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으따 바람이 구멍을 통해 솔솔 들어오구마잉~
만일 참교육을 거부할 시 성적은 개좆망행이니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헤이, 영쑤!! 돈 두 댓!"
^따잇^
참고로 부산과 광주의 운명도 이날 뒤바뀌어서 부산으로 향하던 죽음의 사신이 광주로 향하게 된다.
ㄴ 물론 이건 결과를 놓고 하는 역사드립이다. 실제로 "부산 학살 예정 → 김재규가 막음 → 그 병력이 그대로 광주행" 같은 단순한 직선관계가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10.26으로 박정희 유신체제가 붕괴한 뒤 권력공백 속에서 12.12 군사반란과 신군부 집권이 이어졌고, 그 결과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진압으로 연결된 것은 사실이다.
개요
(당시 상황을 재현한 움짤)
10.26 사태는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서울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총으로 사살한 사건이다.
김재규 장군이 경제를 살리고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한미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박정희의 두부를 날린 민주 혁명이다.
ㄴ 앞 문장은 이 문서의 평가다. 역사적으로 확정 가능한 것은 김재규가 재판 과정에서 유신체제 철폐와 자유민주주의 회복, 대규모 유혈사태 방지를 자신의 거사 이유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한미관계 악화에 대한 우려도 거론했지만, "경제를 살리기 위해 죽였다"까지 김재규의 확정된 핵심 동기로 보는 것은 어렵다.
실제로 10.26의 직접적인 동기를 놓고는 지금까지도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김재규가 주장한 민주회복 목적, 부마항쟁에 대한 강경진압 방침과의 충돌, 차지철과의 권력갈등, 박정희에 대한 개인적 반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해석이 많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0.26으로 18년간 이어진 박정희의 집권과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았다.
혁명군
성인을 욕보이게 하는 짓은 하지 맙시다.
-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 전직 육군 중장으로 사건 당시 박정희와 차지철을 직접 사살.
-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김재규가 교사였던 시절 제자로 예비역 대한민국 해병대 대령. 사건 당시 대통령경호실의 정인형·안재송을 사살.
- 박흥주: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김재규가 사단장이던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던 현역 육군 포병 대령. 사건 당시 다른 중정 직원들과 함께 대통령경호실 요원들에게 총격.
- 유성옥 - 의전과장 운전기사. 사건 당시 별관 식당 일대 총격에 가담.
- 이기주 - 안가 경비조장. 사건 당시 별관 식당 총격에 가담.
- 김태원 - 안가 경비원. 총격 과정에 가담했으며 차지철 등에 추가 사격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 유석술 - 안가 경비원. 사건 뒤 권총을 숨긴 혐의 등으로 징역형을 받았다.
- 서영준 - 안가 경비원. 사건 이후 증거은닉 등과 관련해 처벌을 받았다.
원문에는 박선호나 박흥주 등이 "동료 경호원"을 죽였다고 되어 있었는데, 정확히는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대통령경호실 요원들에게 총격한 것이다. 같은 안가에서 근무했다고 같은 소속은 아니다.
사용 무기
- 발터 PPK: 김재규가 첫 총격에 사용했다.
- 스미스 & 웨슨 모델 36: 발터 PPK의 작동 이상 이후 김재규가 박선호에게 받아 사용했다.
- M16 계열 소총: 박흥주·이기주·유성옥 등 별관 쪽 인원들의 대통령 경호원 제압 과정에서 사용되었다.
ㄴ 옛 문서에 M38 치프 스페셜이라고 적힌 경우가 있는데 보통 사건 기록에서 언급되는 권총은 S&W 모델 36 치프스 스페셜이다.
적폐군
목격자
- 심수봉: 가수. 사건 당시 만찬장에 있었던 목격자.
- 신재순: 당시 한양대학교 학생으로 만찬장에 있었던 목격자.
