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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김종필 | 김용순 | 김재춘 | 김형욱 | 김계원 |
| 제6대 | 제7대 | 제8대 | 직무대행 | 제9대 |
| 이후락 | 신직수 | 김재규 | 윤일균 | 이희성 |
| 직무대행 | 제10대 | 제11대 | ||
| 윤일균 | 전두환 | 유학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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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유학성 | 노신영 | 장세동 | 안무혁 | 배명인 |
| 제16대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박세직 | 서동권 | 이상연 | 이현우 | 김덕 |
| 제21대 | 제22대 | |||
| 권영해 | 이종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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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제25대 | 제26대 |
| 이종찬 | 천용택 | 임동원 | 신건 | 고영구 |
| 제27대 | 제28대 |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 김승규 | 김만복 | 김성호 | 원세훈 | 남재준 |
| 제32대 |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 이병기 | 이병호 | 서훈 | 박지원 | 김규현 |
| 제37대 | 제38대 | |||
| 조태용 | 이종석 | |||
신직수(申稙秀, 1927년 3월 21일 ~ 2001년 9월 9일)는 대한민국의 법조인·관료로, 제11대 검찰총장, 제22대 법무부장관, 제7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박정희 정권에서 검찰 → 법무부 → 중앙정보부라는 공안권력 엘리트 코스를 거의 끝까지 탄 인물이다. 특히 36세의 나이에 검찰총장이 되어 무려 7년 반 가까이 자리를 지켰고, 이후 법무부장관과 중앙정보부장까지 올라갔다.
신직수를 이해하려면 그냥 "유신시대 중정부장 한 명" 정도로 보면 안 된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가 권력을 제도적으로 굳히는 과정에서 법률·검찰·공안 영역을 담당한 핵심 실무자였고, 그의 중정부장 재임기에는 민청학련 사건,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동아일보 광고탄압 등 유신체제의 대표적인 공안사건들이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후임자는 바로 김재규다.
그리고 김재규 문서에서도 나오듯 이 둘의 중정부장 시기는 상당히 대비된다. 신직수 시절은 잡아들이고 조지고 형량 때리는 중정 이미지가 강했고, 김재규 시절에는 적어도 정치범 탄압 강도를 줄이고 일부 석방·감형을 시도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생애
신직수
申稙秀인물 정보 출생 1927년 3월 21일 출생지 충청남도 서천군 사망 2001년 9월 9일 직업 법조인, 관료 군복무 육군 군법무관 최종계급 소령 주요 경력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법률고문
중앙정보부 차장
제11대 검찰총장
제22대 법무부장관
제7대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법률담당 특별보좌관중앙정보부장 재임 1973년 12월 3일 ~ 1976년 12월 3일 전임 이후락 후임 김재규
충청남도 서천에서 태어났다. 1947년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대학 법학과에 진학해 1952년 졸업했다.
1951년 군법무관 시험에 합격해 육군 군법무관으로 복무했고, 소령으로 예편했다.
이 시기 박정희와의 인연이 만들어졌다.
박정희가 육군 제5사단장이던 시절 신직수는 휘하 법무참모로 근무했다. 이 관계가 나중에 그의 인생을 그냥 고속도로에 올려놓게 된다.
전역 후 잠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5.16 군사정변 이후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법률고문으로 발탁됐다.
이후 서울지검 검사, 헌법심의특별위원회 참여, 중앙정보부 차장 등을 거치더니 1963년 12월, 36세의 나이에 검찰총장에 임명됐다.
당시 검찰 내부에서도 충격이 컸다.
검찰 경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젊은 인물이 갑자기 총장이 되었고, 고검장이 취임식에 불참할 정도로 반발이 있었다.
그런데 한번 총장 되고 나니까 7년 6개월을 해먹었다.
대한민국 검찰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장기재임이다.
박정희와의 관계
신직수의 출세는 박정희와의 개인적 인연을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군법무관 시절부터 박정희의 휘하에서 근무했고, 5.16 이후 박정희가 권력을 잡자 법률고문으로 곧바로 발탁됐다.
이후
법률고문 → 중앙정보부 차장 → 검찰총장 → 법무부장관 → 중앙정보부장
이라는 정신 나간 승진코스를 탄다.
박정희 입장에서 신직수는 군인 출신도, 정치인 출신도 아닌 법률과 공안기구를 다룰 줄 아는 충성도 높은 실무자였다.
특히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선거, 개헌, 반공사건, 긴급조치 등 모든 권력행위를 법 형식으로 포장해야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신직수 같은 인물은 상당히 중요했다.
