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팔관회(八關會)는 신라와 고려에서 시행한 국가적인 종교·문화 행사로, 불교의 팔관재계(八關齋戒)에 한국의 전통적인 산천신앙과 제천의례, 전몰자 추모와 국가적인 축제가 결합된 행사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연등회와 함께 국가가 주관하는 가장 중요한 정기 행사 가운데 하나로 발전했다.
팔관회는 원래 재가 불교신자들이 일정한 기간 여덟 가지 계율을 지키며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불교 의식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기존의 종교적 전통과 결합하면서 그 성격이 변화했다.
신라에서는 전쟁에서 사망한 군사들을 위로하고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례로 시행되었다. 《삼국사기》에는 572년(진흥왕 33년) 전사한 장병들을 위해 왕경 바깥의 사찰에서 팔관회를 개최하고 7일 동안 의식을 진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에서는 918년(태조 원년) 11월 처음으로 팔관회를 개최하고 이를 정기적인 국가행사로 정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전 태봉의 궁예가 개최했던 팔관회를 계승하면서, 신라시대부터 전해지던 가무와 의례를 함께 활용했다.
이후 태조는 후손들에게 남겼다고 전해지는 《훈요 10조》 제6조에서 팔관회를 연등회와 함께 반드시 유지해야 할 국가행사로 강조했다.
훈요에서는 팔관회가 천령(天靈)과 오악(五嶽), 명산대천(名山大川)과 용신(龍神)을 섬기는 행사라고 설명했다. 이는 고려의 팔관회가 단순한 불교 법회가 아니라 하늘과 산, 강과 용 등의 신령을 섬기는 전통신앙까지 포함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려의 팔관회는 수도 개경에서 음력 11월 14일과 15일에 개최되었으며, 서경에서는 한 달 앞선 음력 10월 14일과 15일에 개최되었다.
행사에서는 국왕이 불교 사찰에 참배하고 태조 왕건을 기리는 의례를 진행했으며, 문무백관과 지방관들의 하례를 받았다. 또한 다양한 음악과 춤, 놀이가 펼쳐졌고 송나라 상인과 여진족, 탐라의 사절 및 상인들도 참여했다.
따라서 팔관회는 고려의 국가적인 종교의례인 동시에 왕조의 정통성을 과시하고 신하들의 충성을 확인하며 주변 세력과 외교·무역을 진행하는 종합적인 국가축제였다.
그러나 모든 국왕이 팔관회를 일관되게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성종은 987년(성종 6년) 유교적인 국가운영과 재정절약을 강조하면서 팔관회를 중단시켰다. 이후 1010년(현종 원년) 다시 개최되었으며,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중요한 국가행사로 유지되었다.
원 간섭기에는 국왕의 칭호와 의례에 관한 제약이 강화되면서 팔관회의 정치적인 위상도 달라졌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뒤에는 새로운 왕조의 유교적인 국가의례 정비 과정에서 폐지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팔관회를 고려 국왕의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확인하고 불교와 전통신앙을 결합하여 국가의 질서를 상징적으로 구현한 의례라고 설명한다.[1]
오늘날의 표현으로 비유하면 종교행사와 국가기념식, 왕실의 연회와 문화공연, 외교적인 접견과 국제무역 행사를 하나로 합쳐 놓은 고려의 대규모 국가축제였던 셈이다.
기본 정보
| 팔관회 | |
|---|---|
| 한자 | 八關會 |
| 다른 명칭 | 팔관재, 팔관법회, 중동팔관회 |
| 행사 성격 | 국가의례, 불교행사, 전통신앙 의례, 국가축제 |
| 관련 국가 | 신라, 태봉, 고려 |
| 불교적 기원 | 팔관재계 |
| 신라의 기록 | 진흥왕 시대, 572년 전몰자 위령 행사 |
| 고려의 정례화 | 918년 (태조 원년) |
| 고려의 개최 지역 | 개경, 서경 |
| 개경 개최일 | 음력 11월 14~15일 |
| 서경 개최일 | 음력 10월 14~15일 |
| 행사 구분 | 소회(小會), 대회(大會) |
| 주요 장소 | 법왕사, 고려 왕궁, 의봉루·신봉루, 구정 등 |
| 주요 내용 | 불교의례, 산천신 제사, 국왕의 하례 수수, 가무와 연회, 외국인의 조하와 교역 |
| 관련 외국인 | 송나라 상인, 여진인, 탐라인 등 |
| 일시적인 중단 | 987년 성종 |
| 부활 | 1010년 현종 |
| 조선의 폐지 | 1392년 조선 건국 직후 |
| 관련 문서 | 훈요 10조, 시무 28조, 연등회 |
| 주요 사료 |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
명칭
팔관회는 한자로 八關會라고 표기한다.
팔관(八關)은 불교의 여덟 가지 계율을 가리키는 팔관재계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관(關)은 여기서 잘못된 행동을 막거나 금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회(會)는 사람들이 모여 의식을 진행하는 모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원래의 팔관회는 재가 불교신자들이 일정한 기간 여덟 가지 계율을 지키는 법회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의 실제 내용이 원래의 불교 수행의식과 크게 달라졌다.
고려의 팔관회에서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와 국왕의 하례, 음악과 춤, 사신의 접견과 연회 등이 함께 진행되었다.
