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開京)은 919년 태조 왕건이 도읍을 정한 이후 고려의 정치·경제·문화적 중심지로 기능한 수도이다. 송경(松京), 송도(松都), 황도(皇都) 등으로도 불렸으며, 오늘날 북한의 개성시에 해당한다.
918년 철원에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이듬해 자신의 고향인 송악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개경은 1392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약 474년 동안 왕조의 중심지로 기능했으며,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던 시기 등을 제외하면 고려의 실질적인 수도였다.
개경에는 고려 국왕이 거주하던 궁궐인 만월대를 비롯하여 중앙 관청, 시장, 사찰, 교육기관 등이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예성강 하류의 벽란도를 통해 송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사신과 상인이 왕래하면서 국제적인 교역도시로 발전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약 2년 동안 수도로 사용되었으나, 1394년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수도의 지위를 잃었다. 이후 정종이 1399년 개경으로 환도했지만, 1405년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최종적으로 수도의 기능을 상실했다.
| 개경(開京) | |
|---|---|
| 다른 이름 | 송경(松京), 송도(松都), 황도(皇都), 중경(中京), 개성(開城) |
| 이전 지명 | 부소갑(扶蘇岬), 송악군(松嶽郡), 송악현(松嶽縣) |
| 국가 | 고려 |
| 위치 | 한반도 중서부, 송악산 남쪽 |
| 현재 위치 | 북한 개성시 |
| 수도 지정 | 919년(태조 2년) |
| 고려 수도 기능 | 919년 ~ 1392년 (일부 천도 기간 제외) |
| 조선 수도 기능 | 1392년 ~ 1394년, 1399년 ~ 1405년 |
| 건설·정비 | 태조 왕건, 광종, 성종, 현종 등 |
| 주요 행정구역 | 5부 35방 344리 |
| 대표 궁궐 | 본궐(만월대), 수창궁 |
| 주요 방어시설 | 발어참성, 궁성, 황성, 개경 나성, 개경 내성 |
| 주요 시장 | 시전, 십자가 일대 상업지구 |
| 주요 무역항 | 벽란도 |
| 주요 교육기관 | 국자감, 성균관 |
| 주요 종교 | 불교, 유교, 도교 및 민간신앙 |
| 주요 기록 |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도경》 |
| 현재 주요 유적 | 개성 만월대, 개성 남대문, 선죽교, 개성 성균관, 왕건릉, 공민왕릉 |
| 세계유산 | 개성역사유적지구(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
개요
고려 왕조 약 500년의 역사가 펼쳐졌던 수도이자, 한때 동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국제도시였던 곳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수도라고 하면 당연히 서울을 떠올리지만, 고려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는 개경이었으며, 국왕이 거주하던 궁궐과 중앙정부의 관청, 전국에서 올라온 관리와 상인, 외국에서 찾아온 사신들까지 모두 이곳에 모여들었다.
고려가 918년 건국된 뒤 이듬해 수도를 개경으로 옮긴 이후, 개경은 수백 년에 걸쳐 한반도의 정치·경제·문화적 중심지로 성장했다. 전국에서 거둬들인 세금과 물자가 개경으로 모였으며, 국왕과 귀족들이 거주하는 궁궐과 저택이 들어섰고, 수많은 사찰과 상업시설이 도시 곳곳에 건설되었다.
특히 개경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와 비교하여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경주는 신라 왕실의 정치적·종교적 중심지로 발전한 도시였지만, 개경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여러 지역의 세력들을 통합하고 새로운 왕조를 운영하기 위해 발전시킨 수도였다. 따라서 고려의 개경은 왕실과 중앙정부뿐 아니라 전국의 지방 호족과 관료, 상인, 외국 사절단들이 교류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또한 개경은 서해로 이어지는 예성강과 가까웠다.
덕분에 외국에서 배를 타고 온 사신과 상인들은 벽란도에 도착한 뒤 육로를 통해 개경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고려는 송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했으며, 대식국으로 기록된 서아시아 계통 상인들도 고려를 방문했다.
왕궁과 관청, 시장과 사찰, 외국 상인들의 숙소까지 갖춘 거대한 중세의 수도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북한의 개성이라는 지방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 시대에는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지금의 서울에 해당하는 위상을 가졌던 셈이다.
다만 개경의 역사가 항상 화려했던 것만은 아니다.
1010년 거란의 침입으로 궁궐과 도성이 파괴되었고, 1126년 이자겸의 난 때에도 궁궐이 불탔다. 1232년에는 몽골군의 침입을 피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으며, 1361년에는 홍건적이 개경을 점령하면서 도시가 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전란에도 개경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왕조의 중심지라는 위상을 유지했다.
그러나 1392년 개경에서 고려 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도시의 운명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새 왕조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한양으로 천도했으며, 이후 개경은 수도의 지위를 잃고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남게 되었다.
고려가 흥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도시였으며, 고려가 멸망하면서 정치적 중심지의 자리에서도 물러난 도시였던 것이다.
역사
고려 건국 이전
송악의 역사
개경의 역사는 고려가 건국되기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지역은 고구려 시대에 부소갑(扶蘇岬)이라고 불렸으며, 신라의 지배 아래 들어간 이후 송악군 또는 송악현으로 불렸다.
송악은 오늘날 개성 북쪽에 있는 송악산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신라 시대의 송악은 수도 경주에서 상당히 떨어진 서북부 지역으로, 정치적 중심지라기보다는 지방의 군사·교통상 요충지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 지역은 서해와 연결되는 예성강의 수운을 이용할 수 있었으며, 한반도 중서부의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훗날 송악이 고려의 수도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또한 신라 말기에는 송악을 중심으로 유력한 지방 세력이 성장했는데, 그 대표적인 가문이 바로 왕건의 집안이었다.