군인이 총을 들고 정권을 잡는 것까지는 쉬운데, 그 다음부터는 헌법도 만들어야 되고 검찰도 굴려야 되고 법원에 사건도 넘겨야 되고 야당도 조져야 한다.
그걸 대신 해주는 법률 담당 핵심멤버 중 하나가 신직수였다.
검찰총장 시절
1963년 12월 제11대 검찰총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나이 36세.
지금 기준으로 보면 검사 생활 좀 시작할 나이에 검찰총장을 단 셈이다.
재임기간은 1971년 6월까지 약 7년 6개월이었다.
박정희 정부의 핵심 법집행기관 수장으로 장기간 재직하면서 검찰 조직을 정비하고 검사 직제와 제도를 다듬는 역할도 했다.
1960년대 검찰제도 자체가 지금처럼 완전히 자리잡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신직수 시절 여러 차례 검찰청법이 개정되고 조직구조가 정비되었다는 점은 제도사적으로 평가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정치권력과 검찰의 관계 측면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박정희 정권이 반대세력을 통제하고 선거와 정치공작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검찰 역시 자유롭지 않았고, 신직수는 정권과 검찰 사이를 연결하는 핵심 인물이었다.
1966년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사건 당시 검찰 수사와 처리 과정도 그의 재임기였다.
당시 삼성계열 한국비료가 사카린을 건축자재로 위장해 밀수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엄청난 정치적 파장이 일었고, 사건 처리 과정에서 정부와 재벌의 유착 문제까지 터져나왔다.
법무부장관
1971년 6월 검찰총장에서 물러난 뒤 바로 제22대 법무부장관이 됐다.
그러니까 검찰총장 7년 반 하고 바로 그 위 감독기관 장관으로 올라간 것이다.
1972년에는 대한법률구조공단의 전신인 대한법률구조협회 설립을 추진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료 또는 저렴한 법률지원을 제공하는 제도를 시작했다.
이 부분은 신직수의 경력 가운데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영역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가 바로 10월 유신 시기다.
1972년 박정희가 국회를 해산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한 뒤 유신헌법을 만들면서 대한민국 정치체제를 사실상 장기독재체제로 바꿨다.
당시 신직수는 법무부장관이었다.
유신헌법 초안 작성 과정에서는 법무부 검사들이 실무에 참여했으며, 훗날 박근혜 정부 대통령비서실장이 되는 김기춘 역시 이 작업에 관여했다.
신직수 개인이 유신헌법 조문 하나하나를 직접 작성했다고 단순화하면 곤란하지만, 적어도 법무부장관으로서 유신체제의 법률적 구축 과정에 있었던 핵심 책임자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은 피하기 어렵다.
중앙정보부장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나자 신직수가 후임으로 임명됐다.
제7대 중앙정보부장이다.
재임기간은 1973년 12월 3일부터 1976년 12월 3일까지 정확히 3년이다.
중앙정보부는 원래 해외정보와 대공수사를 담당하는 정보기관이었지만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는 사실상
정보기관 + 국내정치 공작기관 + 대공수사기관 + 고문실 + 대통령 사설 권력기관
이 다 섞인 괴물이 되어 있었다.
신직수는 그 조직을 유신체제의 국내 정치통제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국내 공안사건을 담당한 제6국 기능을 강화했고, 그의 재임 중 여러 대형 공안사건과 민주화운동 탄압이 벌어졌다.
민청학련 사건
1974년 발생한 민청학련 사건은 신직수 시절 중앙정보부를 대표하는 공안사건이다.
정부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이른바 민청학련이 공산주의 세력의 지령을 받아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학생과 재야인사 수백 명이 체포됐고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등의 혐의가 적용됐다.
관련자들에게 중형이 선고되었으며 중앙정보부 수사과정에서는 고문과 강압수사가 이루어졌다는 증언이 쏟아졌다.
훗날 민주화 이후 재심을 통해 상당수 관련자들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민청학련 사건은 단순히 몇 명을 잡아넣은 사건이 아니라 유신정부가 학생운동과 민주화세력을 용공세력으로 한꺼번에 묶어버리는 데 사용한 대표적인 공안사건이었다.
그리고 당시 그 정보기관의 수장이 신직수였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신직수 이름에서 가장 무겁게 따라붙는 것이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이다.
민청학련 수사 과정에서 중앙정보부는 일부 인사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인민혁명당을 재건하고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했다고 발표했다.