중동팔관회
중동팔관회(仲冬八關會)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음력 11월에 개최하던 팔관회를 가리킨다.
중동(仲冬)은 음력 11월을 의미한다.
고려에서는 음력 10월에 서경에서 팔관회를 개최했으며, 한 달 뒤인 11월에는 개경에서 더욱 큰 규모의 행사를 진행했다.
따라서 중동팔관회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개경의 팔관회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된다.
불교적 기원
팔관회의 불교적인 기원은 팔관재계(八關齋戒)다.
팔관재계는 출가하지 않은 일반 신자가 일정한 기간 동안 여덟 가지 계율을 지키며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수행방식이다.
이러한 전통은 인도에서 유래했으며,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파되면서 중국과 한반도에도 전해졌다.
여덟 가지 계율
팔관재계에서 지키는 여덟 가지 계율은 다음과 같다.
| 구분 | 주요 내용 |
|---|---|
| 제1계 |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을 것 |
| 제2계 |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않을 것 |
| 제3계 | 음행을 하지 않을 것 |
| 제4계 |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 |
| 제5계 | 술을 마시지 않을 것 |
| 제6계 | 향수와 장신구, 화장 등으로 몸을 꾸미거나 노래와 춤 등 오락을 즐기지 않을 것 |
| 제7계 | 높고 화려한 침상이나 자리를 사용하지 않을 것 |
| 제8계 | 정해진 때가 아닌 시간에 음식을 먹지 않을 것 |
팔관재계는 일반적으로 하루 낮과 하룻밤 동안 계율을 지키는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이를 통해 재가 신도들도 일정한 기간 출가 수행자와 비슷한 방식으로 절제와 수행을 실천할 수 있었다.
원래의 팔관재계와 고려 팔관회의 차이
팔관재계는 살생과 음주, 사치와 오락을 피하고 절제된 생활을 실천하는 수행방식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팔관회에서는 대규모 연회가 개최되고 음악과 춤, 각종 공연이 펼쳐졌다.
따라서 두 행사를 동일한 성격의 의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의 팔관회는 불교의 팔관재계에서 출발했지만 국가적인 제사와 왕실의 축제, 외교행사로 발전하면서 원래의 수행의식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팔관회가 불교의 팔관재계와 한국의 전통적인 민속신앙이 결합하여 발전한 행사라고 설명한다.[2]
신라시대
팔관회는 고려가 건국되기 이전인 신라시대부터 시행되었다.
신라에서의 팔관회는 불교적인 수행과 국가적인 위령,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의례가 결합된 행사였다.
혜량과 팔관회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에는 551년(진흥왕 12년) 고구려 출신 승려 혜량이 신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진흥왕은 혜량을 승통(僧統)으로 삼았으며, 이때 백좌강회와 팔관의 법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은 신라에서 팔관회가 제도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한 시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다만 551년 당시부터 오늘날 알려진 형태의 팔관회가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상의 검토가 필요하다.
572년의 전몰자 위령
572년(진흥왕 33년) 10월 20일에는 전쟁에서 사망한 군사들을 위해 팔관회를 개최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冬十月二十日, 爲戰死士卒, 設八關筵會於外寺, 七日罷.
이는 겨울 10월 20일 전쟁에서 죽은 군사들을 위해 왕경 바깥의 사찰에서 팔관연회를 열고 7일 만에 마쳤다는 뜻이다.
이 기록은 신라 팔관회의 구체적인 시행 날짜와 목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다.
그러나 572년의 행사가 신라에서 최초로 개최한 팔관회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에는 앞서 혜량과 관련하여 팔관의 법이 시작되었다는 설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두 기록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실제 팔관회의 시작 시기에 관하여 여러 학술적 해석이 존재한다고 밝히고 있다.[3]
호국적인 성격
신라에서 팔관회는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명복을 빌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로 시행되었다.
이는 불교가 개인적인 종교생활뿐 아니라 국가적인 의례와 정치적 권위를 뒷받침하는 데도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신라시대의 팔관회가 고려시대의 팔관회와 같은 형태의 외교·무역 행사였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고려에서는 왕실의 의례와 국가적인 축제, 외국인의 조하 등이 결합하면서 행사 규모와 역할이 더욱 확대되었다.
태봉의 팔관회
신라 이후 팔관회의 전통은 궁예가 세운 태봉에서도 이어졌다.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과 연결하는 종교적인 권위를 주장한 인물이었다.
그는 불교적인 신앙을 자신의 정치적인 권위와 결합하여 국가를 운영하려 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궁예는 해마다 음력 11월에 팔관재를 개최하여 복을 빌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러한 선례를 받아들여 고려 건국 직후 팔관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궁예와 왕건이 팔관회를 개최한 목적과 종교적인 의미가 완전히 동일했다고 볼 수는 없다.
궁예의 팔관회는 미륵신앙과 그의 정치적인 권위를 강조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왕건의 팔관회는 건국 이후 왕조의 안녕과 민심의 결집을 도모하는 국가행사로 발전했다.
고려 태조의 팔관회
918년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했다.
그는 새로운 왕조의 통치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종교적인 전통과 국가적인 의례를 활용했다.
그 가운데 팔관회는 고려가 건국된 첫해부터 정례화된 중요한 행사였다.