왕건의 선조들은 송악과 예성강 일대를 기반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송악 지역의 유력한 지방 세력이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왕건은 후삼국시대에 중요한 군사적·정치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궁예의 송악 천도
신라 말기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전국 각지에서는 독자적인 무장세력들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궁예였다.
궁예는 처음에는 기훤과 양길의 휘하에서 활동했지만, 이후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한반도 중북부 지역을 장악했다.
896년 송악 지역의 유력자였던 왕륭이 궁예에게 귀부하면서 송악은 궁예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궁예는 왕건에게 송악 지역의 성곽을 정비하도록 했으며, 898년에는 송악을 자신의 수도로 삼았다.
이때 궁예는 송악에 궁궐과 관청, 군사시설 등을 건설하면서 수도로서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궁예는 905년 수도를 철원으로 옮겼다.
송악이 궁예 정권의 수도였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이 시기에 형성된 도시의 기반은 이후 고려 왕건의 개경 건설에 영향을 미쳤다.
고려의 수도가 되기 이전에도 이미 한 차례 나라의 수도로 사용된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궁예가 먼저 수도로 만들어 놓았다가 철원으로 옮겼고, 나중에 왕건이 다시 가져와 고려의 수도로 삼은 셈이다.
고려 태조의 천도
918년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했다.
고려가 건국될 당시 왕건은 궁예가 수도로 사용하던 철원에서 즉위했다.
그러나 왕건은 철원을 새로운 왕조의 장기적인 수도로 삼지 않았다.
919년 왕건은 수도를 송악으로 옮겼으며, 송악현과 개성현 일부를 통합하여 개주(開州)라고 불렀다.
이것이 고려의 수도 개경이 형성되는 출발점이었다.
왕건은 송악산 남쪽에 궁궐을 건설하고 국가 운영에 필요한 관청과 시장, 도로 등의 시설을 정비했다.
또한 수도를 다섯 구역으로 나누는 5부 체제를 마련하고, 법왕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을 건립했다.
개경의 정비는 단순히 국왕이 거주할 궁궐을 짓는 일이 아니었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전국의 지방 세력을 통합하여 새로운 왕조를 운영할 행정적 중심지를 필요로 했다.
개경은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도시였다.
우선 왕건의 본거지였기 때문에 정치적·군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예성강과 서해를 통한 교통이 편리했으며, 한반도의 여러 지역과 연결되는 육상교통망도 활용할 수 있었다.
특히 왕건은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전국의 지방 호족들을 포섭하면서 고려의 통치체제를 정비했다.
개경은 단순히 왕건의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택된 수도가 아니라, 새로운 왕조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정치적·경제적 기반이기도 했다.[1]
왕건 입장에서는 자기 고향이기도 하고, 이미 궁예가 수도로 쓰면서 어느 정도 기반시설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굳이 다른 곳을 찾을 이유가 적었을 것이다.
고려 전기의 발전
936년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개경은 한반도 대부분을 통치하는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고려의 국왕들은 궁궐과 관청, 종교시설 등을 확충하면서 수도의 규모를 확대했다.
특히 광종은 960년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부르도록 했다.
황도란 황제가 거주하는 수도라는 의미다.
당시 고려는 대외적으로 중국 왕조와 외교관계를 맺으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에 준하는 제도와 의례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개경을 황도라고 부른 것도 이러한 정치적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다만 황도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고려가 모든 외교관계에서 일관되게 황제국을 자처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고려의 외교적 지위와 국왕의 칭호는 상대 국가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성종 시대에는 유교적 정치제도가 정비되면서 개경의 중앙 관청과 행정조직도 확충되었다.
995년에는 개주가 개성부(開城府)로 개편되었으며, 수도와 주변 지역을 통치하기 위한 행정체계가 정비되었다.
이후 개경은 왕궁과 관청, 시장, 교육기관, 사찰 등이 결합된 중세 도시로 발전했다.
거란의 침입과 나성 축조
고려 전기의 개경은 거란과의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1010년 거란의 제2차 침입 당시 거란군은 고려의 수도 개경을 향해 진격했다.
고려군은 여러 지역에서 거란군에 저항했지만, 결국 거란군은 개경에 진입했다.
현종은 수도를 떠나 남쪽으로 피난했으며, 개경의 궁궐과 여러 건축물들이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은 고려가 수도 방어체제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개경에는 이미 성곽이 존재했지만, 도시 전체를 충분히 방어할 수 있는 체계는 아니었다.
이에 고려는 수도를 둘러싸는 대규모 외곽 성곽인 나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개경 나성은 1009년 무렵부터 축조가 추진되었으며, 거란의 침입을 겪은 뒤 공사가 더욱 본격화되어 1029년 완성되었다.
나성의 전체 길이는 약 23km에 달했다.
이는 고려가 수도의 방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보여준다.
특히 나성은 주변의 산악지형을 활용하여 개경을 둘러싸는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한 차례 수도가 적군에게 함락된 경험을 바탕으로 도시 전체를 거대한 성곽으로 둘러싸려 한 것이다.
거란군이 수도까지 쳐들어와 궁궐을 불태우고 돌아갔으니, 고려 입장에서는 이번에는 수도 전체에 제대로 된 성벽을 둘러야겠다고 생각할 만했다.
나성 축조 이후 개경의 방어체제는 크게 강화되었으며, 도시의 영역도 더욱 명확하게 정비되었다.[2]
고려 중기의 번영
11세기와 12세기는 개경이 정치·문화·상업의 중심지로 크게 번영하던 시기였다.