-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사건 현장에 있었고, 김재규가 만찬 전 차지철에 대한 극심한 불만과 "오늘 해치워버릴까요?"라는 취지의 말을 한 것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사건 직후 박정희를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옮겼고 이후 최규하와 군 수뇌부에게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렸다.
ㄴ 원문처럼 심수봉과 신재순을 "김재규의 의거에 협력함"이라고 쓰면 안 된다. 둘은 거사계획과 무관한 민간인 목격자였고 총격이 벌어질 거라는 것도 몰랐다.
김계원 역시 사전에 구체적인 암살계획을 공모한 인물로 보는 것은 무리다. 다만 김재규의 과격한 발언을 듣고도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황
1979년 당시, 유신 선포 이후 박정희 정권은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외적으로는 코리아게이트 등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었으며, 내적으로는 2차 오일 쇼크, 부가가치세 제도 실시 등으로 인한 경제 사정과 민심 악화,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야당의 지속적인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여기에 육영수의 피살 이후 측근정치가 심화되고 경호실장 차지철은 지나친 월권 행위를 저지르면서 박정희의 측근들 내에서도 불화가 일고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 바로 당시 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였다.
이런 내외적 상황이 악화될수록 박정희 정권은 유화적 수단보다는 더 치밀한 정치공작을 동반한 폭력적 수단을 위주로 상황을 타개하려 하였다. 이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국회 제명으로 이어졌고 동시에 김영삼 총재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마산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부산에는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마산·창원에는 위수령이 발동됐다. 김재규는 직접 부산 현장을 둘러본 뒤 사태의 심각성을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가 "부산 같은 사태가 서울에서도 일어나면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증언과, 차지철이 캄보디아의 대량학살을 거론하며 강경진압을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다만 이 발언은 녹음이나 당시 회의록이 아니라 김재규가 재판 과정에서 제출한 항소보충이유서 등에 근거한 증언임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앞서 설명한 차지철과의 불화, 부마항쟁의 심각성 파악, 미국과의 관계 악화, 박 대통령의 자녀 문제 등으로 김재규의 반감은 고조되고 있었고 이는 10.26을 일으키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고 김재규 자신은 주장했다.
운명의 1979년 10월 26일 아침, 박정희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KBS 당진 송신소 준공식 등에 참석했다. 김재규도 동행하려 했으나 일정 과정에서 배제되었고 이를 두고 차지철과의 갈등이 다시 불거졌다.
오후 일정 이후 박정희가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을 갖기로 하자 김재규도 참석하게 됐다. 그와 동시에 김재규는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섭 중정 제2차장보에게 저녁 식사를 하자며 궁정동 안가 별채로 초대하였다.
오후 5시대, 김재규는 친분이 있던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부마항쟁의 심각성, 차지철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고 김계원 또한 차지철 문제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 이 과정에서 김재규가
| “ |
이 새끼 오늘 해치워버릴까요? |
” |
라는 취지의 과격한 말을 했다는 증언이 전해진다.
오후 6시경 박정희와 차지철 등이 안가에 도착하고 운명의 만찬이 시작되었다. 만찬 도중 야당 대응과 부마항쟁 문제 등을 놓고 분위기는 좋지 않았고, 김재규와 차지철 사이의 오래된 갈등도 다시 불거졌다.
그 유명한
| “ |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
” |
라는 김재규의 발언 역시 이 사건을 상징하는 대사로 알려져 있다.
다만 실제 당시 대화의 정확한 문장들은 현장 생존자들의 증언이 조금씩 다르므로 영화 대본처럼 한 글자까지 확정된 것은 아니다.
뒤에 섭외되어온 신재순과 심수봉이 들어와 노래를 부르면서 분위기는 잠시 전환되었으나 김재규의 속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후 7시 10분 무렵 김재규는 자신의 부하들인 의전과장 박선호와 수행비서 박흥주에게 거사를 통보했다. 박선호는 거사를 미루자고 했지만 김재규는 보안 누설 등을 이유로 거부했다.