918년 11월
《고려사》 태조 원년 11월조에는 처음으로 팔관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또한 《고려사절요》에서는 관료들이 왕건에게 이전의 궁예가 매년 팔관재를 개최했으니 이 제도를 따를 것을 건의했다고 설명한다.
왕건은 고려가 불교의 도움으로 나라의 안녕을 도모할 수 있다고 말하며 이를 허락했다.
이후 팔관회는 매년 개최하는 국가적인 행사로 자리 잡았다.
화려한 행사
918년 팔관회에서는 궁궐의 구정(毬庭)에 윤등(輪燈)을 설치하고 그 주변에 향등(香燈)을 배치했다.
또한 비단으로 꾸민 높은 무대를 설치했으며, 그 앞에서 다양한 음악과 춤, 놀이를 공연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공연에는 신라시대부터 전해지던 사선악부(四仙樂部)와 용·봉황·코끼리·말·수레·배의 형상을 이용한 공연이 포함되어 있었다.
문무백관들은 예복을 갖춰 입고 의례에 참여했으며, 수도의 주민들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왕건은 의봉루(儀鳳樓)에 올라 이러한 행사를 관람했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十一月, 始設八關會, 御儀鳳樓觀之, 歲以爲常.
이는 11월 처음 팔관회를 열고 국왕이 의봉루에서 이를 관람했으며, 이후 매년의 관례로 삼았다는 뜻이다.[4]
왕조의 정통성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뒤 다양한 지방세력과 정치집단을 하나의 국가 안에 통합해야 했다.
팔관회는 불교와 기존의 전통신앙을 결합하여 여러 계층이 참여하는 국가행사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국왕이 국가적인 의례를 주관함으로써 새로운 왕조의 권위를 보여주는 효과가 있었다.
따라서 팔관회는 단순한 종교적인 행사에 그치지 않고 고려의 건국과 국가통합을 상징하는 역할을 했다.
훈요 10조
943년 태조 왕건이 후손들에게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훈요 10조의 제6조에서는 연등회와 팔관회를 강조했다.
훈요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존재한다.
其八關, 所以事天靈及五嶽名山大川龍神也.
이는 팔관회가 하늘의 신령과 오악, 명산대천과 용신을 섬기기 위한 행사라는 의미다.
연등회와 팔관회의 유지
태조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국가의 중요한 의례이므로 후대의 신하들이 이를 함부로 늘리거나 줄이려 하지 못하도록 당부했다.
그는 자신이 이러한 행사를 소중하게 생각했으며, 국왕과 신하들이 함께 즐기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팔관회가 왕조의 정체성과 관련된 국가적인 행사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불교와 전통신앙의 결합
훈요 제6조에 등장하는 천령과 오악, 명산대천과 용신은 불교의 팔관재계에서 직접적으로 강조하는 여덟 가지 계율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들은 하늘과 산, 강과 물을 신성하게 여기는 전통적인 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훈요의 기록은 고려의 팔관회가 불교의 의례와 전통적인 산천신앙을 함께 수용한 행사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팔관회가 불교와 무관한 순수한 고유종교 행사였다고 설명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실제로 국왕은 법왕사 등의 불교 사찰에 행차했으며, 팔관회는 불교의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개최 시기
고려의 팔관회는 개경과 서경에서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두 지역의 개최 시기는 한 달 차이가 있었다.
| 지역 | 소회일 | 대회일 | 특징 |
|---|---|---|---|
| 서경 | 음력 10월 14일 | 음력 10월 15일 | 북방의 중요한 거점에서 개최, 국왕이나 중앙정부의 대표가 참석 |
| 개경 | 음력 11월 14일 | 음력 11월 15일 | 수도의 대표적인 국가행사, 국왕과 문무백관 및 외국인이 참여 |
소회일과 대회일
소회(小會)는 본격적인 행사의 전날 개최되는 의례를 의미한다.
대회(大會)는 행사의 중심이 되는 큰 모임으로, 국왕의 하례 수수와 외국인의 조하 및 연회 등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구분은 고려의 팔관회가 단순히 하루 동안 개최되는 법회가 아니라 여러 단계의 국가적인 의례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일정의 예외
일반적으로 개경의 팔관회는 음력 11월 15일을 중심으로 개최되었지만 항상 날짜가 동일했던 것은 아니다.
1051년(문종 5년)에는 월식이 예상되어 개최일을 조정했다.
또한 국왕과 왕실의 국상이나 특정한 날짜에 관한 금기, 동지와의 중복 등으로 행사 일정이 변경되기도 했다.
따라서 개경의 팔관회가 모든 해에 예외 없이 정확히 같은 날짜에 열렸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개경의 팔관회
개경은 고려의 수도로, 팔관회를 가장 성대하게 개최하던 지역이었다.
고려의 국왕과 문무백관, 지방관들의 대표와 외국인 등이 행사에 참여했다.
소회일
개경의 팔관회는 음력 11월 14일의 소회부터 시작되었다.
국왕은 의봉문과 궁궐의 전각에서 의례를 진행하고 태조 왕건의 초상 앞에 술을 올렸다.
또한 지방의 관리들이 보낸 축하의 글을 받고 문무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
이후 국왕은 법왕사에 행차하여 향을 올리는 의식을 진행했다.
이러한 절차는 왕조의 건국자를 기리고 현재의 국왕이 국가의 통치권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었다.