고려의 중앙정부가 안정되면서 수많은 관료와 귀족들이 개경에 거주했고, 국왕들은 궁궐과 사찰, 교육기관 등을 계속 정비했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생산된 물품들이 수도로 모였으며, 외국과의 교역도 활발해졌다.
특히 예성강의 벽란도를 통해 송나라의 사신과 상인들이 개경을 방문했다.
1123년에는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를 방문하여 수도 개경의 여러 모습을 기록했다.
그는 귀국한 뒤 《고려도경》을 작성했으며, 이 책에는 고려의 궁궐과 관청, 복식, 종교, 생활문화 등에 관한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고려도경》은 오늘날 고려 중기의 개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 가운데 하나다.
이 시기의 개경은 궁궐과 고위 귀족들의 저택, 시장과 사찰, 외국 사절단을 위한 숙소 등이 갖추어진 도시였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의 이면에는 중앙 귀족들의 권력 독점과 정치적 갈등도 존재했다.
1126년에는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탔으며, 1170년에는 무신정변이 발생하면서 고려의 정치질서가 크게 변화했다.
이처럼 개경은 고려의 번영뿐 아니라 왕실과 귀족, 무신들 사이의 정치적 투쟁이 벌어진 공간이기도 했다.
몽골 침입과 강화 천도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이 고려를 침략하면서 개경의 역사도 큰 전환점을 맞았다.
1231년 몽골군이 고려에 침입하자 고려는 강력한 군사적 압박을 받았다.
당시 고려에서는 최씨 무신정권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국왕보다 무신 집권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다.
1232년 최우는 몽골군과의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강화도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기병 중심의 몽골군이 공격하기 어려운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수도 이전은 고려의 관료들과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개경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강화도로 이동해야 했으며, 새로운 궁궐과 관청, 방어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또한 몽골군이 한반도 내륙을 공격하면서 많은 지역이 전쟁의 피해를 입었다.
이 시기 강화도는 강도(江都)라고 불렸으며, 고려의 임시 수도로 기능했다.
그 결과 개경은 약 38년 동안 실질적인 수도의 역할을 상실했다.
그러나 강화도 천도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개경이 완전히 폐허가 되어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개경에는 여전히 주민들이 거주했고, 일부 시설과 교통망도 유지되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전쟁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도시의 궁궐과 관청, 사찰 등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1270년 원종은 몽골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이를 개경 환도라고 한다.
고려 왕조는 약 38년 만에 다시 본래의 수도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강화도에 남아 항전을 계속하려던 삼별초는 개경 환도에 반발하여 봉기했고, 이후 진도와 제주도로 이동하여 저항을 이어갔다.[3]
홍건적의 개경 점령
고려 후기인 1361년에는 홍건적이 개경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원나라의 지배에 저항하는 반란이 확대되고 있었으며, 홍건적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성장한 무장세력이었다.
홍건적의 일부 세력은 고려를 침입하여 여러 지역을 공격했으며, 결국 수도 개경까지 진격했다.
공민왕은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했고, 홍건적은 개경을 점령했다.
그러나 고려군은 군사력을 재정비하여 반격했다.
안우, 이방실, 정세운 등 여러 장수들이 홍건적에 저항했으며, 고려군은 결국 개경을 탈환했다.
이 과정에서 개경은 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송악산 남쪽에 자리 잡고 있던 고려의 본궐은 전란으로 심각하게 파괴되었으며, 이후에도 원래의 모습으로 완전히 복구되지 못했다.
고려 말기 국왕들이 수창궁 등 다른 궁궐을 활용한 것도 이러한 상황과 관련이 있다.
고려의 수도를 상징하던 궁궐조차 여러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점차 원래의 모습을 잃어 갔던 것이다.
도시 구조
지리적 특징
개경은 송악산 남쪽의 분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북쪽에는 송악산이 위치했으며, 동쪽과 서쪽, 남쪽으로도 여러 산들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러한 지형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는 데 유리한 조건이었다.
또한 고려에서는 풍수지리 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산과 물의 배치를 고려하여 수도의 위치와 궁궐의 방향을 정하려 했다.
개경 역시 풍수지리적인 관념을 반영하여 조성된 도시였다.
그러나 개경의 지리적 장점은 산악지형에만 있지 않았다.
도시 서쪽으로는 예성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서해와 연결될 수 있었다.
특히 벽란도는 개경으로 들어오는 외국 사신과 상인들에게 중요한 출입구였다.
개경은 내륙의 정치적 중심지이면서 동시에 서해를 통해 외국과 교류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궁성·황성·나성
고려의 수도 개경은 여러 겹의 성곽과 방어시설을 갖춘 도시였다.
그중 중요한 시설은 다음과 같다.
| 구분 | 주요 기능 | 특징 |
|---|---|---|
| 궁성 | 국왕과 왕실의 생활 및 정치활동 | 송악산 남쪽의 본궐을 중심으로 형성된 궁궐 구역. |
| 황성 | 궁궐을 둘러싼 주요 국가시설 보호 | 궁성 주변의 관청과 왕실 관련 시설을 방어하는 성곽. |
| 발어참성 | 초기 수도 방어 | 궁예 시대부터 정비된 것으로 알려진 초기 성곽. |
| 나성 | 수도 전체의 외곽 방어 | 현종 시대인 1029년 완공된 약 23km 길이의 외곽 성곽. |
| 내성 | 고려 말기의 도성 방어 | 1391~1393년 무렵 정비된 도성 내부의 방어성곽. |
이들 성곽은 모두 동일한 시기에 한꺼번에 건설된 것이 아니다.