박선호가
| “ |
각하도 포함됩니까? |
” |
라고 묻자 김재규는 박정희도 대상이라고 밝혔다.
결국 거사가 결정되자 박흥주와 유성옥, 이기주 등은 별관 식당 쪽 대통령 경호요원 제압을 맡고, 박선호는 만찬장 옆방에 있던 경호처장 정인형과 경호부처장 안재송을 맡았다.
운명의 오후 7시 40분경,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던 도중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 “ |
이 새끼 너 건방져! |
” |
라는 취지로 말하며 발터 PPK를 발사했다.
첫 탄은 차지철의 팔 부근을 맞혔고, 이어 김재규는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발사했다.
그리고 다시 차지철을 쏘려는 과정에서 발터 PPK에 작동 이상이 생기면서 김재규는 방 밖으로 나갔다.
같은 시각 옆방과 별관에서는 박선호,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등이 대통령경호실 요원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정인형·안재송·김용섭·김용태가 숨졌고 박상범은 여러 발을 맞았으나 살아남았다. 박상범은 훗날 김영삼 정부에서 대통령경호실장까지 된다.
잠시 뒤 차지철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김재규는 박선호에게 받은 S&W M36 권총을 들고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김재규는 차지철에게 추가 사격을 했고, 이미 가슴에 총상을 입고 쓰러져 있던 박정희의 머리에도 다시 총을 쐈다.
이 총상으로 박정희는 사망했다.
ㄴ 원문에는 오른쪽 가슴에 2발, 머리에 2발처럼 정확한 발수를 단정하고 있었는데 당시 여러 기록에서 세부 발수가 엇갈리는 부분이 있어 그냥 가슴과 머리에 총상을 입었다 정도로 적는 것이 안전하다.
사살 직후 김재규는 별채로 가 정승화와 김정섭에게 급한 상황이 발생했다며 함께 이동했다.
김재규 입장에서는 중앙정보부 본부인 남산으로 가 조직을 장악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으나, 이동 과정에서 결국 자신의 영향력이 약한 육군본부로 향하는 치명적인 선택을 했다.
왜 육본으로 갔느냐를 두고도 여러 해석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김재규에게 존나 치명적이었다.
궁정동에서 살아남은 김계원은 박정희를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옮긴 뒤 최규하 국무총리와 군 수뇌부에 사건의 진상을 알렸고 결국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김재규는 그날 밤 체포되면서 몇 시간짜리 천하로 끝났다.
10.26 사태 이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사건 배경
부마항쟁으로 인한 김재규의 회의감
유신체제를 거부하는 대규모 민중시위인 부마항쟁이 발생하자 평소에도 현 체제에 심각한 회의감을 느꼈다고 주장했던 김재규의 회의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현장을 직접 확인한 뒤 박정희에게 근본적인 민심 수습책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재규의 항소보충이유서에 따르면 박정희는
| “ |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
” |
는 취지로 답했다고 한다.
또 김재규는 같은 자리에서 차지철이 캄보디아의 대량학살을 예로 들면서 100만~200만 명 정도 죽여도 문제없다는 취지의 극단적인 강경론을 펼쳤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김재규가 발터 PPK와 M36 치프 스페셜을 드는데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했다고 본인이 주장하였다.
다만 다시 말하지만 이 대화의 직접적인 출처는 김재규 자신의 사후 재판 진술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거짓이라고 볼 근거도 없지만 녹취된 공식회의 발언처럼 취급하면 곤란하다.
코리아 게이트로 인한 미국과의 사이 악화
코리아게이트란 박정희 정부와 관련된 인사들이 미국 의회에서 한국에 우호적인 여론과 정책을 만들기 위해 의원들을 상대로 불법 로비를 벌이다 뽀록난 사건이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지미 카터였고 카터 행정부는 인권외교를 내세우면서 박정희 정권과 상당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까지 겹치면서 한미관계는 실제로 상당히 악화돼 있었다.