법왕사
법왕사(法王寺)는 고려 태조가 개경에 건립한 주요 사찰 가운데 하나다.
국가적인 불교의례와 왕실의 종교활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국왕이 팔관회에서 법왕사에 행차한 것은 불교적인 호국의례를 수행하는 동시에 왕조의 종교적인 정통성을 확인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법왕사의 정확한 배치와 건축물의 전체적인 모습은 오늘날 완전하게 복원되어 있지 않다.
대회일
음력 11월 15일에는 팔관회의 중심적인 행사인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날에는 외국에서 온 상인과 사절단 등이 국왕에게 조하하고 물품을 바쳤다.
국왕은 참석자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고 음식과 술을 내렸으며, 여러 음악과 공연을 관람하도록 했다.
이러한 의례는 국왕이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서 국내외 참석자들의 인사를 받는다는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개경 팔관회의 소회와 대회가 각각 왕조의 정통성 및 국왕을 중심으로 한 대내외적인 질서를 표현했다고 설명한다.[1]
서경의 팔관회
서경은 고려의 수도 개경과 함께 중요한 정치적·군사적 거점이었다.
태조 왕건은 서경을 북방정책의 중심지로 발전시키려 했으며, 훈요 10조에서도 서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고려는 이러한 서경에서 개경보다 한 달 앞서 팔관회를 개최했다.
음력 10월 행사
서경의 팔관회는 음력 10월 14일과 15일을 중심으로 개최되었다.
국왕이 직접 서경을 방문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중앙정부에서 고위 관료를 보내어 행사를 주관하도록 했다.
이는 서경이 단순한 지방도시가 아니라 국왕이 특별하게 관리하는 정치적·종교적 공간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북방정책과의 관계
서경은 고려의 북쪽 국경과 가까운 지역에 위치했다.
고려는 서경을 통해 북방의 정치와 군사, 외교관계를 관리하려 했다.
따라서 서경의 팔관회는 국가적인 종교행사이면서도 북방지역에 대한 국왕의 통치권과 정치적인 관심을 드러내는 행사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서경의 팔관회가 처음부터 개경의 팔관회와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행사의 구체적인 절차와 참석자, 규모 등에는 시기와 지역에 따른 차이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음악과 공연
팔관회는 종교적인 의례뿐 아니라 다양한 공연과 놀이가 펼쳐지는 국가적인 문화행사였다.
918년 태조 시대의 기록에서부터 가무와 놀이, 화려한 무대장치 등이 등장한다.
백희가무
백희가무(百戱歌舞)는 다양한 놀이와 음악, 춤 등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고려의 팔관회에서는 문무백관들이 국가적인 의례에 참여하는 한편 다양한 공연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공연은 국왕과 관료들이 함께 관람했으며 수도의 주민들도 행사장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헌에 기록된 모든 공연을 오늘날의 형태로 완전하게 복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사용된 음악과 춤의 동작, 공연의 구성 등은 일부 기록에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선악부
사선악부(四仙樂部)는 신라시대의 전통과 관련된 공연집단 또는 공연형식을 가리킨다.
《고려사절요》에서는 고려 태조 원년의 팔관회에 사선악부가 등장했으며, 이들이 신라의 옛 제도를 계승했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내용은 신라의 음악과 공연문화가 고려의 국가적인 행사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윤등과 채붕
윤등(輪燈)은 행사장에서 사용한 대규모 등불 장치였다.
채붕(綵棚)은 여러 색의 비단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무대를 의미한다.
918년 팔관회에서는 이러한 장치와 함께 다양한 공연이 펼쳐졌다.
이는 고려 초기부터 팔관회가 상당한 규모의 행사였으며, 단순한 법회보다 많은 장식과 공연을 포함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도이장가
팔관회와 관련된 중요한 문학작품 가운데 하나는 《도이장가》(悼二將歌)다.
《도이장가》는 1120년(예종 15년) 예종이 두 장수를 추모하며 지은 노래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의 향찰 표기 가요로 알려져 있으며, 팔관회에서 이루어진 역사적인 추모공연과 관련되어 있다.
두 장수의 희생
927년 공산 전투에서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의 군대와 싸우다가 크게 패했다.
당시 신숭겸과 김락 등 여러 장수가 왕건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
왕건은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추모행사를 마련했다고 전해진다.
1120년 서경 팔관회
1120년 예종은 서경의 팔관회에 참석했다.
당시 행사에서는 신숭겸과 김락의 모습을 형상화한 인형 또는 조형물을 이용한 공연이 진행되었다.
예종은 이를 보고 두 장수가 태조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실을 떠올렸으며, 그들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도이장가》를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팔관회가 국가적인 종교의례뿐 아니라 건국공신과 전쟁에서 희생된 인물들을 추모하는 행사로도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도이장가》를 1120년 서경 팔관회에서 예종이 신숭겸과 김락의 충절을 기리고자 지은 향찰 표기 가요로 설명한다.[5]
외교적인 기능
고려의 팔관회는 주변 세력과 외국인들이 참석하는 국제적인 행사이기도 했다.
개경의 팔관회에서는 국왕이 외국의 상인과 사절단의 인사를 받았다.
대표적인 참가자로는 송나라 상인과 여진인, 탐라인 등이 있었다.
송나라 상인
송나라는 고려와 활발하게 외교와 무역을 진행한 국가였다.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는 사신뿐 아니라 다양한 상인들도 왕래했다.