23명이 기소됐고, 이 가운데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사형을 확정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바로 8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대법원 확정판결 후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이 때문에 훗날 이 사건은 사법살인의 대표 사례로 불리게 된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이었다고 판단했고, 2007년 재심에서는 관련자들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당시 사건 수사를 총괄한 기관의 최고책임자가 바로 신직수였으며, 중앙정보부 제6국이 수사를 담당했다.
그래서 오늘날 신직수의 역사적 평가에서 인혁당 사건은 절대 피해갈 수 없는 부분이다.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을 거쳐 법과 인권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할 사람이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대표적인 사법살인 사건을 지휘한 셈이라 더 아이러니하다.
동아일보 광고탄압
1974~1975년 동아일보가 유신정권에 비판적인 보도를 이어가자 중앙정보부는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었다.
기업들이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못하도록 협박하거나 회유했고, 광고가 줄줄이 취소됐다.
신문 지면에는 광고 대신 하얀 공백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작은 개인광고를 내면서 유명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가 벌어졌다.
중앙정보부가 언론사 기자를 직접 잡아다 검열하는 것뿐 아니라 광고주 목을 졸라서 돈줄을 끊는 방식까지 사용한 것이다.
이 공작 역시 신직수 재임기의 대표적인 언론탄압 사건으로 꼽힌다.
문인·간첩 사건
신직수 재임기 중앙정보부에서는 여러 간첩사건이 발표됐다.
문인간첩단 사건,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 등 여러 사건에서 훗날 고문, 강제자백, 조작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유신정부의 공안정치는 대충 패턴이 비슷했다.
반정부 활동을 하는 인물이나 학생·지식인을 잡음 → 북한과 연관이 있다고 발표함 → 중앙정보부에서 강도 높은 조사 → 검찰 기소 → 법원 중형 선고.
진짜 간첩사건 역시 존재했지만 이런 구조가 반복되면서 정치적 반대자와 간첩의 경계가 중앙정보부 마음대로 움직이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신직수 중정 시절은 이 방식이 가장 강하게 사용된 시기 가운데 하나다.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방문
신직수 시절 중앙정보부의 모든 일이 탄압과 공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74년 육영수 피살사건 이후 정부는 일본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즉 조총련계 재일동포를 대상으로 모국방문사업을 추진했다.
1975년 광복 30주년을 계기로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이 한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했고, 분단 이후 처음으로 상당수 재일동포가 한국의 가족들과 만날 수 있었다.
신직수는 중앙정보부장으로 이 사업을 추진하는 데 관여했다.
유신정부 입장에서는 인도적 목적뿐 아니라 조총련계 동포들을 북한 영향권에서 이탈시키려는 정치·정보 목적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수십 년간 만나지 못했던 이산가족들이 재회할 수 있었다는 점은 긍정적인 부분으로 평가된다.
김재규와의 관계
신직수 후임 중앙정보부장이 바로 김재규다.
둘은 과거 군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다.
박정희가 제5사단장이던 시절 김재규는 참모장, 신직수는 법무참모로 근무한 적이 있어 군대 조직상 김재규가 신직수보다 상급자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1973년 이후락 후임 중앙정보부장으로 신직수가 임명되고 김재규가 차장으로 들어가면서 상황이 반대로 뒤집혔다.
김재규 입장에서는 과거 자신의 휘하 법무참모였던 신직수가 이제 자기 상관이 된 셈이다.
이후 김재규는 1974년 건설부장관으로 옮겼고, 1976년 12월 신직수가 물러나자 후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됐다.
두 사람의 중정부장 스타일은 꽤 달랐다는 평가가 많다.
첨부된 김재규 문서에도 당시 정치범이었던 이부영의 회고가 인용되어 있는데, 그는 중정부장이 신직수에서 김재규로 바뀐 뒤 정치범 형량이 크게 줄어들고 보안법·긴급조치 사건의 체포도 감소했다고 회고했다.
물론 김재규 시절 중앙정보부도 민주적인 정보기관은 절대 아니었고 고문·공안수사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래도 신직수 → 김재규 교체는 유신체제 내부에서 공안정책의 강도가 어느 정도 완화되는 분기점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경질
1976년 코리아게이트가 터지면서 신직수도 결국 자리에서 내려왔다.
박정희 정부와 미국 의회 사이의 로비 의혹이 미국에서 대형 정치스캔들로 번졌고, 사업가 박동선이 미국 정치인들에게 돈을 제공했다는 의혹이 폭발했다.
여기에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중앙정보부 요원 김상근이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정보기관의 해외공작과 대미관계 문제가 한꺼번에 터진 셈이다.
결국 신직수는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에서 경질됐다.
후임이 김재규였다.