당시 전 최고실세였던 김형욱은 박정희 정권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며 온갖 일을 하다가 권력에서 밀려난 뒤 미국으로 망명했고, 이후 미 의회에서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했다.
그러나 김형욱은 1979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옛 문서에는
| “ |
한국의 킬러들에게 납치된 뒤 산채로 해머밀에 갈려 동물용 모이가 되었다는 것이 유력하다. |
” |
라고 되어 있었는데 해머밀 분쇄설은 유력설이 아니다.
이건 김형욱 실종사건을 둘러싸고 나온 여러 엽기적인 설 중 하나일 뿐이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는 김재규의 지시를 받은 중정 요원 측이 현지인을 고용해 파리 근교에서 김형욱을 살해했다는 취지의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관련자 진술의 신빙성을 둘러싼 반론도 있었고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김형욱이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는 지금도 완전히 확정되지 않았다.
어쨌건 코리아게이트와 인권 문제, 주한미군 문제 등으로 박정희 말년에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상당히 나빠졌던 것은 사실이고 김재규 역시 한미관계 악화를 안보 문제로 언급했다.
최태민의 권력 남용과 박근혜의 옹호
최태민이 박근혜에게 접근한 뒤 각종 단체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고, 박정희 정권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김재규 역시 최태민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태민 관련 문제를 박정희에게 보고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박근혜가 최태민을 두둔하면서 갈등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다만
| “ |
육영수가 꿈에 나타났으니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면 나를 통하라 |
” |
처럼 구체적으로 알려진 대사들은 후대 증언에 의존하는 부분이 크므로 한 글자까지 실제 발언으로 확정된 녹취는 아니다.
원문처럼 최태민이 대한민국 국정 전반을 직접 지배했다고까지 표현하는 것도 과장이고, 정확히는 박근혜와의 관계를 이용해 구국선교단·새마음봉사단 등을 중심으로 상당한 영향력과 각종 이권 의혹을 낳았다고 보는 편이 맞다.
설상가상으로 김재규와 정치적 숙적인 차지철도 최태민 문제에서 김재규와 대립했다는 증언이 있다.
김재규가 최태민에 대해
| “ |
최태민 같은 쓰레기는 교통사고라도 나 죽어 없어져야 된다 |
” |
는 취지로 말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차지철과의 대립
차지철은 엄청난 권력욕을 가진 인물로 유명했다.
대통령 경호실의 권한을 크게 확대하고 군과 정부조직에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끊임없이 충돌했다.
경호실이 군 병력과 장비를 동원한 대규모 훈련을 실시하는 등 대통령 친위조직처럼 비대해졌고, 차지철은 대통령에 대한 접근 자체를 통제하면서 다른 측근들의 원성을 샀다.
김계원의 회고 등에 따르면 차지철과 김재규의 관계는 1979년 들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김재규가 이러한 차지철의 횡포에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는 10월 26일만이 알 일이다.
참고로 차지철에게 염증을 느낀 사람은 김재규뿐만 아니었다는 증언들이 많다.
전두환 역시 군 선배들과의 관계나 대통령경호실의 비대화 문제 때문에 차지철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 “ |
전두환이 이순자와 이규동 장군 라인을 타려고 결혼했다 |
” |
는 원문의 설명은 당사자의 혼인동기를 확인할 사료가 없는 뇌피셜이므로 사실처럼 쓰기는 어렵다.
출세욕이 강했던 인물이라는 평가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결혼 자체를 오직 출세를 위한 전략결혼이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여튼 박정희 측근들 사이에서 차지철의 평가는 상당히 나빴고,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 하나를 기반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적을 많이 만든 것은 사실이다.