송나라 상인들은 고려에 도착하여 여러 상품을 판매하거나 고려의 특산물을 구입했다.
팔관회에서는 이들이 국왕에게 인사를 드리고 물품을 바치는 일이 이루어졌다.
이는 상업적인 교류가 국가적인 의례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진인
고려 북방에는 여러 여진계 세력이 존재했다.
이들은 고려와 군사적·외교적 관계를 맺었으며, 무역과 물자의 교환도 진행했다.
팔관회에는 동번과 서번 등으로 분류된 북방세력의 사람들이 참석하여 국왕에게 물품을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모든 여진세력이 동일한 정치적 지위나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해서는 안 된다.
여진계 세력들은 지역과 정치적 상황에 따라 고려와 서로 다른 관계를 유지했다.
탐라인
탐라는 현재의 제주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세력이었다.
고려와 탐라는 오랜 기간 정치적·경제적 관계를 유지했으며, 시대에 따라 탐라의 지위와 자치적인 성격도 변화했다.
팔관회에서는 탐라에서 온 사람들이 국왕에게 조하하고 물품을 바치는 의례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팔관회가 고려의 내부적인 행사만이 아니라 고려와 주변 정치세력의 관계를 표현하는 행사였음을 보여준다.
국제무역과 팔관회
팔관회는 고려의 국제무역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행사에 참석한 외국 상인들은 국왕에게 인사를 드리고 물품을 바쳤으며, 그 과정에서 고려의 상인들과 교역할 수 있었다.
교역 물품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서는 다양한 상품이 거래되었다.
송나라에서 고려로 들어온 물품으로는 비단과 차, 약재와 서적, 악기와 향료, 상아와 보석류 등이 있었다.
반면 고려에서는 삼베와 모시, 인삼과 금·은, 종이와 먹 등 여러 물품을 제공했다.
이러한 교역은 고려의 경제와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물품이 모두 팔관회 행사장에서만 거래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팔관회는 이미 존재하던 대외무역과 상인들의 활동을 촉진하는 여러 계기 가운데 하나였다.
벽란도와의 관계
벽란도는 고려의 수도 개경과 연결된 중요한 국제무역항이었다.
고려를 방문한 외국 상인들 가운데 일부는 벽란도를 통해 입국했다.
팔관회와 같은 대규모 국가행사는 외국 상인들이 고려를 방문하고 물품을 교환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팔관회가 고려의 외교와 국제무역, 벽란도의 번영에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6]
국왕의 권위와 국가질서
팔관회는 고려 국왕의 정치적인 권위를 표현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국왕은 궁궐의 높은 전각에서 문무백관과 지방관, 외국인의 하례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중앙과 지방, 국왕과 신하, 고려와 주변세력 사이의 관계가 의례적으로 표현되었다.
국내적인 의미
고려의 국왕은 전국의 지방관들이 올린 축하의 글을 받았다.
이는 지방의 관료들이 국왕을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례였다.
또한 왕실과 중앙 관료, 지방의 대표들이 함께 국가행사에 참여함으로써 정치적인 결속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외적인 의미
고려의 팔관회에서는 송나라 상인과 여진인, 탐라인 등이 국왕에게 조하하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장면은 고려가 주변세력과의 관계에서 독자적인 정치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표현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례에 참여한 모든 세력이 실제로 고려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속국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외교적인 의례에서 나타나는 상징적인 위계와 실제 정치·군사적인 지배관계는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려 중심의 세계관
팔관회는 고려의 국왕을 중심으로 국내외의 여러 집단이 모이는 행사였다.
이러한 구성은 고려가 독자적인 국가적인 질서와 정치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특히 원 간섭기 이전에는 국왕을 위해 만세를 외치고 행차하는 길을 황토로 장식하는 등 황제국과 유사한 의례가 사용되기도 했다.
이는 고려에서 국내적으로 독자적인 군주권과 정치적 권위를 표현했던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성종의 팔관회 중단
팔관회는 태조 왕건이 중요한 국가행사로 지정했지만 후대의 모든 국왕이 이를 그대로 유지한 것은 아니었다.
987년(성종 6년) 성종은 개경과 서경의 팔관회를 중단하도록 명령했다.
유교적인 정치질서
성종은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국가의 제도와 행정을 정비하려 했다.
그는 982년 최승로가 제출한 시무 28조 등의 건의를 참고하여 지방관 파견과 교육, 국가재정과 의례 등을 개혁했다.
최승로는 불교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국가의 과도한 불교행사와 사찰의 경제적인 폐단을 비판하면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재정의 부담
팔관회는 대규모의 공연과 연회, 무대장치와 장식 등을 포함한 행사였다.
따라서 이를 매년 개최하려면 상당한 물자와 노동력이 필요했다.
성종은 이러한 행사가 국가재정에 부담을 준다고 판단했으며, 유교적인 국가의례를 중심으로 정치질서를 정비하려 했다.
987년의 조치
《고려사》 예지에는 성종 6년 10월 개경과 서경의 팔관회를 중단시켰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成宗六年十月, 命有司, 停兩京八關會.