참고로 신직수가 부장에서 물러난 뒤 바로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79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의 법률담당 특별보좌관으로 다시 청와대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사망하고 최규하 정부가 들어선 뒤 같은 해 12월 면직됐다.
이걸로 박정희 정권과 함께 시작된 그의 공직생활도 사실상 끝났다.
퇴임 이후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난 뒤 1977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했다.
1981년부터는 일양합동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로 활동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 검찰과 정보기관을 사실상 대표했던 인물이지만 퇴임 이후 형사처벌을 받거나 과거사 책임을 법적으로 추궁당한 일은 없었다.
2001년 9월 9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74세.
평가
신직수에 대한 평가는 사실 꽤 단순하다.
행정가나 법조인으로서는 매우 유능했고 박정희가 원하는 것을 빠르게 제도화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36세에 검찰총장이 된 뒤 7년 반을 버티고, 법무부장관과 중앙정보부장까지 했다는 경력 자체가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코스다.
검찰 제도 정비, 대한법률구조협회 설립,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방문사업 같은 긍정적인 업적도 분명 존재한다.
문제는 그 능력을 어디에 썼느냐다.
특히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는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언론 광고탄압, 각종 공안사건 등 유신정권의 가장 어두운 정책들이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그가 모든 사건의 세부 수사방법까지 직접 지시했다는 뜻은 아니지만,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자리는 조직의 최종 책임자였다.
더구나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까지 지낸 사람이었기 때문에 법률적 절차와 인권문제를 몰랐다고 변명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신직수를 단순한 "박정희 시대의 유능한 법조인"보다 유신체제를 법률과 공안기관 양쪽에서 떠받친 핵심 관료로 보는 평가가 강하다.
김재규와 비교
김재규 문서와 같이 보면 신직수라는 인물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둘 다 박정희가 직접 신뢰한 측근이었고, 둘 다 중앙정보부장이었다.
하지만 스타일은 상당히 달랐다.
신직수는 법조관료 출신답게 정권의 요구를 제도와 수사로 집행하는 타입이었다.
반면 김재규는 군인 출신이었고, 중정부장에 오른 뒤에도 정치범 처벌 완화나 긴급조치 완화 등을 주장하면서 박정희와 계속 충돌했다.
물론 김재규를 무조건 민주투사로 보고 신직수를 단순 악당으로 만들면 역사 이해가 너무 평면적이다.
김재규 역시 보안사령관·중정부장으로 공안체제에 몸담았고 인권침해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중앙정보부 운영방식에서는 차이가 있었다는 증언과 자료가 꽤 남아 있다.
정리하면
신직수: 유신 공안체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굴린 법률관료
김재규: 같은 체제의 핵심에 있으면서 뒤로 갈수록 그 체제와 충돌한 군인
정도로 대비해서 보면 이해하기 쉽다.
여담
- 대한민국 역사에서 36세 검찰총장이라는 기록부터가 어지간히 비범하다.
- 검찰총장을 약 7년 6개월간 지냈다. 요즘처럼 검찰총장 임기가 2년인 시대와 비교하면 그냥 검찰에 자기 방 하나 따로 만들어도 됐을 기간이다.
- 검찰총장→법무부장관→중앙정보부장이라는 이력 때문에 법무·검찰·정보기관을 전부 경험한 극히 드문 인물이다.
- 중앙정보부장 중 군인이 아닌 순수 법조관료 출신이라는 점도 특이하다. 군법무관 복무는 했지만 본업은 법조인이었다.
- 신직수와 김재규는 박정희 밑에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고, 당시에는 김재규가 참모장, 신직수가 법무참모였다. 나중에는 중앙정보부에서 신직수가 부장, 김재규가 차장이 됐다.
- 1973년 중정부장이 된 이유부터가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이후락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직수 자신도 코리아게이트와 중정요원 망명 문제로 날아갔다. 중정부장이라는 자리가 권력은 존나 센데 오래 버티기는 쉽지 않았다.
- 인민혁명당 사건 사형수 8명은 대법원 판결 바로 다음 날 처형됐다. 이 부분은 신직수 재임기의 가장 무거운 역사적 책임으로 남아 있다.
- 대한법률구조공단의 전신인 대한법률구조협회 설립에 관여한 사람이 나중에 대표적인 공안사건을 지휘한 중정부장이 됐다는 점은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 1975년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방문사업은 신직수 경력 중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사업이다.
- 사위가 홍석현이다. 그래서 삼성·중앙일보 쪽 가계와도 연결된다.
- 2001년 사망 당시 언론 부고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막후 인물'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했다. 눈에 확 띄는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권력 핵심에는 거의 20년 가까이 붙어 있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