궁예와 왕건 시대의 초기 성곽을 바탕으로 고려 전기에 궁성과 황성이 정비되었으며, 거란 침입 이후에는 나성이 축조되었다.
또한 고려 말기에는 기존의 외곽 방어체계를 보완하기 위한 내성이 건설되었다.
따라서 개경의 성곽 구조는 고려 왕조 수백 년 동안의 도시 확장과 군사적 필요가 축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유네스코에서도 이러한 성곽 체계를 고려 수도 개경의 중요한 역사적 특징으로 평가하고 있다.[4]
만월대
고려 왕조의 정궁이 있었던 장소이자 개경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만월대(滿月臺)라고 부르는 곳은 고려의 왕궁이 있던 송악산 남쪽의 구릉지대다.
고려 시대에는 이곳의 주요 궁궐을 본궐(本闕) 또는 대내(大內)라고 불렀다.
왕건은 919년 송악에 천도하면서 이곳에 궁궐을 건설했으며, 이후 여러 국왕들이 궁궐의 규모를 확장하고 수리했다.
만월대에는 국왕이 정무를 처리하던 중심 전각과 왕실의 거처, 의례를 위한 공간 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특히 회경전(會慶殿)은 고려 왕궁의 중요한 정전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궁궐에는 여러 건축물과 정원, 연못 등이 존재했으며,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전각을 배치했다.
만월대는 평탄한 땅 위에 건설된 일반적인 도시형 궁궐과 달리 산기슭의 경사를 활용하여 여러 단의 축대를 쌓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오늘날 남아 있는 궁궐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만월대는 고려 시대에 여러 차례 전란과 화재를 겪었다.
특히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본궐이 심각하게 파괴된 뒤에는 원래의 모습을 충분히 회복하지 못했다.
현재 만월대에는 궁궐의 목조건축물이 대부분 사라지고 석축과 계단, 건물터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2007년부터 2018년까지 남북한은 만월대 유적에 대한 공동 발굴조사를 여러 차례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궁궐의 건물터와 기와, 청자, 금속활자 등 다양한 유물들이 확인되었다.[5]
수백 년 동안 고려 국왕들이 거주하고 정치를 했던 궁궐이었지만, 지금은 건물 대부분이 사라지고 기단과 계단만 남아 있다. 고려 왕조가 사라진 세월을 생각하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십자가와 시전
개경의 도심은 주요 도로들이 교차하는 십자가(十字街)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십자가는 남북 방향의 도로와 동서 방향의 도로가 교차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이 일대는 개경의 주요 상업지구이자 교통의 중심지였다.
고려는 왕궁과 중앙 관청이 위치한 지역을 중심으로 주요 도로를 정비했으며, 그 주변에 시전(市廛)이라는 상업시설을 마련했다.
시전은 국가의 감독 아래 운영되던 상업시설로, 다양한 상품들이 거래되는 공간이었다.
특히 황성의 정문 가운데 하나인 광화문에서 십자가로 이어지는 남대가(南大街) 일대에는 주요 상점들이 들어서 있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고려 개경의 광화문과 오늘날 서울 경복궁의 광화문은 서로 다른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위치와 시대, 소속된 궁궐이 다르다.
또한 개경에는 오천(烏川)이라는 하천이 흐르고 있었으며, 하천과 도로를 따라 상업활동이 이루어졌다.
개경의 도심은 궁궐과 관청이 있는 정치적 중심지와 시장 및 주거지역이 연결된 도시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개경은 단순히 왕궁만 있는 도시가 아니라 실제로 수많은 주민들과 상인들이 생활하던 경제활동의 중심지였다.
5부 35방 344리
고려는 개경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행정구역을 구분했다.
수도 개경의 대표적인 행정구역 체계는 5부 35방 344리였다.
여기서 부(部)는 도시의 큰 행정구역이며, 방(坊)과 리(里)는 그 아래의 구역을 가리킨다.
개경의 5부는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로 구분되었다.
각 부 아래에는 여러 방이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다시 여러 리가 존재했다.
대표적인 방의 이름으로는 안정방, 덕산방, 법왕방, 흥국방, 앵계방 등이 전해진다.
이러한 행정체계는 도시의 주민들을 관리하고 조세와 부역을 부과하며 행정명령을 전달하는 데 활용되었다.
다만 5부 35방 344리라는 숫자가 고려 왕조의 모든 시기에 동일하게 유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왕조가 지속되는 동안 수도의 규모와 행정조직은 여러 차례 개편되었으며, 부와 방의 구획도 변화했다.
또한 개경의 도성 내부와 주변 지역인 경기(京畿)는 행정적으로 구분되어 관리되었다.
정치와 행정
고려의 중앙정부
개경은 고려의 중앙정부가 위치한 도시였다.
국왕은 개경의 궁궐에서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했으며, 국가의 중요한 정책과 법령이 이곳에서 결정되었다.
또한 중앙 관청의 관리들은 개경에 거주하면서 전국의 지방행정을 감독했다.
고려 전기에는 2성 6부를 중심으로 중앙 정치체제가 정비되었다.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은 국가의 주요 정책과 행정을 담당했으며, 6부는 인사와 재정, 군사, 형벌, 의례, 토목 등 국가 운영에 필요한 업무를 분담했다.
이 밖에도 중추원, 어사대, 삼사 등 다양한 관청들이 존재했다.
이러한 중앙 관청들은 개경의 정치적 기능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시설들이었다.