이는 성종 6년 10월 담당 관청에 명하여 두 수도의 팔관회를 중지시켰다는 의미다.[7]
이후 팔관회는 약 20여 년 동안 국가적인 정기 행사로 개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중단이 고려의 모든 불교활동과 종교의례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고려에서는 이후에도 불교가 왕실과 귀족, 일반사회에서 중요한 종교적인 영향력을 유지했다.
현종의 팔관회 부활
1010년(현종 원년) 팔관회가 다시 개최되었다.
이것은 성종 시대의 중단 이후 국가적인 팔관회가 부활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거란의 침입
당시 고려는 북방에서 거란의 군사적인 위협을 받고 있었다.
1010년에는 제2차 여요전쟁이 발생하여 고려의 수도가 함락되는 등 국가적인 위기를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왕조의 결속을 강화하는 종교적인 의례의 필요성이 다시 강조될 수 있었다.
팔관회의 재개는 이러한 정치적·군사적 상황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팔관회가 부활했다는 사실만으로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한 특정한 종교적인 의식 하나가 전쟁의 결과를 결정했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1010년의 재개
《고려사》 예지에는 현종 원년 11월에 팔관회를 다시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팔관회가 고려의 국가적인 의례로 복귀한 시점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는 현종이 최항의 건의를 받아들여 팔관회를 다시 개최했다고 설명한다.[8]
국가의례의 재정비
팔관회는 현종 시대의 부활 이후 다시 고려의 대표적인 연례행사로 유지되었다.
정종 시대에는 행사 절차가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1034년에는 서경에서 대신을 파견하여 팔관회를 열고, 개경에서는 외국인들의 하례와 물품의 봉정 등을 포함한 성대한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팔관회가 정치적인 변화와 일시적인 중단을 겪으면서도 고려 왕조의 주요 국가의례로 유지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원 간섭기의 변화
13세기 고려는 몽골 제국과 장기간 전쟁을 벌인 뒤 원나라와 강화했다.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강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팔관회의 의례에도 영향을 미쳤다.
1275년의 의례 변경
1275년(충렬왕 원년) 팔관회에서는 기존에 사용하던 여러 표현과 의례가 변경되었다.
국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성수만세'(聖壽萬年)라는 표현은 '경력천추'(慶曆千秋)로 변경되었다.
또한 만세를 외치던 관행을 천세로 바꾸었으며, 왕의 행차하는 길에 황토를 까는 일도 금지했다.
이는 고려가 원나라의 영향 아래에서 국왕의 의례적 지위를 이전보다 낮게 표현하도록 조정한 사례다.
국가적인 위상의 변화
원 간섭기 이전의 팔관회에서는 고려의 국왕을 중심으로 주변세력의 하례를 받는 의례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고려의 독자적인 군주권을 표현하는 방식에도 제약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팔관회가 나타내는 정치적인 위상과 상징성 역시 변화했다.
그러나 원 간섭기에 팔관회가 즉시 폐지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팔관회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개최되었으며 고려 말까지 국가적인 의례로 유지되었다.
조선 건국과 폐지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건국했다.
조선의 건국세력은 유교적인 통치질서를 바탕으로 국가의 제도와 의례를 정비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고려의 불교적·전통신앙적인 국가행사였던 팔관회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했다.
1392년의 폐지 건의
《태조실록》에는 1392년 8월 5일 조선의 도당에서 팔관회와 연등회의 폐지를 건의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팔관회는 불교와 산천신앙, 고려 왕실의 정통성을 결합한 국가행사였기 때문에 새로운 왕조의 정치적·종교적 질서와 충돌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후 팔관회는 조선의 정기적인 국가의례에서 사라졌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조선왕조실록사전은 조선 건국 직후 팔관회가 중단되었다고 설명한다.[9]
유교적 국가의례
조선은 국가의례를 유교적인 기준에 따라 정비했다.
이에 따라 종묘와 사직, 여러 국가적인 제사가 새로운 의례체계 안에서 운영되었다.
또한 산천에 대한 제사 역시 유교적인 국가제례의 형식으로 정비되었다.
따라서 고려의 팔관회가 폐지되었다는 사실이 산과 강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의례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존의 전통신앙은 일부 형태를 변경하여 다른 의례 속에 남아 있기도 했다.
팔관재계의 존속
국가적인 팔관회는 폐지되었지만 불교의 팔관재계라는 수행방식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재가 불교신자들이 일정한 기간 계율을 지키며 수행하는 전통은 팔관회와는 별개로 이어질 수 있었다.
따라서 고려의 국가축제인 팔관회가 폐지되었다는 사실과 불교의 팔관재계 수행이 중단되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연등회와의 차이
팔관회와 연등회는 고려를 대표하는 두 가지 국가적인 종교행사였다.
