검토해야 한다.[5]
주변 민족에 대한 기록
《사기》에는 조선 외에도 흉노, 남월, 동월, 서남이, 대완 등 여러 민족과 정치체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러한 편목은 중국 왕조의 역사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주변 세계와의 교류 및 충돌까지 다루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다만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표현도 등장한다. 당시 중국에서 사용한 '이'(夷)와 같은 명칭은 현대의 민족 분류와 동일하지 않으며, 해당 집단의 문화나 정체성을 평가하는 중립적인 용어로 사용된 것도 아니다.
고대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할 때 《사기》가 중요한 이유는 이처럼 다른 지역에 관해 남아 있는 초기 문헌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적 가치와 한계
역사적 가치
이 사람의 팬들 앞에서 절대로 이분을 까지 마십시오.
정말로 잘못 까다가도 디시위키에서는 안전을 보장해 드리지 않습니다.
모두 레전드에게 예의를 갖춥시다.
여러 대중매체에서 자주 거론되거나, 아니면 문화적, 세계적으로 거대한 영향을 끼쳤거나
확실히 그 무엇보다도 다른 우주명작급 작품이니 본문을 읽기 전 뇌를 비우시기 바랍니다.
《사기》의 가장 큰 의의는 서로 다른 시대와 인물, 정치제도, 경제활동을 하나의 역사적 체계로 정리했다는 점이다.
사마천은 황제와 장군뿐 아니라 학자, 외교가, 자객, 의사, 상인, 협객까지 기록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 통치와 권력의 중심에 있지 않던 사람들도 역사에 남을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단순히 사건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사람이 왜 성공하거나 실패했는지, 도덕적인 인물이 왜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지, 권력과 부가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질문했다.
이는 후대의 역사서와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공식 역사서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역사 서술 전통 전반에서도 《사기》는 중요한 참고 대상이 되었다.
한계
그러나 《사기》가 오래되고 유명하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내용이 정확한 역사적 사실인 것은 아니다.
황제·요·순과 하나라의 일부 기록처럼 신화와 전승이 섞인 내용도 있다. 또한 전국시대 인물들의 대화와 연설을 지금 전하는 문장 그대로 실제로 발언했다고 확인하기도 어렵다.
사마천은 앞선 문헌과 전승, 당대에 남아 있던 기록 등을 모아 역사서를 작성했다. 그 과정에서 사건을 문학적으로 구성하거나 인물의 성격을 부각한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항우나 한신의 마지막 장면은 문학적으로 매우 인상적이지만, 모든 대화가 현장에서 문자 그대로 기록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후대에 일부 편목이 소실되거나 보충되면서 판본의 문제가 발생했다. 같은 사건이 여러 편목에서 다르게 기록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따라서 《사기》는 중요한 1차 사료이자 고전 문학 작품이지만, 실제 역사 연구에서는 다른 사료와 고고학적 증거를 함께 검토해야 한다.
영향
중국 역사서
《사기》의 형식은 이후 반고가 편찬한 《한서》를 비롯한 중국 정사들의 기본적인 모델이 되었다.
《사기》는 황제부터 한무제까지 여러 왕조를 다룬 통사인 반면, 《한서》는 전한 한 왕조의 역사를 중심으로 다룬 단대사다.
이처럼 책의 서술 범위에는 차이가 있지만 본기와 열전, 제도에 관한 기록 등을 결합하는 기전체의 구조는 이어졌다.
그 뒤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 등도 기전체 서술 전통을 계승했다.
동아시아 역사 서술
중국 정사의 형식은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의 역사서 편찬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삼국사기》 역시 본기·열전·지·표 등을 사용하는 기전체 역사서다.
물론 《삼국사기》가 《사기》를 그대로 복사한 것은 아니다. 김부식과 편찬자들은 중국의 역사서 편찬 전통을 참고하면서도 삼국의 역사와 고려 시대의 관점에 맞게 내용을 구성했다.
동아시아에서 역사서를 작성할 때 왕조의 계보와 제도, 인물의 전기를 함께 기록하는 방식이 널리 정착한 데에는 《사기》의 영향이 컸다.
여담
제목 때문에 생기는 혼동
《사기》의 '사기'는 한자로 史記이며, 역사 기록이라는 뜻이다.
현대 한국어에서 남을 속여 재산상의 이익을 얻는 범죄인 사기(詐欺)와는 한자가 다르다.
ㄴ 사마천이 사기를 썼다고 하니까 역사에 관심 없는 사람은 범죄 자백이라도 한 줄 알겠다.
ㄴ 정확히는 역사책을 쓴 것이지 남을 속인 것이 아니다.
권수와 분량
《사기》는 13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통상 52만여 자의 방대한 역사서로 소개된다.
다만 판본과 한자 계산 방식, 주석의 포함 여부에 따라 실제 글자 수와 책의 분량은 달라질 수 있다.
현대 한국어 번역본은 여러 권의 단행본으로 나뉘어 출간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원래의 130권과 현대 출판사의 분책 수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사마천의 생애와 《사기》의 완성
사마천이 궁형이라는 치욕을 견디면서 집필을 끝냈다는 이야기는 이 책의 문학적·역사적 평가와 함께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사기》의 가치를 사마천의 불행한 개인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아버지 사마담이 시작한 편찬 사업, 사마천이 수집한 기록, 역사적 사건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사마천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특정 왕조만을 찬양하는 책을 쓰기보다 여러 시대의 흥망성쇠와 인물들의 행적을 종합한 역사를 남기려 했다.
그의 개인적 고난은 《사기》 집필을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지만, 《사기》의 학문적 가치는 책 자체의 구성과 사료, 역사적 통찰에서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