개경에는 국왕과 왕실뿐 아니라 고위 관료, 귀족, 군인, 승려, 상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개경의 정치는 곧 고려 전체의 정치적 권력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경기와 개성부
고려는 수도를 둘러싼 지역을 일반 지방행정구역과 구분하여 관리했다.
이러한 수도 주변의 특별한 행정구역을 경기(京畿)라고 불렀다.
경기는 수도의 식량과 물자를 공급하고 군사적으로 수도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919년 왕건이 송악에 천도하면서 설치한 개주는 수도와 주변 지역을 포함하는 특별한 통치영역이었다.
이후 성종 시대인 995년에는 개성부가 설치되어 수도 주변의 행정을 담당했다.
1018년에는 수도 주변 지역을 경기라는 명칭으로 정식 편제했다.
이후 개성부와 개성현, 장단현 등 여러 행정기관이 수도와 주변 지역을 나누어 관리했다.
다만 고려 시대의 경기와 오늘날의 경기도는 완전히 동일한 행정구역이 아니다.
두 명칭은 모두 수도 주변의 지역을 의미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관할 영역과 행정체계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또한 개경이라는 명칭은 수도 자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며, 개성부는 수도 및 그 주변 지역을 관할하던 행정기관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개경과 개성부를 항상 같은 의미로 취급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6]
삼경제와 사경제
고려는 개경 이외에도 여러 지역에 중요한 도시들을 두었다.
대표적인 것이 서경과 동경, 남경이다.
- 개경: 고려의 정식 수도로 국왕과 중앙정부가 위치했다.
- 서경: 오늘날의 평양에 해당하며, 북방 경영과 정치적·군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동경: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에 해당하며, 신라의 전통과 지역적 위상을 반영했다.
- 남경: 오늘날의 서울 일대에 해당하며, 고려 중후기에 중요한 정치적·지리적 거점으로 성장했다.
고려는 시대에 따라 양경제와 삼경제, 사경제 등의 체제를 운영했다.
그러나 여러 지역에 경(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모든 도시가 개경과 동일한 지위를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개경은 실제로 국왕과 중앙정부가 거주하는 정식 수도였으며, 다른 도시들은 이를 보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서경은 고려 전기부터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왕건은 서경을 적극적으로 개발했으며, 이후 묘청 등은 서경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묘청의 난이 실패하면서 서경 천도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개경은 이러한 천도 논의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중심 수도라는 지위를 유지했다.
경제와 국제무역
수도로 집중된 물자
고려의 수도 개경에는 전국 각지에서 생산된 물품들이 모여들었다.
국가가 지방에서 거둬들인 조세와 공물은 육로와 수로를 통해 개경으로 운송되었다.
특히 곡물과 직물 등은 국가의 재정과 관료들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물자였다.
고려는 조운제도를 활용하여 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수도로 운송했다.
이러한 물자들은 개경과 그 주변의 창고에 보관되었으며, 궁궐과 관청, 군대 등에 공급되었다.
또한 개경에는 귀족과 관료 등 소비 능력이 높은 사람들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상품에 대한 수요가 존재했다.
이러한 수요는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을 촉진했다.
개경에서는 의복과 장신구, 도자기, 금속제품, 서적 등 다양한 상품들이 거래되었으며, 국가의 감독 아래 운영되는 시전뿐 아니라 여러 형태의 상업활동이 이루어졌다.
전국에서 생산된 물자가 개경으로 모이고, 그 물자를 소비하는 왕실과 귀족, 관료, 주민들이 다시 상업활동을 촉진하는 구조였다.
벽란도
개경을 중세 국제무역도시로 만들어 준 중요한 항구다.
벽란도(碧瀾渡)는 개경 서쪽 예성강 하류에 위치했던 항구였다.
고려 시대에는 외국에서 배를 타고 온 사신과 상인들이 주로 이곳을 이용했다.
벽란도에 도착한 사람들은 육로를 통해 개경으로 이동할 수 있었으며, 외국에서 들어온 상품들도 이러한 경로를 통해 수도에 공급되었다.
특히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서는 해상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송나라의 상인들은 비단과 약재, 서적, 도자기 등 다양한 상품을 가져왔으며, 고려에서는 인삼과 종이, 금속제품, 직물 등 여러 물품을 교역했다.
그러나 벽란도가 단순히 송나라와만 교역하는 항구였던 것은 아니다.
고려에는 일본과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등 여러 지역에서 온 상인들도 방문했다.
1024년에는 대식국 상인 약 100명이 고려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듬해와 1040년에도 대식국 상인들이 고려를 찾았다.
대식국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서아시아의 이슬람권 지역을 가리키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고려가 단순히 중국과 일본뿐 아니라 훨씬 먼 지역과도 교역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7]
지금 생각하면 고려의 수도에서 중국인뿐 아니라 서아시아에서 온 상인들까지 볼 수 있었다는 뜻이다. 중세라고 해서 사람들이 자기 나라 안에서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벽란도를 통해 세계 모든 지역과 직접 교역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과장이다.
당시에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의 상인들이 중계무역을 담당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고려와 먼 지역 사이의 교류는 직접무역과 간접무역이 함께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벽란도가 개경을 국제적인 교역망과 연결하는 주요 관문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외국 사신과 상인들의 숙소
개경에는 외국에서 온 사신과 상인들이 머무를 수 있는 숙소도 마련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송나라 사신들이 이용하던 순천관(順天館)이 있었다.
순천관은 고려가 외국 사절단을 접대하기 위해 운영한 객관 가운데 하나로, 당시 개경의 외교적 기능을 보여준다.
또한 외국 상인들이 머무르며 상품을 거래할 수 있는 공간도 존재했다.