두 행사 모두 불교와 관련되어 있으며 국왕과 문무백관, 지방관 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행사의 종교적 기원과 목적, 개최 시기에는 차이가 있었다.
| 구분 | 팔관회 | 연등회 |
|---|---|---|
| 한자 | 八關會 | 燃燈會 |
| 종교적인 기원 | 불교의 팔관재계 | 부처에게 등불을 바치는 의례 |
| 고려에서의 성격 | 불교·산천신앙·국가축제의 결합 | 불교적인 등불 공양과 국가적인 축제 |
| 주요 신앙 | 천령·산천·용신과 불교의 결합 | 부처에 대한 공양과 기복 |
| 개경의 주요 개최일 | 음력 11월 15일 | 음력 2월 15일을 중심으로 개최 |
| 서경의 개최 | 음력 10월 | 별도의 시행 사례 존재 |
| 주요 장소 | 궁궐·법왕사 등 | 궁궐·봉은사 등 |
| 왕조의례의 의미 | 국가의 안녕과 건국 정통성, 군신 화합과 외교 | 불교적인 공덕과 국왕 및 국가의 안녕 |
| 고려 태조의 유훈 | 훈요 10조 제6조에서 강조 | 훈요 10조 제6조에서 강조 |
| 조선시대 | 국가적인 정기 행사 폐지 | 국가적인 행사는 축소·폐지되었으나 민간의 연등 풍습은 존속 |
종교적인 차이
연등회는 부처에게 등불을 바치는 불교적인 의례의 성격이 강했다.
반면 팔관회는 원래 불교의 팔관재계에서 유래했지만 고려시대에는 산천과 용신 등을 섬기는 전통적인 신앙과 결합했다.
따라서 팔관회는 불교행사인 동시에 고려의 여러 종교적 전통을 통합한 국가적인 의례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인 차이
두 행사 모두 음악과 춤, 연회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팔관회는 외국인들의 조하와 물품 봉정, 국가적인 위계질서를 표현하는 의례가 중요한 특징이었다.
또한 팔관회에서는 전몰자와 건국공신에 대한 추모의 성격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두 행사를 단순히 등불을 밝히는 불교축제라고 동일하게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역사적 가치
국가통합
팔관회는 고려의 여러 지역과 정치세력을 국왕 중심의 국가적인 의례에 참여시키는 역할을 했다.
지방관들이 국왕에게 축하의 글을 올리고 문무백관들이 한자리에 모여 행사를 진행한 것은 중앙정부의 통치질서를 상징하는 행동이었다.
이는 고려가 후삼국 통일 이후 여러 지역세력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 과정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다.
종교적인 다양성
팔관회는 불교와 전통적인 산천신앙, 풍수지리와 도참사상 등이 함께 나타나는 행사였다.
이는 고려의 종교와 문화가 단일한 사상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전통을 결합하여 발전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인 다양성이 모든 종교와 신앙에 대한 완전한 평등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국가가 특정한 의례를 공식적으로 후원한 만큼 실제 종교적·사회적 지위에는 차이가 존재했다.
정치적인 권위
팔관회는 국왕이 국내외 참석자들의 하례를 받음으로써 고려의 정치적인 권위를 표현하는 행사였다.
특히 1275년 원 간섭기의 의례 변경은 행사에 사용된 칭호와 표현이 국가의 정치적인 지위를 상징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외교와 경제
송나라 상인과 여진인, 탐라인 등이 참여했다는 사실은 팔관회가 국제적인 교류의 장으로 기능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고려의 외교와 무역, 주변세력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외국인이 행사에 참석하여 국왕에게 물품을 바쳤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국가나 지역이 모두 고려의 속국이었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한계와 비판
국가재정의 부담
팔관회는 대규모의 연회와 공연, 다양한 장식과 물자를 필요로 하는 행사였다.
따라서 국가재정과 백성들의 노동력에 부담을 주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이유로 성종 시대에는 행사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행사의 실제 비용과 사회적인 효과를 정확하게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팔관회가 언제나 국가재정을 낭비하기만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종교적인 기복과 정치
팔관회에는 산천과 용신의 도움을 받아 국가의 안녕을 이루려는 기복적인 성격이 존재했다.
이는 당시 고려의 정치적·종교적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그러나 산천과 신령의 제사가 실제로 국가의 군사적인 승리나 정치적인 번영을 결정한다는 주장은 현대적인 과학의 관점에서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은 당시 사람들이 믿었던 종교적인 관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기록의 한계
팔관회의 실제 모습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 후대에 편찬된 역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시대의 팔관회가 동일한 규모와 절차로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현재 남아 있는 의례의 기록이 실제 행사에 참석했던 일반 주민들의 경험을 모두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고려의 팔관회를 연구할 때에는 문헌의 작성시기와 편찬자의 관점, 당시의 정치적·종교적 환경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한국사 교육에서
팔관회는 고려 초기의 통치정책과 불교문화, 고려의 대외관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진다.
특히 태조 왕건의 훈요 10조와 최승로의 시무 28조, 성종의 유교적인 국가운영을 비교할 때 자주 언급된다.