박지만 문제
사형 전 김재규가 밝힌 10.26의 이유 중에서는 박정희의 장남 박지만의 육사 생활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김재규의 주장에 따르면 박지만이 육사생도 신분으로 품위와 기강에 맞지 않는 행동을 했고, 자신이 다른 학교로 옮기거나 외국유학을 보내는 것이 낫다고 박정희에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김재규는 이것을 박정희의 가족문제에 대한 판단과 집권욕을 비판하는 사례 중 하나로 들었다.
다만 이 역시 김재규 측 진술에 크게 의존하는 대목이다.
박지만이 이후 성인이 된 뒤 필로폰 투약 혐의로 여러 차례 처벌받은 것은 사실이다.
10.26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문서를 읽기 전에 모니터 앞에서 따봉각을 치켜 세웁시다.
이 문단부터는 말 그대로 대체역사 뇌피셜이다.
역사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검증할 수 없으므로 아래의
| “ |
박정희가 반드시 학살했을 것이다 |
” |
같은 내용은 사실관계가 아니라 작성자의 가상 시나리오로 보면 된다.
한때 시민들의 손으로 민주화를 이뤄낼 기회를 10.26이 뺏어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대로 10.26이 없었다면 부마항쟁에 대한 강경진압이 확대돼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 부산에는 실제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공수부대까지 투입됐으며, 마산·창원에는 위수령이 발동됐다. 따라서 추가적인 유혈사태 가능성 자체는 충분히 현실적인 우려였다.
그러나
| “ |
10.26이 없었다면 민주화는 개뿔, 붓싼과 마싼에서 킬링필드가 확정이었다 |
” |
까지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조금만 반박: 박정희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다.
문서를 읽기 전에 모니터 앞에서 따봉각을 치켜 세웁시다.
김재규가 아니었어도 박정희는 부마항쟁이 일어난 이상 뭘해도 사망은 확정된 상황이었다.
ㄴ 사망이 확정됐다는 건 당연히 알 수 없다. 역사에 세이브파일 불러오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1979년의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던 것은 확실하다. 부마항쟁, 야당 탄압, 경제침체, 미국과의 갈등, 권력 핵심부의 내부 분열이 동시에 터지고 있었다.
만약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박정희가 부산과 마산에 더욱 강경한 진압을 시도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군 내부에 훗날 신군부의 핵심이 되는 전두환, 노태우와 하나회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서부터
| “ |
전두환이 시민쪽이 이길 거라 생각해서 박정희를 체포하고 민주화 영웅으로 대통령이 된다 |
” |
는 원문의 시나리오는 그냥 대체역사다.
실제 역사에서 전두환은 박정희 사망 뒤 민주화세력 편에 붙기는커녕 12.12 군사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1980년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5.18 민주화 운동을 무력 진압한 뒤 권력을 장악했다.
그래서 실제 행적을 놓고 보면
| “ |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면 전두환이 시민 편에 붙었을 것이다 |
” |
라고 예상할 근거는 오히려 약하다.
실제로 전두환은 박정희뒤지고나서 1980년 광주를 진압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 뒤 1980년 새 헌법을 제정하면서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제로 바꾸고 기존 통일주체국민회의 방식 대신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제를 도입해 제12대 대통령에 다시 취임했다.
ㄴ 그러니까 원문의
| “ |
취임하자마자 유신독재의 잔재인 체육관선거를 폐지하고 민주적으로 다시 취임했다 |
” |
식의 묘사는 매우 misleading하다.
직선제로 바꾼 것도 아니고 신군부가 만든 새로운 간선제였다.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하고 3S 정책 등 사회문화 정책을 바꾼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언론통폐합, 삼청교육대, 정치인 규제와 각종 인권탄압도 자행했다.
또한 박근혜에게 청와대에서 나오면서 당시 돈 6억 원을 전달한 사실은 박근혜 본인이 훗날 인정했다.
어쨌든 특전사와 하나회에 전두환과 가까운 장교들이 상당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본인도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지냈고 노태우,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등 훗날 신군부 핵심들이 특전사 요직을 거쳤다.