1055년에는 개경의 여러 객관에 송나라 상인을 비롯한 외국인 약 400명이 체류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는 개경에 상당한 규모의 외국인 방문과 교역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8]
물론 이 숫자가 개경에 거주한 외국인 전체의 인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시기에 객관에 체류하던 사람들의 규모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이해해야 한다.
문화와 종교
불교의 중심지
고려는 불교를 국가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던 왕조였다.
따라서 수도 개경에는 수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뒤 개경에 법왕사 등 여러 사찰을 건설했으며, 이후 국왕과 귀족들도 사찰의 건립과 운영을 지원했다.
당시의 사찰은 단순히 승려들이 수행하는 종교시설에만 머물지 않았다.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식을 거행했으며, 불교 경전을 보관하고 학문과 문화활동을 수행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특히 연등회와 팔관회는 고려의 대표적인 국가 행사였다.
이러한 행사가 열리면 국왕과 관료, 승려들이 참여했으며, 수도의 주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행사를 접할 수 있었다.
개경의 사찰과 불교행사는 고려 왕조의 정치적 권위와 종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는 일부 사찰과 승려들이 막대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면서 정치와 경제에 과도하게 개입한다는 비판도 나타났다.
이러한 문제는 훗날 조선을 건국한 신진 사대부들이 불교 중심의 정치질서를 비판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국자감과 성균관
개경에는 고려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이 있었다.
국자감은 992년 성종 시대에 설치된 중앙 교육기관으로, 국가의 관료를 양성하고 유교 경전을 교육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는 불교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국가의 정치·행정체제를 운영하는 데에는 유교적 정치이념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따라서 개경에는 사찰뿐 아니라 유교적 교육과 의례를 위한 시설들도 건립되었다.
국자감은 고려 후기에도 여러 차례 개편되었으며, 충선왕 시대에는 성균관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교육기관은 고려의 관료 양성체제와 유교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날 개성에는 고려시대 교육기관의 유적과 조선시대 건축물이 남아 있으며, 이는 개성역사유적지구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고려도경의 개경
1123년 송나라의 사신 서긍은 고려를 방문하여 수도 개경의 여러 모습을 관찰했다.
그가 귀국한 뒤 작성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은 오늘날 고려의 사회와 문화, 궁궐과 도시의 모습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이 책에는 개경의 궁궐과 관청, 사찰, 도로, 의복, 식생활, 국가 의례 등에 관한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외국인의 관점에서 고려의 수도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다만 《고려도경》은 송나라 사신이 고려를 방문하고 관찰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기록이므로, 당시 개경 주민들의 일상생활 전체를 빠짐없이 보여주는 자료는 아니다.
또한 서긍은 외교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왕실과 고위 관료들의 생활을 접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기록에는 상류층과 국가 의례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많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개경이 상당한 규모의 정치·문화적 시설을 갖춘 수도였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고려 말과 조선 건국
고려 말의 수도 개경
14세기 후반의 개경은 고려 왕조의 정치적 혼란을 직접적으로 겪은 도시였다.
원나라의 간섭이 약화되면서 공민왕은 고려의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했지만, 귀족과 권문세족들의 반발, 홍건적의 침입, 왜구의 공격 등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특히 홍건적의 개경 점령은 도시의 궁궐과 주요 시설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이후에도 개경에서는 여러 차례 정치적 갈등과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1388년 위화도 회군을 통해 이성계가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뒤에는 고려의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정몽주는 고려 왕조를 유지하려 했던 대표적인 관료였으며, 그의 죽음은 고려의 멸망이 가까워졌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같은 해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국왕인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건국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장소는 개경의 수창궁이었다.
고려 왕조가 시작된 수도에서 약 474년 만에 고려 왕조의 마지막 장면도 펼쳐진 것이다.
조선 건국과 한양 천도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처음에는 개경을 수도로 사용했다.
그러나 새로운 왕조를 건국한 만큼 수도도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특히 정도전 등은 기존 고려 왕조의 정치적 기반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의 통치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또한 한양은 한강을 통해 교통과 물자 운송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며, 풍수지리적으로도 수도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논의 끝에 1394년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했다.
이후 한양에는 경복궁과 종묘, 사직, 중앙 관청 등이 건설되었으며, 조선의 새로운 수도가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개경은 오랫동안 유지하던 정치적 중심지의 지위를 상실했다.
그러나 개경의 관료들과 주민들, 특히 상인들 가운데에는 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개경은 이미 수백 년에 걸쳐 수도로 발전한 도시였으며, 한양으로 수도가 이동하면 기존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이 약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가 망했다고 해서 개경에 살던 사람들까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수백 년 동안 수도에서 장사하던 상인들 입장에서는 왕조가 바뀌었다고 수도까지 옮기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정종의 개경 환도
그런데 개경의 수도 역사는 1394년에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정도전 등이 제거되고, 이성계가 정종에게 왕위를 넘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후 정종은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수도를 개경으로 다시 옮기기로 결정했다.
1399년 3월 조선 조정은 개경으로 환도했다.
그 결과 개경은 다시 조선의 수도로 기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영구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정종 이후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수도 문제를 다시 논의했으며, 여러 정치적 갈등 끝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1405년 조선 조정은 다시 한양으로 천도했다.
이후 개경은 더 이상 조선의 정식 수도가 되지 않았다.[9]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잠시 수도의 지위를 회복했지만, 결국 한양에 그 자리를 완전히 넘겨주었다.
조선시대의 개성
수도의 지위를 상실한 이후 개경은 일반적으로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은 옛 수도를 관리하기 위해 개성유후사를 설치했으며, 이후 개성부로 개편했다.