| 시대 | 핵심 내용 |
|---|---|
| 신라 진흥왕 | 전사자의 위령을 위한 팔관회 시행 |
| 태봉 궁예 | 불교적인 기복행사로 팔관회 개최 |
| 고려 태조 | 팔관회 정례화, 훈요 10조에서 유지 강조 |
| 고려 성종 | 최승로 등의 건의를 참고하여 팔관회 중단 |
| 고려 현종 | 팔관회 재개 |
| 고려 정종 | 국가적인 의례와 외국인의 조하 등 행사 정비 |
| 고려 예종 | 서경 팔관회에서 《도이장가》 창작 |
| 원 간섭기 | 국왕의 칭호와 국가의례 변경 |
| 조선 건국 | 팔관회를 국가적인 정기 행사에서 폐지 |
또한 팔관회가 단순한 불교행사뿐 아니라 고려의 독자적인 문화와 왕조의 정통성, 외국과의 교류를 상징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주요 연혁
| 연도 | 사건 |
|---|---|
| 551년 | 고구려 출신 승려 혜량이 신라에 들어옴. 팔관의 법이 시작되었다는 기록 존재 |
| 572년 | 신라 진흥왕이 전사한 군사들을 위해 팔관회 개최 |
| 태봉 시대 | 궁예가 매년 11월 팔관재를 개최한 것으로 전함 |
| 918년 11월 | 고려 태조 왕건이 팔관회를 열고 정기적인 국가행사로 정함 |
| 943년 | 훈요 10조 제6조에서 연등회와 팔관회의 유지 강조 |
| 987년 10월 | 성종이 개경과 서경의 팔관회 중단 |
| 1010년 11월 | 현종이 팔관회 재개 |
| 1034년 | 정종이 서경과 개경에서 팔관회를 개최하고 외국인의 조하와 연회 등을 진행 |
| 1051년 | 문종이 월식으로 인해 팔관회 날짜를 조정 |
| 1120년 | 예종이 서경 팔관회에서 두 공신을 추모하는 《도이장가》를 지음 |
| 1275년 | 원 간섭기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팔관회 의례와 칭호 변경 |
| 14세기 | 고려 말까지 국가적인 팔관회 유지 |
| 1392년 | 조선 건국 이후 팔관회 폐지 추진, 국가적인 정기 행사 소멸 |
여담
- 팔관회는 신라와 고려에서 시행한 국가적인 종교·문화 행사다.
- 이름은 불교의 팔관재계에서 유래했지만 고려시대의 팔관회는 원래의 수행의식과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
- 불교뿐 아니라 천령과 오악, 명산대천과 용신 등을 섬기는 전통신앙이 결합되었다.
- 신라에서는 전쟁에서 사망한 군사들의 명복을 비는 의례로 시행되었다.
- 《삼국사기》에는 572년 진흥왕이 전몰자들을 위해 7일 동안 팔관회를 개최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 궁예도 태봉에서 매년 팔관재를 개최했다고 전해진다.
- 고려 태조 왕건은 건국 첫해인 918년에 팔관회를 개최하고 이를 정례화했다.
- 훈요 10조의 제6조에서는 연등회와 팔관회의 유지를 강조했다.
- 고려의 팔관회는 개경과 서경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개최되었다.
- 개경에서는 음력 11월, 서경에서는 음력 10월에 개최했다.
- 소회일과 대회일로 구분했으며, 국왕이 법왕사에 행차하고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 송나라 상인과 여진인, 탐라인 등도 행사에 참석했다.
- 외국인들은 국왕에게 인사를 드리고 물품을 바쳤으며, 이 과정에서 무역도 이루어졌다.
- 따라서 팔관회는 종교적인 법회이면서 국가의 정치와 외교, 문화와 경제를 연결하는 행사였다.
- 918년의 팔관회에는 화려한 등불과 무대가 설치되었으며, 신라시대부터 전해지던 음악과 춤이 공연되었다.
- 팔관회에서 신숭겸과 김락 등 전쟁에서 사망한 공신들을 추모하는 공연이 진행되기도 했다.
- 1120년 예종이 지은 《도이장가》도 서경의 팔관회와 관련되어 있다.
- 987년 성종은 팔관회를 중단했다.
- 그러나 이 조치가 고려의 불교 자체를 폐지한 것은 아니었다.
- 1010년 현종 시대에 팔관회가 다시 개최되었다.
- 최승로는 과도한 불교행사로 발생하는 국가재정의 부담을 비판했지만 불교 자체의 폐지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 고려의 팔관회는 국왕의 정치적인 권위와 왕조의 정통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의례였다.
- 1275년에는 원 간섭기의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만세를 천세로 바꾸는 등 의례가 변경되었다.
- 1392년 조선이 건국된 뒤에는 새로운 왕조의 유교적인 국가의례 정비 과정에서 폐지되었다.
- 그러나 불교의 팔관재계라는 수행방식 자체는 국가적인 팔관회의 폐지와 구분해야 한다.
- 팔관회는 불교의 이름으로 개최되었지만 실제로는 고려의 종교와 문화, 정치와 외교, 무역과 오락까지 결합한 대규모 국가축제였다.
- 고려가 어떤 종교와 전통을 중시했고 스스로를 어떤 국가로 인식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행사 가운데 하나다.
관련 문서
- 고려
- 고려의 문화
- 고려의 불교
- 신라
- 신라의 불교
- 태봉
- 궁예
- 진흥왕
- 혜량
- 태조(고려)
- 왕건
- 성종(고려)
- 현종(고려)
- 정종(고려)
- 문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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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란도
- 고려의 대외무역
- 고려의 외교
- 원나라
- 원 간섭기
- 제2차 여요전쟁
- 조선 건국
- 유교
- 고려사
- 고려사절요
- 삼국사기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각주
- ↑ 1.0 1.1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팔관회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팔관회
-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삼국사기》 진흥왕 33년 10월, 전사한 사졸을 위하여 팔관회를 개최하다
-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고려사》 태조 원년 11월, 처음으로 팔관회를 열다
-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 팔관회 행사와 도이장가
-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 외국과의 무역 활동
-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고려사》 예지, 성종이 양경의 팔관회를 중지하다
- ↑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 팔관회의 시행
- ↑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조실록사전 - 팔관회