그렇다고 그들이 1979년 박정희를 반드시 배신했을 거라는 건 알 수 없다.
또 하나의 원문 시나리오:
| “ |
부산과 마산에서 학살 → 전국 봉기 → 미국 그린베레가 박정희군 격파 → 박정희 체포 → 교수형 → 대한민국 이라크처럼 분할통치 |
” |
이건 그냥 HOI4 모드다.
카터 정부가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을 강하게 비판하고 한미관계가 악화돼 있기는 했지만, 미국이 대한민국을 침공해 현직 대통령을 잡아 교수형에 처할 계획이 있었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박정희가 중국으로 튀려 했을 것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순수한 상상이다.
따라서 이 문단에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질문은
| “ |
10.26이 없었다면 유신체제는 얼마나 더 지속됐을까? |
” |
정도다.
결론: 박정희가 반드시 뒈졌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1979년 유신체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고 김재규의 총격이 실제 역사에서는 그 체제를 즉시 끝장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김재규 덕분에 부마항쟁 과정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던 추가적인 유혈진압이 현실화되지 않은 것도 결과론적으로는 맞다.
한가지 치명적 오점이 생겼다면 그건 다름 아닌 박정희가 이후 오지게 미화됐다는거다.
김재규 덕에 피를 아꼈지만 그 피들이 과거미화를 하면서 각하께선 핵무기를 공개하며 대통령직을 내려놓으려 했다느니 아버지같은 분이 어떻게 자기 아들딸들을 죽였겠냐느니 하는데.
물론 박정희 시기의 경제성장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국민을 쥐어짜내는건 다른거다.
조조가 한나라를 집어삼키고 서주대학살을 벌였어도 통치·무력·안목 등 모든 밸런스가 삼국지 정사/연의 양쪽에서 최고를 찍는 인물 중 하나인데도 아직까지 간웅이고 학살자라 욕쳐먹는 걸 보면 알거다.
제 아무리 잘난 능력이 있어도 작은 문제가 아닌 독재·인권유린 문제는 따로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위에 글을 쭉 보고 내려 왔으면 알겠지만 박정희가 핵무기를 공개한 다음 자발적으로 대통령에서 물러날 계획이었다는 이야기도 입증된 사실은 아니다.
누가 살려낸 무고한 목숨들인데 그 무고한 것들이 무지해서 대가리가 깨지는 바람에 자기 한 몸 희생하신 분들을 욕하고 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ㄴ 이것 역시 김재규를 의사·민주투사로 평가하는 입장의 서술이다. 법적으로 김재규는 당시 대법원에서 내란목적살인 등의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됐고, 역사적 평가는 지금도 극명하게 갈린다.
박선호와 박흥주
박선호
김재규와는 스승과 제자 사이이다.
김재규가 군에서 잠시 나와 대륜중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일하던 시절 박선호가 학생이었다.
해병대 대령으로 전역했던 박선호는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다가 김재규의 도움으로 중앙정보부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소 김재규가
| “ |
거만하게 행동치 말라. |
” |
등의 조언을 했고 박선호는 김재규를 스승이자 상관으로 크게 존경했다.
하지만 의전과장이란 자리가 궁정동 연회에 참석할 여성들을 섭외해야 하는, 이른바 '채홍사' 역할까지 해야 하는 자리였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박선호는 이에 상당한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사의를 고민했지만 김재규가
| “ |
자네가 없으면 궁정동 일을 어떻게 하겠나. |
” |
라는 취지로 만류해 계속 근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최후 진술에서 박선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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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부장님을 모셨다는 것을 첫째 영광으로 생각하고, 저로 하여금 항상 인간으로 일깨워 주시고, 국가의 앞날을 버러지의 눈이 아니라 창공을 나는 새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똑바른 눈이 될 수 있도록 길러 주신 데 항상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또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도 저는 그 길밖에 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
” |
박흥주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18기로 입학했다.