개성은 더 이상 국왕과 중앙정부가 거주하는 수도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지방도시로서의 위상을 유지했다.
특히 고려 시대부터 이어진 상업적 전통을 바탕으로 개성의 상인들은 조선시대에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들을 일반적으로 송상 또는 개성상인이라고 부른다.
개성상인들은 인삼을 비롯한 여러 상품의 유통과 상업활동에 참여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인 상업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개성은 한양과 평양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중국으로 향하는 사신과 상인들이 지나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따라서 정치적 중심지의 지위는 잃었지만 경제와 교통의 중요성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고려 때에는 국왕이 살던 수도였고, 조선 때에는 장사 잘하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된 셈이다.
현재의 개경
개성시
오늘날 고려의 수도 개경이 있었던 지역은 북한의 개성시에 해당한다.
북한에서는 2019년 개성을 개성특별시로 승격했다.
개성은 한반도의 군사분계선과 가까운 곳에 있으며, 오늘날에도 남북한 사이의 역사적·지리적 연결을 상징하는 도시 가운데 하나다.
광복 이후 개성은 38선 이남에 위치했기 때문에 한동안 남한의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6.25 전쟁을 거치면서 군사적 통제권이 바뀌었으며, 1953년 정전협정 이후에는 북한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 개성에는 고려 시대의 수도 유적뿐 아니라 현대 한국의 분단사와 관련된 역사적 의미도 함께 존재한다.
다만 고대·중세의 개경과 오늘날의 개성시는 행정구역의 범위가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고려 시대의 수도 개경을 설명할 때에는 오늘날 개성시 전체의 행정구역을 그대로 대입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10]
개성역사유적지구
2013년 유네스코는 개성역사유적지구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개성역사유적지구는 고려의 수도 개경과 관련된 궁궐터, 성곽, 왕릉, 교육기관 등의 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만월대와 개성 첨성대, 개성 남대문, 고려 성균관, 선죽교, 왕건릉, 공민왕릉 등이 있다.
유네스코는 이러한 유적들이 고려 왕조의 정치적·문화적 전통을 보여주며, 불교와 유교, 풍수지리 등의 사상이 도시와 건축에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특히 도시를 둘러싼 산과 성곽, 궁궐의 배치가 고려의 정치적·종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유산은 여러 구역으로 이루어진 총 12개의 구성 요소로 구분된다.
이는 개경의 궁궐과 성곽, 왕릉 등 여러 유적을 하나의 역사적·문화적 체계로 평가한 결과다.[11]
주요 유적
| 유적 | 성격 | 주요 특징 |
|---|---|---|
| 개성 만월대 | 고려 왕궁터 | 919년 왕건이 조성한 본궐의 유적. 궁궐의 기단과 석축, 계단 등이 남아 있다. |
| 개경 나성 | 수도 외곽 성곽 | 현종 시대에 완성된 약 23km 규모의 도성 방어시설. |
| 개성 남대문 | 도성 성문 |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정비된 내성의 주요 성문. |
| 개성 첨성대 | 천문·기상 관측시설 | 고려시대의 천문 관측과 관련된 유적. |
| 개성 성균관 | 교육기관 | 고려의 최고 교육기관과 관련된 건축·유적. |
| 선죽교 | 석교 | 고려 말 정몽주가 암살된 장소로 전해지는 다리. |
| 왕건릉 | 왕릉 | 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 |
| 공민왕릉 | 왕릉 | 고려 제31대 국왕 공민왕과 왕비의 무덤. |
| 숭양서원 | 유교 교육시설 | 정몽주의 옛집과 관련된 장소에 조선시대 세워진 서원. |
이 가운데 만월대와 개경 성곽은 고려 수도의 도시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며, 선죽교와 왕릉 등은 고려 왕조의 정치적 사건과 왕실의 역사를 보여주는 장소다.
다만 개성에 현재 남아 있는 모든 건축물이 고려 시대에 건설된 원래의 건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여러 유적은 조선시대에 중건되거나 개수되었으며, 일부는 터와 석축만 남아 있다.
다른 수도들과의 비교
한국사에서 개경은 신라의 경주와 조선의 한양 사이에 위치하는 중요한 역사적 수도다.
| 구분 | 경주 | 개경 | 한양 |
|---|---|---|---|
| 대표 왕조 | 신라 | 고려 | 조선 |
| 수도 기능의 시작 | 신라 초기 | 919년 | 1394년 |
| 현재 위치 |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 북한 개성시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 주요 궁궐 | 월성 | 만월대 | 경복궁, 창덕궁 등 |
| 주요 종교·사상 | 불교·토착신앙 | 불교·유교·풍수지리 | 성리학 중심 |
| 주요 특징 | 신라 왕실의 장기적인 정치 중심지 | 후삼국 통일 이후의 정치·국제교역 중심지 | 조선의 정치·행정 중심지 |
세 도시는 모두 해당 왕조의 정치적 중심지였지만, 형성 과정과 지리적 조건, 도시구조에는 차이가 있었다.
경주는 신라 왕조의 오랜 정치적 중심지였으며, 개경은 후삼국 통일과 함께 발전한 수도였다.
반면 한양은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건국된 뒤 기존의 개경을 대신하여 조성한 수도였다.
특히 개경은 송악산을 중심으로 한 분지 지형과 예성강의 수운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개경은 왕건의 본거지였던 송악을 바탕으로 발전한 도시였으므로, 고려 왕조의 정치적 정통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의의와 평가
개경은 고려 왕조의 정치·경제·문화적 중심지로서 한국 중세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개경은 전국의 여러 지역과 세력을 연결하는 중심 도시로 발전했다.