육사 18기 가운데서도 진급이 매우 빨랐던 엘리트 장교로 포병 병과를 선택했고, 김재규와는 김재규가 사단장일 때 전속부관으로 근무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원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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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를 최고 수준의 성적으로 졸업했는데 집이 가난해 서울대를 못 가고 육사에 갔다. |
” |
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박흥주가 서울고 출신의 수재이자 육사 18기의 선두권 장교였던 것은 맞지만 육사 수석졸업을 확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자료는 확인이 필요하다.
굉장히 유능했기 때문에 30대 후반에 대령을 달았고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가 되었음에도 검소한 생활을 한 인물로 유명하다.
당시 서울의 작은 집에서 가족과 살았고 권력기관 핵심에 근무하면서도 부정축재와 거리가 멀었다는 증언이 많다.
10.26 이후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도 김재규를 원망하기보다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역군인이었던 박흥주는 다른 민간인 피고인보다 먼저 1980년 3월 6일 총살형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10.26 사태를 배경으로 한 영상물들
- 그때 그사람들
- 제4 공화국(드라마)
- 제5 공화국(초반)
- 남산의 부장들
- 행복의 나라 - 박흥주를 모티브로 한 인물을 중심으로 사건 이후 재판 과정을 다룬다.
여담
그 당시 궁정동 연회의 음식과 술에 관해서는 관계자들의 회고를 통해 여러 메뉴가 전해진다.
특히 술은 잘 알려지다시피 시바스 리갈이었다.
시바스 리갈은 박정희의 마지막 술이라는 이미지가 워낙 강해져 10.26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서 이상한 방법으로 영구박제됐다.
이거 준비하는 데 당시 돈으로 수만 원이 들었다는 증언도 있는데 1979년의 수만 원이면 당연히 지금 감각의 6만원짜리 회식은 아니다.
ㄹ혜를 정의구현하신 이정미 재판관님이 이 사건을 계기로 법조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백괴사전에도 당시 상황을 패러디한 문서가 있다.
이 사건을 바탕으로 각색되어 만든 남산의 부장들이란 영화가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 약 40일부터 사건 직후까지를 각색해 다루니까 관심있는 사람은 보길 바란다.
수명 드립
어차피 사람의 수(壽)는 그 사람의 인격과 신분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 '수'라 함은 그 나이에 근접해서 사망한다는 것이다. 박정희의 경우 수(壽)가 65이다. 즉, 절대 70살 넘는 박정희를 볼 수 없다는 얘기다.
전두환의 수는 100, 노태우의 수는 95, 이승만의 수는 90이고 김대중은 태어날 때의 수는 100이었는데 워낙 고통을 받다보니 수가 85로 쪼그라들었다 카더라.
그런데 박정희의 경우 오행이 화(火)이다. 이 '화'라 함은 성정이 불같거나 성욕이 강하거나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인데 이런 사람들은 수가 줄어든다 카더라.
손책의 수가 고작 30밖에 안 되는 것으로 이를 알 수 있다.
구봉서의 경우 오행이 목(木)인데 수(壽)가 90이며 실제로 장수했다 카더라.
한마디로 박정희는 온순하고 얌전하고 소극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으며 그게 많은 대인관계를 유발시켰는데 뭐든지 많다 보면 나쁜 게 섞이기 마련이다.
참고로 노무현의 수(壽) 역시 박정희와 동일한 65라 카더라.
당연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수명·오행 이야기는 명리학/점술 드립이지 과학적으로 사람의 수명을 계산하는 방법이 아니다.
사람의 인격이나 오행을 넣으면 사망 나이가 나오는 공식 같은 건 없다.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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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운명적으로 1980년을 넘길 수 없었다. |
” |
도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1979년 10월 26일에 죽은 것은 맞다.
매년 10월 26일에는 식당이나 술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마피아 게임을 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