왕실과 중앙정부의 관청들이 이곳에 집중되었으며, 지방에서 올라온 관리와 상인들, 외국에서 방문한 사절단과 상인들이 왕래했다.
또한 개경은 불교와 유교, 풍수지리 등 다양한 사상과 문화가 결합된 도시였다.
송악산 남쪽의 궁궐과 이를 둘러싼 성곽, 도심의 상업시설, 사찰과 교육기관 등의 배치는 고려가 어떠한 정치적·문화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벽란도를 통한 국제교역은 개경이 한반도 내부의 중심지에만 머물지 않고 동아시아와 그 주변 지역을 연결하는 국제적인 교류도시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개경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이상화할 필요는 없다.
수도에는 왕실과 귀족들의 화려한 궁궐과 저택이 존재했지만, 이를 유지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세금과 부역을 부담했다.
또한 중앙 귀족들의 정치적 권력 투쟁과 무신정변, 여러 차례의 전쟁은 개경 주민들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
따라서 개경은 고려 왕조의 번영을 보여주는 공간인 동시에 그 정치적·사회경제적 모순이 집중된 장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약 5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한 왕조의 수도로 기능하면서 형성된 역사적·문화적 유산은 오늘날까지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특히 개경의 궁궐과 성곽, 왕릉과 교육기관 등의 유적은 고려의 수도가 어떠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사람들이 어떠한 정치·종교·문화적 세계관 속에서 생활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개경은 단순히 고려의 국왕들이 거주했던 장소가 아니라, 고려라는 국가의 정치와 경제, 문화와 대외교류가 집중되었던 도시였다.
오늘날에는 서울이 한반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도시지만, 고려 시대 사람들에게 그 자리는 개경의 것이었다. 고려가 약 500년을 이어간 만큼 개경도 그만큼 오랫동안 한반도의 중심에 있었다.
여담
- 개경은 고려 왕조의 수도였지만, 고려가 건국된 918년부터 곧바로 수도였던 것은 아니다. 왕건은 918년 철원에서 즉위했으며, 이듬해인 919년 송악으로 천도했다.
- 개경은 송경 또는 송도라고도 불렸다. 이는 개경의 모체가 되었던 송악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 고려 광종은 960년 개경을 황도라고 부르도록 했다. 황도라는 명칭에는 고려 왕실의 정치적 권위와 황제국적인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 개경의 수도 기능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도로 옮겨졌다. 따라서 고려 474년 동안 개경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수도였다고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 개경의 나성은 약 23km에 달하는 외곽 성곽이었다. 이는 개경이 당시 상당한 규모의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 개경은 5부 35방 344리로 구성된 도시행정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구획이 고려의 모든 시기에 동일하게 유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 고려의 궁궐이 있었던 만월대는 송악산 남쪽의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현재는 궁궐의 목조건축물 대부분이 사라지고 석축과 기단, 계단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 개경에도 광화문이라는 이름의 문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 서울 경복궁의 광화문과는 다른 건축물이다.
- 개경의 주요 상업지구는 십자가라는 도로 교차점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곳에는 시전과 여러 상점들이 존재했다.
- 고려의 대표적인 국제무역항인 벽란도는 개경 자체에 위치한 항구가 아니라 서쪽의 예성강 하류에 있었다. 외국에서 방문한 사신과 상인들은 벽란도를 통해 개경으로 들어왔다.
- 고려 시대에는 송나라 상인뿐 아니라 대식국으로 기록된 서아시아 계통 상인들도 고려를 방문했다. 1024년과 1025년, 1040년의 방문 기록이 전해진다.
-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이 개경을 방문하여 작성한 《고려도경》은 당시 수도의 궁궐과 행정시설,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다.
- 개경은 거란과 몽골, 홍건적의 침입 등 여러 차례 외적의 공격을 받았다. 특히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만월대의 본궐이 큰 피해를 입었다.
- 고려 말 정몽주가 암살당한 선죽교 역시 개경에 있다. 선죽교는 오늘날 개성의 대표적인 역사유적 가운데 하나다.
- 1392년 이성계는 개경의 수창궁에서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따라서 조선의 건국 역시 한양이 아니라 개경에서 이루어졌다.
- 조선은 1394년 한양으로 천도했지만, 1399년 정종이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 이후 1405년 태종이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개경의 수도 역사는 최종적으로 끝났다.
- 조선시대의 개성상인인 송상은 고려시대 개경의 상업적 전통과 연결하여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개성상인들은 조선 후기 인삼을 비롯한 상품 유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 개성은 광복 이후 한동안 38선 이남에 위치하여 남한의 관할 아래 있었지만, 6.25 전쟁과 정전협정 이후에는 북한 관할 지역이 되었다.
- 2007년부터 2018년까지 만월대에서는 남북 공동 발굴조사가 여러 차례 실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건물터와 금속활자, 청자 등 여러 유물이 확인되었다.
- 2013년 개성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고려의 궁궐과 성곽, 왕릉, 교육기관 등 총 12개 구성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 고려에서 국왕이 거주한 궁궐의 정확한 모습은 오늘날 완전히 복원되지 않았다. 드라마와 영화에 등장하는 만월대 및 개경의 전경은 남아 있는 유적과 문헌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므로, 실제 고려 시대의 모습과 일치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각주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경」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경」 - 성곽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화천도」
- ↑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Historic Monuments and Sites in Kaesong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성 만월대 유적」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적현」
-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 외국과의 무역 활동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시장」
-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양 천도」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성특별시」
- ↑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 Historic Monuments and Sites in Kae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